W.제이치(blog.naver.com/jae_ch) -2차 수정을 금합니다^~^ 그러니깐.. 그냥 분위기 탓이었다. 콘서트가 성공적으로 끝나서 회식을 했다. 그래서 술을 좀 많이 마셨고, 흥겨운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심취했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랬다.. 그랬는데.., 이런 상황이 될 줄은 나도 몰랐다. "아.. 미치겠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침에 나체인 상태로 누군가와 껴안은 채로 깨어난게. 그것도 같은 그룹 멤버와. 술잔을 신나게 기울이다가 무슨게임을 하던것 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이 당최 생각이 나질 않는 것이다. 잔뜩 쉬어서 맛이 가버린 목소리와, 멍자국 같은 것이 울긋불긋하게 자리잡고 있는 몸과,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있는 어딘가의 통증이 내가 어제 무엇을 했는지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난 대체, 어제 최민호와 무슨 짓을 벌인거냐. 머리를 쥐어뜯어도 대책이 서질 않는다. 내가 이렇게 책임감없고 무모한 사람이었던 것일까..? 멤버들과 장난으로 스킨쉽 정도는 가볍게 했었다. 나이도 나이인지라 농담중에는 야한 말들이 섞일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몸소 실천한 적은 처음이라 도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여기 있었어?" "흐아악!!!" 갑자기 들이친 목소리 때문에 지금 앉아있는 변기 위에서 떨어질 뻔 했다. 반쯤 열린 욕실 문 사이로 문제의 그 자그마한 머리통이 불쑥 들어왔다. 고개를 드니, 작은 머리에 잘 박혀있는 둥글둥글한 눈이 보인다. 저 얼핏보면 순진해 보일수 있는 눈망울을 지금은 별로 보고싶지 않았다. 아, 문을 잠구었어야 했는데. "변기 위에서 뭐해?" ..상황도 구렸다. 속옷만 간신히 걸쳐입고 방에서 기어나와, 행여나 멤버들과 마주칠까봐 화장실에 들어와 있었다. 이미 다 씻겨진 상태라 딱히 화장실에서 할일이 없어서 변기뚜껑을 덮고, 그 위에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있었다. 아직도 아래쪽이 화끈거려서. "종현아, 뭐하냐니깐." "그냥 나가줘." 평소라면 '형이라고 하랬지 새끼야!'하면서 대꾸해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겨를이 없었다. 그러니깐, 혼자 생각을 정리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상태로는 다른 멤버들도 정상적으로 대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 자식은 왜 청개구리처럼 문을 활짝 열고 안으로 들어오고 난리람. "나가라고 쫌!" 신경질을 냈는데도 묵묵히 들어와서 문을 잠군다. 사실 내말을 잘 따르리란 기대도 않았다. 그건 그렇다 쳐도, 들어올거면 뭐라도 입고 있던가. 적어도 속옷 정도는 예의가 아닌가. 내쪽으로 오는 맨몸의 최민호에게 옆에 걸려있는 수건을 집어서 던졌다. 이럴땐 꽤나 쓸만한 운동신경으로 수건을 받아낸 최민호가 내얼굴을 살핀다. 내가 수건을 던진 이유를 찾는 듯 했다. 가리라고. 그제서야 자신을 살피더니 아아- 거리며 수건을 허리에 두른다. "종현아." "나가라는 말 못들었어?" "진정좀 하고," "지금 내가 진정하게 생겼냐고! 너 보고싶지 않으니깐 그냥 나가라, 응?" 내 말을 싹 무시하고 내 앞까지 온 최민호는 갑자기 손으로 내 볼을 문지른다. 뭐하는 짓이야! "혼자 울고있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 울어..? 누가? 내가? 나 안울어. 최민호의 손을 쳐내고 눈가로 손을 가져갔다. 정말로 눈가가 젖어있다. 나 언제부터 울고있었던 거지. "종현아, 어제일 때문에 그러는 거면," "나가줘. 이건 부탁이야 민호야." 어떤 말이든 지금은 듣고싶지 않았다. 