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1부. 전설 1-프롤로그. 인천의 피바람 -2003년 인천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사건이 터진다. 전국에 있는 초·중·고교생을 비롯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천 연합과, 인천 칠공주의 싸움이 바로 그 것이었다. 부상자 67명, 사망자 1명. 사상 최악의 고교 난투극, 한 해의 끝자락에서 벌어진 이번 사건의 이름은 ´인천의 피바람´. 뉴스에서는 연일 이번 사건에 대해 떠들어댔고, 근 일주일간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것 역시 인천의 피바람에 관해서였다. 나날이 심각해져가는 고교생 폭력문제에 대한 토론들이 줄지어 터져나오고, 전국민의 관심은 인천으로 집중됐다. 그러나. 사건의 중심에 있는 인천 시내는 이상하리만큼 고요했다. "이제 어떻게 할 셈이니?" 우아하게 셋팅 된 머리를 쓸어 넘기며, 중년의 여자가 나직하게 물어왔다. 아무 것도 담겨있지 않은 검정색 눈동자를 향해. "묵비권을 행사할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을 거다. 오늘까지 아무런 대답이 없으면.. 이후 윤서, 네 처분에 대해서는 학교에 일임할 생각이니까." 사건이 터진 후, 끝없는 질문 속에서도 오로지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윤서를 향해 결국 여자는 줄곧 눌러왔던 짜증을 쏟아냈다. 짙은 보라색 머리를 날리는 바람에 맡기고 흥얼거리던 텅빈 아이, 윤서는 그제서야 여자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자를 바라보는 윤서의 검은 눈동자는 할 말을 잃을 정도로 지독하게 비어 있었다. 걱정스러움이 한껏 베어난. 그러면서도 지겨움이 숨겨진 이중적인 여자의 얼굴을 멀거니 쳐다보던 윤서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죽여버려요. 다신 일어서지 못하게, 주먹질따윈 엄두도 못내게 밟아 죽이는 거예요. 꿈틀거리는 지렁이는 밟는다던가 하는 속담두 있잖아요." "지금 장난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나는." "...하늘을 잡을라고 살았거든요, 제가??..그 새끼가 가지고 있는 하늘이 너무 탐나서, 뺏어서 부숴버리면 그 새끼. 울고 불고 질질짤까 기대되서 악착같이 버텼거든요, 제가?... 후회뿐인 김윤서 인생, 꾸역꾸역 먹어가며 그렇게 달렸는데... 인제 아니래. 겨우 잡아놨는데, 이미 지가 버린 거래.."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낀 여자는 창가에 기대 서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과는 완전히 엇나간 말을 조용조용. 읖조리는 윤서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절망도. 우울함도 담겨있지 않은 윤서의 얼굴은 말 그대로 텅 비어 보였다. 먼저 나서서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들정도로. 그만큼.. 뉴스나 신문에서 한창 떠들어대고 있는 문제아의 얼굴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천진한 얼굴로 자그맣게 말하고 있는 윤서를 가만히 지켜보던 여자는 짧은 한숨을 터트리며, 결국 눈을 감았다. 윤서는 창 너머로 손을 뻗었다. 허공에 선 윤서의 팔이 유난히 슬퍼 보였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 윤서가 고개를 꺾었다. "그래서 그래요. 살 이유가 없어진 걸. 악착같이 버티던 이 세상, 결국 버틸 끈을 잃어버린 거야. 그래서 빠비용 포돌이 아저씨 와도 가만히 앉았던 거구, 반짝이 기자들 와도 웃기만 한 거예요. 그니까 죽이세요. 아니, 죽여버려. 퇴학이고, 전학이고 살 가치도. 이유도 없는 거지같은 김윤서 인생. 땡땡땡하고 종이나 울려주면 고맙겠어요. 진심으로." 빙그레. 그 사건이 있고나서 처음으로 윤서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 17살 겨울. 어린 소녀 윤서는 그렇게 빈 가슴을 안았다. "죽여줘? 씨발. 그렇게 죽는 게 소원이면, 내가 죽여줄까!!!! 존나 고통스럽게, 제발 살려달라고 싹싹 빌만큼! 그렇게. 그렇게!!! ...죽여줘, 씨발년아?" 삐죽삐죽. 미친개 은지니가 하늘을 향해 멋대로 뻗어버린 머리만큼이나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죽기위해 산다는 김윤서를 향해. 하루종일 난간 위에 누워 하늘만 보고 있는, 더없이 눈물겨운 자신의 친구를 향해... 미친개의 성난 목소리에 하늘을 가득 담고 있던 김윤서의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은지니 살인자 만들고 싶지 않은데,나는." "그럼 살아!! 병신처럼 나자빠져 있지 말고!!! 세상 다 산 것처럼 굴지 말고, 제발!!!! ...제발 살라구,병신아.." "숨 쉬고 있는 걸. 이거봐, 심장도 벌떡벌떡. 이럼 살고 있는 거잖어. 벌떡벌떡, 잘 살구 있는 거잖어." "아냐. 그건 산 거 아냐. 그거는 살아있는 척 하는거야,윤서야." 반짝반짝. 햇빛에 반사될 때마다 눈부시게 빛나는 노란 머리의 바나나광, 수이연이 김윤서의 손에 자신이 가장 아끼는 바나나맛 추파춥스를 올려놓으며 말한다. 건드리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수이연의 말에 김윤서는 문득 새파란 하늘 위로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생각만해도 가슴에 이쑤시개가 꽂힌 것 같이 따끔거리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온풍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따뜻해지는. 그런 얼굴이 하나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너 그러고 있다가 얼굴 홀라당 탄다? 이허리처럼 섹시하지두 않은 게, 괜히 얼굴 태우고 그러지 마라. 보는 사람 생각도 좀 해야지." 샤랄랄라. 억.소리가 날 만큼 예쁘장하게 생긴 최고의 얼짱, 주연오가 튀는 오렌지색 머리를 휘날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하루종일 난간 위에서 죽치고 있는 김윤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눈쌀을 찌푸린채. "그래, 죽을상 그만하고 이만 일어나. 정말 보기 꼴사나워, 지금 김윤서. 차라리 옛날 김윤서로 돌아와. 미친척 싸움질만 해대는 꼴통쪽이 지금보다 훨씬 나을테니까.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이 건." 설컹설컹. 자칫 잘못 다가갔다간 손가락이 잘려나갈만큼 매서운 목소리로 대마왕 정리아가 톡. 쏘았다. 그 사건 이후, 완벽하게 나사가 빠져버린 김윤서에게 다시 그 나사를 쥐어주며. "그.그래.. 유,윤서야. 우리가 있잖아.. 누가 뭐래도 너한텐 그리고 우리한텐 서로가 있잖아. 그,그러니깐..이제는 울지말고..으응?? 웃자. 옛날처럼 웃자,우리.." 훌쩍훌쩍. 너무나도 여린 아이, 스토커 황아라가 말똥같은 눈물을 뚝뚝.흘리며 조용히 속삭인다. 상처로 얼룩진. 그러면서도 텅 비어 가여운 자신의 친구를 향해 차마 크게 소리치지 못하고 작게. 아주 작게.. ".... 차라리 가자, 우리. 당분간만이라도. 어른들 말씀대로 일이 좀 조용해질 때까지. 아니, 윤서가 다시 제정신 차릴 때 까지만이라도 가있자. 부산으로." 째깍째깍. 깊게 한숨을 내쉰 최효선이 아까부터 곰곰히 생각해오던 문제에 종지부를 찍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장 멋지고, 든든한 칠공주의 대장. 초록색 효선이는 말한다. 무의미해져버린 인천 하늘 아래에서는 절대 예전으로 돌아가 수 없다고. 그러니 차라리 떠나자고. 그렇게 말한다. 텅 빈 인천을. 그녀들의 세상이고 하늘이였던 이 곳을 버리고 떠나자고. "...부산 하늘도 예뻤음. 갖고 싶을 정도로 눈부셨음.. 그랬음 좋겠다. 그래서 수이연 말대로 살아있는 척 말고 진짜로. 진짜로 살게해줬음 좋겠다아." 팔랑팔랑. 하늘을 담았고, 하늘을 원했던. 그리고 하늘이 선택한 아이. 김윤서는 다짐하듯 그 말을 가슴 깊숙한 곳에 새겼다. 17년 평생을 바쳐 쫓았던 하늘을 잃고, 17년 평생을 자신에게 주었던 아이를 잃고, 텅 비어버린 아이. 윤서는 목숨보다 더 소중한 친구들을, 자신을 살아있게 해 줄 부산의 하늘을. 가슴 깊숙히 새겼다. 삐죽삐죽, 빨강머리 미친개. 은지니. 샤랄랄라, 주황머리 최고의 얼짱. 주연오. 반짝반짝, 노랑머리 바나나광 . 수이연. 째깍째깍, 초록머리 대가리. 최효선. 설컹설컹, 파랑머리 대마왕. 정리아. 훌쩍훌쩍, 남색머리 스토커. 황아라. 그리고 팔랑팔랑, 보라머리 일당백. 김윤서.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의 이야기. 또 다른 시작. 1-1. 레인보우(Rainbow)의 보라둥이 1년 전까지만 해도 인천짱으로 이름을 날렸던 김한영이 서울연합을 장악하며, 전국의 모든 고교를 통합하기 위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두 달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인천과 부산을 제외한 수도권과 강원·경상·충청·전라지역의 모든 학교를 통합한 김한영은 이때부터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며 전국 고교생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단 한 곳. 김한영의 소문이 미처 닿지 못한 곳이 있었는데, 그 곳은 바로 부산이었다. -2004년 부산 경쾌한 목소리가 하늘을 가득 울린다. 인천과 많이 동떨어진 이 곳. 푸르른 하늘과 시원한 바다 냄새가 가득한 이 곳. 부산의 한복판, 제화동에는 김한영의 전설과 맞먹을정도의 위력을 가진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레인보우(Rainbow). 의뢰와 함께 적당한 수고비만 지불하면 무슨 일이든지 해결해준다는 무적의 해결사 집단. 2월 초. 혜성처럼 등장한 레인보우는 단 3개월 만에 부산 최고의 강자 대열에 올라섰다. 하지만 그 누구도 레인보우의 멤버가 누군지, 어느 학교에 다니고 있는지, 나이는 몇살인지 하는 등의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의뢰자는 물론이고, 의뢰를 받은 레인보우에게 당한 피해자마저. 그런데 지금. 자신이 레인보우라고 말하는 여학생이 나타났다. 탐스러운 보라색 머리를 휘날리며. "너가 제화예고 김벼리. 지난주 수요일날, 길가던 시민의 갈비뼈를 무자비하게 박살내고. 이번주 월요일날에는 제화예고 1학년생을 거느린채 무법자 놀이를 한." "니 뭐꼬?" "나는 레인보우의 보라둥이, 김윤서입니다. 이 뚱뚱돼지 악당아!" 난 히죽 웃으며 김벼리의 턱주가리를 힘껏 후려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막지 못한 건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뚱뚱돼지. 김벼리는 멍청한 얼굴로 눈을 꿈벅였다. 굼벵이처럼. 꾸움벅.꾸움벅. 씨박. 최면 거는 건가? "졸립니다. 뚱뚱돼지, 특기가 최면이었습니까? 주연오랑 짝짜꿍 하면 딱이겠네." "니. 니.. 니 내가 누군지 모르나? 나가! 그 칠성 대가리 동생 친구, 것도 겁나게 친한 친구란 거! 모르난 말이다!!!" 뚱뚱돼지의 고함소리에 귀를 후비며 눈꺼풀을 팔랑였다. 김벼리가 말하는 '그 칠성 대가리 동생 친'라는 무지하게 긴 수식어가 딱히 마음에 와닿은 건 아니지만, 기분이 썩 좋은 것도 아니였다. 칠성은. 아라의 표현을 빌리자면, 부산 연합의 최고봉들만 모인 집단이었다. 그러니까 싸움 좀 한다는 새끼들이 올망졸망 뭉쳐있는 집단. 그리고 지금 내 앞에 있는 김벼리는 그 집단에서도 최고 대장님의 동생의 친구분. 참 멀기도 멀다. 더이상 김벼리양을 붙들고 주절주절.말을 섞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자, 난 오른쪽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방긋. 웃었다. "이름 김윤서! 나이는 열여덟개! 특기는 펀치게임 신기록 세우기!! 와자뵹!!! 어제 봉봉 오락실서 새로운 기록을 달성한 기념으로다가 김윤서표 왕주먹. 나갑니다!!!" 아직까지도 완전한 사태 파악을 하지 못한 멍텅구리, 뚱뚱돼지를 향해 날아간 주먹은 깔끔하게 그녀의 배에 박혔고. 999점짜리 김윤서표 왕주먹의 위력에 놀란 김벼리는 아주 우스꽝스러운 포즈로 나자빠졌다. 낄낄낄. 언제나 이 상황은 유쾌해. "그냥 왼쪽 주먹만 빠개줄라 했는데, 뚱뚱돼지가 아까부터 거슬리게 말 짧게 토막내잖아요. 나는 초면부터 반말까는 애기들 욘나게 싫어하는데, 그거 뚱뚱돼지가 했잖어요. 그래서 김윤서 주먹, 맛뵈기로 좀 보여줬어요. 어떄요? 정신, 팍! 깨나요?" "쿨럭- 니..니 내가 가만 안둔다카이!!! 니가 내한테 이러고도! 이러고- 악!!!" 김벼리는 미처 마지막 말을 끝맺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 벼리양의 두툼한 솥뚜껑같은 손이 김윤서 발 아래서 무참히 밟혀져서. 악소리 나게 아플정도로 밟혀져서. 그래서 김벼리는 비명을 내질렀다. 목소리는 정말 귓구멍 쑤시게 크네, 뚱뚱돼지. "꽤나 괴롭혔다면서요? 아까 말한 그 칠성 대가리 동생 어쩌구 하는 걸 빌미로 애들 꽤나 울렸다던데. 에이. 그럼 못써요. 친구라는 이름은요, 그럴 때 이용해 먹는 것도 아니구요. 또 먹어도 좋은 데만 먹는 거거든요." "니...니!!!!" 삐빅― 손목에 채워진 전자 시계가 정각 3시를 알려옴과 동시에 분노 게이지 6542%로 급상승한 김벼리가 내게로 달려들었다. 쉽게 피할 수도 있었지만, 눈을 딱 감고서 김벼리의 거대한 몸집을 받아냈다. 우당탕쾅★ 그리고............ ............ "지금 뭐하는 깁니까!!" 빙고. 김벼리가 내 위에 올라타 주먹을 뻗으려는 바로 그 때. 기막힌 타이밍과 함께 근처를 순찰 중이던 포돌이가 한 명 등장했다. 김윤서가 원하는 대로 김벼리를 향해 번쩍번쩍, 경찰봉을 휘두르며. ................. .............................. ........... ※ "지가 그런 게 아이래두?!! 이거 보소!! 저 가시네가 먼저 달려들었다, 아임니까!!!!!" "시끄럽다!! 이 가스나가 요즘 좀 풀어줬드니, 또 시끄럽게 구나!! 김벼리. 니 오늘 딱 걸렸어!" "아이씨!!! 진짜 지가 먼저 한 게 아이라니깐요!!!!!" 포돌이 VS 뚱뚱돼지 서로의 피부를 촉촉히 적셔가며 열변을 토해내는 두 사람을 흥미진진하게 바라보던 나는 4시 정각을 알리는 시계 소리에 구경을 그만두고, 그제부터 갈고 닦은 연기를 시작해야만 했다. 뒷구녕으로는 온갖 꼴통짓을 일삼아도 되지만, 포돌이나 교사.등등 어른이라고 나이 꽤나 먹은 노친네들 앞에서는 다리미로 펴놓은 것처럼 아주 반듯한 모범생 행세를 해야한다! 라는 대장님, 효선이의 주입식 교육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아저씨 그러지 마세요. 저는 괜찮습니다. 그냥 팔하고, 허벅지하고, 얼굴하고 또 갈비뼈가 쬐끔. 아주 쬐~끔 쑤시는 것 뿐인걸요." 두께가 한 8752m쯤 되는 철판을 얼굴에 철푸덕. 깐 나는 눈물글썽이라는 살짝의 조미료를 첨가해 마지막 라스트를 날렸고, 그 라스트에 포돌이는 꼼짝없이 쓰러졌다. "김벼리!!!!니 당장 경찰소로 가자!!!!!!" 포돌이에게 귀를 잡혀 질질 끌려가는 김벼리에게 상큼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한 마리의 킹콩처럼 가슴팍을 두드리며 끌려가는 가여운 뚱뚱돼지 한 마리. 김벼리의 모습이 골목 너머로 사라지자,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효선이에게 문자를 보냈다. 인제 뒤처리는 온전한 주연오 차지. [오나벽하게 임무 완수!짝짝짝, 박수 오천번.] "양호실에 갔다가 어예 뒈진 줄 알겠네. 빨리 컴백해야겠어." 교복 위에 입고 있던 보라색 망토를 가방에 쑤셔넣고, 골목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의 학교. 아이 러브 스쿨! 제화예고를 향해 경쾌한 발걸음을 옮겼다. 상쾌한 아침의 시작이었다. 짭짤한 수고비에 더불어 몸풀기까지. 하늘도 쨍쨍, 태양도 반짝. 굉장히. 들뜨는 기분이다. 1-2. 제화공고, 선우권 ................. ....... ※오후 7시 "윤서야아!!!! 우리우리 시내 나가자!!! 웅?!!!!" "귓구멍이 아이우에오." "아잉잉!! 내가 오늘 한 턱 거하게 쏘께!! 가자!!가자가자!!!!" 서울 강남서 전학왔다는. 김윤서가 오기 전까진 제화예고 짱까지 먹었다는. 김윤서가 오자마자 그 짱 자리를 대뜸 건네준.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뇌구조의 소유자, 달리는 흡사 이연이와 비슷한 귀염을 떨며 가방을 끌어 당겼다. "오늘은 집구석에서 발닦고 잠이나 잘란다. 요번에 새로 생긴 나의 브라덜, 한솔이가 물 받아놓고 애타게 기다리고 있걸랑." "윤서야아!!! 가자!! 가자가자가자가자." "됐대니깐." 됐대니깐.... 됐대니깐........ .......................... "왁! 요거 예쁘다!!!!! 그치? 그치??" "엉. 아주 눈깔딱지 뒤집어지게 예쁘네." "아냐아냐. 요건 별루 안 이뻐, 보니까. 봐! 여기 기스난 것 봐. 아유, 촌시러. 아까 그 가게 꺼가 쫌 더 예쁘던데..." 결국 난 핫도그 두 개에 무너져 달리와 함께 시내에 나오고야 말았다. 내키지 않는 시내행에 기분도 별로 안 좋고만. 달리 가시네는 시내에 있는 악세사리점이란 악세사리점은 죄다 돌아 볼 모양인지 13번째 들른 악세사리점마저 마음에 들지 않다며 횡. 나가버렸다. 찌릿찌릿. 무섭게 째려보는 점원 언니야를 뒤로하고 가게를 나오자, 멀리 떨어지지 않은 오락실 앞에서 호들갑을 떨어대는 달리의 큼지막한 엉덩이가 날 반긴다. "유달리이" 지루한 하품을 길게 내뿜으며 달리를 불렀건만. 씰룩씰룩 엉덩이는 도통 돌아 볼 생각이 없어 보였다. "유우다알리이이이" 아까와 딱히 달라진 점이 없는 늘어진 목소리로 부르자, 여전히 달리의 엉덩이는 씰룩씰룩. 저 가시네 아까 배고프다더니.. 지 귀를 씹어먹기라도 한건가? 대답없는 그녀때문에 난 어쩔 수 없이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달리에게로 걸어가야만 했다. 망할. 누군가와 열심히 수다를 떨고 있는 달리의 어깨에 막 손을 올리려는데... 올리려는데........ "한...가람?" 힘이 탁 풀려옴을 느낌과 동시에 나는 달리의 앞에 서 있는 남정네의 손을 확 끌어당겼다. 코 끝을 싸하게 만드는 던힐의 향기. "니 뭐냐?" ............ ................... 아. 미치겠다. 진심! 세상엔 한가람이를 닮은 노마가 참 많기도 하지. 얼마 전에는 이연이가 대뜸 한가람 닮았다고 왠 사내놈을 데려와 날 놀래키더니. 이젠 나야? 그럴리가 없는 거 욘나 잘 아는데.. 한가람이가 여기 서있을 녀석 아닌 거 뼈저리게 아는데... "아, 김윤서 폼 지대루 구기네. 진짜.. 저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는 사람하고 쫌 심하게 닮으셔가지고 제가 착각을 했네요. 접시물에 코 박도 엎드려 뻗쳐 해드릴만큼 죄송합니다." 꾸벅. 한가람이를 참 많이도 닮은 사내에게 후딱 사과를 하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동그래진 눈으로 뻐끔뻐끔. 나를 보고 있는 달리가 눈에 들어온다. "유달리, 이 가시네. 맞을라고 어딜 뽈뽈 싸다니냐. 빨리 핫도그 먹으러 가자." "....야." "예?" 달리의 손을 잡고 주황색 포장마차를 향해 한 걸음 내딛는데. 갑자기 아까 그 닮은 사내가 날 불러세운다. 예의 바르다고 아주 소문이 자자한.(☜개뻥) 김윤서의 기분은 한방에 조져주시는, 매우 짧은 말투를 선사하며... "....너 아까 나 뭐라고 했냐?" "한남자요. 한남자라고 했는데요." "장난 까면 뒤진다. 뭐라고 했어?" 아예 본격적으로 닥달할 셈인지, 자기 쪽으로 날 돌려세운 말 짧은 사내가 눈시깔을 부라리며 험악하게 물어왔다. 이 새끼.. 또라이의 절정? 사과를 했는데 왜 꼬투리를 잡고 난리지. 별로 마음이 동하진 않았지만, 앞에 있는 또라이와 말장난만 계속 하고 있다간 새벽내내 시내에 있어야 될 것 같아서 난 떨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떼고서 말했다. 한가람이 이름 입에 올리는 거.. 맨정신엔 쫌 심하게 힘든데... "한가람요. 한가람이라고 불렀어요." "살다살다 그런 이름은 또 처음 들어보네. 너 나 누군지 몰라서 그러냐, 아님 장난 까는 거냐?" "아마 몰라서 그랬을지 싶습니다." "진짜 나 몰라? 날 모른다고?" 지구가 돈다, 돈다 하니까 인제 사람들까지 도는갑다. 그리고 운 없게도 내 앞에 있는 또라이가 그 중 한 사람인갑다.. "예에. 정말 정말 털 끝만큼의 거짓도 없이 진짜! 에브리바디!! 모르겠는― 왁!!!" 몰려오는 지루함과 따분함을 견디지 못해 얼른 또라이를 벗어나려 평소보다 심한 악다구니를 써대는데 갑자기 달리가 내 옆구리를 무지막지한 힘으로 찔러댔다. 욱신거리는 옆구리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리자 사색이 된 달리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연방 사과를 하고 있는 게 보였다. "달리야?" "죄송해요!! 선배님, 얘가 전학 온 지 얼마 안되서 아직 잘 몰라요! 죄송합니다!!!" ...... 인제 저 또라이도 모잘라 달리 너까지 지구랑 손잡고 돌아버린거니? 민망할정도로 사과를 해대는 달리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말 짧은 또라이가 손목을 확 낚아챈다. 어쭈. "에?" "귓구멍 열고 잘 들어. 나는 선우권이다. 제화공고 다니는 선우권!" "예? 아, 예." 말이 짧은 그 사내는 무안할정도로 허리를 숙여 사과하는 달리를 깔끔하게 무시하고는 저렇게 말했다. 자기는 선우권이라고. 제화공고 다니는 선우권이라고. ........... 2004년 어느날. 제화동의 이름 모를 오락실 앞에서 나는 그렇게 김윤서 마음 속의 이쑤시개가 되버린 아이, 한가람이를 기가막히게 닮은 선우권을 만났다. 왠지 모르게 하늘을 닮은..... 제화공고 다니는 선우권을.... .............. ........ ※2시간 후 그 후로 다섯번이나 자기 이름을 기억하라고 외치던 말이 짧은 또라이, 선우권과 사과만 하다 결국 선우권이 사과를 받아주지 않자 그 뒤를 뽈뽈 쫓아간 달리를 뒤로한채 아지트로 가는 길. 뻐근한 어깨를 쪼물딱 거리며 걸어가는 데... 어느 어두운 골목 사이로 꽤 익숙한 목소리가 한 개 튀어나왔다. "씨빠롱!!! 바나나 우유 내 놔, 이 뽕빠롱 가시네야!!" 애교가 철철 넘치는 이 콧소리는.... "얼른 가 사오라고, 바나나 우유. 빙그레표 바나나 우유!! 항아리! 항아리!!!!! 어엉?!!" ........... 바나나에 미쳐버린 아이. 바나나만 준다면 미친듯이 휴전선을 넘어 백두산의 봉오리를 잘라올 수도 있는 아이. 수이연이었다. "또 여기서 엄한 애들 잡고 있었지?" 1-3. 바나나광와 미친개, 그리고 최고의 얼짱 "윤!!!서!!!!야아!!!!!"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이연이는 한글자, 한글자에 강렬한 악센트를 주며 김윤서의 이름을 불렀재꼈다. 골목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이연이의 목소리에 눈쌀을 살짝 찌푸리자 귀신같이 알아채고선 금방 뚱한 표정을 짓는 수이연. "윤서 너 지금 이연이 보구서 얼굴 구긴거야?" "설마. 김윤서가 수이연이 젤로 좋아하는 거 알면서." 딱히 비굴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비굴하다고 생각하라면 그럴 수 밖에. 사실 수이연은 엄청난 가시네다. 한 번 토라지면 한달치 용돈이 거덜날 정도로 바나나를 사줘야만 풀리는. 우리 중에서 가장 악독하다고 소문난 정리아조차 밀릴만큼 대단한! ...........바나나사랑의 절정. 오죽하면 별명이 바나나에 미친년, 나미였을까. "그건 그렇고 여기서 뭐해? 아지트 안 들어가냐?" "아, 맞다!!! 아까 연오가 지금 막 지니가 시내서 사고치고 있다고. 마막 여기서 기다렸다가 너 오면은 같이 오랬는데!! 왁!!! 늦었다!!!!.." 혼자서 횡설수설하던 이연이가 갑자기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며 손목을 잡어채더니. 빛과 경주라도 할 모양인지 엄청난 속도로 방금 내가 빠져 나온 시내를 향해 뜀박질을 시도했다. 한참 후. 시내 중심에 선 우리는 분수대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경악스러운 광경에 그만 정신을 잃기... 바로 일보직후까지 다녀오고야 말았다. "왁!!!!! 놔, 이 씨발롬아!!!!!" "개쌍팔!!!! 저 년, 머리끄댕이 잡어!!!!" 온갖 욕설과 폭력으로 난무한 그 곳. 새빨간 머리가 풀썩풀썩 휘날리는 그 곳. 그리고 그 새빨간 머리를 말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그 곳. .............. 미친개 은지니 대형사고 치다. "악!!! 김윤서? 윤서야!!!! 씨바, 왔으면 이 미친년 좀 말려!!!! 나도 못알아보고 이 지랄이야!!!!" 어제 미용실가서 큰 맘먹고 셋팅파마를 했다던 연오는 지니의 손에 의해 돼지똥꼬털이 되버린 머리를 부여잡고는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마스카라가 다 번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빛이 나는 얼굴로.... "이연아, 너가 가라. 그럼 내가 바나나 우유 다섯개 쏠께." "싫어요! 이연이는 미친개한테 물리기 싫어요!으르릉! 컹컹!!" ......... 못된 가시네. 가기 싫다며 온갖 애교를 떨어대는 이연이와 날 향해 울부짖는 연오때문에 결국 김윤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미친개에게 달려가야만 했다. 제화상고 교복을 입고 있는 여자아이를 막 패대기 친 지니가 새로운 먹잇감을 찾아 고개를 돌릴 때. 아주 무지하게 큰 마음을 먹은 김윤서는 팔꿈치를 들어올려 그대로 지니의 뒷통수를 내리찍었다. "윽" 담백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고꾸라지는 미친개. "역시 윤서야!! 짝짝짝, 박수 오천번!!!" "작작 하고 얼른 와서 거들어,임마. 그리고 연오, 너는 고만 짜고 수습하자? 여기 몰려있는 대갈통만 해도 스무개는 넘는다는 데 올인하겠어." 이 상태로 계속 있다간 포돌이 아저씨가 경찰봉을 휘두르며 달려올 것이 분명했기에, 빠른 몸놀림으로 사태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수습은 김윤서 분야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신속한 동작으로. 우선 정신을 잃고 쓰러진 지니를 이연이 등에 업혀두고, 그런 지니에게 맞아 처참히 구겨진 제화여상 아이들을 증거 인멸을 위해 분수대에 던져버리고.. 안즉까지도 짜고 있는 연오를 일으켜 세워 마지막 뒷수습을 맡기기까지. 딱 2분 54초가 걸렸다. 음후후하하하. 역시 나는 못할 게 없는 일당백! 와자보. "주연오, 그럼 뒷수습 잘 하고 와―" "야이 씨발년아!!!!" 쿠당당★ 이연이의 손목을 잡고 자리를 벗어나려는 찰나. 어디선가 튀어나온 깔쌈한 여학생 한 개가 김윤서와 지니를 업고 있는 이연일 시멘트 바닥에 발라당. 나자빠지는게 하는데 매우 큰 공헌을 세우셨다. 뭡니까? "왜라이, 이 사발면님아!!!!" 차마 초면에 반말을 할 수가 없어, 저따위의 어의없는 말을 내뱉음과 동시에 방금 부딪힌 여학생을 향해 고개를 쳐 들었다. "니들이 뭔데 내 친굴 때리나!! 니들이 뭔데!!!! 아아악!!!!" 생긴건 완전 성유리 싸다구를 갈기는데... 말투는 어쩜 저렇게 싸가지를 상실했을까. 신비한 미스테리에 대꾸를 못하고 가만히 있자, 이에 힘입은 짝퉁 성유리(☜방금 부딪힌 그 여학생)는 우리를 향해 발길질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마음이 태평양 두개 를 합쳐놓은 김윤서라 해도, 이건. 솔직히 좀. 그렇잖아? "악!! 이연이 아퍼!!!! 그만 때려, 이 뽕빠롱년아!!!" "죽어!! 죽어!!!! 내 친구 괴롭힌 년들, 다 뒈져버리라카이!!!" "작작 하세요, 쫌!!!" 짝퉁 성유리의 발길질에 퍽퍽한 시멘트 가루들이 온 몸에 달라붙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그녀의 손목을 나꿔채고 소리쳤다. 씩씩거리며 부리부리한 눈으로 날 노려보는 짝퉁 성유리. 눈은 아주 장기알만해가지고. 알까기 하면 딱이겠는데? "이 겁대가리 없는 가시네야!!!!!" 그렇게 짝퉁 성유리와 함께 무시무시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데, 갑자기 엄청난 소리와 함께... 아까 골목에서 흠씬 두들겨 맞고, 결국 포돌이에게까지 끌려간 뚱뚱돼지, 김벼리가 나타나.... 나타나...... 각목으로 내 뒷통수를 후려쳤다야... "하니야!!! 괜찮노?!! 이 망할 가시네가 너한테도 몹쓸짓 한 기 아니지?!!! 아오, 내가 아까 이 가시네한테 당한 거 생각하면―!!!" "...수이연, 일어나서 당장 여기 모여있는 새끼들 눈깔 돌리게 만들자 실시." 후끈후끈. 미친듯이 아파오는 뒷통수를 움켜쥐고 까득― 이빨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피가 솟구치는 느낌이다. 좋아. 가끔은 은지니처럼 대박 사건을 한 번 터트려줘야지. 엉? 안 그래? 암, 그렇고 말고!! 뭔가 심상치않는 기운을 느낀 이연이가 연오와 함께 주변에 몰린 사람들을 몰아내기 시작하자 뚜둑거리는 목주변을 슬슬 주무르며 짝퉁 성유리와 겁대가리를 통째로 상실해버린 뚱뚱돼지를 따갑게 쳐다봤다. "내가 왠만하면 곱게 넘어갈려고 욘나게 참았는데... 아, 나 오랜만에 뻗대보자. 응?" 각목을 들고 짝퉁 성유리를 지키려는 듯 서있는 뚱뚱돼지를 보고있자니 실실 웃음이 난다. 싸운다. 피터지게 한 번 싸운다! "훼까닥 돌아버릴 각오하고 덤벼라!!!!!" 성난 호랭이마냥 괴성을 내지른 나는 삼단차기를 하며 둑실둑실한 벼리양의 턱주가리를 차버리고, 곧바로 벼리양의 손에 들려진 각목을 빼앗아 두조각으로 빠개버렸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한 두 아녀자의 뒷통수를 후려잡아 왕주먹 5연타를 날리려는 순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 "씨발, 느그들 뭐꼬?!!!!!" 1-4. 부산 연합의 최고봉, 칠성 3중으로 들려오는 걸걸한 목소리의 주인공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뜻밖에... 아까 그 선우권이라는 사내와 처음 보는 사내 두명이 심상치않은 오라를 풍기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동자 여섯개가 천천히 두 아녀자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있는 내 손으로 모여졌고, 이윽고 그 중 가장 키가 크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소리쳤다. "너그들이 뭔데, 내 친구 동생 건드리나?" "....넌 아까?" 귓구멍이 터져버릴정도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깜댕이 사내를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선우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향해 검지 손꾸락을 치켜들었다. 인생이 아무리 스큐류바라도 이렇게 배배 꼬이면 절더러 어쩌란 말인가요, 하늘님. 예?! 전 엉켜있는 실타래하고는 거리가 5442헥타르만큼이나 먼 사람이라구요. 밀려오는 불길함과 찝찝함에 입술만 잘근잘근 씹어먹고 있는데, 선우권이 갑자기 내 앞으로 달려와서는 내 손에 잡혀 있던 두 아녀자를 떼어냈다. 그리고 뭔가 굉장히 상기된 표정을 지으며..... ...... "이름!!!!!" 다짜고짜 내 어깨를 붙들고 이름을 묻는 것이였다. 당황한 김윤서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뚱뚱돼지의 뒤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던 짝퉁 성유리가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며 선우권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아주 재미난 상황이다. "오빠아!!!! 으앙. 하니, 여기 너무 아프다!! 저 망할 년이 내 친구도 괴롭히고―" "이름. 이름, 뭐냐고 너." 보기 애처로울정도로 눈물, 콧물 질질(☜추하게 있어도 예쁘다고 느낀 여잔 주연오 이후로 이 아이가 처음이었다.) 짜대고 있는 짝퉁 성유리를 아까 달리를 대할 때처럼 깔끔하게 무시한 선우권은 날 무섭게 노려보며 물어왔다. 당황스러움이 미친듯이 몰려오는데. "제 이름―" "윤서야!!!! 윤서야, 튀어튀어!! 조빵 열받은 리아가 막 여길로 오고있대!!!" 매우 궁금해하는 선우권에게 막 이름을 알려주려는 찰나. 다급한, 그러면서도 신이난 이연이의 목소리가 귀떼기를 후려쳤다. 정리아. 일명 대마왕이라고 통하는 정리아에 대해 말하자면 아주 3657일 밤낮 안가리고 말해도 입에 침이 마르지 않을, 그런 무시무시하고도 엄청나게 대단한 사람이랄까. IQ 200이 넘는 초특급 천재 효선이조차도. 얼굴에 무쇠철판 5712장을 깐 이연이조차도. 그리고 모든 사람을 무관심과 쌩- 하나로 살아온 지니조차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말빨과 머리를 가진 여자. 아주 사소한 사고라도 칠라하면 당장에 달려와 머리채를 휘어잡고 영동 고속도로를 달리게 만드는 여자. ........... 생각만 해도 무서운 여자, 정리아. 그런 여자가 온단다. 그냥 와도 무서운 여자가 조빵 열받아가지고 온단다. 김윤서 인생 최대의 위기다!! "난 무조건 튄다?!!!!" "그런 게 어디있어!! 죽어도 같이 죽어야지, 윤서야아!!" "저번에 후배님 병원구경 좀 시켜줬다고 날 해운대에 빠트린 인간이야, 대마왕은!! 이번에도 잡히면 난 아마 아마존에 던져버릴껄?! 늦기전에 난 삼만!" 불과 일주일 전. ´서울에서 온 년이라 그렇게 뻗대노?´ 라며 시비를 걸어온 후배님이 하나 있었다. 내가 계속 인천이라고 우기는데도, 윗동네는 다 똑같은 거라며 말귀 하나는 욘나 못알아 쳐먹는 그 후배님이 먼저 열통 터지게 하는 바람에 그냥 살짝 주물러주고서 병원에 데려다줬는데. 하필 그게 효선이한테 안넘어가고 바로 리아한테 들어가서.... ............ 3일 밤낮을 정신적인 고문을 당하고 난 뒤, 새벽 5시에 해운대 바다에 빠지고 참치잡이 어선에 태워지기까지의 모습들이 한 개의 필름이 되어 촤르륵. 펼쳐지고..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 때의 기억을 되새김질 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쇠파이프 한 개를 주워 질질. 끌고 오는 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악!!! 윤서야!! 리아 조빵 화났어!!!! 쇠파이프로 오늘 우리 셋 다 죽여버린대!!!" "부연설명 안 해도 다 알어, 임마. 아무튼 난 간다? 뒷수습은 수습담당이 하시고, 난 이만삼만사만!" "이름 말하고 가" 점점 다가오는 리아때문에 내장은 아주 초조해 타들어가는데, 눈치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선우권이 어깨를 꽉 잡고서 놓질 않는다. 한발자국, 한발자국. ....천천히 리아가 걸어오고... "에이, 씨발!! 이거봐라, 새끼야!"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터라 예의고 뭐고 다 집어던진 나는 교복 주머니를 뒤져 손에 잡히는 아크릴판 명찰을 선우권의 면상떼기에 던지다시피하고 죽어라 달리기 시작했다. 100m를 6초에 돌파하는 육상계의 다크호스인 나였지만 이번만큼은 아주 똥줄타게 달려야만 했다. 무시무시한 리아의 외침을 뒤로하고. 선우권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김윤서를 죽일듯이 노려보는 네개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그래서 난 미처 깨닫지 못했다. 존댓말 쓰기를 생활화한 김윤서가. 철 들고나서 처음으로 초면에 반말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것이 제화공고, 선우권이라는 것을.. ............... ....... "후아. 진짜 지옥물에 엄지발가락 담궈논 느낌이였어. 하여간 정리아, 저거는 인간 자체가 스펙타클이래니깐." 시내에서 집까지 뛰어오는 바람에 입고 있던 보라색 교복은 땀에 쩔었지만, 그래도 인간 자체가 스펙타클로 이루어진 리아에게서 벗어났다는 안도감에 난 빙글빙글 웃으며 마이를 벗을 수 있었다. 얼굴 가득 흐르는 땀을 대충 닦아내고 초인종을 누르려는데 골목 저 편에서 익숙한 얼굴 한개가 걸어온다. "...한솔아!!" 어른들(☜우리 일곱명의 부모님들 짬뽕 해놓은 거)께서 아주 황송하게도 이번 부산에서는 절대 사고를 치지도, 그 근처에도 가지 말라며 우리에게 해주신 것들이 있었다. 그 중 하나는 경찰뺏지 단 포돌이 한 명은 꼭 있는 집 안에 우리를 살게 해주신 것. 나머지 하나는 항상 검은 정장만 입는 감시자, 일명 맨인블랙을 각자 다니는 학교에 붙여놓은 것. 그리고 특별히 김윤서에게만 붙여준 마지막 하나는... 저 하늘의 별도 달도 다 따다줄 수 있을만큼 사랑스러운. 김윤서 심장을 정말이지 싱싱한 도미회처럼 살게 해 준 바로 부산에서의 새 가족과 저기 걸어오는 아이. 한한솔이었다. "윤서누나?" "엉. 욘나 반갑다야, 지금 들어오는거야?" 김윤서와는 틀리게 뼛속까지 타고난 모범생인 한솔이는 방금 학교서 오는 건지 왼쪽에 두꺼운 정석을 낀 채로 총총총 걸어오고 있었다. 싱글싱글. 한솔이를 보자마자 피어오르는 기분 좋은 미소를 입가에 덜렁덜렁 붙여놓은 채. 낼름 한솔이 옆으로 다가가 어깨동무를 했다. "하늘하고 무지개보다 훨씬 더 보고 싶었어, 한솔아. 알지, 누나 맘?" "오늘 아침에도 봤는데요, 뭘." "아유. 우리 귀염둥이 1초라도 못 보면 누나 엉덩이에 이쑤시개 돋는 거 알잖어. 히히" 한솔이의 맨질맨질한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길. "근데 누나 왜 이렇게 늦었어요? 오늘 일찍 끝나는 날 아니예요?" "엉엉. 쫌 일찍 끝났는데, 친구들 좀 만나느라. 근데 우리 한솔이 맨날 이 시간에 오는 거야?" "예." 반질반질 어젯밤. 새벽 3시에 일어나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호랭이 주둥이에 손을 넣어 대문을 쑥. 밀자 한솔이가 방긋방긋 웃으며 따라온다. 아유!! 귀여운 것! "안되겠다, 한솔아." "예? 뭐가요?" "너 너무 귀여워서 위험하겠어!! 누나가 앞으로 너네 학교로 맨날맨날 마중나가야 겠다!" "예에? 안 그러셔두 되는데.. 누나 힘드시잖아요." "너 그거 모르는구나? 누난 한솔이 웃는 것만 봐도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 이것 봐. 지금도 막 알통이 뽈록뽈록 올라오잖아." 시덥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현관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까만 아디다스 운동복을 입은 보람이가 뛰어나왔다. 그리고 바로 걸려오는 보람이의 뒤돌려차기! 날렵하게 허리를 꺾어 보람이의 발차기를 피한 나는 바로 고개를 들어 헤딩을 날렸다. "우왁!!! 언니야!!! 마빡에 불똥튄다, 아이가!!! 살살해라!" "보람씨야 말로. 들어올때마다 발로 인사하는 거 인제 슬슬 좀 접지?" 방금 나에게 날렵한 뒤돌려차기를 날린 아이는 한솔이와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만나는 사람마다 다소곳한 인사 대신 뒤돌려 차기를 날려주는 아주 괄괄한 여장부. 부산에서의 김윤서 여동생, 한보람이다. 빨갛게 부어오른 마빡을 슬슬 만지며 한솔이에게 다시 뒤돌려차기를 시도하는 보람이를 보고있자니 갑자기 웃음이 나온다. 꼭 예전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보람이를 보면 아주 어렸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 그냥 웃음이 나온다. 한솔이는 사랑스러워서 웃음이 나고, 보람이는 또다른 김윤소를 보는 것 같아서 웃음이 난다. ................. 인천집에 들어가면 웃음이 먼저 사라지고 말았는데, 부산집에 들어오면 웃음이 먼저 나타나고 만다. 그래서 좋다. 좋은데.... 천하의 김윤서, 가슴 쑤시게 하는 사람들도 없는 부산이 이렇게나 좋은데..... .......... .................... 그만큼 아프다. 좋은만큼 아프다. 망할. "누나?" "언니야?" 동글동글 귀엽게 눈을 뜨고서 날 부르는 한솔이와 보람이. 그런 한솔이와 보람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주며, 씩. 웃었다. "징하게 귀여운 내 새끼들.... 미안하다. 그리고... 사랑한다." 1-5. 복수의 화신, 화강안 등장 "미치게 졸려버리네, 이거." 어제 현관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 명대사 하나 읊었다고, 새벽 2시까지 대련상대 해달라, 어째라 조르는 보람이때문에 잠을 설쳐서 그런지 영 눈꺼풀이 뻑뻑하다. 게다가 4시간 내내 매트 위에서 보람이의 발에 이리저리 치이다보니 어깨고,허리고 괜찮은 구석이 없다. 시퍼런 멍이 잔뜩 든 어깨를 주물주물거리며 낯익은 선도부원 몇이 서있는 교문을 지나쳐오는데 주머니 속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댄다. 간단한 목운동을 하며 전화를 받아보니...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아라의 목소리가 귓구멍이 따가울정도로 울려댔다. [윤서야!!!] ["엉, 아라 좋은 아침."] [크, 크― 큰일났어!!] ["무슨 크크크큰일?"]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는 후배님들에게 살짝 고개를 까닥여주고 교실로 올라가는 길. 핸드폰을 따라 울먹거림이 가득 담긴 아라의 목소리가 끈임없이 흘러나온다. 유난히 말을 잘 더듬는 순진배기 아라는 연방 ´크크큰일´ 만 외쳐대며 김윤서의 궁금증을 살살 간질였다. 교실에 도착한 나는 교탁 앞에서 조례중이신 선생님께 빙긋 미소를 지어보이고, 자리에 앉아 아라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인제 슬슬 그 큰 일이 뭔지 말해보지?"] [기, 김벼린가? 아, 아무튼 니가 어제 일때문에 만난 너네 학교 이, 일학년. 걔가 일을 꾸미고 있어!] ["무슨 일?"] 4B연필과 스케치북만 들어있는 가방을 대충 의자 뒤에 걸쳐놓고 고개를 꺾자 아라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귓가를 때렸다. [치, 칠성하고 손잡고 널.. 널!! 윤서 널 오늘 소, 손 봐주려나봐.] ["흐응― 뚱뚱돼지가 안즉도 정신을 못차렸네."] 새끼손가락으로 후비적,후비적. 귀를 후벼파며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아라의 비명소리가 들린다. [윤서야!! 그, 그렇게 쉽게 넘길 일이 아니야. 치, 칠성이라면 부산의 최고들만 모인!! 그, 그런 곳이란말이야. 너 어제도 그렇게 사고 크게 쳐놨는데.. 치, 칠성이랑 또 엮이면―] ["엄연히 말하면 어제 그 사고는 순전히 은지니때문이었다, 뭐. 난 잘못 개미똥구녕만큼도 없음, 퉤퉤."] [그래도!! 윤서야, 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고―] ["아라야!!!"] [으응? 딸꾹―] 갑작스러운 내 외침에 화들짝 놀란 아라가 딸꾹질을 한다. 한없이 귀여워주시는 아라의 모습에 난 비실비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고서 말했다. ["재미난 일 없나, 하고 고민하고 있었는데 고맙다! 재미난 일 하나 물어다줘서."] [그게 무, 무슨― 아, 안돼!!! 윤서야, 안돼!! 응? 어제일로 리아 아직도 화나있는데 오늘 또 그러면―] 애타게... 아주 똥줄이 탈 정도로 내 이름을 불러재끼는 아라를 향해 미안하지만, 빙글 미소를 지어주며 마지막 쐐기를 박아줬다. ["알잖아. 아라, 너. 내가 하늘, 최고, 도전 뭐 이런거에 껌벅 죽는거. 오늘은 신경써서 조용히 처리할테니깐 리아한텐 암말 마? 그럼 오늘도 건강히!"] [아, 안돼― 유, 윤서야?] 마지막 아라의 부름을 뒤로한 채, 나는핸드폰의 전원을 과감하게 꺼버렸다. 후후후.... 부산 내려와서 처음으로 날 재미나게 해주는 일이 생기겠네, 이거... 아 기대된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우지끈우지끈.. 아, 이건 아닌가? 에이. 아무렴 어때!! 무진장 기대되는 오후가 기다리고 있는데... ................. ......... ※오후 8시 "미행을 할라믄 좀 더 폼나게 할 것이지, 저게 뭐꼬." 지루하게 중얼거리며 아까부터 눈에 띄게, 내 뒤를 쫓아오는 한 무리를 흘끗 바라봤다. 아니 따라올람 좀 몰래 따라오던가..... 긴장감 사라지게, 이게 뭡니까. 에이, 김 샜다. "그럼 이쯤에서 할까?" 시내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으슥한 골목. 먼저 골목 안으로 들어온 나는 안전하게 쓰레기통 뒤에 가방을 내려놓고 벽에 기대섰다. 곧이어 골목 안으로 들어오는, 미행 하나는 죽이게 못하는 한 무리. 오른손을 들어 반가움을 표시했다. "반가워, 자기들. 우리 구면이지?" "무슨 똥배짱인지 모르갔는디, 니는 지금 죽은 목숨이다. 그거 아나?" "난 뚱뚱돼지 말고, 뚱뚱돼지 옆에 짝퉁 성유리한테 말한건데?" "머머머, 머라카노?!!!" 느긋하게 웃으며 각목이나 쇠파이프같은 무기 하나씩 쥐고있는 여학생 다섯명을 찬찬히 살펴봤다. 맨 앞에있던 뚱뚱돼지는 내 농담 아닌 농담에 발끈해 소리치고 있었고, 그 모습에 짝퉁 성유리는 입술을 실룩이며 콧방귀를 끼고 있었다. 오. 역시. "다시는 그 주디로 나불거리지 못하게 할끼다, 알갔나?" "과연 그럴 능력이 있을라나, 그대들이?" "과소평가 안하는 게 좋을걸." "앗. 뉴페이스 등장!" 뚱뚱돼지와 짝퉁 성유리와의 눈싸움을 깨고 등장한 새로운 얼굴에,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양 옆으로 곱게 머리를 땋아내린 그 여학생은 내 말에 피식 웃으며,서늘하게 눈알을 부라렸는데. 그 폼이 어찌나 무서운지. 전설의 고향에서 직접 캐스팅을 나와도 될 만큼 굉장했다. "그렇게 노려보면 눈에서 레이져빔이라도 나오나? 하하. 눈알 빠지기 전에 좀 집어 넣죠?" "쫌만 있으면 살려달라고 빌빌댈꺼면서 강한 척 하기는. 하, 웃기다 아이가?" "뚱뚱돼지는 아가리 묵념 좀 하지. 하늘같은 선배님한테 왜 자꾸 말 짧게 하고 지랄일까. 열통 터질랑 말랑하게, 응? 뭐, 뚱뚱돼지 생긴 거 자체가 열통터지게 생기긴 했지만.." "니!!!" 결국 김윤서보다 먼저 열통을 터트린 뚱뚱돼지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고, 난 쌜쭉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달려올 때마다 떨려오는 뚱뚱돼지의 두툼한 턱살을 보면서 실실 쪼개고 있는데, 어느새 성큼 다가온 뚱뚱돼지가 들고 있던 각목을 치켜들었다. "아이고. 무서워 죽겄네!?" 한 걸음 잽싸게 물러서, 뚱뚱돼지의 안면에 바로 왼쪽 주먹을 날리자. 그 바람에 바닥에 주저앉은 뚱뚱돼지의 뒤로 아까 그 네명의 여학생들이 내게로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아, 인제 좀 풀리네. 이거 욘나 유쾌상쾌통쾌야, 정말. 낄낄낄.. "와자뵤!!!"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앞으로 달려나가 바로 3단차기를 날리자, 기겁을 하며 물러서는 아이들. 좁다란 골목에서 서로를 밀치며 각목만 휘둘러대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 속에서 짝퉁 성유리의 기다란 머리칼을 나꿔챘다. 악― 비명을 내지르며 앞으로 끌려나오는 짝퉁 성유리. 우선 짝퉁 성유리의 뒷통수를 단단히 단단히 붙잡고, 천천히 무릎을 들어올렸다. 콰직-. "혹 내가 말 했을라나 모르겠는데... 나는 초면부터 말 짧게 하는 새끼들 욘나 싫어해요. 나보다 어리면서 말 짧게 하는 건 더더욱 싫어하고, 자는데 깨우는 거. 펀치게임 하는데 툭툭 쳐대는 거. ....그리고 지 오빠 믿고서 나대는 거. 그거 김윤서가 세상에서 제일로 재미없어 하는 거." 대충 어제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이 짝퉁 성유리는 선우권과 끈끈한 피가 섞여있음이 틀림없다. 김윤서 왕개코가 그렇게 말해줬으니깐.. 옛날 그 새끼하고 김윤서 사이에서 났던... 오빠하고 동생 사이에만 풍기는 특이하고도 구린 그런 냄새가 났다고. 그렇게 말해줬으니깐.... ............... ........ ※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 짝퉁 성유리와 여전히 싸가지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뚱뚱돼지. 뉴페이스, 댕기소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지근지근 밟아주며 싱글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골목 안으로 어두운 그림자가 한 개 들어선다. "선우하니, 이깟일로 일일이 나 부르지 말랬..." "어라? 너." 짝퉁 성유리에게 신나게 먹여주고 있던 꿀밤을 멈추고 넋이 나간 듯.정신이 잠깐 가출한 듯한 표정을 지으며 지금 골목 안으로 들어온 사내를 바라봤다. ............ 오늘은 재미난 일만 있는 줄 알었는데, 역시 하늘님은 지나치게 공평해. 재미난 일 10개 주면 꼭 재미 더럽게 없는 거 10개도 덤으로 주더라. 안그래도 되는데.... "이런데서 만날 줄은 또 몰랐네." "하하하― 욘나 돌새끼가 말도 하고 지랄이네." "입 험한 거 여전하군. 여자가 얼굴이 안되면 성격이라도 좋아야지, 넌 뭐냐? 이도저도 아니고." "아가리 묵념. 너한테 그딴 소리들을만큼 궁하지 않거든요, 제가."" 웃고있는 얼굴이 달달 떨린다. 이러면 폼 심하게 구기는데... 애써 표정을 정리한 나는 비웃음이 가득한.경멸과 환멸, 마치 시궁창 쥐를 보는 것 같이 더러움으로 찌들어있는 녀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거 이쑤시개 친구다. 김윤서 심장의 이쑤시개 친구. 김윤서 잘 뛰는 심장 콕콕 찔러대는 나쁜 이쑤시개 떠올리게 만드는 이쑤시개 친구 새끼.... 망할. 제대로 망할이다, 이 거. "후. 인천에 있는 줄 알었는데, 부산까지 왠 행차셔?" ".....할려고." "뭐?" "복수할려고. 내 친구, 철저하게 망가트린 칠공주. 아니, 이제 레인보우라고 불러야하나? 아무튼 잘난빠진 김윤서 친구들한테 복수할려고. 평생을 너만 바라본 새끼한테 상처만 준 너, 김윤서. 그 새끼랑 똑같이 죽여버릴라고. 그럴라고 쫓아왔어. 인천에서 이 먼 부산까지, 직.접. 어때 영광이냐?" "푸하하―" 한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도 안되는 헛소리를 지껄여 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저 발뒤꿈치서부터 웃음폭탄이 밀려온다. 벽을 붙여잡고 한참을 킥킥대던 나는 녀석을 향해. 평생 내 심장에 이쑤시개가 되어 꽂혀있을 그 아이의 둘도, 셋도 넷도 없는 친구녀석을 향해. 칠공주, 이제는 레인보우가 된 우리한테 복수하기 위해 쫓아왔다는.. 멍청한 돌새끼, 화강안을 향해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넌 딱 웃찾사야. 김윤서 웃음을 찾아주는 사람. 낄낄..하여간 욘나게 웃긴대니깐." 1-6. 보라둥이의 전설 "너란 여자. 참 재수 없다." "저도 너란 남자, 참 재수가 없어 뒈지거든요. 아주 오질나게 재수가 없어 미치겠거든요? 그니까 그만 좀 꺼져 주실래요? 촛불이 아닌 건 알지만, 그래도 제발. 눈 앞에서 뽕.하고 꺼져주시면 감사할랍니다." 이제 슬슬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0.246초라도 얼굴 마주보고 있으면 주먹이 먼저 나갈 것 같은 사람 1순위를 이렇게 오랫동안 보고 있다간... 정말 콩박 먹으러, 큰 집에 들어가야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후아후아. 쉼호흡을 한 대여섯번 하고서 고개를 돌리자 언제봐도 짜증스러운 화강안의 얼굴이 단박에 보인다. 얼굴 하나는 기깔나게 생긴 주제에, 성격은 어쩜 그렇게 더러울까. 신기해. 신기해 죽겠어, 응? "작작하고 그만 꺼져, 화강안. 김윤서 정말 돌아버리는 꼴 보고싶지 않으면 꺼지라고. 응? 나 진짜 화난다야. 너무너무 화나서 미치기 일보직전이다야. 응?" "그 새낀... 그 새낀 아직도 눈을 못 뜨는데... 병신같이 누워만 있는데... 너는 뭐가 그렇게 즐거워서 쪼개냐? 한가람, 그 새끼는 아직도 눈을 못뜨는데!!! 너란 년은 뭐가 좋아서 그렇게 실실 쪼개냐고!!!"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벽을 내리치는 화강암새끼. 돌새끼, 세계 최고 왕또라이 돌새끼... 끈임없이 화강안을 욕하면서 참으려고 했는데, 이 놈의 심장이 발광주사라도 맞았는지 주체할 수 없이 떨려온다. 온 몸이 떨려온다. 화강안의 그 한마디에.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한다는.... 그 한 마디에.. 순식간에 떠오른 1년 전 영상과 함께 내 안에 무언가 툭―하고 끊어졌다. 1년 전 그 날부터 꽁꽁 나를 묶어 두었던 그 무언가가 툭하고... "킬킬... 너 내가 지금 즐거워 보인다 그랬어? 그 새끼, 아직도 누워있는데 난 뭐가 즐거워서 처웃고 있냐 그랬어, 지금? 욘나게 웃긴다, 그거. 졸지에 멀쩡한 사람 완전 그지깽깽이로 모는 거, 그 것도 재주라면 재주야. 그치?" "너..." "니가 홀딱 벗고 내 마음에 들어와보지 이상, 알 수도 없는 거. 너 참 잘 안다는 듯이 말한다? 이햐― 그거 완전 신기한 일이네?" "닥쳐." "이제부터다? 김윤서 눈에 이제 뵈는 거 없는 거, 그거 이제부터다?" 낄낄낄.. 한바탕 간드러지게 웃어재낀 나는 여전히 굳은 표정으로 서있는 화강안에게 달려들었다. 정강이를 힘껏 걷어차 주저앉게 만든 다음, 굴러다니는 각목으로 녀석의 어깨를 내리쳤다. 발로 까고, 주먹질 해대고, 각목으로 후려치고.... 아무말 없이. 아무런 저항없이 맞고만 있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울화통이 터진다. 화가 나 견딜 수가 없다. 그지깽깽이 맞는데. 화강안 말대로 김윤서, 그지깽깽이... 맞는데... 씨발. 씨발이다, 정말 씨발... "김윤서!!!!" 얼마동안 그러고 있었을까. 피투성이가 된 녀석을 얼마나 짓뭉개고, 밟고 있었을까. 낯익은 목소리가 날아와 내 귀로 파고들었다. "가람아? 히히.. 가람이, 너 여기까지 어떻게 왔어?" "나 선우권이야, 그리고 너 지금 여기서 뭐해? 걔.. 화강안 아냐?" 가람이가.. 웃는 거 죽이게 예뻐주는 가람이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온다. 그리고 내 발 밑에 깔린 화강안을 뒤에 서있던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온다. 안 본새 키가 한뼘은 더 큰 가람이다. 안 본새 눈이 더 검어진 가람이다. 아직까지도 눈을 못뜬다던 그 가람이다.... "너... 괜찮냐?" "가람아.... 나 너무 아프다? 너때문에 나 너무 아파. 한가람 이쑤시개가 나를 너무 찔러서... 그래서 나 너무 아파. 근데도 나 아프지 않을꺼다? 나보다 너가 훠배 더 아프니깐은... 나 아프지 않을꺼다? 장하지. 착하지, 나? 그러니까 이쁘다, 우리 윤서 참 착하다 머리 쓰다듬어주라. 참 잘했어요, 도장도 찍어주구.. 이쁘다구.. 착하다구..." "후우. 나 선우권이다, 제화공고 선우권! 너 지금 누구보고 말하는 거야?" ............. 선우권이란다. 내 앞에 있는 가람이가 자기는 선우권이란다. "나 언제쯤 너한테 가니.. 히흐히하하.... 나 언제쯤.... 뒈져버리니....." 코 끝이 뜨거워진다. 눈시울이 마구 붉어지기 시작했다. 울지 않기 위해서 억지로 웃었다. 얼굴에 있는 근육이란 근육은 죄다 입가로 모아서, 눈따위에 신경 못쓰게 웃었다. 그랬더니..... 자기는 선우권이라고 말한 가람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내 손을 잡는다. "그거 뭐냐? 표정 존나 구리다. 차라리 울어라." ".....가람아 미안해. 너보다 하늘을 원해서 미안해. 너보다 김한영 더 미워해서 미안해. 너보다 내 주먹을 좋아해서 미안해. 너보다...... 괜찮아서 정말 죽을만큼 미안해...." 한참동안이나 주절거리는 날 바라보던 가람이가 갑자기 내 손 위로 무언갈 올려놓는다. 차가운 아크릴판 감촉이 느껴지고, 가람인 내게 한마디를 남긴채. 내 뒤에 쓰러져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선우권이야, 나´ ........................ ....... "씨바라. 눈 똑바로 못 뜨고 다니나?!!" 이리 비틀,저리 비틀. 미친 여자처럼 정처없이 시내를 걷고 있는데 제화고 교복을 입은 남자아이 셋이 험악하게 눈을 부라리며 시비를 걸어온다. 기분 안좋은데, 나... 지금 최악으로 안 좋은데, 나..... "....너도 뒈질래??..." "뭐라카노? 이 가시나가 미칬나?" "건들지 말지, 그랬어. 김윤서 기분 조빵 안좋아주시는데, 건들지 말지 그랬어. ....김윤서 기분 더러울 때 걸리면 개아작나는데..." "야가 지금 뭐카라는 기― 악!!!" 지들끼리 히히덕거리며 떠들던 아이들 중 가장 키가 작은 녀석의 어깨를 후려쳤다. 팔꿈치를 들어 안면도 강하게 찍어주고, 가랑이 사이도 걷어차줬다. 금방 비명소릴 지르며 거시기를 움켜쥐는 새끼들. "이 가시나가 정말!!!" "윤서야!!" 방금 거시기를 얻어맞은 녀석이 빨개진 얼굴로 손을 치켜들 때. 바나나우유를 쪽쪽 빨고 있는 이연이가 폴짝거리며 내쪽으로 뛰어왔다. 부산스럽게 손을 흔들며 반가워하던 이연이는 미친 여자, 김윤서과 제화고 아이들읠 번갈아 보더니 이내 먹던 바나나 우유를 내게 건네주고 베시시 웃었다. "얘네가 우리 윤서 기분 조지게 했구나? 헤헤. 요런건 이연이한테 맡겨!! 윤서는 쪼기서 이연이 바나나 우유 지키면서 앉어있구." 날 억지로 분수대 의자에 앉힌 이연이가 작은 팔을 휘두르며 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 아무것도 생각이 안난다. 오징어새끼 한 5721마리가 달려와서 먹물을 쏴댄거처럼 머릿속이 온통 먹통이다. ....... 너무 깊숙히 박혀서 빠질 생각을 않는 이쑤시개를 화강안,그 돌새끼가 더 쑤셔놨다. 인제 조금씩 묻어가고 있는 이쑤시개를 그 돌새끼가 더 쑤셔놨다. ....다음에 만나면 가만두지 않을테다. 제주도 한라산에 아주 콱 쳐박아버릴테다.... "내가 재미난 얘기 하나 해줄까?" "으윽­ " 반쯤 정신을 잃은 아이들 앞에 쪼그려 앉은 이연이의 뒷모습이 어렴풋이나마 보인다. 그리고 희미하지만 톡톡 튀는 이연이의 목소리도 들려온다. "옛날에 인천이란 곳에 칠공주라는 애들이 있었다? 근데 어느 날, 그 칠공주한테 어떤 겁대가리 상실한 새끼들이 막 시비를 걸어온 거야. 너네랑 살짝 비슷하지? 그니까 더 귀 쫑긋 세우고 들어야 돼. 이건 너네들 얘기이기도 하니까. 할튼! 칠공주 중에서 싸움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는 둥이가 세 명이 있었는데, 새끼들이 막 시비를 걸어오니깐. 열받은 뽀둥이가 먼저 나섰어. 근데 그 뽀둥이가 소문이 좀 심하게 안좋았거든? 별명이 막 미친개였는데, 아무나 물어뜯고 지랄해가지구 붙은 별명이였다? 그래가지고 새끼들이 기겁을 하면서 다른 애부터 나오라는 거야. 간댕이가 처 부었지? 아무튼 걔네가 자꾸 그러니까 맘씨 존나 좋은 나나둥이가 나왔어. 그랬더니 새끼들이 아까보다 더 기겁을 하면서 차라리 보라둥이보고 나오라는 거야!!" .......... 언제적얘기를 하는건지... 슬며시 눈을 감고 듣기 좋은 목소리로 옛날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연이에게 귀를 귀울였다. "그 새끼들 존나 무식하지? 사실은 보라둥이가 젤로 무서운 년인데, 그런 보라둥이를 나오라니 말이야. 와하하하하. 너내 왜 보라둥이가 제일 무서운 년인지 궁금하지? 까지껏 맘씨 좋은 이연이가 알려주께. 우선 뽀둥이는 그냥 심심해서 싸움을 하는 애거든? 너무 심심하고, 지루하고 또 따분해 죽겠으니까 싸움을 하는 거야. 싸움을 하면 뭐랄까. 쫌 기분이 풀리고 그런가봐. 그래서 지 기분 내킬 때마다 싸우고, 풀고 막 그래. 평소에 만날 시비 걸고, 지랄 하고 그러니까 미친개인거야. 왈왈왈. 미친개 알지? 눈깔 뒤집혀서, 혓바닥 헥헥 거리고 그런 개새끼! 히히히. 그래도 얜 광견병 주사도 잘 맞고 그래서 선이 있어. 싸움을 하면서도 절대 그 선을 넘는 적이 없는 거지. 살려달라고 빌빌거리면 병신, 이러고. 잘못했다고 엎드리면 또 병신, 이러고. 그냥 보내줘. 왜냐면! 미친개는 교육을 잘 받았거든! 게다가 이미 싸울 의지도, 능력도 없는 새끼들 붙잡고 있는 게 더 스트레스라는 걸 잘 아니깐!! 그래서 뽀둥이랑 싸우는 게 그 중 제일 나아. 뽀둥이는 적어도 상대를 죽이지는 않거든! 그러니까 너희도 다음부터 뽀둥이 만나면 뽀둥이하고 싸워. 차라리 몇 군데 부러지고 마는 게, 죽는 것보단 훨씬 좋잖아? 다음은 나나둥이! 나나둥이는 폭탄이라서 싸우는 애야. 평소엔 싸움도 안하고, 가만히 있다가두 열받을 때만. 하두 열받아서 미치겠을 때만 싸우는 애거든? 그래서 나나둥이는 한 번 터지면 끝장나게 싸워. 얼마나 무서운데! 평소에 쌓아뒀던 걸 터트리는 거라 더 무서워! 으왕. 게다가 나나둥이는 싸우는 것도 지저분해서, 할퀴고 상판 긋고 그래. 나중에 휴우증이 크다고! 그래서 나나둥이가 뽀둥이보다 훨씬 위험한거지롱!! 근데 나나둥이는 대장님이나 보라둥이가 바나나 사줄게, 애기야 가자! 이러잖아? 그럼 딱 멈춰. 으히. 그래서 나나둥이가 두번째로 나은 거야. 만약 뽀둥이하고 나나둥이하고 둘이 만나면. 그러면 무조건 뽀둥이하고 싸운다그래! 나나둥인 일부로 시비걸고 막 안그러거든. 자자. 너희들도 이제 뽀둥이랑 싸우겠다고 약속. 도장 쾅쾅!" 주절주절 이야기를 하던 이연이의 목소리가 그 뒤로 조금씩.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다. 이젠 거의 속삭임 수준으로 이야길 하는 이연이. 귀를 더 곤두세워 이연이의 이야길 들으려다 몰려오는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내 잠이 들어버렸다. 쿨쿨...Zz...... 파란 하늘 아래서 누워있는 내가 보인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얘기를 하고 있는 이연이 노란 뒤통수도 보인다. "....-이는 말야. 죽을려고 싸우는 애거든. 죽지 못해서 겨우겨우 사는 애거든. 한 번 죽어볼라고 싸우는 애거든. 하늘밖에 눈에 뵈는 것도 없고, 최고인 지네 오빠 죽일라고 겨우겨우 버티는 애거든!!... 그래서. 그래서 얘가 제일 무서운 거야. 이래도 모른다구? 퓌휴으. 너희 정말 눈치가 없구나. 기니까 인제 이연이 말 귓구멍 확 열고 잘 들어? 이제부터가 진짜야, 진짜! 보라둥이의 전설!! 보라둥이는 죽을라고 싸우는 애라서, 한 번 시작하면 사소한 싸움이건. 큰 싸움이건 절대로 멈추는 거 없어. 정지, 스톱! 이런 걸 몰라. 선도 없고, 말리지도 못해. 보라둥이는... 결국 지 죽을라고 싸우다 상대편 먼저 죽게 만든단 말야. 제발 살려달라고 빌어도, 잘못했다고 울어도 절대 안 멈춰. 누군가 죽을 때까지! 숨통 끊어놓기 전엔 절대로... 그러니깐!! 이연이가 할라는 말은!!... 보라둥이는 제일 피하고,멀리해야 된다는 거지! 시내에서 또 보라둥이 만나면 무조건 튀라는! 고런 말씀이야. 보라둥이 옛날 별명이 뭐였는 줄 알어? 바로 일단튀어야,일단튀어. 얼굴만 보면 무조건 튀라고 해서.. 흐..불쌍한 별명이지? 아무튼! 이제 좀 알아 들었어? 뭐? 보라둥이가 누군지 모른다고?!! 아요, 이 빙시들 진짜! 이연이 막 화나게 만든다아? 쟤잖아, 보라둥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이연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김윤서를 가르키고 있었다. 열통이 터진 건지, 아니면 신이나서 그런건지 발로 바닥을 꽝꽝 치면서 소리치는 이연. "쩌기!! 하늘 보고 있는 정신 나간, 저거!!! 죽기 위해서 사는 저거!! ........ 저거 김윤서. 저거가 바로 보라둥이야." 1-7. 위기 ............. ........ ※3일 후 "아이고 두야. 정리아, 고 가시네때문에 잠도 못자고. 후아. 지랄 한 두번만 떨다간 세상 하직하겠어, 아주." 쾅쾅 울리는 머리를 지끈지끈.눌러주며 교실로 올라가는 길. 저번 시내에서 좀 크다 싶은 사고 하나를 친 뒤로, 학교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와선 인도네시아에 팔아버리겠다며 발악의 최고봉을 떨어대는 정리아때문에 수면부족 현상에 시달린지도 벌써 3일하고도 꼬박 8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그동안 잠을 못자 몸 안에 차곡차곡 쌓인 피로들이 이젠 아주 만리장성을 이뤘다. 정말이지 이렇게 살다간 인간 하나 베리겠다는 생각이 내 머리를 강렬하게 뒤흔든다. "이대로 살다간 죽지, 죽어. 아무래도 빨리 방법을 생각해 내야겠-" "윤서야!!" 어떤 방법으로 리아를 꼬득여야 하나 머리를 굴리며 교실문을 향해 손을 뻗는데, 갑자기 열린 문 사이로 달리가 튀어 나왔다.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교실문을 열려고 하는 날 막아선 달리가 다짜고짜 손을 잡아끌고 학교 뒤편으로 향한다. 얘가 아침부터 또 왜 이런다냐. "숨찬다, 야. 무슨 일 있냐?" "큰 일났어!!" "큰일났으면 화장실 가면 되지, 왜 날 끌고 와?" 다급해하는 달리의 물음에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눈썹을 긁적이자 사색이 된 달리가 내 앞으로 왠 종이를 하나 내민다. 도대체 이 종이가 뭐길래 왠만한 일에도 눈하나 깜짝 안하는 달리가 이러나.하고 종이를 찬찬히 훑어보는데... 종이안의 내용을 확인하는 내 눈동자가 금방이라도 굴러떨어질 것처럼 커졌다, 이내 가늘게 휘어졌다. "이거 욘나 재밌네? 누가 썼냐, 이거?" "그럴 거 따질 시간이 없어, 윤서야! 지금 선생들이랑 이년들 부모님들이 교실로 쳐들어와서 너 기다리고 있어, 어떡해?! 응?" "뭐 어떻게 하긴. 몸소 교실까지 행차하셔서 기다려주신다는데, 기꺼이 만나드려야 예의지." 싱글싱글 웃으며 몸을 돌리는 날 달리가 급하게 돌려세운다. 달리는 눈물이 가득 찬 눈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하여간 이름값 한다고, 괜한일에 참 유난 떠는 유달리. "너... 너 사고쳐서 여기 온 거라며. 근데 이렇게 또 사고친 거 걸리면, 너.. 너!" "장사 한두번 하냐. 끄덕없다, 언니." "정말 선생들 눈치가 장난 아녔어!! 돼지같이 생긴 아줌마가 너 깜빵에 처넣는다고 소리 지르고... 너 그냥 도망가라, 응? 윤서야, 나 너 소년원 가는 거 싫어." "혼자서 아주 소설을 쓰지, 소설을 써?" 아라처럼 바들바들 떨며 애처롭게 말하는 달리에게 씩.웃어주고는 녀석의 마빡에 꿀밤을 먹여줬다. ........ 김윤서 인생 아주 스펙타클 인생이야, 스펙타클. 김윤서를 깜빵에 처넣겠다고 고래고래.소리 지르는 돼지 아줌마를 만나기 위해 몸을 돌리는데, 달리가 소매를 붙잡는다. "윤서야!" "너가 정 그러면 부탁 하나만 하자. 학교 끝나고 미르공원 근처 공사장에 우리학교 1학년 애들 몇 잡아다놔. 김벼리하고, 선우하니였던가. 하여튼 칠성하고 관련된 애들이래니까 알아서 잘. 부탁한다." 김윤서를 위해 뭔가 해주고 싶어하는 달리에게 힘들지도 모르는 부탁을 하나, 던져놓고 교실로 향했다. 아라나, 연오를 통해서 해도 되는 부탁이였지만 달리는. 그래도 꼴에 친구라고 부산에서 지낼 동안 김윤서 옆에 붙어있던 맘씨 좋은 아이니깐. .......... 아깐 리아 생각으로 경황이 없어 몰랐는데, 학교 곳곳에는 아까 달리가 보여줬던 종이들이 덕지덕집 붙어 있었다. 복도 창문을 메우고 있는 종이를 거칠게 뜯어내며 이를 악물었다. [제화예고 2학년,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김윤서를 고발한다!!] 입학 이래, 단 한번도 학교 톱을 놓치지 않던 모범생 김윤서는 사실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였다. ………뒤에선 학교 후배를 이유없이 구타하는 등, 폭력을 일삼으며 학교의 무법자로…… …3일 전에도 김윤서에게 폭행당한 같은 학교 후배들은 전치 6주의 판단을 받고 병원에서 치료중이다. 선생들 앞에선 온갖 알랑방구를 뀌며 이런 모습을 감춰온 김윤서를 고발한다!! 사진까지 첨부된 종이들을 짓밟던 나는 이내 긴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아무래도 계집애들이 머리를 좀 썻나보다. 난데없이 나타난 화강안때문에 미처 연오에게 수습을 맡기지 못한 것이 이렇게 크게 돌아올 줄이야. 갓뎀. 평탄한 부산에서의 생활에 드디어 위기가 온 건가? 이거 정리아 귀에 들어가면 인도네시아가 아니라, 알래스카로 가서 북극곰 사냥이라도 해와야 되겠는걸. ................... ※2-F "이 많은 분들이 김윤서, 하나를 기다리고 계셨다니. 영광이예요. 미리 알았다면 조금 더 일찍 올 걸 그랬네요." "느가 김윤서고?!" "예. 뚱뚱한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교실문을 열자마자 내게로 날아온 두툼한 손바닥 하나. 얼얼해진 뺨을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날 노려보는 아줌마가 보였다. 썰면 5134접시는 넉넉히 나올 듯한 턱살이나, 목살을 보니 딱 감이 왔다. 뚱뚱돼지의 마덜. "따님분하고 달리 손이 꽤 고추시네요. 이정도면 청양은 가볍게 넘고, 하바네로 정도 되겠는데요." "너때문에 우리 벼리가, 우리 벼리가!!! 지금 병원에 누워있다 아이가! 앙? 이 일을 어찌할꺼고?!! 어찌할꺼고!!!" "이야. 목소리 한 번 되게 크시네. 기차 화통을 통째로 구워드셨나. 아무리 배가 고프셔도 그렇지, 그걸 다 드시면 어떡합니까." "김윤서! 어른들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귓구멍이 따가울 정도로 소리 지르는 아줌마 때문에 새끼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고 있는데,오늘도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은 김윤서 담당. 맨인블랙 선생이 매우 화가나신 얼굴로 걸어온다.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닥였다. 한동안 안보이길래 인천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사고 칠 때를 노리고 기다린 거였네. 앙큼도 하셔라. "잘 있었는가, 독고선생? 난 또 한동안 안보이길 인천으로 간 줄 알았는데 안즉도 붙어있었네?" "김윤서!" "이름 닳겠다, 왜 자꾸 불러?" "하! 이런 아를 학생으로 받아들었습니까, 선상님들?!!" 깐죽거리는 내 말투가 거슬렸는지 두툼한 목살에 어울리지도 않는 진주목걸이를 끼고 있는 아줌마가 저 멀리 앉아있는 학주에게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난장판이 되버린 교실에서 맨인블랙 선생의 차가운 눈빛과, 장난끼가 가득 담긴 김윤서의 눈빛이 마주쳤다. "큰 건수 하나 잡아서 좋겠어, 독고선생?" "사고치지 않고 조용히 지내는 줄 알았는데, 뒤에서 그런 짓이나 하고 있을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다." "엉, 어쩌다보니까 그렇게 됐네." "네 처리에 대한 결과에 나올때까지 학생부실에서 반성문 쓰고 있어." "글쓰는 건 영 내 취향이 아닌데. 반성문 말고 반성그림 그리고 있으면 안되나? 내가 이래봐도 명색에 그림 그리는 학생인데 말야." 빙그레 웃으며 묻는 날 한참동안이나 노려보던 맨인블랙은 알아서 하라며 어서 나가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까닥.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와 학생부실로 향했다. 여기서 일 더 커지면 재미없어 지는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학생부실에 도착한 나는 다 낡아빠진 의자에 걸터앉아 눈을 감았다. "아깐 지나쳤지, 김윤서? 효선이가 학교에선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착실한 모범생이 되라고 했는데.. 에이씨, 대가리에 기름칠이라도 해놔야 겠다." 자꾸만 떠오르는 안 좋은 기억에 고개를 내저으며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었다. 우울한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 피곤하다. 1-8. 대마왕 출동 "하루라도 사고를 안치면 엉덩이에 종기라도 돋지, 넌?" "대마왕 왔는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바로 달려온건지 아직도 교복차림인 리아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학생부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해가 지는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하고 있던 나는 리아의 등장에 베시시 미소를 지어 보이며 경례를 했다. 그런 내 모습에 기가 찬 듯 웃으며 길게 뻗은 검지 손가락으로 김윤서의 마빡을 꾹꾹 누르는 대마왕.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단 속담은 다 그짓부렁이다. 암, 그렇고 말고. "정말 너처럼 속편한 애도 없을거야, 응? 수백만원 깨질 사고를 쳐놓고도 웃는 앤 너밖에 없어, 김윤서." "내 속이 좀 편하긴 해." "뭔가 대책이 있으니깐 이따위 사고를 쳐놓고도 계속 실실 쪼개는 거겠지?" 리아의 말에 난 심드렁하게 어깨를 으쓱여주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니 핸드폰이 이번 사고를 수습할만큼 큰 가치가 있을거라곤 생각이 안되는데?" "핸드폰에 있는 녹음폴더 통째로 복사해서 선생들한테 뿌려. 돈봉투 없이도 쉽게 끝날 거다. 그리고 이번 일은 억울함이 하늘을 찌릅니다, 대마왕님. 엉? 솔직히 나 싫다고 덤빈 새끼들 아작낸게 왜 잘못이야. 난 억울하다구. 정당방위가 지도 억울하다고, 울잖어." "주둥이만 살았지, 주둥이만." 울상을 지으며, 눈썹을 찡그리자 리아가 한심스러운 눈길을 마구마구 쏴대며 책상 위의 핸드폰을 가방 속에 챙겨 넣었다. 핸드폰이 무사히 리아의 가방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나는 6시를 알리는 시계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쭉.폈다. 이쯤되면 달리가 잘 데려다 놨겠지? "또 어딜 튈려고?" "내가 튀김이냐, 튀긴 뭘 튀어. 그냥 이번에 감히 김윤서 뒷통수를 후려쳐주신 겁대가리 없는 가시네들 몇 손 좀 봐주고 올거야." "안돼!! 너 아주 스트레이트로 사고 치겠단 거야, 지금?" 리아는 펄쩍 뛰며 내 손목을 비틀었다. 난 인상을 벅벅 쓰며 아프게 내 손목을 꺽어잡은 리아의 손을 털어냈다. 얜 다른데는 다 약한데도 손 힘 하나는 기가막히단 말야. 신기해요, 하여간. "대마왕, 제발 좀 손목 꺾지마. 그러다 손목 애자되면 너가 책임질 거야?" "책임이고 뭐고. 허튼생각 하지마." "미안하지만 허튼생각 이미 하고 있는데? 교무실에 가서 머리 싸매고 있는 선생들이나 처리해줘. 그럼 나 간다." 다시 리아의 손에 잡힐세랴, 후다닥 인사를 마친 나는 잽싸게 선도부실을 뛰쳐 나왔다.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리아를 뒤로하고, 오늘의 이 시끄러운 일들을 만든 가시네들을 응징하기 위해 공사장으로 향했다. ................ ......... "여어. 미리 와있었네?" "...우, 우릴 부른 게..." 칙칙하고 눅눅한 습기로 가득찬 공사장 안. 미리 공사장에 와 있던 뚱뚱돼지와 짝퉁 성유리는 김윤서의 등장에 단박에 표정을 구기며,눈알이 빠지도록 날 노려보기 시작했다. 하여간 우리 달리가 사람 부탁은 기가막히게 잘 들어준대니깐. "내가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렇게 노려봐서 레이져빔이 나오겠어? 적어도 우리 대마왕정도는 되야지." "우, 우릴 불러낼 여유도 있고. 생각보가 개안나 보네." "그르게. 이 언니가 좀 괜찮네." "....마, 말도 까나?" "그럼 말을 까지, 마늘을 까겠어. 내가?" 빙글빙글 웃으면서 농담따먹기를 즐기는 나와는 달리, 뚱뚱돼지와 짝퉁 성유리는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바들바들 떨어댔다. 그러니꼔 고작 요런 일로 겁먹을 거였으면 일을 그따위로 벌여놓지 말았어야지. 엉? 자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구겨넣으며, 앙증맞은 핑크색 병원복을 입고 있는 두 아가씨에게 다가갔다. "내가 오늘 학교서 아주 재미난 걸 봤거든? 진짜 배꼽 빠지게 재미나더라? 근데 그 거 얼마 들었어? 그거 욘나게 궁금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거든." "도, 도... 도대체 무슨 말을―!" "나 동치미는 되게 좋아하는데 시치미는 되게 싫어하는 사람이거든? 오늘 제화예고에 터진 폭탄. 그거 뿌리는데 얼마 들었냐고 나 물었어. 빨리 대답하는게 목숨 유지 하는데 좋을건데.." 손을 뻗어 짝퉁 성유리의 기다란 머리카락을 베베 꼬아대며 묻자, 핏기가 싹 가진 얼굴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짝퉁 성유리. 김윤서 뒷통수 한 번 제대로 후리시길래 쫌 두둑한 개깡소녀인줄 알았는데, 이 아가씨 겁 되게 많네. 여기서 더 무섭게 나가다간 오줌이라도 쌀까 두려워 아까보다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사근사근하게 입을 열었다. "좋아, 내가 한 542보쯤 양보할게. 원래는 내가 열이 기가 막히게 뻗어가지고 너네 지옥물에 반쯤 담궈줄라 했는데.. 그래. 오늘 내가 시달린만큼만, 딱 그만큼만 한 번 끝내자. 엉? 좋지?" "시, 싫다, 아이가!!" "...짝퉁 성유리, 아니. 너, 너 이름 뭐냐?" "서, 선우하니!!! 야 이름 선우하니입니더!!" 역시. 미친개 길들이는데는 몽둥이가 최고라더니. 한 번 먼지나게 맞으니깐 하늘을 찌를 것 같던 콧대가 한층 누그러진 뚱뚱돼지가 죽어도 말 안하겠단 표정으로 서 있는 짝퉁 성유리를 대신해 대답했다. 내심 그 모습에 뿌듯해 하기도 잠시.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깨달은 난 조그맣게 흥얼거리며 짝퉁 성유리, 아니 이름 하난 죽이게 예쁜 선우하니의 앞에 다가섰다. "선우하니양. 난 내 친구 은지니보다 싫어하는 게 별로 많지 않은 사람이거든? 근데 하니양 만나고나서 갑자기 싫어하는 게 많아졌다? 아, 많아진 게 아니라 잊고 있던게 떠올랐다랄까..." "그, 그기 무신..." "아. 그러니깐은 말이지. 선우하니양은 내가 세상에서 제일로 떠올리기 싫어하는 일들만 자꾸 기억나게 한단 말이야. 이번일도 그래. 난 모르고 살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군데군데 피어있는 멍만 빼면 정말 나무랄데 없이 곱고,예쁜 선우하니의 얼굴 위로 기억하기 싫어 꽁꽁 감춰놨던 얼굴이 한 개 떠오른다. 기억하기 싫어서.. 생각할 때마다 내 심장을 콕콕 쑤셔놔서... 일부러 감춰뒀던 얼굴이 한 개 떠오른다. ...... "선우하니야. 선우권인가? 암튼 제화공고 다니는 애랑 남매 맞지? 맞을거야. 김윤서가 그런 거 하난 죽이게 맞추거든." "우리 오빨 어떻게 아나?!!" "...남매라 그런가? 참 닮았네. 니네 오래비 되는 사람보단 좀 덜 닮긴 했는데.. 하니양도 참 많이 닮었어. 김윤서 뒷통수 후려칠 때 그 녀석 눈동자하고... 좀 심하게 많이 닮았어." 딱 이 눈이였는데. 그 녀석 내 뒷통수 후려칠 때. 김윤서 심장 속에 이쑤시개 되서 꽉 박힐 때... 딱 이런 눈이였는데. "....봐. 선우하니양 내가 기억하기 싫은 거 또 한 개 떠오르게 했어." 시야를 가득 메운 녀석의 눈동자, 아니 선우하니의 눈동자를 밀어내고 빙그레 웃었다. 끝난 일. 왠만하면 기억 안할 일. 그냥 집어넣자, 김윤서. 구질구질하게 자꾸 꺼내서 심장 쑤시지 말고 그만 집어 넣자. "근데 좀 짜증난다." 작은 중얼거림에 앞에 서있던 선우하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그리고 그런 선우하니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선우하니의 머리통을 잡고 시멘트 가루가 폴폴.날리는 벽으로 돌진했다. 쿵― 조용한 공사장 안에 묵직한 마찰음이 울리고.... "....그렇게 쳐다보지마. 나 짜증나고 화나. 그 녀석, 인천, 망할 김한영 새끼, 돌새끼 다 떠올라서 나 돌아버리겠어. 그러니깐 그렇게 쳐다보지마. .....흔들리게 쳐다보지말라구." 1-9. 닮은 사람 ................ .......... ※ ".....그만하고 싶다. 나 죽고 싶다고, 남 죽게 하는 짓. 인제 좀 그만하고 싶다, 하늘님..." 개미새끼가 빨빨 기어다니는 소리조차 크게 울릴정도로 고요한 공사장 안에 웬 미친여자 한 명이 누워있었다. 1년 전 그 날처럼 텅 빈 얼굴을 하고서, 바보같이 실실 쪼개면서 누워 있었다. 마빡에 빨간 피딱지들을 덕지덕지 붙여놓은 여자애 두명 위에 미친 여자 한 명이 그렇게. 누워 있었다. ....... 아, 완전 미친년... "하니양, 듣고있어요? 