어지러웠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팔에 쉴새없이 물기가 묻어나는걸 보니, 정말로 울고있긴 한가보다. 서러운건지 화가나는건지 아직 판단은 안되지만, 일단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난.. 난 정말 이런일은 처음이었다. "어제 너 피 많이 흘렸어. 아래 치료는 대충 했는데 아직 다른 곳은," "그만! 내가 나가 달라고 부탁하잖아!" 고개를 들지도 않고 외치니, 머뭇거리는게 느껴진다. 곧이어 문쪽으로 향하는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보이진 않지만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다 조심스럽다는게 느껴졌다. 그가 문을 열고 나가며 한마디를 남긴다. "미안." 바깥에서 새어들어온 찬 공기가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바람이 내 머릿속까지는 들어오지 못했는지 아직도 내 머릿속은 답답하고 열이난다. 무슨 의미일까. 그가 남긴 한마디는. "아침부터 요리하느라 고생이 많네." "알면 형이 좀 하던가." "하하, 그말 진심이야?" "내가 무슨말을 해. 가서 수저나 놔!" 술을 잘 못하는 태민이는 숙취 때문에 상태가 안좋아서 방에 누워있었고, 기범이와 진기형은 주방에 있었다. 최민호..는 테이블에 앉아있었고. 최대한 멀직히 떨어져서 앉으니, 수저를 놓던 진기형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너네 항상 붙어앉더니 왠일이야? 둘이 싸웠어?" "아니." 진기형의 말에 최민호가 곧바로 부정한다. 난 고개를 숙이고 그저 젓가락만 만지작 거렸다. 그러자 진기형은 그저 갸웃거리기만 할뿐 별다른 대꾸는 안했다. 음식 냄새를 맡으니 속이 울렁거렸다. 저혼자 분주한 기범이가 테이블에 냄비를 올려놓고 그리고 밥그릇을 가져다 주었다. 하얀 쌀밥과 콩나물이 들어간 해장국에선 모락모락 김이나고 있었다. 기범이가 끓인거라 맛은 보장되겠지만, 별로 먹고싶지 않았다. 그래도 애써 요리해준 사람 성의가 있으니 나도 숟가락을 들긴 들었다. "우욱..! 우웩!!" 고작 한숟가락 먹었는데 속이 뒤집혔다. 위산이 역류해서 그런지 하면할수록 구역질이 더 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난 변기를 부여잡고 웩웩거리는 중이었고, 진기형은 놀라서 달려와 등을 두드려 주고 있었고, 기범이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종현아, 괜찮아?!" 이게 다 최민호 때문이다. 대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거야. 간신히 진정하고 부엌으로 가니, 기범이가 죽을 끓이고 있다. 미안해졌다. 한번도 기범이가 해주걸 먹고 토해본 적이 없는데. 나말고 다른 멤버들도 다. 그정도로 알아주는 솜씬데. 혹시 기분이 상하지 않았을까.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해." "히끅." 놀라서 순간 딸꾹질이 나왔다. 기범이가 눈치 백단이라는건 알아줘야 한다. 내가 아까부터 눈치보고 있었던걸 그새 알아차렸다. "내가 해준 북어국이 맛이 없어서가 아니라, 형 몸상태가 않좋은거 다 아니깐 가서 앉아있어." "응.." 테이블로 가서 앉으니, 이번엔 진기형이 내 눈치를 보고있다. "종현아, 진짜 괜찮은거야?" 걱정이 잔뜩 담긴 표정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이 얼굴에 대고 어젯밤에 무슨일이 있었는지 난 절대 말하지 못할거다. 대답이 없자, 죽을 끓이던 기범이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왔다. 난 괜찮아. 억지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그러자 금새 의심가득한 질문이 따라왔다. 진짜 괜찮은거 맞지? "다들 왜이래. 죽을병 아니니깐 걱정마."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지만 음식 냄새를 맡으니 다시금 구역질이 꾸역꾸역 밀려온다. 그런 반찬은 전혀 없는데, 비린냄새가 코끝을 맴돈다. 안되는데. 기범이가 해준 죽 먹어야 하는데.. 