나 하니양한테 욘나게 미안해. .....나도 이제 한곈가봐. 뻑하면 지랄하는 거 보니깐. 욘나욘나게 미안미안해. 깔끔하게 한대만 맞고 끝내자고 그래놓구선 결국 이렇게 만들어놔서... 미안... 후아..."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피로 얼룩진 콘크리트벽과 두 아녀자들 번갈아 바라봤다. 터져나오는 한숨을 겨우 억누르고. 간질거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선우하니 앞에 쪼그려 앉았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아님 쇼하는 건지 눈만 꾹 감고 있는 선우하니를 멍청히 바라보던 나는 이내 고개를 휘휘 내젓고는 손을 들어 선우하니의 병원복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손에 잡히는 선우하니의 핸드폰. 얼굴에서부터 귀티가 잘잘 흐르더니, 정말 부잣집 딸내미라도 되나보네? 그 비싸다던 가로본능을 가지고 있다니. "어디보자. 0번,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우리오빠? 하하. 골까네, 진짜.. 오빠가 그렇게나 좋을까." 누워있는 선우하니를 신기하게 쳐다보다, 핏기가 싹 가신 선우하니 얼굴에서 시간이 얼마 없음을 깨닫고는 이름 하나는 무지하게 긴 단축 0번을 길게 누르며 입맛을 다셨다. 이연이의 바나나 맛 사탕이던, 지니의 하얀 담배던 아무거나 입에 물고 싶은 느낌을 꾸역꾸역 참고 핸드폰을 귀에 가까이 갖다대자. 얼마안가 굵직하면서 남자다운. 거칠면서도 부드러운, 그 녀석. 제화공고 다닌다던 선우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도 목소리는 좀 틀리네. 비디오는 똑같아도 오디오가 다르니깐 그나마 좀 괜찮네. [어디야, 선우하니.] ["공사장"] [.....너 누구냐?] ["제화공고다니는 선우권을 세상에서 젤로 사랑하는 선우하니 학교 선배. 숨 꼴딱꼴딱 넘어가고 있는 선우하니 쥐어 팬 나쁜 년."] [뭐?] ["미르공원 근처 공사장인데 빨리 와. 안 그럼 니 동생 뒈진다??.."] [너 거기 꼼짝말고 있어.] 낮은 욕설과 함께 전화가 끊기고, 난 재미있는 선우권의 반응에 피식 웃으며 다시 선우하니의 주머니에 핸드폰을 쑤셔 넣었다. 부산연합의 짱이자, 칠성의 우두머리. 별명은 얼음왕자에, 웃는 거 보기가 하늘에 토끼따기 만큼이나 어려운 남자. 가급적 싸움을 피하며, 타인과의 접촉을 꺼려함. 음. 또 뭐가 있더라. 어제 아라가 선우권 정보에 대해서 기똥차게 뽑아왔는데... "따르릉♬ 따르릉― 비켜나세요. 미친여자 김윤서가 지나갑니다―.." 흥얼흥얼. 신나게 허벅지까지 튕겨가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거친 숨소리와 함께 공사장 안으로 웬 그림자가 하나 뛰어 들어왔다. 안봐도 DVD다. 꽤나, 아니 무지하게. 아니, 그 것도 아닌 허벌나게 빨라주시는 선우권에게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며 빙긋.미소를 지었다. "욘나 빠르게 왔다. 달리기대회 같은데 나가면 하니따윈 그냥 이기겠는데?" "...너....였냐?" "엉, 나였어. 그리고 니 동생 여기." 빙글거리며 바닥에 누워있는 선우하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내 말에 선우권은 그 자리에 멈춰서 숨을 몰아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꽤 폼이 나는 녀석의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데, 녀석의 입술 사이로 아까 전화 받았을 때와는 달리 투박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넌 안다쳤냐?" "뭐? 하하하. 선우권, 너 진짜 골깐다야. 니 동생을 걱정해야지,지금 남 걱정을 하게 생겼어?" "하니가 먼저 시비 걸었던 거, 다 알아." "...아니, 내가 걸었어. 오빠 믿고서 하두 나대길래 열받아서. 욘나게 열통이 터져서 내가 먼저 걸었어. 어쨌든 미안하게 됐네." 너무나 재미있는 반응을 보여주는 선우권에게 거하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을 지우고, 눈썹을 긁었다. 오늘따라 내 심장에 꽂힌 이쑤시개가 아주 격렬한 테크노댄스를 춘다. 싫다, 이런 거 정말이지 버터에 밥알갱이 묻혀 먹는 것 이상으로 싫다. ............... 옛날이 싫다. 옛날을 떠올리게 하는 얘네들이 싫다. 옛날 떠올렸다고 약해지는 김윤서가 싫다. 나는 욘나게 강한 김윤서일껀데.... 나는 하늘도 먹어버릴만큼 위대한 김윤서일껀데... 그 아이 하나에 무너지는 김윤서가 아닐껀데... "아이, 씨발. 기분 조졌어." "김윤서." "그래, 나는 김윤서야. 김윤서. 이유없이 실실 쪼개고, 심각한 거 한 개도 없는 그런 김윤서야. 그런 김윤서... 건들지 마. 아니. 건들지 말아주세요, 제발... 여기서 더 떠올리게 하지마. 여긴 부산이야. 인천이 아니라, 부산! 갈매기 끼륵끼륵 날라다니는 부산!! 부산.... 부산..."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줬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는 선우권 위로 자꾸만 그 아이의 얼굴이 겹쳐진다. 울고 싶어진다, 정말. 고작 닮은 거 뿐인데. 그 아이 자체도 아니고, 고작 닮은 거. 닮은 사람, 그 거 한개뿐인데. 어째서.... 이렇게 김윤서를 우울하게 만드는 걸까. "선우권" "어, 말해라." "니 동생이랑 너, 싸잡아서 김윤서 눈에 띄지마라. 시내에서건, 학교에서건, 어디서건! 김윤서 앞에 나타나지 좀 말아주라." "김윤서" 선우권은 어이가 없었는지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그래, 나 같아도 욘나 황당했을 거야. 얼마나 처 안다고 눈 앞에 띄지마라야? 암, 황당하고 어이 무지하게 없어주시겠지. 근데 지금은 내가 더 어의없고 황당하니깐. 울고 싶을정도로 화가나고 우울하니깐. 그러니깐..... "김윤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고, 애원이고, 소원이고, 바램이고, 그리고..... 명령이거든. 내 눈앞에 띄지마라, 선씨 남매." 1-10. 고백 "그게 무슨―" "내 눈에 띄지 말라구우!!" 퍼억.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온 선우권은 후끈거리는 손으로 내 어깰 잡어챘다. 그리고 난 어깨 위로 느껴지는 뜨거운 감촉에, 고개만 들면 바로 보이는 날 미치게 하는 얼굴에 펄떡펄떡 뛰는 심장을 주체 못하고 그만... 주먹을 날리고 말았다. 내게 얻어맞은 턱을 어루만지며 여전히 황당한 눈으로 날 내려다 보는 선우권. 곧이어 녀석의 입술 사이로 조금 무겁다싶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김윤서..." "그러니깐 내가 진작에 말했잖아, 내 앞에 띄지말라고. 아이씨.. 그래도 때린 건 미안." "김윤서" "미안해. 미안해요,미안합니다. 화내서... 때려서 미안." "내가 이름 물어본 거, 너가 처음이다." "뭐?" 그게 무슨 소리냐며 선우권을 향해 고개를 치켜드는데, 어느새 성큼. 코 앞으로 다시 다가온 녀석이 날 품 안에 꼭 안는다. 주먹을 쥐고 또 후려쳐줄까 하다, 사뭇 진지해 보이는 녀석의 모습에 그냥 입을 꾹 다물고 서있었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뭘. 원래 라스트는 좀 멋지게 장식을 해줘야 하는 거라잖어, 김윤서. 엉? 좀 참자. "내가 명찰 받은 것도 너가 처음이다." "그래서 뭐?" "하니 말고 편들어 준 사람도 너가 처음이고, 나 모른다고 한 것도 처음이고. 그리고.... 내 이름 내가 알려준 것도 너가 처음이다." 그래서 도대체 어쩌라고, 응? 당장이라도 선우권을 떼어내고 닥달하고 싶은 마음이 백두산 봉오리만큼 커졌지만, 아까부터 가볍게 뿌리칠 수만은 없는 답답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녀석때문에. 자꾸만 올라가려는 주먹을 꾹 말아 쥐고서 계속 떨떠름한 표정만 지어야만 했다. 쿵쾅쿵쾅. 얇은 옷 위로 녀석의 심장소리가 들려온다. 순간 찐득한 불길함이 내 몸을 덮쳐오고, 그 불길함은 곧 현실로 나타났다. "나랑 사귀는 것도 너가 처음이였음 한다. 나랑 사귀자, 김윤서." "골깐다, 너 진짜?" 결국 녀석의 가슴팍을 밀쳐내고, 픽 웃었다. 살짝 젖어 있는 선우권의 눈동자가 보이자 순간 마음이 철렁했지만, 이를 악물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리아처럼 사랑따윈 믿지 않는다는 현실주의자도, 연오처럼 가는 남자 안 막고, 오는 남자 안 막는 연애주의자도 아니였지만 이건 아니다. 그 애랑 닮았다고 해서. 이 아이가 지금 나때문에 조금이나마 아파한다고 해서. 불쌍해서, 미안해서, 그래서. 그래서 시작하는 안되는 거다.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건, 연오 하나면 족하다. "너 내가 아까 분명히 말했지? 앞으로 니 낯짝, 내 눈에 띄게 하지 말라고. 근데 뭐어? 사귀어?? 지금 개그하냐,너?" "김윤서, 나 장난치자는 거 아니다." "그건 내가 할 소리거든요?" "니가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는데, 나 너보고 첫눈에 갔다. 천하의 선우권이 김윤서보고 첫눈에 황갔다고." 지랄을 해라, 지랄을 해. 진지한 얼굴로 닭살이 오도독. 돋는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선우권을 말없이 바라보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딴 거 관심없어." "내가 관심있어." "나는!! 김윤서는. 선우권 얼굴만 봐도 미칠 것 같은 사람이야.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나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열통 터지는 얼굴이 김윤서한텐 바로 선우권. 니 얼굴이야. ....난 다 지울라고 내려온거지, 다 잊을라고 내려온거지! 묻어뒀던 거 다시 꺼낼라고 내려온 거 아니다." "김윤서.." 그렇게 보지마. 가람이랑, 그 애랑 똑같은 눈으로 보지마. 미안해서 뒈질 거 같은 느낌 들게, 그런 눈으로 보지마. "나 간다, 앞으로.... 정말 내 눈에 띄지마라." 숨 막히는 공기를 가르고 뭐라 중얼거리는 선우권을 뒤로 한 채, 먼저 공사장을 나왔다. 비가 오려는지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이 보였다. "오늘이 마지막. 정말 마지막, 쫑. 오늘 일로 김윤서 심장에 박혀있는 이쑤시개 뽑을 거다. 더이상 인천에 연연하지 않고, 욘나게 괜찮은 김윤서 될꺼다. .......이제 김윤서 흔들리게 하는 거, 애초에 키우지도. 만들지도 않을 거다." 손톱이 살에 박혀 시뻘건 피가 줄줄 흐를때까지 주먹을 꽉.쥐었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따끔거림을 느끼며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무쇠 팔, 무쇠 다리로 만든 마징가Z도 감히 넘볼 수도 없는 초강력 다이아몬드로 무장을 할 거라고. 그 어떤 거에도 흔들리지 않게 꿋꿋한 김윤서가 될 거라고. 다시는 이쑤시개 하나로 인천을 떠올리지 않을거라고. ................ ........ ※다음날 "선생님." 학교에 오자마자 교무실부터 들른 나는 아침부터 갈고 닦았던 초췌한 모습을 선보이며, 처량한 목소리로 학주를 불렀다. 책상 위에 가득 쌓여진 종이를 정리하던 학주가 놀란 눈으로 날 돌아본다. 흥 얼굴을 보아하니, 어제 리아가 벌써 한바탕 휩쓸고 갔군. 그래도 마지막 펀치를 날려줘야 뒷탈이 없지. "아가 와, 와이카노?" "정말 억울해요, 선생님. 저... 그럴 애 아니란 거 선생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전 벼리가 그렇게 절 싫어하는 줄 몰랐어요. 그냥... 그냥... 흐읍-" 아침에 생마늘을 까먹고 나온 효과가 드디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눈가에 주렁주렁 눈물 방울을 달고 애처롭게 학주를 바라봤다. 학주는 여전히 당황한 얼굴로 날 보고만 있었다. 보아하니 학주도 지금 엄청나게 고민을 하고 있어뵌다. 암, 고민도 그냥 고민이 아닐테지. 전학 이래 단 한 번도 전교 상위권을 놓친 적 없는 모범생 중에서도 아주 완벽한 모범생 행세를 한 김윤서를 학교 내 골칫거리들의 말만 듣고 혼내기에는 아주 그냥 아쉬워 돌아가실 지경이겠지. 이래서 평소에 선생들 눈을 잘 닦아둬야 된대니깐.. 난 거의 99.9%는 넘어온 학주의 눈을 바라보며 큰 맘먹고 무릎을 꿇었다. "이번에 학교에 큰 폐를 끼쳤다는 거 알아요. 아는데, 저 여기서 주저앉고 싶지 않아요.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다시는 문제 근처에도 얼씬하지 않고, 문제가 될 만한 거 손도 안댈게요. 이번에 열리는 시대회 나가서 상도 받아오고, 공부도 더 열심히 할게요. 용서해주세요, 선생님..." 아주 그냥.... 용을 쓴다, 용을 써. 김윤서. 이제 100% 완벽하게 넘어온 학주를 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세상은 이래서. 사는 재미가 있다는 거다.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1-11. 한가람 [ 야이 씨발년아!!!! ] [ 하, 하니야? 왜, 왜 이래. 하니야, 으응? ] [ 이 겁대가리 없는 가시네야!!!!! ] [ 벼, 벼리야? 너까지 왜 이래. 으응? 나아.. 하, 학원 가야돼. 으응? ] [ 다시는 그 주디로 나불거리지 못하게 할끼다, 알갔나? ] [ 벼리야, 이러지 마. 난... 나는 너희가 좋단 말야.. 으응? 꺄아― ] 조용한 교무실 안을 울리는 째지는 여학생의 목소리. 검은색 가죽 쇼파에 느긋하게 몸을 기대 못 들을 것이라도 들은 표정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뚱뚱돼지&선우하니 가족들을 바라봤다. 어제까지만해도 기세등등한 얼굴로 내 뺨을 후려치던 뚱띠 아줌마나. 어제까지만해도 애절한 얼굴로 내게 고백을 해오던 선우권이나. 어제까지만해도 바락바락 대들던 선우하니나... 너나 할 것 없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웃겼다. 아주 못견디게 웃겼다. 하지만 난 웃지 않았다. 왜냐? 여기서 자지러지게 웃었다간 방금 학주 앞에서 꿇었던 내 무릎이 소용 없어지니깐. 자꾸만 터져나오는 미소를 꾸역꾸역 감추고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 벼리하고 하니한테 불이익같은 건 안 갔으면 좋겠어요. 힘든 건, 저 하나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벼리야. 그리고 하니야, 우리 앞으로도 계속 친하게 지낼 수 있는 거지?" 가식이 5721개정도 섞여있는 김윤서의 말에 뚱뚱돼지, 김벼리와 짝퉁 성유리, 선우하니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뭐 저런 미친년이 다있어? 하는 눈빛으로 날 째려보던 두 아이는 이내 자기들의 옆구리를 찔러오는 뚱띠 아줌마와 선우권때문에 새초롬하게 입술을 비죽이며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끽소리 못하고 잘못했다는 말만 되풀이 하고 있는 두 아이를 보던 나는 문득 옆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나의 말에 감동을 받은 듯,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는 학주의 얼굴이 보였다. 학주의 얼굴을 보자마자 미친듯이 울렁거리는 속을 겨우 진정시킨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뜨기 위해 손등으로 눈가를 닦는 척 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어제 수업을 빼먹어서 진도 따라가려면 미리 예습을 좀 해둬야 할 것 같아서요. 그럼." 정말이지.... 내 스스로 생각해도, 넌 정말 대단한 아이야. 윤서야!! 감동이다. 이제 얼굴만 좀 되면 바로 연예계로 고고싱인데 말야. 나 조차도 감동할만한 연기에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끼며 교무실을 나왔다. 교무실을 나온 나는 고개를 돌려 벽창호같이 답답하게만 보이는 문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지그시 올렸다. "예습을 얼어죽을. 엿이나 먹어라, 또라이들아." 멋들어진 김윤서표 연기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교무실 안의 바보들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준 뒤. 갑갑하게 목을 쪼이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푸르며 옥상으로 향했다. 이제 조금은 더 생각을 하고 날뛰어야지. 라는 기특한 다짐을 마음에 새긴 난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젖히고 옥상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바람이 몸뚱이를 감싸온다. 그래, 바로 이 맛이지!! "아주 내 인생의 그늘이야, 그늘. 시원해 죽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옥상 안으로 들어섰다. 너저분하게 쌓여있는 책상더미 위로 올라온 나는 팔을 베고 누웠다. 눕자마자 시야를 가득 메워오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에, 절로 빙그레. 미소가 걸쳐졌다. 길게 숨을 들이마쉬며 마음을 다스리고 있는데, 갑자기 낯선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김윤서" "선우권, 귓구멍 좀 파고 다녀라? 바로 어제 한 말이야. 벌써 잊었다면 그건 새빨간 구라파덕이지. 안 그래?" "너 좋아한다고 나 분명히 말했어." "난 내 눈 앞에 띄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 "누가 사귀재? 누가 나랑 뽀뽀라도 하재?" 조금은 화난 듯, 싸늘하게 식어버린 목소리가 내 귓가를 울렸다. 사귀자고 말해놓구선. 저 등신. 됐다, 넌 떠들어라. 어차피 쌩까고 지내기로 마음 먹은 거, 아주 때깔나게 무시해주마. 나를 향해 무어라 꽥꽥 소리를 질러싸는 선우권을 깔끔하게 무시하고, 오로지 하늘만은 바라보며 얄쌍궂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하늘을 바라보다. ....무심코 입을 열었다. "선우권" "...후. 왜." "너 하늘이 웃는 거 본 적 있냐?" 내 말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는지 선우권은 한동안 대답이 없었다. 어차피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기에,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는 봤다. 하늘 웃는 거, 나는 봤다. 날 보면서 아주 뻑쩍지근하게 웃는 거,봤다구." "....." "세상을 향해 처음 눈을 뜬 그 순간부터, 다시 세상을 향해 눈을 감을때까지 김윤서라는 인간 하나때문에 아파했던 애였는데. 지독하게 못되 처먹은 김윤서 때문에 끝까지 힘들어 했던 애였는데. 내가 걜 버리고, 걔가 날 떠난 그 순간. 하늘이 웃었다. 진짜 예쁘게 웃었다." "김윤서..." "그 애가 유일하게 김윤서 심장에 살고 있던 애였는데. 하늘하고 복수밖에 없던 김윤서 심장에 유일하게 들어온 애였는데. 그런 애가 하늘 웃는 거 보여주고 떠났거든? 김윤서 가슴에서 싹.없어졌거든? 그럼 여기서 문제 한 개 낼테니깐, 맞춰봐. 이제 김윤서 심장에 남아있는 건 뭘까? 응?" ".....선우권." 선우권의 대답에, 누가 뾰족한 바늘로 허파를 찔러댄 것처럼 바람빠진 웃음소릴 냈다. 내 어이를 단박에 날려주시는 그 한 마디에 신나게 웃다 눈치 없이 눈물이 나오려는 눈가를 잔뜩 찡그렸다. 화강안이 웃찾사면, 넌 개콘이다. 선우권. "땡! 틀렸어. 이제 김윤서 심장엔 새하얗게 불타버린 복수하고 예쁘게 웃어주는 하늘밖엔 없어.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쭈욱 그럴거야. 그러니깐 괜히 시간낭비 말고, 너 좋아한다는 달리한테 잘해줘. 남자란 자고로 여자의 내조가 밑바탕이 되어야 된다잖어?" "선우권. 이제 김윤서 심장에 그 웃기지도 않는 복수하고 하늘같은 거 없다. 선우권 하나만 박힐꺼다." "얘가 귓구멍을 덜 팠나, 왜 이렇게 말 귀를 못 알아 먹어." "진심이야. 오늘은 니가 피곤할테니 그만 가겠지만, 내일부터야. 내일 아침해 뜰 그 순간부터 선우권, 김윤서 심장에 들어간다. 기억해. 내일 해 뜨는 그 순간부터야. 선우권이 김윤서한테 작업 들어가는 거. ....그럼 쉬어라. 난 간다." 미처 잡기도 전에 선우권은 소리없이 옥상에 들어온 그때처럼, 소리없이 다시 옥상을 나갔다. 선우권의 손에 의해 닫혀지는 문소리가 들리자, 쓰게 웃으며 눈을 감았다. "바보야... 맨 처음 내 심장에 들어온 가람일 내가 왜 버렸는데.. 평생 나 하나만 바라보고 살아온 그 아이, 내가 왜 울렸는데... 처음부터 내 심장 꽉 채운 그 두개. 그 웃기지도 않은 복수하고 하늘, 그 두 개. 그 두 개 때문인데... 그거 때문에 그 아일 보낸건데 너가 어떻게 들어와.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는 제화공고 선우권이 어떻게 들어와아!!!!" 입술 사이로 김윤서 답지 않은 격한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끝까지 바보같았던 한가람2가 될까봐. 반짝반짝 빛이 나는 그 녀석.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닮은 그 녀석. 그 녀석이 지독한 김윤서 때문에 바보같은 한가람2가 될까봐. 그게 두렵고 화가 나서 한껏 격해진 목소리가 허공을 세차게 울린다. "...아무도 못 들어와, 김윤서 병신같은 심장에. 뒈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미안해서. 돌아버리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이여서. 그래서 아무도 못 들어와. 한가람이 유일하게 뚫어놨던 김한영에 대한 복수, 김윤서 살게 만들어준 하늘. 그게 이젠 너무 커버려서, 지울 수도 없이 꽉 들어차서... 아무도 못 들어와..." 이젠 슬픔으로 가득 젖어버린 목소리가 힘없이 흘러 나온다. 어제 그렇게 다짐했는데. 이제 다시는 인천에 연연하지 않고 꿋꿋할꺼라고. 한가람, 내 심장에서 완전히 뽑아버릴꺼라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자신있게 내 심장에 들어올거라고 말하는 선우권의 목소리에서 김윤서 심장에 이쑤시개가 되어 꽂혀있던 가람이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올라. 김윤서 심장에 선우권이 박힐꺼라고 장담하던 선우권의 목소리에서 끝까지 날 슬프고, 미안하게 만들던 가람이의 마지막 목소리가 떠올라. 　´ 윤서야, 아픈 거 다 내가 한다고 했잖아. 슬프고, 힘든 거 다 내가 대신 　한다고 했잖아. ´ 　´ 윤서야!! ´ 　……… 　´ 윤서야… 난 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울지마. 이젠 　내가 널 지켜줄게……. ´ 울어버렸다. 눈꼬리를 따라 뜨거운 눈물을 흘려보냈다. 폼 구긴다고 눈물 근처엔 얼씬도 않던 김윤서가 이틀 연속으로 눈물을 질질 짜댔다. 감당할 수 없을만큼 뻥 뚫려버린 심장의 구멍이 너무 아파서. 괜찮다고 생각했던 김윤서가 사실은 빌어먹게도 약해빠진 인간이여서. 만난지 몇일밖에 안된 선우권때문에 뼈없는 닭발처럼 흔들리는 마음이 미안해서. 그래서 울어버렸다. 1-12. 주리엣과 화미오 .............. .......... ※ "어라? 주연오, 니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따라와. 나랑 갈 데가 있어." 어울리지도 않는 눈물을 짜대느라 퉁퉁 부어버린 눈 주위를 꾹꾹 누르며 교문을 나서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날 기다리고 있던 연오가 새초롬하게 웃으며 손을 잡아 끌었다. 어딜 가냐고 묻는 날 무참히 씹어버리고 앞장 서 걷던 연오가 도착한 곳은 연오의 단골 미용실 '올리비아'였다. 연오의 단골집이란 것을 광고하기라도 하듯 공주풍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올리비아로 들어서자마자 연오는 다짜고짜 김윤서를 미용실 뺑뺑이 의자에 앉히더니 이리저리 돌려보기 시작했다. "뭐하냐, 주연오? 놀아줄라고 데려왔냐." "정리아의 특별명령." "대마왕의 특별명령이라니?" "넌 생긴 거 자체가 문제아처럼 생겨먹어서 그대로 냅뒀다가는 언젠가 또 사고칠지도 모른대. 그러니깐 생긴 거라도 모범생처럼 꾸며놔야 날파리들이 안꼬일꺼라나?" 화려하게 네일아트 된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리는 연오를 멀뚱히 올려봤다. 환타를 통째로 들이 부은 것 같은 밝은 오렌지색 머리에, 학생같지 않은 요란스러운 파마. 긁으면 1cm는 나올 것 같은 두꺼운 화장빨에 도저히 눈뜨고 못봐줄만큼 화려한 네일아트. ......생긴 걸로 따지면 너도 만만치 않다, 연오야? 황당해하는 눈빛을 느꼈는지 연오가 눈을 내리깔고 날 바라본다. 나방도 날아와서 쉬고 갈 만큼 기다란 속눈썹. 정말. 얼굴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깐. "뭘 봐? 이렇게 예쁜애 처음 보니?" "맙소사. 그걸 농담이라고 하다니. 넌 절대 개그맨이 될 수 없을 거야, 주연오." "흥, 여기 원장님! 얘 우선 검은색으로 염색시켜주시구요, 매직 좀 해주세요. 샤기쳐서 머리가 좀 그진데, 길이는 손대지 마시고. 대충 단정하게 손봐주시면 되겠네요. 참, 앞머리는 눈썹 위까지 오게 일자로 잘라주셔야 되요! 그럼 난 완벽한 모범생으로 변신할 김윤서를 기대하면서, 트리트먼트나 하고 올게. 요새 너때문에 바빠져서 머리 상태가 영 아니야. 아유." 소름이 돋을정도로 간드러지게 웃어재끼던 연오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고는, 요염하게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트리트먼튼지 트라이앵글인지를 하기 위해 사라졌다. 얄밉게 사라지는 연오를 황당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쉬지도 않고 쏟아내던 연오의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 원장님이라 불린 남자가 자기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김윤서의 등 뒤로 다가왔다. 턱 밑에 난 거뭇거뭇한 턱수염을 문지르던 원장은 느끼한 눈길로 날 훑어보더니 여성스럽게 손뼉을 치고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주먹을 꾹.내리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런 내 모습에 콧소리를 내며 웃던 원장이 곧 내 머리카락에 뭔가 덕지덕지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으억!!! 이게 뭐야?" 무지막지한 내 고함소리에 올리비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가 내게로 쏠렸다. 하지만 그런 시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원장의 멱살을 잡아챘다. "머리가 이게 뭐예요?!!" "너무 뷰리풀하고 완벽해요. 호호호~ 아주 굿뜨야, 굿뜨!" "뷰리풀이고 뭐고 원래대로 해놔요!!! 아씨, 이게 뭐야!!! 쪽팔려 뒈지겠네." "뭐긴 뭐야? 이쁘기만 한걸. 그리고 너 자꾸 교양없이 굴래?" 김윤서의 고함소리에 득달같이 달려온 연오가 머리를 쥐어박으며 입술을 비죽였다. 그런 연오에게 머리만 짧으면 아주 클레오 파트라가 와서 친구먹자고 할 만큼 자로 잰듯한 검은 머리를 들이대며 고래고래 악을 써댔다. "썅, 눈이 있으면 봐!!! 이게 인간의 머리야, 엉?!" "이쁘기만 한데 뭘 자꾸 그래. 귀 아파, 제발 소리 좀 지르지마." "주연오!" "시끄럽다고 했지?!! 여기서 더 지랄하면 바로 리아한테 꼬바른다? 그러니까 좀 닥치고 있어. 원장님 얘 다 끝난 거예요?" "머리 끝에 손상된 부분만 다듬으면 되요." "그럼 빨리 해주세요. 그리고 윤서, 너 얼른 엉덩이 붙이고 앉아." 왕방울만한 눈을 부라리며 손가락을 까닥이는 연오때문에, 결국 다시 미용실 의자에 앉아야만 했다. 이건 결코!!!! 주연오가 정리아한테 꼬바른다는 말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윤서, 너 화강안 어떻게 생각해?" 차마 연오에게 다시 화를 내지도 못하고. 거울 속에 비치는 김윤서의 모습에 타일 바닥이 들릴 정도로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데, 옆에서 잡지책을 뒤적이던 연오가 갑자기 화강안에 대해 물어왔다. 연오의 물음에 덮수룩하게 내려온 앞머리를 긁적이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뭘 어떻게 생각해. 미친 돌덩이라고 생각하지." "흠. 그럼 난 미친 돌덩이를 좋아하게 된 가여운 공주님인가?" "뭐? 아야! 아퍼요, 쫌!" 마른 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지. 기절초풍할만한 연오의 폭탄선언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날카로운 가위 끝이 머리를 쿡 찔렀다. 얼얼해진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원장을 째려보다 일어선 이유를 떠올리고는 다시 연오를 향해 고개를 꺾었다. 자기가 방금 한 말이 초대형 폭탄급이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잡지책을 뒤적이고 있는 연오. 발 뒤꿈치에서부터 짜릿짜릿하게 올라오는 혈압을 간신히 누르고 연오에게 말했다. "너 방금 한 말, 그냥 한 말이지?" "정말이야, 나 화강안 보고 완전히 필 꽂혔어. 사실 인천에 있을 때부터 유심히 봤는데, 다시보니까 알겠더라. 나 걔 좋아해." "그 새끼가 어떤 새낀 줄 알고!" "세상에서 우리를 제일 증오하는 남자. 그 중에서도 주연오하고 김윤서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남자. 뭐 이정도?" "연오야!!!" "아무래도 안되겠다, 원장님 그냥 얘 머리 놔두세요. 참, 계산은 나중에 와서 할게요." 연오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리에서 일어나 유유히 올리비아를 빠져 나갔다. 허탈하게 웃으며 유리창 너머로 어디론가 걸어가는 연오를 쳐다보다가, 주먹을 말아쥐고 서둘러 연오를 따라나갔다. 개미떼처럼 몰려드는 인파를 헤치고 연오의 손목을 낚아채려는 찰나. 연오를 향해 뻗었던 손을 내리고 멈춰서야만 했다. 하트를 뿌리며 달려가는 연오를 살짝 비껴, 김윤서를 향해 비웃음을 쳐 날리고 있는 화강안과 눈이 마주쳐버려서. 아주 재수 오질나게 없는 그 화강안의 눈빛과 마주쳐버려서. 이런 쌍칼. 1-13. 정리아 깔딱지, 반계율 "뭘 꼬라봐, 새끼야." "너같은 거 본 적 없는데." "하이고, 두야. 이 새끼 진짜 사람 열통 터지게 하는데 소질 있네." 한 5723대 정도 패주고 싶을만큼 깐족거리는 화강안을 향해 한걸음.한걸음. 아주 천천히 내딛는데 평생에 도움 하나 안될 주연오가 지가 무슨 비련의 여주인공이라고. 갑자기 양팔을 쭈욱 벌리고 날 막아섰다. 주리엣과 화미오의 탄생의 순간이었다. 꼴같지도 않은 주리엣의 등장 덕분에 더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채, 자리에 멀뚱히 서서 연오를 바라봐야만 했다. 허파에 구멍 뚫린 웃음 소릴 내며. 저거는 나하고 지 남자친구하고 한강물에 빠지면, 주저없이 지 남자친구에게 튜브를 던질 아주 치사빵구한 가시네일거다. "뭐하냐, 너?" "내 사랑 건들지마." "와나― 진짜. 주연오 이젠 웃찾사도 찍고 그러네, 아주? 그만 지랄하고 비켜. 언니 화낸다." 내 위협섞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눈치라곤 약에 쓸래도 없는 주연오는 코웃음을 치며 혀까지 낼름거렸다. 뒤에서 화강안이 처 웃고 있는데도! 간이라도 빼주시겠어, 주연오? 사랑에 자존심이고 뭐고 다 집어던진 눈 먼 계집애. 아주 쇼 중에서도 초특급 생쇼를 해주시는 연오를 뾰족한 눈길로 쏘아보던 나는 치마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한숨을 꺽꺽.뱉으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걸 진짜 죽여, 살려.. ["후아. 여보십니까."] [유- 윤서야, 큰일났어!!] ["넌 뻑하면 큰일이지. 왜, 이번엔 붕어빵에서 붕어가 가출했대?"] [그게 아니고, 지금 제화국고가 쳐들어왔어!!!] ["...국고가 왜 쳐들어와, 뜬금없이."] 긴박감이 느껴지는 달리의 말에 연오를 향해 '아지트에서 보자' 라고 입모양만 벙긋여주고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한창 싸우는 중인지 달리의 목소리 뒤로 험악한 욕설과 물건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진짜... 오늘 하루 또 스큐류바 만들게 생겼네. ["자세히 말해봐, 가만히 있던 국고가 갑자기 왜?"] [얼마 전에 1학년 애들이 단체로 국고랑 한판 하자고 너한테 말했다며? 근데 니가 안된다 그래서 마리가 삘받고 사고쳤나봐. 지금 우리학교 뒷편인데... 왠만하면 너 안부르려고 했거든? 근데 상황이 너무 안 좋아. 국고새끼들 단단히 꼴받았는지 무기까지 들고왔어. 어떡해, 윤서야. 응?] 벽에 기대 눈을 감았다. 울먹이는 달리의 목소리에 가슴 속이 복잡해져왔다. 그냥 눈 딱 감고 사고를 치자니, 이번 사고 수습한지 꼴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내 발목을 붙잡았다.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퉁기던 난 핸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달리의 비명소리에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눈을 부릅 떴다. ["조금만 참어라, 달리야. 일당백 출동한다."] 서둘러 전화를 끊고, 학교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래, 인간 김윤서. 싸움 하나로 18년 인생을 살아왔다! 까지껏 걸리면 시베리아로 튀고, 안 걸리면 그냥 넘어가고 그런거지. 뭐 인생 별 거 있겠어? 단순하게 살자, 단순무식 김윤서답게!! 그렇게 난 참 바보같게도 단순무식 인간 김윤서를 악의 구렁텅이에 집어 넣게 될 싸움터로 향하고야 말았다. ...................... .............. ※제화예고 "썅년들아 꿇어라!!!" 마악 학교 뒤편으로 들어서자 제화국고의 황토색 교복을 입고 있는, 웬 똥돼지같은 아이 하나가 들고 있던 야구방망이로 달리의 어깨를 후려치는 게 보였다. 오마나. 저 새끼는 눈깔에 뭘 쳐넣고 다니길래 애를 저따구로 후려친다냐? 잠시 자리에 멈춰서서 쉼호흡을 했다. 시내에서부터 달려오느라 한껏 부풀어오른 폐를 가라앉히고, 고개를 다시 들자 이번엔 아까 그 똥돼지가 달리의 머리칼을 휘어잡고 벽으로 갖다 대는 게 보였다. 달리의 대갈통이 마악 벽에 부딪치기 전,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돌멩이를 하나 주워 똥돼지를 향해 던졌다. 따악. 경쾌한 마찰음이 울리고. "으미- 골 빠게지겄네. 닌 뭐꼬?" "똥돼지. 건강하게 말 할 때 우리 달리 곱게 놓으세요." "하이고! 이거 웃기는 가스나가 하나 왔고마잉." 아저씨처럼 껄껄 웃어재끼던 국고 똥돼지는 정통으로 마빡에 꽂힌 돌멩이를 털어내며 내 예상대로 달리를 내팽겨치고 뚜벅뚜벅.걸어왔다. 교복 단추가 터져라 아주 펑퍼짐하게 튀어나온 녀석의 아랫배에 시선을 고정시킨 난 고개를 까닥이며 개구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뒈지고 싶어요, 똥돼지? 왜 가만히 있는 예고를 건드리고 지랄입니까. 예?" "아― 니가 갸가? 유달리, 이 가스나 째고 예고 짱 먹은 아가?" "유달리, 그 가시나 째고 예고 짱 먹은 김윤서. 지금 분노 게이지가 대가리 꼭지점까지 닿았거든요? 가뜩이나 의리없는 가시네하고 재수없는 머스마 만나고 오는 길이라 기분도 깔짝지근한데 웬만하면 좀 닥치고 계세요." "하― 이 가스나 말빨 드릅게 쎄네?" 똥돼지는 김윤서의 충고를 콧구멍에 들이박았는지 계속 깐족거렸고, 그에 난 터져오른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로 첫번째 주먹을 날리고야 말았다. 분노가 가득 담긴 스트레이트 한 방에 고개가 꺾여진 국고 뚱돼지는 곧 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위로 쓰러졌고, 녀석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에 배를 잡고 낄낄 대던 나는 된통 열받은 뚱돼지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재빨리 발을 들어 녀석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런 내 모습에 저마다 무기 한개씩 챙겨서 달려들던 국고 찌끄래기들이 흠칫하고 멈춰선다. 나른한 눈길로 내 주변을 둘러쌓고 있는 국고와 예고 학상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시작은 예고가 먼저 했으니까 국고 쳐들어온 거 꼬투리 잡을 맘 발톱만큼도 없어요. 근데 예고 김윤서가 이렇게만큼이나 열통 터져서 오버 하는 건!! 여자고 남자고를 떠나서 이미 전투능력 모조리 상실한 사람 가지고 논 거. 그리고.... 김윤서 허락없이 예고 건드린 거. 그거 두 개 때문입니다." 빠각.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밑에 깔려있던 똥돼지의 대갈통이 아작이 나버렸다. 똥돼지 대가리에서 나온 시뻘건 핏방울들이 쌔끈한 김윤서의 종아리에 튀긴다. 손을 뻗어 종아리를 쓸어내리고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로 얼어있는 국고 애기들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 "시간 아깝게 따로따로 덤비지 말고, 개떼로 몰려오세요. 난 그편이 더 좋으니깐." "와우― 예고 김윤서, 아주 지랄을 생으로 까주시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김윤서의 신경을 후벼파는 굉장히 허스키한 목소리. 목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쩐 일인지 아주 조금은 낯이 익는 단풍대가리가 한 개 보였다. 저거.. 정리아 지갑 속에 있던 사진하고 아주 똑 닮은 새낄세? "야, 여기 김마리 빼고 다 꺼져. 거기 지랄하는 김윤서, 니네 애들도 좀 빼주라. 너랑 긴박하게 할 얘기가 있거든." 아주 세상의 카리스마란 카리스마는 죄다 끌어모은 것같은 목소리로 말하는 녀석을 황당하게 바라보던 나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달리를 비롯해 걸레들이 달려와 친구하자고 할 만큼이나 만신창이가 된 우리 학교 아이들을 손수 학교 밖까지 안내해줬다. 아이들을 옮기느라 교복 위로 진득하게 묻은 피들을 쓱쓱 닦아내며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아까 그 단풍대가리에 입에 디스를 한 개비를 물고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이지 심하게 낯이 익는 녀석의 얼굴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물었다. "국고 정리아 알지?" "예고 김윤서는 초면 말 안까기로 유명하던데. 다 개뻥이였네." "내가 물어본 거에 대답이나 좀 해, 국고 척쟁아. 혹시 너... 정리아 깔딱지, 뭐 그런 거냐?" "누, 누가 그래?! 내가 정리아 깔딱지라고?!.." 새끼... 역시 지갑에 있던 사진의 주인공이였구만. 아주 좋아 죽겠다는 얼굴로 떠듬떠듬 말을 내뱉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이어 녀석의 빨개진 얼굴 위로 심각한 고민들이 둥둥 떠오른다. 그냥 박살만 내주려고 했는데.. 그냥 예고 쳐들어 온 거 빌미로 국고 상대로 스트레스 쪼끔만 풀라고 한거였는데.. 이 국고 척쟁이가 리아하고 연관있는 애면 심하게 일 꼬여버린건데. "너 진짜 정리아 지갑 속에 있는 걔냐? 진짜 너가 정리아 깔딱지야??..." "어!!! 그래. 그래. 흠흠. 내가 정리아 애인이야!" "리아 너같은 남자애 욘나 싫어하는데? 진짜 너라고?" "아씨. 너 뭐냐?! 내가 농담같은 거 할 새끼로 보이냐?!" 아까 그 무게는 어따 팔아 먹은건지. 아이처럼 앙증맞게 소리를 질러대는 단풍대가리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리봐도 저 현란한 머리색깔은 주연오 취향인데, 어째서 양아치의 냄새를 풍기는 저 아이가 리아의 지갑 속에 있는거지? ....리아 함부로 마음에 사람 담는 애 아닌데. "리아 지갑에 있는 사진. 그거... 사실 니가 넣은거지?" "아, 씨발. 나 국고짱 반계율이야!! 치사함하고는 담쌓고 지내는 반계율, 구라같은 거 안깐다!!!" 진짜 열받았는지 얼굴까지 빨개져서 소리치는 국고 아이. 리아의 깔딱지 비슷한 것처럼 보이는 아이. 함부로 맘에 사람 안 담는 리아의 지갑 속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아이. 자기 스스로 국고짱이라고 말한 아이. 그 아이, 반계율 뒤로 웬일인지 불빛이 번쩍 하고 났다. 1-14. 함정 "이리보고, 저리봐도... 진짜 리아취향 아닌데..." "씨바라. 너 자꾸 똑같은 말 반복하게 할래?" 어느새 친구 비슷한 걸 먹은 계율이와 난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반대편에선 정신을 잃은 나의 1년 후배, 마리가 축 늘어져 있었지만. 신경 쓰지 않고 리아와 석연치않은 관계를 맺고 있는 계율이와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잘하면 그 무시무시한 대마왕의 약점을 잡는 거고, 못하면.... 으. 생각만 해도 소름 돋는다. "근데 너 자꾸 나보고 정리아 취향 아니라는데!!! ....리아 취향이 뭔데??..." "흠. 한마디로 말하자면, 반계율 같지 않은 놈." "야!!!!" "오키도키. 근데... 진짜 너 같지 않은 놈이 리야 취향이야." "너!!!!!" 계속된 농담을 가장한 진담에 성질머리 드럽게 없는 계율이는 화를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하늘을 막고 일어선 녀석에게 손짓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어쩜, 진짜 머리에서부터 성질머리까지 리아가 제일 싫어하는 취향을 타고난건지. 심하게 신기하다야, 그러기도 쉽지 않은건데. "옴마야. 알었어, 알었어. 진지하게 대답하께, 목 부러지기 전에 앉아러." "앉았어. 자, 이제 빨리 얘기해봐." 지가 언제 화를 냈냐는 것처럼 계율인 바로 내 옆에 쪼그려 앉아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을 귀엽게 쳐다보던 난 자꾸 재촉하는 계율이때문에 생각하기조차 무서운 리아를 떠올리며 리아의 취향을 읊어줘야만 했다. 정말 이 세상 그 누구도 소화할 수 없는 화려한 리아의 취향을. "우선 연봉 5000은 기본. 머리에 든 거 많고, 능력 짱 좋아야 되고 직업은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자기보다 꿀리지 않는 거여야 돼. 얼굴은 안보지만 그래도 데리고 다니기에 쪽팔리지 않을 정도면 오케이고, 안경을 필수. 머리는 옵션. 요란한거 말고 점잖은 거 좋아해. 나랑 지니때문에 싸움질하는 새끼는 절대 사양. 뭐, 구구절절 다 읊으면 365일 하고도 꼬박 이틀은 더 얘기해야되니까 딱 한마디로 말해줄게. 그니깐 한마디로 말하면!!! 넌 아니라는 거야, 계율아. 하하하. 진짜 리아 지갑에 사진 너가 넣은거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지만 듣는 계율인 심각한가보다. 미간을 좁히며 인상을 벅벅 구긴 계율인 생각에 깊이 잠긴 듯,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런 계율일 멀뚱멀뚱 쳐다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폈다. 시원한 뼈소리가 울려 퍼지고. 시원하게 웃으며 마리에게 걸어가다가, 고개를 돌려 계율이에게 말했다. "근데!!! 너가 번쩍하고 좋아할만한 소식 세개 있는데 알려줄까?! 첫번째!! 정리아 좋다고 지갑에 사진 넣은 놈은 반계율이 처음인 거! 그리고 두번째! 깔끔한거 무지하게 좋아하는 정리아가 지갑에 있는 너 사진, 아직도 안 빼고 있는 거. 마지막으로 세번째!! 정리아의 기가 막히는 친구, 김윤서가 널 정리아 남편감으로 점찍은 거!! 하하하. 어때? 진짜 번쩍하고 좋아할만하지?!!" "야!!!! 김윤서, 너 진짜 마음에 든다!!!!!" 내 외침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계율이가 하늘을 향해 만세를 부르짖으며 폴짝폴짝 뛰어댔다. 진짜 귀여운 자식이네, 저거.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아질만큼 아주 신나게 폴짝거리는 계율일 재미있게 쳐다보던 난 순간 발목을 감싸쥐는 차가운 감촉에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숙이자 피투성이가 된 마리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발목을 휘감고 있는 게 보였다. "달리, 정신이 좀 드냐?" "....-배..님...." "어, 그래. 너 선배님 여기 있다야, 눈 좀 떠봐. 얼마나 쳐 맞았길래 눈탱이가 두꺼비가 다 됐냐. 나보다 더 심하다." 피식 웃으며 정신이 가물가물한지 뭐라 중얼거리는 마리를 들쳐 엎으려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달려온 계율이가 무슨 시궁창에 빠진 버러지를 보는 것처럼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달리를 노려보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왜?" "완전 더러운년이야, 얘. 만지지 마. 미친년 바이러스 옮아." "말을 뭐 그따구로 하냐, 너. 얘 내 후배야, 욘나 귀여운 김윤서 후배님." "아씨, 얘 진짜 개년이야!! 씨발, 김마리. 너 뒈지고 싶지? 죽여버린다. 연기 까지 말고 처 일어나, 개년아." "반계율, 너 말이 좀 심각하게 심하다?" 내 말에 계율이가 돌씹은 표정으로 눈썹을 꿈틀거린다. 이해할 수 없는 계율이의 행동에 슬슬 화가 나려는 찰나.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온건지 마리가 날 자신의 위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내가 마리를 덥치는 듯한 포즈가 나오고. 당황스러움에 멀뚱히 마리의 두꺼비 눈을 내려보는데.. 갑자기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얼마안가 민중의 지팡이라는 경찰아저씨들이 우루루 우리들에게 달려왔다. 아, 씨바.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아무래도 오늘 김윤서 9273칸 쌓여진 스큐류바 먹을 예감. "손 들고, 자리에서 인나라!!!" 무슨 날 흉악범 취급하는 포돌이의 고함소리에, 교복에 묻은 모래를 탈탈 털어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번쩍번쩍 빛이 나는 경찰차 위의 형광등을 보며 빙긋 미소를 지었다. "날 언제봤다고 반말이세요, 포돌이 아저씨들." ............... ........ ....... ※1시간 후, 제화파출소. 김윤서가 파출소에 올 줄이야. 정말이지 생각지도 못한 퐝당한 시츄에이션인데? 어느새 김윤서의 두 손목에는 차가운 수갑이 채워졌고, 그 광경이 너무나 재미있어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내 모습이 기가 막혔는지 검은색 서류철로 대가리를 콕콕 찌르는 포돌이1. "웃음이 나노? 웃음이 나? 아를 저 꼴로 만들어 놓고도 웃음이 나느냐 이 말이다, 이 가스나야!" "포돌이 아저씨 나 언제 봤나?" "뭐?" "분명 오늘이 초면인데. 왜 자꾸 말을 톡톡 짤라먹고 지랄이세요?" "이 가스나 말뽄새 좀 보세!?" 순식간에 분노로 벌게진 포돌이1이 허공을 향해 손을 치켜 들 때, 김윤서와 같이 잡혀 온 계율이가 상아색 철제 책상을 발로 차며 소리쳤다. "씨발, 내가 쳤다고요!!! 김마리, 걔 내가 조진거라고!!!! 왜 아무 잘못 없는 애, 자꾸 건드리고 그래!!!!" "계율이 너 조용히 못해?!!" "씨발. 아저씨 알잖아, 반계율이 조졌다니깐? 쟤 아냐!!!" 새끼 파출소를 벗삼아 자주 들낙거렸는지, 취조하는 포돌이2와 친근한 모습을 연출해내고 있다. 목에 핏줄이 튀어나올정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계율인 금방이라도 울것같은 얼굴로 날 돌아봤다. 그런 계율이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준 나는 내 앞에 위태롭게 앉아있는 마리를 바라봤다. .....마리의 얼굴 여기저기 피어있는 피딱지들의 갯수를 세며 조금씩.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혀 가는데 마리의 새하얀 입술이 들썩인다. "선배...님..." "엉, 왜 부르냐." ".....왜 안 놀라세요...?" "너 계율이한테 좀 죠터지더니 시신경이 아픈가보다? 나 욘나 놀랬는데, 지금. 김마리가 서울말 쓰는 거 보고 지금 욘나게 놀랬는데. 안 보이냐?" "....이럴때까지도...똑...같아요...선배님...." 한글자, 한글자 내뱉는 것조차 힘이 든건지 마리는 꼴딱꼴딱 숨을 멈추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아.... 딱 12개다. 마리 얼굴에 있는 피딱지 갯수. ".....난....요....선배님....싫어했어..요....처음부터 쭈욱.." "나도 너 좋아하지는 않았으니깐 이걸로 피장파장 쌤쌤." "....벼리하고...하니...제가 제일 좋아하는..친구예요...선배님.." "대충 짐작하고 있었어. 설마 이 하늘같은 선배님이 그 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지?" 싱글싱글 웃으며 꼬박꼬박 대답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눈쌀을 찌푸리던 마리는 잠시 입술을 깨물더니. 곧 두껍게 부어버린 눈을 부릅뜨고 날 죽일듯이 노려보기 시작했다. "너...내가 유치장에 쳐박을거야....내 친구들 엿먹인 댓가로 내가 너...유치장에 쳐박을거야...너 그래도 웃음이 나오― 꺄악!!!!" 분한지 연방 씩씩거리며 감히 나와 맞먹겠다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던 마리가 비명을 내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곧이어 마리의 몸뚱이 위로 우리 사이에 있던 책상이 뒤집어졌고, 그 다음 김윤서의 오른쪽 발이 마리의 대가리를 후려찼다. 파출소 바닥은 피로 흥건히 젖어버렸고, 주위에 있던 포돌이들이 경악스러운 얼굴로 내 어깨를 서둘러 잡아챘다. 겁에 질려 부들부들 떨고 있는 마리를 향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썅년아. 내가 선배님 꼬박꼬박 붙이라고 말했냐, 안했냐? 어디서 겁대가리 없이 맞먹을라고 드니?" "그만 못두노!!!!!" "귓구멍 열고 잘 처들어, 김마리. 다시 한 번 나랑 맞먹을라고 들면 너. 진짜 뒈진다. 김윤서 손에 김마리 뒈지는 날이다, 그 날." 마리는 수전증에 걸린 환자처럼 계속 바들바들 떨며 포돌이의 부축을 받아 내게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무릎을 끌어안으며 어깨를 들썩이고 있는 마리를 차갑게 바라보던 난 앞에 엎어진 책상을 신경질적으로 후려차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용히 살라고 부산에 쳐박하둔 애가 파출소까지 왔다면 어른들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이젠 진짜 모범생처럼 지내라고 머리까지 손봐준 우리 애들이 지금 내가 이꼴로 여기 있는걸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 김벼리, 고 가시네 손봐줄때부터 뭔가 찜찜하다 했지. 사발. 어쩜 일이 꼬여두 여기까지 꼬이고 지랄이냐. 짜증이 솟구친다, 짜증이 솟구쳐. "김윤서 학생 보호자 되십니꺼?" 짜증스럽게 눈썹을 긁던 나는 포돌이 아저씨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파출소문을 바라봤다. ....이런, 빌어먹을. 급히 고개를 돌렸지만, 귀신같이 날 알아본 리아는 순식간에 달려와 내 따귀를 올려부쳤다. 온 힘을 실어 아주 힘차게. 여태껏 맞아봤던 그 어떤 리아의 손바닥보다 훨씬 더 강하고, 또 아프게... "나가 뒈져라, 김윤서." 1-16. 해 떴다 "아 욘나 아프다. 정리아, 김윤서 모르게 펀치게임 조따 많이 하고 왔는갑네." "정말 너만 보면 말도 안나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고 아주 온 몸이 다 막혀, 정말. 너 뇌라는 게 있긴 하니? 생각이란 건 하냔 말이야!!" 리아는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지르며 내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활짝 웃으며 몸에 해로울 정도로 화를 내는 리아의 손을 잡았다. 리아의 눈가에 얼핏 어려있는 물기에 양심이 찔끔하고 아파온다. 모범생 탈만 쓰고 있는게 아니라 뼛속까지 모범생이 되면. 그때쯤 되면 리아가 나때문에 소리도 안지르고 편하게 잘 지낼 수 있을까? 김윤서 만난 뒤로 쭈욱 대마왕으로 살고있는 리아, 제법 사람티도 내고 그러고 살 수 있을까? 머리를 흠뻑 적시는 생각에 잠시 말을 멈춘 난 조용히 리아를 바라봤다. 너도 참 친구 잘못만나서 고생이다, 리아야. "...골 울려. 그만 흔들어, 안 그래도 없는 머리 더 빌라." "김윤서어!!!!" "아, 귓구멍 터진다. 펑펑" "진짜 너." 골치 아프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는 리아. 그리고 그런 리아 앞에서 조금은 미안하다는 얼굴로 웃고 있는 김윤서. ..... 리아는 상대하기도 싫다는 듯 날 외면하고서 소장실로 들어가버렸다. 한바탕 난리가 날 소장실 광경을 상상하며 의자에 몸을 깊숙히 묻었다. 내 몸을 감당하기엔 턱없이 작은 철제 의자에 힘겹게 몸을 기대어 천천히 눈을 감고 호흡을 멈췄다. ....... ..............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눈물 범벅이 된 아라와 걱정스러운 얼굴의 효선이가 있는 아지트에 와있었다. "미안하다, 너희들한텐. 부산와서 맨날 사고만 치네. 그것도 울트라급만 골라서. 이러기도 쉽지가 않은데 말야. 하하" ".....윤서야..." "내가 인복이 좀 심하게 부족해서. 그래서 더 미안. 씨발 내 주위엔 항상 왜 배신때리는 애들밖에 없을까. 여러사람 피곤하게..." "우리, 우리가 있잖아. 윤서 너한테 우리 있잖아, 그러니까 울지마. 응?" 아라는 눈물로 얼룩진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훌쩍거렸다. 달래주고 싶은데. 울지 말라고 예전처럼 달래주고 싶은데. 팔모가지에 214톤짜리 추를 숨펑숨펑 달아놓았는지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대충 울지말라는 의미를 담아 강렬한 눈빛을 한 번 쏴주고 몸을 일으키자, 문이 벌컥 열리며 바나나 우유를 한박스 들고 있는 이연이가 들어왔다. 저거..... 얼마니, 도대체. "나 같으면 저돈으로 펀치기계를 한 두어대 들여놨을텐데. 아 아쉽다야." "쌰따쥐새끼. 윤서 너때문에 리아의 화는 하늘끝, 땅끝, 우주끝까지 우루루쾅쾅했다?" "그게 나때문이냐, 김윤서 뒷통수 후린 년 셋때문이지." "앙앙. 그래가지고 지니가 걔네 족치러 갔어. 너무 서운해 마세요, 윤서씨." 앙증맞게 눈을 찡긋이며 이연이는 박스에서 우유를 하나 꺼내 입에 물었다. 이연이의 말에 기겁을 하며 일어서는 효선이. ...... 김윤서 다음은 은지니. 은지니 다음은 김윤서. 돌고 도는 칠공주 사고뭉치들. 효선인 지니를 말려야한다며 서둘러 이연이의 손을 잡고 방을 나가버렸다. "히야. 효선이 욘나 빠르다. 육상대회 나가면 일등먹고 그러겠다, 그치?" "응.응. 윤서야 내가 물 가져다 줄까? 목 안마르니?" "엉, 괜찮다. 김윤서는 욘나게 괜찮다. 그러니깐은 이제 애들 걱정 시키지 않는다. 와자.. 김윤서는 조빵 강하다." 씨익.웃으며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리는 날 슬프게 쳐다보던 아라는 기어코 닭똥보다 후배 더 굵은 눈물 방울을 후두둑 떨구고야 말았다. 손을 들어 아라의 얼굴 밑에 갖다대자, 유난히 따뜻한 아라의 눈물 방울들이 송알송알 고여들었다. 손바닥 위에 고이는 눈물 방울들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날수록 양심이 따끔따끔 아파왔다. 방 안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기가 너무 싫어서. 자꾸만 옛날을 떠올리게 만드는 지금의 이 엿같은 상황이 싫어서. 웃으며 손내미는 날 계속 궁지로만 몰고가는 지독한 세상이 싫어서. 그래서 일부러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오늘 되게 신기한 소식 두개 들었다, 아라야? 그거 너한테만 알려줄게? 흠흠! 그 신기한 소식이 뭐냐면은. 우선 첫번째는! 연오가 화강암, 그 돌새끼를 좋아한다는 거! 그리고 두번째는 대마왕 리아를 좋아해주는 남자가 드디어 나타났다는 거!! 어때? 와뵤하고 쓰러질만큼 신기한 소식이지?!" ".....으응..응..." "우리의 정보통 아라보다 내가 훨 빨리 알아낸 거다. 나 대단하지?" "...으응.." "아!! 나 더 대단해지고 싶다. 그럴려면 신기한 소식을 더 알아와야겠지? 이참에 지니하고 효선이 러브관계까지 알아내야겠다. 어이쿠야. 그러면 빨리 나가야겠는걸. 아라야 너무 신기해도 머리 아프니까 울지는 마. 그리고 애들오면 김윤서, 대단한 사람 되고 싶어서 나갔다 그러고. 알았지? 그럼 나 간다. 아라야!! 항상 미안하고, 항상 고맙고, 또. 또... 항상 최고다." 아라의 눈물 방울들이 가득 고여있는 손을 움켜쥐며 벌떡 일어섰다. 언제나 작아보이는 아라의 여린 어깨를 마지막으로 한 번 두드려준 나는 도망치듯이 아지트를 나왔다. 그리고선 어두워진 밤하늘 아래에서정처없이 걷기 시작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미친 여자처럼 시내를 배회하는데 누군가 거칠게 어깨를 돌려세운다. 힘없이 고개를 돌린 곳에는... 제일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절대 마주치지 말자고 말했던. 하늘을 닮은 선우권이 숨을 몰아쉬며 서있었다. "내 눈에 띄지 말라고 말했잖아, 이 개자식아" 건조해진 입술 사이로 장난기가 진득하게 베어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뛰어온 듯 헉헉거리던 선우권이 갑자기 애틋해진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부담스러웠지만. 그 눈빛이 여전히 못견디게 힘들고 아팠지만. 이미 김윤서 심장에 왕다아이아를 푹하고 박아놔서 견딜만했다. 그 어떤 거에도 흔들리지 않고 꿋꿋한 김윤서 심장이 되버려서 견딜만했다. 그래서 난 빙긋 웃으며 녀석의 마빡을 향해 오른손을 들었다. "마음같아선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 꽂아버리고 싶은데, 오늘부터 너그러워 지기로 마음 먹었으니깐 특별히 봐줄게. 이걸로. 따수콩." 퉁― 굳은살이 박힌 손가락을 퉁기자 선우권의 마빡이 금세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맞았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선우권은 실실 쪼개면서 마이 안주머니에서 뭔갈 뒤적거리더니 유치원생이 만들어도 이 것보단 나을거란 생각이 드는 아주 좀 울퉁불퉁 동그랗게(☜솔직히 그닥 동그래보이진 않았다.) 오려진 빨간색 색지를 꺼내들었다. 그리고선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단박에 집중시킬만큼 큰 목소리로 힘차게 외쳤다. "해 떴다!!!!!!! 이제 김윤서 심장에 선우권 들어간다!!!!!!" 1-15. 칠성과의 만남 ............. ......... ※ "땀찬다, 선우권." "니 땀 내 손바닥이 다 먹고 있으니까 걱정마." "나 열받을랑말랑해. 그만 놔라?" "니 열 내가 다 먹어줄게, 걱정마." ......... 지지않고 꼬박꼬박 말대꾸를 하는 선우권. 그리고 그런 선우권 손에 잡혀 정확히 1시간 54분째 시내에 머물고 있는 김윤서. 입술을 씰룩이며 뭐가 그렇게 좋은지 실실 쪼개고 있는 선우권의 뒷통수를 쳐다봤다. 모처럼 딱 혼자이고 싶은 기분에 휩싸였는데, 이 눈치없는 녀석때문에 이게 무슨 꼴인지. "나는 지금 무지하게 혼자이고 싶은 사람이거든요?" "너 지금 혼자 있잖아." "니 눈깔에는 지금 제가 혼자 있는 사람같아요?" "응. 아까부터 선우권은 김윤서 심장에 살고 있는거니깐 김윤서는 지금 혼자인거다. 모르겠냐? 선우권은 김윤서고, 김윤서는 선우권! 이 간단한 공식도 모르다니. 마누라 은근히 머리 나쁘네?" "누가 니 마누라야!!" 결국 빽빽하게 차오른 짜증을 참아내지 못하고 철썩.선우권의 등짝을 후려쳤다. 곧바로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자리에 멈춰서는 선우권. 녀석은 내 손을 잡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내게 맞은 등딱지를 쓸어내리며 인상을 벅벅 구겨댔다. 그 모습을 고소하게 쳐다보던 난 녀석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 그랬냐는듯 방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깐 이제 좀 찢어지자. 니 정신없는 소리 들어줄만큼 내가 여유롭지가 못하거든, 지금." "나중에 우리 애기 낳으면 힘은 무지하게 쎄겠다. 그치? 나도 한 힘 하거든." "자꾸 앞서가면 다리몽둥이 분질러집니다." "아, 다왔다. 들어가자 마누라."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선우권은 잡고있던 내 손을 잡아당겨 약간 심할정도로 술집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반지의 재탕'이란 곳으로 들어와버렸다. 처음 와보는 술집(☜모두들 쌩구라라고 하지만, 난 정말 대가리에 털나고서 처음 와보는 곳이다.) 풍경을 마음껏 감상하기도 전에 가게의 정 중앙으로 걸어간 선우권은 바로 앞.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모여있는 테이블로 날 쑥 내밀었다. 저마다 입에 물고있던 맥주를 반대편에 앉아있는 아이의 얼굴에 내뿜으며 나와 선우권을 번갈아 보는 아이들. ......... 와나, 얘때문에 정말 미치겠네. "선우권, 너 지금―" "인사해라. 형님 마누라." "헉!! 우권아, 너 가시네들한테 관심 없다하지 않았나? 그리고 야는... 그떄 갸 아이가! 시내에서 하니 조진―" "권이야 이새끼야. 똑바로 부르라고 몇 번 말했냐? 그리고 그냥 가시네들한테 없는 관심 다 얘한테 쏟아부었다." "흐미야. 얼굴이야 이쁘장하긴 헌데, 우리같은 아들하고는 좀 안 어울리지 않나?" 우락부락한 등치의 제화체고 교복을 입은 스포츠 머리가 무지막지한 목소리로 묻자 선우권은 대답없이 씩.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지만 앉으면 좋았을껄. 돌아가려는 나까지 억지로 앉혀둔다. 전생에 하늘로 올라가려는 이무기를 잡아다 구워먹은 죄라도 있는건지. 가엾다, 김윤서 인생. "...잠깐. 너 어디서 나 보지 않었어?" "황재섭, 너 내 마누라한테까지 찍접대면 죽인다." "그냥 진짜로 재섭이는 저 클레오파마머리를 한 아이를 본 것 같어서 그런 것 뿐인데." 동글동글한 눈매며 새하얀 피부며 남자치고 지나치게 붉은 입술하며. 저 거 완전 귀염상이네, 귀염상. 제화고 교복을 매끈하게 차려입은 녀석은 귀엽게 웅얼거리다, 선우권의 매서운 눈초리에 금새 꼬리를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저거 볼수록 딱 이연이 취향이네. 황재섭이란 제화고 아이를 보며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내밀어진 안주접시. 눈을 땡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자 무테 안경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과고 학생이 날 보고 있었다. "제 얼굴에 팝콘이라도... 묻었어요?" "아뇨. 어디서 본 거같은 얼굴인데 잘 기억이 안나서요." "재천상! 너까지 우리 마누라 예쁘다고 찍접거리냐?" "아녜요, 형. 전 진짜 낯이 익어서 그래요. 어디서 봤지..." 재천상이라 불린 과고 학생은 심각한 얼굴로 내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기 시작했다. 또랑또랑한 눈이 참 인상 깊은 아이. 얜 또 효선이 취향이랑 흡사한데.? 선우권 친구노마들 중에 우리 애들 취향이 꽤 있네. 나중에 단체 미팅을 한 번 주선해볼까나.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있는 아이들을 찬찬히 훑어보는데 볼따구에서 느껴지는 찌릿한 눈빛. 고개를 돌리자 맨 처음 걸걸한 목소리로 구수한 사투리를 내뱉던 그 체고 스포츠머리가 내게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근디야 너랑은 쪼까 안어울린다 안카나 우권아. 야는 너무 비리비리해 뵈는데?" "이래뵈도 우리 마누라가 나보다 쎄." "으잉? 그기 참말이고?" "응. 이거 봐, 아까 마누라한테 얻어맞은건데 완전 빨갛지?" 선우권은 교복 와이셔츠를 훌렁 들어올리며 아까 내게 맞은 등짝을 체고 스포츠 머리에게 보여준다. 뭐라고 따지기 위해 고개를 훽 돌리는데, 순간 내 눈앞에 보이는 하얀 등짝 위의 새빨간 손바닥 자국. ......괜히 미안해진 난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걸쭉하게 웃으며 내 앞으로 잔을 내미는 체고 스포츠머리. "뭐, 생긴대로 노는 아가 을마나 많겠노. 여튼 만나서 반갑다, 나는 조기 제화체고 다니는 최필립―." "옴마나. 미성년자는 술,담배 절대 금지. 모르세요? 이거 먹으면 다 잡혀가요, 그것도 성격 무지하게 안좋은 포돌이 아저씨한테." "야가 무슨 소리고. 요즘 시상에 누가 그런걸 따지노. 그냥 무라." "그래도―" "썅년아, 닥치고 처 마시라. 어디서 내숭빼고 지랄이노."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럽게 말하는데 갑자기 내 말을 싹둑 자르고 들려오는 매우 불쾌한 목소리. 구겨지려는 인상을 간신히 붙잡고 목소리의 주인공을 찾아 고개를 돌렸다. ......... 저 아이는.... 분명! "뉴페이스!!!!!!!" "뭐라카노?" "뉴페이스네. 맞지? 저번에 뚱뚱돼지하고 선우하니하고 짝짜궁해서 나한테 덤비러 온 애. 양갈래 머리에 싸가지라곤 눈씻고 찾아봐도 없는 목소리. 딱이네, 딱." "닥치고 처 마시라고 했나, 안했나?" "한가영, 말이 좀 심하다. 너나 닥치고 마셔." 내가 무척이나 마음에 안들었는지 자꾸만 틱틱대던 뉴페이스. 아니 이름만 무지하게 예쁜 한가영은 선우권의 싸늘한 두마디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은근히 두 얼굴이네, 이 남자. "신경쓰지말고 마셔. 아, 미성년자는 이런거 먹으면 안된다고 했지. 그럼 콜라마실래, 사이다 마실래?" "사이다. 사이다는 꼭 칠성으로!" 때마침 목도 마르고 해서 힘차게 말했는데 갑자기 싸해지는 분위기. ..... 얘네가 왜 이런다냐. 눈을 꿈벅이며 선우권을 바라보자,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입만 벙긋거리며 '왜?"라고 묻자 녀석이 갑자기 입을 가리고 킥킥대기 시작했다. "아, 진짜. 역시 우리 마누라다!!" "언제부터 걔가 오빠 마누라가 됐다고 그러나?" 신나게 웃어재끼던 선우권 뒤로 엄청난 눈보라가 쳤다고 느꼈다면 그건 내가 미친 것일까. '대한병원'이란 로고가 자잘하게 박혀있는 환자복을 입고서. 귀티가 잘잘 흐르는 목발을 짚고 쩔뚝쩔둑 걸어오는 선우하니. 그리고 그런 선우하니 옆에서 귀찮다는 얼굴로 퍽퍽하게 걸어오는. 걸어오는... "하루에 화강안 얼굴 한 번 마주쳐도 재수 오질나게 없는건데. 오늘 김윤서 재수 황 될려나보다. 화강안 두번이나 만난거 보니깐??..." 1-17. 슬픈 기억 "....너 진짜 웃기는 년이다, 김윤서." 내가 던진 말에 반박이라도 하듯, 화강안이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술집 분위기는 초고속으로 무거워졌고, 당황하는 여러 아이들을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난 화강안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요즘 하두 너랑 안면을 맞대고 있어서 그런지 남의 마음에 들어갔다 나오는 능력이 생겼거든? 그래서 너가 지금 어떤 개같은 생각하는지 뻔히 보인다?.. 신기하지??.." "아무리 똑같이 생겼어두. 아무리 비슷하게 생겼어두. 얜 선우권이야, 김윤서. 얘한테 니가 아무리 잘하고, 빌빌대도!! 선우권은 한가람이 될 수 없-" 와장창. 화강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강안을 스쳐 지나간 맥주잔이 벽에 부딪쳐 요란한 소리를 냈다. 힘없이 부서져 내리는 유리조각을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아이들. 뻐근해진 손가락을 주무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둥이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난 경고 했다. 선우권한테서 한가람 본적도. 선우권한테 잘해서 한가람한테 미안한 거 씻으려고 한적도. 아쉽지만 난 없어." "김윤서." "...연오는 어따 팽개쳐두고 왔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해라." "하- 주연오 말하는거냐, 너 지금?" 차가운 비웃음을 날리며 화강안이 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선우권은 뭔가 짐작되는 바가 있는지 우리를 말리지 않고 가만히 앉아있었고, 나머지 아이들은 저마나 토끼눈이 되서 나와 화강안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지독하게 뻔뻔한 주연오나, 너나 사람 기막히게 하는건 똑같네. 난 내 친구 죽인 년. 곱게 받아줄 맘 없다." ".....주연오 한가람 죽인적 없어. 한가람이... 한가람이 지 멋대로 대갈통 들이민거지." "넌 끝까지!!! 널 위해서 죽음까지 각오한 녀석을... 그따위로밖에 표현 못하냐?" 둥글게 말아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매섭게 날아오는 화강안의 시선보다. 어느새 내 오른쪽 손을 꾹 잡고 있는 선우권의 손보다. 놀란 얼굴로 나와 화강안을 보고있는 아이들의 수근거림보다. 그 어떤 것보다 지금의 날 위태롭게 만드는 건. .....화강안의 말대로 날 위해 죽음까지 각오한 그 아일 이따위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김윤서다. 날 위해 악역까지 자처한 순수한 아이를. 날 위해 목숨까지 버린 해맑은 아이를. 그런 아이를 고작 저따위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거지같은 김윤서다. "화강안 그만해. 나 우리 마누라 울고싶은데 울지 못하겠단 얼굴로 서있는거. 존나게 싫으니깐 그만해." "선우권.." "그래, 강안이 너 그마해라. 야, 우권이가 좋아하는 아다. 니가 함부로 말할 가시네들하고는 차원이 틀리다 안카나. 앙?" 눈가에 잡히는 잔주름이 무척이나 푸근한 최필립이 심각해지려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서둘러 일어나 화강안과 하니양의 팔을 잡아 끌었다. 역시 체고 사나이답게 힘이 강력한 최필립이 두 사람을 억지로 자리에 앉혀두자, 그와 동시에 선우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리에서 일어선 선우권은 내 손을 잡고 있는 손에 더욱더 힘을 주며 화강안. 아니 테이블에 앉아있는 모든 아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제화예고 2학년 김윤서. 선우권이 첫눈에 황간 여자다. 오늘 내가 내 마누라 데려온 이유, 어디서든 얘 마주치면 인사하고. 위험에 처해있으면 도와주고. 그러라고 데려온거다. .....오늘처럼 거지같이 굴면 가만 안둬, 내가." "오빠야!!" "선우하니, 너도 마찬가지야. 니 올케 될 사람한테 무례하게 굴면 혼난다." "오빠야가 어떻게 그러노!! 저따위 가시네가 뭐가 그렇게 조타꼬!!! 그 가시네, 나 이렇게 만든 사람이다!!! 나 이렇게 만들고, 그걸로도 모자라 내 친구까지 박살낸!!!!" "진작에 말하려고 했는데, 너 친구 가려 사겨 선우하니. 그럼 놀다 가라. 오늘 내가 했던 말, 명심하고." ............... 아주 얘는 연기자같은 거 하면 단박에 스타자리에 올라갈 애다.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투로 명령하듯 간단하게 말을 마친 선우권은 그 길로 나를 데리고 반지의 재탕을 빠져나왔다. 집에 데려다준답시고 앞장서 걷는 선우권. 녀석의 넓다란 등을 보며 무작정 따라가는 김윤서. "나..." "응." "나같은 애를 좋아하는 사람이 두명이나 있는 거. 좀 심각하게 놀랍다." "너같은 애가 어떤 앤데?" 마침 횡단보도 앞에 멈춰선 우리들. 삐죽 웃으며 신호등을 부셔져라 노려보는 선우권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하늘에 미친년." ".....그거 남자는 아니지?" 심각한 얼굴로 되물어오는 선우권때문에 순간 다리가 휘청일뻔 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킬킬거리며 선우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할까 말까 잠깐 고민을 했지만, 쉽게 결정을 내리고 녀석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었다. "너 내 꿈이 뭔줄 아냐?" "선우권 정식 마누라 되는거." "...내 꿈은 말야, 하늘이야. 처음엔 그 자식이 가지고 있는 인천 하늘. 다음엔 날 살게 해줄 부산 하늘. 그리고 마지막엔... 전국 하늘." 순간 번쩍하고 초록불이 켜졌다. 횡단보도 앞으로 우루루 몰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멍청히 서있는 선우권을 향해 하얀 치아를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그러니까 넌 안돼, 선우권. 왜냐하면 넌. 하늘이 아니니깐." 깜박깜박. 금방이라도 빨간불이 들어올 것처럼 초록불이 깜박이자, 잽싸게 횡단보도를 건너왔다. 건너편에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빨간불이 켜지고,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 사이로 멍한 얼굴의 선우권이 보인다. "선우권!!!!" "......" "너도!!!!! 너도 말야!!!!! 언젠가는!!! 아주 언젠가는!!!!!" 자동차 소리에 묻혀 내 목소리가 안들릴지도 모르지만 난 전혀 개의치않고 여전히 멍해있는 선우권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는 로미오와 줄리엣 안 좋아하거든!!! 그러니깐 미리 접어, 니 마음!!!! 너도!!! 너도 언젠간!!!! 내 적이 될테니깐!!!!!!" 순간적으로 고개를 든 선우권과 시선이 마주치고. 녀석을 향해 오른손을 크게 휘휘 저었다. 그때엔 너무 힘들어서 그랬지만 이젠 아니니깐. 초강력 다이아몬드 심장을 가진 김윤서니깐. 그러니깐 난 이젠. ......가람이같이 외로운 아일 만들지 않아. 넌 그렇게 되기에 무척이나 아까운 애니까. 집으로 가기 위해 몸을 돌리는 순간.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걸렸다. ................ ........ ※ 다음날 [...-그러니까 오늘 7시에 그 김마리라는 계집애 집에 다녀와. 과일바구니 같은 것도 사가지고, 알았어?] ["후으아암. 싫은데요."] [너 정말 교도소에서 먹는 콩밥이 어떤지 궁금하구나?] ["폼 구겨지잖아. 후배님 집에 과일바구니 들고 가는 선배님이라니. 윽. 생각만해도 닭살이."] [지랄말고 가라면 가!! 주소는 문자로 찍어서 보내줄테니깐. 그리고 너 요즘 화강안 만난다며?] 교문 앞에서 내게 깍듯이 인사를 하는 1학년 선도부원 아이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주고,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데 휴대폰을 따라서 황당무계한 리아의 말이 들려온다. 신발을 찍찍 끌며 반으로 들어온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피식 웃었다. ["미쳤구나, 드디어. 화강안을 만나는 건 요즘 김윤서가 아니라, 주연오야. 어디서 허접떼기같은 정보를 주워-"] [뒈진다, 너.] ["앗. 죄송. 어찌되었든 난 그런 새끼 한다스로 갖다줘도 취미없어. 걔랑 엮지마, 불쾌해."] [....걔랑 만나지 마.] 말 귀 욘나 잘 들어먹는 정리안데 아까부터 왜 자꾸 자다가 꽹과리 두드리는 소리일까나. 묘하게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너 귓구멍 막혔냐? 뭘 들은거야?"] [걔 낌새가 이상해. 아무래도...아직 한영이 오빠 밑에 있나봐. 요즘 한영이 오빠가 서울연합 먹고, 세력 넓힌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거때문에 부산에 내려와 있는 거 같아, 아무래도.] 리아같지 않은 그 조심스러운 한마디에 순간 내 얼굴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차갑게 변해버리는 인간. 얼굴을 보면 미친듯이 이성을 잃고 날뛰게 만드는 인간. 생각만 해도..... 역겨울정도로 화가 나는 인간. 그 인간 이름에 순식간에 책상을 걷어차고 일어선 나는 잔뜩 열이 오른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럼 잘됐네. 그 새끼 조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는데, 화강안. 그 새끼 잘 구슬려서 조져야겠다."] [김윤서!!] ["기가 막힌 우연이네. 아직도 그 새끼 밑에 있고 말야."] [허튼 생각마! 김윤서 너 지금 대형사고만 세번 터트렸어!! 어른들 귀에 들어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찌그러져 있어!!] 막 교실로 들어온 담임 선생님과 반 아이들의 놀란 시선이 느껴졌지만, 이미 김한영의 이름을 듣는 순간 김윤서 머리는 하얗게 변해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쿵쾅쿵쾅. 급격하게 뛰어대는 심장의 고동과 함께 야릇한 전율까지 느끼며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띄웠다. ["철저히 부숴버릴거야. 리아야, 축하해주라. 나 지금 살고 싶어졌어. 김한영 부숴버리고 싶어서. 김한영이 가지고 있는 서울, 넘어서 전국 하늘 가지고 싶어서. 빼앗고 싶어서!!!! 아주 미치게 살고 싶어졌어. 인천에 있을때보다 더 심하게. 살고싶어 졌다, 나."] 리아는 순간 말문이 막힌 듯, 핸드폰에서는 아무런 답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김한영을 조질 수 있다는. 1년전에 미처 끝내지 못했던 김한영과의 싸움을 드디어 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때문에 기분은 최고조로 달려가고 있는데. 챙그랑.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내 옆에 있던 창문이 박살나고. 깨진 유리조각 위로 떨어지는 핏방울을 발로 밟으며 웃었다. 1-18. 한가람, 그리고 선우권 .............. ........ ※ ["엉, 아라니?"] [으응. 유, 윤서야 무슨 일이야?] ["김한영. 지금 어디서 뭐하고 있는지 너 알지?"] [으응??..] 기겁을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뜰 아라의 모습이 상상되자 나도 모르게 비실비실 미소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이내 미소를 삼킨 나는 엎어져있는 책상을 발 끝으로 툭툭차며 제법 진지한 목소리를 냈다. 그렇지 않으면 아라가 농담인줄 알테니. ["리아가 눈치챌정도면 넌 이미 빠삭하게 알아놨을거 아냐. 얼른 알려주라, 김윤서 끊어질랑말랑하고 있어."] [아, 안돼. 윤서야. 이번만큼은 안돼. 정말루우..] ["아라야. 