결국엔 죽은 입에도 대지 못하고 침대행이었다. 오늘 아침에 처음 눈을 떴을 때는, 침대고 방안이고 죄다 난리였었다. 뱀 허물처럼 벗겨진 옷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고, 얼룩진 시트에다가, 콘돔껍질까지 굴러다녔으니. 다행히 최민호자식이 다 치우고 환기도 시켜놓은 듯 했다. 개자식. 그럼 뭐해. 정작 내가 이꼴인데. 옆에서 간호한답시고 더 어지럽게 하는 맴버들을 모조리 쫓아내고 혼자 침대에 누웠다. 몸도 정신도 정상이 아니다. 콘서트가 끝난지 얼마 안되서 일단은 휴식기간이 어느정도 주어지겠지만, 곧 새 앨범 녹음을 해야하기 때문에 얼른 나아야 했다. 몸도 몸이지만, 목소리가 문제였다. 거의 목소리를 쥐어짜다시피 말해야 할 정도였으니깐. 말을 최대한 안하고 관리를 잘하면 녹음하기 전까진 괜찮아지겠지.. "마셔." "악!!!" 말을 안하겠다고 결심한지 삼초도 안되서 괴성을 내질르고 말았다. 이자식은 왜 노크도 없이 불쑥불쑥 들어오는거야! "뭐야!" "생강차." "..안마셔!" "그럼 꿀물타줄까?" "저리 꺼져! 너 진짜 오..!" 왜이러는 건데..! 뒷말이 다 최민호의 손에 막혔다. 보자보자하니깐 진짜!! "쉿. 거실에 진기형이랑 기범이 있어. 들으면 어쩌려고." "드으르그흐(들으라고해)!!!" "안돼. 그럼 더 피곤해져." "......." 그건 싫다. 씩씩거리면서 노려보자 그제서야 입을 막고있는 손을 치워준다. "너 진짜 왜이러는 건데? 보기싫다잖아!" 최대한 소리를 낮춰서 화를 내니 거의 쇳소리 비슷한게 내 귓가에 들려왔다. 설마 저게 내 목소린 아니겠지. "예쁜 목소리 다 망가졌네.." 얼씨구? 이게 누구 때문인데. 범인은 본인이면서 가식적이게도 안쓰럽단 표정을 짓고있다. 맘에 안든다. "나가." 꿈쩍도 않는다. 난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깐 내겐 최민호를 방 밖으로 밀어낼 힘이 남아있지 않았다. 젠장. 근육은 대체 왜 키웠을까. 이런데 써먹지도 못하는데. 게다가 최근에 운동을 덜해서 근육이 빠진 탓도 있다. 아무튼. 나는 눈앞에 있는 이 순진한 척하는 소 한마리를 치울 수 없다는거다. "이렇게 피해서 해결될 문제 아니야, 종현아." 그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지 말라고! 평소엔 아무렇지도 않게 듣던 목소리였지만, 지금 들으니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였다. 이 고집센 소자식을 어떻게 해야할까. "이걸 꼭 지금 해결해야해?" "어." ..할말이 없게 만든다. "이건 다 네가 벌인 짓이고, 난 너한테 당했.. 아무튼 너때문에 이렇게 됬으니깐, 너가 책임져." "......." 말하고 나니깐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좀 더 협박적인 말투와 무게있는 목소리가 필요했다. 이렇게 쉰목소리로 애처럼 떼쓰듯 말하는게 아니란 말이다..! "그러니깐, 너가..!" "알았어. 내가 다 책임질께. 어제 밤 일도 모두다." "?!" 다시한번 제대로 말해보려 했는데, 갑자기 내 머리통을 끌어안고 저딴 말을 하는 탓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아직 이해가 다 되질 않았다. 누가 뭘 책임져..? "솔직히 종현이 네 잘못도 있어. 내 앞에서 그렇게 유혹을 하면, 내가 안넘어 가겠어? 하지만 결국 일을 벌인건 나니깐, 내가 책임져야지. 평생 책임질테니 걱정...," 퍽!! 손목이 아프다. 주먹질은 많이 안해봐서. 나한테 등짝을 세게 얻어맞고 나서야 내게서 떨어져 나가며 말을 멈추는 최민호다. 소리는 나름 컸는데, 큰 타격은 없었던 건지 표정은 담담하다. "다 때린거야?" "뭐?" "날 두들겨 패도 맞아줄 생각으로 들어온거야." 오, 최민호를 맘대로 팰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거라 이거지? 침대에서 내려와서 침대에 걸터앉아있는 최민호를 내려다 보았다. 내가 진짜로 일어날 줄은 몰랐는지 살짝 당황한 빛을 서렸다가 금새 얄입게도 빙긋 미소를 짓는다. 어디 해보라는 식으로. 저걸 발로찰까, 싸대기를 때릴까, 주먹질을 할까 신나는 상상을 하고 있는데 발을 한발짝 떼니 갑자기 머리가 핑 돈다. 난 이렇게 병약한 이미지가 아닌데.. 누워있다가 갑자기 몸을 일으킨데다, 뇌의 과부화 현상이 온것이 틀림없다. 순간 나갈뻔 한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눈을 제대로 뜨니 이건 또 뭔가. 코앞에 최민호 얼굴이 있다. "학!" 반복해서 놀라면 내성이 생길만도 한데, 나는 기회가 오는 족족 놀라기만 한다. 내 목에선 볼품없는 바람소리만 흘러나왔다. 내가 휘청할때 쓸데없는 순발력을 발휘해 내허리를 잡아챈 최민호는 곧바로 이어지는 동작으로 날 침대에 눕혀서 내 양팔을 내리눌렀다. 드라마를 찍는다더니 지가 무슨 진짜 순정만화 주인공인줄 아나보다. 입술을 꾹 깨물고 팔에 힘을 주었으나 꿈쩍도 않는다. 원랜 내가 힘이 더 센데, 지금은 아파서 이런다. 하.. 더 비참해진다. "아프니깐 얌전히 누워있어. 어젯밤엔 내말 그렇게 잘들었으면서 지금은 왜이래." "이 그땐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난 기억도 안나!!" "쉿쉿. 목소리 낮춰. 그래도 다른 멤버들한텐 당분간은 비밀로 하는게 낫지 않겠어?" "당분간이라니! 이건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비밀이야!" 김종현 인생에 이런 흑역사가 만들어 지다니.. 내말은 또 싹 무시하고는 이번엔 내 입술을 한번 가볍게 빨아들였다 떨어진다. 양팔이 붙잡혀서 내가 반항하지 못할걸 알고 그런거다.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피할 틈도 없었다. 이젠 아예 막나가겠다 이건가? "난 내가 한말은 지켜. 진짜로 책임질테니 걱정마." "..야.., 야...!!! 최민호!!" 이제 저려오기 시작한 팔을 놔주고는 그대로 방을 나가버린다. 아직 해결된건 하나도 없고, 해결해야할 짐만 더 늘었다. 정말 이래선 안된다. 난 왜 그런짓을 벌인걸까? 내 의지였을까? 이무리 제정신이 아니었어도 함부로 잠자리를 가지고 그러진 않는데.. 그럼 무의식 중에서도 최민호한테 정말 그렇고 그런 마음이 있어서..? 그럴리는 없는데. 난 아무에게나 막 그러진 않는데.. 그렇다면, 최민호는..? 최민호는 과연 진심일까..? 만약 그렇다면 대체 왜.. 아니, 언제부터.. 짧은 휴식기간동안 최민호와 마주치지 않으려 갖은 노력을 했다.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일단은 최민호와 같은 방이라는게 제일 문제였다. 그나마 잠이 많은 최민호 덕분에 내가 일찍 일어나서 씻고 나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런데 휴식기간이면 잠이나 쳐잘것이지 요즘들어 최민호의 기상시간이 빨라졌다. 그래서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일어났다. 최민호가 깨기전에 나가려고 서둘러 모자를 눌러쓰고 문고리를 돌리는데, 뒤쪽에서 잠이 덜깬 목소리가 들려왔다. "또 어디가." "나미사." "유치하게." 뭐라고 더 반박하고 싶었지만 아침부터 쓸데없이 말을 늘리고 싶지 않았다. 내가 그냥 흘겨보며 지나가자 최민호의 시선이 날 졸졸 따라온다. 무시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거의 도망치듯 밖으로 나오고 나면 사실 할것도 없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좀 돌아다니다가 운동을 하기도 하고, 그게 싫으면 영화를 보기도 하고. 보통 때는 휴식기간이 주어져도 귀찮아사 숙소에 붙어있곤 했는데, 내가 자꾸만 밖으로 나가니깐 다른 멤버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눈치를 챈 것 같긴했다.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긴 했지만, 왠지 안믿는 눈치였으니깐. 안믿을 만 했다. 한바탕 난리를 친 다음날에도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숙소를 나섰으니깐. 그 몸을 이끌고 가야 할 정도로 중요한 약속이냐고 진기형이 물었을때, 난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삼일쯤 반복되니깐 다들 묻지도 않았다. 