나 지금 무지하게 살고 싶어졌거든? 겨우 살고 싶어진 수줍은 김윤서. 꺾지마라."] [그, 그래도 안되는데... 그, 그럼 너 나랑 약속하는 거야. 절대로 이 거 듣고 사고 칠 생각 않기로... 알았지?] ["오키도키. 얼른 불러봐."] 역시 마음 약한 아라. 핸드폰을 쥐고 있는 왼쪽 손이 흥분으로 떨려온다. 이런 김윤서의 마음을 알았는지 핸드폰 너머. 아라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왔다. .......아무라도 내게 시비를 걸어왔으면 좋겠다. 지금의 이 흥분을 조금이나마 가라앉힐 수 있도록 아무라도 좋으니 내게 시비를 걸어왔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광견병 걸린 멍멍이가 될 것 같으니깐. [하, 한영이 오빠 너도 알고 있듯이 그 날 이후 서울로 올라가셨-] ["존칭 빼. 그새끼한테 높임말 쓰는 거 듣고 있을려니깐 주먹들이 근질거려, 아라야."] [아- 으응. 그래서 서울로 올라간 한영이오빤...] 이후 내게 들려줄 충격에 약간의 힘을 더 실으려는 듯. 잠시 말을 멈추고 뜸을 들이던 아라는 크게 쉼호흡을 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잘못이라면 그저 내 옆에 자리를 차지했다는 이유밖에 없는 화분들을 싸그리 깨부셔버렸다. [....-서울 연합이란 이름으로 일주일만에 서울을 통합하셨어. 그리고 전국 각 지역의 연합들을 차례차례 깨고 지금은 인천을 제외한 전 지역의 연합. 그러니까 경기의 평택, 여주. 전라의 광주. 충청의 대전. 강원의 강릉. 그리고 경상의 대구, 부산까지 총 9개 연합 중 8개의 연합을 통합한 전국 연합의...] 화분을 깨부순걸로도 성이 안차 파편 조각들을 억세게 잡아 쥐었다. 아릿한 통증이 손바닥에서부터 느껴졌지만, 이상하게 아프지 않았다. 완전히 뒤 엎어진 책상에 주먹 크기만큼의 구멍이 나있는 유리창. 게다가 창문 난간 위에 어지럽게 깨져있는 화분 조각들. 거지같은 장면 속에 김윤서가 위태롭게 서있었다. [....-드,듣고 있는거니, 윤서야? 우린 고작 인천 하나를 잡기 위해 1년이란 시간을 허비했는데. 오빠는 그 반에 반도 안되는 2달 만에 전국을 자, 잡은거라고... 이번엔 정말 안돼, 윤서야. 네가 더이상 망가지는 모습 나는. 아니, 우리는 이제 더이상.... 볼 수 없어.] ["....아니. 네가 틀렸어, 아라야. 그때 우리가 왜 인천을 택했는데. 왜 하필 김한영이 가지고 있는 인천 하늘을 노렸는지. 넌 기억을 못하고 있구나."] 믿기지 않을만큼 즐거운 목소리고 내 입술을 타고 흘러 나왔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주변을 치우고 있는 달리를 가볍게 제지한 나는 소름끼치도록 잔인한 눈으로 창문 너머의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순수하게 하늘을 원했다면 우린 그때 인천이 아니라 다른 지역부터 노렸어야 했지."] [유,윤서야! 너!...] ["우린. 적어도 나는 하늘을 그 자체를 원하는 게 아니였으니깐. 김한영 전설을 부수고, 그 새끼가 가지고 있는 것을 빼앗기 위해서. 단순히 김한영이란 개자식이 무릎 꿇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우리가 그때 인천을 노린 건 인천 하늘이여서가 아니라, 김한영이 가지고 있는 하늘이여서였어 아라야."] 내게 충격을 주기 위해 말을 꺼냈던 아라는 되려 나에게 충격 펀치를 맞아버렸나보다. 핸드폰 너머로 아라가 놀란 듯,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라의 놀란 심장을 위해 약간의 여유를 둔 나는 아라가 진정이 됐을때쯔음. 다시 아라의 심장에 충격 펀치를 날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아라, 네가 잘못 생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김한영의 대단한 전설을 들려주면, 겁에 질려 포기하는 대게의 사람들이 아냐 난. 그냥 강한 새끼들만 봐도 주먹이 근질거리는데, 천하의 김한영이라니. 아라야 너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상상이 되니?"] 나른한 내 목소리에 아라는 기어코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젠 충격 펀치가 아닌 안정 펀치를 날려줄때다. 아라가 더 격해져 실신하면 안되니깐. 아라를 달래기 위해 아까보다 눈에 띄게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걱정하지마, 아라야. 김한영은 김윤서의 최종 목표가 아니거든, 이젠. 정말 순수하게 하늘 그 자체. 이제 김윤서 목표는 그거다. 김한영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야.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꼭 부숴야할. 심각한...과정."] .................. ......... . . . ※방과 후 굉장히 유쾌한 기분을 유지시키며 학교를 나서던 내가 마악 교문을 지날 무렵. 익숙한 얼굴이 하나 내 앞에 다가섰다. .......... 식어가는 태양을 등진채 선 선우권이 유치하게 하늘색 색지로 오린 구름 모양의 종이를 내밀며 빙긋 웃고 있었다.(☜저번에도 느낀거지만 선우권은 참. 가위질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 내 눈이 뛰어나서 그렇지,보통 사람이라면 구름이 아니라 하늘색 똥으로 봤을지도 모른다.) 상승곡선을 달리고 있는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가볍게 웃으며 녀석이 건넨 하늘색 구름을 받아들었다. "어제 못들었나봐. 여기까지 온 걸 보면 말야. 핏줄들이 지랄할때까지 소리질렀는데." "똑똑히 들었어, 그래서 온거야 마누라. 선물은 마음에 들어?" "꺄아!!! 권이오빠!!!" 선우권이 상큼한 미소를 날리자 주위에 몰려있던 예고 아이들이 미리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귀가 따갑게 꽥꽥.소리를 질러댔다. 덩치가 뚱뚱돼지와 맞먹을정도로 거대한 3학년 선배들조차 선우권을 향해 '오빵♡' 하며 하트를 날리는 걸 보고 있자니 오바이트라도 해주고 싶을만큼 속이 울렁거렸지만, 그냥 황당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여긴 좀 시끄러운데 다른데로 갈까?" "별로. 너랑 어딜 가고싶은 마음은 지금 내게 없어, 선우권. 그만 삽질하고 너도 얼른 원래 니 자리로 돌아가." "니 옆이 내 자리야." "언제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하는 선우권을 보며, 가려움이 느껴지는 눈썹을 긁었다. 여전히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보고 있는 녀석. "김윤서 옆자리보단 칠성 대가리 쪽이 더 폼나지 않나?" "쪽팔려, 그 거. 그냥 난 선우권이야, 마누라를 열렬히 사랑하는!" "으웩!" 결국 참지 못하고 오바이트 하는 시늉을 냈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소리내 웃던 선우권은 주변에 아이들이 더 몰려들자 안되겠다며 내 손을 잡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 어제처럼. 굉장히 익숙한 모습으로 내 손을 잡고 앞장서 걷는 선우권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방금 전 아라와의 통화가 떠올랐다. 인천을 제외한 전국의 주요 연합이 김한영 밑으로 들어갔다는 조금 존심 상하는 대단한 이야기. "야" "서방님이라고 불러." "까지말고 너 김한영이라고 알지?" 순간 걸음을 멈추는 녀석. 녀석은 약간 당황한 듯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순간 난 꼴뵈기 싫은 화강안을 구슬리는 것보다 가위질에 영 소질이 없는 선우권을 구슬리는 쪽이 김한영을 훨씬 더 빨리 만나게 해줄거란 생각이 들었다. "알구나, 너." "너가 한영선밸 어떻게 알아? 마누라 쫌 노는줄 알았더니, 쫌이 아닌나보네." "까지말랬지? 그나저나 김한영은 어떻게 알었냐? 차례차례 연합 깼다더니, 김한영이 여기까지 내려와서 너랑 붙디?" "....강안이가 했던 말이 참이였나." 날 보며 가벼운 한숨을 내뱉던 선우권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씨익 웃으며 아까처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 새끼, 바람만 잔뜩 불어넣고 뭐하는 짓이야. 선우권의 종아리를 걷어찬 난 얕은 신음소릴 내는 녀석을 향해 물었다. "내가 물어봤던 거 부터 대답해. 어떻게 알었어, 걔?" "윽. 내가 알기론 한영선배 우리보다 2살 많은 걸로 아는데." "나잇살 처먹은 새끼가 1년 꿇은 게 자랑이지. 아, 왜 자꾸 얘기를 샛길로 빠지게 만드냐. 얼른 대답이나 해, 어떻게 알었어?" "으.. 아파라. 마누라가 호 해주면 괜찮을 거 같은데." 멀쩡한 얼굴로 버젓이 정신 나간 소리를 하고 있는 선우권을 멀뚱히 바라보다, 신경질적으로 '호!' 라고 소리치고 녀석에게 다시 물었다. "호해줬으니깐 빨리 말해. 안그러면 나 너부터 조진다?" "으악. 무서워라. 마누라, 서방님한테 조진다가 뭐냐." "야!!" 기어코 소리를 지르고야 말았다. 투우사에게 투정을 부리는 코뿔소마냥 씩씩거리는 날 보며 해맑게 웃는 선우권. 이 새끼, 감히 날 가지고 놀아? "너 진짜 오늘 죽을 줄 알어!!!" "마누라 손에 죽을 수 있다면 정말 행복할 거야." 녀석의 복부를 향해 힘껏 내리치려던 주먹이 순간 움찔했다. 내가 움찔한 순간을 틈타 양팔을 벌려 날 지 품으로 끌어들인 선우권이 내 머리통 위에 턱을 괴고는 힘껏 끌어안았다. "아퍼, 등신아" "행복하다, 마누라. 나 태어나서 이렇게 행복한 적 처음이다? 우리집 멍순이가 임신했을때도. 그래서 낳은 새끼들이 다섯일때도. 그 새끼들이 몽땅 암컷일때도. 그 새끼 팔아서 짭짤하게 돈 벌었을때도. 이렇게 행복하진 않았는데." "이거 못놔? 폼 구기게 이게 뭐하는 짓이야!"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날 깔끔히 무시한 선우권은 어깨를 들썩이며 킥킥거리다 갑자기 조용해졌다.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순간적으로 느껴지는 침묵이 더 불편했던 나는 고개를 갸우뚱 거리며 슬며시 고개를 들려다... 선우권의 턱이 너무 아프게 머리통을 눌러와 가만히 멈췄다. 코 앞에서 느껴지는 알싸한 담배 향기. 숨도 못 쉴만큼 가까이 다가와있는 녀석의 가슴. 그리고..... 내 심장을 너무 아프게 조여오는 녀석의 심장 박동 소리. 정상인보다 두배는 더 빠르게 뛰는 것 같은 녀석의. .....선우권의 심장 박동 소리. "아까 내가 준 구름 예쁘지? 실습시간에 애들 다 용접할때, 나 혼자 그거 만드느라 쪽팔려 죽을뻔했다. 그러니까 잘 간수해, 어제 줬던 햇님도 잘 가지고 있지?" ".....너 가위질 진짜 못하더라. 유치원생도 너보단 나을꺼다." "하여간 우리 마누라가 칭찬하는 걸 못들었어." "너 자꾸 마누라, 마누라 하는데 내가 왜 니 마누라냐. 난 너같이 가위질 못하는 서방 둔 적 없어." "하여간. 성질머리 하고는..." 콩콩콩. 자지러지게 웃는 선우권 때문에 녀석의 턱이 내 머리통을 사정없이 눌러댔다. 이번엔 봐주지 않겠단 굳은 결심으로 고개를 쳐드려는 순간. ...... 물기에 흠뻑 젖어버린. 왠지모르게 눅눅하다고 느껴지는 선우권의 목소리가 내 몸을 뻣뻣하게 경직시켜버렸다. "....비록 하늘을 될 순 없지만 나 선우권. 마누라 김윤서를 위해 기꺼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그러니까 마누라는 전국이던 세계던, 우주던 마누라 꿈인 하늘만 열나게 잡으면 돼.." 짠하게 다가오는 선우권의 낮은 목소리. 시큰거리는 콧잔등을 녀석의 와이셔츠에 뭉개며 이를 악물었다. 　´ 그게 하늘이든, 한영이 형이든 뭐가 됐든. 윤서, 너랑 　관련된 거라면 다 내가 지켜. 그러니까 넌 웃어 윤서야. 　많이 바라는 것도 아냐. 그냥 윤서, 너 하나만 웃을 수 있으면 　그 거 하나로도 만족해 난. ´ ................... 가람아. 여기 너랑 똑같은 애가 있어. 빌어먹을 김윤서한테 목숨까지 거는 바보같은 애가. 니가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니가 마지막일거라 생각했는데. 니가 마지막이여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너무 아프게. 짜증날정도로 화가 나게. 너랑 닮은 애가 여기 있어. 어쩌면 너보다 더 무모할 애가 내 앞에 지금 서있다 가람아. 난 아직도 벅차는데. 하늘을 잡는 게. 김한영과 싸우는 게. 난 여전히 벅차는데. ......... 분명 망가트리고 말거야. 너처럼. 1년 전 한가람처럼. 선우권을 망가트리고 말거야. 어쩌면 너보다 더 심하게 망가트릴거야. 난 그게 아프다. 숨을 쉴 수조차 없을만큼 심장이 먹먹해져올만큼 눈 까뒤집고 기절하고 싶을만큼. 딱 그만큼.... 1-19. 김한영, 살아있는 전설 .............. ......... ※반지의 재탕 "그니깐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 안나는데, 아무튼 기분 무지하게 더러운 날이였어. 참으로 뻥 한개도 안치고 나 선우권으로 태어나서 누구한테 맞고 병원에 입원한 적 없었다. 솔직히 얻어 터져도 병원 갈 정도는 안됐는데.." "니 자랑 그만하시고, 빨랑 얘기나 하세요." 따각. 술집에 들어오자마자 옴팡지게 지자랑만 늘어놓는 선우권을 향해 가벼운 웃 음을 지어보인 나는 테이블 한켠에 자리잡은 사이다 다섯병 중 하나를 골라 잡아 병마개를 뽑아버렸다. 견딜 수 있을정도의 따끔함과 함께 시원한 사이다를 한모금 들이킨 나는 제법 진지해진 선우권의 검정색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시킨채로, 속으론 트림이 나올 것같이 간질간질한 목구멍을 달랬다. 이래서 탄산음료는 좋아할래야 좋아할 수가 없어. 가오 구겨지는 음료수야, 정말. "딱 10분이였어. 지옥같던 그 10분동안 믿기진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내 눈 앞에 펼쳐지드라. 7분동안 다섯이나 됐던 연합 주요 멤버들을 박살나고, 3분만에 선우권이 전치 4주 부상을 입었다. 그 때 우리, 부산연합 전국에서 세번째였어. 전국에서 세번째로 쎈 부산 연합을 10분만에 박살낼정도로 강했던거야, 한영선밴." "그런거 영 믿음이 못가진다. 초시계로 세보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10분이라고 확신해? 그런 얼렁설렁한 말 정말 믿음 못가. 10분 52초인지 48초인지 재봤냐, 너가." 차가운 빈정거림이 불쑥 튀어나왔다. 하지만 내 빈정거림에도 불구하고 선우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씨익 웃으며, 앞에 놓여진 사이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차라리 지 자랑을 늘어놓던 때가 훠배 나았다. ......빌어먹을 김한영의 전설따위 듣고 싶은게 아녔는데. 신경질적으로 손가락을 퉁기다 섬광처럼 번뜩이는 기막힌 아이디어. 갑자기 떠오른 유쾌한 생각에 눈을 반짝이며,얼굴을 바짝 갖다대자 흠칫하며 뒤로 몸을 빼는 선우권. "뭐, 뭐야 마누라. 우린 아직 빨라, 이성을 찾아!" "삽질하지마, 멍청아. 그 새끼가 너넬 10분만에 제압했다면, 난 5분이야. 우리 한 판 붙자, 선우권." "맙소사. 마누라, 과격한 여잔 내 취향이 아냐." 모처럼 몸 안의 진지함을 가득 긁어모아 말했건만. 선우권은 내가 농담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지, 붉어진 얼굴을 잔뜩 늘어트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난 옆에 있던 사이다 병을 집어 들어 병마개를 향해 엄지 손톱으로 조금 강하게 퉁겼다. 피슝―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소리가 들리고. 허공으로 튀어오른 회색 병마개가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 "그 새끼가 하는 거면 나도 해. 그니까 당장 니네 연합인지 뭔지 하는 새끼들 불러." "마누라 강한 거는 인정해. 하지만 애들은 안돼." "....너 끝까지 나 우습게 보는구나?" 빙글빙글 웃는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약간 당황한 듯 주춤한 선우권은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쭈. 이 새끼 날 우습게 봤다 이거지? "당동이지. 마누라가 얼마나 웃기게 생겼는데. 보고만 있어도 자꾸 웃음이 나는걸?" 순간 주먹에 들어갔던 힘을 슬며시 빼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선우권을 멍하니 쳐다봤다. .......... 놀리는 말 같긴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않지? 이거 묘하게 신기하네. 헛기침을 하며 괜히 민망해진 나는 목구멍이 따갑다고 발광을 할때까지 사이다를 입 안으로 들이부었다. 결국 사이다 한 병을 통째로 비우고 나서야, 고슴도치를 삼킨듯한 따끔한 충격에 인상을 찌푸리며 병을 내려놨다. "아씨, 여긴 왜 이렇게 더워." "어? 마누라 더워? 내가 손부채질이라도 해줄까?" 열심히 두 손을 들어 펄럭이는 녀석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멋없다며 투덜거리던 선우권이 갑자기 내 손을 덥썩 잡는다. 뿌리치려던 나는 예상 외의 강한 힘으로 짓누르는 선우권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좋다, 마누라. 마누라랑 이러고 있으니깐 뽀개질 만큼 좋아죽어." "까지마 새끼야." 이렇게 가끔씩 선우권은 사람을 순식간에 닭으로 만들어 버린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을 주며 말이다. 정말 이상한 새끼야. 억지로 손을 빼내고, 낮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찌끔하게 와닿는 선우권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던건 아니였지만, 썩 유쾌한 일도 아니였기 때문에. "그만 쳐다봐, 구멍 뚫린다. 내 얼굴 골프공 만들고 싶지 않음 고개 돌려라?" "골프공은 작기라두 하지." "어쭈. 그 말 뜻은 뭐지?" "헉. 설마 마누라 얼굴이 골프공만하다고 생각했던거야? 으악 쓰러지겠다!! 우리 마누라 유머감각이 지나치게 탁월한데?" "아, 안닥쳐 진짜?" 이상하게도 선우권 앞에만 있으면 내가 아닌 다른게 되버리는거 같다. 이죽이죽 웃으며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방을 이끌 수 있는 능력이 유일하게 통하지 않는 녀석. 선우권. ................. 김한영한테 3분만에 작살난 허약한 꼴통. "애들 못부르먼 너라도 나랑 좀 붙자." "아쉽게도 난 마누라 때리는 개같은 취미 없어." "미안하게도 난 나를 마누라라고 부르는 새끼 때리는 고양이같은 취미가 있는데, 어쩌냐? 나가자, 나 진심으로 너랑 붙고 싶어졌어. 제화공고 선우권이자 부산연합 짱이자. 칠성의 우두머리! 선우권하고서 정말로 한 판 뜨고 싶다." 진지하다 못해 아주 심각하기까지 한 말투에 녀석은 잠시 고민에 빠진 듯. 미간을 좁혔다. 지루한 기다림이 얼마쯤 지속됐을까. 드디어 결정을 내린건지 선우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 손을 잡아끌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와자뵤!! 드디어 붙는구나, 선우권! ........... 하지만 녀석이 멈춘 곳은 한없이 들뜬 마음으로 녀석의 뒤를 쫓아온 날 가볍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밀어넣기 충분했다. 빨간색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곳. 척 보기에도 싸구려 모텔티가 팍팍 나는 곳. '한판장'의 입구에 선 선우권은 망연자실하게 서있는 날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한판 붙자며? 얼른 들어가자. 넌 어떨지 몰라도 내가 이거면 껌벅 죽거든. 선우권의 얼마 안되는 취미 중 하나랄까." "처음 봤을때부터 강렬하게 느끼긴 했지만.... 너 정말 돌았냐?" "마누라가 한판 뜨재서 일부러 온건데, 왜 그래?" 정말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냐. 기가막히다는 얼굴로 선우권을 바라봤다. 장난인지,진심인지 구별할 수 없는 묘한 미소를 흘리며 들어가자고 손을 내미는 선우권. 허허허. 바람빠진 웃음소릴 내던 나는 번뜩 눈을 치켜뜨고 선우권의 면상에 돌려차기를 날렸다. 가까스로 발차기를 피한 선우권이 놀란 눈으로 급히 외쳤다. "마누라 왜그래!!" "왜 그래? 왜 그래에?!! 지금 그따위 말이 나오냐!!! 아깐 얼굴만 들이대도 빠르다고 지랄하던 놈이 사람을 덥썩 모텔로 끌고와?!! 너 비오는날 비듬 날리게 맞고 싶지? 엉!?!!" "모텔은 무슨 모텔!! 내가 가려던 데는 저기였단말야!!" 억울한 듯.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치던 선우권의 손 끝이 '한판장' 이란 간판 옆의 당구장 표시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창문을 가르켰다. 까닥하면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으슥한 곳에 자리한 당구장. '당구한판'으로 들어온 나는 삐져서 입이 댓발이나 나온 선우권에게 미안한 눈빛을 쏴주며 어색하게 웃었다. "모텔 옆에 꽁꽁 숨어있는 당구장을 내가 무슨 재주로 알아채냐? 간판도 코딱지만하드만. 아씨. 미안하대두?" "날 그따위로밖에 보지 않았음이야. 마누라 실망." "그럼 난 바늘망할게. 아무튼 사과 했으니까 그 튀어나온 주둥이 좀 제발 수습해주라." 티격태격. 녀석과 가벼운 말다툼을 하며 자리를 잡은 나는 맨질맨질한 큐대를 골라잡았다. 초크를 슬슬 문지르고 익숙한 포즈로 큐대를 잡는 날 보며 선우권이 또 투덜거린다. 저건 입에 모터라도 달았나, 아주 쉬지를 않네. "무슨 여자애가 남자보다 앞서가고 그러냐. 모처럼 내가 가르쳐 주면서 접촉 좀 시도해볼라했더니." "내가 무슨 자동차냐? 접촉은 무슨. 그리고 내가 너 가르쳐 주면 되잖아, 새꺄. 남자가 뭐 대수라고. 근데 너 몇이나 치―" 쭝얼쭝얼. 쫌생이의 표본을 보여주며 중얼거리는 선우권을 향해 고개를 트는데 갑자기 당구실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면서 화강안이 들이닥쳤다. 저새끼는 김윤서 스토커가 되기로 작정한건가. 왜 자꾸 기분 조지게 찾아오고 지랄이라니. 들고 있던 큐대를 신경질적으로 당구대 위로 집어던지고, 코뿔소가 울고갈 만큼 씩씩거리며 다가오는 화강안을 쳐다봤다. 나보다 먼저 코뿔소로 변해버린 화강안에게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챈건지 선우권이 먼저 나서 녀석을 제지했다. "강안이, 너가 여긴 어쩐일이냐?" "김윤서 너 돌았냐!!!!" 하지만 화강안은 선우권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화가 치미는 얼굴로 내게 버럭 소리를 질러댔다. 당구대에 걸터앉아 녀석을 향해 차가운 조소를 날리며 입술을 씰룩였다. "씨박아 돌고 있는건 지구지, 내가 아냐." "너같은 년 진짜 구역질나게 싫다, 진짜!! 사람이 얼마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지 몸소 보여주는 거냐!!?" "니 쨍쨍거리는 목구녕에 큐대 박아버리기 전에 아가리 묵념해라. 니 개소리 들어주자고 나 살아있는 거 아니거든?" "너...너!!!!" 결국 터져버리고 말았다. 내심 언제 터질지 궁금했는데, 결국 터지고야 말았다. 화강안이. 복수를 위해 부산까지 쫓아온 화강안이. 이연이같이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을 안고 있던 화강안이. 터질 듯, 안 터질듯 위태롭게 서있던 화강안이 펑하고 터졌다. 이유는 모르지만 썩 유쾌한 모습은 아니였다. 그나마 한때는 서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녀석이여서. 빌어먹을 옛정때문에 밉지만 증오할 수 없었던 녀석이여서... ........... 미친듯이 달려드는 화강안을 향해 바람빠지는 소릴 내며 당구대 위로 올라섰다. "화강안은 김윤서 웃찾사였는데. 언제 시사투나잇으로 탈바꿈 했냐." "닥쳐!!!" "화강안, 그만해!!" 뒤늦게 선우권이 화강안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그보다 한발 앞서 녀석이 당구대 위로 훌쩍 뛰어올라왔다. 녀석이 언제 덮쳐올지 모르는 불안감보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건... 지독히도 1년 전 상황과 똑같이 전개되는 모습때문일까. 아찔해지는 정신을 뒤로하고 화강안의 발차기가 날라왔다. 꿈벅꿈벅. 바보처럼 눈만 꿈벅이다 아슬아슬한 순간에 녀석의 복숭아뼈를 향해 왼쪽 주먹을 날렸다.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발이 힘없이 떨궈지고, 오른발을 움직여 당구대 위를 굴러다니고 있던 큐대를 차올렸다. 퉁겨진 큐대를 낚아챈 나는 화강안에게 그 것을 넘겨주며 눈을 찡긋였다. "그거 너 해라." "죽인다, 김윤서!!!!" "너한테 미안해서가 아냐. 미안한만큼 옛정이 떠올라서. 옛정만큼이나 니 얼굴이 슬퍼서. 그래서 그런 거 아냐. 너가 불쌍해서야, 화강안. 1년 전처럼 아무런 힘도 못쓰고 나한테 박살날 화강안이. 아주 미치게 불쌍하고, 가여워서... 그래서 너한테 준 거야. 그땐 각목이였지만, 어차피 똑같은 나무토막 아니겠어?" 아마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찢어죽일 수 있다면. 화강안은 벌써 김윤서를 8712조각으로 찢어죽이고도 남았을 거다. 살기 어린 녀석의 눈동자를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주고, 몸을 돌렸다. 천천히, 그러나 강하게 뒤돌려차기를 날려 화강안의 가슴팍을 밀어젖힌 나는 망설임없이 내게 큐대를 휘두르려는 녀석의 얄팍한 손목을 후려찼다. "너같은 년들보고 뭐라 그러는 줄 아냐? 바로 빽믿고 나대는 썅년이라 그래!!! 김한영이라는 후광을 엎고 지가 강한줄 아는 존나리 재수없는 쌍년!!!!" 빠각― 손목의 고통을 누르고 나에게 날린 녀석의 일격은 꽤 충격적이였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꽤. 얼마나 세게 내리쳤는 큐대가 두동강이 되어 아래로 떨어졌다. 뼈가 부러졌나. 얼핏 빗맞은 쇄골뼈를 문지르며 인상을 구기자, 화강안이 내게 달려들었다. "씨발새끼야!!!!! 너 그만두라고!!!!!!" "가람이 눈에 피눈물 나면!!! 니 눈엔 더러운 시궁창 물이 흐르게 할거야!!!!! 알아?!!!!!!" 고래고래 악을 써대는 선우권과 미친듯이 발악하는 화강안. 큐대가 부러지면서 긁혔는지 금방 붉게 피가 베어나오는 어깨를 감싸쥐며 난 조용히 미소를 지을 뿐이였다. 새끼야 넌 건드려도 한참을 잘못 건드렸어. 그냥 그때처럼 가람이때문에 나한테 덤비는 거였음 나도 봐주는건데. 니 사정 봐가면서 참는건데. .............. 내 앞에서 김한영 빽 얘기 어쩌구 나불거린 거. 너 인생 최고의 실수일거다, 화강안. "김한영이란 이름 입에 올린 거, 니 말대로 존나리 후회하게 만들어줄게. 이 개자식아." 괴기스러울정도로 사악한 미소를 짓던 나는 땅을 박차고 녀석을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내 발은 정확히 화강안의 관자놀이를 후려쳤고, 그때문에 녀석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아까보다 더 높이 허공을 향해 뛰어오른 나는 180도에는 좀 미치지 못할 각도로 뻗은 왼발을 녀석의 어깨를 향해 내리쳤다. 굉장히 우스꽝스런 포즈로 화강안의 오른쪽 어깨가 기울어지고, 허리를 숙여 무릎팍을 찍어버리자 녀석은 힘없이 당구대 위에 주저앉았다. 김윤서한테 당한 것이 몹시나 분한지 바닥의 큐대를 들어올려 던지려는 화강안. 놀란 눈으로 뛰어올라오는 선우권. 그리고..... 지금의 상황이 못견디게 즐겁다는 얼굴로 웃고있는 김윤서. "니가 어째서 폭발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 지금 내가 궁금한 건, 너가. 화강안이 김윤서 앞에서 얼마나 비참해지느냐야. 얼마나 얻어맞고, 까여야 정신을 차리나. 그게 난 지금 제일로 궁금하다, 강안아?" 친근하게 녀석의 이름을 부른 나는 오른쪽 눈을 향해 날아오는 큐대를 잡아채고, 녀석의 대가리를 후려깠다. 단단한 큐대에 맞아 녀석의 머리통이 힘없는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지려했지만, 난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아직 손에 남아있는 큐대를 이용해 녀석의 턱을 올려찬 난 흐리멍텅해진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화강안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며 씨익 웃었다. "너.... 용서...하지 않...을거다...절...대...." "하하하. 골때린다, 너. 내가 왜 화강안따위의 용서를 받아야 하지?" "나도.....가....람이도 너.....절대...." ".....너 오늘 정말 가지가지한다. 김윤서 돌게 만드는 이름 두 개나 내지르고말이야. 이러고도 살길 바라니, 너?" 어금니를 꽉 깨문 난 비릿한 통증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화강안의 복부를 있는 힘껏 걷어찼다. 곧이어 화강안이 픽하고 앞으로 고꾸라지고.... 녀석의 뒷통수에 왼발을 지그시 누른 난 피묻은 큐대를 꾹 쥐고 눈깔을 부릅 떴다. 하지만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릅 뜬 눈깔 사이로 숭뭉숭뭉 눈물 방울들이 떨어졌다. 녀석의 마지막 중얼거림을 듣고만 김윤서는 결국 눈물을 떨궈내며 피가 베어나올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가람이...부산....왔다....이 썅년아...." 서둘러 팔뚝으로 눈가를 가렸지만. 지독하게도 주인 말을 안듣는 눈물 방울들이 얼굴을 뜨겁게 적셨다. 동그란 눈물 방울이 툭하고 화강안의 뒷통수를 누르고 있는 발등에 떨어지고. 껄그러운 입안을 적시며 한숨을 내쉬었다. 눈물 방울들을 더이상 내보내지 않기 위해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었더니... 아릿할정도로 눈부신 당구장 형광등이 보이고. 걱정스러움이 한껏 담겨진 선우권의 얼굴도 보이고. 그리고..... 수세미로 박박 문질러도 떨어지지 않는 옛 기억들이 보였다. 2부. 일년 전 2-20. 김윤서의 하늘 잡기 잔인한 소나기가 퍼붓던 까만 밤. 흠뻑 젖어버린 여자아이가 작게 울먹이며 어느새 자신보다 훌쩍 커버린 남자아이의 옷자락을 붙잡습니다. 남자아이는 들고 있던 우산을 여자아이에게 쥐어주며 조금은 슬프게. 그러나 아플 정도로 차갑게 말합니다. 그리고 세찬 빗줄기에 섞여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남자아이의 낮은 목소리가 어느새 여자아이의 귓가에 살포시 내려 앉고. 남자아이의 말을 또렷히 알아 들은 여자아이는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자아이가 고개를 들어 쳐다본 곳에는 누구인가 싶을 정도로 잔인한 표정의 남자아이가 서있었습니다. 일말의 미안한 감정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이기심에 사로잡힌. ........아이의 오빠가. "오빠 이러구 가면... 나 오빠 용서 안해. 죽어도. 아파도, 슬퍼도, 외로워도!!! 절대 용서 안할 거야. ...그래두 갈꺼야? 나 무너지게 가버릴거냐구우!!!" 여자아이의 새빨간 고함소리에. 허공을 찢어내리는 고함소리에. 남자아이는 아프게 웃으며 아까보다 훨씬 더 작은 목소리로 여자아일 향해 중얼거립니다. 또 다시 그 중얼거림을 듣게 된 여자아이의 작은 손이 힘없이 떨어지고, 남자아인 여자아이 모르게 눈가를 엄지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돌아섭니다. 그리고선...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지금 여자아이의 마음이 얼마나 무너졌는지. 지금 여자아이의 가슴이 얼마나 슬퍼졌는지. 알아채지 못하고. 굳은 어깨로. 빠른 발걸음으로 걸어갔습니다. 남겨진 여자아이는 빗속에서 조금씩 작아지는 남자아이의 등을 바라보다, 방금 건네받은 우산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입술을 앙다물었습니다. 아프게 쥐어진 아이의 주먹 아래로, 붉은 핏방울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슬프게 닫혀진 아이의 마음 아래로, 차가운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집니다. 분노로 일그러진 아이의 얼굴 아래로,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들이 후두둑.떨어집니다. ..................... 그 날. 한영이는 하늘을 위해, 윤서를 버리고. 윤서는 그 무엇도 위하지 않기 위해, 한영이를 버렸습니다. 잔인하게 비가 퍼붓던 까만 밤. 그렇게 두 남매는 서로에게 지독한 짐이 될 기억을 남긴채 돌아섰습니다. ............... ..... . . 　´......응. 너 죽어두. 너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또. 　...또 무너져도 오빤 갈꺼야. 아니 가야돼. 꼭...´ .................... ............... ........ . . 2003년 인천. "여기서 더 처 맞고 싶냐 개새끼아." "으윽.." "까지 말구 벌떡 일어나 개새끼야." 깔깔거리는 미소를 한아름 머금고서. 바닥에 쓰러져있는 아이의 등을 툭툭 차며 물었다. 하지만 내 물음에 대답할 기력조차 없는 듯. 아니, 어쩌면 내 질문따위 답하지 않겠다는 듯. 쓰러진 아이는 옅은 신음소리를 흘리며 몸을 뒤척일 뿐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꼽게 보이던지. 얼굴 가득 머금었던 미소를 뱉고, 쓰레기통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드디어 끝이라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아이를 심드렁하게 내려보던 난 방금 쓰레기통 옆에서 주워온 야구빠따를 휘두르며 끅끅 웃었다. "끝은 내가 만들어 개새끼야." "으윽...너가 이래도... 한영이 선배...절대...-" "백점만점 펀치!! 비쇼옹♪♬♩♪" 목소리에 높낮이를 주며 시원스럽게 아이의 대갈통을 후려쳤다. 꿈틀꿈틀. 살기 위해 지랄하는 가여운 배추벌레처럼 몸을 움찔이던 녀석의 대갈통에서 뭉숭뭉숭 벌건 피들이 베어나온다. 바닥에 깔린 모래알들을 흥건히 적시는 핏물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난 쪼그리고 앉아 간당간당한 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아이. 연수구 짱. 그 이름도 거창한 이나대의 머리통을 꾹꾹 누르며 싱긋 웃었다. "야야. 벌써 일년이 다되간다. 너네가 브라운 아이즈도 아니고, 왜 시간을 질질 끄는건데. 엉? 작작하고 불러 인제. 대단하신 너네 짱님." "....니...가 아무리 이래도.... 으윽... 한영이형... 절대로 오지 않...아...." 브라운 아이즈가 유치하대니까 인제는 주온이냐. 푸시식 웃으며 꺽꺽대는 이나대의 이마를 퉁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꺽으니 건물들 사이에 가려져도 너무 잘 보이는. 슬픈 하늘이 있었다. 만날말날 슬픈 하늘. 만날만날 우는 하늘. .......만날만날 잡아야 하는 하늘. "가족까지 버릴만큼 소중한 인천연합, 하나씩 하나씩 깨지구 있는데두??.. 김한영 목숨보다 소중한 인천하늘, 하나씩 하나씩 무너지고 있는데두???... 그래두 안온대, 이 개새끼야?" "....그....래..." "와으! 그래도 안와? 이래두 안와? 그럼 저러면 올까? 엉? 저러면. 저러면 올까, 이 개새끼야?!!!" 이나대의 말에 버럭.소리를 지르며 야구 빠따를 휘둘렀다. 정신없이 허공을 내지르는 야구빠따 밑에는 더이상 꼬물대지 않는 이나대가 있었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을까. ....귀신같이 알고 나타난 아이 한 개가 김윤서 손목을 따뜻하게 나꿔챈다. "....그만해, 윤서야." 거짓말처럼. 새파란 거짓말처럼. 손에 쥐어져 있던 야구빠따가 스르륵 떨어지고.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태어났을적부터 쭈욱 함께 해온 아이. 눈물나게 해맑은 웃음을 가진 아이. 김윤서만을 평생 지켜주겠다는 아이. ......이 세상에 칠공주 말고 유일하게 김윤서를 말릴 수 있는 특별한 아이. "가람이 안니융!!!" "응, 안니융." "하여간 귀신같어요. 나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그냥 하늘님이 여기로 가보래서 왔는데 너가 있었어." 가람인. 세상에서 아라랑 짱먹을 정도로 착한 가람인. 등 뒤에 새하얀 날개를 감춘 가람인. 피를 흘린채 홀딱 기절한 이나대를 등에 들쳐 매고서 대답했다. 조금은 부끄러운. 하지만 기분 좋은 가람이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빙글빙글 웃었다. "죽지 않을정도로 팼어. 너가 걱정할 거 귀딱지만큼도 없다? 나 잘했지!!!" "....윤서야, 이제 그만. 그만 하면 안될까. 나는... 나는 너가 누구 때리고, 그래서 아파하고. 끝도 없는 지옥에서 나는 너가. 이제는 벗어났음 하는데...." 뚜웅.... 여전히 비실비실 웃고있는 김윤서 앞에 금방이라도 후두둑 눈물을 떨궈낼 거 같은 얼굴로 웃고 있는 한가람이 서있다. 언제나 똑같은 가람이의 물음에. 언제나 똑같은 김윤서의 대답이 있을건데. 지난 1년동안 지겨울정도로 가람인 바보짓을 되풀이 하고 있다. ........... "아유아유. 너는 지겹지두 않냐. 어차피 뻔한 거 왜 자꾸 물어봐." "윤서야, 나는!" "가람아 너는!! 뭐? 너는 뭐?..." 까르륵. 요상하게 뒤틀리는 주먹을 감추고 입가가 찢어져라 웃자, 가람인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린다. .......... 이나대를 병원에 데려다 주기 위해 가람이가 골목을 떠나고, 홀로 남겨진 나는 벽에 몸을 기댔다. 왁스칠이라도 해놨는지, 벽에 닿자마자 주르륵. 미끄러진다. 털썩. 본의 아니게 바닥에 주저앉게 된 나는 휘유. 휘파람을 불며며 핸드폰을 꺼냈다. 쉽사리 플립을 열지 못하고 만지작 거리기를 한 1분 35초쯤 했을까. 우주최고봉으로 병신같은 김윤서 대신 핸드폰의 불빛이 반짝인다. [대장님] 액정 위로 발신자 표시가 뜨고. 건조해진 손길로 플립을 열었다. [어디야, 윤서야.] 아무런 생각이 안드는. 폭신폭신한 효선이의 목소리가 들리자 모처럼 진짜 웃음을 입가에 띄운채로 입술을 들썩였다. ["하늘님 마음속...."] [하늘님 마음에서 그만 나오고, 아지트로 좀 올래? 지니하고 이연이가 방금 서구 접수하고 왔거든. ....이제 딱 하나 남았어, 윤서야. 한영이 오빠 있는 부평구 딱 하나.] ["으아!!!!!기분 조빵 째진다!!!!!"] 분명 효선이의 귀청이 떨어질랑말랑.아슬아슬해지겠지만 가슴 속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설레임에 신나게 소리를 치고 말았다. 까만밤 이후. 여태까지 김윤서의 목숨줄을 쥐고 있던.김윤서 삶의 이유이자 목표가 이제 코 앞에 와있다?! 와자뵤다,제대로 와자뵤!!!! 하늘을 향해 신바람 난 목소리로 소리치던 나는 금방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개새끼야, 인제 넌 뒈졌다야!!!!!!" 내 우렁찬 고함소리에. 내내 슬프게만 있던 하늘이 활짝 웃는 것 같았다. ......... 하늘을 향해 쭈왁 손바닥을 펼친 나는 정말로 신이나 죽겠다는 얼굴로 외쳤다. 목구녕이 쉴거같다고 지랄을 해두. 핏줄들이 튀어 나올거같다고 야단법석을 떨어두. 난 외쳤다. "인제 넌 김윤서한테 잡혔다, 하늘아!!!!!!!" 툭. 투둑. 투두두둑. 하늘님이 화가 났나부다. 자기가 있는 하늘이 고작 김윤서란 인간한테 잡혔다고 소리 질러서 쫌시럽게 화가 나셨나부다. 화가 난 하늘님이 뱉은 가래침이 내 얼굴 위로 쏟아진다. 으아...... 더러워...... "하하하... 하늘님 양치 좀 해요!!!!! 씨바, 더러워 뒈지겠다!!!" 어느 미친년의 개소리를 시작으로 하늘에선 하늘님의 가래침이 미친듯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2부. 일년 전 2-21. 미친개의 미친사랑 어느날 그 애가 말했다. 나 없으면 죽겠다는. 태어날때부터 나 하나만 바라보고 여기까지 왔다는. 지긋지긋해서 죽어버릴것만 같은 그 애가 말했다. "...니 친구들 만큼은 아니여도 나 싫어하는건 아니지?... 적어도 그 만큼은 아니여도 나... 나 좋아하긴 하는거지?" 너무 유치하지만. 너무 당연한 그 질문에 난 비웃음을 날리며 대답했다. 싫어하는 것 투성인 이 세상에서 내가 유일하게 싫어하지 않는 그 아이들을. 싫어하는 것 투성인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그 애에게. "대답할 가치 못느끼는데. 대답 안해도 되지? 너 똑똑하잖아,김현광." "......난 두번째여도 되는데... 싫다는 말만 아니면 난 두번째든, 세번째든 괜찮은데..." "대가리에 돌밖에 없냐, 너? 미안하지만 나 너 싫어. 구역질나게 싫고, 짜증나." 잔인하지만. 몽땅 진실투성인 그 말에 그 애는 평소처럼 울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다. 그냥. 그냥...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 슬픈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꼴등이여도 되는데... 네가 좋아하는 것중에서 꼴등이여도 나는 괜찮은데..." "아니, 꼴등까지 갈 필요 없어. 너 1등이야. 은지니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거에서 1등!" 짜증스러운 외침에 그 애는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정도로 작게 속삭이며. ............. 갑자기 차도로 뛰어들었다. "김현광!!!!!!" 따가울정도로 세상을 울리는 내 목소리와 함께 그 애가 하늘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 바닥에 닿았을때. 그 애는 이미 아까의 그 애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평생. 그 애의 미친사랑에. 죽을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그 애를 버릴 수 없게 되버렸다. ................... ....... . 　´니가 없으면 난 죽어버릴건데.... 　은지니 없으면 김현광도 없는건데.... 　정말 죽고싶을정도로 김현광은 　은지니....사랑하는데.......´ .................. ......... . . 2003년 인천 ※아지트 "이제 오냐?" "담배 좀 그만펴. 너 폐가 아파한다." 공포영화라도 찍었는지. 연수구를 접수한답시고 나갔던 김윤서가 온 몸에 피를 덕지덕지 묻히고서 돌아왔다. 김윤서는 아지트에 들어오자마자 성큼성큼. 내 앞으로 걸어와 입에 물려진 담배를 뺏어간다. 지 걱정이나 할 것이지. 하여튼 지 걱정은 죽어도 안하는 계집애가 남 걱정은 죽어라 하지. "눈까시에 힘 풀어라야. 무서워 뒈지겠는데?" "까지말고 앉아. 너때문에 여태까지 시간만 족치고 있었어." 바나나맛 츄파춥스를 건네며 방글방글.웃는 수이연의 머리를 쓰다듬는 김윤서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보이고. 주머니를 뒤적여 새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김윤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잔뜩 눈쌀을 찌푸렸지만, 상관하지 않고 하얀 연기를 내뿜었다. 지독한 이 세상을 향해. ............... "정확히 일주일 후에 구산고등학교 뒷산에서 붙기로 했어. 지금 자료를 수집하는 중이긴 한데, 그쪽에선 아마 주요멤버 10명 정도에 아마 밑에 있는 애들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100명은 나올 것 같아." "으자으자. 일주일이나 기다리지 말구, 지금 바로 가면 안되나?!! 몸이 막 근질근질한데!!" "그러니까 내가 쫌 씻으라고 했지?"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로 방방 뛰어대는 김윤서를 역시 단 한마디로 제압하는 정리아. 하지만 김윤서는 더욱 더 활짝 웃으며 효선이를 보챘다. "엉엉??.. 나는 빨랑 붙고 싶은데에.." "그래도 정보를 제대로 수집하고 해야지. 그리고 윤서 너 방금도 싸우고 왔는데, 뭘 빨랑 붙고싶다야. 몸조리 하면서 좀 쉬고있어." "으으. 알았습니다아!!.." 효선이 말이라면 껌벅 죽는 김윤서는 냉큼 대답을 하고 수이연의 옆자리로 걸어와 앉았다. 그 뒤로 효선이는 일주일 후. 우리가 붙게 될 인천 연합에 대해 처음보다 더 자세히 설명했고, 주변에 어둑어둑해질무렵. 마지막 정리를 시작했다. ".....-그럼 앞으로 연오하고 아라는 인천 연합의 다크호스가 누군지. 거기에 대해서 좀 자세히 알아보고, 이연이하고 리아는 우리가 접수한 구역 관리 좀 해줘. 그리고 지니는. ....윤서처럼 몸조리 하고 있어. 우리의 최고 전력은 윤서하고 지니, 너니깐." "시러시러!! 이연이두 최고 전력할꺼야!! 왜 나는 띰빵시켜?" 수이연이 애기처럼 칭얼대자 효선이가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인자하게 웃으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아라가 들고있던 츄파춥스 한 박스를 이연이의 품에 안겨준다. 역시 머리 제대로 돌아가는 최효선이네. "이연인 이거 먹어두 몸조리 잘 되잖아." "응응!!! 이연인 이거 먹어두 몸조리 대땅 잘돼!!!" ............. 그렇게 세상에서 제일 단순한 수이연이 효선이가 안겨준 사탕박스를 소중한 보물 다루듯 안고 사라지자. 뒤이어 아이들이 하나씩 아지트를 빠져 나갔다. 마지막으로 아지트에서 쉬겠다는 김윤서를 놔두고. 주연오와 함께 아지트에서 나오는 길. ....1층 입구에서 날 기다리고 있는 BMW R1200RT. 씨발. "은지니 스토커왔다??.." "닥쳐." "휘유. 저 새끼 대단도 하지, 너같은 애 뭐가 좋다고 지금까지 쫓아다니냐?" "그렇게 대단하면 너 가지던가." 놀림 반. 안쓰러움 반. 그렇게 반반씩 섞인 말투로 말하는 주연오에게 아까 김윤서에게 날렸던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고 BMW R1200RT쪽으로 걸어갔다. "지니야아!!! 오늘도 잘 참아라!!!!!" "꺼져." "지니야, 왔어?" 입구를 나오자마자. 오토바이에 앉아있던 김현광이 헬멧을 벗어 던지고 풀썩 뛰어내렸다. 짧게 고개만 끄덕여준 나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자기가 벗었던 헬맷을 내게 씌우며, 싱긋 웃는 김현광. 지긋지긋한 새끼. "오늘은 내가 쏠게. 음, 요 앞에 아웃백 새로 생겼는데 거기로 가자." "집으로 가." "그래두우. 너 오늘도 싸웠다며. 나랑 같이 아웃백 가서 뭣줌 먹고, 약국 들려서 다친데 좀 보―" "씨발, 집으로 가라는 말 안들려?!!" 결국 짜증을 억누르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 김현광이 상처받은 듯. 젖은 눈동자로 나를 바라봤다. "후우. 화내서 미안한데. 집으로 가자, 나 지금 어디갈 기분 아니어서 그래." "...그래두...먹고 가면 안돼??..." "김현광. 너 여기서 더 싫어지게 만들지 마, 제발." 나조차도 정떨어질만큼의 싸늘한 말투가 나오고. 결국 포기를 했는지, 녀석은 어색하게 웃으며 내 앞에 올라타 핸들을 잡았다. 난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핼멧을 조용히 벗어 김현광의 머리에 씌워주고. 물끄러미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어렸을때부터 나보다 한뼘씩은 꼭 작았던 김현광의 등이. 어렸을때부터 나보다 한뼘씩은 꼭 작았던 김형광의 뒷통수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을정도로 넓어보였다. .....몸은 이렇게나 눈에 띄게 커졌는데, 왜 녀석의 심장은 하나도 자라지 않았을까. 나때문에. 아니면.... "지니야아!!!!!" "왜." "나는 죽을만큼 행복하다!!!!! 너가 내 뒤에 있어서!!!! 너가... 너가 내 뒤에 있어서!!!!" .......병신아. 나는 죽을만큼 싫어. 니가 내 앞에 있어서. 너의 그 절대 자라지 않는 심장에 내가 있어서. 그래서 나는 니가 죽을만큼 싫어,김현광.. 하지만 마음 속에 떠도는 말을 꾹 삼키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나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끔찍한 기분이었으니까. ................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하고. 인사도 없이 집으로 들어가려는 날 김현광이 뒤에서 안아버렸다. 수줍다거나. 창피하다거나 하는 마음보다, 짜증스러움이 먼저 솟구쳐 허리에 감겨져 있는 녀석의 팔을 풀어내려는데. 갑자기 내 어깨에 고개를 묻은 김현광이 슬프게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지니야, 니가 그럴때마다... 나한테 차갑게 등 돌릴때마다... 내 가슴이 울어...." "가지가지 한다, 진짜." "지니야..." "씨발, 뭘 바라는데. 여기서 더이상 뭘 바라는데!!" 항상 내 앞에서만 슬퍼지고. 항상 내 앞에서만 작아지고. 항상 내 앞에서만... 항상 은지니 앞에서만! 허리에 둘러져 있던 김현광의 팔을 거칠게 떼어내며 고개를 돌렸다. "작작해라, 너?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너 뒈지는 꼴 보기 싫어서 봐주는 것도 다 한계가 있다고, 씨발아. 어?" "...지니야...." "지겨워. 아주 넌덜머리 날정도로 지긋지긋해, 김현광 입에서 나오는 은지니 이름! 너 좋다는 애들 다 놔두고 왜 난데? 너한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고, 너라면 치를 떠는 날!! 왜 좋다고 하는건데?!" 입술 사이로 터져나오는 격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대문에 기대 선 얼굴은 무서울정도로 차분했다. 이런 내 모습이 익숙할법도 한데. 김현광은 여전히 상처받은 얼굴로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한다. 성질 더러운 은지니를. 모두들 미친개라고 피하는 은지니를. .........지겨울정도로 사랑해주는 김현광. .......... ................... ...그건 미친사랑이었다. 미친개 은지니에 대한 김현광의 미친사랑.. "....너니깐. 김현광이 죽고싶을정도로 사랑하는 은지니, 너니깐..." "하.. 하!! 진짜 기분 엿같네." 짧게 잘라진 머리를 뒤엉클며 대문에서 몸을 뗀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쥐고 있는 김현광을 향해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무방비 상태에서 얻어맞은 거라 그런지 녀석은 힘없이 바닥 위로 쓰러졌다. 눈물이 차오른 김현광의 눈동자를 보며, 어금니를 악물었다. ".....너가 안 그래도 죽을 때까지 은지니 옆에 있을 남자 김현광이니깐. 알아서 조절해, 오늘처럼 사람 미치게 만들지 말고." 잘 참으라고. 체면차리느라 길거리에선 소리도 안지르는 주연오가 말해줬는데. 결국 참지 못했다. 오늘도. 내일도. ......아마 죽을 때까지. "....김윤서랑 한판 뜨러 가야겠네." 불같이 일어나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아지트를 향하면서. 미친개 은지니를 말려줄 유일한 주먹,김윤서에게 향하면서. 은지니의 손등 위로 뜨거운 눈물이 한방울 떨어졌다. 2-22. Play Girl 까만색 소나기가 무섭게 퍼붓던 날. 온통 상처투성이인 그 아이. 그러면서 상처를 덮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큰 상처만 만들던 그 아이. 윤서에게 물었다. 내가 밉지 않냐고. 널 그렇게 만든 내가 원망스럽지 않냐고. 한영오빠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너에게 한영오빠처럼 살게 만든 내가 미치도록 저주스럽지 않냐고. 그러자 윤서가 대답했다. 맞아서. 맞은만큼 때려서. 그래서 아픈 윤서가 대답했다. .................. 그리고 그 날. 나는 다짐했다. 주씨집안 주연오가 아니라 칠공주의 주연오가 되기로. 상처를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상처를 보듬는 사람이 되기로. 나만 생각하는 못된 여자가 아니라 ............ 항상 너희들을 먼저 생각하는 못되지 않은 여자가 되기로..... ....................... ............... 　´너가 예뻐서 괜찮어. 김윤서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주연오같이 기가 막히게 예쁜 애여서 　....그래서 괜찮어. 그니까 눈물 닦어라. 　예쁜 얼굴 망가질라....´ ................... .............. .... 2002년 인천 보기좋게 그을린 어깨. 보기좋게 볼륨감있는 가슴. 보기좋게 들어간 배. 보기좋게. 보기좋게. ......... 온통 보기좋은 것 투성인 여자가 쇼윈도우 창 너머로 보인다. "아오. 존나 예쁘네, 정말." "지랄 그만하고 빨리 와라. 너때문에 또 늦게 생겼다." "진짜... 뭘 먹으면 이렇게 예쁘지? 아. 지니야 나 기절할 거 같아. 이렇게 예쁜 애 너 어디서 본 적 있어?" "주연오 살기 싫지?" 티끌만큼의 농담도 통하지 않는. 언제나 강철같은 지니의 협박에 오물조물 떠들던 난 조용히 입을 다물고 싱긋 웃었다. 얄쌍하게 차려입은 빨간색 배꼽티를 슬슬 문지르며 지니의 뒤를 따라 총총 걷는데 갑자기 고개가 휙 꺾어지면서.... 비가 올 듯. 먹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하늘이 보였다. "아... 나 머리 어제 했는데. 진짜 왕비싸게 주고 했는데. 오백년만에 모처럼 주연오스럽게 나온 머리였는데." "씨발년아 너가 주연오 맞지? 씨발. 와, 이제야 찾았네. 개같은 년. 앵간히 도망다녀야지. 후아. 이늬야!!!! 너가 말한 애 찾았다!!!!!!" 기분 나쁘게 내 머리를 휘어잡은 황토색 손. 내가 좋아하는 건 욘나게 화려한 오렌지색이지 이따위 볼품없는 황토색이 아닌데...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었다는 듯. 노란색 큐빅이 자잘하게 박힌 손톱으로 머리를 털어내던 나는 험상궂게 날 노려보는 황토색 손을 쳐다봤다. "너같이 못생긴 애. 너같이 볼품없는 애. 너같이 보기 안 좋은 애.등등등. 별 거지같은 수식어 다 갖다붙여도 모자른 아이야. 너 혹시 주연오 알고 이러는 거니?" "얼씨구? 쌍판만 반반한게 아니라, 말빨도 좀 된다. 이거냐?" "리아한테 좀 배웠거든. 하하. 근데 주연오 알고 이러는거냐니깐?"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황토색 손을 가진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이더니. 어느새 주연오를 중심을 둘러쌓고 서있는 모양새를 내고 있었다. 흠... 좋아좋아. 언제나 나는 가운데여야지. 주연오한텐 가운데가 딱이지. 그 때 지금의 자리를 흡족해하며 실실 쪼개는 주연오 앞으로 성큼 다가온 그림자 하나. "존나게 오랜만 주연오." "난 알지도 못하는 개쌍판이 아는척 하는거 싫어하는데." ......... 조금은 위험한 냄새. 이런 상황 수도없이 겪어보긴 했지만 언제나 심장 떨리게, 무서운건 어쩔 수 없나보다. 얼굴 가득 드리웠던 미소를 지우고. 불쾌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기억 안나, 솔직히. 그러니깐 소개 좀 해줄래?" "끝까지 잘난척이네. 진짜 씨발년이다, 너? 사람 하나 망가트려놓고...-" "이쁜게 죄라면 죄지. 응, 그건 인정." ".....얼마전에 헤어진 니 12번째 남자친구 최하균. 그 새끼 깔딱지 최이늬. 그게 나야, 소문난 걸레 주연오. 저번에 한 번 만났었는데 기억 못하네." 하균. 하균. 아.. 웃는 거 얄쌍했던 놈. "근데?" "너 하는 꼴이 하두 같잖아서 말이지. 좀 교육 좀 시켜주러 왔어." "꼴에?" "응. 꼴에." 그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눈 깜짝할 새도 아니고. 눈 깜짝할려는 새정도. 아무튼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자기를 최이늬라고 소개한 나보단 조금 덜생긴 여자애가 내 뺨을 후려친 것. 더불어 내 주위에 몰려있던 황토손 무리들의 발이 온 몸을 짓누른 것. 조금은 놀란 표정의 지니가 달려오는 것. 그리고..... "옴마나!!! 다들 통장 그만!!!!!" 골때리게 웃긴 가시네. 김윤서가 백마탄 기사처럼 번쩍.등장한 것. "얘 때릴데가 어디 있다구 막 굴려요, 이 개자식들아??..." "이건 또 뭐야." "이늬야, 얘 걔야.!! 기, 김윤서. 김한영 동생!!! 그, 그 김한영 빽믿고 나댄다는 걸레년 친구!!" "으악. 걸레는 너 주둥인데?" 최이늬라고 했던가. 너희들 정말로 잘못 건드린거다. 하도 들어서 괜찮은 말이 있고. 하도 들어서 열받는 말이 있는건데. 너희는 그걸 잘못 찍은거다. 아이고.. 꼬셔라. "하여간 끼리끼리 논다더니. 딱 그짝이네? 김윤서? 아무튼 너 까지말고 좀 꺼져줄래? 니네 오빠 지금 여기 없거든? 너가 믿고 까부는 빽. 지금 여기 없다구. 그러니까 좀 꺼져달라구요." "누가 김윤서 빽인데?..." 막 달려오던 지니도. 까불대던 황토손도. 비꼬던 최이늬도. 바닥에 엎어져 있는 주연오도 몽땅 다 얼어버렸다. 윤서의 싸늘한 눈빛에. 윤서의 싸늘한 목소리에. ........ 오금이 저릴정도로 싸늘한 분위기에. ................. ....... 그러면서도 여전히 웃고 있는 모습에. "다시 한 번 그 걸레같은 주둥이 나불거려봐, 이 개자식아." "무..뭐?" "누가 내 빽이라고? 와. 지나가던 참새가 웃다 죽겠다야. 김윤서한텐 오빠라는 거 한개두 없는데. 후. 후아후아. 후우. 후아... 아. 심장 갑갑했어, 지금." 그때까지만 해도. 윤서가 정말 숨막히다는 얼굴로 가슴께를 부여잡을때까지도. 윤서가 웃는 얼굴로 무섭게 중얼거릴때까지도.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 엄청난 폭발이 있을 거란 걸. .............. 아슬아슬한 윤서를 터트리는 최이늬의 마지막 한 마디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그. 그- 근데 아까워서 어쩌냐!! 너가 인천짱 김한영 빽 믿고 이 지랄 떨정도로 주연오 가치있는 년 아닌데!!! 저 년 시궁창에서 굴러먹는 존나 더러운 걸레년인데!! 니 더러운 빽 쓸 가치도 없는 그런 기집애 한테 너 지금 괜히 힘빼고 그런건데에!!!!! 네가 지금 같잖은 우정 지킬라고 발악할 가치, 손톱만큼도 없는 년이 주연온데!?!!" 오기였을까. 아님 발악이였을까. 좌중을 압도하는 윤서의 분위기에 밀렸던 게 영 찝찝했던 모양인지. 그러지 않아도 될 것을 최하늬는 약간의 액센트까지 주며 외쳤다. 그리고. 그리고..... 일은 터졌다. 한영오빠 이름 나올때마다 이 악물고 견디던 윤서가. 그 어떤 말을 해도 주먹 쥐고서 꾹꾹 눌러담던 윤서가. 끝내는 자기 자신을 할퀴게 될 슬픈 싸움을 시작하는 일이. "너 인생 최고의 실수 두개. 우주최고로 엮이기 싫은 새끼랑 김윤서랑 계속 엮어 놓은 거. 그리고 그거 참을만큼 소중한 내 친구. 걸레같은 주둥이에 담은 거. 그거 두 개. 너 인생 최고 실수." "꺄..꺄악!!!!!!!" 왕년에 태권도 좀 배웠다는 윤서의 매끈한 다리가 허공을 휘두르자, 최하늬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엎어졌다. 놀란 황토손들이 윤서에게 달려들었지만, 가뿐히 때려눕힌 윤서는 인정사정없이 최하늬의 대가리를 후려차 버렸다. 처음으로 보는 윤서의 싸움. 번개같은 지니는 싸움판으로 뛰어 들어 윤서와 같이 싸우기 시작했지만, 난 여전히 멍하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윤서가 싸우고 있다. 그 누가 시비를 걸어도 그 누가 싸움을 걸어도 묵묵히 받아주기만하던 아이였는데. 한영오빠처럼만은 되지 않겠다며. 한영오빠처럼 싸움에 미쳐 주위를 둘러보지 못하는 바보는 되지 않겠다며. 묵묵히 받아주기만하던 아이였는데. 그런 아이가 싸우고 있다. 주연오때문에. 얼굴밖에 볼 거없는 주연오때문에. 남들한테 얼굴 믿고 까부는 년이라고 손가락질받는 주연오때문에. 남자 가지고 놀다 결국 벌 받는 못된 주연오때문에. ............. 빌이먹을 친구년 때문에.... 2-23. Smile Girl 옛날옛날. 세상에서 제일로 귀여운 수이연 공주가 사는 칠공주 왕국엔 수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찡그리는 사람. 예쁜 사람. 귀여운 사람. 똑똑한 사람. 표정 없는 사람. 따뜻한 사람. ............ 그리고 텅 빈 사람까지요. 그 사람들은 기억도 안나는 아주 어릴적부터,훌쩍 커버린 지금까지. 서로의 옆에 서있는 것이 사람들이 숨을 쉬는 것처럼 아주 당연한 일이 되버린 사람들이었어요. 이야기는 그 중에서 가장 기쁜 웃음을 만들어 아낌없이 나눠주는 아이의 눈물에서부터 시작되었답니다. 항상 차가운 아줌마 앞에서도 항상 변하는 아저씨 앞에서도 항상 자유로운 오빠 앞에서도 기쁘게 웃던 그 아이는 강하게 웃던 그 아이는 잔인한 비가 퍼붓던날 밤.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고. 그 눈물을 입술에 묻어두고. 묻은 것을 가리기 위해 웃음을 짓고. 그러면서 조금씩. 조금씩. 비어갔어요. 결국 그 아이는 가슴 속에 아무것도 남기지 못하고 텅 비어 버렸어요.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나는 게 아니였답니다. 유난히 하늘이 푸르렀던 날. 유난히 햇님이 반짝거렸던 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로운 난간에 선 아이가 갑자기 수이연 공주님에게 묻는 것이었어요. ".....옥상 난간에 수도없이 올라오면서 왜 단 한번도 아래로 떨어진 적 없는지.. 죽고싶으면서, 죽지 못해서 사는 인생이면서 왜 안 죽는건지.. 궁금하지??...궁금해 뒈지겠지?? 엉??..." 감춘 눈물을 더 감추기 위해 웃는. 참 아픈 얼굴로 말이예요. 수이연공주님은 정말 궁금한 듯,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모습에 난간에 올라선 아이는 또다시 아픈 얼굴로 웃으며. ........말했어요. ..................... ............ 그리고 그 날. 세상에서 제일로 귀여운 수이연 공주님은 세가지의 기특한 생각을 했답니다. 그 아이가 나눠주었던 기쁜 웃음을 이제 자기가 나눠주겠다고요. 그 아이가 모두를 대신해 지고 있던 짐을 이제 자기가 나눠지겠다고요. 웃으면서 우는. 슬프지만 강한. 그 아이에게 진짜 웃음을.... 찾아주겠다고요. ......................... .......... 　´.....하늘이 무너졌어도... 아직 세상이 　남아 있어서... 빌어먹을 하늘은 아직 　못 잡았지만.... 좋아죽는 세상을 벌써 　잡고 있어서. 그래서. 　그래서 김윤서가 바닥까지 내려가지 않는 거다. 　그러니까 항상 고맙다고...항상...매일매일.. 　눈 뜨고 있을적마다....´ .......... .. ..................... . . 2003년 인천 "냠얌쩝쩝." "나가거라. 네 얼굴 보고 싶지 않구나. 한영이 다시 집으로 데려오기 전까지 집으로 들어올 생각마라." "할짝헐쩍." "한영이가 나간다 그래도 네가 붙잡았어야지. 애가 왜 그렇게 생각이 짧아?" 언제 들어도 차갑기 그지 없는 윤서네 엄마님 목소리를 벗삼아 윤서네 대문 앞에 쪼그려 앉은 이연이는 바나나맛 사탕을 할짝이며 눈을 깜박였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라는 효선이의 말에 불퉁불퉁. 심술딱지가 나있을 윤서가 궁금해 찾아온 거였는데... 이연이는 또 윤서의 상처를 듣고야 말았습니다. "잘나빠진 추여사가 어련하겠어요. 낄낄....들어오래두 눈썹 깜짝 하나 안할 껀데. 추여사가 그렇게 말해두 나 들어올 맘 입꼬리만큼도 없으니깐. 엉?! 그러니깐... 여기서 빠빠이. 응응. 김한영 와서두 영원히 빠빠이..." 덜컥. 문이 열리고,고개를 돌린채 경쾌한 말투로 손을 흔드는 윤서가 보였습니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려다 지리릿.하고서 쥐가 올라버려 가만히 쪼그려 앉아있는데 쾅-하고 문을 닫은 윤서가 어느새 이연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이연이 안니융." "엉!!!!!윤서도 안니융!!!!" "수이연 폼 지대로 구겨지네??..하하. 거기서 뭐하냐." "그게. 엉. 너 기다리구 있었어. 이거 먹어." 깜찍하게 도리질을 친 이연이가 방금 전까지만해도 이연이 혀가 낼름 낼름거렸던 바나나맛 사탕을 내밀자. 꿈틀꿈틀. 윤서의 눈썹이 묘하게 일그러지더니. 이내 픽하고 웃음을 터트린 윤서는 이연이의 머리를 잔뜩 헝클다가 휘적휘적.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으아죠!!!!!! 같이 가자, 윤서얌!!!" 윤서의 뒷모습이 사그락사그락거리면서 사라지기 전에. 다리에 오른 쥐들을 꾸욱 참아낸 이연인 후다닥 일어나 서둘러 윤서의 뒤를 쫓아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상처받은 윤서는 동네에서 알아주는 오락실인 자가라치 오락실로 향합니다. 윤서는 사실 화가날 때마다 펀치게임을 하는 펀치게임광이거든요. 이연이가 바나나광인 것 처럼요. 아까보다 손톱만큼은 작아진 사탕을 아그작. 깨물어 먹은 이연이는 주머니를 뒤적여 새 사탕을 꺼내 입에 다시 물었습니다. 이렇게 쉬운건데. 구겨진 마음은 이빨로 깨먹고. 새로운 마음 꺼내면 되는건데. 이거 진짜로 쉬운건데.. 왜 윤서는 아직도 이걸 모를까요. 이연이 심장이 콩닥콩닥. 쿵덕쿵덕.자진방아를 돌립니다. 상처를 감추는 방법뿐이 모르는 바보같은 윤서를 보며 이연이의 심장이 자진방아를 돌립니다. "윤떠얌..." "엉. 왜 이떤아??.." "나는 수이연인데. 세상에서 젤로 예쁜 수이연공주님인데.?" "이름 놀림은 너가 먼저 했단다. 공주님아." 방긋방긋. 모TV에서 방영되고 있는 텔레토비에 출연하고 있는 그 아기햇님처럼 미소를 짓던 윤서는 오락실 앞에 있는 펀치기계에 또르릉♪ 동전을 넣고 한걸음 물러섰습니다. "윤서얌..." "엉, 이연암." "억!!! 이연이 암 안걸렸는데!!! 왜 자꾸 놀리냐아!!" "이름놀림은 너가 먼저 했대두." 얄밉게도 눈을 찡긋인 윤서는. 펀치기계 앞에선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힘모으기를 간단히 생략해버린채. 곧게 서있는 펀치기계를 가볍게 후려쳤습니다. 삐용삐용♪♬♩♪♪ 또 언제나 그렇듯. 요란한 벨소리와 함께 펀치기계 점수판이 빨갛게 반짝이고... 곧이어 팡파레가 터지면서 윤서의 점수가 최고점수판에 턱.하고 박혔습니다. 무척이나 살짝 친 거같은데. 역시 윤서에게는 이연이가 모르는 거대한 괴력이 숨겨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전요, 윤서가 펀치게임을 하면서 최고 기록을 세우지 않은 적을 본 적이 없습니다. 윤서는. 대단합니다. "아요..펀치기계야 아푸지?? 이연이가 호해주고 싶다아." "그럼 해주세요." 심드렁하게 대꾸하는 윤서를 향해 입술을 비죽인 이연인 치마 끝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아무데서나 잘 놀고 있어. 이연이는 바나나 우유 좀 먹고 올테야." 이연이의 말은 들리지도 않는 듯이. 모른척 다시 펀치기계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윤서를 뒤로하고 이연이는 오락실에서 좀 멀리 떨어진 편의점으로 걸어갔습니다. 룰루랄라. 신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흥얼흥얼 편의점을 향해 가는데.... 가는데...... 되게되게 익숙한 뒷통수가 하나 보였습니다. 윤서가 아무리 죠패도 나타나지 않던 뒷통수. 조만간 우리 칠공주와 인천 하늘을 놓고 맞짱 뜨게 될 뒷통수. ......... 그리고 윤서를 웃으면서 울게 만든 뒷통수. "오빠아!!!!!" "어?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우리 시스터 친구 이연이네??.." "체인지됐는데요. 세상에서 젤로 귀여운 이연이 친구가 바로 오빠의 시스터지요!!" 폴짝폴짝. 이연이는 맛 좋은 엄지공주를 찾았을 때의 두꺼비 왕자처럼 신나게 뛰어대며 여러 친구들에게 둘러쌓인 한영오빠에게로 달려갔습니다. 허벅지를 찍어주고 싶은 마음을 살짝 감추고 헤헤 웃자 한영오빤 특유의 상큼 미소를 날리며 이연이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이런 거 보면 윤서랑 오빤 정말 땅콩과자같이 똑같은데. "우리 시스턴 잘 지내지?" "네에!! 진짜 까진데 물파스 바른 거 같이 아주아주 잘 지내요! 오빠두 잘지내죠?" "그럼. 깜찍이들이 자꾸 오빨 노리는거 빼고 아주아주 잘 지내." 비꼬는건데. 리아가 그러는 것처럼 웃으면서 욕하는건데... ......역시 인천 하늘을 쥐고 있는 사람처럼 너그러운 한영오빤 싱긋 웃으며 오히려 이연이에게 바나나사탕은 한가득 사다줬습니다. 받으면 안되는데. 뇌물인데!!!! 도 불구하고 바나나의 마력에 못이겨 결국 사탕을 받아버렸습니다. "윤서 잘 보살펴달라는 뇌물." "오빠가 이거 안줘두 이연인 윤서 잘 웃기고 그러는데..." "응. 근데 거기서 더 웃겨주고, 재미있게 해주고 또. 에이. 아무튼 그래달란 의미로. 알지?" .............. 난 옛날부터 그게 싫더라, 오빠. 오빠 표정. 오빠 얼굴. 오빠 웃음. 거기에 잔뜩 베어있는 가진 자의 여유로움. 윤서도 싫었을 거야. 그래도 윤서는 웃었는데. 오빠보면서.... 오빠좋다고.... 철모를적 윤서는 그렇게 웃었는데. 오빠가 그걸 버렸어요. 오빠가 그걸 망쳤어. 오빠가 윤서를..... 윤서를 울게 만든 거야. 윤서를 울게 만든 오빠가, 이연이는 지금 죽이고싶게 미워죽겠어. "오빠.....목닦구서 기다려요. 이연이가 윤서 아프지 않게 오빠 목구녕 따버릴꺼니깐. 윤서 다시 진짜로 웃을 수 있게 오빠.... 이연이가 혼내줄꺼니깐...." 2-24. 7 칠이란 숫자가 특별해서 우리가 특별해진게 아닙니다. 우리가 일곱이기때문에 칠이란 숫자가 특별해진겁니다. 7은 칠이여서 특별한게 아니라. 우리가 일곱이여서 특별한 것 입니다. ................. ............. ....... . 2003년 인천 타닥타닥. 하얀색 스탠드 불빛으로 가득찬 방 안. 벌써 하루 앞으로 다가온 인천 연합과의 싸움을 위해 여기저기서 아라가 모아온 자료를 정리해 문서 파일로 저장 해놓고 있었다. 시계 바늘은 새벽 3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지만, 약간의 수면만으로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나는 개운한 정신으로 자료를 정리 할 수 있었다. 자료 정리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갑자기 짧은 도착음과 함께 모니터 위로 새로운 메세지가 떴다. [특S급. 인천 연합의 숨겨진 다크호스.] 웬지 모르게 다급함이 느껴지는 메세지에 마우스를 움직여 서둘러 메일함을 클릭했다. "인천북중, 인천공고, 상일체고. 세 학교에 재학 중인 인천 연합의 숨겨진 다크호스, 폭풍. 인천북중 구온승. 인천공고 최강. 상일체고...... 한...가람??..." 어지간해서 놀라지 않은 내 심장이 명조체로 쓰여진 그 세글자에 벌떡 튀어나왔다. 믿기지 않아 안경알을 빡빡 문질러 다시 봤지만 여전히 내 심장을 놀라게 한 세글자는 모니터 안에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니가??...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리던 나는 급하게 요동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다시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구온승은 연오가, 최강은 내가 따로 맡아서 더 캐내기로 했는데. ....한가람은....어떻게 할까, 효선아?] 세 명의 아이들에 대한 짧은 소개와 이력등을 쭉 훑어내리고. 맨 마지막에 써있는 조금 슬픈기가 묻어나는 아라의 물음. 뻑뻑해진 눈가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다크호스라더니... 정말 다크호스긴 하네요. 후우. 오빠 참 대단한 사람이야." 힘겨운 한숨을 토해낸 나는 눈을 떠 컴퓨터 옆에 자리한, 오래되 낡아버린 액자를 바라봤다. 액자 속에는. 지금보다 훨씬 엣되 보이는 나와 지금보다 훨씬 안정 되보이는 윤서와 ........ 지금보다 훨씬 솔직해 보이는 한영 오빠가 웃고 있었다. "오빤 윤서에게 얼마나 많은 걸 뺏어가야 직성이 풀릴까요. 아무리 머릴 굴려봐도 그 답, 난 10년이 넘어도 못찾겠어." 적어도 저때는. 온통 사심으로 가득찬 눈길로, 날 이용해 먹기 위해 혈안이 된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처음으로 숨통을 틔게 해준 윤서를 만났던 저 때는. 저때는 그러지 않았는데... 윤서도, 오빠도, 서로를 끔찍하게 아꼈었는데. 너무 예쁘게 서로를 좋아해줬는데. 어째서.. "솔직히 윤서가 연합을 치자고 말했을 때부터 내키지 않았어요. 다칠껄 뻔히 알았으니깐. 결과가 어쨌던 윤서는 결국.... 지금보다 더 위태로운 모습으로 변했을테니깐."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책상 위에 놓여진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전화를 걸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였지만, 저 밑바닥에서부터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얼마 울리기도 전에, 잠결에 받은 것이 역력한 리아의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 늦은 시간에 왠일이니. 요즘 가뜩이나 잠 못자서 스트레스 받는 거 알면서...] ["미안, 상의할 게 있어서."] [후우. IQ 200의 대천재 최효선님께서 나한테 뭘 상의할 게있다고. 어지간한 전략은 니 혼자서도 넘칠만큼 잘 짜잖아.] ["...감정이 내 눈을 가려 버릴까봐 걱정이 되서말야."] [....또 김윤서 일이구나. 하여간 이 기지배는 남 편한 꼴을 못보지, 아주. 그래 이번엔 무슨 일인데?] 겉으론 툴툴거려도 내심 윤서 걱정이 됐는지,리아는 처음보다 한결 맑아진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다 어서 말하라는 리아의 재촉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천연합에...한가람이 있어."] [....그걸 이제야 알았어?] ["뭐? 그럼 넌 벌써 알고 있었단 말이니?"] 조금 격양된 목소리로 되묻자 시니컬하게 웃던 리아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네가 모를정도로 비밀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말야. 왜 한가람이 윤서가 연합하고 붙는 걸 그렇게 말리는 지. 윤서라면 죽을 수도 있는 그 새끼가 왜 윤서가 내키지 않는 짓을 골라 하는지. 진작에 눈치 챘어야 최효선일껀데? 너 요즘 피곤한거야??..] 진심으로 걱정되는 듯. 아까보다 훨씬 자상해진 리아의 목소리에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 간신히 책장에 몸을 기댄 나는 막연한 두근거림을 느꼈다. ["그럼... 그럼....."] [...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연합과의 싸움을 포기할 이유는 없어. 김윤서가 지금 어떤 마음으로. 무슨 속으로 싸우고 있는지 잘 알잖아?] 내가 무슨 말을 할건지 미리 알아챈 리아가 날카롭게 말했다. 그래. 나도 알아, 리아야. 지금 윤서가 어떤 마음으로. 무슨 속으로 연합과 싸우는지 미치도록 잘 알아. 하지만 안되는 거잖아. 처음부터 쭉 버림만 받은 윤서. 배신만 받은 윤서, 이대로 연합과 싸우면 안되는 거잖아. 상처따위로 끝나지 않을 싸움. 윤서, 더이상 하면 안되잖아... [지금 니가 무슨 생각하는지 다 아는데. 다 느끼는데. 그래도 안돼. 니가 지금 여기서 이번 싸움 없애버리면, 무산시켜버리면! 어쩌면 윤서. 싸우고 났을때보다 더 심하게 무너질지 몰라. 냉정하게 판단해, 평소처럼. 김윤서는 물론 우리 목숨까지 달린 문제야. 여기까지 우리가 어떻게 왔는데. 이번 일이 손바닥 뒤집듯 그렇게 쉽게 바뀔 것 같아? 99%의 불안이 있어도 1%의 승산만 있으면 되는 게 너잖아.] 콧잔등이 시큰한게.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괜스리 윤서의 하늘님이 미워진다. 그 앤 아무 잘못도 없는데. 어째서 그 애에게 이런 슬픔만 주시는 겁니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만 안겨 주시는겁니까. 우리들이 가진 상처보다 더 큰 상처를 안고 사는 앤데. 어째서 하늘님, 당신은! ............. 그 앨 그렇게 데려가고 싶어 안달이십니까. 어째서요..... [지금 윤서를 살게 하는건 우리때문만이 아냐. 목표가 있기때문에. 자기가 가진 상처, 이 악물고 버텨낼 만큼 이루고 싶은 목표가. 깨버리고 싶은 상대가 있기 때문이야. .......윤서, 여기서 더 힘들게 하지 말자.] ["윤서...손 하나 까딱 안할 거야. 거기서 한가람 보는 순간! 윤서... 아무것도 못할 거야."] [병신도 아닌데 설마 손 하나 까닥은 하겠지.] ["리아야..."] [너만 김윤서 걱정하는 거 아냐. 너만 김윤서 불쌍하게 생각하고, 자꾸 돌봐주고 싶은 거 아니라구. 어떤 게 그 기지배 목숨을 조금 더 길게 이어줄지. 어떤게 가장 최상의 방법일지. 니 머리속에 떠오른 그 생각. ....그대로 지키면 돼.] 냉정하리만큼 차갑게 말을 끝낸 리아는 마지막 한마디를 덧붙이고 빠르게 전화를 끊었다. 일정하게 울리는 기계음을 들으며 스르륵. 바닥에 주저앉았다. 리아의 마지막 그 한마디가 불안했던 두근거림을 거짓말처럼 싸늘하게 얼렸다. 내가 모든 일에 앞서 항상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내가 모든 일을 계획하기 앞서 항상 최우선으로 꼽는 것. 한가람이란 세 글자에 잠시 그 것을 잊고 있었다. 그래. 잠시 잊었어. 절대 예상하지 못했던 인물이 연합에 버티고 있어서. 그게 하필 한가람이여서. 윤서에게 항상 한영오빠 대신이였던 한가람이여서. 그래서 잊었어. 예전처럼 또 무너질 윤서가 두려워서. 그래서 잊었던거야. .................. 우리가 일곱이라는 것을. [윤서의 친구이기전에 우린 칠공주야, 그걸 기억해.] 2-25. 나쁜 여자 항상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짓는 어머니가 어느날 내게 물었다. 금쪽같은 시간을 쪼개 만나는 그 아이들이 내게 어떤 존재냐고. 감정 표현이 유난히도 없는 네게 진실된 얼굴을 하게 만드는 그 아이들에게 과연 어떤 가치가 있냐고. 평소와는 달리 잔뜩 굳은 얼굴로 묻는 어머니를 향해 무심히 고개를 돌린 나는 픽 웃어버리고 말았다. 웃음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 어머니가 재차 물을때. 어머니 앞에선 항상 예의바른 모습만 보여왔던 내가. 연오처럼 거만하게 턱을 쳐들고 효선이처럼 자신감 베인 눈빛으로 아라처럼 사심없는 순수한 얼굴에 이연이처럼 아이같은 미소를 지으며 지니처럼 무시무시한 분위기를 띄우고 윤서처럼 하늘을 담은 채 그리고 마지막. 나처럼 상대를 압도하는 목소리로. 내 눈짓, 표정 하나하나에 그 아이들을 담아내 말했다. 그리고 어머닌 인정했다. 나에게있어 그 아이들이 어떤 존재인지. 나에게있어 그 아이들이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반박의 여지도 없이 아주 깔끔하게. ..................... .............. 　´정리아 미래를 맡겨도 될 친구들입니다. 　그 어떤 결과가 나올지라도 후회없는. 　그런 친구들이요.´　 ..................... ........... ................ . . 2003년 인천 비가 내렸다. 하늘도 이 싸움을 원하지 않았는지, 온 몸을 진득하게 적시는 비가 내렸다. "으흐으흐. 기대기대! 조빵나게 기대!!!" "응! 윤서야, 이연이두 기대기대!!! 우루르쾅쾅할정도로 기대기대!!" "정신사나워, 자리에 앉아 둘 다." 버스 안 사람들이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지도 모르고 방방 뛰어대는 시끄러운 두 여자(☜김윤서&수이연)를 한방에 조용히 시키고.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 지금 우리는 일생일대 최고의 싸움을 하기 위해 월미도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기쁘다.!!!!! 미치게 기쁘다!!!!!!! 기쁨이 철철 넘쳐 흘러 아마존을 뒤덮겠다아!!!!!!...." "좀 닥쳐라 김윤서?" "응응!! 닭가져오면 내가 싸다구 한방 거하게 날려줄께!!!!!" "씨발. 귀청 떨어지겠네 아주." 지니는 결국 욕설을 내뱉으며 귀를 틀어 막았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불구하고 윤서는 여전히 창문을 열어 소리를 꽥꽥 질러대고 있었고. 참다못한 기사아저씨가 내려!를 외치자... "엉!!! 아저씨가 먼저 내리면!!!!" "거 어린 아가씨가 목청도 크네! 쫌 조용히 갑시다!! 아가씨 혼자 있는 거 아니잖아!" "엉엉!!! 나는 혼자가 아니야, 그거 잘봤어!!! 하하. 선동렬 연기가 장난이 아녔지..?!" "쉬쉿. 윤서야아!! 선동렬이 아니라 선동엽이야!!! 동엽!!" 저따위 상대할 가치도 없는 유치하다 못해 아주 짜증나는 말을 내뱉었다. 저런 바보들. 이연인 원래 저런 애가 아니였는데, 윤서때문에 물들었다며 꺼이꺼이 우는 연오를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어느새 기사 아저씨 옆으로 가서 쫑알쫑알 떠들고 이는 시끌이들(☜다시 한번 말하자면 김윤서&수이연콤비)의 귀떼기를 잡고 뒷자석으로 걸어왔다. 평소같았음 투덜거렸을 윤서가 웬일인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을 덥석 잡는다. "너희때문에 내가 얼굴을 못들겠어. 이연이 너까지 왜그래?" "리아야!!" "김윤서, 너 조용히 못해?!!" "학종이가 됩시다, 학." 역시 발빠른 이연인 잽싸게 내 손에서 벗어나 효선이 옆으로 쪼르르 달려갔고, 원조 시끌이 윤서는 여전히 웃으면서 내 손을 잡고 있었다. ........그렇게 기쁘니? 결국 죽어버리고 싶을만큼 아플텐데. 네가 항상 올라가는 그 난간에서 뛰어 내리고 싶을만큼 울텐데. 그렇게도 기쁘니, 윤서야. 바보같은 내 친구, 윤서야...... "어어어!!! 왠일이냐아!? 은지니도 울고 갈 포커패쓰 정리아가 막막 껍질 벗네?!" "포커패쓰가 아니라 포커페이스라고 몇 번을 말해?" "두루치기나 그게 그거지. 히히. 근데 정리아 껍질 벗는건 욘나게 좋은데.. 껍질 벗은 알맹이가 슬픈거면. 그런거면 나....." 꿀꺽. 모처럼만에 나온 윤서의 진지함에 뒤에서 듣고있던 연오와 아라. 그리고 믿었던 효선이마저 침을 삼키며 귀를 쫑긋였다. 물론 나와 귀청을 찢어내리는 윤서의 목소리에 짜증이 난 지니는 빼고 말이다. "나..... 비다!!!!! 억!!!!! 나비다!! 리아야 저거봐바, 욘나 신기해!??!!" 니가 그럼 그렇지. 김윤서는 그 약간의 진지함을 못참고 고새 경로인석에 앉아있는 흰머리 할머니(☜김윤서가 말한 나비는 그 할머니 머리에 꽂혀있는 나비모양의 큐빅삔이었다.)에게로 달려갔다. 혀를 끌끌차는 나와는 달리 나머지 애들은.심지어 지니마저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하여간... 지버릇 남 못준다더니. "할머니 나비가 흰밭에 앉었어!!! 어어? 할머니 나비에서 막 그런 냄새나! 너구리 응가냄새!!!!" "지랄말고 썩 꺼지라!!" "으아!!!! 할머니 입에선 잠자리 응가냄새 난다!!! 와. 할머니 똥푸는 사람이구나?" 저거 또 한대 처 맞을 소리하고 있네. 윤서의 농담아닌 농담에 나비삔을 꽂고 계신 할머니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푸르르 하더니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할머니는 들고 계시던 지팡이로 윤서의 머리를 퍽.내리치셨다. 참 꼬숩다, 김윤서. 망아지처럼 날뛸때부터 알아봤어. "이이!!! 마, 망할 가시네를 봤나!!!!" "으악. 아퍼!!!! 라고 할 주 알았어? 하하하. 할머니 센스빵쩜이다!!! 나는 안직 안 망했거든. 안직은 안망하구 쫌이따 망할 예정이거든.!!" "뭐, 뭐라카노!!?" "응응. 나는 페리카나 치킨이 젤로 맛있더라." "....어... 어이구, 혀...혈압!!!" 윤서의 말장난에 할머니께선 뒷목을 잡고 금방이라도 쓰러지실 듯 몸을 꺾으셨다. 그 모습에 마음 약한 아라가 벌떡 일어나 할머니 옆으로 달려가고. 갈수록 유치해지는 김윤서는 빙글빙글 웃으며 할머니를 계속 놀렸다. "이!! 이 망할녀언!!!!" "어!!!!?" 아라의 부축을 받으며 할머니가 쉰 목소리로 외치자 윤서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을 번쩍 들었다. 그 모습에 순간 움찔한 할머니. 하지만 움찔한 할머니가 민망하게 윤서는 방방 뛰며 뒷문으로 달려갔다. 곧이어 월미도에 도착한 버스가 멈추고, 뒷문이 스르르 열렸다. 제일 먼저 버스에서 내려간 윤서가 무슨 생각에선지 다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 "할머니 뒷통수가 막 외롭다 그러잖어. 나비가 뽀로롱하면서 심심하다 그러길래. 또 할머니 울 할머니 닮어서, 그래서 그랬어.!!! 기니깐은 삐지지말어. 그리구... 그리구 할머니!! 좀 씻어!!! 진짜로 너구리 응가냄새나, 할머니 머리서!!" 코 끝이 싸해지기도 전에 분위기를 싸하게 만드는 윤서의 마지막 한마디. 결국 할머닌 뒷목을 부여잡고 쓰러졌고,그 덕분에 아라는 당황하며 할머니를 모시고 병원으로 달려가야만 했다. 연합과 만나기로 한 월미도 근처 으슥한 공사장. 아라만 고생시킨다며 효선이에게 한바탕 설교를 듣던 윤서는 공사장에 들어서자마자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살짝 떨리는 얼굴로 주먹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 가끔 무모하리만큼 앞뒤 안보는 널 보면 한심한데.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몸부터 나가는 널 보면 참 한심한데. 그런데..... 지금은 가슴이 아프다, 윤서야. 널 잃게될까봐. 널 다시는 못볼까봐. 너와 투닥거리는 일을 다시는... 하지 못할까봐. 그럴까봐. 가슴이 아프다. "개새끼들아아!!!!" 저 멀리 모여있는 연합의 무리를 확인하자마자 말릴 틈도 없이 빠르게 달려나가는 윤서. 뒤이어 지니와 이연이가 급하게 쫓아갔고, 연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걸어갔다. 마지막으로 남은 효선이와 나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주변 감시도 할 겸. 싸움이 잘 보이는 위로 올라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리아야." "응?" ".....윤서가 이겨냈음 좋겠다. 우리 생각해서라도 윤서, 꿋꿋히 일어섰음 좋겠다. 그치?" "아까 버스에서 못봤어? 저 가시네는 쉽게 뒈질 운명이 아닌거야. 간땡이가 보통 부었어야 말이지. 그 커버린 간, 아까워서라도 쟤 이겨내. 그러니깐 걱정말고..." 효선이에게 차분히 말을 하던 나는 순간 입을 다물고 어느 한 곳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윤서와 이연이, 그리고 지니가 연합과 즐겁게 싸우고 있는 장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기둥 뒤에 서있는 다섯남자. .......멀리서지만 난 확신할 수 있었다. 다섯명의 남자 중 눈에 띄는 호랑이 인형을 알고 서있는 남자. 윤서의 오빠. 김한영을. "똑같이 웃는데... 정말 똑같이 웃는데..... 참 이상하지. 윤서가 웃는건 짜증날정도로 슬픈데. 오빠가 웃는건 짜증날정도로.... 기쁘네." 분해서 그런지 꽉 쥐어진 주먹에서 윤서나 지니의 손에서나 들릴법한 뼈소리가 우드득. 하고 났다. ...........이 싸움이 끝나면. 어떤 결과를 내든 이 빌어먹을 싸움이 끝나면. 난 내 방식대로 복수해줄거야. 윤서를 위태롭게 만든 당신, 김한영. 정리아 방식대로 죽고싶게 만들어 줄 거야. 그게 김윤서를 지키고. 칠공주를 지키는 내 방식이야. 절대로. 다시는...... 그렇게 웃게 만들지 않아. "리, 리아야! 윤서가... 윤서가..." 효선이의 다급한 외침에 살기등등했던 생각을 지우고 고개를 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효선이는 방금 전 김한영이 서있던 자리를 가리켰고. 그 곳을 향해 다시 시선을 돌린 난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버리고 말았다.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랬는데. 윤서가 만나지 않길. 윤서 인생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될 두 사람과 만나지 않길 바랬는데. 너무도 쉽게 윤서는 그 두 사람을 만나버렸다. 짜증날정도로 아파 보이는 등으로. 짜증날정도로 슬퍼보이는 뒷모습으로..... 2-26. 김윤서 꿈일까. 또 그 지독한 악몽일까. 비에 흠뻑 젖어서 김한영의 뒷모습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김윤서가 보이는. 그 악몽일까. "어째서 니가..여기 있는...건데?..." 머리로 생각하기도 전에 불쑥 말이 먼저 튀어 나왔다. 뻔뻔한 얼굴로 날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서있는 김한영 옆에. 내가 알고있는 그 아이가 맞는지, 의심될정도로 다른 얼굴로 서있는. 가람이를 향해...... "시스터♡ 내가 얼마나 보고싶었다구. 왜 이제야 오빨 찾아온거니. 너무너무 보고싶-" "넌 닥쳐, 개새끼야. 그리고 한가람 대답해, 니가 왜 거기 서있는지. 딱 1분 23초줄게." "시스터!? 오랜만에 만난 오빤 안중에도 없는거야?! 오빠 너무 슬프다?!" 당장이라도 김한영의 얼굴에 주먹을 날려버리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고서 가람이를 향해 빙긋 웃었다. 하지만 가람인. 길거리에 죽어있는 참새 한마리조차 불쌍해 직접 무덤까지 만들어주던 천사같은 그 가람인. .......... 대답대신 싸늘한 눈으로 날 바라보기만 했다. "....응응. 이제야 알았다. 너가 내 뒷통수 후린거지? 깜찍하게 속이고서. 김한영 밑에 붙어있는 주제에 날. 날.. 속이고서 뒷통수 후린거구나. 글쿠나. 글쿠나아.....?" 입술 사이로 피식. 비웃음이 튀어나온다. 어느새 김한영이 내 옆구리에 끼워넣은 호랑이 인형을 내팽개치고. 웬지 모르게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를 지우기 위해 눈가를 비볐다. ..........생각 안해. 응. 지금은 김한영만 생각할 거야. 그 새끼 조지기 위해서 여태까지 달려온 거였으니깐. 그러니깐. 적어도 지금만큼은. 종아리가 저릿저릿하고. 주먹이 찌릿찌릿하지만. 그래. 적어도 지금만큼은 김한영만 생각할 거야. 김윤서. 칠공주의 적 인천 연합. 그래, 그 것만 생각할 거야. 후웁. 심호흡을 한 나는 주먹을 휘두르며 빙글거렸다. "다 덤벼, 개새끼들아...^ㅇ^..." "내가 먼저. 덤빌께." "라고 할 주 알었냐? 낄낄낄!! 나는 쩌기 있는 김한영만 조지면 볼 일 없는 사람이거드은!??? 쩌기 김한영이 가지고 있는 인천 하늘만 뺏으면 되는 사람이거든!!!" 겁대가리 없이 먼저 나서는 한가람을 제치고 여전히 두 팔을 쭈왁. 벌리고 있는 김한영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한가람이에게서 받았던 충격은 이제 김윤서 몸 안에서 사라졌다. 오직 김한영을 부수고야 말겠다는. 오직 김한영을 이기고야 말겠다는. 그 생각만이 가득찼다. 윽. 흥분으로 주먹까지 떨린다. "시스터, 알라뽕♡" "필요 없으면 버리는 그따위 개같은 사랑. 사절이야, 새끼야.." 오른쪽 주먹을 날렸다. 녀석은 허리를 비틀며 가볍게 피했다. 이번엔 왼쪽 다리로 발차기를 했다. 녀석은 기막힌 타이밍에 발목을 잡았다. 화가나 턱을 들이받았다. 녀석은 이따위 충격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었다. .............. 비틀린 웃음이 새어나왔다. 나같지 않은. 김윤서 안같은 거지같은 웃음이 새어나왔다. "빌어먹을 가족같은 거 버리만큼 쎄네....쎄서 막 화가 날랑말랑하네.. 씨발... 눈물나게 쎄서 막 짜증이 날랑말랑하네...?..." "시스터..." 녀석에게 잡힌 발목을 거칠게 빼낸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 떴다. 응. 쎄서 더 좋아. 쓰러트릴 맛이 나서 너무 좋아. 니 전부인 주먹이 내 손에 개박살 날 꺼. 그 거 상상하면 미치게 좋아. "진짜로 죽여버리고 싶을만큼...쎄서 좋네, 김한영." 솨아악. 소름끼치는 바람소리. 조금 멍해있던 김한영이 내 어퍼컷을 맞고 주춤거렸다. 때를 놓치지 않고 바로 연타를 날렸고, 뒤이어 오른쪽 다리를 들어올려 녀석의 턱을 후려치고 몸을 돌려 다음엔 왼쪽 다리로 뒤돌려 차기를 날렸다. 눈깜짝할 새 일어난 일에 정신을 못차리는 김한영. 그래, 끝까지 봐준다 이거지. 나같은거 니 손을 쓰지 않아도 될 만큼 하찮고 우스워서. 그래서 끝까지 봐준다 이거지?.... 분노로 일그러진 주먹이 다시 김한영에게 날아갈 때. 갑자기 몸이 휙 돌려지면서.... 철썩.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뺨이 후끈거렸다. ".....싸우고 싶지 않은 사람 패는거. 안좋은 거야." "헛쭈. 너한테 그따위 충고 들을만큼 나 너그러운 사람 아닌데.. 어쩌냐, 이 개새끼야..." 퍽. 내 뺨을 후려친 댓가로 복부에 있는 힘껏 주먹을 찔러주고. 콰당. 내 뒷통수를 후려친 댓가로 종아리를 있는 힘껏 후려차고. 콰직.. .........김윤서의 한가람이 아니라 김한영의 한가람이 된 댓가로 옆구리를 걷어찼다. "김윤서,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화강안 씹새끼는 닥치고 있어. 너까지 봐줄 만큼 너그럽지 않다고 나 방금 말했다??..." "으윽..." "아파할 자격. 소리낼 자격. 내 뺨 후려칠 자격. 내 뒷통수 후려칠 자격. ....아무것도 없는 너. 김윤서가 김한영하고, 추여사하고 또 우리 김사장 빼고. 제일로 씨껍하는 새끼." ........... 순간 공기가 멈춘듯. 시간이 정지한 듯. 묘한 분위기가 흘렀다. "씨발놈아 이거 놔아!!!! 씨팔, 정보 빼낼라고 여우짓 한거라고 몇 번 말해 썅!" 그 분위기를 깬 것은. 조금 의외다싶은 연오였다. 어떤 얄쌍하게 생긴 남학생과 마주 선 연오는 평소 상스럽다며 입에 담지도 않는 욕설을 거침없이 뱉어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한가람과. 불쾌한 얼굴로 서있는 화강안과. .....여전히 싸울 의지가 안보이는 김한영과 연오를 번갈아보던 나는 결국 퓌슈슈.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내가 저거 해결하고 올 때까지 싸울 의지 만들어놔. 안만들어놔두 상관은 없는데. 김한영 너 그러면 나 인정사정 안봐주고 막 댐빌꺼야. 눈까리 확 뒤집혀서. 낄낄.... 그거 무서우면 알아서 쌩쑈 그만하구 있어라아?.." 다른쪽을 둘러보니. 생각보다 꽤 많은 연합 인원에 지니와 이연인 떼거지로 몰려있는 아이들을 상대하느라 바빠보였다. 허니. 어쩔 수 없지. 은근한 사고뭉치 주연오를 구제할 사람은. "내 친구한테서 족발 치워, 개새끼야." "연오 내껀데. 너 친구 아니라 이 최이누껀데." 눈깔을 확 쑤셔버릴라. 감히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자유로운 바람둥녀 주연오를 자기꺼라고 말하는 최이누.(☜아마도) 가볍게 중지 손가락을 내밀며 씨익 웃었다. "이게 너꺼지. 연오는 너꺼 아냐, 뵹아." "아니야. 연오가 인제 내꺼 한댔어. 인제 최이누꺼 한댔어." "으악. 이연아!!!!! 여기 너랑 똑같은 새끼 하나 있다!!!" 이연이와 쌍둥이라고 해도 믿을만큼 쏙 빼닮은 말투에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데 갑자기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는게. 고개를 돌려보니. 이게 웬일인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여기저기 못이 박힌 각목을 들고서 화강안이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미친놈." 화강안을 향해 짧게 중얼거린 나는 어깨로 날아오는 각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주먹을 뻗었다. 화강안의 관자놀이를 노렸던 건데, 예상과는 다르게 내 주먹은 녀석의 뺨을 쳤고. 그에 열뻗친 화강인이 미친듯이 휘두르는 각목을 피한다는 것이 얼떨결에 최이누라는 녀석의 가슴팍이었다. .....씨바. 아주 가지가지 해라, 김윤서. "미안. 저 새끼 눈깔이 나보다 먼저 뒤집혀서 놀랐-" "걔 잡고있어, 최이누!!!" 화강안의 거친 외침에 최이누의 팔이 내 허리를 감싸고.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감촉에 당황해있는 사이, 화강안이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급하게 발을 뻗어 녀석의 복부를 후려치고 최이누의 품에서 나오려는데. ..........씨바. 오늘 눈까뒤집힌게 화강안만이 아녔다. "위험하게 그게 뭐야!! 내려놔, 주연오!" 싸움에 쌍시옷도 모르는 가시네가 겁없이 벽돌을 휘두르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도 위험천만하게 눈을 꾹 감고서..... 저거 돌아도 단단히 돌았지, 아주. 연오를 말리기 위해 몸을 비트는데 최이누, 이 새끼. 굉장한 고단수였다. 쉽게 손을 푸르지 않는 녀석때문에 연오의 벽돌이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오고... "띠발, 눈떠 주연오!!!!!!" "위험해!!!!" 거의 동시에 내지른 고함소리였다. 소리가 울려퍼지고. 모든 일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줄 알았던 한가람이 날 감싸안고. 여전히 눈을 안뜬 연오가 휘두르는 벽돌을 나대신 얻어맞고. 그래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내 위로 미끄러진 녀석을 내가 멍하니 쳐다보고. 그러고..... 녀석의 개미 숨소리보다 작은 중얼거림이 내 귀에 들려오고. 또.... 어울리지 않는 슬픈 웃음을 짓는 김한영이 뒤돌아서 공사장을 나서고. 얼마안가 사이렌이 울리고. 기겁을 한 연오와 지니가 내 팔을 잡아당기고. 하지만 나는 움직이지 않고. 결국 파란색 경찰복을 입은 아저씨들이 들이닥치고. 내 품에 있던 한가람을 구조대원이 데려가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직 뒤집히지 않은 김윤서 눈깔에서 눈물이 한방울 툭 떨어지고...... 절규하는 화강안 뒤로한채 고개를 꺾은 김윤서의 얼룩진 눈동자에 보일리없는 하늘이 보이고..... 끝. 무뎌진 아픔이 이쑤시개가 되어 가슴 깊숙히 파고들고선.... 그리고선 모든게 다 끝. 마지막이 아닌 끝...... 2-27. 바보 천사 울고 있었어요. 항상 웃는거밖에 모른던 아이가 너무 슬프게 울고 있었어요. 가슴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왈칵왈칵 눈물이 쏟아졌어요. 그런데 참 신기하게. 그 순간 슬프게 울던 아이가 눈물을 뚝 그쳤어요. 자기 눈물을 그친 아이는 평소처럼 씨익 웃으며 제 눈물을 닦아줘요. 나는 괜찮은데. 나보다 니가 더 아파 보이는데. ....... 내가 널 달래야 하는건데. 그 말들이 목 안에 맴돌면서 나가질 않았어요. 결국 잔뜩 젖어버린 눈으로 절 달래는 그 앨 보면서 결국 아무런 말도 못해줬어요. .............. 그런데 이제 그 애가 눈물을 그치지 않아요. 앞에서 목놓아 우는 절 보고도. 앞에서 더 크게 우는 절 보고도. 자기 눈물을 그치지 않아요. 자꾸만. 자꾸만 울어요. 어떻게 해야 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아이가 날 향해 고개를 들었어요. 따끔따끔. 가슴이 아파와요. 꽉 차올라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물 웅덩이 위에 제 얼굴이 보여요. 그래서 가슴이 아파요. "우는 거....안 어울려. 그러니깐 뚝." 울지 말라고 했는데. 우는거 안 어울리다고 뚝 하랬는데. 전 멈추지 못했어요. 왜냐면. 왜냐햐면. 그 아이가 웃어서요. 울지 말라고 웃어서요. 울면서도...... 웃어서요. ............................ .................. 윤서는 그런 아이였어요. 정작 자기 자신은 꽉 차서 더이상 울지 못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메말라서 더이상 울지 못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들이 우는 걸 못 보는 아이였어요. 그러면서 우리가 걱정할까봐 웃음부터 짓는 아이였어요. 그리고 전. 그런 윤서에게 가장 많이 걱정을 끼치고. 그런 윤서에게 가장 많이 눈물을 뽑아내고. 그러면서도.... 윤서의 눈물을 가장 먼저 멈추게 하는. 그런 아이였어요. ........................ .............. ........... 2003년 인천 윤서가 너구리 응가 냄새 난다고 놀리던 할머니를 무사히 응급실에 넘겨놓고 돌아서는데. 새하얗게 질린 얼굴의. 조금 낯이 익은 화강안이라는 아이가 보입니다. ......... 벌써 싸움이 끝났는지. 몸 이곳 저곳에 핏자국이 묻어있는 화강안은 의자에 앉을 생각도 안하고 멍하니 수술실 문만 보고 있었어요. 조심스럽게 다가간 저는 주머니를 뒤적여 꺼낸 하얀 손수건을 건넸습니다. 윤서가 좋아하고, 윤서를 좋아하는 가람이의 친구였거든요 강안인. "피는 묻으면 자, 잘 지워지지 않으니깐. 저... 이걸로라도 우선 조금 닦―" "닥쳐!!!" 순간 화강안의 눈동자가 번쩍이더니. 내 손목을 거칠게 비튼 화강안이 소리쳤어요. 화강안에게 잡힌 손목이 빨갛게 물들어갑니다. ...... 당황스러운 눈으로 올려보자. 금방이라도 울 것같은 얼굴의 화강안이 말했어요. "죽어도.... 너희는 용서 못해. 죽어서도!!!!! 너희 칠공주라는 년들, 용서 못한다구!!!" "니같은 거 용서 받고 싶은 마음, 우리도 없거든? 그러니까 아라 손 놔."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싸늘한 표정의 리아가 걸어오고 있었어요. 그 모습에 화강안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내 손목을 놓고 리아에게 다가갔어요. 다가가자마자 리아를 향해 손을 치켜드는데. 리아의 뒤에서 나타난 지니가 그런 화강안의 손목을 나꿔챘어요. 그 뒤로 천천히. 윤서를 제외한 나머지 아이들이 걸어 왔어요. 피곤해보이는 이연이와, 복잡해보이는 효선이와, 얼굴 가득 짜증스러움이 묻어있는 연오가요. "씨팔새끼야, 지금 너만 꼭지 돌고 있는 거 아니거든? 앵간하면 닥치고 있어라." "너나 닥쳐, 썅년아!!" 싸움이 터질 듯. 지니와 화강안이 위태롭게 서로를 노려봐요. 리아와 효선이가 둘을 말리기 위해 무어라 말을 했지만, 두 사람은 절대 물러서지 않고서 계속 서로를 향해 소리쳤어요. 욕지거리가 들리고. 난장판이 되버린 자리에서 열심히 눈을 굴리던 저는 분위기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심스럽게 묻고 말았어요. "윤서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주변이 조용해지고.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화강안이 의자를 걷어차고 자리를 빠져나갑니다. 내가 또 무슨 실수를 한건가. 눈만 깜박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데,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어요. "......아지트에 가봐. 아마 거기 있을거야." 리아의 대답에 서둘러 아지트로 가려는데. 연오가 제 손을 잡고서 같이 가자고 말했어요. 윤서 걱정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고 우린 아지트로 향했습니다. 두근두근. 이상하게 가슴이 아파와요. 윤서가 또 울고 있는건 아닌지. 두려워져요. "아라야." "으응?" 굳게 닫혀진 아지트 문 앞. 연오가 문고리를 잡으려는 절 불렀어요. 고개를 돌려 연오를 바라보니까. 연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제 옷을 잡고 있었어요. 그 모습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 저도 모르게 흐르려는 눈물을 애써 참아내고 연오의 어깨를 쓰다듬었어요. 목이 메인 듯.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연오는 한참 뒤에야 조그마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곳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왜 화강안이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는지. 왜 우릴 죽어도 용서 안하겠다고 소리 쳤는지. ........... 지금 윤서가 어떤 마음일지. ".....너라면 윤서 잘 달래줄 수 있을거야. 후우. 난 여기서 기다릴게, 들어가." 연오는 눈가를 훔치며 고개를 돌렸어요. 그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저는 크게 쉼호흡을 하고서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어요. 아지트 안에는. 예상했던대로 윤서가 있었습니다. 항상 앉아있던 난간 위에. 평소보다 더 위태롭게 서있는 윤서가.... "윤....서야..?" 언제나 밝게 웃으며 인사해주는 윤서였는데. 아까 싸움에서 튀었는지, 심각할정도로 피를 묻히고 서있는 윤서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어요. 윤서의 옷을 가득 적시고 있는 붉은 피가 왜 이렇게 불안해보이는지. 결국 전 아까부터 꾹 참아왔던 눈물을 토해내며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요. 저는 바본가봐요.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는 윤서 앞에서 울어버리는 저는. 바본가봐요...... "우는 거.. 안 어울려. 그러니깐 뚝." "윤서야아..." ".....알고 있었어. 원래는 다 알고 있었어." 여전히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는 윤서였지만. 분명 윤서는 절 향해 말을 하고 있었어요. 바보 황아라를 향해서. 닦아낼 엄두조차 못낼 만큼 흠뻑 젖어있는 목소리로... "왜 김한영 옆에 서있어야 했는지... 왜 김윤서가 아니라 김한영 옆이여야 했는지... 사실은 다 알고 있었어." 울었을까요. 잔뜩 쉬어버린 윤서의 목소리가 힘없이 들려와요. "내가 멈추기를 바랬을 거야. 결국 상처만 남을 싸움을.... 내가 먼저 멈추길 바래서.. 그래서 그랬을 거야." "윤서야... 너 그, 그러면..." ".....다 알면서도 난 멈추지 않았어, 아라야. 어떤 마음으로 가람이가 김한영 옆에 서있는 줄 알면서도 난... 난.... 멈추지 않았어." 전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어요. 막혀진 입술 사이로 자꾸만 울음소리가 튀어나와요. 뒷모습을 보이고 서있는 윤서가 어떤 얼굴로 있을지 두려워서.... 그래서.... 자꾸만 감당할 수 없는 울음이 나와요. 윤서는....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요. 곁에 있는 난 듣는 것조차 너무 힘이 겨운데... "난.... 그런 한가람보다.... 김한영을. 그 새끼가 가진 하늘을 더 원했으니깐. 한가람이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김한영을 이기길 원했고, 또. 또.... 그만큼 하늘을 원했으니깐...." 대답해줘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 당연한거라고. 네가 여태까지 살아왔던 날을 떠올리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한거라고. 네 안에 있는 한영 오빠가 어떤 존잰지를 알면 그렇게 생각하는 게.... 정말 당연한거라고. 그러니깐 울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해야하는데.... 본드라도 붙은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아요. 너무 아파서.. 윤서의 뒷모습이 너무 아파보여서.... "....한가람을 버리면서까지 난 하늘을 원했는데... 인제 내가 원하는 하늘이 없대, 아라야. 날 여태까지 살아오게 했던 하늘이. 김한영이! 이제는 없대, 아라야. ......이젠 어쩌지..? 살 이유가 없어졌는데.. 이젠 어쩌지....?" 울먹거리며 말을 하던 윤서가 갑자기 저를 향해 고개를 돌렸어요.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그냥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얼굴이였어요. 맞아요. 절 향해 고개를 돌린 윤서의 얼굴은 두려울정도로 텅 비어 있었어요. 윤서는 폴짝. 하고 난간에서 내려와 제 어깰 두드리며 빙긋 웃었어요. 그 웃음이예요. 아픈 걸 감추기 위해서... 아픈 걸 감추면서까지 날 달래기 위해서... 그래서 짓는 웃음이요. "죽어버리고 싶다. 나 지금..." "그, 그러지마. 윤서야... 흐읍- 그런 말 하지마아... 니가 왜 죽어... 너가 왜... 흐.. 흐으...." 얼굴을 찡그리며 우는 절 아프게 바라보던 윤서는 알 수없는 미소를 짓고는 문을 향해 걸어갔어요. 잡아야 하는데. 죽고싶다는 윤서, 아무데도 못가게. 아무 생각도 못하게 잡아야 하는데....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서있던 저는 눈물만 흘리고 있었어요. "살 거야. 살아야지. 죽지를 못하니깐... 그러니깐 살아야지....." 윤서의 위태로운 마지막 말. 윤서가 나가고 조용해진 아지트. 어깨가 들썩거릴정도로 울다. 문득 고개를 들어 윤서가 서있던 난간을 바라봤어요. 그런데.... 이상한 물건이 하나 보여요. "이게... 뭐지?" 조심스럽게 난간으로 걸어온 저는 손을 뻗어 그 이상한 물건을 집어 들었어요. 녹음기...?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왠지 마음에 걸려 재생 버튼을 눌렀어요. 치지직. 거리는 기계음이 들리면서.....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녹음기 안에서 흘러나왔어요. [.....윤서야...니가 이걸 발견해주었으면 하는 마음 반. 죽을때까지 찾지 못하길 바라는 마음 반으로 이렇게 녹음한다. 널...말릴 수 있을정도로 내가 큰 사람이라곤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그래도 작은 기대를 걸고 한영이형 밑으로 들어갔어. ....어쩌면 네 옆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렇지만... 윤서야. 아픈 거 다 내가 한다고 했잖아. 슬프고, 힘든 거 다 내가 대신 한다고 했잖아... 내가 그랬잖아.. 그래서 그랬어. 네가 울던, 웃던. 끝까지 네 곁을 지킬테니까. 그럴테니까... 후우. ...윤서야!! 난 항상 이렇게 널 부르고 있는데. 가슴이 터지도록 널 부르고, 또 부르고 있는데.. 어째서 넌 단 한번도 뒤를 돌아 보지 않는걸까...? ............ ......... 윤서야... 난 너를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사람이야. 그러니까 울지마. 이젠 내가 널 지켜줄게.... 내가 죽더라도. .....너만은 꼭 내가 지켜줄게. 끝까지 하지 못한 말. 네가 원하는 하늘을 잡게 되면. 그때 하려던 말. 혹시 모르니까 지금할게. 윤서야. ............ 사랑해. 너의 모든 걸....] 평소 가람이 답지 않게 두서없이 녹음된 말들.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이 짙게 베어있는 말들. 윤서가 들었을까요. 이걸 듣고서 윤서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가슴이 답답해져옵니다. 까만 밤하늘처럼 먹먹해져와요. 죽지 못해서 사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울면서도 웃어야하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 지금 윤서는 어떤 기분일까요. "흐으...." 울음이 나요. 멈추지 않을 울음이. ......... 차라리 바보가 될까요. 아무것도 모르는 깨끗한 마음으로 윤서의 눈물을. 지니의 아픔을. 연오의 진심을. 리아의 상처를. 효선이의 외로움을. 이연이의 마음을. ........ 우리들을 위로할 수 있게. 그럴 수 있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될까요. 그러면 될까요. 그러면 더이상 눈물이 없을까요. 3부. 부산의 별 3-28. 슬픈 기억 우루루. 세상이 울린다는게 이런 느낌일까. 얼룩덜룩. 피가 튀긴 손을 치마 위에 쓱쓱 문지르며 목을 뒤로 꺾었다. 쉴세없이 움직이는 하얀 가운들. 그 뒤를 쪼르르 따라가는 하얀 치마들. 그리고.... 미끈하게 뻗은 리아의 하얀 다리. "야옵! 다리가 얄쌍하시군요." ".....죽여버린다, 너." "엉예. 죽여주시면 감사하게 죽어드리겠습니다." 방글방글 웃으며 대꾸하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리아가 살기로 가득찬 발바닥을 내 얼굴에 내밀었다. 맞아줄까. 말까. 약 15.3초동안 고민을 하는데 고 사이에 싱겁게 물러가는 리아의 발바닥. 소금을 좀 쳐야 맛이나겠어. 정리아..? "화강안 상태가 어떤지 알긴 하냐, 너?" "내가 원랜 상대방 존중을 참 많이 하는데. 이번엔 눈깔 뒤집혀서 하느라 잘 못살폈어. 그래도 뒈지진 않았을 거야. 교도소에서 인생을 썩힐 만큼 멍청하지 못하거든 내가." "....1년 전으로 돌아가지마." 순간 잘못들었나. 의심이 될정도로 걱정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벅꿈벅. 신기한 눈빛으로 리아를 바라보다,이내 씨익 웃어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다보니 정리가 걱정도 듣고. ....홍가게 좋네, 이 기분. "....인천으로 올라가서도 방금 한 끄덕임. 잊지마." "엉예, 그럴.― 잠깐. 뭐? 갑자기 왠 인천?"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묻는 날 무심하게 쳐다보던 리아는 결국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않고서 어디론가 걸어가버렸다. .....저 가시네. 맨날 이런식이지. 내가 물고기냐! 밑밥만 던져주고 휑 가버리게. 그렇게 한참을 리아의 뒷모습을 보며 툴툴거리는데. 갑자기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요새 꽤 익숙해진 향기가 풍겨왔다. "화강안은 어떠냐?" "그냥 몇 주 입원하면 된다더라. 너는 괜찮냐??.." "내 피도 아닌데 뭘." 어깨를 으쓱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서자 선우권의 검은 가슴팍이 보인다. 평소엔 몰랐는데... 은근히 이새끼 키가 크다.(☜절대 내가 작은게 아니다.) 기분 나쁜 시선으로 녀석의 가슴팍을 노려보는데, 갑자기 엑스자로 손을 모으며 뒤로 물러서는 선우권. "아까도 말했잖아, 마누라. 우린 너무 일러!" "아. 니 또 삽질할래?!" "그건 그렇고. 마누라 진짜 검사 안해봐두 되는거야? 아까 좀 맞았잖아. 내가 지켜줬어야 하는건데.. 아쉽스야." "제발. 엉?" 아까부터 영 재미없는 농담만 지껄이는 선우권을 지나쳐서 화강안이 입원해있다는 병실로 올라갔다. 707호. .......하하. 어쩜 이렇게 센스만점일까. 이 병원? 고딕체로 쓰여진 숫자를 영 깔깔한 시선으로 쳐다보던 나는 휘유. 한숨을 내쉬고 문을 열었다. 열자마다 코끝을 찔러오는 매쾌한 산소냄새. 굳어지려는 안면근육을 한번 쓸어내리고 천천히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병실 가득 퍼져있는 화강안 냄새. ".....자냐." 쉬익.쉬익. 일정한 간격으로 뿜어지는 가습기 연기에 가려 화강안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정확히 병실 가운데 서서 화강안을 바라봤다. 온몸에 칭칭 감겨져 있는 붕대가 그다지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까분 댓가라고 생각해. 그리고 새겨 넣어두라. 김윤서를 돌게 만드는 이름을 왜 김윤서 앞에서 하면 안되는지. "....너처럼 옛날 생각 나게 하는 녀석도 없다. 진짜로 신기한 녀석일세. 뭔 재주가 그렇게 많으냐...?" 그때도 이랬지. 눈깔이 확 뒤집혀서는. 김한영 밑에 있는 새끼들은 다 잡아서 조졌는데. 너나할거없이 김한영하고 관련된 새끼면 다 잡아다... 흠. 좋지 않아. 옛 기억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복잡한 머리를 정리한 나는 휘적휘적 걸어가 화강안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내려다봤다. ".....그 녀석도 꼭 이랬을까. 하아. 너만보면 참...개구리 같아." "풉." 순간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눈썹을 모으고 고개를 돌리자. 반쯤 열려진 문 사이로...... "니가 여긴 어떻게?" 3-29. 김윤서는 모르는 이야기1 통글. 통글.. 링거액 떨어지는 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병실 안. 어디서 준비해온건지. 하얀 물수건으로 화강안의 얼굴 이곳저곳을 꼼꼼하게 닦아내고 있는 주연오와 그 모습을 멀거니 바라보고 서있는 김윤서. "참 어디서 본 건 많어. 그치??.." ".....리아." 흠칫. 순간 연오의 입에서 흘러나온 가녀린 음성에 장난스런 웃음을 거둬내고, 입을 다물었다. 새끼... 남의 약점을 찌르다니. 하지만 이어지는 연오의 말에 내 투덜거림은 자취를 감추고야 말았다. "....상대가 화강안이여서 봐준거야, 이번 일. 또 다른 문제도 있긴 하지만. 결국엔 맞아도 싸는 화강안이여서 봐준거야, 리아. 그거 좀...씁쓸하다?" 헤- 벌어지려는 입을 겨우 다물고 연오를 쳐다봤다. 지금 쟤가 뭐라고 한거야... 내 귀를 의심해야 할지, 아님 내 눈을 의심해야 할지. 갈피를 못잡고 방황하고 있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선 연오가 처연한 얼굴로 날 돌아봤다. 꿀꺽.... "너...." "부탁할게, 윤서야. 날 위해서, 주연오를 위해서 제발. ....제발 강안이만은 참아주라. 알잖아, 너도. 강안이가 얼마나.. 아프고, 아픈 앤지. ....나 이 애가 아픈 거, 더이상 볼 수가 없어." 연오의 물기 어린 눈동자에 다시 주둥이 합! 생각치도 못한 연오의 무거운 진심.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부탁을 해오는 연오를 난감하게 쳐다보다. 귀찮은 한숨을 내뱉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최대한 자제는 해볼게. 엉. 내 친구 주연오를 위해서 까지껏 참아보지, 뭐. 근데 너무 아프지는 마라..." 화강안이란 새끼는 치가 떨리게 싫지만. 그런 새끼를 좋아하는 주연오는 치가 떨리게 소중하니깐. 결국 실쭉 웃으며 연오가 좋아할만한 대답을 해주고야 말았다. 그래도 영 내키지가 않는단 말이야. 후우. "아. 참, 리아가 아까 인천 어쩌구 하던데. 너 그게 무슨 말인지 아냐?" "어. 알긴 하는데... 넌 알 필요 없는거야." 연오는 애매한 대답을 하고선, 다시 고개를 돌려 자리에 앉았다. 지나칠정도로 조용한 연오의 모습에 차마 더 묻지 못하고. 가슴 속에서 뭉클뭉클 피어오르는 궁금증을 몰아냈다. 화강안을 손을 꾹 잡고서 가만히 앉아있는 연오의 모습에 눈썹을 긁적이던 나는 병실을 나가기 위해 몸을 돌려 문고리를 잡았다. "유, 윤서야!" "엉?"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연오의 부름에 살짝 고개를 꺾자, 아차싶은 표정의 연오가 어쩡쩡하게 서있었다. 눈을 꿈벅이며 연오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금새 표정을 바꾼 연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나갈 때 계단으로 내려가라구. 너 괜히 리아 마주치고 그러면... 혼나잖아." "별걸 다." "김윤서!" "아아. 오키도키. 알았어, 알았으니까 소리 지르지마. 니가 안그래도 어차피 정리아 잔소리, 시껍하게 들어야 돼. 그럼 니 사랑, 잘 닦어라." 마지막으로 연오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병실을 나오자 텁텁한 공기가 목 안으로 들어왔다. .......연오가 화강안을 진심으로 좋아한다. 사랑을 받는 것밖에 몰랐던 아이가, 이제 사랑을 주는 것을 알았다? 반갑지만, 마냥 반가워만 할 수 없는 상황에 괜시리 한숨만 터져나온다. "니가 다칠꺼 뻔히 보이는데..." 툭툭. 병실문을 살짝 두드리며 꽤나 심각하게 중얼거리던 나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초록색 깜빡이가 보이는 비상구로 들어갔다. 간간히 풍겨오는 미적지근한 담배 냄새때문에 코를 틀어막으며 무사히 1층에 도착한 나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로비를 가로질러 나갔다. 어디로 갈까.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을 하다.오락실로 결정을 내리고 휘적휘적 걸음을 옮겼다. 뒷통수에 꽂혀있는 아픈 시선을 모른채..... .................. .......... ......... 김윤서는 모르는 이야기 1. "....연오야." "으응?" 대한병원 로비. 강안이 입원해있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연오는 로비에서 자신을 맞이하는 리아를 당황스런 눈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그런 연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아는 표정없는 얼굴로 연오의 팔을 잡아 끌었다. "한가람 와있어, 부산에. 너도 아라한테 들어서 알지?" "아, 응." 리아의 말에 연오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이 부산에 내려와 있다는 소식은 윤서를 제외한 나머지 6명 모두가 비밀로 부치고 있는 사실이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얘길 꺼내냐는 눈빛으로 연오가 리아를 바라봤다. "....걔 지금 여기로 오고있대." "응? 여길?!" "어." 너무도 담담하게 얘기는 리아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보던 연오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어떻게든 못 만나게 해. 나 김윤서 1년 전으로 돌아가는 거 용납 못하니깐." "우리가 못 만나게 한다고 안 만나지는 거 아니잖아." "작정하고 덤비면 못할꺼 뭐가 있는데? 그리고 안그래도 어른들이 윤서 인천으로 올려 보내라는 말씀 하셨어. 한가람 다시 만나기 전에 윤서, 인천에 보낼 생각이야." 단호하게 말을 마친 리아를 복잡한 얼굴로 쳐다보던 연오는 악몽처럼 떠오르는 1년 전,윤서의 모습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 윤서는 눈을 뜨고 못 볼 만큼 처참했다. 하루하루가 싸움의 연속이였고, 상처의 순환이였다. 눈을 뜨면 싸움질만 죽어라 했고, 눈을 감으면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사람이. 아니였다, 그 당시 윤서는..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고싶지 않은건, 연오나 리아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연오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못했다. "윤서는 방금 화강안 병실로 올라갔어. 너도 따라 올라가봐. 가서 걔 보낼때 계단으로 가라는 거 잊지 말고. 괜히 엘레베이터 탔다 한가람하고 마주치면 안되니까." 힘겨워 보이는 연오의 모습에 잠시 흔들렸던 리아의 눈빛이 다시 굳어졌다. 뭔가 말을 꺼낼듯. 말듯. 입술을 달싹이던 리아는 결국 결심을 했는지,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연오 니 마음에서 화강안.... 진짜 되기 전에 잘라내." 리아의 말에 연오의 눈빛이 순간 싸늘해졌다. "언제부터 내 사생활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어?" "주연오, 비꼬지마. 김윤서 일로도 충분히 복잡한데 너까지 보탤 필요 없잖아." "....진짜야. 화강안 진짜라구, 주연오한테. 가짜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라고!" 연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자신을 원망스레 쳐다보는 연오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였지만, 그래도 리아는 고개를 내저었다. "가짜로 남겨. 그 새끼, 너한테 진짜 될 만큼 좋은 녀석 아냐." "니가 어떻게 알아! 강안이 그렇게 나쁜 애 아니야." "그 새끼가 너 이용하는 거면 어떡할래. 넌 진짠데, 그 새낀 가짜면 어떡할래? 니가 그거 버틸 수 있어? 남한테 지고는 못사는 니가. ....가짜 마음을 버틸 수 있냔말이야." 이쯤되면 언성을 높일만도 한데. 언제나처럼 높낮이 없이 일정한 리아의 목소리에 오히려 흥분을 하는 건 연오였다. 연오는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리아를 노려봤다. "그러지마!! 너까지 그러지 마!!!" "주연오, 정신차려. 사랑은 장난이고, 또 가짜라고. 니가 맨날 입에 달고 살았어. ...이번에도 가짜라고 생각해." "정리아!!!!" "...한가람 올지도 몰라. 어서 올라가봐." 연오의 외침에 리아는 얼굴을 찌푸리며 먼저 돌아섰다. 상처받은 친구의 얼굴을 보는 건, 유쾌한 일이 못되었기 때문에. 리아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연오는 주먹을 말아쥐고는 엘레베이터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사랑을 한 적은 별로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뿐이라고 수없이 되뇌이며 연오는 강안과 윤서가 있을 병실로 향했다. "니가 여긴 어떻게.....?" 동그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윤서를 지나쳐 강안의 옆에 앉은 연오는 미리 준비해온 물수건을 들고 강안의 얼굴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연오의 하얀 손등 위레 뜨거운 눈물 방울들이 후두둑 떨어져내렸다. 왜. 나는 진짜 사랑을 하지 못하는 것일까. 3-30. 김윤서는 모르는 이야기 2 그러면 안된다고 몇번이나 다짐했지만, 연오의 입술은 머릿속을 가득 메우고 있는 생각들과 다르게 달싹이기 시작했다. "부탁할게, 윤서야. 날 위해서, 주연오를 위해서 제발. ....제발 강안이만은 참아주라. 알잖아, 너도. 강안이가 얼마나.. 아프고, 아픈 앤지. ....나 이 애가 아픈 거, 더이상 볼 수가 없어." 사실은 니가 더 아픈데. 강안이보다 니가 더 슬프고, 힘이 드는데.... 연오는 짭짤한 피맛이 느껴질 때까지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만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입술의 상처를 더욱 더 누르며 참아 내는데. 이 다음 들려오는 윤서의 말에 그만 연오는 눈동자에 담겨있던 눈물들을 힘없이 쏟아내고야 말았다. "최대한 자제는 해볼게. 엉. 내 친구 주연오를 위해서 까지껏 참아보지, 뭐. 근데 너무 아프지는 마라..." 끝까지 자신을 위해 모든 걸 포기하는 친구. 끝까지 저밖에 모르는 자신을 위해 기꺼이 희생해주는 친구. 주연오 친구 김윤서.... 목놓아 울어버리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연오는 몸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윤서의 시선 몰래 시큰해진 눈가를 훔쳐내던 연오는 순간 들려오는 쇳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윤서를 불렀다. 하지만 너무 티나게 잡았다는 생각에 잠시 말을 멈추고 어색하게 서있던 연오는 금방 표정을 바꾸고 다시 말을 이었다. "나갈 때 계단으로 내려가라구. 너 괜히 리아 마주치고 그러면... 혼나잖아."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 가려는 윤서에게 신신당부를 해주고, 다시 자리에 앉은 연오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과연 이게 옳은 행동인지, 아닌지 하는 생각에 잠긴 연오의 귀에 갑자기 병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윤서? 연오는 식은땀이 베어나오는 이마를 쓸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윤서, 너 뭐 놓고 간 거라도― 어? 너!" "아, 연오구나. 오랜만이네." 연오는 앞에 보이는 하얀 얼굴에 그만 말문이 막혀 숨을 들이켰다. 이미 아라에게서 얘기를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실감이 나지 않았는지 연오는 당황스러운 눈으로 가람을 쳐다봤다. ....자신이 휘두른 벽돌에 맞아 식물인간 상태까지 갔던 아이가 멀쩡하게 서있는 모습은 생각 외로 연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안도감을 넘어 두려움마저 느낄 만큼. 후들거리는 다리를 감추기 위해 한걸음 물러선 연오가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런 연오를 아는지 모르는지 병실 안을 둘러보던 가람이 연오를 향해 조심스럽게 묻는다. "근데 윤서... 여기 왔었나봐?" "......윤서....." 이름만 들어도 좋은지, 금새 화색이 도는 가람의 얼굴에 연오가 마른침을 삼키며 입술을 뗐다. 이번만. 지금 한 번만. 윤서의 사랑을 위해서... "...지금 계단으로 막 내려갔어." "아. 고마워!" 연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맙다는 인사를 한 가람이 빠르게 비상구로 뛰어갔다. 탕―... 가람이 닫고 간 상아색 병실문을 바라 보는 연오의 눈동자가 씁쓸하게 젖어 들어간다. .............. 세네칸씩 뛰어내려갈때자마 심장이 미친듯이 욱신거렸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낸 가람이 윤서의 뒷모습을 쫓았다. 가람이 한참을 망설이다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윤서를 향해 내밀 때. 어디에선가 나타난 리아가 가람의 손목을 낚아챘다. "가서 어쩔려구? 김윤서 상처에 소금이라도 뿌려줄려고? 그럴려고 가니?" "리아야..." "내 이름 부르지마. 난 너같이 남 뒷통수 후려치고 다니는 애 제일 경멸해." 리아의 살기어린 눈동자에 가람이 윤서를 향해 뻗었던 오른손을 내렸다. 조금씩 작아져가는 윤서의 뒷모습을 잊지 않기 위해 눈동자에 새긴 가람이 손목을 파고드는 리아의 날카로운 손톱에 고개를 돌린다. ".....니가 싫어, 한가람. 너때문에 흔들릴 김윤서도 싫고, 그런 김윤서한테 자기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 알면서도 다가가려는 한가람은 더 싫어. 나타나지마. 이미 김윤서한테 한가람은 더이상 옛날의 그 한가람이 아니잖아?" 시니컬하게 웃으며 말하는 리아를 슬프게 바라보던 가람은 잡혀있던 손목을 빼내고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힘없이 걸어가는 가람의 등 뒤로 리아의 싸늘한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가람의 느린 걸음이 멈춰지고. 그런 가람을 향해 서늘한 조소를 날린 리아가 차갑게 돌아선다. 가람의 주먹이 아프게. 가엾게 떨린다. "...김윤서 남자 생겼어." .................... ............ ......... ※봉봉 오락실 간질간질한 눈썹을 긁으며 새로 들어온 펀치기계 앞에 다가서 동전을 집어 넣으려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검은 손. "아. 스토커..." "스토커 아니라 니 서방님. 심심하게 혼자 게임하려구? 에이, 서방님이랑 같이 하자." "나 펀치게임 할 때 건드리는 거 욘나 싫어하는데. 좀 꺼져주면 안되나?" 가뜩이나 심난하고만. 가위질도 더럽게 못하고, 눈치도 더럽게 없는 선우권은 싱글벙글 웃으며 내 대신 펀치기계 안으로 500원짜리 동전을 쑥 넣는다. 폼만 잔뜩 잡는 다른 남자아이들과는 달리 꽤 깔끔한 포즈로 주먹을 날리는 선우권. .......삐용삐용♬♩♪♪♬ 정신없이 올라가는 점수판. "875점." "마누라 지켜줄만큼은 된다, 나도. 하하. 어때? 멋 좀 나?" "맛은 나는데, 멋은 안나. 비켜봐, 내가 진정한 펀치를 알려주지." 까치발을 들어 선우권의 머리통을 쓱쓱 쓰다듬고 다시 올라온 펀치판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슈웅. 기분 좋은 바람소리를 내며 날아간 주먹은 정확히 펀치판 정 중앙에 꽂혔고. 곧이어 미친듯이 올라가던 점수판은.... "앗. 고장났다!!" "튀어, 마누라!!!" 푸쉬식. 연기를 내며 점수판의 빨간불이 꺼지고. 놀래 뒤집어지려는 아저씨가 나오자마자, 선우권이 내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후왁후왁.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날 골목 안으로 집어넣은 선우권이 잽싸게 몸을 돌려 내 몸을 꽉 안았다. "이럴 필요까지 있을까?" "응." "어째서?" "내가 좋으니깐. 하하. 아, 진짜 죽인다. 마누라 품이 곰실곰실해." 행복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내 머리통을 턱으로 비비적대던 선우권이 갑자기 날 떼어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뭐?" "마누라..... 은근히 볼륨감 있네? 아. 막 마누라랑 결혼까지 골인하고 싶어, 지금!!" "또 삽질." 못마땅한 얼굴로 선우권을 쳐다보던 나는 혓바닥을 날름. 내밀고는 휙 고개를 돌렸다. "앙탈은." "하회탈은 들어봤어도, 앙탈이란 말은 처음 듣네." "윽. 마누라 개그 쪼끔 많이 춥다? 뭐, 그래도 괜찮아. 마누라가 하는 거라면 포도 슬러쉬 백만컵이라도 원샷할 수 있어." "......너랑 얘기하면 멍텅구리가 되버릴 것 같아." 부끄러움이나 창피함같은 건 눈썹을 떼고 찾아봐도 없는 녀석. 얼음왕자라는 별명은 역시 개뻥이였어. ....괜스리 화끈거리는 볼딱지를 꾹꾹.누르고 있는데, 선우권이 실쭉 웃으며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재섭이가 그러는데 요 근처에 김밥 때깔나게 하는 데 있다더라. 거기 가서 배 좀 채우자. 저녁 아직 못 먹었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조개같은데." "아. 나는 굴조개보단 가리비가 좋더라." 이제부터 너를 삽질의 귀재라 불러주마. 어디서 꼴같지도 않은 말장난을 하는건지. 잔뜩 비웃음을 지으며 선우권의 뒷통수를 쳐다보는데. 갑자기 가슴 한 구석이 못으로 후벼판 것처럼 따끔거렸다. 　´....인천으로 올라가서도 방금 한 끄덕임. 잊지마.´ .............. 인천. 0.035만큼의 의심이나 오차라도 있으면 절대 입에 담지 않는 리아가 한 말이니, 거의 확정된 일이겠지??... "우권아." "권이야, 선우성을 가진 권. 서방님 이름은 쫌 기억해두라." "인제 너 나 못본다??.." "장난 그만. 그런 장난 매력 없어." 잔뜩 개구진 내 목소리와 달리, 완전 진지한 선우권의 목소리가 재깍 튀어나왔다. 피쉬식. 살짝 웃으며 걸음을 멈춘 나는 선우권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런 장난 매력 없다니깐?" "진짜루. 하늘 걸구서. 나 인제 인천 갈지도 몰라. 응. 갈지도가 아니라 갈거다가 맞는 말." 괜히 기대 바람만 줬다가, 바늘 구멍 내버리면 더 아픈거니깐. 일찌감치 잘라내야 되는 거야. 연오에게서 물려받은 작업녀의 노하우 1장 1절을 떠올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선우권은 김윤서한테 훠배 아까운 녀석이고, 김윤서는 선우권한테 훠배 아깝지 않은 사람이니깐. 어영부영 끌다 제 2의 한가람 만들면 안되니깐. ............ 가람이가 부산에 왔다는 소식을 원망에 가득찬 목소리로 말하던 화강안이 떠오른다. "김윤서." "엉." "나두 가." "너는 가, 나는 나." 배꼽 빠지게 웃긴 나의 유머에도 웃지 않는 선우권이 아까 골목에서처럼 날 꼭 안아줬다. 곧이어 뜨거운 선우권의 목소리가 귓가로 내려앉는다. 눈물나게 뜨겁고, 또. ......슬픈 목소리. "백두산 꼭대기라도. 활활 타는 불구덩이라도. 그 어디라도 김윤서가 가는데라면 선우권도 간다고, 이 바보야. 마누라 가는데 서방님 따라가는거,당연한 거 아니냐?" 하여간. ..........얼굴 빨개질 소릴 아무렇지 않게 하는 녀석. 선우권. 선우권.... 네 이름은 한가람2가 아니라 선우권....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3부. 부산의 별 3-31. 바통 터치 ............... ......... ※ 까딱까딱.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하얀색 A4용지로 가득찬 책상을 내려다봤다. 오늘 아침. 막무가내로 찾아와 한뭉치의 서류를 안겨주고 가버린 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까딱거리던 손으로 책상 위의 서류들을 뒤적였다. "수업시간에 절대 졸지 말 것. 선생님 질문엔 재깍재깍 대답할 것. 학교에서는 절대 싸우지 말 것. 옥상에 올라가지 말... 에이씨. 뭐 이렇게 말게 많아?" 아주 빽빽하게도 써놨다. 책상 위에 널부러진 A4용지들을 신경질적으로 가방 속에 쑤셔넣고, 힘껏 몸을 뒤로 젖혔다. .........리아가 작정했다면, 시간이 별로 없으려나??... 매끈한 턱주가리를 쓰다듬으며,덜그럭 생각에 잠겼다. "....귀찮고 복잡한 거 딱 질색인데. 아. 그래도 안 들키게 하려면 대갈통을 심하게 굴려줘야겠지.." 한동안 안굴려 뻑뻑해진 대가리를 열심히 굴려가며 계획 나부랭이들을 짜는데. 멀쩡하던 내 머리통이 갑자기 책상 위로 푹. 고꾸라지더니... 간들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김윤서, 이 씨깝할년. 느가 선생놈들 한테 꼬리 살랑살랑 흔들어댈 때부터 나가 알아봤다!" "아... 머리." 얼마나 세게 후려쳤던지. 골이 울릴정도로 욱신거리는 뒷통수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돌렸다. 총 다섯명의 노란 대가리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엔... 어디서 쌔벼온건지 모를 쇠몽둥이를 쥐고 있는 하얀 손도 보인다. "흥. 선생들한테 꼬리치느라 인제 쌈질도 못하는갑다? 그 거 참 꼬시다. 앙?" "뭐였지. 기억이 안나네.." 멍한 시선으로 올려보자 쇠몽둥이를 들고서 비웃음을 머금고 있던 노란 머리1이 눈썹을 찡그린다. 찬찬히 옛 기억을 뒤집었다. 순간 번뜩하고서 떠오른 기억 한개. .......리아가 날 날 해운대 바다에 빠트리게 만든 장본인. 오키바리. 접수됐어. "아아. 나보고 왜 이렇게 뻗대냐고 까불던 후배님이구나..." "뭐, 뭐꼬?! 지가 팬 가시네 얼굴도 기억 몬한단말이가? 하. 이 가시네 진짜 웃긴 가시네 아이가?" "귀 따가워, 후배님. 주둥이 합!" "이, 이! 이 가시네 니 오늘 함 죽어 보자! 당장 뒤뜰로 나온나!!" 얼굴이 빨개지도록 소리를 꽥꽥.지르던 노란머리1은 바닥에 침을 뱉어주는 센스까지 보여주고 성큼성큼 나갔다. .....폼 구겨지게 후배님의 도전 신청을 무시 할 수도 없고, 이것 참. 눈썹을 긁적이며 고민을 하던 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후배님이 기다리고 있을 뒷뜰로 향했다. "이 가시나!!!" 마악 뒷뜰로 들어설 무렵. 무지막지한 고함소리와 함께 아까 후려맞았던 뒷통수가 흔들렸다. ......쇠몽둥이? 뒷통수를 흔들리게 만든 물건을 대충 짐작하고서 고개를 돌리자 노란머리2가 동그래진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감히 김윤서님의 뒷통수를 두번이나 울게 한 노란머리들을 혼내주기위해 주먹을 드는데. 순간 흠칫. ......방금 전, 교실에서 봤던 서류들이 떠올랐다. "아. 너네 리아가 보냈어요??.." "뭐, 뭐라카노?!" "안 그러면 이렇게 나이스 타이밍으로 나타날 수가 없잖아." "혹시 니 인제 선생들 눈치보느라 싸움 못하는 거 말하는기가? 하! 야가 돌아가는 상황을 모르네. 그거 지금 전교에 소문 쫙 퍼졌다!" "니 노리는 가시네들이 한 둘이 아니던데. 니는 인제 뒤진다. 알긋나?" 히죽히죽 웃으며 내 주위를 둘러쌓는 노란머리들. ......눈을 깜박이며 노란머리들을 바라보다.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간 좋게 끝나는 걸 못봤어, 김윤서. "그동안 당해왔던 거, 배로 갚아줄끼다. 각오해라!"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안나 가만히 있자 노란머리들의 매끈한 발들이 날아왔다. 사정없이 날아오는 발길질에 슬슬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갈때쯔음. 지친건지. 숨을 몰아쉬는 노란머리들이 스스로 물러섰다. "하악 하악. 오늘은 여까지만 하는데, 앞으로 단단히 각오하고 있어라. 독한 가시네... 끝까지 비명 한 번 안지르고 지랄이나." 툭. 쇠몽둥이들을 바닥에 던져놓고서,유유히 뒷뜰을 빠져나가는 노란머리들. 휘유. 별스런 휘파람을 불며 벽에 몸을 기댔다. 한결 시원해진 느낌이다. 쓸떼없는 생각만 들던 아까보다는. 아주 뻥 뚫린 듯. 시원해진 머리를 느끼며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뛰어들어온 달리가 토끼눈을 하고 소리쳤다. "윤서야아!!!! 괜찮아?!!! 많이 안 다쳤어?!!!" "엉엉. 많이 안다쳤으니깐 제발 사운드 좀 낮춰라. 아까부터 고막 울려서 짜증날랑말랑해." 기겁을 하는 달리를 조용히 시키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흙먼지들을 탁탁. 털어냈다. 앵간히 좀 밟지. 털어내도 지워지지 않는 신발자국에 낮게 투덜거리며 뒷뜰을 나오다가. 문득 든 생각에 몸을 휙. 돌려 달리에게 다가갔다. "손." "으응?" "손 좀 달라구요, 이 아가씨야." "아, 으응." 당황한 달리가 손을 내밀자, 상처 투성이인 내 손으로 처덕. 달리의 손바닥을 쳤다. "바통 터치." "응? 바통 터치라니?" "말 그대로. 제화예고 짱은 이제 김윤서가 아니라 유달리, 너라는 말씀이지요." 새하얗게 질려가는 달리의 얼굴을 향해 실끗. 미소를 지어준 나는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뒷뜰을 나왔다. 릴렉스 릴렉스. 천천히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움직이는거야. 아무도 모르게. 비밀스런 미소가 내 입가에 걸쳐진다. ............... ※방과 후 예전보다 한결 무거워진 가방을 둘러매고 교문을 나서는데. .....익숙한 풍경이 보인다. "도대체 니 귓구멍엔 무슨 고막이 있길래 이렇게 사람 말을 이렇게 못알아 처먹고 그르냐?" 싱글싱글 웃으며 한무리의 여학생들에게 둘러쌓인 선우권을 바라봤다. 오늘은 혼자가 아닌지, 녀석의 주변엔 낯익은 교복을 입은 남자애들이 서너명 몰려있었다. 날 보자마자 활짝 웃으며 달려오는 권씨. "내 고막엔 마누라 살지요." "그 놈의 마누라 타령. 이제 버릴 때도 됐을텐데?" "선우권 심장에 살고 있는 마누라를 어떻게 버리냐? 하여간 말 안되는 소리 존나 잘해, 마누라." "....제발 약 좀 먹어줘." 가운데 손가락을 지그시 올려주고,휘적휘적 걸어가는데. 강아지마냥 쪼르르 내 옆을 쫓아오는 녀석. "어제 내가 한 얘기, 진짜 못들어서 이래?" "마누라야말로. 어제 내가 한 뜨거운 고백, 잊은거야?" "뜨겁기는. 아주 미지근해 죽겠더만." "인천 가기전에 추억 많이 만들어 놓을려고 이러는거야. 그러니까 협조 좀 해주라, 마누라." 선우권의 목소리게 순간 귀가 번쩍.살짝 고개를 틀어 녀석을 향해 물었다. "내가 한 얘기 안 잊었나보네?" "어." "얼. 선우권 왠일이냐? 그러니깐 진작에 포기하고 딴 길을 찾아보지 그랬어." 아주 약간은. 정말 먹다 남은 우유팩에 남아있는 우유방울만큼은 씁쓸했지만. 그래도 씁쓸함보단 즐거움이 더 큰 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는데 갑자기 내 손목을 나꿔채는 선우권. "와이라노?.." "뭔가 오해하고 있나본데. 내 말은 부산에서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 놓자란 얘기야. 인천에 가면 인천 추억 또 따로 만들고. 알아 듣겠어?" ".....아. 약 아직두 안먹었어." 후끈후끈. 달아오르려는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피식 웃으며, 이제는 앞장서 걷는 녀석. "마누라. 나 솔직히 떨려." "그럼 벨리댄스라도 추시던가." "인천에 가면 이길 수 없잖아." "뭐 싸우러 가냐? 이기고 말고 할 게 뭐있어." 귀를 후비적거리며 건성건성 대답하는데. 요즘에는 잘 들을 수 없었던 선우권의 젖은 목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부산에서의 시작은 나여서 괜찮은데, 인천에서의 시작은 그 새끼여서. 니 마음 속에 살고 있는 그 새끼. ....하고의 추억이 더 많은 인천이여서. 그래서 나 떨려. 하지만 나 선우권, 주먹으로도 꽤 알아주니깐! 이기진 못해도 지진 않을 거다. 마누라가 걸린 일이니깐 아주 이 악물고 싸울 거야." ......또 이래. 이 새끼는 무슨 밤마다 '김윤서 감동시키는 107가지 방법' 이란 책이라두 읽나. 후. 선우권. 너 왜 이렇게 내 심장을 건드리고 그러냐. 이제 움직이면 안되는 심장. ....왜 자꾸 깔짝거리냐. 지금 나한테 마누라, 서방님 할 여유 없는데. 왜 자꾸 나 건드리고 그러냐고..... 자꾸 미안하지게 왜...... 3-32. 톰과 란제리 .............. .......... ※ 선우권에게 오른손을 잡힌채 쫄랑쫄랑 뒤따라가고 있는 김윤서.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고 있는 가지각색의 교복 무리들. 그리고 이 요상한 무리를 희한하다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 ......아 마늘이 마구마구 팔려 주시는군요. "어디 가는거야?" "마누라랑 추억 만들러." "....그럼 저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은?" "증인" "부부클리닉 찍으러 가냐? 증인은 무슨." 인상을 잔뜩 구기며 툴툴거리는데도, 선우권은 아무렇지 않은 듯. 싱글벙글 웃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렇게 도착한 곳은.... "톰과....란제리????" 황당한 속옷 가게 간판에 당황해 하고 있는데, 내 손목을 끌고 성큼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선우권.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빨간 속옷. 눈이 쏙빠지게 예쁜 레이스 속옷. ........ 벙― 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는 나와는 익숙하게 점원에게 걸어간 선우권은 아주 당당하게. "여기 커플 잠옷 세트랑요, 커플 속옷 세트 보여주세요." "아. 예예.." 젊은 학생들이 커플 속옷을 찾는게 믿기지 않는지 눈을 깜박이던 점원 언니가 서둘러 진열장을 뒤적인다. "저기 혹시 미치셨나요?" "네, 우리 이뻐 죽겠는 마누라한테 미쳤어요." "윽. 정말 미쳤나보네." 정말 미쳐도 단단히 미쳐버린 선우권을 보며 혀를 끌끌 차던 나는 점원 언니가 올려놓은 속옷을 보고 입을 꾹 다물고야 말았다. ....이 점원 아가씨가 선우권 따라미치기라도 했나. "요즘 제일 잘나가는 세트예요. 어, 특히 일찍 결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찾으시더라구요." 아무래도 이 아가씨 인터넷 소설을 너무 많이 보셨구만. 얼굴까지 붉히며 계속해서 한무데기의 속옷&잠옷 세트를 내놓는 아가씨를 껄쩍지근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선우권이 너무나 심각한 얼굴로 내게 한 속옷 세트를 보여준다. "뭐? 어쩌라구요?" "이거 어때? 좀 야시시한데... 마누라한테 딱일 거 같아." "제발 그런거 진지하게 물어보지 마. 갑빠가 운다, 갑빠가 울어." 혀를 끌끌 차며 녀석이 내민 야광 속옷 세트를 다시 돌려줬다. 그러자 이번엔 땡땡이 속옷 세트를 내미는 선우권. ....당연히 돌려주고. 하지만 녀석은 지치지도 않는지 계속해서 별 해괴망칙한 속옷 세트들을 내밀었다. "앗! 마누라, 이거 봐! 이거 진짜 마누라한테 딱이다!!!" 이번엔 가뜩이나 좁은 가게 안이 떠나가라 소리치는 선우권. 하두 호들갑을 떨어대길래 한숨을 내쉬며 녀석이 들고 있는 속옷을 향해 시선을 돌리는데. .......정말 녀석 말대로 나한테 딱인 속옷이 눈에 들어왔다. ".....예쁘긴 한데 너랑 커플로 입고 싶진 않다." "마음에 든다는 소리지? 좋아. 저기요, 이거랑 이거 주세요." "하여간. 가위질만 못하는 게 아니라, 귓구녕도 막히셨지." 내 대답은 깡그리 무시하고, 지 멋대로 속옷을 고르는 선우권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다소곳이 날려주고 가게를 나왔다. 후아. 날씨 한 번 끝내주네. "치사하게 먼저 나가는 게 어디있냐? 우리 마누라, 참을성 없는 건 알아줘야해." "됐고, 난 이제 그만―" "슨배님, 큰일 났습니더!!" "우경이 너 내가 마누라랑 얘기 할 땐 끼어들지 말랬지." ......선우권의 또 하나의 재주. 두 얼굴의 사나이. 선우권은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다급하게 달려나온 후배를 꾸짖었다. 그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당황하던 후배님은 선우권에게 핸드폰을 내밀고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거 사실이야?" "처, 천상이가 보낸거 아임까. 화, 확실 합니다!" "이렇게 빨리 내려 올 줄은 몰랐는데." 후배님이 내민 핸드폰을 심각하게 바라보던 선우권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아. 마누라 미안. 일이 생겨서 오늘 추억 만들기는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정말로 미안. 그리고 우경이, 너 지후하고 둘이서 우리 마누라 집까지 데려다놔." "스, 슨배님? 그라모 슨배님 혼자 가실라꼬요?" "잔말말고 빨리 데려다줘." "그럴 필요 없네요. 내가 무슨 앤가? 니 후배들 호위 받으면서 갈만큼 연약하지가 못하다네. 나는." "진짜 무드없어, 마누라." 방금 전까지 잡던 무게는 어디로 홀랑 날려버렸는지. 금새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선우권. 그렇게 한참을 뚱한 표정으로 날 보던 선우권은 갈색 고양이 톰과 회색 쥐 제리가 그려진 쇼핑백을 내게 안겨주고서, 아까 그 후배님과 심각하게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여하튼 그럼 나 간다." "안돼! 지금 너 혼자 돌아다니―" "스, 슨배님!!!"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지른 후배님이 겁에 질린 얼굴로 어디론가를 향해 손가락을 치켜 들었다. 후배님의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 끝에는..... 너무나도 낯익은 교복 무리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였어?" "응? 뭐가? 아. 저 새끼들은 왜 이렇게 빨라. 우경아 너 빨리 지후랑 마누라 데리고―" "진짜였냐고 물었잖아, 우권아." "마누라?" ".....아. 진짜 미치겠네, 이거."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비죽 웃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선우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두둑.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하아. 얼굴 빼고는 하나서부터 열까지 똑같은 게 한개도 없어. 기뻐해야 되는 일인지, 나빠해야 되는 일인지 이것 참.." "아까부터 무슨 소리야?" "...마누라 말고. 엉, 그래그래 마누라 말고 쫄따구. 그거면 허락해줄게, 선우권. 너 내 쫄따구 해라?" 낯익은 교복 무리들이 가까이 다가왔다. 내 말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는지. 멍청하게 눈을 꿈벅이던 선우권은 곧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미소를 지었다. "마누라 심장 속에 제대로 박힐 수만 있다면야 뭐. 명함이 뭐가 중요하겠어." "대신 나랑 약속 한개만 해." 이제 서로의 숨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온 교복 무리들. 선우권의 후배님들이 서둘러 그들을 막아서고, 선우권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천에서의 직접적인 호출이 오기 전까지는 허울뿐이더라도 모범생 역할을 완벽히 수행해야 하므로,미리 도망갈 구멍을 만든 뒤. 까치발을 들어 선우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대장님 심장에 깔짝거리지 않기로." 천천히 몸을 뗀 나는 싱긋 웃으며 몸을 뒤로 뺐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쫄따구! 하하하. 그럼 저 새끼들 다 처리하고 연락해, 기꺼이 달려나와줄테니깐." 휘적휘적. 정신을 못차리고 서있는 선우권을 향해 휘적휘적 손을 흔들어준 나는 마지막으로 연오가 애용하는 비장의 무기. 앙큼상큼♡윙크를 날려주고는 달음박질을 쳤다. 3-33. 대장님과 쫄따구 후악후악. 싸움이 하고 싶어 한껏 근질거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근처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을 전력 질주 한 뒤. 턱을 넘어서 콧구멍까지 차오른 숨을 헐떡이며 털썩. 바닥에 주저 앉았다. 요즘 너무 놀았나보다. 고작 요거 뛰고서 이렇게 꼴사납게 무너지다니. 코 끝을 잔뜩 찡그리며 운동장 바닥에 드러누운 나는 까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손에 잡힌 핸드폰을 쑤욱. 빼내서 단축번호 7번을 길게 누르고 귀에 가까이 갖다댔다. 얼마안가 들려오는 아라의 낭랑한 목소리. ["하아. 아라 안뇽?"] [응, 윤서도 안녕.] ["아라야!!"] [으응?] ["나 구라파덕 욘나게 싫어하는 거 알지?"] [구, 구라 파덕?] ["응. 퐁퐁 몬스터에 나오는 구라파덕 말구, 구라 잘까는 오리새끼. 그거."] [아아. 으응...] 짖궂은 내 목소리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챘는지, 순식간에 아라의 목소리가 침울해졌다.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는 땀방울들을 대충 팔뚝으로 훔쳐낸 나는 싱긋.웃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오늘 시내에서 뭘 봤게?"] [뭐, 뭐를.. 바, 봤는데?] ["엉. 예전엔 인천연합이였고, 지금은 서울연합이 된 떨거지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라가 급하게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저번에 너무 아라를 몰아세운거 같아 이번에는 자제하려고 했지만, 김윤서 주둥이는 그 명령을 거부하고 지멋대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인천서 살고있는 김한영 떨거지들. 걔네를 봤다니깐? 아라야, 너 놀랍지 않어? 난 니가 아무 말이 없길래 너두 모를줄 알었는데. ....지금 보니까 알고 있었는갑다?..."] [유, 윤서야...] ["선우권이 서울연합 탈퇴한거며. 그거때문에 서울연합에서 애새끼들 보낸거며. 한..가람 부산 온거며. 이것저것 잡다구리한거 다 합쳐서 너가 모르는 소식이 많을거라 생각했는데 말야. 나 지금 뒷통수 크게 후려맞은 느낌. 어쩌지, 아라야?"] 이번에는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마음 약한 아라는 내 다그침에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하며 작게 흐느꼈고. 그 모습에 아라보단 쪼오끔 마음이 덜약한 김윤서가 한숨을 내쉬며 다다다. 쏘아대던 말을 멈췄다. ["화내는거 아냐. 울지말어요, 아가씨. 엉?"] [미. 미안해... 마, 말해야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러질 못했어. 미안... 윤서야 정말...] ["되었네. 미안하다는 말은 송은채 한테나 해줘."] [소, 송은채?] ["미안하다, 사랑한다에 나왔던 걔 있잖어. 앙증맞고 귀여운 여자애."] [아아... 풋.] 꼭 리플을 달아줘야 웃지. 아라의 웃음소리에 나역시 입가에 웃음을 주렁주렁 매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음부턴 꼭 나한테 먼저 귀뜸 해주기. 너희들이 내 걱정해서 입에 쟈크 채운 건 백번 이해하는데, 이건 영 아니다 싶다. 내 마음 알지? 인제 김윤서 꼴통도 좀 컸다, 이거야. 옛날처럼 꼴리는대로 굴지 않을꺼니깐, 이 사람 좀 믿어 주세요? 그럼 끊는다. 수고!"] 철지난 유행어를 한 번 읊어주고, 뚜우.전화를 끊었다. 아까. 인천공고(☜옛날 김한영이 다니던 학교여서 교복을 기억하고 있음.) 무리들을 막아선 선우권의 모습이 떠올랐다. .......... 오랜만에 발견한 김윤서 마음에 드는 사람. 주먹 빼고는 볼 거 없는 김윤서를 좋아한다고 말해준 두번째 사람. 선우권. 제화공고 선우권. 반짝반짝. 빛이 나는.... 부산의 별. "그렇다고 진짜 연합 탈퇴할꺼라곤 생각 못했는데. 그게 선우권 진짜라는건가??.. 하이고. 하늘이 빙빙 돕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몸담고 있던 연합을 나온 선우권. 마누라를 위해 자기 한 몸 바쳐 도와주겠다는 선우권. 김윤서의 하늘을 닮은 선우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연합의 밑으로 들어간 한가람. 김윤서를 위해 아픈건 자기가 다 하겠다던 한가람. 김윤서의 하늘을 지켜주겠다던 한가람. 선우권. 한가람. 선우권. 한가람..... 진짜 얼굴 빼고는 한 개도 닮은데가 없네. 하여간 얄궂지요, 사람 사는게. "그나저나. 그 것들 처리하는데 뭔 시간이 이렇게나 오래 걸려?" 손목에 감겨진 검정색 전자시계를 흘끗. 바라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에 묻은 모래들을 탈탈 털어냈다. 마지막으로 옷매무새를 다듬는데. 기막힌 타이밍에 걸려온 전화. ....양반김은 못될 사람입니다. ["다 끝내셨어?"] [윽. 마누라, 나 갈비뼈 한 두어개 나같거 같아. 진짜 아퍼, 울고싶다. 어떡하지?] ["갈비뼈 나갔다고 안 죽어, 얌마. 아까 거긴 아닐테고. 어디서 싸웠냐?"] [우리학교 근처 공터.] ["4분 37초만에 달려갈테니깐, 아픈 갈비뼈 부여잡고 기다리고 계세요. 따구님."] [어? 아니, 마- 마누라―]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다급한 선우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깔끔하게 플립을 닫은 나는 제화공고를 향해 또다시 뜀박질을 했다. 뜀뛰기는 싸움과 펀치게임 다음으로 김윤서가 가장 사랑하는 것이였다. 꼭 사랑이 아니여두 되지요. 같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료여두 되지요. ......그 애와 다른 사랑이여두 되지요. 그래도 되지요, 하늘님? 서방님 선우권 말고, 쫄따구 선우권으로 그 아일 심장에 담어놔도... 그래도 되지요...? ................. ※제화공고 제화공고 교문에 도착한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선우권이 말한 공터를 찾았다. 데구르르. 굴러가는 눈동자에 곧 누군가에게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는 선우권이 비춰진다. 실쭉. 입가에 미소를 띄운 나는 처벅처벅 선우권을 향해 걸어갔다. "생각보단 몰골이 괜찮네??..." "윽. 마누라 나랑 안과 다녀와야겠다. 시력 너무 안좋은데?" "마누라 말고 대장님이래니깐. 그리고 내 시력 3.0이야, 왜 이러셔?" "사람 시력은 2.0이 최곤데." "난 사람이 아니잖아." 내 말에 선우권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는다. 선우권을 부축해온 후배님은 녀석을 나에게 넘기고는 바람같이 사라져버렸다. 단 둘만 남은 상황에 멋쩍어진 나는 실없는 웃음만 쪼개며 선우권의 오른팔을 어깨에 둘렀다. "쫄따구 사랑은 대장님. 