새벽에 사라졌다가 밤늦게 다시 나타나는 나에대해. 궁금해도 못 묻는 거였다. 마주칠 일이 없었으니깐. 내가 좋아하는 카페에 들어갔다. 24시간 하는 카페는 아니지만 일찍 개장을 하는 곳이라 좋았다. 연습생 시절에 이곳에서 아이스티를 많이 사먹었었다. 새벽부터 연습하러 갈때, 커피는 노래 연습할때 별로 안좋으니깐 대신 아이스티를 마셨다. 잠도 확 깰 정도로 시원하고, 무엇보다도 상쾌한 아침을 맞기엔 제격이었으니깐. 오랜만에 그 상쾌함을 만끽하기 위해 아이스티를 주문했다.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아이스티는 바로 내 손에 쥐어졌다. 텅빈 카페안을 둘러보다가 적당히 막혀있고, 방해 안받을 만한 곳에 앉았다. 창가쪽으로. 출근 시간보단 조금 이른 시간이라 길가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아이스티를 한모금 마셨다. 시원했다. 낮에도 딱 이만큼만 시원했으면 좋겠다. 여름의 끝무렵인데, 막바지 더위가 기승을 부려서 죽겠다. 지금은 아직 새벽이라 온도가 적당했다. 좀 쌀쌀한 정도. 그래도 습도가 높아서 춥지는 않고. 오늘은 또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 할까 생각하는데 딸랑- 소리가 들린다. 이렇게 이른시간에 누가 또 카페에 왔나 하고 카운터 쪽을 돌아보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아침이라 그런지 주문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잠겨있었다. 수트가 아니걸 봐서 회사원은 아닌것 같고, 차림새는 그냥 나랑 비슷했다. 티셔츠 한장에, 반바지, 그리고 푹 눌러쓴 모자까지. 다른게 있다면 난 반바지가 아니라 스키니진 이라는 것. 무대의상도 대부분 스키니진이라 이젠 사복도 거의 스키니진이다. 익숙해서 그런지 이게더 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네받은 남자는 앉을 자리를 찾아서 가는 듯 했다. 사람도 없는데 하필 내쪽으로 오고있다. 나처럼 창가쪽에 앉으려고 하는 건가 생각하는데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커피를 내려놓는다. 자리를 옮길까 생각을 하며 이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처다보는데 순간 당황해서 몸이 굳었다. 앉아도 되지? 묻는데 끄덕이지도 못하고 쳐다보았다. "내가 형만의 티타임을 방해했나?" 고개를 저었다. 귀신같이 내가 있는 곳을 찾아왔다는 사실 때문에 조금 놀란 것 뿐이다. 기범이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며 몸을 완전히 내쪽으로 돌렸다. 이제, "말해봐. 뭘 그렇게 피해서 도망다니는지." 나한텐 말해줄 수 있잖아, 안그래? 하고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얼마나 설명해 주어야 할 지 감이 안잡혔다. 일단은, 내가 피해다니는 인물을 먼저 말해야 할까, 아님 사건을 먼저 말해야 할까. 전자와 후자를 동시에 밝히는건 내가 거북하다. 아직은. "민호 때문이야?"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에 허를찌르고 들어오는 말에 이번에야 말로 진짜 놀랐다. 티 안내려고 했지만, 움찔하고 말았다. 기범이 짧게 웃고는 말했다. 다 털어놔봐. 들어줄께. 단단하고 힘있는 말투에 이끌려 며칠간 나 혼자 앓고 있던, 아니 어쩌면 최민호도 같이 앓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일에 대해 나는 입을 열었다. 기범의 눈치를 슬쩍 보고 빨대로 아이스티를 휘휘 저었다. 얼마 남지 않은 걸 마실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두었다. 어차피 얼음이 다 녹아서 밍밍한 맛밖에 나지 않을 테니깐. 손에서 빨대를 놓고 다시 기범을 흘긋 쳐다보았다. 여전히 표정이 굳어있다. 기범이 노려보고 있는, 딱 한모금 마신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얼음이 다 녹아서 묽어져 있었다. 