병원갈까?" "아니." "생각보다 꽤 다쳤네. 내가 했으면 우리 쫄따구 안다쳤을껀데... 요즘 대장님 상황이 바닥에 엎드리고 살아야 되는 상황이여서 미처 도와주질 못했습니다. 지성." 유치한 내 사과에 선우권의 피식거림이 또 들려온다. 웬만한 아녀자가 도와주기엔 버거운 선우권의 무게였지만, 다행히도 김윤서는 웬만한 아녀자가 아니였기 때문에 가뿐히 선우권을 부축하면서 대한병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응급실에 선우권을 던져놓고, 뻐근해진 어깨를 주무르며 비상구로 들어온 나는 잠시 고민을 하다. 결정을 내리고 뚜벅뚜벅.계단을 올라갔다. 707호 화강안. 병실문에 서서 잠시 눈을 깜박이다가. 휘유.휘파람을 불며 병실문을 열었다. "....꺼져버려." "나한테도 넌 결코 반갑지가 않거든? 말 자르지 말고 잘 들어, 화강안." 화강안은 신경질적으로 TV의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팔엔 깁스. 한 다리에도 깁스. 갑빠에도 깁스. 목뼈에도 깁스. 온통 깁스 투성이, 화강안. "단 일분 일초라도 너같은 년하고 말 섞고싶지 않다. 꺼져라." "그건 피차 마찬가지구. 너 아직 김한영 쫄따구로 있다며?" "....꺼지라고." 어느새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화강안이 위협적으로 말했다. 하지만 요따위 화강안의 협박에 굴할쏘냐! 얄미울정도로 함박웃음을 머금은 나는 화강안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 새끼한테 전해, 너네 잘나신 대장님한테. 이제부터 선우권은 김윤서 쫄따구니깐. 이제부터 김한영꺼가 아니라, 김윤서꺼가 된 새끼가 바로 선우권 그 새끼니깐!! 앞으로 김윤서 허락없이 선우권 건들지 말라구. 꼭 전해라?" 마지막으로 화강은을 향해 한껏 비틀린 웃음을 날려주고 돌아서는데. .....돌아서서 병실을 나서는데. 평소답지 않은 화강안의 무거운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내 머릿속을 울려댔다. ".....용서하고 싶어도, 끝까지 용서 못하게 하는게 바로 너지 김윤서. 한가람 부탁때문에라도 이 지긋지긋한 감정 없애려는데, 끝까지 도움 안주는 게 바로 너지. 김윤서.... 씨발.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너...." 언제는 안죽이고 싶었겠냐. 우스운 화강안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달칵. 병실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리고 선우권이 기다리고 있을 1층으로 내려가려는데. 차라리 듣지 말았어야 할 목소리가 병실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강안아..." 거짓말처럼 내 걸음이 뚝 멈춰졌다. 놀라움이 스며든 얼굴로 병실문을 돌아봤다. 가슴이 쿵쾅쿵쾅. 정신없이 뛴다. 눈알이 핑글핑글. 정신없이 돌아간다. 손가락이 부들부들. 정신없이 떨린다. .......... 언제까지 전 저 아이에게 상처만 줘야 하는 건데요. 불쌍해서 뒈져버리고 싶은 저 아이에게 언제까지 상처만 줘야 하는건데요..... 이제 겨우 살고싶어진 김윤서, 다시 죽고싶게. 언제까지 이래야 하는건데요, 이 빌어먹을 하늘님아..... 3-34. 재회 꾸욱. 자꾸만 터져버릴 듯, 울렁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병실문에 기대섰다. 항상 차갑게만 느껴지던 병실문이 따뜻하게 느껴진다. ......저 안에 그 아이가 있어서 그런걸까. 아. 정말 스큐류바 같은 생각이 따로 없네. 쟤가 무슨 난로라도 되냐. 따뜻하기는 개풀. ― "윤서, 집에 안가나보다.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안나오네." ― "미친놈." 퉁명스러운 화강안의 목소리 뒤에 가람이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맑고. 예쁘고.... 또 눈물나게 포근한..... 웃음소리. 그 거는 한 개도 안 변했네. "아... 진짜 울음나." 뜨뜻한 무언가가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이를 악물고 뜨뜻한 그 무언가를 훔쳐내고서 몸을 일으켰다. .......나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다. 김윤서하고는 솜털만큼도 관계없는 사람이다, 한가람은. 1년 전, 그 날부터 김윤서하고 한가람은 빠빠이 한거다. ....... 그러니까 지금 김윤서가 여기 죽치고 서있을 필욘 박테리아만큼도 없다, 이거지. "망할 귓구녕... 쑤셔버릴라..." 괜히 마음만 심란한 목소리를 들려준 귀떼기를 신경질적으로 주욱. 잡아 늘이며 한발자국씩 휘적휘적 걸음을 떼는데. 아. 한 번 꼬이면 도통 풀릴 생각을 않는 이 놈의 빌어먹을 인생. "윤...서야?" 당황한듯. 그러면서도 굉장히 기쁜 듯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잠시 걸음을 멈춘 뒤, 눈을 깜박이던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에는 반쯤 열려진 병실문을 어쩡쩡하게 잡고 서있는..... 가람이가 있었다. "아.... 연습 되게 많이 했는데. 너 다시 보면 옛날처럼 웃으면서 인사하는 연습... 그 거 되게 많이 했는데... 막상 너 보니까 잘 안되네.." 가람이의 왼쪽 입술이 어색하게 씰룩인다. 역시 귀로 듣는 거하고, 눈으로 보는 거 하고는 천지차이야. 화강안한테서 한가람 부산 왔다는 소리 들었을땐, 그냥 심장이 욱신욱신 거렸는데. .........막상 이렇게 내 앞에 서있는 모습 보니까 욱신거림조차 느껴지질 않으니 말이야. 사르르 떨리는 손을 감추고 방긋 웃었다. "오랜만, 한가람..." "응. 오랜만이야, 윤서야." "근데 우리. 이렇게 웃으면서 마주 보고있을 사이... 아니지 않나?" 여전히 웃고는 있었지만, 심장은 주체 할 수 없이 떨려왔다. 하지만 난 문소리 아주머니도 울고갈 연기를 선보이며 기어코 가람이의 예쁜 눈동자를 울게 만들었다. 나쁜년. 뒈져버릴년. 재수없는년. ....... 화강안 말이 딱이네, 김윤서. "몸은 괜찮나보나? 이렇게 쏘다니는거 보니까 괜찮은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응, 많이 괜찮아졌어." "엉. 보니까 더럽게 많이 괜찮아보여." "김윤서!! 말 조심해." 비죽비죽. 웃으며 꼽게 말하는 날 향해 화강안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알을 부라렸다. "....침대에서 일어난지 얼마 안됐을텐데, 무리하지마라." 순간 가람이의 눈동자가 커지더니, 곧 둥글게 휘어졌다. 하지만 뒤이어 터져나온 말에 결국 얼굴을 돌리고야 마는 불쌍할정도로 착한 한가람이다. "너 다시 침대에 고꾸라지면 그 책임,다 우리가 물어야 되걸랑. 잘못한 건 한가람인데, 정작 똥오줌같은 거 다 우리 칠공주가 뒤집어 써야 하걸랑." "....김윤서, 너 끝까지." 화강안이 분노로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낮게 으르렁거렸다. 하지만 강아지 흉내 내는 화강안따위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지금 내 눈을 꽉 채우고 있는건. ....보기에도 힘겨워 보이는 가람이의 뒷모습. ......웃고 있다고 심장까지 기쁜거 아니라고. 울고 있다고 심장까지 슬픈거 아니라고. 찡그리고 있다고 심장까지 화난거 아니라고. 그런거 세계에서 최고로 잘 알고 있는 가람이였는데. 그런거 눈물날만큼 나보다 더 잘 알아준 가람이였는데. "침대에 눠있는동안 한가람 대갈통 쫌 썩었나보다??..." "김윤서어!!!!!" 화강안의 고함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리고. 안즉도 김윤서 마음, 코끼리 콧구멍만큼도 모르는 가람이는 아픈 뒷모습만 보여주고. "인제 재미 없어졌으니깐 가야지. 거기 두 환자님들 몸조리 잘하세요. 그럼 빠빠이!!!" 손을 휘적휘적 흔들어주고 몸을 턱.돌리는데 무언가 거대한 물체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갑작스러운 부딪침에 아까부터 겨우 버텨온 다리가 휘정거리는 찰나. 커다란 손이 내 허리를 휘어잡았다. 곧이어 휘둥그레진 눈동자에... 활짝 웃고 있는 선우권이 들어왔다. "마누라, 괜찮아?" "...아주 조금 괜찮지가 않아서 그런데. 잠깐만 이대로 있을께? 쪽팔리게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서 말야.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선우권의 옷깃을 잡으려는데, 갑자기 번쩍. 몸이 들어 올려지더니. 어느새 선우권의 널따란.(☜한편으론 깁스가 부착되어 단단한.) 가슴팍에 안긴 내가 보였다. "마누라한테는 온니 오픈인 서방님 가슴팍! 어때? 뿅가게 멋져?" "와나...너 때문에 돌겠어, 진짜." 넉살좋게 웃는 선우권에게 차마 화를 내지도 못하고. 퓌식퓌식. 바람빠진 웃음소릴 내며 머릴 쓸어넘겼다. 뚝. 갑자기 이마 위로 떨어지는 땀방울. 살짝 고개를 들자, 꽤 힘이 든지 비오듯이 땀을 흘리고 있는 선우권의 얼굴이 보였다. "힘들면 내려줘두 되는데. 난 그냥 부축만 쪼끔 받으면 되는데." "서방님 갑빠가 있지!" "그 놈의 갑빠타령은." 투닥투닥. 그렇게 선우권의 품에 안긴 나와 선우권이 아웅다웅 다투고 있는데, 갑자기 싸한 느낌이 불어닥치더니. 아까보다 눈에 띄게 굳어진 가람이가 다가와 날 안고 있는 선우권의 손을 잡았다. "누구...시죠." "나? 김윤서 서방님인데. 넌... 우리 마누라 심장에 살고 있단 그 새끼??" 파지직. 선우권과 가람이의 눈동자에서 푸른색 번개들이 뿜어져 나왔다. "듣기론 손하나 깜짝 못하는 식물인간이라던데. 언제 일어났냐?" ".....손 놓으십시오." "너야말로. 서방님이 마누라 좀 안고 있겠다는데 제 3자가 왠 참견?" "손 놓으라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파지직. 하지만 이번엔 선우권의 번개가 조금 더 강했다. 가람인 조금 슬프게 웃으며 날 안고 있는 선우권의 손을 더 힘주어 잡았고, 이에 선우권은 지지않겠다는 듯. 날 안고 있는 손에 더욱더 힘을 줬다. 이런 미친. 아주 뽀사지겠네. "씨바, 둘 다 못 놔?!!" 결국 온 몸으로 퍼지는 저릿저릿한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소리를 버럭 지르자, 놀란 두 남자가 화들짝 손을 놔버렸다. 동시에 쿵. 바닥에 추락.. 아까보다 더 놀라하는 두 남자를 향해 입술을 씰룩여준 뒤, 얼얼해진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퍼뒈져... 으." "마누라 괜찮아?!" "윤서야 괜찮아?!" 당황한 두 남자에게 가볍게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리고 돌아섰다. 껄쩍지근한 침묵 속에서 잠시 멈춰있다, 한 발자국씩 걸음을 떼며 조용조용 말했다. 한 발자국씩. 한가람한테서 멀어지면서. 이젠 빼도박도 못하게 되버린 심장의 이쑤시개를 떠올리면서. 조용조용 말했다. "한가람.... 1년 전 그 날부터 김윤서가 김한영하고, 추여사하고 또 우리 김사장 빼고. 제일로 씨껍하는 새끼. 제일로 씨껍하고, 씨껍하고 또... 씨껍하는 새끼..." 투두둑. 제일로 미안할 새끼. 제일로 좋아했던 새끼. 제일로 착한 새끼. .......이제 진짜로 안녕해야 할 새끼. "안녕, 빠빠이 한가람.." 3-35. 진짜 빠빠이와 가짜 빠빠이의 사이 ................ ......... ※ ".....―누라. 마누라아!" "엉." "정신 어따두고 왔어? 아까부터 계속 불렀는데 왜 모르는 척이야. 튕기는 여잔 별론데." "엉." 똑같은 대답만 되풀이 하는 내가 짜증났는지,선우권이 거칠게 내 왼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모기를 쫓듯이, 가볍게 녀석의 팔을 떨궈낸 나는 고개를 흔들거리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마누라 지금 뭐하자는 플레이?" "엉." "그 놈의 엉엉 좀 하지 말고! 어휴, 진짜. 불안해서 눈 뜨고는 못봐주겠네. 자!" 주절주절. 자기 혼자 궁시렁거리던 선우권이 갑자기 내 앞을 가로막고 몸을 숙였다. 다른 때 같았더라면 녀석의 등짝을 후려치며 무슨 짓이냐고 묻기라도 했겠지만... 미안하게도 지금은 다른때가 아니였기 때문에. 난 매정하게 녀석을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마누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선우권의 목소리. 그와 동시에 길을 걸어가던 사람들이 일제히 걸음을 멈추고 선우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생각만 해도 흥분되는 생각(☜빨간딱지 붙은 생각 절대 아님)에, 이번에도 선우권을 깔끔히 무시하고 지나쳤다. "가짜 빠빠이 하고 이러면, 진짜 빠빠이했다간 아주 뒈지겠다. 응?!! 마누라아!!!!!" ....... 선우권의 마지막 발악에 거짓말처럼 뚝. 걸음을 멈춘 내가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선우권을 바라봤다. 잔뜩 굳어있는 선우권의 얼굴. 싱글벙글 미소가 가득한 김윤서의 얼굴. "까지말고 좀 닥치세요. 응?" "....진짜 화난다. 마누라 심장, 절반은 차지하고 있는 그 새끼. 아주 존나게 화난다." "까지말래두?... 김윤서 심장엔 빌어먹을 김한영하고, 하늘밖에 없대니깐." "빠빠이같은 거 안해도 좋으니깐, 제발 그 새끼때문에 위태로워하지마. ......보는 내가 더 화나." 어울리지 않게 있는 분위기, 없는 분위기 다 끌어다 잡고 있는 선우권을 참 꼴같지도 않게 쳐다보다. 이내 고개를 휙 돌렸다. 눈깔에 썩은 동태포가 씌었나. 가짜 빠빠이는 무슨... 괜시리 쿵덕거리는 심장을 무시하기 위해 주먹을 말아쥔 나는 뚜벅뚜벅 걸어갔다. "마누라!!!" "선우권." 질리지도 않는지, 다시 따라오려는 선우권을 즐겁게 불렀다. 순간 선우권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은 내 입술이 슬며시 열렸다. ......강해졌어. 이젠 한가람하고 가짜던, 진짜던 빠빠이라는 걸 할 수 있을정도로 강해졌어. 그러니깐.... .......그러니깐 이제 잡을꺼다. 바짝 긴장하고 있으라고, 하늘님??.... "너한테 부산연합은 어떤거냐?"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후다닥. 내 옆으로 달려온 선우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그런 녀석을 향해 빙긋. 미소를 지어준 나는 녀석의 심장을 가리키며 물었다. "니 심장에서 부산연합, 아니 칠성이 차지하고 있는 부피가 얼마만큼이냔 말이죠. 응?" "갑자기 그건 왜?" "내가 먼저 물었는데." "마누라보단 조금 덜한 친구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구기는 선우권. "...글쎄. 친구를 버리다고 말하기엔 좀 뭐하지?" "좋아, 그럼 바꿔줄게. 김윤서보다 조금 덜 한 니 친구들, 잠깐동안 신경 안 쓸 수 있을 정도로?" "질문이 뭐 이러냐." 마음에 들지 않은 듯, 콧잔등을 찡그리며 선우권이 날 바라봤다. 녀석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나는 횡단보도 옆, 불쑥 솟아오른 전봇대에 다리를 올렸다. 매끈하게 뻗어오른 내 다리를 보고 벙- 한 표정을 짓던 선우권이 재빨리 표정을 수습하고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응. 마누라의 뻑가는 허벅지에 올인하겠어." "좋아, 변태 쫄따구는 별로 취미가 없지만. 이번만 봐주지. 자자, 그럼 두번째 질문 갑니다. 레인보우라고 알어?" 깜박. 신호등의 초록색 불이 들어오고. 우루루 쏟아지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서 횡단 보도를 건너는데 요번에는 처음부터 강했는지, 선우권이 놀란 얼굴로 내 손목을 나꿔챘다. "빨리 대답하는 건 좋은데, 여기 계속 서있다간 우리 골로 갈 것 같다??.." "레인보우는 왜?! 마누라가 그 레인보울 어떻게 알어?!" 깜박깜박. 곧 꺼질 듯, 초록색 불이 짧게 깜박였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건너가고, 위험한 횡단보도 위에는 선우권과 김윤서만이 서있다. .....심상치 않은 기세로 크락션을 울려대는 차들을 보니 정말 까딱했다가 골로 갈 듯 하다. 죽는 것도 나쁘진 않았지만. 벌써 죽어버리기에는 하늘을 잡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던 나는 선우권의 손을 이끌고 건너편으로 건너왔다. "그냥 아냐고 물었어, 나는." "당근, 알다마다. 돈만 주면 어떤 일이든 다 해주는데다, 뒤처리까지 완벽하게 하는 그 대단한 조직을 누가 몰라. 벌써 우리 연합에서도 두어놈이나 당했는걸. 근데 뒷골목에서만 유명한 조직을 마누라가 어떻게 알아? 혹시.... 마누라 친구가 레인보우?!" 별 황당무계한 소리를 지껄이는 선우권을 향해 가볍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걸음을 재촉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어른들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서 효선이하고 아라가 철저히 비밀유지를 했다더니. 정말이였나갑네. 오호라. 대단해라. "그럼 이건 쫌 먼건데. 혹시 인천 칠공주라고 아는가 모르겠네?" "마누라!!" 대답 대신 귓구녕이 얼얼할정도로 소리를 꽥.지르는 선우권. 이 새끼. 아까부터 누구 귓구녕을 애자로 만들라고,소리를 빽빽 질러대는 거야. 후끈거리는 귀를 후비며 고개를 돌리자, 뜨악스러운 선우권의 얼굴이 보였다. "진짜 또라이 쫄따구. 이래가지고 김윤서 쫄따구 하겠어요?" "마누라가 혹시...." "너네 정보통 다 갈아엎어라. 영 쓸모가 없네. 내가 인천서 전학 왔다는 것도 몰랐다니 말야. 그래도 명색의 부산에서 알아주는 학교 짱이였는데 말야." 손 끝을 퉁기며 입술을 씰룩이자, 선우권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찡그리는 것도 아닌. ....정말 눈뜨고는 못봐줄 녀석의 얼굴에 웃음보가 간질간질 할때쯔음. 선우권의 먹음직스런 입술이 열렸다. "대충 알고는 있었는데, 뭔가... 마누라한테서 들으니깐 이거 신선한 충격이네. 그럼 마누라가 부동의 전국 2위, 칠공주의 일당백?" "곧 부동의 전국 1위로 올라갈꺼야." 여전히 충격이 가시지 않은 녀석의 이마를 퉁. 튀기고 아지트를 향해 휘적휘적 걸었다. 아까완 달리 조용히 따라오던 선우권은 다 쓰러져 가는 초록색 대문 앞에 서자 의아함이 담긴 목소리로 물어왔다. "여기가 어디야?" 끼이익. 몇 일 신경 좀 못써줬다고, 녹이 잔뜩 쓸어버린 외로운 대문을 밀었다. 대문 안으로 오른 발을 들여놓고 고개를 돌린 나는 야릇하게 눈을 찡긋이며 말했다. "레인보우 아지트." 3-36. 아지트 턱. 지난주에 이연이가 맨들맨들하게 닦아놔 빛이 나고 있는 현관문을 향해 오른손을 뻗으려는데.. 갑자기 날 돌려세우는 선우권. "엉? 왜?" "지금 내 대가리가 먹통이 되서 그런데... 지금 이게 무슨 상황?" "선우권이를 김윤서 정식 쫄따구로 소개하려는 상황." "윤서야아!!!!" 한 5178톤정도 되는 맘모스 발에 채이기라도 했는지. 눈까리를 뒤집고 나를 쳐다보는 선우권에게서 시선을 떼고, 막 열려진 현관문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이연이를 바라봤다. 바나나광, 수이연답게 오물오물.바나나맛 츄파춥스를 입에 문 이연이가 땡그란 눈을 깜빡이며 나와 선우권을 번갈아 봤다. "어... 어.... 쟤... 그러니까아....." "표정 집어넣어. 김윤서 쫄따구 1호, 껍데기 닳을라. 안에 애들 있지?" "어엉. 요즘 삐뽀삐뽀 사태라 옹기종기 모여 앉았어.!!!" "들어가자." 말 한개는 무지하게 잘 듣는 이연인 금새 선우권에게서 관심을 떼고, 우렁차게 소리쳤다. 그런 이연이에게 빙긋 미소를 지어주고, 여전히 상황파악 안되는 선우권의 손을 질질. 잡아끌고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다. 일반 가정집보다 훠얼씬. 가정집같은 분위기에 더욱더 못 믿겠다는 듯, 선우권이 눈썹이 꿈틀거렸고. 앉은뱅이 식탁에 모여 앉아 매니큐어를 바르던 연오와 지니가 그 모습을 보고선 인상을 구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씨발놈은 왜 달고 왔냐." "김윤서, 너한테 생겼다는 남자가 혹시 그 새끼야?" 거의 동시에 내뱉어진 두 여자의 말. 이연이는 다른 애들을 부르러 안방으로 휙. 뛰어 들어가고. 거실에 있는 세 남녀(☜묘한 표정의 선우권&살벌한 분위기의 은지니&선우권을 훑어보고 있는 주연오)는 서로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바라보며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있는데. 안방 문이 벌컥 열리면서 평소 모습과는 다르게 반쯤 흐트러진 뿔테 안경을 쓰고 있는 효선이와, 놀란 표정의 아라가 뛰어 나왔다. "리안?" "어? 리, 리아 오, 오늘 늦는다고... 그, 근데 옆에 걔... 제화공고 선우권 아니니??" 아라가 붕어새끼마냥 뻐끔뻐끔. 입을 벙긋 거리며 선우권을 가르켰다. 본의 아니게 손가락질을 받게된 선우권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날 돌아봤다. "아. 소개 할라구, 지금. 엉엉, 그럴테니깐 다들 표정 좀 풀고 앉어들..."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는데도, 꿈쩍도 않고 서있는 아이들. "오키도키. 알았어, 앉기 싫음 그냥 서서 들어도 돼. 자, 여긴 내 쫄따구 1호 선우권. 여긴 최강 인천 칠공주 겸. 선우권, 너가 아까 말했던 그 대단한 레인보우 입니다. ^ㅇ^" 서로 만나서 반갑다며 악수를 하는 것까진 바라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멍텅구리 표정을 지으며 나를 쳐다보는 건 생각조차 못했는데 말야. 머리 회전이 가장 빠르다는 효선이조차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는데. 윽, 이런 난감함이라니.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는데. 선우권이 아까전부터 꾸욱.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냥 그렇다구. 아까도 말했잖아?" "갑자기 무슨 소개?" "쫄따구라니? 너 그런 거 안 키운다며!!" "미쳤냐, 너?" "유, 윤서야 그, 그래도 갑자기 이건!" "이연이도 쫄따구 구해줘어!!" 효선이, 연오, 지니, 아라, 이연이가 순서대로 소리쳤다. 그냥 소개라면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나 할 것이지, 왜 따지고들 들어. 복잡하게 꼬여가는 상황이 깨름칙해 눈썹을 긁는데. 가장 먼저 제정신을 차린 효선이가 아이들을 수습하고서 선우권에게 다가갔다. 코 앞까지 다가선 효선이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선우권이 갑자기 손뼉을 친다. "맞다, 너! 과고 최효선 맞지? 천상이가 죽자사자 쫓아다니는 애. 게다가 저 노란머린 얼마전에 재섭이 여자친구 된 제화고 수이연이고. 그 옆에 빨간머린 필립이가 첫 눈에 뻑갔다는 체고 은지니에... 아. 쟤 화강안 따라다니는 상고 주연오." 일일히 소개 시켜주지도 않았는데, 그 분이 오셨다는 듯. 선우권이 우리 애들을 한명씩 찬찬히 짚어가며 말했다. 그 중. 유일하게 선우권의 말하지 않은 아라가 멋쩍게 웃으며 조심스럽게 지니의 뒤로 가 숨는다. "쟨 제화여고 다니는 순둥이 황아라야." "아, 응. 근데 레인보우, 7명 아닌가? 왜 여섯명 밖에 없냐? 혹시 가짜 레인보우 아냐?" "아냐!!!! 록기 세븐 맞어, 재섭자기 친구님!!" 언제부터 알았다고. 이연이가 선우권의 손을 잡아 흔들며, 친한척을 하기 시작했다. 붕어빵 뒤집 듯. 순식간에 변한 이연이의 태도에 오히려 당황한 선우권의 얼굴이 붉게 닭아오르기 시작했다. "어머. 명색의 부산 하늘을 가지고 있다는 남자가 여자 손 한 번 잡았다고 얼굴이 빨개지네. 호호. 키스 한 방이면 아주 기절 하겠어?" 조금은 짙다싶은 연오의 농담에 선우권의 얼굴이 활화산처럼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며 저마다 굳게 닫아놓았던 표정을 풀고선 킥킥. 웃음을 주렁주렁 매달기 시작했다. 하지만...... 선우권이 어쩡쩡하게 서있는 현관문이 벌컥 열리면서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각 되기 시작했다. "골칫덩어리 왜 굴러왔냐? 누군가에게 시달리다 온 듯. 초췌해 보이는(☜그래서 더 신경질적으로 변모한)리아가 선우권의 어깨를 밀치며 등장했다. 우리 중 누구보다 사고치는 것에 민감한 리아였기에.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하고 리아의 다음 행동을 기라디고 있는데, 선우권이 내게 걸어오려는 리아의 손목을 나꿔챘다. "우리 마누라 골칫덩어리 아닌데." "...이건 또 뭐야." 지독한 청결 주의자인 리아는 손목을 잡고 있는 선우권의 손을 짜증스럽다는 듯, 휙. 털어내고 눈을 부릅떴다. "우리 마누라 서방님." "....누가 이런거 여기까지 달고오래. 조용히 지내고 있으라는 말, 귓등으로 들었구나, 너." 날 보고 한 말은 아니였지만,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하는 리아의 모습에 꿀떡. 식은침을 삼켰다. 하지만 곧 패이스를 찾은 내가 싱긋. 웃으며 입을 열자 이번엔 반대로 리아의 표정이 개미똥이라도 씹은 것 마냥 구겨졌다. "정식으로 소개할께, 김윤서 쫄따구 제 1호. 선우권이야." 3-37. 칠공주라는 이름 "....효선아, 아까 내가 부탁해놓고 간 거, 다 됐니?" .......역시. 리아는 내 말을 단칼에 무시하고는, 더이상 내게 볼 일이 없다는 듯. 효선이에게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런 상황이야 이젠 콧구멍으로 숨을 들이 마시는 것처럼 익숙한 상황이였지만, 선우권에겐 그렇지 않았는지. 갑자기 표정을 싸늘하게 굳힌 선우권이 손을 뻗어 아까보다 더 힘을 주어 리아의 손목을 나꿔챘다. "개무시하냐, 너 지금?" "좋은 말 할 때 이거 놔라?" "사과해. 우리 마누라 개무시한 거." "이젠 별게 다. 아.. 짜증나." 띠딕띠딕. 이젠 정말 위험수위다. 아무래도 리아가 밖에서 무슨 대단한 일을 겪고 온 것이 틀림없다. 평소에 자기 페이스를 지나칠정도로 잘 조절하던 리아의 [정말 화난 모습]을 보는 건 우리로써도 거의 몇년만이니. 리아의 분노게이지가 미친듯이 올라가고 있는 게 뻔히 보이는데, 선우권의 동태 눈깔은 아직도 이걸 캐치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리아의 손목을 놔주지 않고있다. 모두들 숨을 죽이며 리아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는데... 마치 CF의 한장면처럼 선우권에 잡혀있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긴 리아가 바로 손을 들어... 처얼썩. 녀석의 싸다구를 갈긴 것이다... "매너는 어따 쳐박아두고 왔니." "....너 마누라 친구 아녔음 바로 죽었어." "난 너같이 입만 산 남자새끼, 질리도록 봐와서 말야." 순간 엄청난 불빛이 튀겼다. 리아와 선우권은 서로를 잡아 먹을 듯이 노려보기 시작했고, 살떨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아라는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이 새끼 데려온 이유, 7초내로 설명해." "그냥. 아까도 말했잖어? 난 그냥 내 쫄따구를 정식으로 소개 시켜줄라고 그랬다니깐." "김윤서, 나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아니거든?" 여전히 선우권의 검은색 눈동자를 뚫어질 듯 노려보며 리아가 말했다. 리아의 말에 눈썹을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짓다.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진짠데." "김윤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뜬금없는 내 외침에 아이들 모두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돌아봤다. 손으로 브이자를 그리며 씰쭉. 웃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리아에게 다가갔다. "아라하고 연오가 아무리 서울연합에 대해서 캐낸다고 해도 한계가 있잖냐. 우리 쫄따구 1호는 서울연합 출신에다, 김한영하고 한판 뜬 전적도 있는걸. 깔린 백그라운드가 얼마나 번쩍번쩍해? 그래서 자랑 할라구 데리고 온거야. 기니깐. 눈깔 그만 부라리고, 오늘 왜 이렇게 꼽게 굴었는지 이유 좀 설명 해줘봐." ".....안된다고 했지, 서울연합은." 이제서야 내게로 시선을 돌린 리아가 조금은 슬프게.조금은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된다는 거 알면서. 김윤서 마지막을 걸고 할 싸움이란 거 알면서. 자글자글. 주름이 가득 잡힌 눈웃음을 치며 고개를 가로 젓자, 리아가 까득. 이빨을 깨물고서 나를 쳐다봤다. "김윤서, 너 정말 구재불능이구나." "...이번엔 너네한테 개미 더듬이만큼의 피해도 안가게 할 거야. 그르니깐 허락해줘. 김윤서 마지막 걸고서 하는 싸움일꺼니깐. 응??..." "윤서야!!"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효선이가 외쳤다. 아이들의 표정이 조금씩 굳어져가고. 그 중, 감정표현이 가장 솔직한 연오가 처벅처벅. 걸어와 내 뺨을 후려쳤다. 후끈후끈. 꽤 매서운 연오의 손바닥에 방금 후려맞은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데. 연오의 얄쌍궂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한테 우리, 고작 그따위야?!!! 처음부터 끝까지 왜 다 너 혼자 하려고해!!!" "....내 꿈이잖어. 너네 꿈이 아니라,김윤서 꿈. ....김윤서가 원하는 거. 그르니깐.그르니깐 그렇지." "그러지마, 김윤서. 너 그러면 우리 열받는 거 알잖아." "지니야, 선우권인가 뭔가하는 새끼 데리고 잠깐 나가있어." 리아의 말에 아까부터 쭈욱. 삐딱한 표정을 짓고 서있던 지니가 순순히 선우권의 팔목을 잡고서 쾅.집을 나갔다. 짜증날 만큼 묵직한 침묵. 숨 죽여 울고있는 아라의 모습에 따끔따끔.심장 한 켠이 아파온다. 너네 더 아플까봐. 그래서 그래. 나때문에 안그래도 아픈 너네, 더 아프게 할까봐.. 그게 무서워서 그래.... "...욘나 화났어, 나. 그 싸움만 아녔음 장학금 받고서 욘나 좋은 학교 다닐 너네들이였는데. ....김윤서만 아녔음 지금보다 훨 나은 데서 살고 있을 너네들이였는데 말야. ...밑바닥에서 구질구질하게 주먹질 해대는 거, 나 하나로 족해 이젠." "우리가 단지 너때문에 칠공주가 되고, 레인보우가 되고. ....싸움을 하고 그러는 줄 알어, 너? 이야. 김윤서 자신감 짜증나게 크네?" 비죽. 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려 비죽. 웃고는 황당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그런 리아의 말투 속에서 눈물나게 빛나고 있는 진심을 느낀 나는 빙그레 웃을 뿐이였다. ........어쩌면 최악의 상황으로 끝날지 모르는 이번 싸움, 너네한테까지 함께하자고 할만큼 낯두꺼운 사람이 아니여서. 어렸을적부터 주욱. 내 목숨을 쥐고 있는 이번 싸움. 너네한테까지 피해를 주면서 부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여서. "....김윤서 눈치 까리한 거 모르냐. 어른들이 자꾸 너네 찌르고 있는 거, 공부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 너네인 거. 마냥 달리기엔 조금은 벅찬 고2가 바로 너네인거. ....진즉부터 알고 있었다야." "우린 너처럼 돌대가리가 아니여서, 멀티플레이도 가능하거든? 그따위 걱정 하려거든 학교에서 모범생 노릇이나 잘 해." "이번엔 진심이여서 그래. 죽어도 될 만큼 후회없이 하고 싶은 싸움이여서. ......그래서 그래." 따박따박. 말을 하던 리아가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약한 모습 보여주기 싫어하는 리아가 울고 싶을적마다 보여주는 작은 버릇 한 개. 미안한 듯. 멋쩍게 웃으며 우는 걸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 리아를 위해 시선을 돌렸다. "너 죽으면 우리도 죽어. ....같은 날,같은 시에 태어나지 못해도 같은 날,같은 시에 뒈지자고 말한 거 윤서였어. ....이연이 꼭 그럴꺼야.." "너 혼자 하기에 역부족인 거. 알잖아? 전국 하늘은 주먹만 휘둘러서 잡을 수 있는 게 아냐." "그, 그래. 윤서야... 내가 저, 정보도 모아주고 그래야.. 그래야 너가 원하는 거,잡을 수 있을 거야..." 이연이와 효선이. 그리고 뒤이어 아라가 날향해 말했다. ......빌어먹을 하늘님에게 딱 하나. 이마가 닳도록 감사하고 싶은 거 딱 하나. ............... 김윤서 세상이 되어주는 칠공주를 만나게 해준 거. 그거 하나는 눈까뒤집고 감사한거. "인천 올라가는 날짜, 확실해지면 문자로 찍어주라 리아야. 그날로 당장 짐싸서 인천에 올라가 있을테니깐." "김윤서!!!" 울고싶은 마음을. 눈꼬리를 타고 흘러내리고 싶은 눈물을. 입가에 꽁꽁 숨겨두고서 활짝 웃는 날 부르는 리아. 휘적휘적. 현관문으로 걸어간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려 하얀 이빨이 드러나게 웃어보였다. "김한영 조지고, 전국하늘 잡으면 너네한테 바로 줘버릴꺼다. 그러니깐.... 그러니깐 아주 쪼끔만 기다려줘. 김윤서, 정말 멋진 김윤서 되서 돌아올 때까지." 3-38. 메주가루 달칵. 문을 열고 나오자 기다렸다는듯이 지니가 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싱글거리며 고개를 드는데, 대뜸 내 머리에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청모자를 씌우는 은지니. 입술을 불퉁거리며 구겨진 청모자의 앞부분을 들썩이는데. 괴기스러울정도로 인상을 구기고 서있는 지니의 얼굴이 보였다. 옴마야.무서워라. "....밑바닥 인생이라면 은지니도 김윤서 못지 않어. 혼자서 빌빌댈꺼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말란 말이다." 쓰윽. 뾰족하게 와닿는 지니의 말에 반듯하게 펴놓은 청모자를 다시 깊게 눌러썼다. 왜. 지니가 모자를 쓰고 다니는지 그 이유를 알겠다. 모자에 가려 시선이 어두워지자마자 눈동자를 쿡쿡. 찔러오는 지니의 구슬픈 목소리. "단순히 김윤서만의 꿈이였다면 1년 전에 우리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다. 무슨 말인지 니 년이 더 잘 알꺼라고 믿어. 니가 우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처럼, 우리도 너라면 목숨따위 아깝지 않아." 쿠왕. 거칠게 현관문을 닫고서 지니가 아지트 안으로 들어갔다. 잔이하리만큼 철커덕 잠기는 문소리에 얕은 한숨을 내쉬며 눈가를 비비적 거리다. 도리질을 치고는 뚜벅뚜벅. 아지트를 걸어나왔다. 약해지지말자. 흔들리지말자. ......혼자서도 잘해요하자. "마누라 우냐." "마누라 아니고 대장님." "그거 마누라 특기. 울음 참는 목소리 내는 거." ".....쫄따구 특기는 사람 조띠 열받게 하는 거." 기다리고 있었는지 대문을 밀고 나오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난 선우권이 덥썩.손을 잡었다. 뿌리치기도 귀찮아 그대로 휘적휘적 걸어 가는데. 커다란 등치를 이끌고 쭐래쭐래 쫓아오던 선우권이 갑자기 날 돌려세운다. "안겨." "지랄금지." "마누라 눈물, 한톨도 바닥에 내돌리기 싫다. 서방님 품안에 고이 적셔둬." "쫄따구 품안에 고이 적셔둘 눈물, 한톨두 없는데." "내숭은." 순식간에 퍽퍽한 선우권의 가슴팍이 코 앞에 다가왔다. 지도 모자 끝에 부딪혀 얼얼한지 가슴팍을 쓱쓱 문지르며 헛기침을 한다. 꽉. 와닿는 선우권 가슴팍 냄새. 담배맛도 나고. 하늘맛도 나고. ......... 눈물맛도 나는 선우권 가슴팍 냄새. "킁킁거리지마. 간질간질거려." "너 은근슬쩍 자꾸 안는데. 요번만 봐준다??.." "여자들은 왜 이렇게 내숭을 잘 떠는지 몰라. 마누라도 은근히 내숭과네, 정말." "즐이나 드세요." 퍽. 툴툴거리는 선우권을 밀치고서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줬다.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녀석. "김한영 밑으로 다시 들어가라, 너." "윽. 쫄따구1호로 정식 소개한지 몇초나 됐다구. 지금 쫄따구를 버리는겁니까, 대장님?" "까지 말구.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아까 내 말 어따 흘려 먹었냐.?" "그럼 사나이 선우권보고 지금 스파이짓을 하란 말?!" 버럭. 소리를 지르며 눈을 크게 뜨는 선우권. 이새끼는 멀쩡하게 생겨가지고, 대가리는 폼으로 달고 다니나. 생각의 시옷자도 안하는 선우권을 향해 한심하단 눈빛을 강렬하게 쏴주고서 몸을 돌렸다. "농담이었어, 마누라! 그냥 폼 구겨지니까 한 소리였는데. 마누라를 위해서라면 그깟 폼 구겨져도 되니깐. 어??..마누라 지금 삐졌냐?" "쫑알쫑알. 너같이 말많은 새끼 처음 봤어." "나같이 멋진 새끼를 처음 본 거겠지." ".....진짜 까고싶어, 너. 내 쫄따구1호만 아녔음 바로 까버리는건데.." 진짜 패버리고 싶을만큼 앙증맞게 말하는 선우권을 뒤로하고 다시 휘적휘적. 길어 보이고 싶은 다리를 움직였다. 역시나. 아까처럼 내 뒤를 쫓아오는 선우권. "마누라 빨리걷기해두 별로 살 안빠져. 그니까 쫌 천천히 가자." "살뺄라구 빨리걷기 하는 거 아니거든요?" "에이. 맞으면서 뭘 그러냐. 마누라 옆라인이 아주 죽여줘. 잡고 운전해도 되겠―" 쉬익. ....... 매끈한 뒤돌려차기로 선우권의 턱주가리 밑에 오른발을 들이밀었다. 깜박깜박.눈을 깜박이며 상황파악에 들어간지 13.2초 만에 녀석이 실실 웃으며 손을 들었다. 이럴꺼면서 까불기는. "그나저나 한영선배 밑으로 다시 들어가면 되는 거야, 난?" "엉. 서울연합 탈퇴 무르고 다시 사이좋게 지내자그래. 김한영 사는 데랑 걔네 활동 계획같은 거 알아오면 더 좋으시고." "나 궁금한거 있는데." 터억.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뭐?" "한영선배 마누라 오빠잖아. 오빤데 왜. ...왜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솔직히 한영선배 인물좋지, 성격좋지, 게다가 싸움 잘하지." "그 새낀 인간이 덜 됐어. 아주 빌어먹을정도로 덜된 인간이 김한영이여서. 그게 하필 김윤서 오빠라서. 할튼. 우리 집이 원래 쫌 메주가루야." 다시 휙.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내 말이 조금 충격적이였는지(☜선씨 남매는 우리 남매와는 다르게 우애가 남달랐으니 쉽게 이해를 못했을 수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있는 선우권이 가여워져 다시 입을 열었다. "그냥 김윤서가 가지고 싶은 하늘을 그 새끼가 가지고 있어서라고 생각해. 그 편이 니 혈관에 좋을 거다." 흔들흔들. 오른손을 들어 인사를 해주고 마악 풀색이 들어온 신호등을 따라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아주 중요해주시는 생각이 떠올라 또다시 고개를 꺾어 여전히 멍청히 서있는 선우권을 향해 소리쳤다. "내일부터 작전개시다!!!!" 3-39. 컴백 ................ ......... ※ 째째깍. 빨간색 시계바늘이 정각 3시를 알리고 있다. 아둥바둥. 열심히 달리고 있는 시계 바늘을 응원해주며. 시선은 지루한 숫자들만 칠판에 나열해 놓는 수학 선생의 뒷통수에 고정시켰다. 아이들에게 폭탄선언을 한지 7일하고도 16시간 1분 8.3초가 지나가고 있었지만, 여전히 리아에게서 문자는 오지 않았다. .....화가 난걸까. 아님 거대한 허리케인을 끌고 오느라 안즉도 연락이 없는걸까. "핸드폰 뚫어지겠다. 누구 문자 기다려?" "엉." "머리 색깔 예쁘게 나왔네. 어디서 했어?" "엉." "...윤서야, 지금 나 무시하는거지?" "엉." "김윤서!!!" 버럭. 귓고멍이 따끔따끔할정도로 빽. 소리를 지른 달리가 성난 텍사스 코뿔소처럼 콧김을 내뿜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뚝. 수학 선생의 손에 쥐어져 있던 눈색깔 분필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리고. 또르르. 반 아이들의 송편같은 눈동자가 달리에게로 굴러왔다. 꿈벅꿈벅. 멀뚱히 눈을 꿈벅이던 나는 이내 방긋 웃으며 선생의 고개가 돌려지기 전에 아이들을 향해 소리를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벙긋거렸다. "돌려, 눈깔." 휘휘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이들의 눈동자가 다시 굴러가고. 이번엔 성난 선생이 뚜벅뚜벅. 우리에게 걸어왔다. .....처얼써억... 키가 유난히도 크신 선생의 손바닥이 달리의 뺨을 후려갈기고. 비틀어진 지푸라기마냥 고개가 훽 꺾인 달리가 허허. 웃으며 다시 고개를 원위치 시킨다. "조까 아프네요?" "슨상님한테 그기 무신 말버릇이고!! 요새 잠잠하다 싶드니만 인제 일 치느기가!?!" "씨발. 내가 일을 치던 떡을 치던 댁이 뭔 상관?" 얼. 세게 나오는데. 거침없이 욕설을 내뿜으며 벌게진 선생을 노려보던 달리는 휙. 내 손을 잡고 교실을 나왔다. 말없이 걸어가는 달리를 따라 도착한 옥상. 털푸덕. 내 손을 놓고서 바닥에 주저앉는 달리. "수업 빠지면 출석부에 금가, 달리야." "어차피 수업 듣지도 않으면서." "아까부터 왜 이렇게 불퉁거리냐??.." "너때문이잖아!! 윤서, 너 저번부터 왜 그래? 짱자리 넘겨준 것도 그렇고. 뭘 물어봐도 엉엉만 하고!! 나 진짜 삐졌어." "...삐졌어? 그럼 에이가 이겼겠네??.." "김윤서!!" 히죽. 성질을 버럭버럭 내는 달리를 향해 눈을 찡긋인 나는 난간으로 걸어가 그 위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바람이 두 뺨을 간지른다. 간질간질. 고양이 바람. "처음부터 그랬어, 윤서 너. 친해졌다 싶으면 갑자기 오천미터는 더 떨어져 버리고. 또 다가갔다싶으면 육천미터는 더 멀어져버리고. .....너랑 진짜로 친하게 지내고 싶었는데." "지금도 충분히 친한 거 같은데. 그건 나만의 생각?" "피. 맨날 말만." 귀엽게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리던 달리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내게 걸어왔다.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뒤적이던 달리가 내민 건 잔뜩 구겨진 하얀 종이 한 개. "안줄라고 그랬어. 너가 나 친구로 생각 안하는 거 같애서 그냥 콱!! 먹어버릴려다 주는거야. 왜냐하면 우린. 친구니깐." 퍼억. 조금은 세다싶은 강도로 내 어깨를 친 달리가 쑥쓰럽다는 얼굴로 후다닥. 옥상을 나섰다. 갈수록 이연이를 닮아가는 달리의 뒷모습을 보며 히죽히죽 웃다가. 스을쩍 달리가 주고 간 종이를 펴보았다. 구불구불. 구겨진 선을지나 종이의 윗부분을 보니... [세계 최고 멍청이에게.] 라는 글씨가 보인다. "달리 글씨치고는 참 고깝죠,하늘님??" 눈썹을 긁적거리며 찬찬히 종이 안의 내용을 읽어봤다. 종이 안에는... ........... ....... [이번주내로 인천으로 올라오라는 어른들의 말씀이 있었어. -효선 이번에 올라가면 쉽게 돌아오진 못할꺼다. -리아 고것참 쌤통이다. 호호호. -연오 가서 모범생인척 지대로 하고 와용♡. -이연 ....내 말 잊지마. -지니 윤서야, 몸 건강하고 가서 사고치지 말고 어른들 눈 밖에 날 행동 자제하고, 또. ....너무 많아서 이 종이에 다 못 적겠어. 나중에 편지 할게. 조심히 다녀와. -아라] 각자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는 가지각색의 글씨체들이 종이를 현란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그리고 나를 당황하게 만든 마지막 한 문장. [PS. 우리 지금 너한테 욘나 화난척해야된대, 리아가. 기니까 이렇게 쩍지로 보내는거얌. 우리 지금 너한테 삐져있따.?!! -나나둥이] "프히.. 화났으면 화난거지, 화난척 하는 건 뭐여. 하여간 웃긴 가시네들. 그리고 수이연 맞춤법 욘나 틀리네, 막. 국어시간에 종이 비행기 날릴 때부터 알어봤다." 비식비식. 흘러나오는 웃음을 겨우겨우 집어넣고 종이를 곱게 접었다. 삐진척을 하느라 달리를 통해 소식을 전한다는 이연이의 깜찍함에 꾸물꾸물. 내장이 꿈틀거린다. 자꾸만 터져나오려는 웃음폭탄을 후악후악.복식호흡으로 겨우 가라앉힌 나는 난간에서 내려와 옥상문으로 향했다. "뻑쩍지근하게 한 번 놀아보자구." 입술을 오물조물하게 만들고 입가를 씨익.말아올렸다. 작전개시 1단계. 어른들 엿맥이기. ................... ............. ※터미널 속전속결. 학교가 끝나기도 전에 집으로 돌아간 나는 아줌마나 한솔&보람이와 마주치면 꼴사납게 눈물이라도 찔끔거릴까 무서워 대충 옷가지 몇개만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지금은 유일하게 화난척을 하고 있지 않는 아라의 배웅을 받으며 한 손엔 옷가방을. 한 손엔 인천행 버스표를 들고 서었있다. "저, 정말 이대로 그냥 가버릴꺼야? 그,그래도 준비도 좀 제대로 하고 또―" "사고친걸로 따지면 김윤서와 삐까한 녀석이 둘있지. 아라야?" "으응? 아, 으응." "조만간 고것들도 내 뒤를 따라 컴백홈 할껀데 뭣하러. 먼저 가서 기다릴테니까 느긋하게 오라고들해. 그리고 내가 달리 일당백이냐. 어른들이 복제되서 한 5438명정도 내 앞에 나타난대두 전혀 안 쫀다는 말씀!!.." 브이자를 그리며 활짝 웃자 아라의 입가에 조심스러운 미소가 그려진다. 하지만 버스가 출발한다며 나를 재촉하는 기사아저씨를 보더니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야 마는 아라다. "평생 못볼것두 아닌데 짜기는. 너 눈물샘은 하두 짜대서 인제 쪼그라 터질꺼다, 아마." "사고치지마, 윤서야... 인천쪽도 이젠 잠잠해졌으니까 우리도 곧 올라갈 수 있을 거야. 그때까지.. 그때까지 싸우지 말고 가만히 있어.응?" "버스. 와요, 버스 아자씨가 날 버리고 튈라그르네!! 얼른 잡어야겠다!!! 아라야 그럼 빠빠이!!!!! 가서 문자 보낼께!!!!" 대답해주기 곤란한 아라의 질문에 나는 애꿎은 버스 아저씨 핑계를 대며 힘차게 소리쳤다. 어물거리며 입을 벙긋거리던 아라에게 마지막 인사를 해주고 돌아서려는 그 때였다. 그 넓은 터미널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며.... 울음벅벅이 된 달리가 뛰어온 건... "윤서야아!!!!!!!" "달리 너가 여긴 어떻―" "한가람이라는 애가 갑자기 와서는... 갑자기 권이선밸 잡아갔어!!!.." 쿵. 들고있던 옷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위로 살랑. 가벼운 봄바람처럼 버스표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3-40. 쫄따구 구출작전 .............. ...................... ※ "어, 어딘줄은 알고 가는거야??..." "대충은." "그, 그래도 윤서야아. 이렇게 막무가내로 갔다간...게다가 이, 인천에도 연락을 해야―" "아라 넌 저 뒤에서 질질 짜고 있는 달리나 달래줘. 어라??.. 달리나 달래줘? 요거 쫌 개그나네. 달리나 달래달라니..낄낄" 실없는 소릴 지껄이며 쪼개는 날 당혹스러운(☜언제나 그랬듯. 아라는 나의 개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였다.)얼굴로 바라보던 아라는 누구에겐가 전화를 걸며 쪼로로. 안직도 울고 있는 달리에게로 달려갔다. 콩콩콩. 누군가 내 가슴 속에서 스카이 콩콩을 타고 있는 것같다. 아님 연오 가슴만한 농구공을 튀기고 있다던가. .......... 따구야 기다려라. 대장님이 널 구출하러 간다야. ................... .............. ※제화공고 을씨년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제화공고 교문 앞. 달리의 훌쩍거림을 벗삼아 찬찬히 학교 안을 둘러보던 나는. 옳커니!!!.... 체육관 뒤에 자리잡은 어두침침한 소각장이 번뜩. 눈에 들어오자마자 각도기로 잴 것도 없이 휘적휘적. 그 곳으로 향했다. 끼이익―..... 회색 철문이 기분 나쁜 소릴 내며 열리고. 컴컴한 소각장 안으로 기다렸다는 듯이 따가운 햇빛이 쏟아져 들어갔다. "...넌 뭐야." "나는 오늘까지 제화예고 다녔던 김윤선데. 그러는 너네들은 누구세요???.." "김윤서?? 아 그그 한영선배 동생??" "그 새끼 동생이 내가 아니라. 내 빌어먹은 오빠가 그 새끼인건데요, 이 개자식아." 퍼억. 그그 한영선배 동생??... 좋아하시네. 방금 전. 저따위 그지깽깽이같은 말을 내뱉어주신 겁대가리 없는 녀석의 앞으로 달려가 턱주가릴 날려버렸다. 콧구녕을 벌렁거릴새도 없이 뒤로 자빠져버리는 녀석. 거만하게 고개를 쳐든 나는 바닥에 누워있는 녀석의 가슴팍에 턱. 오른발을 올려놓고 퓌식.웃었다. "알겠니요, 이 개자식아?..." "윽." "헐. 괜찮냐, 김성일?" "니가 보기엔 괜찮아 보이냐? 개새끼. 계집애 주제에 뭐 이렇게 쎄." 수이연 주둥이 마냥 넓은 아량을 베풀어 쓰윽. 발을 떼자 김성일이라고 불린 녀석이 쿨럭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얼추 주위를 둘러보니 인천공고 애새끼들이 넷. 제화공고 애새끼가 하나. 그리고..... 밧줄에 꽁꽁 묶여 정신을 잃은채 누워있는 선우권 하나. 아. 갑자기 터질거 같다 눈깔이. 퓌슈슉. 바람빠지는 소릴 내며 친구에게 기대 고작 턱주가리 한대 맞았다고 낑낑거리는 김성일을 향해 물었다. 근데 개자식이네, 저거 진짜. 선우권은 요따위로 조져놓구선 고작 턱주가리한대 맞았다고 낑낑대?.. 이새끼, 넌 0.32분있다가 몇대 후려맞을 각육해라. "한가람이 잡아갔대드니. 한가람은 어디있어요?" "가람이는요.. 지끔 강안이 데릴러 병원에 갔어요." 김성일 대신 꽤 낯이 익은 녀석이 귀엽게 눈을 껌벅거리며 대답했다. 벙긋벙긋 웃는 건 꼭 수이연을 닮았는데. 워째 주연오삘이 느껴지는거지??.. 눈썹을 긁적거리며 내 앞에 서있는 깜찍이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인천공고. 인천공고라... 인천공고, 김한영 다니는 꼴통 학교라서 아는 애 안 만들어놨는데.. 워째 낯이 익네. 너 어디서 나 보지 않았어요??.." "이쁘긴하지만 이누취향은 아니야.이누 취향은 연오같은 멋쟁인걸." "연오? 연올 어떻게―... 아!! 그 때 꼴통??..." 휘번뜩. 떠오른 옛 생각에 대뜸 손가락 질을하며 소리쳤다. 김윤서의 두번째 손가락이 자신을 향하고 있는게 기분 나빴는지. 뾰루퉁하게 입술을 내미는 이누. 최이누. 귀여운 척 하나는 수이연하고 맞먹는 최이누. ........한가람 대갈통 작살낸데 아주 크나큰 공헌을 세웠던. 그 최이누. "이누도 너 알어. 짭퉁 김한영. ....한영 선배 따라하는 못난이." "1년 전이나 지금이나 지랄 쌈싸먹는건 아주 수준급." "이누는 지랄같은거 쌈 안싸먹어." "귀여운척 지대. 몸속에 있는 국수가닥이 꾸물렁 꾸물렁 올라올랑말랑. 저리로 꺼져주시면 감사하겠어요." 실쭉 웃으며 최이누의 어깨를 푹 밀쳤다. 그 모습에 김상일을 비롯한 인천공고 노마들이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지만, 싹― 무시 해주고 선우권에게 걸어갔다. ......다구리라도 당했는지 성한데가 한 군데도 없는 선우권을 보고있자니, 손톱 끝이 욱씬욱씬 거린다. 들썩이는 손톱을 꾹 누르고 고개를 휙. 돌렸다. "얘 이렇게 만든 새끼들 누구예요.?....." "좋은말 할 때 꺼져, 너. 여기 너같은 계집애들이 나댈만한 데 아니다." "너예요, 얘 이렇게 만든 개자식이?" "....한영이형 봐서 한번은 봐주는데―" 쿠왕. 묵직한 패트병이 담겨져있던 드럼통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방금 전까지 김한영 운운하며 있는 무게, 없는 무게 다 잡고 있던 공고녀석 한개가 자기 앞으로 굴러온 드럼통을 발로 걷어차고는 피식 웃었다. "재밌네. 놀아보자는거냐?" "또또. 하여튼 전국 연합새끼들은 짱 닮아서 대가리가 잘 안돌아가요. 놀아보자는게 아니라,내가 너네들하고 놀아주겠단 얘기입니다." 찡긋. 살짝 윙크를 해준 뒤 허리를 굽혀 왼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리고 가볍게 몸을 띄우고, 바닥에서 왼손을 뗌과 동시에 오른손을 짚고 매끈하게 뻗은 다리를 휘둘렀다. 억. 하는 소리와 함께 유일하게 제화공고를 입고있던 녀석이 넘어졌다. 폴짝. 바닥을 짚고 있던 오른손 마저 떼고 제대로 선 나는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내며 빙긋 웃었다. "2.03초도 안되서 한명 디졌는데요. 계속 놀아드릴까요, 아님 얘 이렇게 만든 새끼 자진납세 할래요. 것도 아님..... 한가람 데리고 올래요?" "제일 꼬른새끼 하나 눕혀놓고 기고만장 하는 꼴이라니." "겁먹은 개새끼마냥 주둥이만 산 새끼가 지랄 해대는 꼴이라니." 씰룩. 리아에게 배운 말싸움 비법이 먹혀드는 순간이었다. 아까부터 김한영 어쩌고하면서 내 신경을 긁던 공고 새끼 한개가 드디어 얼굴에서 미소를 싹.몰아내고 무시무시한 오로라를 내뿜기 시작했다. "전국연합 행동대장 최강. 내 이름이다, 기억해둬라 김윤서." "별로. 개자식 이름은 잘 안외워지는 귓구녕이라서 말입니다." "그렇게 깐죽대다 크게 다친다, 너." "그렇게 깐죽대다 크게 다치는 새끼 여럿 봤죠, 제가." "...후우." 이름만 멋진 최강은 정말 화딱지나서 죽겠다는 얼굴로 연방 제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며 나를 노려봤다. 어깨를 으쓱이며 최강의 눈빛을 맞받아쳤다. "셋 중에 빨랑 아무거나 찍으세요. 기다리는 거 지루하니깐." "너 좀 맞아야 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게 달려드는 최강. 이를 시작으로 안에 모여있던 세명의 인천공고 녀석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 선우권이 얻어터진만큼의 딱 9423배로 갚아줄 생각으로 목 뒤를 주물렀다. 김윤서가 하고많은 이름 중에 하필 일당백 김윤서라고 불리는지 오늘 핏줄 터지게 깨닫게 될거다, 요놈들. 어흥. "카악!!!" 가래침이라도 뱉는지. 괴상한 기합소리와 함께 김상일이 가장 먼저 공격을 해왔다. 인정사정없이 날아오는 김상일의 주먹을 피해 빙글 한바퀴를 돌아 팔꿈치를 들어올렸다. 뻐걱. 소름끼치는 소리와 함께 김상일이 자기 목을 붙잡고 바닥에 미끄러진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한쪽 무릎을 꿇은 김상일의 머리통 뒤로 험상궂은 표정의 최강과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최이누가 달려오고 있었다. "선우권 건드린 대가는 아주 두둑히 받아낼게요. 개자식님들??.." 빙글. 아까부터 입가에서 떠나지 않는 미소를 드러내보이며 바닥을 차고 뛰어올랐다. 주왁. 오늘따라 기름칠이라도 했는지 미끈하게 찢어지는 오른쪽 다리를 흡족하게 바라보며 혀를 낼름였다. 빠른 속도로 추락하던 발꿈치가 정확히 최이누의 정수리에 박히고. 곧 녀석의 눈동자가 촛점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넌 귀여운척 지대, 나는 발차기 지대요." 애써 눈을 부릅뜨려는 녀석의 싸다구를 후려갈기고, 녀석의 어깨를 힘껏 움켜잡었다. 그리고 최이누 뒤에서 달려오고 있던 최강을 향해 녀석을 던지고, 주먹을 가슴 앞으로 모아쥐었다. 오른손을 뻗으면서 살짝 회전을 주자, 묵직한 느낌을 매달고 가슴팍에 안겨든 최이누를 떨궈내고 있는 최강을 향해 달려갔다. 퍼억. 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최강의 얼굴이 돌아가고. 뒤에서 느껴지는 위험스런 인기척에 허리를 숙여 왼발을 휘둘렀다. 아까 김상일을 부축해주던 공고노마 하나가 종아리를 움켜쥐고 바닥에 주저 앉는게 보이자 바로 마빡을 들이 밀었다. 빠악. 공고노마는 벌겋게 부어오른 이마를 문지르며 인상을 구겼다. 하지만 녀석은 제 이마를 문지르느라 쉬용.하고 경쾌한 소릴내며 날아오는 어퍼컷을 피하지 못했다. 곧이어 턱뼈가 아작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휘익. 몸을 돌려 콧구녕 아래까지 다가온 최강의 거시기를 올려찼다. "아이. 부끄부끄." 오버하는 내 모습에 한쪽 입술을 실룩이며 주먹을 내지르는 최강. 왼손을 들어 녀석의 주먹을 터억. 잡아낸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1분도 안되서 아작내는 새끼들을 데리고 참 고생이 많겠어, 김한영은. 그치?" "말조심해, 너." "말조심은 됐고, 조랑말 조심은 어때?" "....." "최강이라고 했지? 마지막까지 남은 영광으로 내가 큰 거 하나 귀뜸해줄게. 뇌세포 활짝 열고서 잘 새겨들어. 김윤서가 요요 안붙이고 반토막짜리 말하게 되면은. 욘나 싸가지 상실해가지고 깔쪽깔쪽 되면은....." 나른한 목소리가 촉촉하게 젖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짙은 검정색을 띄고 있는 최강의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며 말을 이었다. "존나게 튀는거야, 씨박아.!!!!!" 빠각.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들어올려 나보다 훠배 키가 큰 최강의 턱주가릴 후려쳤다.(☜나는 신체부위 중에서 턱주가릴 제일 좋아라 한다.)턱을 움켜쥐며 주춤주춤 물러서는 최강을 향해 뿌드득. 주먹을 쥐었다. "낄낄낄...선우권 조진건 둘째치고, 김윤서랑이랑 한판 붙게 된 거 존나게 후회하는 순간일 거야. 그치?" 겨우 중심을 잡고 반격을 해오려는 최강을 향해 정신병원색 이빨을 보여주며 팔꿈치를 뻗었다. 굵직한 녀석의 목젖에 단단한 팔꿈치가 꽂히고. 단박에 숨통이 막힌 최강은 꺽꺽거리며 내 팔을 움켜잡았다. 방긋 웃으며 팔꿈치를 녀석의 손에 맡기고, 이번엔 반대편 팔꿈치를 휘둘렀다. 팔꿈치를 잡았던 최강의 오른손이 퉁겨짐과 동시에 새로운 팔꿈치가 녀석의 관자놀이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싸바싸바♪♬ 아예압 싸바싸바~♬♩♪" 지나간 노래를 흥얼거리는 내 앞에 거의 반쯤은 정신이 나간 최강이 풀썩. 무릎을 꿇었다. 끼이익.....― 그리고 아까 미처 닫아놓지 못한 철문이 더 열리면서.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려왔다. 희애님 Daum홈 메일 카페 블로그 쇼핑 뉴스 전체보기 ╋소설나라╋ [공개] +소설나라지기+ cafe.daum.net/sosulnation Beautiful thing - 동방신기 (東方神起)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3-41. 히터몬 "게임 아웃 됐는데, 이미. 어쨌든 하이, 거기 지각쟁이 두 분." "윤서야." "김윤서." 싱글싱글. 화라짝 웃으며 손을 흔들자 상반된 목소리의 두 남정네가 나를 불러재꼈다. 언제나 슬픈 아이 한가람이와, 언제나 못되 처먹은 아이 화강안이가. 하지만 이름을 부른 뒤로는 영 반응이 없는 두 남정네에게서 곧 흥미를 잃고 푸식푸식.웃으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인천공고노마들의 대갈통을 발끝으로 툭툭 쳐대기 시작했다. "내가 알기론 선우권이가 고개 쳐박구서 전국연합에 다시 들어간 것이 참일텐데... 지네편 조지는게 김한영 새로운 취민가??..." "여자애가 입 험하게 놀리는 거 아니다." "난 여자애이기 전에 얘 대장님이거든." 쮸쮸바엿이나 먹으라지. 여자애운운하는 화강안을 향해 빈정거리듯. 톡 쏘아붙이고선 투벅투벅 걸어가 선우권에게 감겨져있는 밧줄을 풀러냈다. ......태연하게 밧줄을 풀러내다 문득 보이는 새빨간 밧줄 자국에 나도 모르게 이를 까륵.깨물었다. 선우권 갑빠에 금궈놨어, 이새끼들. "처음이자 디엔드가 될 경고 한개. 하늘이 솟아나고 땅이 무너져도.. 선우권 갑빠는 절대 건드리지 않기. 오키??.." "지금 너 그 새끼 편 드는거냐?" "주둥이 합!하고 잘 처들으세요. 얘 건드리면 나 아까처럼 꼭대기 돌아가니깐. 엉? 그니깐. ....얘 건들지 말라고."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연오가 맨날 읽는 소설책에서 보면 이런 말은 멋쟁이 소설남이 하던데. 선우권의 팔을 어깨에 두르며 괜히 입술을 실룩였다. 이새끼, 정신차리면 체력 단련 좀 시켜놔야지. 안그러면 이거.... 폼이 아주 제대로 구김질해주겠는데?!(☜사실 저번 갈비뼈 나갈 때부터 알어봤다.) ".....너 평생 남자친구 하난 안 사귈꺼라고 생각했는데. ...조금 의외다, 윤서야." 웃으면서. 얼굴론 웃고 있으면서 또. 또 운다. .....한가람이 이 바보같은 머스마가 웃는 낯짝 뒤로 한주먹만큼의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내고 있는 게 뻔히 보여서 걸음을 멈추고야 말었다. 웃는 얼굴이여서 더 슬픈 가람이의 모습이 맨인블랙색 동공에 아프게 비춰진다. "....남자친구 아닌데. 쫄따군데. 선우권 김윤서 쫄따군데. 한가람 오해하는 거 쪼끔 짜증날랑말랑." ".......그래도 난 너 지켜줄 수 있는 남자친구 만났으면 하는데. 너가 지켜줘야하는 남자친구 말고, 널 지켜줄 수 있는 그런 남자친구. ....한가람도 선우권도 아닌 남자친구 만났으면 하는데." 내 말을 못들었는지 엉뚱한 소릴 늘어놓은 가람이. 양파를 껍질째 씹어먹는 거 보다. 마늘을 통째로 삼키는 거 보다. 더 따끔따끔하다. 꼭 눈물 방울들이 떨어질 것처럼 따끔따끔. ".....어른들때문에 조용히 지낸다는 말 들었어. 오늘 일은 내가 잘 마무리 해놓을게. 여긴 걱정말고 선우권 데리―" "그럴 필요 없슴돠. 인제 김윤서 인생에서 빠빠이 한 한가람한테 이런거 안 부탁합니다." "윤서야..." "빠빠이한게 엊그제하고도 보름이나 더 지난거 같은데 왜 자꾸 친한척 이름 부르십니까요. 나 모르는 사람이 친한척 하는거 코뿔소 오줌만큼 싫어합니다." 꾸욱. 주먹을 움켜쥐고 다시 찬찬히 걸음을 옮겼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송골송골. 핏방울이 맺혔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바보도 이런 바보천치가 없지. 아주 아라랑 손붙잡고서 바보대회 나가면 특등은 따논당상이여. 한가람이 정말.... 대단할정도로 바보다, 바보. 바다의 보자기.... SES 바다의 보자기... "킬킬... 그럼 아란 슈의 주먹인가..." "윤서야!!!.." 마악 소각장 밖으로 한 발자국 내놨을쯔음. 등 뒤에서 가람이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돌릴까. 말까. 약 0.090초동안 고민을하다 결국 고개를 돌리려는데... 고개를 딱 34도 꺾었을 때. 내 앞으로 성큼 다가온 가람이가 손을 꽉 잡아왔다. 바다의 보자기가 될만큼 따끈따끈한 가람이의 하얀손. 그리고.... "택시 타고가." "....." "병원까지 선우권 엎고 갈려면 힘들잖아. 교문 앞에 모범 택시 많이 다니니까 꼭 그걸로 잡아서 타고 가." 바스락. 가람이가 내 손에 쥐어준 풀빛 배춧잎 두장. 꽤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던 가람인 곧 쑥스러운 얼굴로 손을 뗐다. 제 주인을 닮아 따끈따끈한 풀빛 배춧잎 두장. .....인제 이쑤시개가 아니라 히터네. 김윤서 마음 따끈따끈하게 댑혀놓는 히터. 띠로롱♪ 지금 막한가람 이쑤시개몬에서 히터몬으로 진화했다. "내가 도와준다...그러면은 너가 싫어할 것 같아서. ...아, 서있는 것도 힘들텐데 얼른가. 저래봐도 전국에서 꽤 알아주는 형들이야.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선우권 많이 다쳤을 거야." 한걸음 물러선 가람이가 등을 떠민다. 히터몬 착함레벨 ★★★★★★★ 멍청함레벨 ★★★★★ 바보레벨 ★★★★★ 필살기 천사날개공격. "날개 감춰뒀냐, 너.?" "응?" "등 뒤 날개뼈 밑에. 천사날개 감춰뒀냐구." "어?" "....너 날개한테 눈물샘 자극하는 기술 사용하지 말라고 해. 안그러면 날개죽지 확 찢어버린다고." 둥그런 눈으로 멍글멍글하게 날 바라보는 가람이에게서 휙. 고개를 돌려 소각장을 나왔다. 어깨에 둘러진 선우권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나를 짓누르는건. ....히터몬의 천사 날개. 한가람 등딱지에 붙은 할머니 머리색깔나는 날개. ................... ※대한병원 삐뽀삐뽀. 신호등 색깔 구급차들이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는 병원 입구. 소나무로 만든 때깔나는 벤취에 앉아 병원에 안들어가겠다고 땡깡을 부리는 선우권을 한심스럽게 쳐다보고 있었다. "님 방금 전국에서 알아준다는 엉아들한테 다구리당했거든요??.. 저번에 나간 갈비뼈보담 훠배 심하게 아작났거든요???... 근데두 안가실래요?" "......" "주둥이에 손오공본드 붙여놨어.?? 왜 대답을 안해." "...." "아오. 선우권, 김윤서 욘나 승질나게 만든다. 엉.??" 끝까지 입 꾹다물고 서있는 선우권. 안즉 정신 안깨났을때 응급실에 던져놓고 와야 됐었는데. 후아. 정말 승질이 뽀록뽀록. 돋아난다. 엉.?! 돋아나, 돋아나. "....대장님이 쫄따구 구해주는 거, 개미가 코끼리 발에 밟히는 거처럼 당연한 일이여. 폼 구겨진다고 지금 그러는가본데... 그러실 필요 없단 말씀이라구요. 네에?!!.." "....." "그래. 니 꼴리는대로 하세요." 완벽한 대화불가능. 퓌시식. 한숨을 내빼고 벤취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시원한 느낌이 척추뼈를 따라 흘러내리고. 눈을 감고서 그 느낌을 매끈하게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내 옆에 털썩 앉는 선우권. 하여간 새끼가 요럴꺼면서 뻗대기는. ".....마누라에 대해서 나 무지 잘 안다고 생각 했었거든? 발톱에서부터 머리털끝까지 모르는 거 없다고 생각했는데. 근데...." "근데 뭐." "한참 모르더라, 마누라에 대해서. 서방님이 마누라에 대해서 한개도. 한개도.... 잘 아는게 없었어. 그래서 또 화나. 미쳐버릴만큼 아주 많이. ....많이 화나." 3-42. 서방님이 보는 마누라 "뭘 그런걸 가지고 화까지." 사뭇 진지해보이는 선우권의 옆모습에 괜히 거시기해져 머리를 긁적이는데. 미간을 잔뜩 좁힌 선우권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꿈벅꿈벅. 신발 자국 투성인 선우권의 등판을 멍청히 보고있는데, 선우권의 뒷모습이 조용히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화나면 눈동자가 하얀거 하나도 없이 새카매지는 거. 누구 비웃을땐 오른쪽에 짝퉁 보조개 파이는 거. 한영선배 얘기만 나오면 주먹부터 쥐어지는 거. 한번에 남자 여럿 상대 할 수 있을정도로 싸움 잘하는 거. 그리고....." 꼴딱. 숨을 멈추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까뒤집고 기절한 줄 알았는데. 구라빨이였던가, 선우권.. 입술을 미묘하게 비틀며 한껏 구린 표정을 지어내는데. 휙. 내쪽으로 고개를 돌린 선우권이가 울 것같은 얼굴로 씨익 웃었다. "....한가람 이름만 들으면 눈에 눈물부터 차오르는 거. 한가람 마주보고 섰으면 항상 눈동자가 까맣게 젖어드는 거. 김윤서 마음 속에 한가람, 아직 못나가고 앉아 있는 거. 난 그거 오늘 처음 알았다." 눈쌀을 찌푸리며 코 끝을 잔뜩 찡그려봐도 눈물샘이 뭉클뭉클하게 자극돼 눈가가 촉촉히 젖어 들어갔다. 차라리 마누라타령 할 때가 훠배 나았다. 개소리든, 쥐소리든 쓸떼없는 소리를 지껄이던 때가 훠배훠배 나았다. ....이렇게 불쌍한 표정으로 마주 보고 있는 것보단 그 편이 정말 아프리카산 맘모스 오줌보보다 나았다.정말. 진심. "얼굴에 진흙 던져버리기 전에 주둥이 합!" "....그 새끼 이길라면 나 한참은 더 멀었지?" "이기고 자시고. 푸석푸석한 말만 늘어놓을라면 병원에나 들어가. 니 뼈들이 울고있잖아." "아. 정말 화난다, 오늘." 벅벅. 뭐라고 중얼거리며 머리를 긁는 선우권의 손 아래로 빼짝하게 마른 피딱지들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엽기 사진만 모아놓는 홈페이지에 찍어서 딱 올리면 특상은 따논건데. 아. 이럴 때가 아니지. "병원 안가??.. 쫄따구, 니 진짜로 심각한 상태래니깐? 겉으론 멀쩡해보여두―" "좋아한다, 나. 진짜로 선우권이 김윤서 좋아한다." "대장님도... 쫄따구 사랑해." "장난아니고, 진짜. 진짜로 좋아한다고."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멋있는 척. 무뚝뚝하게 말을 내뱉는 선우권을 귀엽게 쳐다보다 핑글 웃음을 머금고는 녀석의 등을 떠밀었다. "엉엉. 알았으니까 우리 병원가자구. 엉.? 아까 깨나있었다며.? 그럼 너 다구리하던 새끼들이 얼마나 센지알거 아녀. 괜히 여기서 뻗대지말고 치료하러 들어가자." "사랑한다는말. 아껴둔다. 여기에 담아놨다가 마누라 지켜줄 수 있을 때. 그때되면 다시 꺼내서 말해줄게." 휙.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선우권이 다짜고짜 내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 퍽. 갖다댔다. 속눈썹이 따가워질만큼 눈을 깜빡이다 이내 상황파악을 마치고 눈썹을 푹. 찌푸렸다.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심작박동이 위험할정도로 불규칙적이였다. 쿵-쿵콩쿵-쿵쿵콩콩. "...위험해 진짜로. 얼른 들어가자." "마누라 멋지게 지켜낼 서방님 되면. 마누라보다 훨씬 더 강해지는 서방님 되면. 그때되면 말해줄게. 마누라, 김윤서를 이렇게나...사랑한다고." 가늘게 휘어진 눈가에 주렁주렁. 눈물방울들이 매달렸다. 잘 익은 포도알마냥 주렁주렁... 자존심에 8124톤짜리 쇠뭉치 한대 얻어맞어서. 그래서 쪽팔려서 그러는 줄 알었는데. 대장님이 쫄따구 지켜준 게 폼 구겨진 거 같아서 그런 줄 알었는데.... 기가막히게 닮은 두 새끼가 강철같은 김윤서 심장을 사정없이 뒤흔든다. "....정확하게 말해. 선우권이 나보다 강해지는 날이 언젠지. 몇년 몇월 몇일 몇시 몇분 몇초까지 정확하게!!.. 그러면. 그러면 나도 약속해줄게." 똥글. 순식간에 선우권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반짝반짝. 이제 아주 빛까지 내며 쳐다본다. 기대에 부푼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선우권을 향해 흠흠. 헛기침을 한번 해주고 빙글 웃었다. "몇년 몇월 몇일 몇시 몇분 몇초에 선우권이 김윤서보다 강해지면. 그때 김윤서가 선우권 .......... 진짜 대장님 되주겠단 약속." 푸시쉭. 풍선에 바늘 구멍을 냈을때 나는 소리가 들려오고. 실망에 대실망을 하고 있는 선우권의 팔을 이끌고 병원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갔다.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를 잔뜩 걸어놓고.. ................... ※응급실 응급실 침대에 눕혀놓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푹. 기절한 선우권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껌정색 눈동자 안에 천천히 선우권의 멋진 얼굴들이 들어온다. .....가람인 뭐랄까 좀 지켜주고 싶게 잘생긴 얼굴인데, 선우권은 참 안지켜줘도 잘 살 것 같이 잘생긴 얼굴이다. "....쫄따구로 만족하긴 좀 아까운 가죽이긴 하지, 요놈이." "...." ".....김윤서 옆에 있기에도 좀 심하게 아까운 녀석이지요. 휘유." 옅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부터 눈에 빨간 하트를 뿅뿅. 그려넣은 간호사 언니에게 선우권을 부탁하고서 병원을 나왔다. 콧구녕 속으로 유쾌한 하늘 바람이 들쑥날쑥.시원하게 들어왔다. 3-43. 황아라 납치사건 "아주 골이 띵하네, 골이 띵해." 세상에서 가장 뾰족한 송곳으로 머리통을 꾹꾹 누르는 느낌이다. 미간을 삐죽. 구기며 손가락으로 이마를 지그시 눌러줬다. 후아. 뻑쩍찌근하게 쉼호흡을 한 번해주고 근처 담벼락에 쪼그려 앉아 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듣기 좋은 비발디의 사계가 흘러나오고. 얼마안가 철커덕하는 소리와 함께 겁먹은 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 유.. 윤서야아...] ["아라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지, 지금. 너.. 너 따라갈려고 아까. 아까... 제화공고까지 쫓아갔는데... 그게..] ["엉엉. 그래그래, 나 따라올라구 아까 제화공고까지 왔는데.? 지금 거기야?? 내가 바로 갈테니까 기다―] [오지마!! 유, 윤서야 오지마. 오지마.. ..으응?] ["엉, 오지는 말께. 그럼 육지하면 되나? 아님 칠지.???"] 내 유쾌한 농에도 불구하고 아라는 오지말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아까부터 뭐에 쫓기는 사람처럼 덜덜대는 아라에게서 뭔가 깨름칙한 기분이 느껴져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갑자기 고막을 터트릴듯한 비명소리와 함께... [어딜가, 황아라!!!!!] 굵직한 남자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 남자??... 18년동안 남자라고는 남동생인 규일이와 아버님인 조사장님밖에 모르고 살던 아라가?? 보다못한 연오가 소개팅을 주선해볼라하면 수전증 걸린 빼빼 할머니처럼 부들부들 떨던 아라가 남자를.!!?!! 두두둥. 엄청난 벼락천둥이 친다. ["너 누구세요.??!!"] [씨팍. 이거 뭐야, 너 전화하고 있었어.?!!] ["시팍이고 레팍이고 너 누구시냐고. 응?"] [너 진짜 사람 돌게 만든다.?!!] 아무래도 핸드폰 저너머에서는 김윤서 목소리가 개미 오줌보보다 작게 들리는갑다. 더이상 성대에 부담을 주기 싫어. 깔끔하게 핸드폰을 닫고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제화공고라 했지??... 방금 전. 아라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눈시깔을 부릅.떴다. 목소리로 보아하니 못되도 소도둑이요, 잘되도 산적인데.. "아라 솜털하나 건들였다간 대가리를 아작내겠다,이 놈!" 불타는 사명감에 휩싸여 용수철처럼 몸을 띠용. 튕겨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주먹을 움켜쥐고 제화공고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욱신욱신. 왠만해선 잘 안뛰는 심장까지 쿵덕거린다. .................. ※제화공고 후왁후왁... 제화공고에 다시 도착한 나는 재크의 콩나무에서 나오는 커다란 거인에게 밟힌 것처럼 쿵쾅되는 심 장께를 움켜잡고 소각장으로 걸어갔다. 쿠왕. 아까완 달리 굳게 닫힌 철문을 여니... 싸늘한 공기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아이씨. 이 소도둑이 아라를 어따 보쌈해간거여." 소도둑에 붙여 엉엉 울고있을 아라가 걱정되 딱딱. 이빨을 부딪치다 아무래도 안되겠다 싶어 효선이에게 전화를 걸었다.(☜리아에게 걸면 직빵으로 싸대기 맞을 거다, 아마) 컬러링 없이 딱딱한 전화음이 몇번 채 울리기도 전에 효선이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윤서야. 오늘 인천갔다더니 벌써 도착한 거야?] ["엉. 아니 그게 아니구, 인천을 갈라다가 말었는데. 아 됐고, 이게 아니지. 효선이 너 지금 아라 어디 있는 줄 혹부리영감시 아니?"] [혹부리영감시는 또 뭐야. 내가 말 그렇게 하지 말래니깐. 그리고 아라는 너랑 같이 있지 않아?] ["그것이 나랑 같이 있을랑말랑 했는데, 우리 쫄따구가 당하는 바람에. 맞다.!!! 효선아 지금 아라 소도둑이랑 같이 있을 서야!! 기니까 내가 구해줘야돼."] [그러니까 결론은 너는 오늘 인천을 가지 않았고,아라는 없어졌다. 이거니?] ["엉? 아, 엉. 그렇지."] [그럼 인천엔 연락해놨어? 어른들은 다 니가 오늘 오는 줄 아실텐데.] 효선이가 보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난 대답 대신 좌우로 도리질을 쳤다. 핸드폰 너머로 효선이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고. 0.810초 뒤 초롱초롱한 목소리로 효선이가 말했다. [그럼 어른들껜 내가 연락드릴께. 아라가 갑자기 없어지느라 그랬다면 뭐라고 크게 혼내시진 않을 거야. 그리고 아라는 연오한테 부탁해놓을게. 아라 다음으로 연오 정보통이 제일 확실하니깐.] ["엉? 아, 엉엉. 역시 효선이가 장이야."] [윤서야] ["엉?"] 효선이의 딱부러지는 말에 안도의 미소를 지으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내는데, 아까와달리 제법 진지해진 효선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효선이가 진지해지면 난 무서워지는데. [인천에서 너 김윤서면 안돼.] ["으잉?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금은 이렇게밖에 얘길 못해주겠어. 하지만 꼭 명심해둬. 인천에서 넌 김윤서면 안되다는거.] ["지구가 태양보담 커지고, 바다가 하늘을 집어 삼켜도 나는 김윤서가 분명할껀데 어째서 그런 아리달송한 말을."] [아. 연오한테 연락왔네. 음. 지금 아라 시내에 있는...어라?] 내 말을 싹둑. 자르고 술술 말을 하던 효선이가 갑자기 멈칫했다. 아까부터 효선이의 목소리 뒤에 깔리던 키보드 두드리는 배경음도 없어지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있는데, 놀란 효선이의 목소리가 펑 터졌다. [나이트?!! 하. 윤서야, 지금 아라 나이트에 있대. 시내에 있는 88나이트로 빨리 가봐.] ["오키바리!!"] 철커덕. 전화를 끊자마자 난 또다시 효선이가 말한 88나이트를 향해 뜀박질을 해야만 했다. 예전같았음 지구한바퀴를 돌고도 거뜬할텐데,오늘은 왠일인지 자꾸만 심장이 콕콕 아프다. 아까 히터몬(☜가람이)에게 심한말을 쏘아대서 그런가. 아까보다 더욱더 욱신거리는 심장의 통증에 눈썹을 찌푸렸다. 요즘들어서 왜 이러지. 3-44. 인천짱 금잔디 ※88나이트 약간 어두워질랑말랑한 오후. 금박조끼를 입은 삐끼들이 요란뻑쩍지근한 명찰을 내밀며 달려드는 걸 가볍게 뿌리치고서 도착한 88나이트. 입구에 서서 민증을 까보라는 [맥주남편]을 밀쳐내고 귓구멍을 빽빽하게 울리는 댄스 음악으로 꽉 차있는 나이트 안으로 휘적휘적 걸어 들어왔다. 주위를 휙휙.돌아보며 아라 비슷한 아이를 찾으려고 열심히 눈시깔을 굴리는데... "이, 이거 놔주세요.!!" 스테이지에서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서둘러 시선을 돌려 소리가 터져 나온 쪽을 바라보니... 누군가에게 손목이 잡힌채로 울먹이고 있는 아라가 보였다. 순간 눈에 번쩍. 불이 튀고. 솟구쳐오르는 짜증을 꾹꾹 눌러담으며 성큼성큼 테이블로 걸어갔다. "얘기 하자고. 사람 말이 말 안같냐???" "이, 이거 놔주세요.." "황아라 나 지금 장난하잔 거 아냐. 1년만에 봤어, 너.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그정도는―" "그 손 놓으라잖아, 이 쇠껄떡새끼야???..." 척. 테이블에 다다른 나는 아까 제화공고 소각장에서 한바탕 신나게 싸웠던 최강의 어깨죽지에 손을 올려놓고 빙긋 웃었다. 아라를 잡아간 소도둑이 누군가 했더니,방금전까지 얼굴 맞대고 싸웠던 새끼라니.. 이래서 세상은 참 좁다는거지, 하늘님?? 썩 좋지 않아뵈는 내 표정을 느꼈는지 아까 나와 싸웠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최강의 이마가 예쁘게 구겨졌다. "유, 윤서야아.." 그렇게 최강의 예쁜 이마에 넋을 놓고 있는대. 녀석에게 손목이 잡힌 아라가 코를 훌쩍이며 앵앵. 나를 불러재낀다. 몇달을 물에 담궈논 미역나부랭이처럼 불어터진 아라의 눈에 찔끔. 눈을 껌벅이고 하하 웃었다. 이 썅노무 쉐키. 애를 어떻게 다뤘길래 눈이 이모냥이야. "놔. 아라 손. 너같은 게 잡을 만한 거 못돼." "상관말고 가라, 김윤서. 이제 너한테 볼 일 없으니깐." "난 있는데, 넌 없어도. 그니까 그거 놓고 촛불처럼 훽 꺼져버려." 텁썩. 최강이 잡고 있는 아라의 왼손 반대편 손을 잡고 씰쭉 웃었다. 녀석의 이마빡에 푸른 힘줄이 두둑 돋아나는가 싶더니.. 갑자기 누군가가 내 뒤로 다가와 있는 힘껏 손목을 꺾어버렸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놀라할 틈도 없이 귓가를 간지럽히는 허스키한 목소리. "방해하지마." "여긴 방이 아니라 나이트예요, 이 붕신님아." 내 귓가를 간지럽힌 목소리만큼 달짝지근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아라에게서 손을 떼 팔꿈치를 크게 휘둘렀다. 빠각. 하는 소리가 분명 음악소리에 묻혀 들려왔건만, 잡혀있는 내 손은 아직도 꺾어진 상태였다. 헛쭈. 요것봐라??? "맷집 좋다고 자랑말구요, 이 붕신님아." "강이 오빠 1년이나 기다렸어. 저 성질머리 없는 오빠가 1년이나 똑같은 여잘 기다렸다고. 그렇게 기다려서 만난 여자, 막을 권리 없어 넌." "성질머리 없는 강이 오빠가 1년이나 똑같은 여잘 기다렸건, 말건 코끝만큼도 상관이 없는데. 나는요." "...말귀 참 못알아듣네." "피장파장이지, 뭐." 뿌드득. 꺾여진 상태에서 억지로 어깨를 틀어서 그런지 기분 나쁜 뼛소리가 울렸지만, 개의치 않고 잡힌 손을 빼냈다. 이렇게까지 할 준 몰랐는지 날 잡고 있던 허스키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제정신이야?" "제정신일수가 없지요. 감히 내 친구 건드리는 새끼들 앞에서." "하. 무대포 정신 하난 한영오빠 판박이네." "자살행윈데. 김윤서 앞에서 그 새끼 이름 꺼내는 거. 뭘 좀 모르시네." 등 뒤의 여자애에게 신경을 빼앗겨, 때를 틈타 아라의 입을 틀어막은 최강이 자리를 빠져 나가는 걸 미처 알아채지 못한 나는 입술을 잔뜩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색색깔의 조명들이 알알히 박혀있는 검정머리에 나이트 조명이 제일 잘 받는다는 하얀색 티셔츠를 입은 여자애. 초록색 반바지 아래로 매끈히 뻗은 다리에 짱구 데일밴드를 덕지덕지 붙여놓은 여자애. 살짝 처진 눈동자를 데굴 굴리며 무표정으로 서있는 여자애. ........... 처음 보는 여자애. "전국연합 따까리 상대하는 취미 없는데." "미안하지만 난 전국연합 따까리가 아냐, 김윤서." "그럼 니 정체가 뭔데요???" "인천짱. 인천짱 금잔디. 여기서 이런말 하는 것도 우습지만 어쨌든 만나서 반가워. 말로만 듣던 인천의 전설, 김윤서를 이렇게 만나게 되서 영광이야." 그 순간 나는 보고야 말았다. 팬더곰같이 순해보이는 인상 뒤에 숨겨진 리아와 똑같은 송곳니가. 하얀손을 내밀고서 빙그레 웃고 있는 저 푸른 초원 위에 있어야 될 금잔디를 멀뚱히 바라봤다. 인천짱. 김한영이 갖고 있던. 그래서 내가 탐냈던. 하지만 가질 수 없었던. ......... 그 인천을 가지고 있는 여자애. 금잔디. "인천짱도 어차피 전국연합 따까린데 뭐. 괜히 김 빠지네 하는데 소 질있네, 금잔디??" "아쉽게도 인천은 전국연합 소속이 아냐. 초대짱인 한영오빨 생각해서 연합이란 이름은 달아놓고 있지만." "쇠꼬챙이에 초콜렛 발라논다고 빼빼로가 되나. 그게 그거지 뭐. 됐고, 너때문에 우리 이쁜이 놓쳤는데 어쩔꺼야??"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두 사람을 이제서야 알아챈 나는 테이블 위의 사과를 아삭. 씹어먹으며 금잔디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난감하게 웃는 금잔디. "글쎄." "짱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책임감이 없어서야 되겠어??" "짱도 짱 나름이지. 책임감 있는 짱은 너네 짱, 최효선이고. 싸움 잘하는 짱은 전국연합 짱, 한영오빠고. 또.. 이렇게 남 일에 잘 껴드는 짱은 인천 짱, 금잔디고. 뭐 그런 거 아니겠어?" "와. 수이연이랑 붙여놓으면 완전 찰떡이겠어??..뻔뻔오징어도 아니고, 대단한데." "칭찬 고마워." 아뜨. 파인애플 먹어보겠다고 섣불리 손을 댔다, 따끔한 가시에 찍혀 눈물을 찔끔 흘렸다. 가시에 찍힌 손을 호호 불고 있는 날 금잔디는 재미있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생각보다 나쁜애같진 않지만, 그래도 아라를 그 소도둑놈에게 넘겨준 죄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지. 테이블에 폴짝 올라 앉았다. "몇대 줄까???" "난 담배 안펴." "그거 말구. 첫빵으로 몇대 맞아주냐구." "하. 지금 맞짱 뜨자는 말이야??" 귀를 후비적거리다 고개를 끄덕이자, 금잔디가 허허 웃으며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불공평할 거 같아서 미리 말해주는건데. ..... 나 이 주먹 하나로 인천짱 됐어. 너처럼 싸움을 끝내주게 잘해주지 못해서, 이 돌덩이같은 주먹 하나로 인천짱 됐다구." "푸하하...지금 개그해요???" 깔깔깔. 배꼽을 잡고 뒤집어져라 웃어재끼는 날 미친년 취급하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배꼽을 간지르는 웃음 폭탄을 차마 삼켜내지 못하고 테이블에 엎어져 아주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다소 쪽팔려하던 금잔디가 참지 못하고 날 향해 손을 뻗을때쯔음. 피융.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 눈물까지 맺힌 눈가를 훔쳐내고서 하하 웃었다. "나 미치겠다, 진짜. 이렇게 웃어본 거 진짜 오랜만." "이제 다 웃었어??" "엉. 고마웠어, 금잔디. 모처럼 김윤서 기깔나게 웃겨줘서." "그럼 이제 왜 웃었는지 물어봐도 될까??" "아. 엉엉. 물어봐. 아니, 이미 물어봤지? 그럼 대답 해줄 차례네, 내가. 난 싸움을 끝내주게 잘해주지만. 그거 못지않게..." 둥그스름한 반달처럼 눈썹이 휘어지자. 아까부터 귀를 뻑뻑하게 만들었던 댄스음악이 슬쩍 물러가고, 은은한 블루스 음악이 들려온다. 아까보다 조금 더 짙어진 조명 아래 선 금잔디의 표정이 궁금함에 반짝였다. 오른쪽 손을 쫙. 펼치고 천천히 주먹을 모아 쥐었다. "강하거든, 나도 이게. 펀치게임만 했다하면 신기록을 세울정도로. 아주 짱!!!! 세거든, 나도 주먹." 3-45. 착한 남자 "재밌네. 나루언니한테서 듣던 것 보다 훨씬 더 재밌다, 김윤서." "내가 재미있다는 소릴 쫌 들어." 테이블에서 내려선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까 금잔디가 했던 것처럼 맛깔스럽게 머리를 쓸어 넘기려... 했으나. 아쉽게도 금잔디와 같은 매력적인 모습 대신 머리카락이 엉켜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윽. 이럴 줄 알았으면 연오 말대로 린스 꼬박꼬박 바를걸 그랬나. "언제 한 번 붙어보고 싶었어. 한영오빨 제치고도 여전히 인천서열 1위에 앉아있는 김윤서. 솔직히 명색의 인천짱이라는 사람이 1위도 못차지 하고 있으면 폼이 안나잖아??" ".....갖고 싶으면 너 가져도 돼. 당분간 안하기로 했거든, 싸움. 그리고 아까 첫빵 얘긴 사실 구라였지롱." 낄낄. 눈을 찡긋이고서 금잔디를 지나쳐 후끈후끈. 열기로 가득찬 나이트를 빠져나왔다. 아라가 해주는 물냉면만큼이나 차가운 바람이 빨갛게 달아오른 볼을 식혀준다. 흐음. 바람 냄새. 잘했어, 김윤서. 거기서 또 쌈박질 했으면 넌 리아한테 싸대기가 아니라 싸대기 할아버질 후려맞았을 거야. 게다가 지금 중요한건 아라를 찾는 거잖아?? 좋아. 정말 잘 참었다 김윤서!!! 아직 작전 1단계도 확실하게 개시 못했는데, 그전에 얼음물을 엎어버리면 안되지. 암 그렇고 말고. "김윤서!!" 인제 어딜 가서 아랄 찾아야하나.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채 생각에 잠기려는 찰나. 등 뒤에서 숨찬 금잔디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보니 금잔기다 아까 민증을 까보라며 날 막아섰던 맥주남편의 어깨에 손을 척. 올리고는 급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난 금잔디야!!! 인천 황제공고 다니고!!! 거기 2학년이고!!!! 인천연합 짱이고!!! 또. 또.. 한가람!!!!! 한가람 많이 좋아하는 애야!!!!!" 잉????? 그게 무슨 소리? 금잔디의 우렁찬 고함소리에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한가람을 많이 좋아한다니. 금잔디가 한가람을 어떻게 알고?? 놀라워하는 동시 궁금해하는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맥주남편에게서 손을 뗀 금잔디가 허억허억. 숨을 토해내며 내게 걸어왔다. "한가람. 후욱. 가람이 좋아한다고. 한가람 좋아하는 금잔디라고. 후욱." 꿈벅꿈벅. 멍청히 눈꺼풀만 움직이며 금잔디를 쳐다봤다. 뜬금없이 왠 자기소갤 하나 했더니, 이젠 난데없이 사랑고백??? 금잔디의 엉뚱함에 조금 심장이 지끈거린다. 머리가 지끈거려야 옳을 것인데, 왜 심장이 지끈거리는지도 모른채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엉. 그래 너는 한가람 좋아하는 금잔디. 엉.입력 완료. 인제 됐나??" "...너도 해야지. 입력완료 이럴게 아니라, 나도 한가람 좋아하는 김윤서야. 이래야지 되는 거 아냐?" "내가 왜??" 순진한 얼굴로 되묻는 날 당황스럽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금잔디는 갑자기 인상을 퍽. 찌푸리더니 나를 야리야리하게 노려보기 시작했다. 혼자서도 잘놀아요. 놀이라도 하고 있는지 시시각각 표정이 바뀌는 금잔디를 보며 웃고 있는데, 별안간 왼쪽 뺨이 얼얼해지더니. 어금니가 뚝. 하고 부러져 입 안을 굴러다니는 게 느껴졌다. "헐. 지금 너 나 쳤냐???" "형편없어, 너. 강안이가 말한 것보다 훨씬." "형편은 없고, 동생편만 있나 그럼?" "........" 웃자고 한 소리였는데... 금잔디는 아무래도 아라과였나보다. 개그를 이해하지 못한채 굳은 얼굴로 여전히 날 노려보는 금잔디. 이쯤 되면 아라만큼은 못되더라도 우리 중에서 그나마. 착한축에 속하는 김윤서 속도 부골부골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너―" "걔 눈 뜨자마자 한 소리가 윤서는 괜찮아였어. 구역질까지 하면서도 건강한 모습으로 니 앞에 나타난다고 안들어가는 약 꾸역꾸역 처먹고, 그러면서 버틴애가 한가람이야. 그 힘들다는 물리치료 아프다소리 하나 안하고 이겨낸 한가람. 니가 얼마나 비참하게 했는지 알기나 해??" "난 누가 내 말 잘라 먹는 거 싫어해. 게다가 처음 보는 년한테 반말 찍찍 듣는 것도 싫어하고. ....나하고 관계 없는 새끼, 나랑 엮는 거. 굉장히 불쾌해." 이제서야 금잔디와 내 얼굴에 매달려있던 미소가 싹 지워졌다. 처음 만난 사이치고 지나치게 친근하게 군다 싶던 김윤서와 금잔디가 이제는 서로를 죽일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짜가인거 안다. 한가람 좋아하는 건 진짜지만, 지금 하는 말은 사랑하는 사람으로써가 아니라 그냥 한가람 친구로써 해주는 말인거. 여자가 아니라 친구로써 해주는 말인거. 얼마 전에 눈치 9752단으로 올라간 김윤서가 다 아는거다. 그러니깐. 그러니깐 난 여기서 화내면 안되는거다. 여기서 화내면 완전 쪼잔한 곰탱이가 되는 거니깐. 그런거니깐... 게다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한가람보구서 모르는 사람 어쩌구 저쩌구 한 주제에. "....강안이가 왜 널 보면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하는지. 오늘 겨우 알았다." "아. 지겹다, 인제. 한가람하고 엮이는 거, 존~나게 지겹다 진짜." "말 그따위로 하는 거 아냐, 김윤서. 가람인 그래도 너네 지키겠답시고-" "알어. 너보다. 금잔디보다 한가람이란 새끼에 대해 누구보다 더 잘알어. 그러니까 주둥이 그만 놀리고 꺼져, 금잔디. 진짜 패버리기 전에. 퉷." 입 안을 깔깔하게 굴러다니던 어금니를 바닥에 뱉고는 몸을 돌렸다. 금잔디, 화강안이랑 완전 판박이. 0.8120초라도 얼굴을 더 맞대고 있다간 주먹이 나갈 것이 분명했기에 주머니 속에 주먹을 더욱더 쑤셔 넣으며 걸었다. ......알어. 아주 돌아버릴정도로 잘 알어. 뼈저리게 잘 알어. 한가람 그 새끼가 누구때문에 악역을 자처했고, 지금도 악역을 자처하고. 또 앞으로도 악역을 자처할지. 빌어먹을 김한영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정말 눈가에 물파스 바른 것처럼 아주 따끔하게 아니깐. 아니깐... "가람인 아직도 널 좋아해!!!! 그지경이 되고서도!!! 만신창이가 되고서도 아직도 널!!!! 김윤서 널 많이 좋아한단 말야!!!! 넌 그런 앨 아프게 할 자격 없어!!!! 널 위해서 모든걸 버린 가람일 아프게 할 자격따윈 너한테 없단 말이야!!!" 파지직. 아까보다 더 큰 금잔디의 목소리가 내 심장을 사정없이 후벼판다. 그 걸 견뎌내지 못하고 주먹을 뻗자, 노란색 형광등을 담고 있는 나이트 간판이 우지직 깨졌다. 유리 파편이 튀어 따끔거렸지만, 괜찮았다. 금잔디 목소리가 파버린 내 심장보단 괜찮았다. "너 곧 인천올꺼지?!!!!"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물어보기도 전에 금잔디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각오 단단히 하고와라 너!!!!! 금잔디 이름 석자 걸고, 절대 가만놔두지 않을꺼니깐!!!! 단단히 각오하라고 오라고, 이 씨발년아!!!!!!!" "엿이나 먹어, 이 붕신아." 손을 들어 중지를 뻗었다. 내 중지의 위력에 주춤 한건지, 아님 이제 좀 지친건지 더이상 금잔디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말 없는 금잔디를 뒤로하고 아라를 찾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내 뒤로 화가난 시선이 날아와 박힌다. ......악역을 자처한건 넌데, 항상 악역이 되는 건 나구나. 후우. 모래라도 한움큼 씹어먹은 것처럼 입안이 까끌해진 느낌이 든다. 3-46. 황리엣과 최미오 ............. ...... ※ "엉라?? 앙라???" 허전한 어금니자리를 혓바닥 쓸며 거리를 뒤지고 걷는데, 어색하게 웃고 있는 아라가 갑자기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최강의 뒷통수는 이미 사라진 듯, 없었다. 입 안에 고여있는 핏물을 뱉어내고 턱뼈를 쓸어내렸다. "괜찮어??" "으응. 미안해, 괜히 걱정끼치고.." "뭘. 너만 괜찮으면 됐어. 가자, 늦었다." 미역나부랭이처럼 불어터진 아라의 두 눈두덩이가 신경쓰였지만, 여기서 또 꼬치꼬치 캐물었다간 왕방울만한 눈물을 쏟아낼 아라였기에 아무말 않고 조용히 앞장서 걸었다. 그나저나 인천짱 거저 먹은건 아닌갑네. 한방에 김윤서 어금니를 부러트리는 새끼는 은지니 다음으로 너가 최초일꺼다, 금잔디. 금잔디를 떠올리며 실실 쪼개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아라가 우물쭈물거리며 말을 걸어온다. "저, 저기 윤서야아.." "엉??" "강이오빠. 아, 아니. 최강 그 사람.." "엉, 얘기해." 아라의 얘길 들어주기 위해서 꼭 필요한, 러시아 땅떵어리보다 훠배 넓은 인내심을 미리 준비 시켜놓고 고개를 돌렸다. 새빨개진 얼굴로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던 아라가 오물오거리며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그 사람.. 너가 보기엔 어때??" "아!" 갑자기 손뼉을 치자 아라가 흡. 숨을 들이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아라를 향해 실실 미소를 지어 보인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거 연오도 했던 대사였어. 대상을 틀리지만, 어쨌든 똑같은 말 들으니깐 신기해서." "아, 으응. 그. 그럼 넌 그 사람 어떤데?" "어떠긴 뭐가 어때. 너 잡아간 못되처먹은 소도둑이지. 별로 생각할 가치가 없어. 하암. 하루죙일 싸돌아 다녔더니 졸리다." 무거운 눈꺼풀을 만지작거리며 말하자 아라의 고사리같은 손이 내 소매를 나꿔챘다. 길잃은 강아지 눈망울와 똑같은 아라의 눈동자가 보인다. 눈을 꿈벅이다, 이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김윤서는 황아라편. 솔직히 너나 연오나 로미오와 줄리엣 찍는거는 반댄데, 황리엣네 최미오는 주리엣네 최미오보다는 쪼끔 나으니깐." "유, 윤서야아.." "근데 그 새끼 말버릇이 좀 심하게 험하던데. 괜찮겠어??" "으응. 내 앞에선 잘 안해. 아. 아깐 화나서 그랬던 거야." "흐응. 글쿤.!!?" 아라와 사이좋게 손을 잡고서 아지트로 향하는 길. 괜찮다며 극구 사양하는 아라에게서 내 짐가방을 빼앗아 들고 걸어가다, 거의 아지트에 다다를때쯔음. 아무래도 아지트 안에 들어가면 물어볼 타이밍을 못찾을 것 같아(☜인천에 재때 안올라갔다고 리아에게 연속 싸대기 후려 맞을 것 같어서.) 걸음을 멈추고서 아라에게 물어봤다. "금잔디라고 알지, 아라야?? 지금 인천짱." "금잔디? 아, 아아응. 조금은." "걔 어떤애야??" "응?? 갑자기 어떤 애라니. 너 근데 금잔딜 어떻게 알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묻던 아라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한참 뜸을 들이다 대답해줬다. "어, 그. 그냥 조금 알어. 아, 아무래도 인천이니깐.. 걔 좀 대단한 애야. 예전에 한영오빠- 아, 아니 김한영하고 같은 체육관 다녔었고. 강안이랑 가람이랑은 같은 중·고등학교 다니고, 강이오빠랑은 친척이고. 또.. 너는 모르겠지만 지금 한창 인천에서 뜨고있는 정지운이란 애하고도 친하대. 아, 아무튼 전국 연합 애들하고 거의 다 안다고 보면 돼." "이햐. 발 조띠 넓네. 그 붕신???" "붕신??" "아. 아냐, 그냥 하는말이야. 그나저나 그거말고 더 신기한 건 없어?" 한가람&화강안 듀오랑 동창이여서 그렇게 아는 척을 해대는 거였구만. 새삼 금잔디의 태평양같은 인간관계에 감탄하고 있는데, 약간 망설이는 듯한 목소리의 아라가 말했다. "되. 되게 쎄다고 그랬어. 김한영하고 강이오빠랑 정지운이랑. 얼마전까지는 선우권 합해서 이 네명 빼고는 전국연합에서 원터치로 금잔디 이긴애가 없었대. ..싸, 싸움은 잘 모르겠지만 힘은 되게 쎄다고..." "호오. 그정도야?? 그정도로 쎄고, 안면 튼 새끼도 많으면서 왜 전국연합엔 안 들어고 뻗댄다냐." "...무, 무리에 속해있는 걸 싫어한대." "무리에 속하는 건 싫은데, 무리를 이끌어가는건 좋다?? 흥. 취미 한번 별나네." 입술을 비죽이며 다시 아라의 손을 잡고 아지트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렇게 강한 애를 김윤서가 모를리가 없는데. 게다가 김한영하고도 오빠동생할정도로 가까운사이면,1년전에 분명 마주쳤을껀데. "...걔 혹시 1년 전에 여기 없었냐??" "어? 어. 어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진짜?? 대충 때려맞췄는데. 아무래도 그 분이 오셨나보군." "그, 그분? 그분이 누군데??" 또 이런다. 개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진지하게 되묻는 아라를 향해 얕은 한숨을 내쉰 나는 아라의 앞머리를 쓱쓱.쓰담으며 빙긋 웃었다. "있어, 그분이. 근데 1년 전에 어디있었는데??" "아. 정지운네 부모님 같이 찾으러 캐나단가 거기 갔었을걸." "...걔네 둘 사귀냐? 아까부터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네." "아. 유, 윤서 넌 모르겠구나. 그 금잔디가 정지운―" "김윤서어!!!!!!" 마악 흥미진진한 아라의 뒷말을 들으려는데. 별안간 골목을 울리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빗자루를 움켜쥔 리아가 후덕후덕. 우리에게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떡 벌어진 입 안으로 차가운 밤공기가 술렁술렁 들어온다. "니가 붙어있었으면서도 감히 아랄 납치당하게 냅둬?!!! 너 진짜 죽어볼래!!!" 입고있는 레몬색 스프리스 남방과 감색치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대사를 외치며 리아가 빗자루를 쥔 손을 마구 휘둘렀다. 목숨의 위협에 느낀 난 서둘러 아라를 등 뒤에 감추고 침을 꿀떡 삼켰다. "진정하고. 리아야 너.. 리아야 너!!!" 다급한 내 말에 대마왕처럼 뛰어오던 리아가 뜀박질을 멈추고 눈을 부릅 떴다. 서슬퍼런 빛이 리아의 두 눈에서 번쩍이고... 숨을 가다듬으며 아라의 두 손을 꼭 붙잡은 난 찡긋. 윙크를 한 뒤 동네가 떠나가라 크게 소리쳤다. "너 콧눈썹 삐져 나왔다아!!!!!!!" 3-47. 새로운 목표물 ..... "잘못 했어, 안했어?" "잘못했슴다.." "목소리가 작다. 잘못 했어, 안했어!?" "잘못했다구, 이 사발면아!!" 딱.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자마자 딱딱한 효자손이 정수리에 정통으로 꽂혔다. 윽.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쳐들자 리아가 시베리안 허스키도 울고 갈 얼굴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결국 그 얼굴에 쫄아 다시 고개를 푹 숙이고 마는 불쌍한 김윤서.. "아까 윤서 목소리 여까지 막 들렸다. 근데 콧눈썹이 뭐야? 콧구멍에도 눈썹이 있어??" "엉, 당근이지. 이건 비밀인데.. 사실 정리아 콧구멍 속엔 눈썹이 살고 있어." "지인짜루?!!!" "쉿. 쉿.!!" 토끼눈을 하고서 소리치는 이연이를 향해 쉬잇. 입술을 막았다. 이연이가 소리를 꽥 지르는 바람에 리아가 매섭게 날 노려봤지만, 이내 새치름하게 고개를 돌리고는 효선이와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아니꼬운 리아의 파란색 뒤통수를 향해 혀를 낼름이고 있는데,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리아에게 달려가는 수이연. "리아야 리아야. 윤서가 방금 너보고 엿먹어 메롱했어!!!" "야!! 내가 언제!!!!!???" "방금 윤서 너가 리아보구 엿처먹어라 메롱~ 했잖어. 이연인 다 봤담" "내, 내내가 언제!?! 그리고 자꾸 왜왜 바, 바꿔!! 나난 어없어 엿먹으라고.!!!" "으앗. 그거 대따 오랜만이다.!!!? 윤서너 옛날에 흥분하면 막 말더듬고 그랬잖어.?? 따악 1년만이다. 그 거 있구선 따악.. 히힛 이연이 기분 쪼아.♡" 달리기 하난 기똥차게 잘해주시는(☜그래도 나보단 훠배 못 달리는.)이연이가 다시 내게로 후다닥 달려와 쪽. 뺨따구에 입술을 비볐다. 이연이의 찐한 스킨쉽에 알딸딸해있는 틈을타 리아가 또다시 내게 효자손을 내리친다. 딱. "둘다 조용히 못해?? 이연이, 너 그리고 잠깐 나와봐. 그리고 김윤서, 너는 여기서 계속 반성 하고 있어." "완전 선생이야, 선생." 툴툴거리며 리아에게 얻어맞은 정수리를 쓱쓱.문지르는데 방을 나서며 왠 종이 서너장을 일부로 떨어트리고 가는 리아. 잉?? 보라는건가??? 효선이와 이연이마저 리아를 따라 나가고 조용해진 방 안. 슬금슬금 리아가 떨어트리고 간 종이를 주우러 다가갔다. 팔랑. 조심스럽게 뒤집은 종이에는... "아띠바. 눈물나게..." 갑자기 시큰거리는 눈가를 쓱쓱 비비며 꾸깃.종이를 움켜잡었다. 화난척하고 있는 중이라더니.. 대가리 돌아가는 거는 하여간 세계 최고야, 세계 최고. 방울방울. 떨어진 눈뭉방울이 종이 위로 떨어져 검은 잉크를 얼룩지게 만든다. [인천에 올라가면 김윤서가 해야할 것 1. 황제공고에 전학가서 처음엔 선생따까리 노릇을 하며 쥐죽은듯 지낸다. 2. 그러다가 황제공고에 재학중인 인천연합 짱 금잔디와 아무도 몰래 한판 붙는다. 3. 빌빌대는 금잔디를 누르고 인천연합 짱이 된다. 4. 대신 뒤에서만 움직이고, 겉으론 금잔디를 내세워 인천연합을 움직인다. (※단독으로 놀면 눈에 띄니깐 인천연합을 방패삼아 활동.) 5. 전국연합 정보를 쏠쏠하게 모으며 위대하신 칠공주님이 올라오실 때까지 인천연합 정리하고 있는다. . . 7. 김윤서 소원대로 전국연합 대가리 김한영과 피터지게 싸운다. ※주의할 점. 1. 인천연합 금잔디는 전국연합하고 무지하게 친하다. 2. 금잔디 오른팔 정지운은 눈치가 김윤서하고 맞먹는다. 3. 인천연합 간부 외에 절대 김윤서라는 것을 알리면 안된다. 4. 어른들껜 절대. 절대 × 84651 알려지게 하면 안된다. (※선생따까리 노릇 제대로 해주는 센스!)] "계획 하난 철저하네, 아주." 벽에 기대 편하게 자리잡고 앉은 나는 실쭉실쭉 웃으며 종이를 뒤적였다. 고딕체로 쓰여진 계획서 뒤엔 금잔디, 정지운에 대한 신상명세서와 인천연합 멤버들의 목록표가 좌르륵. 나열되어 있었다. 대충 술렁술렁 넘어가며 읽어내려가는데. 눈에 띄는 한 구절. [김한영과 17전 1승 16패.] 그 김한영하고 붙어서 이긴적이 있다고???.... 순간 눈이 휘둥그레져 찢을 기세로 종이를 눈시깔에 갖다댔다. "정지운. 황제공고 2학년. -....특기 태권도. 김한영과 절친한 사이??? 뭐야, 이 듣도보고 못한새끼는?" 뭐에 꿀려서 그랬는지 확실히 감을 잡을 순 없었지만, 확실한건... 이새끼 무지하게 걸린다는거다.!!! 딱 한번 싸웠어도(☜일대일 맞짱도 아니고,그나마 중간에 파토까지나버린 싸움)승패를 가늠할 수 없었던 그 김한영을 이겼다니... 몸 속의 혈관이 미친듯이 용트림하는게 느껴진다. "좋아. 목표1 김한영, 목표2 금잔디 다음은 바로 너다, 정지운!!" 종이에 프린트된 한 남자아이의 사진을 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랜만에 느낌이 좋다. 똥줄타게 긴장되는 마음이 순식간에 펑.터져버린 느낌이랄까. ..... 인천. 쿵쾅쿵쾅. 막연한 기대감과 설레임이 한데 뒤섞여 맛깔난 빙수를 만들어낸다. "기다려라, 하늘아. 주인님이 가신다!!!!" 두팔을 쫘악. 펼치고 우렁차게 외쳤다. 살고싶게 해주셔서 감사함다. 김윤서, 죽지 않게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셔 아주 빌어먹게 감사함다. 아주.. 아주 더럽게 감사함다!!!!!! ................ ......... ※3시간후 주섬주섬. 저마다 옷들을 챙겨입고 나갈 준비를 하는 아이들. 여전히 화난척은 하고있지만, 그래도 한결 태평양스러워진 마음으로 용서해준 리아님 덕에 거실에 나와 아라가 준비해놓은 과자를 아작아작. 씹어먹으며 손을 휘휘 흔들었다. "밤길이 위험함다, 조심히 들어가쇼." "여기선 사고치지 말고 있어. 이 사고뭉치야." 따콩. 빨간색 떡볶이코트를 감질나게 차려입은 리아가 이마빡을 퉁기며 가방을 둘러맨다. 즐이다, 붕신아. 방금 전 리아에게 파다닥 날라가 꼬바르던 이연이가 생각나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혓바닥을 냉큼 집어넣었다. 암. 여기서 또 걸렸다간 밤새 골방에 쳐박혀 쫄쫄 굶게될 거야. 자제하자. "윤서, 네가 먹을 음식은 아까 아라가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놨어. 꼭 챙겨먹고, 모레 인천 올라갈때까진 여기 있어. 아. 가기 전에 재영이 아줌마 찾아뵈서 인사드리는 거 있지말고." 회색 더플코트를 챙겨든 효선이가 빙긋 웃으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옆에서 쟁알쟁알 이것저것 챙겨주던 아라는 빨리 나오라는 지니의 성화에 못이겨 분홍색 외투를 입고 후다닥 달려나갔다. 이연이는 외로워하지 말라며 평소에 맨날 끼고 다니던 초키를 건네주고 나갔고, 연오는 혼자 있다고 폐인처럼 지내지 말라고 왠 화장품과 악세서리를 한웅큼 안겨주고 가버렸다. 집 안까지 쨍쨍 울리는 지니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쥐죽은 듯. 조용해진 아지트안. 와그작. 자갈치를 한입 베어물고 벌러덩 자리에 누웠다. 유난히 아기자기한걸 좋아하는 아라가 발라놓은 노란색 병아리 벽지가 눈알에 박혀 들어온다. "....인천간다니까 괜히 심란해져서는. 무슨 생각하냐, 김윤서. 너 집은 여기야, 여기. 그따위 집구석은 집도절도 아냐. 김윤서한테 세상이 되준 애들있는. 칠공주가 도란도란 살고있는.. 여기가 니 집이야, 평생 붕신아." 팔을 눈 위에 얹으며 암시하듯이 중얼거렸다. 싸울 생각만 하면 발끝이 자르르. 떨릴정도로 기쁘지만, 그래도 추여사하고 김사장이 있는 그 집만 떠올리면.. 바지직. 자갈지 한웅큼이 가루가 되어 바닥에 사르륵.흘러내린다. 3-48. 미친개의 남자 ............... ....... "딩가딩가딩♬ 딩딩.. 다음이 뭐였지.??" 뒹굴뒹굴. 벌써 아지트에 처박힌지 이틀하고도 꼬박 3시간 490초가 지났다. 컴퓨터엔 손도 대지 말라는 리아의 엄명에 효선&리아방은 들어가지도 못하고. 시험기간인지 뭔지가 끼는 바람에 유일하게 나를 챙겨주던 아라와, 모텔왕 게임을 즐겨하던 이연이도 아지트에 발길을 뚝. 끊어버렸기 때문에 원치않게도 나는 심심하다 못해 인제 아주 심삼 하기까지 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연오는 아이러브화강안 사로잡기 대작전인가 뭔가 하느라 바뻐서 눈빼기도 안비치고, 지니는 ...아예 기댈 안한다.) 하아. 심심풀이 땅콩이라도 있으면 시원하게 씹어주는건데.. "...선우권이는 치료 잘 받고 있을라나." 근질근질. 눈썹이 마냥 가려웠다. 그냥 한번 툭. 내뱉었을 뿐인데도 선우권의 모습이 고리에 고리를 물고 떠오르기 시작했고.. 결국 난 꼼짝말고 아지트에 처박혀 있으라는 리아의 경고를 뒤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도 이렇게 말없이 나갔다 리아에게 봄날 닭패듯 맞기는 싫었는지. 본능에 충실한 김윤서는 대충 종이에다 아무렇게 휘갈겨 쓰고 나오는 센스!!를 잊지 않았다.. ...... [이연이의 초키가 인질로 잡혀갔다.구해주러간다. 삐용삐용,출동.] ............. ※대한병원 이번 달 들어 몇 번이나 와보는 병원인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한병원 로비. 접수창구에 있는 마빡이 시베리아 벌판보다 훠배 커보이는 간호사 언니에게 선우권의 병실을 물어보고서 뚜걱뚜걱. 비상구 계단을 올랐다. 얼굴만 보고 와야지. 인천 간다고 얘기는 해줘야겠지??? 이러니저러니했어도 선우권이는 김윤서의 쫄따구 제1호니깐.. 오만가지 잡동생각을 하며 도착한 809호 때깔나는 최고급 VIP 병실 앞. "병원에두 VIP 뭐 요런게 있어.?? 에이. 꼴랑 그깨비 치료한답시고 요런거까지 빌리다니.. 우리 쫄따구 돈지랄의 최고봉임다." 병실 앞에 서서 중얼거리던 나는 선우권이라고 써있는 병실문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 철커덕. 문고리를 돌렸다. ...... 병실풍경은 인제 지겨울정도로 익숙한데 도대체 이것이 무엇이다냐?? 떡벌어지는 대형 벽걸이 TV에 딱 봐도. 비싸보이는 노트북, 에어컨, 가습기도 모자라 쌔끈하게 잘 빠진 싱크대와 초대형 냉장고까지 차려져 있는 병실 모습에 나도 모르게 입이 쩍 벌어졌다. 김윤서 지난 18년을 살아오며 맹세하건데.... 이런 병실은 정말 생전처음이다.!!!! "씨박. 살림을 차렸어 아주.." 연방 감탄의 감탄을 거듭하면서도 퉁명스럽게 중얼거리며 병실을 둘러봤다. 무슨 병실이 22평은 족히 되보이네. 아까부터 근질거렸던 눈썹언저리를 북북.긁으며 병실을 구경하던 나는 원래의 목적을 기억해내고 퍼뜩.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엔 자느라 김윤서의 호들갑을 다행히 못본듯한 선우권이 이가는 숲속의 미녀처럼 가만히 누워있었다. "따식. 몰골은 그나마 멀쩡해졌네." 휘적휘적 걸어가 녀석의 뺨을 쓱쓱 문질렀다. 잠결에 내 손길을 느꼈는지 선우권이 몸을 뒤척인다. 그 모습에 회복중인 환자를 건드리면 안되겠단 생각이 들어 어깨를 으쓱이고 고개를 돌리는데.. 문득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 위에 낯익은 사진들이 보였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들을 휘저어보니 역시. 예상대로 전국연합 멤버들이 눈시깔에 들어왔다. "다치면서까지 정보수집을.?? 이야. 우리 쫄따구 최고봉으로 멋지다, 멋져." 혀를 내두르며 사진을 계속 뒤적이는데.. 약간 의아한 사진이 하나 등장했다. 웬일로 굳은 표정을 하고있는 김한영과 굉장히. 그것도 그냥 굉장히가 아니라 아주 굉장히. 눈에 익은 엉덩이 두짝. 이거... "달리 방뎅이랑 심하게 닮았는데 이거.." 눈썹을 찌푸리며 사진을 집어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김한영의 팔에 매달린 짧은 청치마의 주인공은 정말 달리의 통통한 엉덩이 두짝과 닮아있었다. 이제 어떻게 된 일이지?? 사진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곰곰히 생각에 잠겨 있는데 갑자기 허리를 감싸오는 늘씬한 팔 한개. "...돈지랄도 최고봉, 멋진 것도 최고봉. 그리고 구라빨도 최고봉 우리 쫄따구." "언제왔어?" 방금 자다깨서 그런지, 아님 오랜 병원생활에(☜나에겐 병원에서 입원한단 자체부터가 오래된걸로 간주된다) 잔뜩 쉬어버린 선우권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진을 내려놓고 몸을 돌리자 게슴츠레하게 눈을 뜬. 쬐끔. 아주 쬐~끔 귀여워보이는 선우권이 날 보고 있었다. "구라빨. 쫄따구는 구라파덕." "우리 대장님 얼굴 보니까 벌써 다 난거같어. 우리 대장님 얼굴이 우리 아버지 실력보다 훨씬 좋다." 순간 멈칫.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우권을 쳐다봤다. 자나깨나 마누라타령을 해대던 녀석이 드디어 정신을 차린걸까. "아. 대장님 내 걱정하느라 쫄쫄 굶었지? 허리 라인이 예전에 비해 영.. 뭐, 그래도 매끈하게 잘 빠졌어." "옴마." "대장님 뭐 먹을래?? 애들이 사다놓고 간게 꽤 되는데.. 으. 내가 주고 싶은데 침대에서 일어나는게 영 힘드네. 저기 냉장고에서 먹고 싶은 거 꺼내먹어." 왕방울만해진 내 눈동자따윈 보이지도 않는지 저혼자 주저리주저리 말하던 선우권이 힘에 부쳤는지 헉헉대며 내 허리에 두르고 있던 팔을 힘없이 풀었다. 아까부터 꼼짝않고 서있는 내게서 드디어 이상한 점을 발결한 선우권의 귓볼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가, 강해지면 다시 마누라라고 부를꺼니깐 그렇게 쳐다보지마. 그럼 나 존나 쑥쓰럼쟁이 된다??.." "...기특하다, 선우권." "별로 그거 칭찬 아닌데." "아냐. 너 내가 본 남자중에 최고봉으로 기특해. 와나.용가리 뿅가게 기특해 너!!.." 퍽. 선우권의 기특함에 눈이 멀어, 녀석이 환자라는 사실도 훼까닥. 까먹은 채 등짝을 후려쳤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괴로운듯이 몸부림치는 선우권. 하지만 그 모습마저 기특해 난 선우권의 머리를 부비적부비적 쓰다듬으며 하하 웃었다. "너 진짜 맘에 든다, 선우권. 최고봉. 진짜 김윤서 최고봉." "...아씨. 왜 자꾸 쑥스럼쟁이로 만들어.!!!" 과한 칭찬에 몸둘바를 모르겠는지 선우권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그러나 이젠 목까지 벌게져서는) 버럭.소리를 지르고 이불을 덮어썼다. 볼록 튀어나온 이불 아래 선우권 머리통을 계속 쓰다듬으며 간드러지게 웃던 나는 살짝 이불을 들춰 선우권의 검정 머리통을 향해 말했다. "우권아." 눈에 띄게 굳는 선우권의 깜장 먹물 머리통. "우리 이쁜 우권이. 쫄따구에서 최고봉 쫄따구로 올려줄까??" "..선우가 성이라고 몇 번을 말하냐..." 빙그레. 이연이가 항상 끼고 다니는 항아리 우유에 그려진 마크처럼 입꼬리가 쑤욱. 올라갔다. "너가 최초네. 한가람이 말고 김윤서가 처음으로 성떼고 부르는 남자애. 기쁘냐??" "....응." "근데 난 권이보단 우권이라고 부르는게 더 좋다. 그래서 우권이야. 우권이라도 불러도 괜찮지???" 예전에 '반지의 재탕'에서 자기를 우권이라고 부르던 체고 스포츠머리를 매섭게 노려보던 우권이가 생각나서 심술궂게 물었는데.. 선우권. 오늘 지대로 기특해주기로 마음 먹었나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응'이라고 대답하는 녀석을 보며 바보처럼 눈만 껌벅였다. "진짜??? 너 우권이라고 부르면 조따 싫어했잖어??" "마누. 아니, 대장님은 괜찮어." "..인천가기 전에 우리 쫄따구 이쁜짓 많이 보고 간다. 몸조리 잘하고 따샤." 붕신처럼 낄낄대며 살짝 굽혔던 허리를 폈다. 마지막으로 우권이에게 빨리 나으라며 건강인사를 남겨주고 병실을 나가려는데.. 병실문 바로 앞에 떨어져있는 검정색 지갑. "와자보. 땡잡었다, 나 지갑 주웠어.!!" "아. 그거 아까 필립이가 떨어트리고 간걸꺼야." "필립이?? 아. 그때 그 체고 스포츠머리!!... 근데 지갑한번 되게 때깔난다." 살짝 떠올를랑 말랑하는 얼굴과 이름을 매치시키며 지갑을 열어 보는데, 갑자기 아래로 툭 떨어져내리는 사진 한장. 허리를 숙여 사진을 줍다. 문득 사진 안의 사람의 보게 됐는데.. 그러게 됐는데... "와나. 오늘 낯익은 애들 무지하게 보네.." 낮은 탄식과 함께 입술이 실룩였다. 거의 세상의 모든 걸 싫어하는 지니가. 우리조차도 웃는거 볼라면 똥줄타게 개그를 해야 겨우 웃는 천하의 포커페이스 지니가. ....아주 행복하게 웃으면서 있는 사진. 이보다 더 예쁠순 없는 지니가 활짝 웃으면서 있는 사진. 최필립이라는 아이의 지갑에 들어있는 사진. "...김현광 뒤통수 제대로 맞었네." 3-49. 아까부터 계속 지갑을 들고 서있자, 내가 지갑이 탐이나 도망칠 궁리라도 하고 있는줄 알았는지 우권이가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필립이 걔 요즘 지 지갑 만지는새끼 완전 싫어 하는데.. 난 우리 대장님이 필립이랑 싸우는거 보기 싫다." "무슨 헛― 아 맞다.!!! 쫄따구 너 그때 우리 아지트 왔을 때 요거랑 비슷한 말했지?? 필립이가 첫눈에 뻑갔다는 체고 은지니. 맞어.. 너 지니 봤을때 그거 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웃음보가 터지려는지 배꼽이 슬슬 간지러워진다. ...그땐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술렁술렁 넘어갔었는데, 이제서야 그 말의 심각성이 온 몸으로 느껴졌다. 은지니 없음 염라 대왕하고 악수하고 오겠다는 천하의 그 김현광한테도 절대로 안웃어주던 지닌데. 우리 앞에서도 잘 안웃는 지닌데. 싸움할때 빼고. 우리가 웃겨줄때 빼고 절대 입꼬리 안올라가는 지닌데... 그런 지니를 웃게 만드는 앤데, 최필립.. 가물가물한 기억을 억지로 뒤엎으며 '반지의재탕'에서 만났던 최필립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음. 좋은 느낌이였지, 걔. 바다 같은 애.. 김현광처럼 깜깜한 은하수가 아니라 조따 넓고, 깊은 바다 같은 애.." "어?? 지금 필립이 얘기해??? 안돼, 대장님!!! 내가 강해지기 전에 딴남자한테 눈돌리면 억울하잖아, 나." "....바람피면 뭐 어때. 그치?? 바람같은거 솔직히 피워주고 그래야―" "나 화낸다. ...바람같은거 안펴도 대장님 충분히 이뻐. 그니까 그런 말 하지마." 잉???? 이건 또 무슨 귀신 붕어싸만코 까먹는소리????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돌리자, 화났는지.잔뜩 굳은 얼굴의 선우권이 금방이라도 달려올 태세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링겔 잘못 맞았어??" "바람 같은 거 피지 말라고. 조금만 있음 선우권이 김윤서보다 강해질꺼니깐.. 바람같은거-" "누가 내가 핀대?? 붕~신. 이제보니 삽질도 최고봉이야, 우리 쫄따구." 피식 웃으며 녀석을 향해 지갑을 던졌다. 웃고있는 매우 희귀한 지니의 사진은 왼손에 꼬옥 감쳐둔채.. ... 병실을 나서기전. 아무래도 육해도 아닌 오해를 단단히 하고 있는 우권이가 걸려 안직도 표정을 풀지 않고 있는 우권이를 향해 혓바닥을 쭈왁.내밀었다. "바람같은거 내 취미 아니라고, 이 붕아! 그러니까 어울리지도 않는 무게 잡지말고 치료나 잘해. 아.그리고 최필립인가 필름인가하는 애 오면 지니 사진 내가 가져간다 그래. 그럼 몸조리 잘하고, 연락해라! 아참참. 조만간 나 인천으로 뜰 예정이니깐 우리 학교 앞에 가서 그 이상한 종이 들이대지 말어라." 뻐끔뻐끔. 붕어처럼 입만 벙긋이는 선우권을 향해 손을 휘휘 흔들어주고 병실을 나섰다. 김윤서 바라기 한가람처럼 평생을 은지니만 바라본 김현광이였지만. 그래도 은지니 한번도 못웃긴 김현광보단 한번이라도 이렇게 은지니 예쁜 웃음 짓게 해준 최필립이. 나도 뻑갈정도로 은지니 예쁘게 웃게해준 최필립이가 은지니 친구로써 훠배 좋으니깐. 이로써 김현광은 백기, 얼굴 딱 몇번 본것뿐인 최필립이 승리의 청기. "그나저나 이건 국보로 지정할만큼 매우 귀중한 자료니깐은.. 지니를 한번 골려주는데 써먹어???" 씨익. 악마처럼 사악하게 웃던 나는 지니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어두고,가벼운 발걸음으로 지니가 다니고 있는 제화체고로 향했다. .................. .......... ※제화체고 체고답게 굵직굵직하고 큼지막한 교문 앞.(☜어째서 굵직굵직하고 큼지막한게 체고다운건지는 모르겠다) 안즉 안끝났는지 운동장에서 열심히 수업중인 아이들을 빼꼼히 고개만 내밀어 살펴보고 있는데,저 멀리서 지니로 보이는 빨강머리가 내게로 걸어오고 있는게 보였다. 으잉?? 벌써 날 알아채다니.. 눈 하난 기똥차네, 저거. "여기여기!!!.." 괜히 숨겠답시고 지니의 화를 돋울바에야 차라리 내가 먼저 나서는 게 나을 거같아 폴짝거리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런 날 아주 못마땅한 눈초리로 훑어보며 웬일로 반듯하게 걸어오는 은지니. "정리아말 개껌으로 들었어.??? 이시간에 여긴 웬일이야." "아잉. 차가운척해도 알어, 니맘♡ 사실 너도 날 보고싶었던거지?? 그러니깐 내가 등장하자마자 이렇게―" "까지마, 병신아. 담배까러 나왔다가 우연히 본거니깐." ...... 한방에 끝내주시는 센스하고는. 담벼락에 기대 담배를 입에 무는 지니를 향해 불만스러운 얼굴로 불퉁거리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지니의 사진이 떠올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지니의 어깨에 턱. 손을 올렸다. 꿈틀. 움직이는 지니의 눈썹. "치워." "아이러븅하지???" "뭔 개소리야." "지니 너도 아이러븅하니깐 웃은거지??" "아까부터 뭔 개소리냐고." "짜잔.!!!!" 독한 담배연기를 내뿜는 지니의 얼굴에 주머니에서 꺼낸 사진을 펼쳐보였다. 꿈틀. 또한번 지니의 눈썹이 움직이고... 서서히 지니의 눈동자가 커졌다.(☜그래봤자 별 티도 안나게 쬐끔 커졌다.) "이거 너가 어떻게 갖고있어?" "어떤 분 지갑에 아주 소중히 모셔져 있는거 쌔볐지롱." "....."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표정으로 사진을 보던 지니는 다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뱉고는 발로 비벼껐다. 하얀 담배가 흙투성이가 된채 짓이겨지고.. 삐죽삐죽. 멋대로 솟은 빨강머리를 쓸어넘긴 지니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안아이러븅해." "엉?? 말도안돼!! 은지니는 안아이러븅한 애한테 이렇게 웃는애 아닐껀데." "안아이러븅해.." "...하잖어. 흐흐." "안아이러븅한다고, 씨발아." "왕창많이 아이러븅하잖어, 붕아." 나와 주고받는 말장난이 짜증났는지 바닥에 카악.가래침을 뱉은 지니가 도전적인 눈빛으로 쏘아본다. 하지만 날카롭게 다듬어진 지니의 눈동자에서 온 몸을 적시고도 남을 물기를 느낀 나는 베실 웃으며 사진을 지니의 손에 쥐어줬다. "바람 펴도돼. 까지껏 담배도 피는데 은지니 능력으로 못필껀 또 뭐야?? 연오 봐. 걔 신기록이 일주일에 13번 남자 갈아치운거잖어." "....달라, 주연오는." "똑같이 지구에 살고, 똑같이 공기 마쉬고, 똑같이 사는데 뭐가 달라." "......김현광이 있잖아, 은지니는. 주연오한텐 없는 김현광이 은지니한텐 있잖아." 괴로운 얼굴로 인상을 찡그린 지니가 입을 꾹 다물었다. 만약 김윤서에게 하늘을 잡겠다는 목표가 있다면, 은지니에게는 김현광을 떨궈내겠다는 목표가 있을게 뻔하다. 그리고 김현광한테는 은지니를 죽을때까지 사랑한다는 목표가 있을테고... 지니의 가라앉은 눈을 바라보던 나는 한숨을 퓌슈슉. 내쉬며 고개를 까딱였다. "꽉 막아줄게. 은지니하고 최필립 아이러븅하는데 김현광 못들어가게 김윤서가 꽉 막어줄께. 그니깐. 그니깐... 이제 너도 좀 웃고 살어람마." 금방이라도 떨어질듯 위태롭게 지니의 손에 걸쳐진 사진을 꾸왁. 눌러주고 씰끗 웃었다. 사진을 잡은 지니의 손에 조금씩 힘이 들어가는게 느껴진다. 지니의 사진이 완전히 지니의 손아귀에 들어갔을 때. 팟. 손을 뗀 나는 지니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부산에 껌딱지처럼 붙어있어. 김현광이 너 못찾게 최필름 뒤에 꾹꾹 숨어있어. 김윤서 도와줄라고 인천 쌔빠지게 튀어오지말고.. 지금까지 황아라버전이였슴다"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이빨을 드러내보이며,씨익 웃자 지니가 영 아니꼽다는 눈으로 나를 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작별인사를 해주고 돌아서려는데.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뒷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이 신나는 테크노를 추기 시작했다. 설마 리아가 벌써 내가 아지트에 없는걸 눈치챈건가? 약간 두려워질랑말랑한 마음을 안고서 조심스럽게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여보시옹??"] [지금 택배시켜서 아지트로 버스표 보냈어. 당장 짐싸서 올라가, 인천.] ["잉?? 이렇게 갑자기 그러면 내가-"] [잔소리말고. 아, 참. 올라가기 전에 지니랑 이연이 학교가서 그 둘도 데리고 가.] ["이건 또 왠 오잉이야.?? 지니랑 이연일 왜 데리고-"] [궁금한건 그 둘한테 물어보고, 길게 통화 못하니까 짧게 말한다. 인천에 올라가서 어떻게 해야되는지는 지니한테 대충 말해뒀으니깐, 그대로 하면 되고. 김윤서 너 특히!! 조심해라. 나댈려면 조용히 나대. 어른들한테 들키는 날엔 너 당장 동해바다에 처박아버릴테니까 알아서 기어.] 무슨 등짝에 2374리터짜리 산소통이라도 달았나. 나는 눈을 토끼통같이 뜨고서 쉬지않고 다다다.말을 뱉어내는 리아의 목소리를 신기하게 들었다. 높낮이없이 일정한 톤으로 계속해서 잔소리를 늘어놓던 리아의 목소리가 멈춘 것은 통화를 시작하고 약 2분 032초가 지난 뒤였다. 옴마. 징한 기지배. ["조따 대단해, 정리아. 너 수영하면 우주 챔피언딸꺼같어."] [농담따먹긴 그만하고, 다 알아들었으면 빨랑 아지트가서 표 받어놔. 그리고 애들 데리고 올라가고. 그럼 난 끊는다. 무슨 일있음 바로 전화하고. 너 진짜 사고치면 죽어.!] 뚝. 제 할말만 다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는 센스없는 정리아. 정리아 목소리만큼이나 단조로운 기계음이 귓구멍을 가득 메우자 나는 입술을 비죽이며 핸드폰을 다시 뒷주머니에 쑤셔넣었다. 그리고선 여전히 아까와 똑같은 포즈로 서있는 지니를 향해 고개를 꺾고 물었다. "너도 데리고 가래, 리아가. 근데 왜??" "...몰라." "그럼 내가 아까 황아라버전으로 말했던 주금같은 대사들은 다 삽질이였던거여??.." "주금이 뭐냐. 정리아가 말 그렇게 하지 말라고 몇번이나 말했는데. 하여간 말은 지지리도 안듣지." 지니가 자기 사진을 교복 안주머니에 넣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랫입술을 내밀며 어깨를 으쓱이자 담벼락에서 몸을 떼는 은지니. "그럼 수이연데리러 가자." "야야. 너 그냥 이대로 학교 나와도 돼?? 그러다 출석부에 금간다, 너??" "뒤처리는 주연오 몫인거 잊었냐?? 그리고 출석부에 금이 가던,은이 가던 상관없어." 완전 천상천하 유아독존. 으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난 보이지도 않는지, 은지니는 새로운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고 앞장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씩조금씩 작아져가는 은지니의 뒷모습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후다닥 지니의 뒤를 쫓아가며 소리쳤다. "씨봉, 같이가!!!!" 4부. 인천의 하늘 4-50. 가자, 인천으로 ※인천터미널 재섭자기(☜수이연이 고새 만든 남친의 애칭)를 두고 갈 수없다며, 교문을 붙잡고 땡깡부리닌 이연이를 꽁꽁 묶어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인천. 부산의 짭쪼름한 바람과는 달리 온 몸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인천 바람을 느끼며,단촐한 짐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 "시러시러!!! 이연인 안가꼬야!!! 우리 재섭자기랑 헤어지기 싫담말야. 엉엉엉.." "벌써 다 왔고만 뭘 안가꼬야야. 땡깡 그만 부리고 인나, 수이연." "윤서 왕미워.!!! 재섭자기 인기 조따 많어서 이연이가 그거 다 먹어버려야 된담 말야.!!"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는 수이연이 쪽팔려 이미 은지니는 터미널 밖으로 도망친 상태. 온갖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아예 바닥에 주저앉어버린 이연이를 난감하게 보던 나는 퓌휴. 한숨을 내쉬고 이연이 앞에 쪼그려 앉었다. "그럼 부살 갈래.??? 내가 표 끊어줄테니깐, 부산 갈래.???" "어응!!!!어으엉응... 싫어!!!!!" "그라모 뭐 어쩌라고요잉. 응.??" "윤서미워. 윤서 짱왕미워.!!!!" 쿠왕. 엉엉 울던 수이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면서 내 턱을 성난 코뿔소마냥 들이받았다. 그 충격에 달나라 토끼님처럼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게된 내가 턱을 움켜잡고 있는 사이, 자기 가방을 움켜쥔 이연이가 어디론가 뛰어가버렸다. ... 저노무 지지배를 진짜. 얼얼해진 턱을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서자 언제 왔는지 지니가 사이다캔을 내밀었다. "씨봉. 얍샙하기는 우주최고지.?? 치사하게 지만 내빼고." "전화받느라 그런거야. 이거나 먹어." "됐네. 으. 그건 그렇고 수이연 저거 분명 대갈통에 뭐 박아놨어. 안그럼 이렇게 울릴리가 없잖아." 좀체 가라앉지 않는 두통을 느끼며 지니가 내민 사이다를 받아들었다. 목구멍을 따끔하게 찌르는 사이다를 원샷하고, 쓰레기통에 찌그러진 사이다캔을 던져넣었다. 그리고선 이연이를 찾기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데, 매표소에 길게 늘어선. 눈에 띄는 교복무리들. "지니야, 저거-" "인천공고새끼들이네." "헐. 빨랑 수이연 찾아야겠다. 까딱하면 첫날부터 사고 대박으로 치겠는데??..." 그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짜릿짜릿한 기대감에 조금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이연일 무사히 찾으면 그거 나름대로 다행이고, 이연일 찾지 못해 사고가 터지면 뭐. 그것도 그거 나름대고 스릴있고.. 기분 좋은 미소가 올라온다. "느긋하게 찾아보자고." 지니의 어깨에 손을 두른 나는 설렁설렁 걸으며 이연이를 찾기 위해 터미널을 뒤지기 시작했다. ............. ※30분 후 30분째 제법 넓은 인천 터미널을 둘러봤지만 인천공고 녀석들은 여전히 매표소 앞에 진을 치고 있었고, 옛날부터 숨박꼭질 하난 최고 잘했던 수이연은 코빼기도 안비치고 있었다. ....수이연, 이거 정말 부산으로 토꼈나.?? 간지러운 눈썹끄트머리를 긁으며 코끝을 찡그렸다. "김윤서." "엉??" "이제부터 너는 칠공주 김윤서가 아니라, 모범생 김윤서. 쌈박질하는 김윤서가 아니라, 전국 모의고사에서 400점맞는 김윤서." "그게 뭐냐??..." "나도 몰라. 아무튼 효선이가 이렇게 전하래. 그럼 난 간다." "잉?? 어딜가." "난 최효선 말 고분고분하게 들을 맘 없으니깐 미리 튀는거야. 그럼 1시간 있다가 터미널 근처 공원으로 와." 툭툭. 영문모를 소리를 늘어놓던 지니가 내 어깨를 두드리고는 갑자기 방향을 바꿔 어디론가 급히 뛰어가버렸다. 눈을 껌벅이며 그 자리에 멍청히 서있는데 갑자기 내 머리 위로 오징어 똥꼬색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야. 너 아까 우리 야린년이지.??" "야. 나 아까 너네 야린년 아닌데요." 사고를 일으키면 안된다는 생각에 벙싯벙싯 웃으며 대꾸해줬는데, 날 둘러싼 인천공고 노마들의 눈빛이 심상치 않게 빛났다. 씨봉놈의 새끼들.. 왜 나만 있을때 꼭 걸려오고 난리야. 정리아가 사고치지 말라고 욘나 당부했는데,이러다 사고나면 빼도박도 못하잖냐.응?? 잽싸게 튀어버린 지니와, 때아닌 숨박꼭질을 즐기고 있는 이연이를 괜히 원망해보지만, 이 두가시네들은 내가 인천공고 노마들에게 붙잡혀 남자 화장실 구석탱이까지 끌려올때까지 결국 눈썹빼기도 내비치지 않았다. 망할. "너 아까 말 존나 띠껍게 하더라.???" "나 아까 말 존나 띠껍게 안했는데.." "와. 얘봐. 말하는거 진짜 씨껍해." 꾸욱. 인천공고노마 한개가 검지손꾸락을 들어 내 어깨 죽지를 꽈악. 누르기 시작했다. 녀석의 손가락이 어깨죽지에 박힐 때마다 점점 내 기분은 하강곡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곤두박질쳤고.. 슬슬 마빡에 주름이 잡혀갈쯔음. 어깨죽지를 누르던 녀석이 스스로 떨어져나갔다. 속으로 쉼호흡을 하며 바닥에 너저분하게 깔려버린 기분을 애써 끌어올리는데.. 교복주머니에서 레종을 꺼내든 녀석이 갑자기 내게 얄쌍한 고양이가 그려진 담배 한개비를 내밀었다. "야." "..네." "펴." "안피는데요, 담배." "좋은거야. 펴봐." 별 그지깽깽이같은 놈도 다있네. 깐족거리며 어깨죽지를 쑤실땐 언제고, 이제와 싱글벙글 웃으며 담배를 내밀다니. 어의없음을 32.25%를 담은 얼굴로 입술을 실룩이다 녀석이 내민 담배를 다시 녀석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요즘 누가 레종펴요. 그리고 전 국산 아니면 안피는데요." "헐.. 국산 요즘 누가 피냐.??? 촌발날리기는. 근데 너 이름이 뭐냐?? 아. 내 소개먼저 해야지. 나 인천공고 이겸이다, 구이겸." 자기를 구이겸이라고 소개한 인천공고노마는 화장실을 가득 메우던 나머지 인천공고 아새끼들을 밖으로 보내놓고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뻑뻑한 담배연기가 좁디좁은 화장실을 채우고. 담배의 담자도 모르면서 국산아니면 안핀다고 구라빨을 날렸던 나는 기침을 쿨럭. 해대며 입을 틀어막었다. 씨봉. 되는 일이 없어, 초장부터. "...너 국산만 핀다는거 구라지?" "쿨럭. 맞는- 쿨럭. 데요.. 쿨럭.!!!" "누가 안핀다 그러면 깔보냐.?? 그냥 안피면 안핀다고 말하지.. 후우. 아까 야렸으면서 왜 안야렸다 그랬냐.??" "진짜 안 야렸는데요." "...웃는거 예쁘네." "예.??" 구이겸이란 새끼는 샛길로 빠지는거 최고봉인가 보다. 갑자기 화제를 확 바꿔버리는 구이겸을 황당하게 바라보는데. 드르륵. 화장실 창문을 연 구이겸이 갑자기 날 보며 씨익 웃는다. "이쁘다고, 너. 말대답 꼬박꼬박하면서도 웃는애 너가 처음이다." "아,예에." "어디 학교 다녀.??" "아마.. 황제공고 다닐껄요." 황제공고 맞나.??? 리아의 말을 더듬어가며 대꾸하자, 갑자기 구이겸의 눈이 동그래지더니.. 터억. 창틀에서 내려와 터벅터벅. 내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주춤거리며 물러서자 구이겸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너.. 그럼 정지―" "씨발 너 뭐야.!!!" "꺼져, 씨발롬아!!!!!" "야이@#!%^&.." 갑자기 화장실문이 쿵쿵거리면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눈을 꿈벅이며 고개를 돌리자 베이지색 강철문에 퍽퍽. 주먹 자국이 찍히더니.. 곧이어 부서질듯 벌컥. 문이 열렸다. "...호랑이도 제말하면 온다더니. 양반되긴 글렀다, 정지운??..."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4부. 인천의 하늘 4-51. 정지운, 인천의 사신을 만나다 "여기서 놀지 말라고 말했을텐데.. 경고가 우스웠나보네. 구이겸." 엄청나게 매력적인 목소리와 함께 검정색 목폴라티를 입술 위까지 끌어올려 입은 특이한 차림새의 남자애가 화장실 안으로 성큼 들어왔다. 정지운이였던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정지운. 세글자를 되뇌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갑자기 타악. 날 자기 뒤로 밀친 구이겸이 삐딱한 어투로 화장실 문턱에 서있는 정지운을 향해 말했다. "아쉽게도 난 인천연합 소속이 아니여서 말이야. 강이형이 너네하고 친하다고, 우리까지 대가리 숙일 필욘없잖아?.." "...죽어, 너 그러다." "그 전에 너가 죽게될껄." 구이겸 어깨 너머로 보이는 정지운(☜아마도..)의 눈동자가 살벌하게 빛났다. 지금 만약 누가 나에게 눈빛 하나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 묻는다면 주저없이 지니와 리아. 그리고 저 아이, 정지운을 말할 것이다. 어찌나 살벌한지.. 나도모르게 침을 꿀떡 삼키고 구이겸의 교복자락을 움켜잡었다. 순간 움찔하는 구이겸. "...어디 숨어있어. 너한테 피해 안가게 할게." "싸움구경.. 좋아하는데, 나." "..뭐?? 하하. 아까부터 느낀거지만 너 진짜 재밌다. 그래도 위험하니깐 마지막칸에 들어가있어." 속닥속닥. 구이겸은 내쪽으로 살짝 고개를 틀어 낮은 목소릴 속삭였다. 살벌한 남자애 정지운과 이상한 남자애 구이겸의 피터지는 싸움을 구경하고 싶어 발가락이 근질거렸지만, 여기서 더이상 튀었다간 리아가 알려준 계획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것 같아 군말없이 구이겸이 말한 마지막칸으로 향했다. 마악 초록색 문을 열고 냄새나는 칸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문득 옆얼굴에 강렬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보다 더 무서운 얼굴로 날 노려보는 정지운이 보였다. 놀란 마음에 껌벅껌벅. 정지운을 보는데 어느새 온건지 구이겸이 억지로 날 밀어넣고 문을 쾅.닫았다. "상관없는 애야." "...." "이제 할말 다 했나봐?? 그럼 괜히 시간끌 필요 없겠네." 터벅터벅. 구이겸의 발소리가 멀어져간다. ...변기통 위에 쪼그려 앉은 나는 정지운의 그 무시무시한 눈빛을 떠올리며 가방을 뒤적였다. 시간이라도 떼울셈으로 리아가 줬던 계획서를 읽어보려는데 불현듯 내 뒷통수를 거세게 후려치는 말이 떠오른다. "목표3!!!!! 정지운, 맞다 걔다!!!!!" 화장실 천장이 무너질정도로 우렁차게 소리친 나는 꺼냈던 계획서를 다시 가방 속에 구겨넣고 다급하게 화장실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파악. 미친듯이 뛰쳐나온 나는 아직 화장실 문 앞에 서있는 정지운을 향해 소리쳤다. "1, 17전 1승 16패.!!!! 화, 황제공고 2학년 정지운!!!! 마마, 맞지요 너.?!!!!"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란 구이겸의 동그란 눈도, 정지운 뒤에서 화장실 안을 엿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정지운을 향해 삿대질을 하고 있는 그 때. 김윤서의 머릿속을 꽉 메우고 있던건 바로 이거였다. 17전 1승 16패. ....인천의 사신. 정지운. 조금 의외라는 얼굴의 정지운이 갑자기 얼굴을 덮고 있던 폴라티를 쓱. 끌어내리고 날 바라봤다. 정지운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고.. 쿵쾅쿵쾅. 심장이 테크노를 추기 시작했다. "응 맞아. 나 정지운이야." "부, 부붙어요. 나랑 한판 붙읍시다.!!!!" 저기 뒷통수 한구석에선 이러면 안된다는 리아의 외침이 들렸지만, 주둥이가 자기 멋대로 움직였다. 절대 사고치지 말랬는데.. 어른들 눈에 띄는짓은 근처에도 가지 말랬는데.. 근데... 그보다 지금 저 남자애하고 싸우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니까. 손 끝이 짜릿짜릿하게 떨릴정도로 크니까, 그 마음이. 엄청나게.. "..내가 이럴 줄 알았지. 너 이거 녹음해서 정리한테 보내기 전에 빨리 나와라." 기대로 부푼 내 눈동자에 갑자기 지니의 낮은 목소리가 들어왔다. 순식간에 퓌시식. 바람이 빠져 나가고.. 실망으로 가득찬 얼굴로 문간에 기대 한손으론 이연이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지니를 쳐다봤다. 씨봉.. 타이밍 지대 못맞추지. "1시간있다 공원으로 오라매." "아무래도 안되겠어서 다시 온거야. 그리고 나 안왔으면 넌 바로 지옥행이였을텐데 고맙다는 인사 하나도 안하냐, 이 싸가지 없는 년아." "치~이사뿡." 혓바닥을 쭈왁. 내밀고 변기통 위에 내려놨던 가방끈을 질질 끌며 지니에게 걸어갔다. 당황한 구이겸이 내 손목을 잡아채기 전에, 정지운이 먼저 내 앞을 가로 막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정지운이 알수없는 얼굴로 날 내려다 보고 있었다. "...아. 한판 붙기로 한건 다음으로 미뤄주심 감사하겠슴다. 보시다시피 미친개가 잡으러 왔걸랑요." "기다릴게. 찾아와라, 김윤서." "네. 에...에??? 제 이름인데, 그거.." 고개를 끄덕이며 지니에게 가려던 나는 정지운의 말에 그 자리에서 용수철처럼 튀어오르며 오른손을 들었다. 하지만 놀래 뒤집어지려는 나와 달리 정지운은 방금 자기가 무슨 말을 했나싶을정도로 담담해 보였다. 나는 리아가 준 종이에서 봤다쳐도.. 얘가 날 어떻게 알지.?? 설마 얜 사진에도 눈이 달린건가.???? "..잘가라그럼." 타악. 옆으로 비켜선 정지운이 내 어깨를 살짝 힘주어 밀었다. 그런 정지운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리려고 할 때. 굉장한 힘으로 내 머리칼을 휘어잡는 손. 으악. 소리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비겁하다, 너?!!! 갑자기 뒤에서 이러는 법이-!!" "벌써 짭쌔떴잖아, 씨발아. 너때문에 되는게 없어,정말. 빨리 튀어!!!!" 쿠왕. 무릎에 힘을 주고있지 않았더라면 바닥에 엎어졌을정도로 무지막하게 내 머리통을 후려친 지니가 따끔하게 소리쳤다. 지니의 말대로 파란색 포돌이 아저씨 여럿이 호루라기를 불며 뛰어오는게 보였고, 난 입술을 비죽이며 벌써 터미널 밖으로 뛰쳐나가고 있는 지니를 따라 졸라. 뛰기 시작했다. "근데 왜때리는 거야 이 사발아!!!!!!!" 터미널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김윤서 목소리 뒤로 정지운의 안타까운 시선이 방울방울. 맺혀 흘러내린다. 4-52. 수이연의 재섭자기 ※택시 안 "후왁후아.. 사발면 나무꼬챙이로 비벼먹을라.. 후아.." 쫓아오는 포돌이 아저씨를 간신히 따돌리고 올라탄 삐까뻔쩍 모범택시 안. 턱까지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앞좌석에 앉아있는 은지니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기분이 상당히 안좋아뵈는 은지니는 기사아저씨께 목적지만 대충 말하고는 고개를 훽. 돌려 버렸다. 지니 뒷통수를 향해 내밀어진 손을 슬그머니 거둔 나는 괜시리 후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티셔츠 앞자락을 펄럭이며 택시 창문을 열었다. 풀썩. 매쾌한 매연연기와 상쾌한 인천냄새가 뒤죽박죽 섞여있는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죽은 듯 엎어져 있던 수이연이 훌쩍이며 내 무릎 위에 얼굴을 파묻는다. 슬쩍 이연이를 향해 고개를 돌리니 가늘게 떨리고 있는 녀석의 작은 어깨가 눈동자 속을 아프게 파고 들었다. "호호할아버지가 선물 안준대 너 자꾸 울면. 그니까 뚝그쳐. 어른들 만나고나면 이마트 들려서 바나나우유 한통 사줄게." "..재섭자기 인기가 얼마나 많은데... 이연이 없음 여우같은 년들이 얼마나 달라붙는데.. 이연이 없음... 우어.앙..." 앵앵거리기만 하던 이연이의 입에서 결국 아프리카 고릴라의 울음소리가 튀어나왔다. 예전같았음 웃기다며 배를 잡고 굴렀겠지만, 때가 때이니만큼.. 어른스러운 김윤서는 웃고싶어 안달난 허파를 꾹. 누르고 이연이를 달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내가 보기엔 너네 재섭자기 홀릴만한 애 지금 부산에 주연오밖에 없거든?? 근데 주연오는 요즘 화강암한테 한창 작업중이거든. 그니깐 결국 수이연은 아무걱정 안해도 된다 이거지." "아니야.. 아니야!!! 우린언니가 재섭자기 가로챌꺼야. 이연이 없을때 우린언니가.. 으.. 으아앙!!!!" 수이연이 입을 쩍. 벌리자마자 모범 택시안 가득 이연이의 앙증맞은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기사 아저씨의 마빡에 뚜둑. 힘줄이 돋고.. 더불어 지니의 얼굴도 험악하게 구겨져버렸다. 아무래도 이대로 뒀다간 수이연과 짬뽕으로 묶여 쫓겨날 것 같아 서둘러 이연이에게 속삭였다. "이연이 너 사람을 좋아하는데 필요한 준비물이 뭔지 알어???" "으어.. 어.. 어응??? 뭔데????" 이연이가 내 바지에 코를 닦으며 웅웅거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씨봉..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찝찝한 느낌에 인상을 구기려다 다시 마음을 고쳐먹고 이연이의 귓떼기를 쭈왁. 잡아 끌었다. "이 뜨거운 가슴과 날 좋아하게 될 거란 자신감!!!... 바로 그 두개지." "뜨거운 가슴하고.. 자신감?? 그게 뭐야. 윤서 너는 좋아하는 사람이 없어봐서 몰라. 그거 두개론 절대 안되는 게 사랑이야, 사랑.."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분이 쪼끔 나아졌는지 이연이가 코를 훌쩍이며 몸을 일으켰다. 소매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쓱싹쓱싹. 닦아낸 이연인 반대편 창문을 스르륵.열고서 주머니에서 꺼낸 바나나맛 츄파춥스를 입 안으로 쏘옥 집어 넣었다. 영양가 없는 김윤서 말보단 바나나맛 츄파춥스가 더 좋았는지, 한결 나아진 얼굴로. 그렇지만 여전히 풀죽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수이연. "..윤서 너 우리 재섭자기가 얼마나 잘생겼는줄 알어?? 아마 우리로따지면 완전 연오급이야. 특특특S급.!!! 어찌나 잘생겼는지.. 시내에 나가기만하면 여자애들이 한트럭이야,한트럭.." 재섭자기 얘길 꺼내자니 다시 기분이 우울해졌는지,이연이가 무릎을 끌어안으며 처량하게 고개를 푹.숙였다. 솔직히 우리 중에 이쁜 걸로 따지자면 단연 주연오가 으뜸이겠지만, 수이연도 만만치는 않은데.. 도대체 재섭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래 천하의 수이연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건지.. 나도 모르게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우리 재섭자기 사진 보여줘.?? 아마 윤서 너도 보면 뻑갈껄." 주섬주섬. 갑자기 이연이가 무릅 사이에 얼굴을 묻은채로 손을 움직여 가방을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후 가방 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낸 이연인 내쪽으로 슬쩍 그 사진을 밀었다. 사진 속에는 엄청난 수의 여자들에게 둘러쌓인 남자애가 활짝 웃으며 서있었다. 김윤서 신조가 [남자는 갑빠가 최고다]긴 하지만... 이 남자, 정말 '억'소리 나게 생겼다. 수이연 말대로 완전 남자 주연오네, 남자 주연오. 근데 이 얼굴.. 워째 낯이 익네?? 사람 얼굴 기억하는데 잼병인 김윤서긴 하지만 이렇게 눈에 띄게 생긴 얼굴을 잊어버릴리가 없는데.. 사진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어디서 봤더라.." "윤서야.." "엉??" 순간 들려오는 이연이의 축축한 목소리에 사진 속의 재섭자기에게서 시선을 떼 고개를 들었다. "이연인 재섭자기 100번째 여자친군데, 우린언닌 재섭자기 1번째 여친이야. 이연인 재섭자기랑 딱 1번 뽀뽀해봤는데, 우린언닌 재섭자기랑 100번이나 뽀뽀해봤어. ..이연인 재섭자기 하나면 되는데, 재섭자긴 우린언니 아직도 못버렸대. 그게 이연이는 되게 많이 겁나. 이연인 여태까지 한번도 그런적 없는데, 우리 재섭자기랑 있으면 자꾸만 겁이나. ...그래서 참 많이 슬퍼." 처음이다. 정말 송곳니나고 처음이다. 진지하거나 무거운거하고는 전혀 거리가 먼 수이연이 이렇게나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건. 슬픈거나 눈물같은거 하고는 절대 거리가 먼 수이연이 이렇게나 울상을 지으며 말하는건. 우릴 죽이고 싶을정도로 미워하는 화강안을 좋아하는 연오나. 앞으로 우리가 깨부실 전국연합 소속의 최강을 좋아하는 아라나. 자기 아니면 차라리 죽겠다는 김현광을 두고서 최필립을 좋아하는 지니나.. ....... 이렇게나 대단한 재섭자길 사랑하는 이연이나. 어쩜 이렇게 특이하고 유별난 사랑만 골라 하는지. 혀를 끌끌차며 이연이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까부터 우린언니, 우린언니하는데. 천하의 수이연을 겁나게 만든 그 우린언니가 도대체 누구냐??" 내가 건네준 사진을 다시 소중한 보물 다루듯 조심스럽게 가방 속에 집어넣은 이연이가 갑자기 고개를 쳐들고는 삐죽. 입술을 씰룩인다. 그 순간.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택시가 멈추고. 번개처럼 계산을 마친 지니가 우리를 향해 무뚝뚝한 얼굴로 나오라는 한마디만 남겨놓고 쏙. 택시에서 내려버렸다. 아까 터미널에서 지니에게 호되게 당했던 이연인 군말없이 가방을 챙겨들고 택시의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덜컥. 문을 열고 먼저 오른쪽 발을 밖에 내놓은 이연이가 갑자기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경우린. 어렸을적부터 재섭자기 옆집에 살던 제화고 3학년짜리. 중1때부터 사겨서 재섭자기가 양다리걸쳐가면서도 절대 버리지 않은 여자애. ...... 재섭자기가 아직도 맘에 담고 있는 언니. 그래서 이연이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언니, 우린언니." ... 굉장히 슬픈 어투로 조용조용 중얼거리던 이연이가 살풋. 미소를 지어보이곤 폴짝. 택시에서 뛰어내렸다. 너무나 생소해 신기하기까지한 이연이의 모습이 놀라워 입까지 쩍. 벌리고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안내리냐는 기사아저씨의 불만어린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후다닥 택시에서 내렸다. 택시에 내리자마자 유명 조각가가 만들었다는 철제 장식물과 그 장식물 중앙에 새겨진 [대한건설]. 이 네글자가 나를 반겼다. 이상하게도 그 네글자가 뾰족하게 날아와 가슴에 와닿는다. "와오.. 왔네, 결국.. 이게 얼마만이냐,인천님아????" "그만 깝치고 빨랑 따라와. 우리 기다리느라 목빠지셨단다, 노땅들이." 지니는 이연이 가방까지 제 어깨에 쓱. 둘러매고 성큼성큼 하늘을 찌를듯이 솟아있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이연이가 쭐레쭐레 쫓아가고. 건물에 들어가기 전. 양 팔을 쫙. 벌리고 인천 공기를 맘껏 들이마셨다. 인천 특유의 공기가 콧구멍으로 들어와 폐를 맘껏 휘젓는다. 어차피 이공기가 저공기고, 저공기가 그공기일텐데 왜 김윤서한테 인천공기는 왜 이렇게나 특별난지 정말 모를 일이다. "아까부터 꿈지럭꿈지럭!! 너 자꾸 짜증나게 할래, 김윤서!" "간다고. 누가 안간다 그랬냐!!" 회전문을 통해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지니의 목소리에 나 역시 기차화통을 삶아먹은 목소리로 대답하며 맨들맨들 닦아놓은 유리문을 밀었다. 어른들의 아지트. 폐건물 옥상에 있는 칠공주네 아지트와는 달리 엄청 삐까뻔쩍하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어른들네 아지트. ...들어올 적마다 온 몸이 시원하게 뻥 뚫리는 칠공주네 아지트와는 달리 들어올적마다 가슴께에 큰바위를 쿵. 올려놓은 듯 묵직해지는 어른들네 아지트. .... 이번에야말로 진짜 작전개시다. 4-53. 어른들 ※대회의실 U자형 원목책상에 좌르륵. 앉아계신 어른들 7분. 그 앞에서 빳빳히 서있는 겁없는 고등학생 3명. 굳은 표정으로 문 옆에 나란히 서있는 맨인블랙 5명. ...... 대한건설 대회의실에 재미는 있지만 결코 유쾌하지 않은 공기가 흘렀다. "오랜만이야, 얘들아. 다들 부산에서 잘 지냈니?" "잘 지냈으면 쟤네 세명만 먼저 올라오지 않았지." "...얼굴들이 많이 야위었구나." 리아의 어머니라는게 믿기지 않을정도로 이연이와 닮아있는 강영희 여사님과 이연이의 어머니라는게 믿기지 않을정도로 지니를 닮아있는 오희라 여사님. 그리고 아라의 어머니라는게 딱. 믿겨지는 지여린 여사님이 차례대로 우릴보며 한마디씩 하신다. 이연인 언제나처럼 헤실헤실 웃음으로 대꾸했고, 지니는 언제나처럼 아무 표정없는 얼굴로 묵묵히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난.. 언제나처럼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닥거리고 있었다. "버릇 없는건 여전하구나, 윤서 너. 어른들 말씀 하시는데 그게 뭐하는 짓이냐." "김윤서 버릇없는게 뭐 하루이틀일인가요." 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쏴아. 찬물을 끼얹은 듯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싸늘한 얼굴로 날 바라보던 김윤서네 어머님, 아니. 어렸을적부터 지금까지 쭈욱 김한영 한새끼 어머님이셨던 추여사께서 어이가 없었는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넘기신다. ...... 다른 어른들 앞에선 안그러면서 꼭 추여사 앞에서만 말이 뾰족하게 나가는 김윤서 주둥이. 이쁜 주둥이. "윤서야, 말버릇이 그게 뭐냐. 미숙이가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데.." "김한영 걱정으로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르시는 분인데 어련하실까요." "김윤서." 이렇게 뻗댈 상황이 아니면서 자꾸 건들거리는 내가 불안했는지 은지니가 낮게 소리치며 등 뒤로 손을 잡아왔다. 내 말버릇을 운운하며 훈계를 놓으시던 이연이네 아버님, 혁이 아저씨가 한껏 거칠어진 내 눈동자를 느끼셨는지 헛기침을 하며 옆에 앉아계신 오여사님 귀에 무언가 속삭이셨다. "그나저나 우리가 왜 불렀는지는 다들 알고있지??" "그거요. 지니가 알고 있는데요.!!! 지니가 막 머리에 뿔나가지구요, 그래서 못들었어요!!..." 효선이네 어머니, 홍영숙 여사님의 물음에 이연이가 손을 번쩍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상외의 대답이였는지 오히려 말을 건네신 홍여사님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우릴 바라본다. 철없는 이연이의 행동에 얕게 한숨을 내쉰 지니가 쿡. 이연이의 옆구리를 찌르고.이연이가 아차싶은 표정으로 귀엽게 혓바닥을 내민다. "지니가 얘길 안해줬다면 내가 해줘야겠구나. 흠. 우리가 너흴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자중하면서 지내라고 분명히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너희들 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특히 너희 셋이 벌여놓은 일들은 더이상 모른 척 눈감아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니더구나." 부드러운 표정과 달리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의 지니네 아버님, 강한이 아저씨가 우리들을. 특히 지니를 쏘아보며 말씀하셨다. 아저씨의 송곳같은 시선에 지니는 치솟는 짜증을 억누르려는 듯,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그때, 파지직. 소리를 내며 점점 갈라지려는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냉수를 한모금 들이키신 홍여사님이 손을 들어 강한이 아저씨의 시선을 막았다. "너희들을 억지로 떼놓으려는 마음은 없다만, 너희가 계속 부산에서처럼 행동한다면 서로 얼굴 붉힐일만 있지 않겠니? 그래서 특별히 너흴 먼저 부른거니까 오해는 말아라." "응응. 그러니까 너희는 우리가 안심하고 너흴 다시 부산에 내려보낼 수 있도록 그동안 어떻게 지내왔는지, 또 앞으론 어떻게 할건지 보여주기만 하면 된단다." "그,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욘 없어, 얘들아. 그냥 몇주만 지켜보고 다시 부산으로 돌려보낼테니.." 홍여사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여사님과 지여사님이 수다스럽게 꼬리를 달았다. ..... 그 뒤로 한 2시간 23분쯤동안 강여사님의 잔소리 행진이 이어졌고. 끝도없이 밀려오는 졸음을 차마 이기지 못한 눈꺼풀이 껌벅껌벅 감길때쯤되서야 강여사님이 커다란 폭탄선언과 함께 기나긴 잔소리 행진에 종지부를 찍으셨다. "...-렇게 됐으니 앞으로 지니는 남구에 있는 인천공고로 가면 되고, 이연이는 연수구에 있는 연수여고. 그리고 윤서 너는.. 내일부터 부평구쪽에 있는 황제공고로 가면 되겠구나." 강여사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연이가 새된 목소리로 까악. 비명을 질렀다. "으악. 아줌마, 싫어요.!!! 이연인 여중, 여고같은데 근처에도 가본적 없담말예요!!! 그냥 옛날에 다니던 인천고 다니면 안되요?? 진짜로 조용히 사께요. 예에?" "수이연 조용히 못해??" "엄마!! 엄마두 알잖아. 이연이는 인천고가 좋단말야. 으응??" 있는 애교, 없는 애교 다 떨며 이연이가 오여사님께 두 손을 싹싹 빌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여사님은 얼음장보다 더 서늘한 얼굴로 이연이의 애원을 싹. 무시해버릴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산부인과에서 바뀐게 틀림없어. 지니처럼 눈빛 하나로 사람을 얼려버리는 오여사님 밑에서 한귀염 하는 수이연이 나올리가 없지. 울상을 지으며 칭얼거리기 시작한 이연이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있던 학교는 안돼, 이연아. 너희가 얼마나 모범적으로 변했는지 알아보려고 하는건데.. 옛말에 사람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옛날 친구들하고 지내다보면 너네가 원치 않아도 싸움에 휘말리게 될지도 몰라." "그래, 이건 여린이 말이 맞다." 지여사님이 걱정스런 어투로 조근조근. 우리를 타이르자 이때다 싶었는지 혁이 아저씨가 거들고 나섰다. 하지만 그래도 여고에 가는게 영 내키지 않았는지 이연이는심통궂게 입술을 비죽이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비웃듯이 왼쪽 입꼬리를 살짝 비트신 오여사님이 말했다. "너희가 우리말대로 착.실.히 모범생처럼 굴면 예전 학교로 보내줄껀데 뭐가 걱정이니??" "우리 엄만 심술쟁이." "흠흠. 가족 싸움은 다들 집에 가서 하고.. 서로 바쁠텐데 빨리 끝내야지. 학교건은 됐고, 참. 부산에서 붙여줬던 경호원들을 다들 마음에 안들어하는 거 같아서 새로 바꿨는데. 인사를 해야겠지? 이번엔 부산에서처럼 느슨한 분들이 아니니, 제대로 행동해야 될거다 아마." 이건 또 무슨 소리????.. 미리 효선이에게 귀뜸을 받았던 지니조차 생소한 말이였는지 지니의 표정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그러거나말거나 강여사님은 눈짓으로 우리 뒤에 서있던 맨인블랙(☜새까만 양복을 착용하고 있음)들을 앞으로 불러냈다. 탁탁. ...무슨 군인도 아니고. 절도있게 우리의 옆에 다가서는 맨인블랙1,2,3,4,5. "안녕하십니까. 강현도입니다." "현강조입니다." "구지나입니다." "황현집입니다." "정지혁입니다." 워메, 딱딱한거. 내 앞에 서있는 맨인블랙들의 경직되있는 어깨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차라리 부산에 있는 맨인블랙은 놀리는 맛이라도 있지.. 이 분들은 뭐, 드릴로 뚫어도 피 한방울 안나게 생겼네.. 입맛을 다시며 눈썹을 긁적이는데 갑자기 우리쪽을 향해 몸을 훽. 트는 맨인블랙들. "윤서는 요주의 인물이니까 현도씨랑 강조씨. 그리고 지혁씨가 맡아주세요. 지니는 현집씨가 맡아주시고, 이연이는 지나씨가 맡으시면 되겠네요." "세명이나 필요 없는데, 저는...요?..." "세명이나가 아니고 세명밖에겠지. 잔말말고 영희 말대로 해라. 얘기는 대충 끝난거 같은데 난 먼저 일어나마." 추여사는 내 쪽을 보지도 않은채, 무슨 씹던 껌을 버리는것처럼 말을 휙.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말리려는 강여사님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또각또각. 걸어나오던 추여사가 날 스쳐가기 전에 잠깐 걸음을 멈춘다. ......추여사 특유의 맵고 눈물 나는 향기가 코끝을 찌른다. "...한영이." 그럼 그렇죠. 아들사랑 끔찍하신 추여사가 왜 안물어보나 했어요. 피식. 입가에 퍽퍽한 미소가 걸린다. "네가 잘 좀 보살펴라. 그래도 나보단 네가 더 편할테니." "아니요. 아니죠. 김한영을 보살펴야 될 사람도, 김한영이 더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김윤서가 아니라 추여사잖어요. 안그래요?? 바쁘시다고 이렇게 책임전가 하심 저 섭섭합니다. 이따만한 가위로 인연 뚝. 끊어먹은지가 언젠데―" 처얼썩. 추여사의 매콤한 손이 허공을 휘두르고. 엄청난 마찰음과 함께 김윤서의 고개가 돌아갔다. 후끈후끈. 뜨거운 열기와 함께 붉은빛이 뺨 위로 올라온다. "너 그게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어디서 배우긴요. 다 추여사한테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죠. 그리구요, 화내시면요 마빡에 주름생겨요. 주름 생기면 가뜩이나 미안한 추여사 얼굴 더 미안해지는데.. 