얼음이 다 녹을 정도로 얘기가 끝난지는 꽤 되었다. 유리창 밖으론 사람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 보였고, 카페안에도 사람이 꽤나 있었다. 기범은 여전히 말이 없다. 내 얘기는 예상외로 금방 끝났다. 말로 하니 별로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만, 그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 뿐. 기범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걸까. 내가 민호와 잤다는 것에. 그 간단하고도 말도 안되는 사실에 대해. 상대가 말이 없으니, 당사자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초조해진다. 짐을 누군가에게 덜었다는 느낌보다는 안될일을 저지른 느낌. 괜히 말했나 하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 무렵, 드디어 기범이 시선을 아메리카노에서 나에게로 옮겼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황당하게 했다. "우리 조조영화 볼래?" 기범의 눈을 쳐다보았다. 장난이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난 심각한 얘기를 했는데 영화보잔 얘기가 어떻게 나올 수 있냐고, 너 같으면 영화를 마음 편히 볼 수 있겠냐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범은 생각이 깊다. 그리고 결단력도 있다. 그렇기에 내가 고민이 있거나 할 때, 기범에게 자주 털어놓았었다. 이번에도 기범을 믿었기에 털어놓은 것이다. 그런데, 조조영화라니?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났을 내 눈을 바라보던 기범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해줄 말이 있긴 해. 근데 지금, 여기서는 아니야." 이 말이 무얼 뜻하는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기범은 아랑곳 하지 않고 내 팔을 잡아 일으켰다. 영화표는 내가 살께?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날 설득해 보려는 표정에 나도모르게 풋- 하고 웃고 말았다. 정말 기범한테는 당해 낼 수가 없다. 무슨 꿍꿍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단은 넘어가 주기로 했다. 정말 아무 대책도 없이 이러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에. 영화 제목은 'Mistake' 였다. 멜로 영화 였는데, 내용이 심오하다. 주인공들은 사랑에 서툴었고, 그래서 실수 투성이였다. 실수들 때문에 일이 이리저리 꼬여서 나중엔 이별까지 갔었지만, 남자 주인공이 마지막에 실수들을 기회로 역전시켜서 결국엔 잘 해결되었다는 스토리. 감동 코드도 뻔했고, 웃음 코드도 뻔했지만 어쩐지 나에게는 크게 와닿는 영화였다. 상영관을 나오면서, 팝콘과 콜라가 반이나 남았길래 버리려고 했더니 기범이 날 째려본다. 어떡하자고, 물었더니 사람도 별로 없는데 다 먹고 가자고 한다. 별수 없이, 영화관 구석에 있는 빈 의자에 가서 나란히 앉았다. 평일 인데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다행이다 생각하며 팝콘을 집어 먹는데, 기범이 먼저 말을 꺼냈다. "있잖아, 형." "응."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잖아." "..응." "그걸 숨기고 감추려 들면, 나중엔 그게 독이 되버려." "알아. 영화에 나왔잖아." "형이랑 민호도 똑같아. 그 사실을 숨기면, 앞으로 서로 제대로 대할 수는 있을 것 같아? 아니, 지금 보기에도 둘이 충분히 이상한데, 진기형이랑 태민이가 눈치 못 챌 것 같아?" 어디서 형을 가르치려 드냐고 장난식으로 넘기려고 했는데, 다 맞는 말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기범의 눈에도 내가 한심하게 보였을까. "사람이 저지른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게 설령 무의식 중이라 할지라도." "뭐라는 거야, 아까부터.." "민호도 오래 기다려 준 것 같은데, 이제 그만 피해." "..어?" "나 먼저 갈께. 형은 민호랑 같이 와." "뭐라고?" 놀라서 기범을 쳐다보는데, 기범이 갑자기 일어선다. 그리고 내 뒤쪽을 한번 보더니 눈짓으로 무언갈 말하고 그대로 뒤돌아서 간다. 기범을 뒤쫓아 가려는데, 누군가가 손목을 턱- 잡는다. 뒤돌아 보지도 않고 말했다. "놔." "나 봐." "싫어. 놓으라니깐." "기범이가 하는 얘기 다 헛들었어?" 할 수 없이 최민호를 마주보았다. 조금 얼굴을 들어 올려야 눈을 마주 볼 수가 있었다. 내 찡그린 얼굴을 보더니 씩 웃는다. 재수없는 자식. "집에 가자." 내 손목을 잡던 손을 밑으로 조금 내려서, 내 손을 잡는다. 빼내려고 했는데, 더 단단히 잡아오길래 그냥 포기했다. 지금은 더운 여름인데, 최민호의 손은 시원해서. 그 시원한 손이 그다지 싫진 않아서. 단지, 그 이유 뿐이었다. 얌전히 최민호의 손에 이끌려서 걸어갔다. 사람이 없는 길을 찾아 걸어가는 동안, 우리 둘다 말이 없었다. 애초부터 영화관이 숙소에서 그닥 멀리 떨어지지 않았어서, 금방 도착했다. 숙소 문 앞에서 최민호가 잠시 멈춰서더니, 날 부른다. "종현아." "형이라고 하랬지." "나는 다 진심이었어."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정면을 보던 시선을 최민호에게로 옮겼다. 내 눈을 응시하는 최민호의 눈이 진지하다. 대체 뭐가. "뭐가 진심이었는데?" "우리 콘서트 때 장난으로 하던 뽀뽀, 인터뷰에서 네가 좋다고 얘기 했건거, 그리고 잦은 스킨쉽. 난 장난이 아니고, 전부 다 진심이었어." "......." "그날 밤에 너는 날 거부하지 않았었고, 그래서 종현이 너도 나한테 진심인 줄 알았어." "그 땐, 내가 술김에..!" "알아. 그냥 내가 멋대로 착각했었던 건 가봐." "알면.. 됐어." "그러니깐, 정식으로 고백할게." "뭐?" "종현아, 몸은 이미 줬으니깐 넌 나한테 마음만 주면 돼." 낮술했나. 황당하다는 얼굴로 최민호를 쳐다보았다. 잡힌 손에 힘을 줘서 빼내었다. 보자보자 하니깐 끝이 없다. 한대 칠까 하는 생각으로 주먹을 쥐었는데, 어째 손이 올라가지 않는다. 난 최민호를 때리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여전히 진지한 척을 하는 최민호를 노려본 뒤에, 비밀번호를 누르고 현관문을 열었다. "......."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수많은 풍선들 때문에 잠시 당황했다. 커다란 곰인형이 숙소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 인형이 스케치북을 들고있다. 거기에 정갈하게 쓰여진 다섯 글자가 보였다. "우리 사귀자." 최민호가 직접 읽어주었다. 어디서 난 건지 빨간 장미 꽃다발을 내게 건낸다. 풍선에, 스케치북을 든 곰인형에, 장미 꽃다발이라. 무슨 이런 고전적인 방법을. 내가 이런거에 넘어갈거라고 생각한건가. "이 풍선들 다 뭐냐." "네가 영화 볼 동안, 다 준비했어." "니네, 이거 다 짠거였냐?" "글쎄." "유치하게. 초딩도 아니고. 내가 이런거에 넘어가겠냐." "이런 화려한 겉만 보지 말고, 내 진심을 좀 봐달라고." 그렇게 말하는 최민호의 얼굴이 너무 단호해서, 말문이 막혔다. 장난치지 말라고, 난 이런거에 안속는다고 말해줘야 하는데 목구멍이 콱 막혀서 말이 안나온다. 그저 멍하니 최민호와 곰인형을 번갈아 보았다. 다 심각한데, 곰인형만 혼자 웃고있다. 그게 얄미웠다. 꼭 누구를 닮은 것 같아서. 내가 대답이 없자, 최민호가 재촉한다. "어때, 보여? 내 진심." "..아니." 머리로는 아니라고 하는데, 어째 목이 메는 것 같기도 하다. 개새끼. 나한테 마음이 있었으면 사고치기 전에, 먼저 이렇게 고백부터 했었어야지. 내가 얼마나 놀랬었는데. 같이 일을 치뤘던 그날 밤의 기억은, 내게 단 1초도 남아있질 않았다. 때문에 정말로 온갖 상상은 다 했었다. 최민호가 나한테 억지로 그럴 애는 아니니깐 술김에 나도 모르게 내가 최민호를 덮친건 아닐까, 아님 같이 자고싶다던가 그런 헛소리를 해댄 건 아닐까. 지금 깨달은 건데, 그 상상들에는 항상 전제가 깔려있었다. 