거기서 더 미안해지면 살기 힘들어지지 않겠어요???.." "윤서, 너!!!" "그만해, 김윤서!!" 지니의 가느다란 팔이 허리를 감싸오자 나는 말을 멈추고 빙그레 웃으며 화가 난 듯, 씩씩거리는 추여사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무언가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을 벙긋거리던 추여사는 결국 내 뺨을 한대 더 후려갈기는 걸로 대신하고 쾅.대회의실을 나가버렸다. 그 뒤로 당황한 지여사님과 오여사님이 따라나가고.. 얼얼한 뺨을 쓰다듬으며 몸을 돌리자 눈물기가 가득한 눈빛들로 날 보는 어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 하루이틀도 아닌데 뭘 새삼스럽게. 어른들을 향해 천연덕스럽게 웃어보인 나는 아직도 허리에 감겨져있는 지니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냈다. 그리고 놀란 얼굴로 날 보고 있는 맨인블랙. 그 중에서도 김윤서담당이 된 불쌍하고도 운좋은 세 명의 맨인블랙을 향해 말했다. "안녕하세요, 현뭐시기씨. 강거시기씨 그리고. 정고기시씨. 저는 김윤서입니다. 보시다시피 과자 부스러기만큼도 안되는 김씨집안 사람이구요, 싸움질하난 끝내주게 잘합니다. 솔직히 맞짱떠서 져본적 여태까지 한번도 없구요, 김한영 조지고 하늘 잡는게 지금 최고 꿈입니다. 칠공주 빼면 남는거 하나없는 빈털털이지만요, 똥오줌 못가리고 빌빌대는 병신은 아닙니다. 어른들이 보시기엔 쓰레기보다 못한 문제아지만, 나름대로 꿈이 있고 생각있는 사람이구요. 싸움질만 한다고 어른들이 우습게 보시는거와 달리 할 주 아는 거 꽤 많습니다. ....죽지못해 사는 인생이지만, 멋도모르는 남들한테 개무시당할 만큼 가벼운 인생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나서 반갑다는 말이였습니다. 오키?" 4-54. 새로운 맨인블랙 ※30분후 워낙 한 일들 하시는 분들이라 오래 자리를 비우기 어려웠는지 어른들이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서시고... 미처 말해주지 못한 사항들은 담당 맨인블랙들이 알려줄 거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으로 홍여사님이 대회의실을 나가신지 30분이 흘렀다. 학교 얘기가 마음에 걸렸는지 바나나사탕을 아그작. 깨물어먹던 이연이가 아무래도 안되겠다며 자기 담당 맨인블랙을 데리고 휙. 대회의실을 나가버리자, 지니 역시 조금있다 보자는 말을 남긴채 이연이의 뒤를 따라 나갔다. ...... 그리하여 넓디넓은 대회의실엔 멋대가리없기로는 세계 최고인 세명의 맨인블랙과 김윤서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는데... "후아.. 나는 아까 소개 했는데. 뭐 맞소개 같은 건 없어요??" "아. 강현도라고 합니다. 나이는 올해 서른둘이고, 지금은 대한경호업체 S팀 경호실장을 맡고 있습니다." "저도 해야됩니까??.. 흠흠. 저는 현강조입니다. 나이는 올해 스물여덟이구요, 강실장님 밑에서 일을 배우는 중입니다." 제일 키가 큰 현도아저씨와 하얀 얼굴이 꽤나 순진해보이는 강조아저씨가 당황한 목소리로 떠듬떠듬 자기 소개를 했다. 당황한 말소리마저 어쩜 그렇게 딱딱한지.. 뾰족한 모서리마저 느껴지는 아저씨들의 소개에 배꼽을 잡고 데구르르 구르자 놀란 표정의 두 아저씨가내 팔을 잡았다. "옷 더러워지십니다." "히히. 아저씨들 최고네, 최고. 아주 최고 웃겨줘. 크크크키키하하.." 아저씨들의 도움을 거절하고 으쌰. 허리를 튕겨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기깔나게 웃으면서 터벅터벅. 창가로 다가갔다. 하늘색 블라인드를 살짝 걷어내고, 아래 풍경을 바라보는데... 갑자기 어깨 위로 묵직한 손이 얹혀진다. 고개를 돌리자 다섯명의 맨인블랙 중에서 제일 무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면서도 가장.. 거지같은 눈빛으로 김윤서를 바라보던 정고기씨가 나를 내려다 보고있었다. "얘기 아직 안끝났습니다. 아까도 느꼈지만, 윗사람이 말할 때 딴짓하는건 좋은 행동이 아닙니다." "나한테 윗사람이란건 없는데요. 김윤서보다 위에 있는 거라곤 꼴랑 저 하늘 한개가 단데.." 찡긋. 딱딱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하는 정고기씨(☜이름따윈 기억나지 않음)를 향해 윙크를 날린 나는 다시 창문 아래의 풍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꾸왁. 아까보다 더 강한 힘으로 내 어깨를 짓누르는 정고기씨. "아고야.. 어깨뼈 빠지겠네.." "공손히 말하는 버릇부터 들이셔야겠습니다." "김윤서한테 이정도는 충분히 공손하고도 남는건데.. 지금 공손히라는 건 이쪽보단 그쪽한테 더 어울릴 것 같슴다???.." "그리고 제 이름은 정고기씨가 아니라 정지혁입니다. 제가 아가씨보고 김뭐시기씨라고 하면 기분 좋습니까??" "예, 기분 아주 째지게 좋은데요??..그러니까 왠만하면 그만 깔짝대세요, 정지혁씨. 김윤서 주먹 날아가기 전에.." 어깨 위에 얹혀있던 정지혁씨의 굳은 손을 떨궈내자마자 콰직. 코 앞에 있는 유리창을 향해 주먹을 내질렀다. 쩌저적. 꽝꽝 얼린 얼음이 깨지듯 주먹 주위로 얇은 금들이 퍼져나가고, 그 아래로 바삭하게 으깨진 유리가루들이 떨어져내렸다. 주먹질 한방에 옴팡지게 구겨진 블라인드를 검지손가락으로 살짝 펴며 실쭉 웃었다. "잘생긴 얼굴에 금가면 안되잖슴까??" "...잘난 주먹하나 믿고 사신분인데 소중히 다루셔야죠. 이런일로 까딱 잘못했다가 주먹 깨지면 아가씨만 손해 아닙니까?" 잉??? 생각지도 못했던 정리아스러운 대꾸에 용가리치킨마냥 입을 쩍 벌리고 고개를 훽. 돌렸다. 하지만 정작 날 당황시킨 장본인인 정지혁씨는 전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유리창에 꽂힌 내 주먹을 감싸쥐며 주머니를 뒤적이고 있었다. 곧 주머니에서 새것티가 후끈후끈 나는 후시딘을 꺼낸 정지혁씨는 꽉 쥐여진 내 주먹을 펴고 살살 후시딘을 바르기 시작했다. "주먹 좀 쓴다고 까부시다간 언제 한번 큰코 다치시는 날이 올겁니다." "그 좀 쓴다는 주먹으로 먹고 사시는 분한테 그런 소리.. 별로 듣고싶지 않은데요??" "...어른이 하는 말, 흘려듣지 말고 새겨들으십시오." "아까도 말했죠?? 나한테 어른같은거 하늘밖에 없다고." 타악. 정지혁씨에게서 손을 빼낸 나는 도전적인 눈빛으로 말귀하나 끝나주게 못알아먹는 이 남자를 노려봤다. 정지혁씨와 나 사이에 흐르는 위태로운 분위기가 불안 했는지 멀찌감치 떨어져있던 현도아저씨와 강조아저씨가 조심스럽게 우리 주위로 다가온다. "지혁아 그만해라. 그리고 아가씨도―" "잡히지도 않는 뜬구름같은 하늘따위가 왜 그렇게 소중한지 이해할 수 없군요." "..하늘따위????" 헐.. 난생처음 들어보는 소리에 삐딱한 웃음만 터져나온다. 목뼈에서 우드득. 소리가 들려올정도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꺾으며 정지혁씨를 향해 말했다. "진짜 아까부터 말귀 욘나 못알아처먹네요, 아저씨??.. 김윤서 소개할때 분명히 그랬죠. 멋도모르는 남들한테 개무시당할만큼 가벼운 인생은 아니라구요. 인생 최고 목표를 그따위로 개무시당할 인상 아니라구.. 그렇게 말했잖어, 아까 분명히.. 이 개새끼야....." 퍽. 천장 구석쯤에 달린 감시카메라로 보고계실게 뻔한데.. 이번일로 날 재평가 하실분들이란거 뻔한데.. 그런데도 주먹이 튀어나갔다. 머리속에서 안된다고 수없이 외쳤는데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주먹이 튀어 나가버렸다. 방금 전, 정지혁씨가 발라놓은 후시딘이 채 마르지도 않은 주먹이 용수철처럼 퉁. 튕겨져나갔다. 정지혁씨의 잘생긴 얼굴이 휙 돌아가고. 날 말리기위해 손을 뻗던 현도아저씨의 턱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현도 아저씨의 턱을 가볍게 후려친 다리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난후 처음으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있는 정지혁씨를 보며 씩. 웃었다. "모범적으로 깨끗하게 살아볼려는 인생에 왜 자꾸 피클 걸고 그러세요, 예??.. 김윤서한테 인내심이라는건 개미핥기 코딱지만큼도 없어서 그 개미핥기 코딱지만한 인내심 바닥나면 볼짱 다 보는건데 말이예요.." 감시카메라를 의식하며 낮게 속삭인 나는 바닥을 차고 가볍게 공중으로 튀어올라 몸을 돌렸다. 휘익. 몸이 반쯤 돌아가자 난 오른쪽 발에 힘을 줘 힘차게 돌렸다. 비어있는 정지혁씨 옆구리를 쿡. 동그란 내 발뒤꿈치가 찌르고 내가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정지혁씨가 신음 소리를 터트리더니 곧 옆구리를 부여잡고 털썩. 한쪽 무릎을 꿇었다. "..김윤서가 정리아하고 최효선한테 머리카락 뽑힐 정도로 교육을 받어놓을걸 고맙게 생각하세요. 안그랬음... 갈비뼈 아작났을테니깐." 모 샴푸CF에서 나온 여자처럼 머리를 찰랑거리며 널찍한 문을 향해 걸어갔다.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놀라 잡을생각도 못하고 멍하니 내 뒷모습만 바라보던 아저씨들이 퍼뜩 정신을차리고 달려올 태세를 취할때. 살짝 열린 문 틈 사이로 오른쪽 발을 먼저 집어넣은 내가 고개를 돌려 빙긋 웃었다. "쫓아오진 마세요. 첫날인데 쉬엄쉬엄 가자구요." 4-55. 돌아온 일당백 살결을 간지르는 바람을 맞으며 오랜만에 인천 시낼 거닐고 있는데.. 커다란 분수대 근처에 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있는게 눈에 띄였다. 움찔. 본능적으로 새끼 발가락이 움찔거리고.. 어쩔수없이 지나칠정도로 본능에 충실했던 나는 최대한 얼굴을 가리며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시끄럽게 놀지 말라고 했을텐데, 구이겸?" "기고만장 하지마라, 금잔디. 지금 애들이 좋아서 널 따르는거라고 생각하고 있진 않겠지?? 넌 그저 김한영 후광을 엎고있는 꼭두각시에 불과 하잖아??" "하지마. 말 함부로.." 어라???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파고들어 어느새 가장 깊숙한 곳까지 오게된 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있는. 유난히 낯이 익은 세사람을 보고야 말았다. 한창 싸우던 중이였는지 구이겸의 교복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정지운의 얼굴엔 이곳저곳 긁힌 상처가.. 그리고 그 대단한 인천짱 금잔디의 주먹엔 시뻘건 피가 뚝뚝 흐르고 있었다. "...구이겸. 니가 한영이 오빠한테 버림받았다고 우리한테 이렇게 화풀이하면 안되지. 안그래??" "하. 버림? 아무것도 모르면서 함부로 지껄이지 말지그래, 금잔디?" "한영오빠가 너 버리고 서울로 간 것도 모자라서 인천짱 자리 나한테 맡겼다고 지금 화풀이 하는거잖아, 너. 내말 틀렸어?" 피가 흐르고 있는 주먹을 대충 바지에 쓱쓱. 닦아내며 금잔디가 높낮이 없는 어조로 덤덤하게 말했다. 그런 금잔디를 굳은 얼굴로 노려보는 구이겸. ....흥미진진한데, 이거?? 난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눈을 반짝이며 세 사람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러다 걸리면 당장 손목에 수갑차고 방구석에 처박혀야 되겠지만.. 그것보다 나는 김윤서의 어금니를 박살낸 인천짱과 김한영을 한번 이겼던 정지운의 싸움이 더 재미나니깐.. 침을 꼴딱 삼키자 구이겸의 주먹이 빠른 속도로 금잔디의 안면을 향해 날아갔다. "귓구멍 열고 잘들어. 난 한영오빠 빽으로 인천짱 된거 아냐. 정정당당하게 내 실력으로 여기까지 올라온거라고, 씨발놈아." 가볍게 고개를 비틀어 구이겸의 주먹을 피한 금잔디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한다. 그리고... 뻐걱. 언제 올라왔냐싶을정도로 빠르게 올라온 금잔디의 새빨간 주먹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내며 구이겸의 턱을 올려쳤다. 주먹 하나로 짱까지 먹었다던 금잔디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구이겸의 갈색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흔들리더니 곧 한쪽 무릎이 힘없이 꺾이며 녀석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원터치 한방. 그렇게 당해놓고 또 당하는거 보니까 구이겸 대가리도 어지간한 돌대가리야. 그치?" "크.. 금잔디 너어..." 정신을 차리기 위해 이를 악물며 구이겸이 바닥을 짚고 주춤주춤 일어선다. 금잔디는 가볍게 구이겸의 어깨를 밀쳐 녀석을 다시 바닥에 주저앉히고, 한쪽 어깨를 주무르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좋다 이거야. 나한테 화풀이 하는 것도 다 좋은데.. 왜 정지운한테까지 불똥튀게 하고 지랄이야??" 금잔디의 눈빛이 늑대처럼 사납게 번쩍였다. 낌새를 눈치챈 구이겸이 서둘러 금잔디를 피하려 몸을 틀었지만, 그보다 금잔디의 주먹이 더 빨랐다. 뿌각. 금잔디의 주먹이 구이겸의 정수리에 정통으로 들어가고.. 잠시 비틀거리던 구이겸이 푹. 앞으로 고꾸라 졌다. 라스트로 볼썽사납게 대자로 뻗은 구이겸의 등짝을 발로 꾹꾹 지져밟은 금잔디가 탁탁. 교복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며 정지운에게 걸어갔다. "잘생긴것도 죄다, 지운아." "...안그래도 됐었는데 왜 그랬어." "너 괴롭히는 새끼들은 내가 다 조진다고 했었잖아. 이제 구이겸도 너한테 더 안깔짝거릴꺼다." 헉... 아까부터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아까까지만해도 살벌한 표정으로 구이겸을 짓밟던 금잔디가. 새빨간 피를 옵션으로 달고있는 주먹을 휘두르던 그 금잔디가!!!.. 해맑게 웃으며 정지운의 손을 잡다니... 럴쑤럴쑤이럴쑤!!!!!... "씨발들아, 뭘봐!!! 눈 깔어." 금잔디의 따까리정도 되보이는 떡대 두명이 등장해서 몰려있던 사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휘휘. 떡대들의 팔이 허공을 휘저을때마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힘없이 물러났고.. 노란색 브릿지가 참말로 안 어울리는 떡대 한명이 막 나를 향해 손을 휘저으려할때. 바닥을 짚고 퉁. 자리에서 일어났다. "잉???" 자리에서 일어선 나를 보는 떡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금잔디의 웃는 모습을 보고 놀랐던 사람들처럼 입을 쩍 벌린 떡대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바보처럼 어버버거린다.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빙그레 웃자 뒤로 꽈당. 넘어진 떡대가 거의 기다시피해서 금잔디에게 달려가 뭐라고 속삭이기 시작했다. 금잔디의 눈동자가 내게로 와닿고.. 더불어 정지운의 놀란 얼굴도 날 향해 돌려졌다. "이, 이인천 칠공주입니다 선배!! 칠공주 이이일당백 기, 김윤서요. 김윤서!! 그 김윤서가 지금 인천에 떴다구요!!!" 떡대의 우렁찬 고함소리가 울려퍼지자 떡대들에게 밀려 자리를 뜨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되돌아왔다. 씨봉... 똥됐다..... "김윤서?? 1년전에 뉴스에서 떠들어대던 걔아냐???" "어머. 정말이야!! 왠일이니. 그 일있고 얼마안있어서 어디 멀리갔다더니.. 다시 인천으로 온거야?" "근데 왜 혼자지?? 다른 여섯명은??" "야 저 살벌한 눈빛 좀 봐." "이제 좀 조용하다싶더니.. 다시 피바람이 불겠구만." 예전부터 뛰어나게 발달된 오감덕에 사람들의 작은 수근거림이 귓바퀴를 따라 속속 들려왔다. 이왕 이렇게 된거 뻑쩍지근하게 놀아주고 싶지만... 대회의실에서 나댄것도 있으니 나는 어색하게 얼굴을 가리며 고개를 숙였다. "각오 단단히 하고 왔냐???" "각오는 가볍게 찍고, 지금은 한 각십쯤까지 왔을껄 아마??"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거야, 아님 못하는척 하는거야??" "글쎄. 둘다 아닌거 같은데." 또다시 몰려드는 사람들을 보며 가려워지는 귓구멍을 살살 긁으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금잔디의 표정은 잘 모르겠지만, 피부에 와닿는 분위기로썬.... 아마 살인날 분위긴데. "싸우고 싶은 마음은 안직 없으니까 나중에 정식으로 붙자. 계획서에도 보면 너랑 붙을려면 거쳐야 될 단계가 한개 있으니깐.. 그나저나 어디서 타는 냄새 안나??" 살짝 고개를 들어올리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금잔디와 정지운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리 튈 준비를 하고 한두걸음씩 물러서던 나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리고 씩 웃었다. "너희 둘말야. 아주 미치게뜨거워서, 활활 타구 있잖어!!!!" 곧이어 어울리지 않게 금잔디의 얼굴이 불타는 옥수수처럼 불타오르고. 정지운마저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휘적휘적. 크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잽싸게 몸을 돌려 뛰었다. 체육대회나 운동회때면 항상 1등을 놓치지 않던 백만불짜리 김윤서 다리덕에 다행히 나는 포돌이 아저씨가 뜨기 전에 자리를 빠져나올 수 있었고.... 정신없이 뛰고나서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아지트 앞까지 와있었다. "결국 김윤서가 올데가 여기밖에 없지, 뭐.. 하오.. 오랜만에 뛰었더니 아주 심장이 벌렁벌렁 하네." 숨을 몰아쉬며 아지트의 옥상문을 열었다. 얼굴을 적시고 있던 뜨거운 땀방울들을 향해 시원하다 못해 차갑기까지한 바람이 날아들고.. 가슴을 쫙. 펴고 온 몸으로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병신. 야동이라도 보고 왔냐?? 무슨 땀을 그렇게 흘려." 4-56. 감동 "키커콜라 원샷이라도했냐?? 톡톡 쏴대기는.. 지가 무슨 이산화탄손줄 알어." "웃기지도 않는 개그는 그만 하고. 맨인블랙들은 어쨌냐???" "그러는 니 맨인블랙은??" 언제 와있었는지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샌드백을 두드리고 있던 지니가 내 물음에 피식 웃으며 샌드백 두드리기를 멈추고 바닥에 놓여져 있던 생수통을 통째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저거는 아주 남자로 태어났으면 장군감이였어, 특장군감. 모 맥주CF에서 나오는 남자 연예인처럼 멋지게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킨 은지니는 입가에 흐르는 물방울들을 쓰윽. 훔쳐내고는 내게 빈생수통을 던졌다. "내가 너처럼 멍청한줄 아냐?? 진작에 따돌렸다." "불쌍하게 하나밖에 없는 맨인블랙을 따돌리고 그러냐. 나는 셋이나 있어서 괜찮지만.." "병신." 은지니는 깔끔하게 내게 중지손가락을 내밀며 놀기를 좋아하는 수이연이 특별제작한 흔들그네에 털썩 앉았다. 기우뚱.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서도 용케 중심을 잡은 은지니가 화투패 색깔처럼 진한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입을 연다. "후. 좋냐??" "앞뒤말 다 짜르고 그렇게 물어먹으면 내가 아냐???" 장난스럽게 대꾸하며 터벅터벅. 걸어가 김윤서 지정좌석. 그 이름도 찬란한 아슬아슬 위태로운 난간 위에 걸터앉았다. 옛날부터 이렇게 발 밑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좋았다. 비어있는 김윤서 마음을 꽉 채워주는 무서울만큼 차가운 이 바람이 좋았다. 살짝만 흐트려도 벌떼처럼 달려드는 이 바람이 좋았다. ........ 죽게만 해줄 거 같아서. 김윤서 인생 한방에 보내줄 거 같아서. 애들한테 미안하게도 이 바람이 좋았다, 나는. "...사실 좋다, 여기가. 부산에 있는 아지트보다 사실은 여기가 훠배 좋다. ...김윤서 살게 해줬던 인천하늘 짱박혀있는 여기가 존나게 좋다." "...병신. 하늘때문에 사는 년은 우주 통틀어서 너밖에 없을꺼다." "그러는 지는 싸울라고 사는주제에..." "그거랑 이거랑 똑같냐?? 하여간 멍청해요. 그리고 하늘이 그렇게 좋은거면 니가 못죽여서 안달난 김한영도 좋아야되는거 아니냐??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너 김한영 죽일라고 버티고 있는거잖어." "그런가??... 김한영... 똥이됐던 된장이됐던 결국엔 김윤서 버티게 하는건 그거니까.. 좋은건가..." 실없는 웃음이 픽 터져나왔다. 김윤서 살게 해주는 하늘이 좋으면, 김윤서 악착같이 버티게 해주는 김한영도 좋다라... 아이러니한 일이네. "..근데 틀리잖아, 붕신아. 김한영은 깨부셔버리고 싶은데, 하늘은 갖고 싶은거고. 김한영은 이기고 싶은데, 하늘은 같이 놀고 싶은거고. ....김한영은 김윤서 심장을 이따만큼 무너트린거지만, 하늘은 무너진 김윤서 심장을 그나마 일으켜준거고..." .... 옛날에 수이연이 김윤서 웃는게 마음에 안든다고 말했었다. 눈에서 흘러야될 눈물을 꼭꼭 감춰둔게 바로 김윤서 웃음이여서. 그래서 마음에 안든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나는 김윤서가 웃는게 좋다. 꼴사납게 질질 우는것보단 감질나게 웃는게 훠배 멋지니깐. 심장까지 눈물나게 만드는 눈물보단 아주 쬐금이라도 심장까지 즐겁게 해주는 웃는게 훠배.. 나으니깐. "무엇보다 김한영은 이미 버린 새끼지만, 하늘은 아직 안버린거잖냐.." "....버려지면 어쩌려구 그래?? 김윤서가 이렇게 애지중지하는 하늘, 김한영 이기고 나면 버려질꺼 분명한데. 그 때되면. 김윤서 살게해주는 하늘 버리고나면 어쩔려고 이러는건데..." 한 쪽다리까지 그네 위에 올린 지니가 조금 사납게 물어왔다. 나보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금방이라도 넘어질듯 위태로워보이는 지니를 보다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은 나는 난간 위에 벌러덩 누웠다. 아직 거기까진 생각 안해봤는데... "...아. 하나 더 있어. 김한영하고 하늘 말고 김윤서 살게 해주는거." "...." "김윤서 세상. 싸가지 없고, 예쁘긴 예쁜데 성격은 더럽고, 애교는 많지만, 그만큼 잔소리도 많고. 무섭기는 세계 최곤데, 착하기도 세계 최고인 세상. 그거가 있을꺼니까 괜찮겠지 뭐." 새하얀 하늘 위로 떠오르는 얼굴들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먼저 터져나왔다. 이번 대답은 조금 마음에 들었는지 지니는 대답대신 작은 웃음소릴 냈다. 척추를 따라 온몸에 퍼지는 아늑한 느낌. 으메, 좋은거.. "아. 내일부터 작전 2단계 들어가야지. 1단계는 대충 끝내놨으니깐.." "뭐라고 쫑알대??" "아맞다. 쫄다구한테 문자보내줘야지." 퍼뜩 떠오른 선우권 생각에 즐거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플립을 열고 꾹꾹 문자를 찍어서.. 슝. 긴급배달. [작적1단계 성공. 내일부터 작전2단계 돌입. 몸은 괜찮나 쫄따구??] 삐비빅. 문자 보내기가 무섭게 날아오는 답문자. [뭔놈의작전을하루만에끝내몸은괜찮다대장님지금뭐해] "띄어쓰기 좀 하지.. 눈뻑뻑해지게 왜 이렇게 붙여써. 알아보기도 힘드네." 액정에 뜬 다닥다닥. 붙어있는 문자를 겨우 읽어낸 나는 답문자를 보내기 위해 문자창을 열었다. [지금..] 까지 썼는데 갑자기 날아오는 문자. [답문자가왜이렇게늦어뭐하냐니까지금남자만나지] 씨봉.. 이새끼는 손가락에 모터라도 달았나, 왜 이렇게 스피드야... 다시 답문자를 보내기 위해 문자창을 여는데 또다시 문자가 무서운 속도로 날아왔다. [바람피지대장님너?진짜이러기냐나내일인천간다] "...혼자서도 잘놀지, 아주 잘 놀아." 혀를 끌끌차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는 선우권을 말리기 위해 또다시 문자창을 여는데.. 이 씨봉놈의 새끼의 스피드 문자가 또 날아온다. [진짜냐구대장님대장님나강해질라면얼마안남았다 진짜바람피지마나열받는꼴보고싶어] .....도저히 못참겠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선우권의 번호를 누르고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대장님, 너-] ["뒤질래 너? 문자 보낼려고 하는데 왜자꾸 보내!!"] [문자.. 보내는 중이였어??] ["그래!! 근데 니가 자꾸 문자 보내서 결국 한글자도 못썼잖어, 붕신아."] [미안. 나는 또 대장님이 바람 피는 줄 알고...] ["바람같은 거 내 취미 아니라고 말했지. 넌 대장님 말을 그렇게 못알아먹냐??"] [답장이 없길래 그랬지. 미안하다니깐. 그래도 대장님 목소리 들으니까 기분은 좋네] 언제 그랬냐는듯 실실 쪼개는 선우권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화내고 싶던 마음이 싹 가신다. 퓌휴. 한숨을 내쉬며 다시 난간 위에 누웠다. 하늘 위로 선우권의 얼굴이 몽실몽실 떠오른다. 한가람이라고 착각했던 싸가지없던 얼굴. 명찰을 쥐어주면서 소리치던 얼굴. 삐뚤삐뚤 이상하게 오려진 종이를 내밀던 얼굴. ..... 슬프게 웃던 예쁜 얼굴. [...―듣고 있어???] ["참 많이 닮았어, 너."] [누구? 아, 내가 톰 크루즈 좀 닮았단 소릴 들어.] ["...하늘. 붕신아, 너 하늘 닮았다고."] [하늘?? 그건 또 누구야?? 남자지?!!!..] 또 삽질 선우권에게서 하루빨리 저 놈의 삽을 뺏어놔야 될텐데.. ["하늘!! 붕신아,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저 푸르딩딩한 하늘 닮았다고, 하늘. .....칭찬을 해줘도 모르지. 됐다, 통화비 나간다. 끊을-"] [마누라는!! 마누라는...전지현 닮았어!! 아니, 김희선. 김희선 닮았다!!! 아니, 그걸로도 모잘라. 마누라는.. 마누라는― (존나 닭살이다, 선우권? 우우~)] 선우권의 다급한 고함소리에 주위에 있던 선우권 친구들이 뭐라고 야유를 던지기 시작했다. 시끌시끌. 시장 한복판에 와있는 것처럼 여러사람의 굵직굵직한 목소리가 짬뽕이 되서 들려오고.. 윽. 귀를 틀어막으며 핸드폰을 멀찌감히 떨어트렸다. ["됐고!! 전국연합에 대해서 뭐 중요한 정보같은 거 알아냈음 나중에 또 연락해라. 그럼 끊는다! 안뇽"] 스피커에 대고 따다닥.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 뒤 탁. 플립을 닫았다. 곧이어 무섭게 울려대는 핸드폰. 액정에 뜬 [쫄따구]. 난 주저없이 배터리를 분리해 바닥에 던졌다. 따끔따금. 옆얼굴을 콕콕 찌르는 시선. 고개를 돌리자 아까부터 혼자서 무슨 생쇼를 하냐며 나를 요상하게 쳐다보던 지니가 선우권이 마지막에 소리쳤던걸 용케 들었는지 피식 웃고 있었다. 씨봉... 아까부터 되는게 없네.... "왜 웃고 지랄이야." "전지현?? 김희선? 얼씨구. 주연오가 들으면 기겁하겠네 아주." "씨봉. 내가 그랬냐?" "아무리 그래도 전지현, 김희선은 오바였다. 걔네가 들으면 넌 벌써 뒤져서 한강에 떠다니고 있을껄??" 묘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은지니의 빈정거림. 난간에서 턱. 내려온 나는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젠 아예 그네에 누워버린 은지니를 향해 걸어갔다. 틱. 작게 흔들리고 있는 그네를 발로차 은지니를 바닥에 떨어트리고 드라큘라처럼 카악. 뾰족한 송곳니를 보이기 위해 입을 쩍 벌렸다. "...씨발. 지금 나 쳤어?" "그래, 쳤다 어쩔래." "뒤졌어, 김윤서." 바닥에 누운 자세 그대로 은지니가 다리를 휘둘렀다. 피용. 은지니의 다리가 내 종아리에 닿기전에 풀쩍 뛰어오른 나는 팔꿈치를 들어올려 은지니의 목을 향해 떨어졌다. 잽싸게 몸을 굴려 옆으로 피한 은지니때문에 딱딱한 시멘트 바닥과 정통으로 부딫친 팔꿈치가 시큰거린다. "허구언날 쌈박질 하고 다니더니.. 레벨업이라도 했나보지???" "병신. 옛날부터 넌 나한테 안됐어." "지랄깐다, 또. 안되는건 너였어 붕아." 뒤로 손을 짚어 붕. 다리를 띄운 은지니의 발이 복부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쿠야.. 피하긴 했지만 완벽하진 못했나보다. 욱신거리는 배를 움켜쥐고 뒤로 물러서자 은지니가 벼락같이 달려들었다. 씨봉... 넌 진따 뒤졌어, 은지니. "이놈새끼!!!..." 앞구르기를 하기 전 자세처럼 허리를 숙여 바닥을 짚은 나는 마치 투우사에게 달려드는 한 마리의 황소처럼 뒷발을 들어올려 은지니의 턱을 후려쳤다. 틈을 주지않기 위해서 은지니의 턱을 후려차자마자 물구나무서기자세를 고정시킨 다음 다리를 쩍 휘둘렀다. 김윤서표 발차기 6연타를 맞고 떨어져나가는 은지니. 만족스러운 웃음을 띄우며 흙투성이가 된 손바닥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1년전 기술에도 당하는 년이 무슨.. 가서 샌드백이나 진창 두드리시지???" "깝족대지마, 병신아." 벌게진 턱을 쓱. 문지른 은지니가 눈을 부릅뜨고 무서운 기세로 내게 돌진해왔다. 컥.. 미처 피하기도 전에 내 허리춤을 꽉 끌어안은 은지니가 그대로.. "야야야!!!!.. 이건 반칙이다!!!!??" 레슬링 광팬. 요즘들어 뜸하다싶어 까먹은 사실이 내 뒷통수를 강하게 후려친다. 옛날부터 WWE라면 새벽부터 녹화까지 해가며 빼놓지 않고 보던 은지니였는데!!!..... 이런 중요한 사실을 새카맣게 까먹고 있었다니.. 나가 죽어라, 김윤서. 온 몸의 피가 몽땅 머리쪽으로 쏠리는 기분이 들기가무섭게 허공을 향해 몸뚱이가 거꾸로 솟구 친다. 당황한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백드롭을 걸어오는 은지니. "씨봉.. 은지니가 떠놓은 레슬링 비디오, 김윤서도 봤다!!!!!.." 4-57. 작전 2단계, 서울연합 조지기 쿠당탕―.. 걸쭉한 진간장 색깔의 대가리가 바닥에 닿기 전 가까스로 손을 뻗어 바닥을 짚은 나는 허리에 반동을 줘 다행히 맨땅에 헤딩을 하기 전, 무사히 마귀 은지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털퍼덕. 바닥에 누워 숨을 몰아쉬는 은지니. 휘요. 은지니때문에 빨갛게 까진 무릎을 호호 불며 얼굴을 찡그리는 김윤서. "..최홍천만하고나 붙지, 왜 날잡고 기술을 걸고 지랄이여 지랄이...." "하아. 쓸떼없이 잽싸가지고는.." "붕신. 니 기술 제대로 먹었으면 김윤서 벌써 뒤지고도 남었어. 하여간 지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몰라." 퉤퉤. 까진 상처 위에 침을 바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갑자기 띵.하더니 얇은 기계음이 가느다란 실이 되서 머리통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지끈지끈.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너무 묵직한 두통이 뾰족한 송곳이 되서 머리통을 사정없이 찌르고...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주저앉아버렸다. 머리를 감싸쥐며 어금니를 악물자 팅.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통을 찌르던 송곳이 둘로 쪼개진다. ...... "아.. 띠바..." "뭐하냐??.." 예전같았으면 벌써 일어나 다시 공격하고도 남았을 김윤서한테서 아무런 소식도 없자, 아무래도 이상했는지 가만히 있어도 될 은지니가 괜히 미간을 좁히며 물어온다. 한 253밀리정도 남은 두통의 찌꺼기를 간신히 억누르고, 고개를 들자 어느새 코 앞까지 얼굴을 들이민 은지니의 햇님색깔 입술이 보였다. 씨봉... 이 가시네는 뭐 이렇게 얼굴을 디밀어. 까딱하면 소중하게 간직해온 첫뽀뽀를 미친개한테 뺏길뻔 했네.. "뒤로 가, 씨봉아. 내 첫뽀뽀를 너와 할 순 없다." "지랄은.. 김윤서 첫뽀뽀 열트럭을 갖다줘도 사절이거든?? 그리고 애냐, 너? 어떻게 그 나이 먹도록 뽀뽀도 한 번 못해봤냐. 인생 헛 살았네, 아주 헛 살았어.." 혀를 끌끌차며 얼굴을 뒤로 빼는 은지니. 은지니의 중얼거림에 잠자고 있던 김윤서 자존심이 꿈틀.꿈틀꿈틀.. 몸부림을 친다. 오이 맛사지 하듯이 남자친구를 갈아치우는 연애경력 18년의 주연오에게서 그런 소릴 들었다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겠지만.. 지나 나너 별 차이 없는 은지니한테서 듣는 말은 김윤서의 자존심을 너무나도 크게 흔들고야 말았다. "씨봉... 니,니니는!!!.. 얼마나 잘났다고.. 어엉?? 그러냐!!! 너도 첫뽀―" "12번." "어엉???" "12번 했다고, 병신아. 김현광이랑 11번. 최필립이랑 1번. 내가 말했지? 옛날부터 넌 나한테 안됐다니깐." 반달곰 가슴팍에서나 볼법한 나이키 무늬가 서서히 은지니의 입가에 떠오르고.. 처참하게 구겨지는 김윤서 얼굴과 상반되게 은지니의 얼굴은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돼...." "이러니까 김윤서가 은지니한테 안되는거야. 그리고 내가 아까 제대로만 했으면 넌 벌써 대가리 아작났어, 이년아." 아주 제대로 코웃음을 치며 나를 지나쳐 유유히 걸어가던 은지니가 샌드백 아래 놓여져있던 가방을 뒤적이더니 두툼한 갈색 서류봉투 하나를 평상 위에 털썩. 올려놨다. 은지니보다 못하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고 가만히 앉아있는데, 시베리안 허스키도 울고갈 은지니의 걸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해?? 이리 와." "씨봉.." "씨봉이고 저봉이고 빨랑 오라고. 백드롭 또 당하고 싶냐??" 피. 은지니의 협박에 입술을 비죽이며 느릿느릿. 평상으로 걸어갔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또 한 번 나이키 웃음을 짓는 은지니. 저놈의 주둥이를 확 찢어버릴라... "하여튼 올거면서 미적대기는.. 김윤가 보면 홀딱 뒤집어질만한 소식 물어왔으니깐 한 번 봐라." 지니는 방금 전 꺼내놓은 서류봉투를 내 가슴팍에 퍽. 안겨주고는 주머니에서 꺼낸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매쾌하게 풍겨져오는 담배 연기를 피해 아까 지니가 앉아있던 그네에 올라탄 나는 엉성하게 풀칠이 된 봉투의 윗부분을 찢어내고 안에 들어있던 서류뭉치를 꺼냈다. .... 서류를 읽어내리는 눈동자가 조금씩. 조금씩 커져 이제는 동해바다를 채울만큼 넘실댔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은지니의 얼굴에는 뿌듯한 기색이 아주 쬐~~~~~~끔 서렸다. "...이거 설마 은지니가 한거야???" "내가 어떻게 하냐, 병신아. 하여튼 김윤서 돌대가리는 알아줘야돼. 몇개는 아라가 도와줬고, 몇개는 아는 애들 시켜서 알아봤다." "헐.. 그럼 너 아까 터미널에서 나가있던 것도, 수이연 따라서 먼저 나간 것도 다 이거때문이야??"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은지니. 무더운 여름날. 붕어 싸만코에게 밀려 뒷방 신세로 전락한 황금 붕어빵처럼 입만 벙긋거리고 있는 내가 슬슬 부담스러워졌는지 은지니가 표정을 구기며 난간쪽으로 고개를 돌려 두번째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은지니의 새빨간 뒷통수를 보는 김윤서의 검정색 눈동자가 흥분으로 바들바들. 떨린다 은지니가 건네준 서류뭉치를 들고 있는 김윤서의 하얀 손이 흥분으로 후들후들. 떨린다. ....... [김한영 최근 동향 보고서] [서울연합 핵심 멤버 보고서] [서울연합 최근 활동 내역서] [서울연합 비밀 아지트] ... . . 큼지막한 고딕체로 쓰여진 맨 앞장의 네 줄. 앞장을 넘기자 육만화소도 울고갈 화려한 컬러로 인쇄되어진 여러장의 사진들이 보인다. 사진들이 인쇄되어진 장들을 넘기면 신명조체로 빽빽하게 가득찬 여러명의 신상명세서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정리아, 최효선 대가리가 끝내주게 좋아도 현장 경험이 좀 부족하잖냐. 꼴랑 인천연합 한개 가지고는 부족할 거 같어서 알아본거다. 후.. 요즘 경상도 지역에 무슨 문제 생겨서 김한영 거기 가있다더라. 전국연합이 서울을 거점으로 움직이고 있는건 애새끼들도 다 아는거고. 대가리 없는 아지트가 얼마나 심심하겠냐.. 안그래?? 서울연합부터 치는거야. 다른건 몰라도 기둥을 뽑아놔야 나중에 싸울때 편하지 않겠어??" 요몇일 효선&리아와 지나치게 붙어다닌다 싶더니만.. [말빨의 제왕]이라도 읽었는지 뻐끔뻐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면서도 좔좔. 끈임없이 얘기를 하는 은지니. "애들 올라오기 전에 기둥 좀 뽑아놓고, 핵심세력 몇개 다져놓는다고 뭐 크게 달라지겠냐. 눈치껏 어른들 눈 피해서 움직이면 되는거지, 뭐." "와... 욘나 신기해, 은지니. 근데 너 솔직히 말해봐. .....지금 컨닝 페이퍼 보구 있지??" "미친. 저거는 잘해줘도 꼭 저 지랄이지." 속으로 뜨끔하면서 뭘.. 작게 키득거리는 날향해 담배꽁초를 휙. 던진 은지니는 세번째 담배를 물고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쩔꺼야.. 할꺼야, 말꺼야??" "...붕신. 입아프게 내가 꼭 말해야겠냐, 그걸??" 김윤서와 은지니 얼굴 위로 기분 좋은 미소가 동시에 떠올랐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보이며 웃던 우리는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너무 늦었고, 내일부터 시작하자. 이거 보니까 영등포에 꽤 쏠쏠하게 모여있던데.. 내일 학교 끝나면 맨인블렉 떼놓고 영등포역으로 고고. 어때??" "김윤서 혼자 보내놨다가 나중에 뒷감당을 어떻게 할려고?? 당연한거 묻지 마라." "벌써부터 꿈틀거리는데, 이거. 화요.. 아맞다!!!.. 근데 이연이는???" 번뜩 떠오른 이연이의 앙증맞은 모습에 손뼉을 치며 되묻자, 은지니가 그건 생각해보지 않았다는듯 미간을 좁혔다. 지만 깍두기시켰다고 나중에 알면 욘나 난리칠껀데, 고 가시네... 그렇다고 같이 움직이자니 어른들 눈을 따돌리기가 영 귀찮을거같고... "..칠공주 행동파끼리 움직이는거 오랜만이지, 이거 하면??" "김윤서 너.." "좋아쓰!!.. 작전개시 2단계. 서울연합 조지기, 내일부터 시작이다!!..." 4-58. 쓰리아웃 ※2시간 56분후.. 더이상 아지트에서 지체를 했다간 우리를 찾다지친 맨인블랙들이 어른들에게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을 할지도 몰아 자세한 얘기는 문자로 하기로 마무리를 짓고 지니와 함께 아지트를 나왔다. 휘적휘적. 아지트를 나오자마자 근처에 세워둔 오토바이에 낼름 올라타는 은지니. 뒷주머니에서 꺼낸 열쇠를 꽂아넣은 은지니가 날 흘끔 보더니 절대. 결코 태워주고 싶지 않다는 얼굴로 순창도 울고갈 고추장색깔의 헬멧을 내밀었다. "타." "씨봉.. 얼굴이나 다림질하고서 그런 말을 하지시????.." "타기 싫으면 말고. 강요는 안해." "와오. 이새끼봐라??.. 태워주지도 않을꺼면서. 타(☜은지니 목소리를 흉내내며..). 눈치없는 수이연도 안속겠다, 씨바야." 심통맞게 입술을 비죽이며 검지손가락을 들어 은지니가 내민 헬멧의 머리통 부분을 꾹꾹. 눌렀다. 타기 싫으면 말라며 냉큼 헬멧을 거두는 은지니. 내가 치사하고 더럽고 아니꼽고 꽈배기같어서 안탄다, 안타.. 퉤퉤. 은지니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끼는 오토바이 앞바퀴를 향해 침을 뱉자마자 무섭게 내 머리통을 쾅. 후려치는 헬멧. 후끈거리는 뒷통수를 어루만지며 헬멧을 쥐고있는 은지니를 쳐다봤다. "씨봉. 사람을 아주 죽여라, 엉?? 그리고 아까부터 대가리만 직싸게 노리는 이유가 뭐야, 미친개. 정신이 아주 강강수월래를 하냐, 인제??" "즐먹어, 병신아." "...닭똥집 주제에." "뭐???" 내 머리통을 후려친 헬멧을 구겨쓰며 부릉부릉. 시동을 건 은지니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헬멧을 통해 보이는 은지니의 눈동자를 향해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낸나는 살짝 허리를 숙여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친개한테는 먹을게 딱이라더니.. 너네 맨인블랙 닭똥집이잖어. 은지니가 포차가면 꼭 처먹는 닭똥집이 맨인블랙이여서 좋겠어??.. 인제 하루종일 닭똥집 볼 수 있잖어." "닥쳐, 병신아." 실실 쪼개는 내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퍽. 가슴팍을 밀쳐낸 은지니가 핸들을 잡았다. 설마?? 그때까지 분위기 파악못하고 쪼개고있던 나는 뒤늦게서야 화가 난 은지니에게서 복수의 냄새를 맡고는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하지만 아쉽게도 은지니의 오토바이가 김윤서의 발보다 쬐끔 더 빨랐다. 오늘 정말 김윤서를 골로 보낼 작정인지, 바로 옆에 서있는 날 무시하고 엄청난 속도로 오토바이를 출발시키는 은지니. 키기깅. 기분 나쁜 소리와 함께 무릎 아래쪽이 후끈거리기 시작했다. "씨봉!!!!.. 내일 보기만해, 너!!!! 서울연합보다 먼저 조질꺼야, 은지니!!" 불이 안 붙은게 정말 용하다 싶을정도로 타버린 바지를 만지며 소리를 지르자, 은지니가 중지 손가락을 내밀며 휑. 사라져버렸다. 씨봉... 씨봉...... 이 씨봉보다 못한 꼬봉새끼.. 가뜩이나 백드롭 피할때 제대로 까진 무릎팍이고만.. 소독가지곤 어림도 없을 것같아 뵈는 상처를 보고있자니 인상을 절로 와그작와그작. 구겨진다. "..내일 만나기만해, 은지니." 꽈드득. 어금니를 깨물며 주먹을 부릅. 쥔 나는 절뚝절뚝. 또라이처럼 걸으며 맨인블랙이 기다리고 있을 어른들의 아지트로 향했다. .......... ※대한건설 퇴근시간이 한참 지난 어두운 밤. 불빛마저 꺼진 로비 앞에는 굳은 얼굴의 세 맨인블랙이 서있었다. "여어...또 뵙네." "..아가씨 말씀대로 첫날이니만큼 오늘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만 앞으로는 오늘같은 일은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겠군요." "예예. 접수했슴다." 아까 나한테 맞은게 그렇게도 분했는지, 제대로 굳은 정지혁씨가 앞으로 나서며 따박따박. 말했다. 정지혁씨 양 옆에 좌청룡, 우백호처럼 서있던 현도아저씨와 강조아저씨가 슬슬 불안해졌는지, 정지혁씨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눈치를 보낸다. "...오늘." 눈빛으로 말들을 바쁘게 주고받던 세명의 맨인블랙이 나른한 내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린다. "어디서 자요??.. 졸린데. 오랜만에 와보는 인천이라 좀 뻑쩍요란하게 놀았거든요. 저 집에서 쫓겨난거 아시는 분들이니까 따로 잘데 만들어놨을껀데.." "아. 아예. 물론입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아까 내가 토껴서 기분이 상했는지 아까와 달리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현도아저씨가 도로변에 세워진 검정색 벤츠로 날 안내했다. 미우나 고우나 앞으로 찰떡파이 안부럽게 붙어있어야할 맨인블랙들이여서 사이 안구겨지게 할라고 했었는데.. 아까와는 달리 안면을 싹 바꾼 현도아저씨가 사실 좀 웃기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 아무말 없이 아저씨가 안내해주는대로 고분고분. 뒷좌석에 올라탔다. ........ 그나저나 무슨 죄수호송하는 것도 아니고.. 커다란 벤츠 안의 풍경에 푸식. 헛웃음이 나왔다. 땀날정도로 김윤서 양 옆에 딱. 달라붙는 현도&강조아저씨. 그리고 생긴거답게 운전 한번 거칠게하는 정지혁씨. "땀나는데.. 서로 82.2cm씩 떨어지면 안되나??.." "아까처럼 도망치시면 안됩니다." "달리는 차에 뛰어내릴만큼 오버스럽진 않으니까 좀 떨어져두 돼요. 설마 여기서 빨간딱지 하나 찍고 싶은 건 아니시겠죠??.." 묘한 눈빛으로 능글맞게 웃자, 핏기가 싹. 가신 두명의 아저씨가 후다닥. 옆으로 떨어진다. 삐져도 귀엽게구네.. 예전 그 재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던 맨인블랙보다는 놀리는 맛이 나는데, 아주. 아저씨들의 반응이 하두 웃겨 빙글빙글 웃고있는데, 백미러를 통해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정지혁씨. "그러면 눈에서 레이져빔이라도 나오나?? 운전 잘하세요. 아무리 뒈지고 싶어도 교통사고로 찌그러지는건 취미가 아녀서 말입니다..." 정지혁씨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훽 시선을 거뒀다. 칼이네, 칼이야.. 정지혁씨의 매끈한 뒷통수를 보며 시트에 몸을 푹. 기댄 나는 아까부터 뒤적뒤적. 꽤나 묵직해 보이는 쇼핑백을 뒤지고 있는 현도아저씨를 향해 고개를 틀었다. 한참을 쇼핑백을 뒤적이던 현도아저씨는 곧 내 앞으로 <모범생활을 위한 지침서>라고 써져있는 핑크색 종이를 내밀었다. "읽어보십시오. 인천에 계시는 동안 아가씨가 꼭 지켜야 할 사항들입니다." "...정리아한테 이거 비슷한 거 받아놨었는데.. 또 읽어야되나.. 후암." 입꼬리가 찢어질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며 종이를 받아든 나는 찔끔. 눈물이 나오는 눈가를 비비며 자꾸만 몰려드는 졸음을 밀어냈다. 한 번 잠들면 코 앞에 핵폭탄이 터져도 모르기때문에, 잘때는 장소를 신중히 골라야 한다. 저번에 이거 까먹고 버스 안에서 잤다가 다음날 허리 뽀개질뻔 했었는데.. 새록새록. 떠오르는 옛 기억에 살짝. 발가락을 담궈놓기도 전에 현도아저씨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내 뒷덜미를 낚아챘다. "...-앞으로 윤서아가씨는 지공아파트 332동 2605호에 사시게 될 겁니다. 더불어 2606호에는 지혁이가, 2505호에는 강조와 제가 살고 있습니다. 아침등교시에는 제가, 저녁하교시에는 강조가 그리고 그 외, 기타 시간에는 지혁이가 따라붙을 예정입니다. 이연아가씨와, 지니아가씨와는 일주일에 두번씩 만나실 수 있구요. 3일에 한번씩 어른들께 인사를 드리러 가셔야합니다." 따발총을 삶아드셨나.. 쉬지않고 말을 하던 현도 아저씨가 숨을 돌리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추자, 바통을 이어받은 강조 아저씨가 경직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전학가시게 될 황제공고는 인문계열 위주로 편성된 황제고와, 실업계열 위주로 편성된 황제공고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아가씨는 그 중 황제공고 디자인과 2학년으로 편입되실겁니다. 기타 자세한 내용들은 내일 학교에서 들으십시오." 틱틱. 꾸벅꾸벅 졸며 설렁설렁 아저씨 말을 듣고 있던 귀가 순간 번쩍. 뜨였다. 황제공고???? "그거 그건데. ...아저씨 그거 황제공고 확실히 맞아요???" "예." "아하. 어째 이름이 비슷하다 했더니.." 3/2쯤 감긴 눈이 가늘게 휘어진다. 어쨌든 꼭 한 번 싸워야 할 두 사람이 같은 학교에 다니고 있다니.. 우리 하늘님, 오랜만에 예쁜짓 해주시네. 벌써부터 간질간질. 꿈틀거리는 주먹을 느끼며 뻐근한 목주변을 주물렀다. "학교에서는 항상 상위 3%를 유지하셔야 합니다.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지 않게 조심하시구요, 아가씨가 너무 유명하기때문에 약간의 변장을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 "....쓰리아웃." "예?" 역시.. 아무리 시멘트를 발라놔도 사람 성격이 어딜가나. 강조아저씨가 어벙한 얼굴로 되묻는 모습을 귀엽게 쳐다보던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했다. "쓰리아웃하자구요. 불의를 보면 못참고 싸울수도 있는거고, 살다보면 별 개떡같은 일도 일어나는데 그거 다 일일히 세고 앉아있을라면 서로 피곤하지 않겠어요?? 쓰리아웃하면 어른들한테 넘기던, 경찰에 넘기던 상관없으니까 그렇게 합시다." 더이상은 못참겠다.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마치자마자 묵직해진 눈꺼풀을 이기지 못하고 현도 아저씨의 어깨에 풀썩. 머리를 기댔다. 얄팍한 귓구멍 사이로 굵직굵직한 목소리가 웅얼댔지만, 정지운과의 만남에서부터 은지니의 백드롭까지 오늘은 내가 생각해봐도 쬐끔 피곤한 하루였으니깐.... 게다가 오늘은 첫날이니까.. 눈을 감자마자 금새 골아떯어진 얼굴 위로 따끔한 시선이 와닿는다. "...지금 푹 쉬십시오. 앞으로는 이렇게 편하게 쉴 틈도 없을테니." 4-59. 모범생이란 짹째재재잭짹짹찍♪♬♪♪♩.... 도저히 제정신으론 들어줄 수 없는 찍찍이 참새소리에 게슴츠레 눈을 뜨고는 손등으로 벅벅. 부비적거렸다. 눈꼽이 꼈는지, 안개가 꼈는지, 그 것도 아니면 방구 연기탄이라도 낀건지.. 아무튼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 낯선 풍경이 보였다. 침대 주변에 둘러진 하얀 레이스 커튼에 핑크색 벽지. 빨강머리 앤이 살던 초록색 지붕집에서나 볼법한 공주풍의.... "아....골울려.." 오랜만에 와보는 인천이라 적응이 덜됐나..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끼며 낯선 방풍경을 둘러보는건 저 구석쪽에 던져놓고, 새털을 한움큼 담아놓은듯한 푹신한 이불을 얼굴 위로 끌어올렸다. 두통도 잊을겸 다시 잠을 청하기위해 눈을 감으려는데 갑자기 냄비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연이어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결국 나는 이불을 온 몸에 칭칭감은채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오자마자 코를 찌르는 고소한 냄새. "일어나셨습니까." 헐.. 밍기적밍기적. 부엌으로 들어가는 기둥에 몸을 기댄 나는 꽤 놀란 표정을 지으며 부엌 안의 두 사람을 바라봤다. 정지혁은 맨인블랙이니깐 그렇다쳐도 정지운이. 그것도 어제 처음 본. 게다가 인천에 와서 제일 싸우고 싶은 사람 넘버쓰리가.. 왜 어울리지도 않는 짱구 앞치마를 두르고 부엌에 서있는거지??... 생각하기가 무섭게 내 뒷통수를 팍. 치는 두 사람의 공통점 한개. "....정지가 돌림자였나.." "눈치는 빠르시군요. 그런데 너무 늦게 일어나셨습니다. 내일부터는 6시에 일어나십시오. "원래 아침잠이 좀 많아요, 제가. 후암.. 그나저나 걔는 정지혁씨 따까리라도 되요?? 이 시간에 남의 집 부엌엔 왜 있대요." 부스스하게 뻗친 머리를 긁적이고는 이불을 질질 끌며 식탁 앞으로 다가섰다. 눈뜨고는 못봐줄만큼 엉망이 되있는 부엌의 풍경과 다르게 식탁 위에는 보글보글. 앙증맞게도 끓고있는 김치찌개부터 시작해서 아주 맛깔나는 음식들이 차례차례 올려져 있었다. 딸그락. 내 앞으로 은수저를 내려놓는 정지운. ...내가 고개를 들어 멀뚱히 쳐다보자, 어제처럼 검정 목폴라티를 입술 위까지 끌어올려 입은 정지운이 매몰차게 고개를 돌려버린다. 어깨를 으쓱이며 찬바람이 세차게 불고있는 정지운의 뒷태를 향해 물었다. "맛있겠네 찌개. 끓였어요, 너가??" "..." "근데 그거 알어요??.. 김치찌개는 참치보다 돼지 고기를 더 좋아하는거. 다음부턴 김치 외롭지 않게 살코기참치말고 토실토실한 돼지고기―" 탁. ..... 사람 무안하게시리. 정지운은 내 말을 톡. 잘라먹고 물컵을 내려놨다. 대꾸없는 정지운에게서 시선을 거둔 나는 구부정하게 선 상태로 방금 전, 정지운이 내려놨던 은수저를 들어 하얀 쌀밥을 한숟가락 떠먹었다. "...앉아서 먹어." 어느새 내 등뒤로 다가온 정지운이 의자를 빼주며 말했다. 아침이라 그런지 조금 심하게 가라앉은 정지운의 매력적인 목소리를 듣고있자니 몸이 저절로 들썩인다. .... 아침 밥상부터 싸우면 안되는데.. 초강력 모기에 한 125번정도 물린 것처럼 간질거리는 주먹을 애써 감추며 실실 웃자, 아까처럼 훽. 고개를 돌리는 정지운. "무시하는거는 안좋은건데.." "...해." "에??" 아직 가시지않은 졸음기를 느끼며 느릿느릿 찌개를 떠먹는데, 정지운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우적우적. 통통하게 살이오른 참지를 입 안에 한가득 집어넣고 되묻자 바닥에 떨어져있는 냄비와 여러가지 주방기구를 주우며 정지운이 또 한번 작게 말했다. .."무시안해." ......커다란 덩치가 쬐만한 부엌 바닥에 쪼그려앉아 주섬주섬. 물건을 챙기는 모습이라니.. 입술을 비집고 픽. 웃음이 터져나왔다. 순간 정지운의 커다란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아무래도 내가 자길 비웃는줄 알었는갑다.... 그냥 귀여워서 그런거였다고 서둘러 리플을 달아주려는데, 갑자기 우당탕.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물건 몇가지를 식탁 위로 쏟아버리는 정지혁씨. "개새끼도 안건드린답니다, 밥상머리 앞에선.." "늦었습니다. 아침은 도시락으로 보내드릴테니, 어서 준비하십시오." "와. 인제 밥도 못처먹게 하네..싸가지 통째로 뽑아먹은 맨인블랙씨, 그거 알어요??? 아침 밥 못먹고 시작하면 하루죙일 대가리 썩는거.." "그런 소리 들어본 적 없습니다. 빨리 준비하십시오. 밑에서 현도형 기다립니다." 0.921350mm짜리 쇠꼬챙이로 찔러도 절대 피한방울 안날 정지혁씨, 아주 대단한 정지혁씨.. 김윤서 얼굴에 강호동 콧구멍만한 구멍을 뚫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부리부리하게 노려보는 정지혁씨의 시선을 웃음올 되받아쳐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삐딱한 미소를 입에 걸고서 식탁 위의 물건들을 하나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밤이 되면 절대 보이지 않을것만 같은 찐한 검정색 교복. 빗자루를 잘라다가 만들었는지 잔뜩 푸석푸석해보이는 가발. 손가락 반뼘정도 되보이는 두께의 안경알을 끼고 있는 두꺼운 검정뿔테. 용도를 알 수 없는 눈썹 그리는 펜슬. 개당 5Kg는 훌쩍 넘길듯한 묵직한 모래 주머니... 무슨 장사하나, 이사람??? 요상스러운 물건들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모래주머니 다섯개를 손에 들고서 정지혁씨를 향해 물었다. "운동하자구요??.." "싸움방지용입니다. 몸이 무겁다보면 그만큼 둔해질테니 꼭 차고 다니십시오. 복부에 하나, 팔목에 하나, 그리고 양 허벅지에 각각 하나씩 차시면 됩니다." "교복입고 차기엔 너무 튀지 않아요. 그거??" 찰떡파이마냥 철썩. 붙는 모래주머니를 팔목에 붙인 나는 씩 웃으며 되물었다. 교복을 집어들며 표정없는 얼굴로 대답하는 정지혁씨. "고려해서 일부러 사이즈 넉넉하게 잡았습니다. 아가씨 원래 사이즈에서 3배정도 크다고 보시면 되겠군요." "우엑???.. 김윤서가 폼에 살고, 폼에 죽는 주연오는 아녀두 그건 오반데. 차라리 거적떼기를 두르라고 하십쇼." 툴툴대면서도 이런 상황이 재미있는지 김윤서의 주둥이가 짖궂게 웃는다. 내가 이 부분에서 가장 심하게 반항할거라고 생각했는지 정지혁씨의 얼굴에 다소 당황한 기색이 어린다. "..가끔 보면." 이불을 의자에 걸쳐두고 양팔과 허벅지, 그리고 배때기 위에 돌덩이같은 모래주머니를 채운 내가 조용조용 입을 열었다. 정지형제의 시선이 따끈따끈 와닿고.. 오랜만에 차보는 모래주머니를 기분 좋게 바라보며 휘익. 오른발을 뻗었다.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 같어. 모범생 이콜 찐따. 공부 잘하고, 선생들이 예뻐라하고, 조따 모범적으로 사는 애들은 죄다.. 찐딴줄알어. 듣는 범생이 기분나쁘게. 그쵸??" 쉬익.. 모래주머니를 안 차고있을때와는 확연히 달라진 스피드였지만,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속도를 내며 오른발이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다. 터억. 식탁 너머 정지혁씨의 턱주가리 밑에 냄새나는 발꼬락을 갖다대놓고서 빙글 웃자, 정지혁씨가 뭐씹은 표정으로 나를 노려봤다. "솔직하게 쌈박질 하지말고 찌그러져있으라고 말하면 좀좋아. 허울좋게 맨날 모범생, 모범적, 모범모범.. 완전 모범택시팬인가봐 어른들은. 안그래요??.." "....." "서로 솔직해지자구요. 우리는 김윤서가 칠공주 만들었을때처럼 주변애들 더럽게 물들이고, 치고박고 쌈박질만 하고, 사고만 일으키는거 존나게 보기 싫으니깐 제발 좀 닥치고 있으라고. 눈에 띄지도 말고, 어디 시궁창 쓰레기통에 짱박혀 있으라고... 개찐따처럼 비굴하고, 추접하게 굴면서 그렇게 제발 좀 꺼져있으라고... 그러면 누가 뭐라고 합니까??.. 생각하는척, 자상한척, 어른인척 위선적으로 굴 시간에 입고 있는 양파껍질이나 벗으라고 하세요." 옆으로 틀어진 몸을 원상태로 돌리고 빗자루같은 가발을 뒤집어쓴 나는 정지운씨의 손에 들려진 교복을 낚아채고 돌아섰다. 교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방으로 들어가기 전. 정지혁씨를 향해 웃는 얼굴로 침뱉기. 하는 걸 잊지 않고. "사람하고 사람이 얘기할땐 화끈하게 맨가슴으로 부딫치는겁니다. 가식적인 양파껍질 존나게 두르고서 백날 얘기해봤자 발전하는 거 한개 없어요.... 양파껍질 두르고 섰으면 서로가 매울뿐이라구요. 그리고 김윤서는 지금도 충분히 매우니까. 인제는 제발 양고추냄새 풍기지 말라구 전해 좀 주세요. 코가 다 헐겠네, 아주.." 4-60. 황제공고 S대도 울고갈 엄청난 규모의 황제공고 교문 앞. 온 세상에 있는 빛을 다 빨아들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짙은 검정 선글라스에, 그와 똑같은 검정 정장을 차려입은 맨인블랙 같은 사내가 차에서 내린다. 교문으로 들어서던 학생들도. 교문에서 아이들을 잡고 있던 선생들도 모두 궁금한 눈으로 맨인블랙을 바라본다. 반듯한 차림새로 차에서 내린 맨인블랙은 뒷좌석으로 걸어가 문을 연다. 문이 열리고 하얗고 매끈한 다리가 문 사이로 내려온다. 꿀꺽. 남학생들은 침을 삼키며 뒤이어 내려오는 여자를 바라봤다. ......... 씨발. 너나할 것 없이 저마다 욕설 하나씩을 내뱉고 정지됐던 화면이 다시 재생된다. "어때요, 아저씨? 나 많이 예뻐??" 다른사람 신경 안쓰고 산지가 벌써 18년이다. 날보며 쌍욕을 내뱉고 지나가는 아이들을 깔끔히 무시하고 현도아저씨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내 물음에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땀을 뻘뻘 흘리는 참 솔직하신 현도 아저씨.... "지 입으로 솔직하게 살자구 말해놓구선 아저씨 구라파덕 만들뻔 했네. 지송지송...." 투닥투닥. 아저씨의 굳은 어깨를 두드려주고 경쾌한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교문으로 향했다. 빗자루를 연상케하는 뻣뻣하고 갈색빛이 감도는 머리에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만같은 펑퍼짐한 교복. 허리의 윗부분까지 올려 꽉조인 가방. 모래 주머니때문에 둔해보이는 몸매. 과연 앞이 보일까 의심이 될정도로 두꺼운 안경 아래로 뭔가 짜가티가 쫌 나는 갈색의 주근깨들.. 그 것이 황제공고(&황제고)에 있는 모든 사람들 눈에 비치는 김윤서의 모습이였다. ............ ※황제공고 본교무실 "...화려하구나." "제가 쫌 화려하다는 소리 듣습니다." "그래. 근데 이름이.." "김윤서요. 김윤서." 이름을 듣는 순간 서류를 넘기던 선생의 손이 멈칫한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확인한 선생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서류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 내키지는 않았지만, 얼굴 가리는데 이게 직빵이라더니. 입술 사이를 헤치고 비죽. 웃음이 터져나왔다. 펜슬로 대충 찍은 주근깨와 불편하지만 전체적으로 얼굴을 가려주는 안경. 그리고 눈을 찌를때마다 짜증나는 긴 앞머리까지.. 아무래도 정지혁씨 선택이 아주 제대로였는갑다. "똑같은 이름인데.. 많이 다르구나." "별로 안흔한데, 제 이름.. 이 학교에 제 이름하고 똑같은 이름이 있나보죠??" 깝을 싸라, 깝을 싸 아주. 능청스럽게 되묻는 날 보며 절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아마 이 모습을 은지니가 본다면 벌써 유리창 하나 아작났을꺼다.... 그나저나 내가 이정도면... 풉. 쓱싹쓱싹. 그려지는 은지니와 수이연의 찐따 분장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뾰족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째려보는 선생. "선생님이 말하는데 지금 " "아, 죄송해요. 선생님 보니까 이영애가 떠올라서요. 선생님 이영애 닮으셨어요." "어머? 정말. 호호, 내가 그런 소릴 쫌 들어." 선생은 내 말에 뾰족한 표정을 단숨에 뭉개버리고 간드러지게 호호.웃어재꼈다. 뭐 구라는 아니니깐.. 이영애도 눈두개, 코하나, 입하나. 이 선생도 눈두개, 코하나, 입하나... "흠흠. 전 학교에 대한 기록이 없구나. 보호자분도 같이 안왔고.." "외국에서 학교 다니다, 저번주에 귀국했거든요. 부모님은 둘다 회사일때문에 바쁘시구요." "외국?? 그런 소린 없었는데.." "저기 우크라이나에 있는 셀롸도르학교라고 있어요. 그리고 정식서류는 내일 중으로 가져오겠습니다." 구라도 아주 지 수준에 맞게 까요.. (☜라고 말하는 정리아의 목소리가 불현듯 들려왔다.) 선생은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는듯, 잠시 눈썹을 찌푸렸지만 아까 이영애 닮았다고 한 것때문에 기분이 아주 UP됐는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럼 윤서 너는 디자인과 2학년 F반에 들어가면 되겠다. 마침 F반 담임이 나니까, 같이 나가자꾸나." 주연오도 울고갈 커다란 방뎅이를 씰룩씰룩. 요염하게 흔들며 선생이 내 손을 잡고 교무실을 나왔다. ......... 2층 서관 끝자락에 위치한 본교무실을 나와 5층 동관 끝자락에 있는 2학년 F반까지 도착하는데 정확히 총 12분이 걸렸다, 12분이. 더럽게 넓어주시는 황제공고에 새삼 감탄을 하고있는데 먼저 교실로 들어간 선생이 문밖에 서잇는 내게 손짓을 한다. 최대한 얼굴을 숙이고 쭈뼛쭈뼛 들어간 교실은... 교실은...... "우우우!!! 씨발아 꺼져라, 촌년아!!!" "꺄. 어쩜 저래??? 존나 못생겼어!!!!" "찐따네, 찐따!! 키캬카카" 도저히 교실이라고 봐줄 수 없는 개판 오분 후였다. 멀리서 보면 다른학교 교복이라고 착각할만큼 무지하게 개조된 교복을 차려입은 여학우들과 남학우들이 거칠게 소리치며 우우우. 야유를 보내고 있었고.. 교실 뒤에 있는 게시판은 여기저기 박살난 흔적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몇일째 청소하지 않았는지 쾌쾌한 먼지와 함께 교실 바닥은 쓰레기들과 이상한 잡지들이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있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이 너무나도 익숙한듯. 교탁을 탕탕 두드리며 내 어깨에 손을 턱. 올리는 선생. "우크라이나에서 전학온 김윤서다. 전학생이라고 왕따시키지 말고 잘 데리고 놀도록." 거만한 얼굴로 대충대충 날 소개시킨 선생은 곧이어 울리는 종소리에 교실을 휑 나가버렸고... 오랜만에 접해보는 이 난감한 상황에 나는 눈만 껌벅이며(☜물론 교실에 있는 아이들이 보기엔 내가 눈을 깜빡이는지, 감는지, 비비 꼬고 있는지 알 수 없겠지만.)아이들을 바라봤다. "씨발년, 이름은 존나 좋네." "그러게. 근데 천하의 그 김윤서랑 이름은 똑같은데, 애가 어쩜 저렇게 틀리냐? 키킥. 존나 불쌍해." "애 쫄았어. 저거봐, 떨고 있잖아. 아 존나 귀엽네?!!!.." ..... 내가 쫄쫄이 타이즈나, 아님 매콤새콤 쫄면이냐.. 씨봉, 누구 맘대로 쫄았다는겨.. 맨 앞자리에 제일 자지러지게 웃는 녀석을 픽. 쏘아봐주고 4분단 맨 뒷자리에 있는 뒷자리로 걸어갔다. 우당탕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손바닥과 어제 은지니한테 깨진 무릎팍이 욱신거리고... 난 피식 웃으며 내게 다리를 건 아이를 쳐다봤다. 샛노랗게 탈색된 머리를 하고서 가슴이 터질듯 빵빵하게 교복을 줄인.. [최솔림]석자를 명찰에 틱. 박은 아이. "뭘봐, 쌍년아. 눈 안깔어??" "후." 허공을 향해 한숨을 뱉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복에 묻은 먼지를 탈탈 털어냈다. 그리고는 화끈한 일이 터지기를 바라는 눈으로 나와 최솔림을 보고있는 아이들의 기대를 와장창. 무너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걸음걸이로 자리로 걸어갔다. 벗기도 힘든 가방을 겨우 벗어 책상걸이에 걸어놓고, 자리에 앉자 앞에있던 두 명의 남자애가 휙. 몸을 돌린다. "야 찐따. 너 김윤서알어??" "자기를 모르는 사람도 있나, 그럼." "말빨은 졸라 쎄네?? 범생이냐, 너?" 신기한 얼굴로 나를 보고있는 두 새끼의 눈시깔을 뽑아주고싶은 마음을 꾹꾹 억누르고 가방에 들어있던 교과서를 꺼내 책상서랍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깐족거리는 두 새끼. "근데 너 김윤서 아냐구." "자길 모르는 붕.. 아니 바보도 있냐고 했잖아." "너 말고!!! 이 찐따야!!!!" "몰라 그럼." "진짜 몰라?!!!" 씨봉... 고막 걸레짝되면 니가 다시 붙여줄래??라는 의미를 담은 눈빛으로(☜그래봤자 전달되지도 않지만.) 찍 노려보자 놀란 얼굴로 나를 보는 두 새끼. "일단튀어몰라, 일단튀어??" "일단튀어는 모르고 이단튀어는 알어." "뭐? 아, 골까네 얘. 존나 웃기다 너?" "너만할까." "존나.. 아오!!.. 됐다, 찐따 데리고 무슨. 그리고 너 경고하는데 어디가서 니 이름 팔고 다니지마라." 삐죽삐죽.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던 오른쪽 새끼가 먼저 몸을 돌리고, 몽실몽실. 귀엽게도 생긴 왼쪽 새끼가 아까와는 달리 무서운 얼굴로 말한다. 팔긴 뭘팔어, 씨봉아. 니는 팔게 없어서 니 이름을 파냐??? 자꾸만 터져나오는 말들을 억누르기 위해 괜히 교과서를 뒤적이며 고개를 숙였다. "일단튀어. 아, 아니다. 근데 내 말 명심해둬라. 너 멋도모르고 이름팔고 다니면 일당백 추종자들이 이름 바꾸라고 지랄할지도 모르거든." "...걔가 누군데?" 그냥 무심히 던진 말에 왼쪽 새끼가 지나칠정도로 광분을 하며 지 가슴팍을 퍽퍽친다. ...... 변장하고도 김윤서 이름 석자에 이지랄이면, 칠공주 김윤서 고대로 왔으면 아주 폭발났겠네... "김윤서, 진짜 몰라?!!! 너같은 찐따 범생이들도 다 한번씩은 들어봤을꺼 아냐!!!!" "외국에서 살다왔다고 했잖아." "와!!! 씨발.. 씨발.. 말빨 존니 쎄." "니가 약.. 흠. 도대체 김윤서가 누군데??" 첫날부터 너무 나대다가는 학교 생활이 괴로워질거 같아서 터져나오려던 말을 삼킨 내가 다시 무심한을 가장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김윤서!! 인천 칠공주 일당백 김윤서!!! 혼자서 백명두 상대할 수 있다는 애!! 인천서열 부동의 1위!! 존나 쎈 전국짱 김한영 동생에다가 빵빵한 애들만 모여있는 칠공주 행동대장!!!.. 1년 전에 인천연합하고 붙는다고 한참 난리칠때 하두 애새끼들을 무섭게 패대서 붙은 별명, 일단튀어!! 김윤서 만나면 무조건 튀어야 산다고 붙은거, 그거!! 뉴스에도 나오고, 싸움 존나게 잘하고 그러는 김윤서가 바로 찐따 너랑 이름 똑같은 김윤서라구!!!!!" ..........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4-61. 최솔림과 아이들 얼굴 가득 튄 왼쪽 새끼의 침을 쓰윽 닦아내고 탁탁. 교과서의 모서리로 책상을 두드렸다. 안정시켜야돼.. 암.. 진정시켜야되고말고.. 여기서 난리피웠다간 말짱도토리묵이니께.. 꼴같지도 않은 찐따분장도... 김한영 조지기 계획도.. 다 말짱도토리묵이 되는거니께... 책상을 내리치는데 최대한 온신경을 집중하면서 왼쪽새끼의 기깔나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있는데.. 흥분했는지 씨뻘개진 얼굴로 씩씩대던 왼쪽 녀석이 너무나도 태연한 내 반응에 어의없어하며 허허. 헛우음을 터트렸다. "너....너 대가리가 좀 모자라냐?? 어떻게 김윤서 얘길 듣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가 있어?!!!!" "...별로. 김윤서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걔 하나뿐인 것도 아니고." "이야!!!! 그 쌔고쌘.!!! 더럽게 흔해빠진 김윤서들하고는 차원이 틀리다니깐, 차원이?!!!!" "홍표야 그만하고 앞에 봐라. 시끄러워." 아까 먼저 몸을 돌린 오른쪽새끼가 시끄러웠는지, 쬐끔 짜증난다는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녀석의 말을 쌩. 무시하고 날 향해 더욱더 얼굴을 디미는 징글징글한 홍표라는 이름을 가진 왼쪽새끼. .... 생각할수록 부글부글. 가슴이 끓어오른다. 뭐??.. 일단튀어??? 씨봉아, 내가 무슨 조류독감 걸린 닭대가리냐. 뭘 무조건 일단튀어야. 어쩐지 시내에서 만날때마다 애새끼들이 묘하게 날 슬슬 피하더라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꼬리표처럼 붙어있는 별명에 잔뜩 기분나빠하고 있는데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댄 홍표새끼의 가뿐 숨소리가 느껴졌다. "......-듣고 있어?!! 듣고있냐구, 찐따야!!" "엉 듣고있어, 열심히." 벌써 뽀얗게 닳아버린 교과서 모서리가 가여워 책상서랍에 다시 교과서를 집어넣은 나는 이젠 할것도 없어 책상 위를 쓱쓱 닦으며 대충 대답했다. 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목소리로 꽝꽝. 소리치는 홍표. 동시에 반 아이들의 시선이 우리쪽으로 몰려들고. 첫날부터 제대로 튀게 만들어준 홍표새끼를 향해 속으로 진창 욕을 먹여주며 책상의 모서리 부분을 꽉. 잡아쥐었다. "공식, 비공식 다 합쳐서 골백번두 넘게 싸웠구. 싸워서 진적은 단 한번도 없고 최고 기록이 32:1!!! 게다가 얼굴 끝내주지, 몸매 착하지 싸움실력까지 끝장나지!!! 성격 쫌 개싸이코같아도 따르는 애들 많지, 빽 든든하지!!!!!.. 무엇보다 전설의 동생이라구, 걔가!!!.. 전국 최강 전설의 김한영 동생!!!!" 꽈지득.. 힘껏 쥐는바람에 책상 모서리가 비명을 질렀지만 한껏 들떠서 소리치는 홍표새끼 목소리에 묻혀 다행히 아무도 듣지 못했다. 전설?? 개나주라지, 씨봉... 일당백 김윤서에 대해 미친듯이 읊어대던 녀석은 이제 대상을 옮겨 웃기지도 않는 전설 김한영에 대해 줄기차게 떠들기 시작했고.. 왕부글부글. 김윤서의 끓어오르는 속은 거의 폭발 직전까지 올라왔다. "...그만해, 강홍표. 그딴년한테 백날떠들어봤자, 니 입만 아파. 그리고 김한영은 몰라도 왜 김윤서 얘기야??" "그래. 그리고 지금 인천짱은 김윤서가 아니라 금잔디라구. 요즘 그 얘기로 떠드는거 별로 안 좋아하던데.. 이러다 걔가 듣기라도 하면―" "나 무서웠으면 애초에 꺼내질 말았어야지." 드르륵. 바로 옆의 창문이 열리면서 금잔디의 팬더곰같은 얼굴이 나타났다. 강홍규에게 잔소리를 늘어놓던 최솔림과 오른쪽 새끼가 뜨악스러운 표정과 함께 금잔디의 얼굴을 쳐다봤다. 제법 사납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반 아이들을 쏘아보던 금잔디의 시선이 어느새 내 앞에 멈춰졌다. "....못보던 얼굴이네. 전학생??" "엉, 전학생." "...이름이 김윤서????" 금잔디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내 명찰을 훑어보며 물었다. 누가 볼세랴 모서리를 쥐고있던 손을 재빨리 떼어낸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숙였다. 한참을 그자리에 서서 나를 보던 금잔디는 수업종이 울리자 반 아이들을 향해 따끔한 한마리를 남기고 드르륵. 창문을 다시 닫아버렸다. ...... "내 앞에서 김윤서 이름 꺼내는 새끼, 그 자리에서 조져버릴테니까 알아서 기어라." ......... 금잔디가 그렇게 사라지고.. 시베리아에서 퍼온 암바수를 퍼부은듯 싹 가라앉은 반 아이들. 금잔디 생각보다 꽤 살벌하네. 조져버리기 전에 알아서 기라니.. 금잔디 한마디에 퐉. 쫄아버린 애새끼들을 한심하게 쳐다보던 나는 깐깐해보이는 선생이 앞문을 열고 들어오자 후다닥 교과서를 펼쳤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선생이 들어오건말건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애새끼들.(☜금잔디한테 쫄았던 사실따윈 까맣게 잊어먹고선.) 더 웃긴건 이런 애새끼들 상태를 보고서도 아무말없이 수업을 진행시키는 영어선생. 하얀 분필을 들고 쏼라쏼라. 영어들을 칠판에 적어놓는 틈을 타 턱을 괴고 반 풍경을 살펴봤다. 거친 욕설과 함께 과자까지 아그작.거리며 낄낄깔깔. 호호하하 웃는 새끼들과 태연하게 칠판 위로 기다란 영어 문장을 적어내려가는 선생. "완전 개판이네, 개판.." 어차피 시끄러워서 들리지도 않을테지만, 나는 최대한 자제를 하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적었는지 분필을 내려놓고 교탁쪽으로 돌아서는 선생. 턱을 괴고있던 손을 풀고 샤프를 쥔 나는 최대한 고개를 뻣뻣히 들고 선생을 바라봤다. 모범생. 따까리. 그까지껏 즐겨주지 뭐. 김한영을 조지고 하늘만 잡을수있다면야... 쌍꺼풀이 생길정도로 눈을 부릅.뜬 나는 교과서를 솰솰라 읽어대는 선생님을 향해 번쩍 손을 들었다. 허공을 향해 솟아오른 김윤서의 팔은 흡사 가을 운동회날 달리기 주자들을 향해 총을 쏘아올리는 체육선생과 똑같은 거였다. 빨간색테가 둘러진 안경을 쓰윽. 올리며 영어선생이 날 향해 고개를 돌렸다. 히죽. 입꼬리가 보기좋게 올라가고 난 효선이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방금 선생이 했던 것처럼 안경을 쓰윽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선생님이 설명하고 계신 문법에 대해서 질문이 있습니다." 의외. 황당. 재수없음. 어의상실. 선생과 아이들 얼굴에 떠오르는 단어들을 훑어보며 나는 효선이가 미리 정리해준 교과서를 펼쳐들고 또박또박 말하기 시작했다. 좋아쓰. 모범생 탈을 쓴 문제아. 연기 제대로 들어간다!!.. .............. ※방과후. 학교가 끝난 5시. 작전2단계를 개시하기 위해 얼른 영등포역으로 고고해야되는 김윤서를 못나가게 막고 있는 최솔림과 아이들. 가방끈을 잡고 자리에 일어선 나는 질겅질겅. 입술을 씹으며 최솔림을 쳐다봤다. "눈깔어, 씨발아." "엉." 최솔림의 말에 군소리없이 눈을 까는 김윤서. 그 모습을 황당하게 쳐다보는 최솔림과 아이들. 지루하다못해 너무 하품까지 나오는 뻔하게 펼쳐지는 스토리를 의미없이 바라보며 최솔림 모르게 이빨을 갈았다. 빨랑 가야되는데... 늦으면 은지니 수이연만 데리고 튀는데.. 맨인블랙 따돌릴라면 시간 걸릴껀데.. 띠바.. 아까부터 띠껍게 노려보고만 있는 최솔림을 보고있자니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존나 진짜 아주.. 와. 너 어디서 왔냐??.." "우크라이나." "까지마라, 씹쏭아. 제대로 밟아놔야겠다, 너무 뻗대 너." 순식간에 머리칼을 휘어잡는 최솔림. 가발이라 그런지 두피가 뽑히는 고통은 없었지만, 기분 상당히 나뻐주시는데 이거.. 안경이 떨어지지 않게 최대한 얼굴을 가린 나는 순간 억소리를 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와 동시에 방금 내 배를 걷어찬 최솔림 친구1이 쉬지않고 발길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구두를 신고 있어서그런지 뾰족한 구두굽이 온 몸을 욱신욱신. 찌른다. "씨발아 앞으로 한번만 더 나대봐. 그땐 아주 아가리를 찢어버릴테니까!!" 티킹. 마지막으로 대가리를 후려찬 최솔림이 무시무시한 협박을 남기고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나갔다. ...... 오랜만에 당해보는 다구리여서 그런지 온몸이 쿡쿡 쑤신다. 마지막 최솔림이 후려차고 간 이마빡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손등으로 대충 닦아낸 나는 몸을 일으켜 벽에 기대앉았다. "후우.. 담배나 배워놓을껄 그랬네." 4-62. 작전 2단계, 개시 ...... ※영등포역 "어디서 한바탕 구르고 왔냐??.. 꼬락서니 하고는.." "끼야호!!! 윤서얼굴 그지얼굴이래요!!!" 만나자마자 인상을 퍽. 구긴채로 날 위아래로 훑어보는 은지니와 어제와 다르게 입꼬리를 아주 정수리에 걸어놓은 수이연을 보자마자 쌩. 지나쳐 역안의 화장실로 들어왔다. 몸에 차고 있는 모래 주머니보다 훠배 무거워 주시는 교과서를 죄다 책상 서랍에 처박고 와서 그런지 아침때보다 한결 널널해진 가방 안에 가발을 먼저 쑤셔넣고, 그 위에 머리를 띵하게 만들던 안경을 벗어 얹어놨다. 후와. 쉼호흡을 한 번 해주고 수도꼭지를 힘껏 돌렸다. 쏴아... 시원하게 쏟아지는 수돗물을 받아 얼굴을 박박 문대자, 허접한 주근깨들이 자취를 감춘다. "준비정도는 오기 전에 해뒀어야 하는거 아니냐??" "그르게." "그 꼴을 하고서 가겠다고 지금?" "엉." "...김윤서 너 대가리 터졌지??" "엉." "아오!! 씨발. 내가 그런식으로 대답하지 말라고 했지?" 쿠왕. 화장실 문을 주먹으로 내리친 은지니가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소리쳤다. 씨봉.. 일보던 사람들, 다 놀라 변기통에 자빠지겠네. 쓰윽쓰윽. 고개를 숙여 대충 마이에 얼굴을 닦아낸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지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지니야" "왜" "...나 담배 한대만 줄래." "미친년." 대뜸 날더러 미친년이라는 원조 미친년 은지니. 하여간.. 필터는 정수기가 아니라 저 은지니 주둥이에 필요하대니깐. 젖은 머리털을 탁탁. 털며 가방을 대충 둘러맨 나는 실쭉. 웃으며 지니가 닫아놓은 문을 열고 사물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김윤서." "엉." "드디어 돈거지, 니가?" "돌고 있는건 내가 아니라 지구지." 딸깍. 동전을 집어넣고 777번 사물함 문을 열었다. 꽤나 넓어뵈는 사물함 안에 가방을 쑤셔넣고 다시 문을 닫자마자, 쿠왕. 은지니의 매서운 주먹이 사물함에 정통으로 꽂힌다. 분홍색 번호표가 딸랑딸랑 붙어있는 열쇠를 주머니에 집어넣은 나는 눈을 껌벅이며 지니를 쳐다봤다. "왜?" "아까부터 왜그러는데?" "그르게. 아까부터 왜그러지??" "뒤진다 너." "뒤져도 돈 없어." 빠지직. 초특급 다혈질 은지니의 마빡에 시퍼런 핏줄이 두두둑 돋는 소리가 들린다. 까딱하면 이거 서울연합 조지기도 전에 은지니랑 먼저 한판 붙게 생겼는데??.. 활활 타오르는 은지니의 눈빛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데, 쪼로록쪼로록. 어디서 나타난건지 바나나맛 항아리 우유를 쪽쪽 빨고 있는 수이연이 내 앞으로 쇼핑백을 하나 내밀었다. "그렇게 입구가면 쪼발리니깐 옷 갈아입어. 우린 오기 전에 갈아입었지롱." "교복 입고 갔다가 괜히 발목잡히지 말고 빨리 갈아입어라." 방글방글 웃으며 말하는 이연이덕에 은지니 마빡에 돋아있던 핏줄이 픽. 사그라들었다. 심드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지니와 이연이를 지나쳐 쇼핑백을 받아 들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뒤적뒤적. 입고있던 교복을 벗고 쇼핑백 안에 있던 옷을 꺼내 입으려는데... ....... 씨봉. "수이연!!!!" 허벅지를 겨우 가려주는 베이지색 체크무늬 주름치마와 일본에서나 볼법한 하얀색 세일러복. ........ 화장실 안에 김윤서의 절규가 울려퍼졌다. ............ ※사신 서울 영등포에 위치한 신진공고에서 10분거리에 있는 호프집 '사신' 앞. 은지니가 하얀 담배연기를 붕어처럼 뻐끔뻐끔. 내뱉으며 멈춰섰다. "여기가 서울연합 서열3위 신진공고 새끼들 아지트다. 오늘 무슨 모임이 있다고 여기 다 모여있다는데, 어쩔래??" "어쩌긴 어째. 당장 시작해야지." "후우. 그러니까 니가 안되는거야 김윤서. 노땅들이 요즘 우리 약점 잡을라고 혈안되있는거 몰라서 그래??" "찍소리 못하게 밟아버리면 되지,뭘." "병신. 세상 너처럼 단순하게 사는 애도 참 드물꺼다." 쯔쯔. 혀를 차며 은지니가 퉁.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이연이 넌 우선 사신 근처로 개미새끼도 얼씬 못하고 주변지역 통제해. 시작하기도 전에 경찰부터 출동하면 골치 아프니까." "엉!" 귀엽게 눈을 찡긋이며 대답한 이연이가 다 마신 우유통을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폴짝폴짝.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는 길가로 뛰어갔다. "니가 칠래, 내가 할까." "넌 여기있다가 뛰쳐나오는 새끼 있음 조져. 후아. 가슴에 거인이 뛰어다닌다야. 첫 스따뜨는 김윤서가!!.." "미친년." 오늘 두번째 듣는 미친년소리. 하지만 첫번째와 달리 두번째 미친년 소리는 경쾌했다. 닭살이 오도독 돋은 허벅지를 문지르며 끼익. 사신의 문을 열었다. 딸랑. 제법 따뜻한 히터바람을 기분좋게 맞으며 들어서자 시끌벅적했던 가게 안이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듯 조용해졌다. "...누구냐?" "얼. 쌔끈한데!" "일본에서 왔냐, 이쁜이??" 