내가 최민호에게 어쨌든 '마음'이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숨기고, 최민호와의 대면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 좀 알것도 같다. 내가 부정하려고 했던 것은, 최민호와 내가 잤다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최민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너말이야." "응. 말해, 종현아." 늘 나한테 장난만 치던 최민호가, 언제부터 이렇게 진지했더라. 사실, 그 장난에는 처음부터 진심이 숨겨져 있었던게 맞다. 입으로는 농담을 말하는 듯 했지만, 언제나 나를 보는 그 눈빛 만큼은 진지했으니깐. 다만, 내가 인정하지 않았던 것 뿐. "앞으로 나한테 잘해." "..어?" "술먹고 그런 실수 다신 하지말고, 이젠 장난식으로 말고 직접 네 감정 표현해. 그리고, 내 마음 온전히 받을 기대는 하지 말고." 주문을 늘어놓았다. 날 보는 최민호의 커다란 눈이 튀어나올 듯 하다. 그래도 잘생겼다. 쓸데없이 잘생기기만 해가지고는. 왠지 억울한 기분도 든다. 나 꽃뱀한테 홀린거 아닌가. 괜히 심술이 나서, 최민호가 들고있는 장미 꽃다발을 낚아채듯 받아주었다. 여전히 최민호는 아무 반응 없이, 날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뭐해. 나 계속 여기 세워둘거야?" "어,어.., 아니!" 그제서야 허둥지둥 곰인형을 옆으로 밀어주고, 풍선들을 걷어준다. 난 짐짓 도도하게 턱을 들고, 우리의 방으로 걸어 들어갔다. 최민호가 내 뒤를 조심조심 따라 들어온다. 아까 나한테 고백하던 당돌한 최민호는 어디가고, 이제와서 내 눈치를 살살 보고있다. 그 모습이 우스워서 물었다. "뭐 할말있어?" "그게..," "그게 뭐." "지금 숙소에 우리 둘밖에 없는데." "..그,근데."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최민호의 입꼬리가 수상하게 말려 올라간다. 당황했다. 순식간에 전세가 역전됬다. "너 그날 밤에 있었던 일, 기억 안난다고 했지." "그..랬지." "기억 나게 해줄까?" 그렇게 말하며 내게 슬금슬금 다가오는 최민호는, 이미 순진한 소의 탈을 쓴 늑대가 되어있었다. 뒤로 피하다가 침대에 걸려서 털썩 걸터앉았다. "너, 내가 다신 실수하지 말라고 했..!" "오늘은 술 안마셨어. 그때 처럼 취해서 홧김에 그러는거 아니야." "모,뭐?!" "이번엔 실수가 아니라, 진심이라고. 너도 확인 했잖아. 너를 향한 내 진심이 뭔지." 이와중에 버터바른 듯한 느끼한 대사와 눈빛도 잊지 않았다. 어째 내가 손해보는 기분이 든다. 어쩌겠는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걸. 잘생긴 얼굴이 내게 점점 다가온다. 기분이 아찔하다. 머리도 좀 어지럽고. 내가 최민호를 진짜로 이만큼 좋아했던 건가. 솔직히 조금 어이없기도 하다. 능글맞은 목소리로 우리 종현이 이리와, 하고 말하는 그의 눈을 보았다. '저는 종현이 형이 제일 좋아요.' '종현이 형이 여자라면, 아마 제가 대쉬했을 지도 몰라요.' '종현아, 나랑 뽀뽀 한번 더할래?' '우리 오늘 데이트 할까?' . . 평소에 내게 저런 말을 장난스레 건네던, 내 기억속에 있는 최민호의 눈과 겹쳐보인다. 언제나 진심을 담고 있던 그 눈. 아마, 이 한결같은 눈 때문에 내가 그에게 빠졌을지도 모른다. 최민호의 눈은, 마치 헤어나올 수 없는 깊은 웅덩이와 같았다. 왜냐면, 지금도 난 그의 눈동자 속에 푹 빠져서 헤엄을 치고 있었으니깐. 어쩐지 오늘도 저번처럼 큰 일이 벌어질 것 같다. 그런데, 그때처럼 실수가 아니라, 서로 진심을 담아서. 우리의 실수는 결국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쩐지, 이런 실수는 자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눈을 살며시 감으니, 최민호의 장난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실수 좀 해볼까?"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