가게 중앙에 있는 테이블에서 휘파람소리와 함께 걸쭉한 남자애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빙글. 입가가 보기좋게 휘어지고.. 뚜두둑.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탁. 문을 발로 찼다. "안뇽. 방가워요, 김한영 쫄따구들." "뭐??" "이쁜이가 겁대가릴 상실했나" "어?? 야야. 쟤.. 쟤 걔잖아!! 인천 김윤서!!! 칠공주 일당백, 김윤서!!!!!!!" 당황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고.. 우루루. 애새끼들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좋아쓰. 작전2단계 개시!!.. 4-63. 신진공고 한강호 "멈춰." 오.. 갑자기 대빵등장?? 어수선한 분위기를 손짓 하나로 정리한 무게있는 녀석 하나가 앞으로 걸어나온다. 검은색 면티에 하얀색 자켓을 제법 맛깔나게 소화해낸 녀석은 날 위아래로 훑어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알기론 지금쯤 부산에 있어야될텐데. 여기까진 어쩐일이지??" "정보력은 인천연합보다 서울연합이 2.921배쯤 더 좋네." "혹시 한영이형을 찾아온거라면 잘못 짚었다." "설마. 고작 그 새끼 볼려고 아까운 차비내고 여기까지 왔겠어요??" "....겁이 없군."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말을 내뱉던 녀석이 갑자기 피식 웃는다. 씨봉.. 감히 천하의 김윤서님을 비웃어?? 후와. 녀석보다 더 힘차게 웃어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입꼬리가 찢어져라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름도 모르고 패면 미안하니깐. 이름 한번 까보세요." "한강호다. 신진공고 한강호." "오예. 만나서 반가워요, 신진공고 한강호씨. 나는 칠공주 행동대장 김윤서예요. 보너스로 오늘 한강호씨와 함께 신진공고 조질 김윤서이기도 하지요." 타닥. 바닥을 차고 뛰어오른 나는 부웅. 한강호를 향해 이단차기를 날렸다. 서둘러 가드를 올렸지만, 아쉽게도 한방 크게 맞고 뒤로 물러서는 한강호. 우루루. 테이블에 앉아있던 녀석들이 단체로 일어선다. "김윤서가 왜 하고많은 이름중에 일당백 김윤서가 됐는지 오늘 똑똑히 알려드릴께요. 기대 단단히 하십쇼.!!!!"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 녀석들이 몰려있는 곳으로 달려들었다. 여기저기서 날아오는 주먹들을 재주껏 피해 바닥에 주저앉은 나는 왼손으로 바닥을 짚고 다리를 허공으로 띄웠다. 주변에 몰려있던 녀석들의 다리를 후려차며 먼저 중심을 무너트리고, 덤블링하듯 가볍게 몸을 일으켜 바로 주먹을 날렸다. 빠르게 5연타를 날리자 반쯤 굽혀진 다리로 주위에 위태롭게 서있던 다섯명의 신진공고 녀석들이 얼굴을 감싸쥐며 주저앉는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김윤서하면 발차기죠."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사이에 용케도 내 말을 알아들은 몇몇 녀석이 몸을 뒤로 뺐지만, 김윤서 다리가 더 길었다. 부웅. 몸을 한바퀴 돌려 뻗은 뒤돌려차기에 두명이 한꺼번에 넘어진다. 넘어지기가 무섭게 아까 얼굴에 잽을 맞고 바닥에 주저앉았던 녀석들이 좀비처럼 다시 일어서 주먹을 뻗었다. "맞는척 하면서!..." 왼쪽 뺨을 향해 날아오는 주먹을 살짝 비껴내고, 무릎을 굽혔다. 주먹을 뻗었던 녀석이 자기 주먹이 제대로 들어갔다고 생각했는지 한쪽 입꼬리를 말아올렸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쥐떡이다. 무릎을 굽혀 최대한 중심을 낮춘 나는 빠르게 녀석의 품을 파고들어 그대로 어퍼컷을 날렸고, 녀석은 맥없이 뒤로 날아가버렸다. "한강호씨는 대빵이니까 최고 마지막." 순간 내 앞으로 덮쳐드는 한강호의 무릎을 차고 뛰어올라 빙글. 몸을 돌려 뒤에 있는 녀석의 머리통을 꽉 잡았다. 무릎찍기로 녀석의 얼굴을 박살내고, 어깨를 잡아 허공에서 크게 한바퀴를 돈 나는 매끈한 다리로 바로 뒤에 서있던 녀석의 목을 감쌌다. 따뜻한 여자 허벅지의 감촉에 헤롱헤롱한 녀석의 목을 힘껏 조르면서 좌우에 서서 당황해하는 두 명의 정수리에 팔꿈치를 힘껏 내리찍었다. 4분에 6명. 남은건 4명. 이번은 좀 재미있었네. "후딱후딱 가자구요. 이 바닥은 어차피 스피드가 생명이니깐?." 혼자 놀기의 진수를 보여주며 목을 조르고 있던 다리를 풀고 바닥에 착지하자 기다렸다는듯이 바닥으로 쓰러지는 세 명의 신진공고 녀석들. 주춤주춤. 한강호를 제외한 나머지 세명이 겁이라도 한웅큼 집어먹었는지 제자리걸음을 하며 내 주위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시간 소모전은 정말 질색인데.. 눈썹을 긁으며 눈을 어지럽게 만드는 녀석들을 쳐다봤다. "서열3위 실력이 이정도면.. 3위 이하는 뭐 볼짱다본거네요. 그쵸??" "뭐야?!" "남자면 남자답게. 김한영 쫄따구면 김한영 쫄따구답게. 그렇게 굴라구요, 이 붕신들아." 히죽. 내 웃음에 순간 확 열받은 세 명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하지만 나는 가소로운 눈빛으로 녀석들을 쏘아보며, 가장 무거워보이는 녀석의 손을 덥썩 잡아쥐었다. 녀석의 손을 잡은채로 손을 크게 한바퀴 돌리자, 우드득. 기분 나쁜 뼈소리와 함께 내게 손이 잡힌 녀석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터억. 그때 내 목을 감싸는 손. "어디까지 나대나 보자, 이년아!" 목을 감싼 녀석은 팔뚝에 핏줄이 돋을정도로 힘껏 목을 졸랐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피식 웃으며 방금까지 잡고 있던 손을 떼고 위로 들어올렸다. 터억. 목을 조르고 있는 녀석의 양 머리통을 부여잡은 나는 허리를 숙이면서 손아귀에 힘을 줬고, 빙글 내 머리통을 지나 쿠왕. 바닥에 떨어지는 녀석. "튈라면 튀어. 나말고도 놀아줄 사람 있거든, 밖에." 와들와들떨며 후다닥 뛰쳐나가는 녀석을 뒤로하고 굳은 얼굴의 한강호를 향해 눈을 찡긋였다. "드디어 대빵이네." "...이러는 이유가 뭐지?? 한영이형을 도발하겠다면-" "아까부터 느낀건데.. 신진공고 대빵은 헛다리를 참 잘짚어. 그치??" "....." "나는 단순히 서울연합을 조질려고 왔거든?. 김한영 쫄따구들이 아주 그냥 꼴보기 싫어서 그거 조질라고 온거거든. 그러니까 뭐 김한영을 만나러 왔다느니, 김한영을 도발하겠다느니 하는 그런 헛소리 좀 안해줬으면 좋겠어. 굉장히.. 불쾌해, 그 거." 싸늘하게 식은 한강호의 표정을 보니 제법 만족스러운 느낌이 가슴을 채운다. 탁.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친 녀석이 흑갈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자세를 취했다. "대빵이니까 특별히 알려줄께, 귓구멍 열고 잘 들어??.. 수이연 최고기록은 5연타. 은지니 최고기록은 7연타. 그럼.. 김윤서 최고기록은??" "...." "바로 16연타야, 대빵아." 타다닥.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한강호의 코앞으로 다가간 나는 한강호의 안면을 향해 오른주먹을 뻗었다. 양 뺨에 네대. 콧잔등에 두대. 눈두덩이 위로 두대. 이마 한가운데 한대. 인중에 한대. 미간에 두대. 그리고 양쪽의 관자놀이에 네대. 3.02초쯤 후에 한강호가 비틀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으으.. 이걸로 날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오산이야 김윤서."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한강호가 떠듬떠듬 말을 하더니 갑자기 레프트훅을 날렸다. 탁. 가볍게 녀석의 주먹을 잡은 나는 방실 웃으며 눈을 찡긋였다. "내가 말 안했네. 김윤서 16연타는 주먹뿐만 아니라, 발도 있다는거." 꽈득. 한강호의 주먹을 쥔 상태에서 녀석의 무릎을 차고 뛰어올랐다. 4-64. 괴물 ........... "후우.. " 처덕처덕. 뭐 마려운 개새끼처럼 낑낑거리는 신진공고 녀석들의 산처럼 쌓아놓은 뒤, 그 위에 올라앉아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맞은편에는 얼굴 반쯤이 찢겨져 주룩주룩 피를 흘리고 있는 한강호가 거친숨을 몰아쉬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한달안에 조질꺼거든, 김한영을?? 근데 너같은 쫄따구들이 많이 남아있으면 김한영 조질때 재미있긴해도 굉장히 귀찮을꺼야. ..그래서 나는 너같은 쫄따구들을 적어도 한달이상 병원에 처박아둘 생각이거든??.. 기니까 지금 한강호는 김윤서 손에 제대로 아작나야된다는 말씀이거든." "으윽.." "어때?? 김윤서한테 아작날 준비가 됐는가??" 아까 연속 발차기의 후유증인지 한강호가 배를 움켜쥐며 인상을 찡그린다. 눈썹 끝을 긁적이며 고통스러워보이는 한강호를 바라봤다. ...... 마음 약해지네, 이거. "...뭐 내가 예전처럼 싸움에 미친년은 아니여서 말이지.. 흠. 니가 병원에 조용히 처박혀있는다 그러면 조용히 꺼져줄 의사가 있거든??.. 어떻게 할래. 박살내줄까, 너가 물러설래?" 끄응. 자리에서 일어나 한강호를 향해 걸어갔다. 벽에 기대서 힘겹게 서있던 녀석은 내가 다가오자 주먹을 바로쥐며 날 향해 부리부리한 눈빛을 날렸다. 싸우자는건가??... "있잖어, 저기.. 난 제대로 시작하면 눈시깔에 뵈는거 없거든?? 그러니까 잘 선택하는게 어때?.." "...덤..벼." "나 한씨 좋아하거든??.."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날 바라보는 한강호. 나는 매끈한 턱을 쓰다듬으며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김윤서가 한씨 좋아한다구. 한씨 되게 좋아해. 그래서.. 한씨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거든. 근데 댁도 한씨잖어. 신진공고 한강호. 그러니까 내 말은 선택의 기회를 주겠다 이거지. 특별히 김윤서가 좋아하는 한씨니깐. 엉?? 이해갔어??" "...특이하네." "나는 특이보다는 특일이 더 좋은데." 피식. 한강호의 입꼬리가 힘없이 올라가더니, 이내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한강호의 어깨가 저만치 아래로 떨어져내렸다. 힘에 부친듯 결국 바닥에 주저앉은 한강호가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던 핏방울을 손등으로 쓰윽 닦아내고선 주머니에서 담배 한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하여간 요즘은 개나소나 다 담배야.. 하얗게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피해 한강호 앞에 쪼그려앉은 나는 매끈하게 빠진 한강호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우물우물. 담배를 입에 문채로 한강호의 입술이 작게 움직인다. "...싸움 잘하네, 듣던대로." "김윤서가 싸움질 하나로 살아왔거든. 그래서 싸움 하나는 끝내주게 자신있어." "...대게 싸움질 하는 새끼들 보면 백이면 백 강해지거나 세질수록 약점이 없어지거든??.. 근데 오히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또 세지면 세질수록 이상하게 어떤 약점이 하나 생기는데.." 갑자기 샛길로 빠지는 한강호의 얘기. "그게 바로 자만심이라는 거다. 싸움질 잘하고, 강한 새끼일수록 이 자만심이라는게 최대 약점이 되서 가끔 판세를 뒤집기도 하거든." "흐음.. 그래??" "내가 실력으로는 손에 꼽힐정도로 잘나가는 새끼들 이면서, 이 자만심 하나때문에 병신 된 새끼 여럿 봤거든? .....근데 김윤서 너는 좀 특이하다." "잉? 내가??.." 어느새 한강호의 샛길 얘기에 빠진 내가 토끼눈을 하고서 되묻자 한강호가 굳은 얼굴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순간 호흡을 멈춰 허공에 퍼진 담배 연기를 피한 나는 손을 들어 빨갛게 타들어가는 담배 끝을 잡아껐다. 치지직.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꺼진 담배 꽁초는 바닥에 던져버리고, 불에 데인 손을 호호. 부는데 갑자기 큰 소리로 웃어재끼는 한강호. "왜??" "하하.. 진짜 특이해, 김윤서." "아. 원래 담배연기 싫어해. 그나저나 하던 얘기나 계속해봐. 궁금해." "..그냥 특이하다고. 너한테는 자만심같은게 안느껴지거든. 너정도 실력이면 거의 전국 수준인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안느껴지네. 딱히 니 실력에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닌데 말야." 아항.. 결국 그 얘기였구만. 맥없이 풀린 한강호의 샛길 얘기에 금새 흥미를 잃은 나는 한강호의 말에 수긍하는 것처럼 고개를 몇 번 끄덕거려주고는 빙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신없이 싸우느라 더러워진 옷을 탁탁. 털며(☜내 옷이 아니므로) 가게 안을 둘러보다 슬슬 나가야겠다싶어 걸음을 옮기는데 등 뒤로 한강호의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왜 그런거냐?" "엉?? 뭐가?" "..특별히 상대를 높게 쳐주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만심같은게 안느껴지냐구." "글쎄.. 뭐, 굳이 대답을 찾자면 김윤서가 좀 돌대가리라서 싸울때 아무 생각도 안한다는 거??.. 뭐 그정도쯤 되겠네." "싸울 때 아무 생각을 안한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쟨 무슨 전생에 꼬치장수라도 했나.. 뭘 자꾸 꼬치꼬치 캐물어??.. 한강호의 계속되는 물음에 나는 문고리에 손을 올린채로 허리를 틀었다. "난 솔직히 너 말 이해 안돼. 싸울때 그런거 느낄 수 있다는게 오히려 더 신기한데??" "그럼 넌 정말 싸울때 아무 생각도 안한단말야??" "안하는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는거지. 아. 맞다!!.. 이연이가 그랬는데 다른 애들이 다 이길려고 싸울때 나는 그렇지가 않대. 아마 그래서 그런거 아닐까??." 얼라리?? 이게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헛다리 짚었는지 한강호가 얼빠진 얼굴로 날 돌아봤다. 괜시리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이는데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 한강호의 물음이 다시 한번 내 발목을 잡아끌었다. "...넌 이길려고 싸우는게 아니라고?? 그럼 왜 싸우는건데??" 한강호의 물음에 한참 눈을 깜박이며 생각을 하다가 난감한 얼굴로 눈썹을 찌푸렸다. 도대체 이딴게 왜 중요한거지??.. 실없는 한강호의 물음 위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지니와 이연이가 떠올라 나는 대충 예전에 이연이가 해줬던 말을 읊어주며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죽을라고. 죽을라고 싸우는 거란다. 이길라고 악착같이 싸우는 것도 아니고,일부로 질라고 허무하게 싸우는 것도 아녀서 김윤서 싸움은 특히 위험하다나. 그래서 내가 아까 말했잖어. 나 제대로 시작하면 눈시깔에 뵈는거 없을꺼라구." 뒤이어 한강호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난 후욱. 끼쳐오는 차가운 겨울 바람에 어깨를 한번 떨어주고 미련없이 사신을 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피투성이가 된 녀석을 발로 짓이기고 있던 지니가 바닥에 퉤. 침을 뱉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날 노려봤다. "후암. 가자, 포돌이 올라." "뭐하느라 이제 나와. 포돌이 오는게 무서웠으면 속전속결로 끝내고 나왔어야지." 지니는 늦게 나온 나에 대한 분풀이로 발 아래 쓰러진 녀석을 발로 한 번 후려까고는 사신 주변으로 몰려드는 사람을 열심히 밀어내고 있는 이연이를 향해 걸어갔다. "샛길 얘기가 꽤 재미나서." "샛길얘기??" 우리를 발견했는지 이연이가 폴짝폴짝. 뛰며 손을 크게 흔든다. 반갑게 웃으며 같이 손을 흔들어주는데 지니가 고개를 돌려 잔뜩 구겨진 인상으로 되물었다. 만약 내가 별 거지같은 잡소리 듣느라 늦게 나온거라면 멱살을 잡고 아스팔트에 팽개칠 기세로 날 노려보는 지니를 향해 어깨를 한 번 으쓱여주고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무슨 약점 어쩌구였는데.. 기억 안나." "기억해." "흠.. 특이하대. 나보고." "너같이 별난년도 없지, 세상에." "지는.." "뭐?!" 훽 올라가는 지니의 눈썹. 여기서 지니의 화를 돋구어봤자 좋을게 하나 없을 거같아 빙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라구." "별다른 얘긴 안했고??" "엉. 아 맨인블랙이 어른들한테 꼰지르기 전에 후딱 가자. 추워잉~" 오른손으로는 이연이의 짧디짧은 치마 끝을 아래로 쭈욱. 잡아 늘리고, 반대편 손으로 지니의 팔짱을 낀 나는 호들갑을 떨며 걸음을 재촉했다. 2004년 10월 29일. 김한영 조지기 한달 전. 첫번째. 서울 연합의 신진공고 박살. ................. ........... . ... "....김윤서까지 딱 두명이다. 한강호를 놀라게 만든 강자가 김윤서까지 딱 두명. 아예 약점이란게 없는 김윤서. 그리고 그 약점까지도 커버할 수 있을만큼 강한... 한영선배...." 윤서가 쌓아놓고 간 한무더기의 후배들을 보는 강호의 가슴 속에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약점이 없는 김윤서. 약점까지 커버할 수 있을만큼 강한 김한영. 과연 그 둘이 맞붙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호는 자신의 손 끝이 떨려오는 것을 느끼고는 급하게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기대되는만큼 두려울 싸움. ....윤서가 말한 한 달 뒤.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호는 자신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하얀 연기 속으로 떠오르는 장면들을 멀거니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4-65. 짧은 남자, 정지운 ※영등포역 영등포역 2번출구 앞. ........... "다음은 어디야??" "오늘 신진공고 접수한 걸로 영등포 일대는 정리됐을테니까.. 내일은 용산으로 가자." 손바닥만한 주름 치마와 하얀색 세일러복을 구겨넣은 쇼핑백을 이연이에게 안겨주고 지니를 향해 고개를 꺾었다. 용산??? "용산은 신진공고가 관리하는거 아냐??" "병신. 서로 붙어있다고 끼리끼리 노는 줄아냐?? 한번만 설명할테니까 제대로 들어라. 서울연합은 총 4개 학교가 나눠서 구역 관리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영등포일대는 서열3위 신진공고가, 성북구일대는 서열4위 성안상고가. 강남구일대는 서열1위 서울공고, 그리고 서대문구일대는 제일고가 맡고―" "아.. 두개골이 빠개지는 소리가 들린다." 좔좔. 늘어지는 지니의 설명에 지끈지끈 두통이 몰려왔다. 안면 근육을 팽팽하게 조이는 두통을 가라앉히기위해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너스레를 떠는데 갑자기 확 구겨진 인상으로 내 뒷통수를 무지막지하게 후려갈기는 은지니. "제대로 안들을래?" "니 설명은 골빠개져. 효선이한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법은 안배워왔냐??.." "너 진짜 뒤지고-" "아가씨!!!!" ............ 휘휘휙. 세명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간다. 기다란 계단 아래서 양 옆에 파란색 포돌이를 거느린 맨인블랙의 얼굴이 보이자 또다시 세명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졌다. 탁탁. 빙글빙글 미소와 다르게 두꺼운 몽둥이를 쥐고있는 지니의 맨인블랙. 뚜둑. 얄쌍한 몸매와 다르게 뼛소리가 날정도로 주먹을 쥐고있는 이연이의 맨인블랙. 그리고.... 소름끼치는 얼굴로 밧줄을 들고있는 김윤서의 맨인블랙들. "씨봉.." "씨발.." "아잉.." 나와 지니, 그리고 이연이 입에서 차례대로 욕설이 튀어나오고.. 우린 서로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맨인블랙들이 걸어오고있는 반대방향으로 뛰기시작했다. "그럼 내일 용산역으로 고고하기로 하고, 이만 찢어지자구. 안뇽!!" 눈 앞에 세갈래 길이 나오자 서둘러 지니와 이연이를 향해 인사를 하고 오른쪽 길로 뛰어들었다. 타닥타닥. 좁다란 골목을 뛰어다니며 뒤쫓아오는 맨인블랙을 열심히 따돌리는데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확 덥쳐오는가 싶더리... 눈을 뜨자 으슥한 골목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품에 안겨있는 김윤서를 볼 수 있었다. 씨봉.. 설마 잠복근무라도 한건가??.. "아저-" "쉿." "..얼씨구." 오기 전에 무슨 첩보영화라도 보고왔는지 꽤나 낯익은 목소리의 주인공은 내 입을 틀어막으며 낮게 속삭였다. 타다닥. 맨인블랙들이 아슬아슬하게 골목을 지나가고.. 발소리가 멀어지자 나는 기다렸다는듯이 입을 틀어막고 있는 손을 탁 떼어냈다. "땡큐베리감사했어요. 그럼 전 삼만!!" "어딜가." 잉?? 감사인사까지 멋지게 날려주고 골목 밖으로 나가려는 내 옷을 확 잡아끄는 잠복남. 어차피 지나칠정도로 넉넉한 교복이였기 때문에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지만 상당히 불쾌했다. 교복 마이 끝을 잡고있는 잠복남의 손을 가볍게 떨궈낸 나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몸을 돌렸다. "금잔디랑 놀시간도 부족할텐데 여긴 어쩐일이예요??" "...형." "세명만으로도 족한데 나는. 조수까지 주렁주렁 달고 다닐 생각 추호도 없으니깐 그 쪽은-. 아.. 차가워졌다. 그쵸??" 오늘도 여전히 검은색 목폴라티를 입술 위까지 끌어올려 입은 정지운이 조금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봤다. 말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정지운은 30초동안 여전히 당황 반, 어벙함 반을 담은 얼굴을 유지했고 어쩔 수 없이 난 어깨를 으쓱이며 리플을 달아줘야만 했다. 정지운.. 생긴건 은지닌데 하는짓은 황아라야 완전. "김윤서 말투가 쫌 싸가지없을정도로 차가워졌다구요. 그 쪽은 좀 무딘가보네. 지니같았으면 벌써 주먹이 날아왔을텐데." "..안때려." "예??" "난 너 안때린다고." 껌벅껌벅. 바보처럼 눈을 껌벅이며 정지운을 봤다. 참 뜬금없네, 이 남자.. 뜬금없는 정지운의 대답에 대충 고개를 끄덕여주고, 다시 몸을 돌렸다. 맨인블랙이 오기 전에 먼저 집에 도착해서 시침 뚝 떼줘야만했다. 그래야 어른들에게 불려가는 일도 없을 것이고, 더불어 내일 용산도 무사히 갈 수 있을테니.. "집에 안가요??" "가." "나" "..." "다 해줘야죠. 설마 가나다라 모르는건 아니죠??" 또다시 당황한 표정. 더이상 정지운과 농담따먹기를 하면 안되겠다싶어 먼저 골목을 벗어났다. 기다란 다리로 휘적휘적. 금새 내 옆으로 걸어오는 정지운. "맨인블랙. 아니, 너네 형한테는 말 잘해둬요. 김윤서는 학교 끝나자마자 바로 집으로 간걸로. 오키??" "...." "거짓말 안좋아할 타입인거 알지만. 아.. 핫도그다." 마악 포장마차를 지나가는데 내 눈을 맛깔나게 찌르는 바삭바삭 핫도그. 군침도는 핫도그를 쳐다보며 걷는데, 갑자기 정지운이 내 손을 잡아끈다. 인심 좋아보이는 주인아주머니께 천원자리 지폐를 내민 정지운은 케찹까지 알맞게 뿌려 내게 핫도그를 내밀었다. 멀뚱멀뚱. 핫도그와 핫도그를 들고있는 정지운을 번갈아보다 이내 베시시 웃으며 핫도그를 받아들었다. "오. 땡큐베리감사." "..." "말수도 적고, 말도 짧고.. 기럭지 빼고는 다 짧네, 이사람." 핫도그를 한입씩 베어물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조잘조잘 잘도 떠드는 김윤서 주둥이와 다르게 포장마차에서부터 단 한번도 열리지 않는 닫혀라 참깨 정지운 주둥이. 띡띡. 현도아저씨가 아침에 챙겨준 교통카드로 두 사람분 요금을 찍고 사람없이 널널한 버스에 올라탔다. 맨 뒷자석으로 걸어와 앉은 나는 기사아저씨의 따끔한 눈초리를 무시하고 큼지막하게 창문을 열었다. "후아.. 매연냄새." "안좋아." "알어요. 아니까 하는거지.." ".." "그거 알어요?? 매연냄새 맨날 맡으면 빨리 뒈지는거." "...." "그래서 난 매연냄새가 좋아." 싱글벙글 웃는 김윤서. 무뚝뚝한 얼굴의 정지운. 참 많이 대조되는 두 사람. ....아. 선우권 생각나네. 오늘은 우리 쫄따구 뭐하고 지내려나??.. 적당히 느끼하고, 적당히 고소한 핫도그를 와그작. 씹어먹으며 시퍼런 하늘 위로 떠오르는 선우권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지운의 아픈 눈빛이 뒷통수에 매달려 있다는걸 까맣게 모른채로... 4-66. 원아웃 ............ ※오후11시37분 지공아파트 332동 2605호 거실 가을 운동회때나 쓰일법한 두꺼운 밧줄에 꽁꽁 묶인채로 싸늘한 맨바닥에 꿇어앉은 김윤서와 그런 김윤서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는 맨인블랙 1,2,3... 김윤서를 쫓다지친 맨인블랙들이 집으로 컴백했을때부터 지금까지 몇시간째 지속되고있는 상황이 지겨워, 지루한 하품을 찍. 내뱉는데.. 순간 정지혁씨가 기다렸다는듯이 따갑게 나를 노려봤다. 정지혁씨의 따가운 눈초리에 어깨를 한번 으쓱여 주고 살살 눈웃음을 치는데.. 수이연 눈웃음은 애교직빵. 주연오 눈웃음은 섹시만빵. 김윤서 눈웃음은???? ......... 짜증백배. 단박에 싸늘해지는 맨인블랙들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난 해맑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졸리지두 않어요?? 우와, 벌써 11시야. 김윤서는 잠 제대로 못자면 확 돌아버리는데.. 김윤서 도는꼴 보고싶은가봐, 아저씨들은." "...분명 봐드리는건 첫날뿐이라고 말씀드렸을텐데요." 오랫동안 말하지 않아서 그런지 정지혁씨의 두톰한 입술 사이로 꾸왁. 잠겨버린 무거운 목소리가 흘러 나온다. 흐음. 두 개의 콧구멍으로 한껏 숨을 들이마쉰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정지혁씨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자 정지혁씨의 얼굴이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되게 차가워진다. "사람 가지고 노시는 분인줄은 몰랐습니다." "이제라도 아셨으니 다행이네요, 뭘." "..말없이 도망가신일. 지니아가씨와 이연아가씨 허락도 없이 만나신일. 마음대로 영등포로 가신일. 저흴 보고도 무시하신일. 그리고 제 말에 꼬박꼬박 말대꾸 하신일. 오늘 하루동안 아가씨가 저지르신 잘못들입니다. 불만은 없으시겠죠??" "김윤서는 부자가 아니여서 말까지 살 돈 없었구요, 누구 허락맡고 친구 만나야될만큼 대단한 인간 아니예요. 내 다리 가지고 영등포 가겠다는데 차비 10원도 안보태준 사람한테 혼나고 싶은 마음은 거지 발싸개만큼도 없구요, 아무한테나 아는체 할만큼 가볍지가 않어요. 그리고 묻는말에 꼬박꼬박 대답해주는게 어째서 잘못인지 모르겠슴다. 이쯤되면 불만이 아니라 불억정도 되는거 같은데..그치유??" 이죽웃으면서 따박따박. 대답하는 나와 살짝 손 끝만 갖다대도 손가락 전체를 꽁꽁 얼려버릴만큼 분위기가 가라앉은 정지혁씨를 흘끔흘끔. 번갈아보던 현도&강조아저씨가 마른침을 꼴깍 삼킨다. 씰룩. 정지혁씨의 오른쪽 뺨이 험상궂게 씰룩이는걸 가만히 지켜보다 얼굴 한가득 머금었던 미소를 퉤. 내뱉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정지혁씨 못지않게 나도 참 더럽거든요, 기분이. 그러니까 팰라면 패시고, 죽일라면 죽이시고... 니 맘대로 하세요." 쓰윽. 그제서야 등 뒤로 감추고있던 시퍼런 몽둥이를 드러내는 정지혁씨. 그 모습에 방금 퉤. 하고 뱉어냈던 미소를 다시 얼굴 가득 머금고 정지혁씨에게 다가섰다. "엎드려 뻗쳐할까요, 아님 무릎 꿇을까요.??.." "...엎드려 뻗쳐." "이햐. 고새 말이 짧아졌네." 전보다 확. 줄어버린 정지혁씨 말투를 한껏 비웃어 주고는 꽤나 불편하게 묶여있는 몸을 뒤틀며 골이 시릴정도로 꽝. 바닥에 대가리를 박았다. 퍽. 퍽.. 엎드려 뻗쳐 자세를 취하자마자 내 엉덩이를 힘껏 내리치는 둔탁한 몽둥이.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삼키기 위해 있는 이를 악물어야했다. 김윤서 가오가 있지.. 여기서 비명따위 지를 순 없다. 와자, 힘내자!!.. 그렇게 정지혁씨에게 억소리 나게 맞고있는데. 갑자기 나처럼 밧줄에 묶여 엉덩이 후려맞고있을 은지니와 수이연이 상상돼 웃음이 터질랑말랑 입가를 간지르기 시작했다. "그르게. 맞다. 나보다 더맞으면 억울한데.." "....." "전화나 때려줄래요??.. 은지니하고 수이연 맨인블랙한테 전화 좀 때려줘봐요." 엉덩이를 후려치는 느낌이 사라졌다. 탕.. 방금 전까지만해도 절도있게 김윤서 엉덩이를 후려치던 몽둥이가 반쯤 아작이 난 상태로 바닥에 떨어지고.. 묵직한 한숨과 함께 정지혁씨의 목소리가 조용히 귓가에 내려앉았다. "왜.." "버릇없는 것도, 옴팡지게 사고친 것도 다 김윤서가 한거니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나쁜짓은 다 김윤서가 한거니깐. 그러니까 혼나는 것도 김윤서가 3배로 혼나고, 맞는 것도 김윤서가 3배로 맞어야 공평한 거니깐. 안 그래요?? 암만생각해도 난 참 똑똑해."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욱신거림에 오른쪽 눈썹을 찌푸리며 떠듬떠듬 대답하자, 정지혁씨의 힘없는 한숨이 다시 한번 들려왔다. "원아웃이다." 원아웃. 그 한마디를 남긴채 뚜벅뚜벅. 무거운 발소리와 함께 거실을 나가버리는 정지혁씨. 달칵. 문소리가 나자마자 현도아저씨가 내게 묶인 밧줄을 끌러내리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괜찮으세요, 아가씨??" "..으.. 아저씨들도 한대씩 후려패지 그랬어요. 나중에 아까워해도 안 맞아줄껀데, 나는." "많이 반성하시는 것 같아서.. 그나저나 약을 발라야할텐데.." "아. 이렇게 맞아본 적 무지하게 오랜만이네." 다쳤을게 분명한데. 그렇다고 약을 발라주자니 민망하고, 또 그냥 놔두자니 찜찜하다는 얼굴로 날 보고있는 두 아저씨들을 향해 괜찮다는 손짓을 내보이고서 팔뚝에 선명하게 찍힌 밧줄 자국을 문지르며 피식.웃었다. "...옛날엔 이렇게 많이 터졌었거든요. 니 오빠 닮아가는 거냐고 학교 선생도 두들겨패고, 피는 못 속인다고 경찰 포돌이들도 두들겨패고 ..... .......하나도 부족해서 이젠 너까지 그러냐고 추여사도 두들겨패고... 옛날엔 존나 터졌는데...." 벌러덩. 거실에 대(大)자로 드러누워 한쪽 팔을 눈가에 얹어놨다. "그래도 그땐 신경이라도 써주더만.. 그러지 말라고 패기라도 하더만.... 에이... 눈물이 날랑말랑하네." 아려오는 코끝을 괜히 씰룩이며 눈을 감았다. 잡고 있는 건 하늘이면 돼. 죽을때까지 놓을 수 없는 건 하늘이면 돼. 하늘.. 하나만 가지면 돼. 김윤서한텐 그거 하나면 돼. 뭘 더 바래 여기서... 4-67. 마가 낀 하루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느껴지는건 엉덩이의 후끈거림. 그리고... 어제처럼 부엌에서 솔솔 풍겨오고 있는 고소한 냄새. "아이구.. 엉덩이야.." 아무리 졸려도 후시딘 바르고 잤어야 되는건데... 어제보담 한층 더 업그레이드 된 엉덩이의 통증을 느끼며 어그적어그적. 11년째 치질 투병 중인 환자마냥 부엌으로 걸어갔다. "할롱에블바리. 오늘도 안녕하십니까??" "...와서 먹어라." 탁. 밥주기 싫은 눈치를 팍팍.내며 수저를 내려놓는 정지혁씨. 아침부터 냉랭한 바람을 쓰왁. 날리고 있는 정지혁씨를 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식탁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정지혁씨가 방금 전 내려놨던 수저를 들어 찌개를 한숟갈 퍼먹었다. 후루룩짭짭후루룩짭짭. 맛좋은...... 라면????? "이햐. 아침부터 위장 뒤집을라고 작정했네, 아주." 세상에나. 이런 쪼잔한 아저씨같으니라구. 아무리 내가 사고를 크게 쳤기로써니, 어떻게 아침댓바람부터 라면을 내줄 수가 있어????.. 짭쪼름한 라면국물을 꿀꺽. 삼키고 입술을 비죽였다. "..대접을 받고싶으면 그에 걸맞는 행동을 보여줘야지." 냉수 한 컵을 탕.내려놓고 톡 쏘아붙이는 정지혁씨. "보시다시피 집에 그릇들이 넘쳐나서요, 굳이 그 쪽한테까지 대접받고 싶은 생각은 없네요. 그리고 누가 뭐래요??.. 위장 뒤집히는거 빼곤 저 라면 엄청 좋아해요. 인스턴트의 최고봉!!.. 하면 바로 라면 아닙니까?? 게다가 제가 또 최고봉이란 말에 껌벅죽잖어요." 아예 냄비째로 들고 후루룩. 면발을 한웅큼씩 집어삼키는 날 마음에 안든다는 눈초리로 픽. 쏘아보던 정지혁씨는 현관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미련없이 내게서 고개를 돌리고 휘적휘적. 부엌을 나갔다. 베레레. 정지혁씨의 뒷통수를 향해 혀를 낼름이고는, 냄비 안의 라면국물을 단숨에 들이켰다. "아. 엉덩이가 씰룩씰룩. 김윤서 방뎅이는 칠면조 방뎅이♪♬♩♪" 정체불명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냄비를 개수대에 던져놓고, 화장실로 향했다. 어제 옷도 안갈아입고 그대로 잠든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였다. 모범생의 등교시간 7시30분 되기 10분 전. 거울 속에 비춰지는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내 꼬라지를 보고있자니 흡족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쏴아. 시원하게 내려오는 물줄기에 얼굴을 박박 씻어주고, 치카치카. 딸기맛 치약을 묻힌 칫솔로 이도 닦아주고. 물을 묻혀 빗자루처럼 마냥 뻣뻣하기만한 가발을 정리해주고, 마지막으로 탁탁. 펑퍼짐한 교복치마에 주름 잡아준 뒤 화장실을 나오자마자 나를 반기는 우리 현도아저씨. "오늘은 제시간에 준비하셨네요. 늦기전에 가죠." "오케바리바리." "오늘은 하교시간보다 1시간 일찍 강조가 데리러 간다고했으니,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라." 그럼 그렇지. 댁이 김윤서 기분을 쇠꼬챙이로 후벼파주지 않으면 맨인블랙의 최고봉, 정지혁씨가 아니지. 암, 그렇고 말고.. 사납게 노려보며 참 재수 없으시게도 말하는 정지혁씨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고는, 현도아저씨가 건네주는 가방을 둘러맸다. "근데.. 오늘은 안보이네요??" "...지운이는 아침연습때문에 학교갔다." "아예.근데 눈치 되게 빠르시네. 내가 정지운 물어보는건지 어떻게 알었어요??" 구질구질한 검정구두를 구겨신으며 실쭉. 웃자 정지혁씨가 뭐 그런걸 가지고. 하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인다. ....... 재수도 이런 재수가 없지요, 아주. 현도아저씨가 열여놓은 현관문 사이로 오른발을 쓰윽. 내민 나는 고개를 돌려 정지혁씨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잘있어요, 자기!!!...." 순간 엘레베이터 버튼을 누르던 강조아저씨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찬바람만 씽씽.불던 정지혁씨도 헉.하고 굳었다. 살짝만 건드려도 조각조각. 떨어져내릴만큼 아주 쨍하게 굳었다. 그 모습을 아주. 아주~ 아주아주~~ 만족스럽게 쳐다보며 탁. 문을 닫았다. 음후후후히하. 그니까 누가 김윤서한테 물맥이래요, 정지혁씨??.. 아마 지금 돋은 닭살을 처리할라면 하루왠종일 앉아서 팔뚝만 긁고있어야될꺼야. 낄낄낄... 정지혁씨에게 아주 제대로 한방 먹여주고, 돌아서는데 안직도 얼빵한 표정을 짓고 서계신 강조아저씨가 보였다. 강조아저씨를향해 방긋 웃어보인 나는 아저씨의 손가락을 잡고 꾸욱. 엘레비터버튼을 눌렀다. "나 정지혁씨한테 인사안했는데, 아저씨." "예에??" "정지혁씨 뒤에 있는 도자기한테 했어요, 인사. 그니까 그런표정 안지어두 된다구요." 이연이가 항상 장난칠때마다 하는것처럼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한쪽 눈을 찡긋였다. 처음 3.892초동안은 이해를 못했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4초가 지날때쯤에야 아하.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는 현도아저씨. 풉. 귀여우시긴.. 1층에 내려오자마자 현도아저씨는 차를 빼러 주차장으로 달려가셨고, 난 로비 유리문에 기대 하늘을 바라봤다. "아주 기가막히는 날씨네.. 이런 날씨엔 꼭 김윤서 인생에 마가 끼던데... 조심해야겠어." 빵빵. 어느새 차를 몰고와 크락션을 울리는 현도아저씨. 아저씨를 향해 휘적휘적. 크게 손을 흔들어준 나는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계단을 뛰어내려갔.. 쿠왕!!.. ............ "아가씨, 괜찮으세요?!!.." 화들짝 놀란 현도아저씨의 외침에 에릭의 콧수염보다 더 까칠까칠한 아스팔트 바닥에서 얼굴을 떼네고 빙글 웃었다. 씨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제대로 껴주시는데??.. .......... 왼손으론 콧잔등을 문지르고, 오른손으론 엉덩이를 두드리며 뒷좌석에 올라타는데.. 이때까지도 나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궁둥이가 아작나고, 콧잔등이 벌겋게 까지는 일따윈 오늘 김윤서에게 일어날 파라만장한 스토리에서 개미 콧구녕만도 못한 아주 쬐끄만 점일뿐이란 것을.... 4-68. 억울한 오해 ※황제공고 2-F 드르륵.쏴아... .......... 꿈벅꿈벅. 잠시 숨을 멈추고 눈을 꿈벅거리다 정신을 차리고서 찬찬히 눈시깔을 굴리며 방금전 벌어진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는 검정색 구정물. 그리고 그 옆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은색 양동이. 카메라폰을 한손에 쥐고 교탁앞에 서있는 최솔림. 등교 시간이 안직 덜됐음에도 불구하고 빽빽하게 들어차있는 형형색색의 대가리들. ......... 아항. 이렇게 된 일이구만. 주변의 풍경을 둘러본지 약 4.21초만에 상황파악을 마치고서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환영인사치고는 냄새가 좀 구리네. 어쨌든 좋은아침??.." 철퍽. 바닥에 고인 구정물을 일부러 강하게 튀겨주고 당황해하는 최솔림을 지나쳐 자리로 들어와앉았다. 앞에 서있는 최솔림과 별반 다를게 없는 얼굴로 벙. 나를 쳐다보고 있는 강홍표(☜전학 첫날부터 내 고막을 걸레짝으로 만들뻔한 왼쪽새끼)에게 까닥. 인사를 해주고 책상걸이에 가방을 걸었다. 아침 7시50분.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위태롭게 걸려있는 벽시계를 흘끔 바라보고 책상 서랍에 손을 쑥. 밀어넣었다. .....예상대로 난도질이 되있는 교과서가 손에 잡힌다. 유치원생도 울고가겠다, 최솔림. "찐따... 너 대단하다. 그걸 어떻게 피해??.. 저거에 안걸린 애, 찐따 너가 처음이야!!.." "그르게. 내가 생각해봐도 난 쫌 대단한 거 같애." "뭐??? 아. 아하하하!!! 우리 찐따, 유머감각 아주 수준급이네." 철썩. 김윤서가 여자란 사실을 껌벅 잊은건지 강홍표새끼의 얄쌍궂은 손이 어깨를 힘껏 후려치고..예상치못한 공격에 몸이 휘청인다. .... 망할놈의 새끼. 속으로 진창 욕을 퍼부어주고 어깨에 올라와있는 녀석의 손을 살짝 뗐다. "내가 생긴 거랑 안맞게 운동신경 하나는 쫌 끝짱나거든??.. 그러니까 이왕이면 다음부턴 좀 고차원적인 준비를 해줬음한다고 전해줄래, 쟤한테??" 안직도 교탁에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최솔림을 흘끗. 가르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내 말이 무슨 만사마 개그라도 되는양 아주 자지러지게 웃던 강홍표가 낄낄. 웃음을 흘리며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걸레가 되버린 교과서를 수습하기 위해 스카치테이프를 찾기위해 손을 뻗어 가방을 뒤적이는데, 강홍표 옆에 앉아서 어제처럼 삐딱한 눈초리를 쏘아대고 있던 오른쪽 새끼가 갑자기 내 쪽으로 자리를 틀고 앉는다. "야, 찐따." "엉??" "너 솔직히 말해봐. 니 진짜 모습이 뭐냐??" "아. 찾았다. 내 진짜 모습?? 지금 니가 보고있는게 진짜 모습이지, 뭐야." 순간 속으로 뜨끔.했지만 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릴 내며 대꾸했다. 그러자 미간을 좁히며 내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오른쪽 새끼. 찌익. 오른쪽 새끼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소리나게 테이프를 뜯어 찢어진 부분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있는데 갑자기 오른쪽새끼가 내 오른손을 턱. 잡았다. "솔직히 말해. 너 사실은.." "꺄악!!!... 남한강 너 지금 누, 누구 손을 잡고있는거야!!!!?.." 아주 제대로 호들갑을 떨며 등장한 최솔림이 내 손 위에 올려져있던 오른쪽 새끼, 남한강의 손을 소리나게 찰싹. 때리며 돼지새끼처럼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최솔림에게 맞은 손등을 슬슬 문지르며 내게서 손을 떼는 남한강. 아버님이 뉘신지, 참.. 이름 한번 걸작이네. "씨발. 이 쌍년, 너 지금 내 남친한테 꼬리치냐?!!!" "니가 봐서 알겠지만, 내 쌍판이 누구한테 꼬리칠만큼 여유로운 쌍판이 아니여서말이야." "뭐.뭐무머?!!!! 뭐 이런 쌍년이 다있어!!!.." 울그락불그락. 말빨에서 내게 밀린다싶었는지 대뜸 소리를 높이며 손을 번쩍. 치켜드는 최솔림. 우리 중에서 말빨 제일 딸리는 나한테 이정도면 넌... 정리아한테 갔음 벌써 관짜고 있었어, 이년아. 멍청한 최솔림을 보며 낮게 혀를 찬 나는 은글슬쩍. 한쪽 볼따구를 내밀었다. 아까 너가 야심차게 준비한 구정물세례를 안받아줬으니깐, 싸다구 한대정도는 마음이 한 865.521평되는 내가 양보 해줘야지, 뭐. 쏴악. 턱. 바람소리까지 내며 무시무시하게 내려오던 최솔림의 손목이 중간에서 누군가에게 잡혔다. "씨발. 누구야!!!.-헉. 자, 잔디야?!!!!.." "..학교에서 시끄럽게 굴지마라." ...만약 지금 최솔림의 손모가지를 가로챈 아이가 검정색 교복바지를 입고 있는 남자애였다면 십중팔구 하트눈이 되서 뿅. 했을텐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입맛을 다시며 최솔림의 손모가지를 잡고있는 금잔디를 쳐다봤다. "미, 미안. 하지만 이년이 자꾸.. 열받게 해서." "열받게 한다고 다 후려칠꺼면 나부터 찾아왔어야지, 최솔림. 너 나한테 불만 많다며??" "어, 어우야~ 내가 너한테 무슨 불만이 있다구.. 다음부턴 조심할께. 미안해.." 자존심 제대로 상한 표정을 억지로 구겨넣으며 입술을 깨무는 최솔림. 그런 최솔림을 가만히 지켜보던 금잔디는 픽. 웃으며 최솔림의 손모가지를 풀어줬다. 와요... 쟤는 남자로 태어났으면 아주 인기 최고봉이였을꺼야, 아마. 저 온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카리스마하며, 단번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강렬한 눈빛!!.. 속으로 인천짱 금잔디에게 +23.92점을 주고 혼자 실실웃고 있는데, 갑자기 금잔디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전학생 너도 마찬가지야. 학교에서 시끄럽게 굴지마라." "나도 조용히 지내고야 싶지만..세상이 자기 마음대로만 굴러가는 건 아니잖아??.. 앞으로 노력해볼께." "...그정도 깡이면 얼굴이 아깝네." "칭찬이지??.. 칭찬이면 고마워." 픽. 아까처럼 금잔디의 입꼬리가 올라가고.. 분한 듯. 주먹 쥔 손으로 부들부들 떨던 최솔림이 고개를 훽 돌려 자기 자리로 걸어갔다. 최솔림이 떨어져나가자 뒷문에 서있던 금잔디 친구, 아니 쫄따구로 보이는 남자애 하나가 금잔디에게 다가와 무어라 쭝얼쭝얼. 속삭인다. "..뭐?? 지운이가??.. 어디야." "지금 체육관 뒤에.." "후. 일이 이렇게 될때까지 넌 뭘한거야??.." "미안. 나도 지금 알았어." "....앞으로 제대로 해." 사납게 남자애를 노려본 금잔디는 욕설을 내뱉으며 빠르게 반을 빠져나갔다. 남자애가 뒤따라나가고.. 방금 전까지 잠자코있던 강홍표가 내쪽으로 흥분한 얼굴을 쑥. 내밀고는 침까지 튀겨가며 떠벌떠벌. 수다를 떨어대기 시작했다. 이 새끼.. 어제부터 느낀거지만 남자새끼가 무슨 수다를 수이연보다 더 떨어??.. 수이연하고 붙여놓으면 아주 그림 되겠네, 그림 되겠어. "야야야!!. 진짜 너 진짜 최고다!??.. 금잔디가 정지운말고 다른 사람 일에 나서는거 너가 첨이야!!!" "입만 열면 처음처음. 처음이라서 영광이야, 정말." "야야!!!.. 너가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인데, 쟤가 얼마나 남 일에 무신경한 애냐면.. 오!! 그래. 쟤는 정지운 일만 아니면 바로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절대 신경 안쓰는 애라구!!.." "자기가 안죽였으니까 그랬겠지." "무어?!!!... 야. 우리 찐따, 사고방식 진짜 독특하네." 정말 감탄한 얼굴로 날 쳐다보는 강홍표. 그래, 니 마음대로 떠드세요. 더이상 실없는 강홍표 수다에 대꾸해주기를 그만두고, 스카치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교과서를 뒤적이고 있는데 앞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두꺼운 몽둥이를 들고있는 담임이 들어왔다. "...어제 윤서 때렸던 애들 앞으로 나와." 잉????.... 나???.. 고개를 번쩍. 쳐들자 단단히 화가난듯. 굳은 얼굴의 이영애닮은(☜정확히 눈 두개,코 한개,입 한개 닮은..) 담임이 보였다. "안나올래?!!!.. 너희들한테 정말 실망했다. 외국에서 전학온 애를 그것도 전학 첫날!! 개패듯 때려???.. 내가 말했지!! 쓰레기취급 받기 싫으면 쓰레기처럼 굴지 말라고!!!.. 후. 10초준다. 당장 나와." 최솔림과 그 친구들이 나를 매섭게 쏘아보더니.. 입모양으로 씨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담임에게 걸어갔다. 헐.. 너무 예상치못한 상황에 입을 헤.벌리고 담임과 최솔림을 보고있는데 내가 웃고있는줄 알았는지 남한강새끼가 날보고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씨발년.. ......내가 씨발년이면 넌 씨발톱이냐, 새끼야. 보고있는 나까지 태워버릴만큼 활활. 불타오르고 있는 남한강의 시선에 가운데 손가락을 날려주고 (☜물론 속마음으로.) 다시 앞을 쳐다봤다. "최솔림. 또 너야???.." "누가 그래요." "뭐??" "누가 그랬냐구요. 김윤서 때렸다고, 누가 꼬질렀냐구요!!.." "하. 이게 어디서 지금!!!.. 윤서가 어제 울면서 전화했어!!. 애들이 괴롭힌다구 학교 나오기가 무섭다면서 어찌나 울던지.. 너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최솔림??" 잉????? 내 머릿 속에서 수천개의 물음표가 떠오름과 동시에 반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날아와 꽂혔다. 띠바... 저 선생이 지금 뭐라그러는거야??? 어이가 아주 통째로 증발하는 소리 하네, 저 아줌마가??.. 놀라서 벌어진 입을 다물새도 없이 반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느끼며 담임의 웃기지도 않은 얘기들을 곱씹고 있는데, 갑자기 들고있던 몽둥이로 최솔림을 후려치는 담임. "넌 쓰레기야!!!.. 너같은 애 정말 지긋지긋하다구!!!!!.. 당장 따라나와!!!!!.." 분을 이기지못하고 한참을 씩씩거리던 담임이 최솔림의 멱살을 잡고 반을 나가자마자, 내게로 쏟아지는 야유와 비난. .....내가 빵을 훔쳐먹고서 깜빵에 들어가면 말을 안해. 내가 놓쳐놓구서 다음 버스 기다리는거면 말을 안해. 내가 사고 쳐놓구서 정리한테 깨지는거면 말을 안해. 복창터지게 이게 뭐여.. "씨발년. 너 진짜 죽을래??.. 와. 씨발년." "썅년아 고자질 존나 스페셜하게 한다, 너??. 그거 몇대 처맞았다고 울면서 담탱이한테 꼬지르냐?" "우리 찐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탕. 어디선가 날아온 깡통캔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쓰레기들이 날아들었다. 금방이라도 터질듯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꽈악. 누르며 고개를 최대한 수그렸다. 근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웃긴네, 짭퉁 이영애(☜담임)?? 있지도 않은 얘길 지어내는 걸로도 모자라서.. 감히 지네반 학생을 쓰레기취급해???... 방금 전, 고래고래 악을 써가며 소리치던 담임의 새빨간 얼굴을 떠오르자 주먹이 절로 쥐어졌다. ...... 아무리 생각해봐도 마가 낀게 틀림없어. 그것도 초특급 울트라 파워만한걸로 너댓개씩. 4-69. 강조 아저씨 ........... ※황제공고 본교무실 두 손을 번쩍 처들고 무릎 꿇은 최솔림. 불쌍하다는 눈초리로 맞은편에 앉은 학생을 바라보고 있는 담임. 그리고 그런 담임의 눈초리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는 김윤서. ....도대체 이게 무슨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다냐. 후우. 자꾸만 터져나오는 한숨을 속으로 삼키고 고개를 들자 담임이 내 손 위로 자신의 따뜻한(☜히터바람을 쐬서 뜨겁기까지한)손을 얹는다. "..정말 내가 더 신경을 써줬어야 했는데. 선생님이 미안하구나." "아뇨. 뭘요." "...선생님은 윤서같이 똑똑하고, 예쁜 애가 이런 학교에 와줬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겨지지가 않아." 가식덩어리. 숟가락으로 떠보면 아주 10820숟갈은 나오겠네. 내 불만스러운 눈빛을 느끼지 못한건지 계속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담임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내 귓가에 은밀히 속삭였다. "..부모님껜 감사하다고 전해주렴. 학교에 기부 해주신 것도 그렇고, 나한테 따로 주신 것도 그렇고 말이다. 호호.." ..... 간드러지는 담임의 목소리에 눈동자가 싸늘히 식어가는게 느껴진다. 썩어도 제대로 썩었어, 씨봉.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거니??.. 어제 전화받고서 깜짝 놀랐단다 이 선생님은." "아.. 제가 어제 몇시쯤에 전화했죠, 선생님?" "어제?? 음. 내가 엄마이걸확을 다 보고 잘 준비를 할때였으니깐.. 11시쯤이 되겠구나. 그건 왜- 최솔림 손 똑바로 못들어?!!!" "..씨발. 진짜 역겨워서 못봐주겠네." "뭐라고?? 최솔림 너!!." "얼마나 받아처먹었는지 모르겠지만 작작해요, 선.생.님!.. 이름뿐이라도 이렇게 불리고 싶으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담임을 무섭게 째려보던 최솔림은 정말 더이상은 못들어주겠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뚜벅뚜벅. 교무실을 걸어 나갔다. 담임은 최솔림의 한 방에 어머머.를 연발하며 손가락질을 하다 주위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창피했는지 빨개진 얼굴을 감추며 어색하게 웃었다. 얼굴에 몰린 열을 식히기위해 손부채질을 하던 담임은 물끄러미 쳐다보는 내 시선이 민망했는지 호호.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흠흠.. 아무튼 너한테 거는 기대가 커, 윤서야. 우크라이나에 있을때는 전교1등도 하고 그랬다며??.. 호호호. 편입 시험에서도 만점을 받았다더니.. 교장선생님이 언제 한번 보자고 그러시더라." "아예.."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깔깔하다. 우크라이나 전교1등 얘기는 맨인블랙이나 어른들 중 김윤서 부모님 역할 맡은 사람이 대충 둘러댄 거짓부렁일테고, 편입 시험은 나대신 효선이가 봤었으니까 김윤서한테 해당되는 얘긴 하나도 없네. 그나저나 어제 11시면.. 밧줄에 묶여서 정지혁씨한테 된통 깨지고 있을때가 분명할것인데.. 혹시 정리아가 날 못미더워 해서 김윤서 복제인간이라도 만들건가?!!..(☜SF영화 너무 봤다.) 담임에게 꼬지른 고자새 김윤서2호가 누군지 한참 추측하고 있는데.. 따르릉. 담임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어머??.. 이 시간에 누구지. 아. 윤서, 넌 이제 들어가보렴. 바쁜 시간 붙잡아서 미안하다." 마지막까지 가식103%가 첨가된 미소를 지어주며 손을 흔드는 담임. 꾸벅.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인사를 해주고 자리에 일어선 나는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가며 교무실을 나왔다. 후와.. 교무실을 나오자마자 확 트인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있는데 검은 그림자 한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씨발년" "욕 많이 먹을수록 오래산다는데.. 너희덕에 내 수명이 한 301년은 늘었을꺼야. 고마워." "너 오늘 끝나고 남아. 찍소리도 못하게 밟아줄테니깐." "나도 그러고 싶은데 오늘은 약속이 좀 있어서." "하. 하.. 아 씨발. 존나 화나네, 이거." 샛노랗게 탈색된 머리를 쓸어넘기며 최솔림이 헛바람을 내뿜는다. 뜨겁게 와닿는 최솔림의 입김. 살짝 얼굴을 빼며 헛기침을 하자 어제 그랬던 것처럼 최솔림이 내 머리칼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고개가 확 꺾어지면서 목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최솔림은 구두신은 발로 내 정강이를 있는 힘껏 후려쳤다. 억!!!.. "각오 단단히 하고 있어, 씨발년아. 너 절대 학교 곱게 못다니게 만들꺼니깐." 쿠왕. 내 머리칼을 잡은 상태로 벽을 향해 돌진하는 최솔림. 덕분에 단단한 시멘트 벽과 정면으로 충돌한 대가리에선 띵띵. 종소리를 났다. 신음소릴 내며 얼굴을 찡그리는 내가 만족스러웠는지, 머리칼을 놔준 최솔림의 입가가 휘어졌다. 이 무식한 계집애.. 김윤서하고 맞먹을 계집애... 으.. "미친년." 만약 대한민국에 욕 잘하는 사람 선발대회같은게 있었다면 1위는 은지니, 그리고 2위는 최솔림이 차지할게 분명하다. 어쩜 입을 열기만 하면 저렇게 육두문자만 골라서 쏟아지는지.. 멀어지는 최솔림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웃음을 터트린 나는 몸을 돌려 옥상으로 향했다. 하늘이 못견디게 보고싶었다. .......... ※옥상 전학초부터 수업이나 재끼고.. 정말 대단하다, 김윤서. 옥상에 들어서자마자 가득 펼쳐진 하늘 풍경에 가슴 한켠이 무거워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아가씨." "예, 아가씨. 잉?? 강조아저씨!!!?..." "수업 재끼셨습니까??" 난간에 걸터앉아 동그란 눈동자 가득 하늘을 담아내고 있는데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내게 걸어오는게 보였다. 아차.싶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데 예쁘게 웃으며 내 옆에 앉는 강조아저씨. 꼴딱. 침을 삼키고 강조아저씨의 예술적인 옆라인을 쳐다봤다. 꼬지르겠지???.. 그러면 난 어른들한테 깨지고, 정리아한테도 깨지고, 어쩌면 동해바다에 처박힐지도 몰라. .......하늘 잡기도 전에 세상하고 빠빠이하게 생겼네, 이거. "교실에 돌아가시면 양호실 다녀왔다고 하세요. 뭐라고 크게 혼내진 않을꺼예요." "..에??" "가끔 숨도 쉬셔야죠. 첫날부터 너무 답답하셨잖아요." 와... 이 아저씨 멋지네???.. 눈썹이 기분좋게 휘어진다. "엉덩이는 괜찮으세요?? 지혁이형이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김윤서 엉덩이가 원래 좀 쎄서요. 후시딘 한방이면 깨끗하게 나을껀데요, 뭘." 벌러덩. 강조아저씨의 예쁜 웃음에 바짝 조여왔던 긴장이 쑤욱. 풀려 실쭉 웃으며 난간 위에 드러누웠다. 맨인블랙치고 맘씨 좋은 사람 못봤는데.. 이 아저씬 쬐끔. 다르네. 강조아저씨에게 +21.2점을 주고서 고등어 등처럼 푸르딩딩한 하늘색깔을 눈동자에 한가득 담아놓은채로 눈을 감았다. 깜깜한 어둠 속에서 보이는 밝은 하늘 색깔을 맛깔나게 느끼며 아저씨를 향해 살짝. 입을 열었다. "착한 사람이다, 아저씨." "예??.. 아. 아가씨도 좋은 분이세요." "아뇨. 나는 나쁜 분이예요." "..왜 그런 소릴 하세요." 걱정스러움이 가득 묻어나는 강조아저씨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푸식. 웃음이 터져나왔다. 세상에 저런 목소리 내는 사람 칠공주밖에 없을 주 알었는데... 가슴에 구멍이 뻥.하고 뚫린 것처럼 허한 바람이 느껴진다. "...맨날 김한영보고 나쁜새끼다, 나쁜새끼다하지만 까놓고보면 김한영 못지않게 사실 김윤서도 나쁜년인거 모르셨죠??.. 사실 나도 이거 알아채고 인정하는데 꽤 걸렸어요. 아저씬 오늘 이쁘게 웃어줬으니깐 내가 특별히 알려주는 거예요." "그런 말마세요. 아가씨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분이신데요." "하하하. 만난지 삼일밖에 안된 사람한테 듣는 소리치고 너무 빠른데요??.." 내 말에 강조아저씨는 그런가요?하면서 쑥스러운듯 얼굴을 붉혔다. 현도아저씨나 강조아저씨나. 정지혁씨만 빼면 아주 최고봉으로 귀여운 맨인블랙인데 말이야.. 아쉬운듯 입맛을 다시다 허리를 튕겨 몸을 일으켰다. "아저씨." "예??" "미안해요." "뭐가.." "그냥요. 그냥 그거 하나만 대가리. 아니 머릿속에 박아놔줘요. 사실은 김윤서도 아저씨들한테 많이 미안하다고. 아. 눈치보여서 땡땡이도 더 못까겠다. 아저씨 그럼 수고해요!.. 나 걱정해준건 정말 고마워요. 새파랗게 어린애한테 꼬박꼬박 아가씨라고 불러주는 것두요!!.." 난간에서 내려온 나는 강조아저씨를 향해 해맑게 웃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눈을 꿈벅거리며 내 말을 가만히 들어준 강조아저씬 아까 지었던 그 예쁜 웃음을 또 한번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줬다. 흔들흔들. 크게 좌우로 손을 흔들며 옥상을 나와 교실로 내려가는 발걸음이 아침에처럼 경쾌했다. 하지만 쿠왕... ...........경쾌한 발걸음이 좀 심각하게 닮았다싶더니 어쩜 넘어지는 것도 똑같은지. 아파트 계단보다 훠배 더 길어주시는 학교 계단에서 제대로 굴러주시고.. 이번엔 구르면서 벽에 부딫쳤는지 어깨뼈가 심하게 삐그덕거리는게 느껴진다. 아욱. 짧은 신음소릴 흘리며 오른쪽 어깨를 잡아쥐었다. "띠바.. 이러다 용산가서는 지하철에 깔리는거 아냐??.." 말도안돼!!..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어째 이번 일은 좀 현실적으로 강하게 와닿는게.. 불안감3.02%증가다. 4-70. 이상한 의심 ...... ※황제공고 2-F 후.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온 한숨때문에 앞머리가 들썩인다. 이틀 연속으로 제시간에 나가지 못하고 교실에 묶여있자니 뭐랄까.. 입꼬리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랄까.. 버릇처럼 눈썹을 긁적이며 앞문,뒷문 모조리 막아선 최솔림의 아이들을 바라봤다. "..내가 요즘엔 꽤 바쁠 예정이거든??.. 그니까 조질려거든 이왕이면 쉬는시간이나 점심시간. 그런 짜투리시간에 조져주라. 엉??" "내가 어제 그랬지. 너 한번만 더 나대면 아가리 찢어버린다고. ...지금꺼까지 합치면 너 오늘 세번이나 나댔어, 씨발년아." 여고괴담 4에서 출현제의라도 들어왔는지, 온 몸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고 있는 최솔림이 까딱까딱. 책상에 걸터앉아 발을 흔들며 사납게 말했다. 처녀귀신도 울고갈 최솔림의 소름끼치는 눈빛. 내가 자기를 보고있다는걸 알아챈건지 최솔림이 피식. 웃으며 교복 주머니에서 빨간색 커터칼을 꺼내들었다. 와.. 저 계집애 오늘 내 얼굴에 스크래치 하나 크게 남겨주겠는데??.. "그걸로 나 긋게??.." "응. 너 아가리 찢어버릴꺼야." ......머리꼭대기까지 뻗쳐오르는 당황스러움에 목구멍이 콱. 막힌듯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웃으면서 저런 말 비슷하게(☜하지만 저정도로 섬뜩하게말고.)내뱉은 적은 손에 꼽을 수도 없이 많았지만, 반대 상황에 놓인적은 처음이여서 그런가??.. 옛날에 수이연이 뒤처리할라고 방글방글. 꽃미소 날려가며 애새끼들한테 협박하는 것도 저정도까진 아녔는데.. 오와. 진짜 제대로 대단한데, 최솔림??.. "이번엔 절대 못꼬지르게 찢어놔야지. 안그래??.. 선생한테 촌지 먹여가면서 나대는꼴, 앞으로 못봐줄 거 같은데 말이야." "별로 구구절절 변명 늘어놓기 싫으니까 대꾸는 안하겠는데.. 쫌 심하다, 너." "니가 그렇게 아가리 놀리는것도 지금이 마지막일꺼야." 폴짝. 책상에서 뛰어내린 최솔림이 뚜각뚜각. 기분 나쁜 구두소리를 내며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170cm장신에 5cm굽있는 구두까지 신어 아주 잭과 콩나무에서 콩나무 역활로 섭외가 들어올 것만 같은 최솔림의 얼굴은 가까이에서 보니 잔뜩 뒤틀려있었다. 저 뒤틀린 얼굴에서 풍기는 분위기로 봐선.. 오늘 김윤서 아가리 제대로 찢어지겠네. "난 마스크 쓰고다니기 싫은데." "너가 쓰고싶다 그래도 내가 못쓰게 할꺼야." "후와... 너 지금 실수하는거야, 최솔림. 이 소나무만도 못한 가시네야." "뭐?? 하. 아 씨발. 이년이 봐주니까 진짜!" 디리릭. 커터칼 나오는 소리와 함께 손을 힘껏 치켜드는 최솔림. 죠팰까참을까. 짧은 순간 그 고민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조용한 교실 안에 요즘 한창 뜨고있다는 김종찌개의 사람스러워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누구야?! 앙칼지게 소리치던 최솔림은 앞문에 서있던 여자애 하나가 자기 마이주머니를 가리키자, 씨익씨익. 콧김을 내뿜으며 거칠게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최솔림은 언제 그랬냐는듯 표정을 싹. 바꾸고 핸드폰을 귀에 갖다댔다. "예, 언니. 어쩐일이세요??" ..... "예?? 하지만!!.. 약속하고 틀리시잖아요, 이건." ... "불만이 아니라..." .... "예... 예. 알았어요." 전화를 끊었는지,최솔림이 입술을 깨물며 핸드폰을 다시 마이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팅. 들고있던 커터칼을 내 앞으로 집어던진 최솔림은 뭐가 그렇게 못마땅한지 심술딱지가 덕지덕지붙은 얼굴로 날 쏘아보다 휙. 고개를 돌렸다. "씨발. 넌 운 좋은 주 알어. 가자!!" 퍽. 그래도 그냥 나가기 아쉬웠는지 최솔림은 마지막으로 내 무릎을 후려차고선 앞,뒷문을 막아서고 있던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을 나갔다. 후와. 까딱하면 빨간마스크의 뒤를 이어 보라마스크의 주인공 될뻔했네.. 가벼운 한숨과 함께 가슴팍을 쓸어내리는데..억!! 시계 바늘이 벌써 6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띠바. 진짜 돌겠네!" 어제처럼 맨인블랙 따돌리고, 옷갈아입으려면 1시간은 족히 걸리는데!!.. 더이상 교실에서 지체할 수 없어 책상걸이에 걸려있는 가방을 낚아채고 후다닥.교실을 뛰쳐나왔다. 교실을 나오자마자 복도 반대편에서 강조아저씨가 걸어오는게 보인다. 흐미야. 시야를 뻑뻑하게 가리고있던 안경을 벗어 주머니에 대충 쑤셔넣고 드르륵. 복도창문을 열었다. "아가씨!!" 이런. 들켰다. 턱. 오른발을 먼저 창틀에 걸쳐놓고서 휙휙. 웃는게 예쁜 강조아저씨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얼굴에 핏기가 싹 가신 강조아저씨가 달려왔을때, 난 이미 3층 아래 화단에 무사히 착지한 상태였다. "아가씨!!!!" 아까보다 더 큰 목소리로 날 부르는 강조아저씨. 시큰거리는 발목뼈를 문지르며, 화단을 걸어나온 나는 몸을 돌려 꾸벅. 인사를 했다. "9시 전에는 돌아갈테니까 걱정말구 계세요!! 아저씨 빠빠잉." 일본 잡지모델처럼 입을 함박 벌리고, 찡긋. 윙크를 날린뒤. 재수없음의 최고봉, 정지혁씨가 대기하고 있을 정문을 피해 빽빽한 담으로 둘러쌓인 쪽문을 향해 달렸다. ..... 제발. 제발 하늘님. 은지니보다만 빨리가게 해주세요!!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4-71. 뜻밖의 재회 ※용산역 후왁.후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용산역 3번출구. 뛰어오느라 땀으로 흠뻑 젖은 와이셔츠를 펄럭거리며 지니와 이연이를 찾기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찹쌀떡 파는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노란 대가리, 수이연대가리. 빙고♪ 찾었다. "숨연!!" "..이연공주님 이름 맘대로 바꾸는 윤서야, 안뇽. 오늘도 이연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이연인 2시간50분, 지니는 3시간." 입주변 가득 하얀 찹쌀가루를 묻히고서 베시시 웃는 수이연이. 요요 날카로운 가시네. 이연이의 뾰족한말에 히죽.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늘이 너무 좋았어." "만날만날 그짓말. 하늘이 좋기는. 아까보니까 못생겼든데, 뭘." "흠흠!!.. 바나나우유 사줄께." "그건 당연한거구." "어그래. 근데 지니는 어디갔어?? 3시간 아까워서 도로 갔나??." 이연이의 옆에 쪼그려앉아 지니를 찾기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퍽. 옆구리를 강력하게 파고드는 어제와 똑같은 쇼핑백 하나. "알었다, 알었어. 먼저 갈아입구 올께..설마 어제꺼같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겠지??.." "이번엔 지니옷이얌. 얼릉 갈아입구와, 지니 한대만 까고 온댔으니깐. 휘오휘오." 은지니 옷이면.... 적어도 치렁치렁한 수이연 옷보단 낫겠지. 휴우.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덜렁덜렁.들고있던 가방을 이연이의 품안에 안겨주고 낼름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네번째칸으로 들어와 쇼핑백을 열었는데.. "아. 띠바.. 이것들이 골고루 하네, 아주." 낮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툭.초록색 화장실 칸막이에 몸을 기댔다. 쇼핑백엔 총 두벌이 있었다.(☜수이연 지딴엔 날 배려한답시고 이래놨나본데.. 솔직히 두 벌 다 오십보백보였다.)어깨가 훤히 드러난 쭉티와, 바지가 맞나싶을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입으면 꽉.조일것만같은 가죽세트. (☜검정색 가죽자켓, 검정색 가죽바지, 검정색 탱크탑. 그리고 검정색 가죽부츠까지..아주 골고루 갖췄다, 골고루 갖췄어.)까지.. "내가 주연오랑 옷사러 갈때부터 알아봤다. 후와.. 오늘따라 되는게 없어, 아주." 벅벅. 머리를 거칠게 긁다 안되겠다싶어 다시 주섬주섬. 쇼핑백에 옷을 집어넣고 나가려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김윤서 어디갔어??.." "엉. 윤서 옷 갈아입구 있는데.. 화장실서 안 갈아입는댔어. 나가서 찹쌀떡이나 먹자." "후. 이 기지배 오기만 해. 대갈통을 부숴버려야지." 억... 전혀 장난같지 않은 은지니의 진지한 목소리에 슬금슬금.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들고있던 쇼핑백을 변기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눈썹을 한번 길게 쓸어내리고 쇼핑백에서 옷을 꺼냈다. 아. 정말.. 눈물나. ............ ※6분후. 사물함에 기대서있던 지니와 아까 그 자리에 앉아서 찹쌀떡을 오물오물.먹고있던 이연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아띠바. 나도 알어, 쪽팔린거. 기니까 그만봐."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777번 사물함에 쇼핑백을 구겨넣었다. 입을게 없어 결국 입고 나오긴 했지만.. 개구리왕눈이가 와서 친구먹자고 할만큼 둥그래진 이연이와 지니의 눈을 보고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170cm를 웃도는 지니와 160cm에서 놀고있는 내가 서로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부터가 모험이였어. 아주.. ".....그거 놓으면 벗겨지냐??" 지니는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옷의 가슴께와 허벅지 부분을 꽉.부여잡고 있는 내 손을 가르켰다. "띠바. 궁금하면 벗겨봐라, 붕신아."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근데 김윤서 넌 우유는 꼬박 꼬박 잘도 처먹으면서 어째 위로는 안가고, 엉덩이만 커지냐." "..죽여버려." 심각하게 묻는 지니를 향해 중지를 뻗은 나는 엉거주춤. 돌아섰다. 픽.돌아선 내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터트린 은지니는 입고있던 청자켓을 내 어깨위에 걸쳐주고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겨놓은채. 역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연인 끝까지 자리에앉아 찹쌀떡을 주워먹었다.) ........ ※다시6분후. "갈아입고 나와." "헐.나 돈없어." "난있어." "그래도-" "그 꼬라지하고 가고 싶냐? 좋은말 할 때 들어가라."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쇼핑백을 대뜸 품에 안겨주고 화장실 안으로 날 밀어넣는 은지니. 얼떨결에 다시 화장실로 들어온 나는 은지니의 깜찍한짓에 빙글.미소를 흘리며 쇼핑백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회색 맨투맨티와 라인이 예술적으로 빠진 청바지 한개. 음.좋아좋아.. .........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나오자 넓다란 만남의 광장을 장악한 지니와 이연이가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 있었다. 사물함에 다시 쇼핑백을 집어놓고, 지니와 이연이가 있는 자리로 걸어와 앉기가 무섭게 지니가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어디까지 설명했는지 기억나??" "..두개골이 빠개질뻔 했다는건 생각나." "잘들어, 김윤서. 이번엔 어제처럼 미적거릴 시간없어. 빨리 치고 빠지는거야. 알겠어??" "오케바리." 말장난이라도 쳤다간 바로 주먹이 날아올것같은 지니의 분위기에 실쭉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아직까지도 찹쌀떡을 손에 놓지 못한 이연이의 손등을 소리나게 후려친 지니가 매서운 눈을 부라리며 이연이에게서 찹쌀떡을 빼앗았다. "히잉..지니 나뻐." "제대로 집중해, 수이연." "이연이는 윤서 오기전부터 주구장창 들었는데.. 힝. 지니는 나만 미워해." 이연인 귀엽게 입술을 비죽이더니 지니에게 시위라도 할모양인지 주머니에서 바나나우유를 꺼내 빨대도 안꽂고 소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입속으로 우유를 아예 쏟아부었다. 그 모습에 퓌휴.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지니. 화를 삯히려는듯 몇번 쉼호흡을 하던 지니는 드디어 마음 정리가 됐는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서대문구일대는 용산공고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어. 하지만 1년전, 용산공고 짱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하루새 짱을 잃은 용산공고는 순식간에 무너졌지. 결국 올해 새로 치고올라온 제일고한테 깔끔하게 박살났어.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제일고로 쳐들어가면 됐겠지만.. ..아라한테서 어제 전화가 왔었다. 1년 전 자취를 감춘 용산공고 짱이 다시 나타난 모양이야." "오예.그 용산공고 짱, 어지간히 강한가봐??." "...하여간 김윤서 너는 샛길로 빠지는데 일가견 있어. 아라말로는 강하대. 서울연합 사신중 한명이라니깐. 넉넉하게 잡아서 니가 여태까지 상대했던 또라이들 100명 값은 한다고 보면 되겠지. 게다가 김한영하고 특별한 친분까지 있는 새끼라던데.. 뭐. 어제보단 재미있지 않겠어??." 호오. 천하의 그 김한영하고 특별한 친분까지??.. 비틀린 입술을 비집고 차가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김한영하고 깊게 관련된 새끼라면... 확실히 어제 상대했던 한강호보단 조질 재미가 있겠네. 가느다란 철제의자에 몸을 기대고 지니의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쿵쾅쿵쾅. 터질랑말랑 심장이 요동을 친다. 이러다 싸우기도 전에 심장 터지는 거 아냐??.. "어쨌든 서대문구일대를 놓고 용산공고와 제일고 사이에 또 한번 싸움이 붙었고, 아직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봐선 용산공고의 압도적인 승리야. 짱대짱으로 봐도 용산공고가 월등히 높고, 연합 내에서도 용산공고를 밀어주는 분위기니깐." "그래서 다음타켓이 용산공고가 됐다, 이거지??.. 좋아쓰. 입력완료됐으니까 일어나자. 속전속결로 끝낼라면 이러고 앉아있을시간이 없다아이가." 흥분된 미소를 감추지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니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잉??아까 지입으로 빨리 치고빠지재놓구선 왜 또 도리질이여. 지니의 속내를 몰라 어리둥절.멀뚱히 서있는데 갑자기 역 안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곧이어 1번출구에서 한무데기의 교복무리들이 출현했다. 짙은 남색 마이에 환한 회색 교복 치마(&교복바지). 특이하게 생긴 학교마크 위에 깔끔하게 박혀있는 석자.혹은 넉자나 두자의 이름들. 그리고... 연예인 콘서트장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플랜카드들. (☜나를 웃긴건 플랜카드가 아니라 大용산공고. 용산공고만세. 우리가최고다.등등.. 플랜카드를 장식하고 있는 유치찬란한 내용들이였다.) 배꼽 붙잡고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지니에게 물었다. "크큭.. 쟤, 쟤네가 오늘 조질 용산공고.. 마, 맞지?.." "우캬카!!..이연이 뒤집어지겠어, 정말!!"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나와, 원숭이 울음소릴 내며 뒤집어져라 웃어재끼는 이연일 한심하다는 눈으로 째려본 지니가 탕.유리로 된 테이블을 내리쳤다. "초장부터 깨게 놀지마라, 김윤서.수이연." "하,하지만.. 아. 존나. 웃긴걸 어떡해. 아띠바. 쟤네 저렇게 웃겨도 되는거냐??.." "그르니깐!! 저기 제일 큰 플랜카드 든 애, 고릴라처럼 생겼더. 아잉. 어떡해. 싸우기도 전에 쓰러질꺼 같애." 엄청 튀고.엄청 유치찬란해주시는 용산공고 무리들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만남의 광장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용산공고 무리들이 다가올때마다 이연인 아예 바닥에서 구를 기세로 웃어재껴댔고, 나역시 지니의 어깨에 손을 얹은채 부르르.몸을 떨었다. "...싸우기 전에 이름먼저 묻는게 김윤서 습관 아녔냐?? 오늘은 조용하다, 너." "어엉??. 아맞다. 용산공고 짱 명함은 뭐야??.." 터억. 용산공고 무리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웃음을 참기위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데.. 근질근질한 몸을 시원하게 긁어줄 싸움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때문에 평소보다 쬐끔.흥분한 지니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타고 스르륵.들어왔다. 그리고 용산공고 무리 중. 가장 앞에 서있는. 가장 많이 낯이 익은. 가장 놀라운 얼굴이 보이자 웃느라 잔뜩 휘어진 내 눈동자가 연오네 앞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토마토만해지는 게 느껴졌다. "구나루. 서울에서 사라진 1년동안 사용했던 이름은... ..... ......유달리." 4-72. 구나루+유달리=구달리 ............ 꿈뻑꿈뻑.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꿈뻑대던 눈시깔을 가만히 놔두고 천천히 달리.아니 이제는 구나루라고 불러야될 용산공고 짱을 향해 걸어갔다. "...보고싶었어." "마음으로 끝냈어야했어, 그거.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잖어??. 이렇게 너저분하게 끝내는 거 김윤서 취향 아니다, 달리야." 빙그레.휘어진 입과는 달리 구나루를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김윤서 뒷통수 제대로 후려갈겼다는 사실이 뿌듯한건지. 아님 정말로 보고싶던 얼굴을 보게되서 그런건지 알수는 없지만 어쨌든 구나루는 기분 좋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어왔다. "재회의 악수." "...내가 미안했던건. 말 한마디 제대로 못건네주고 부산을 떠나온 김윤서가 정말로 미안했던 사람은. 유달리지 용산공고 짱이 아니야." "유달리도 나야. 구나루도 나고, 용산공고 짱도 나야. 이름만 다를뿐이지 알맹이는 다 똑같은 사람인데, 악수 안해줄꺼야??.." 뻔뻔기름이 좌르르.흘러내리고 있다는걸 저 아이는 모르는걸까??... 손수건을 사와 직접 닦아주고싶은 마음을 꽉.억누르고 다시 몸을 돌렸다. 후와후와.쉼호흡을 하고 차근차근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도 배를 잡고 웃고있는 이연이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있는 지니를 쓱. 훑어보며 메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하나만. 아니 몇가지만 좀 묻자. 내가 전학오자마자 짱자리 넘겨준거. 오락실 앞에서 선우권 만나게 해준거. 이거 말고도 부산에서 있었던 모든일들. 그거 다 너가 일부러 꾸민거냐??.." "....응. 일부러그랬어. 미래 시누이한테 점수좀 왕창 따낼라고.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그랬어. ..하면 나 나쁜년 되는거지??" 밉지 않을정도로. 딱 그정도로 얄밉게 눈웃음을 친 구나루가 물었다. ....띠바. 날씨가 너무 좋다 했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터벅터벅.지니의 옆자리로 걸어와 앉았다. 앞에 냉수라도 있으면 시원하게 들이킬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눈치 제대로 빨라주시는 이연이가 냉큼 가방에서 꺼낸 바나나우유를 내게 내밀었다. "다음에 일곱개로 불려서 사주면 되니까.. 마셔.윤서야." "...땡큐베리감사." 턱. 이연이에게서 우유를 건네받은 나는 손가락으로 껍데기를 북.찢어 단숨에 우유를 들이마셨다. 후와.순식간에 빈 우유통을 한손으로 콰직.구겨 쓰레기통에 휙.던졌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우유통이 정확히 쓰레기통 안에 꽂히고. 두 손으로 작게 만세를 외친 나는 우유 원샷으로 진정된 마음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엔 한영이부탁이였지만, 나중엔 아녔어. 정말 친구로써 윤서 네가―" "말까지마세요. 전 초면에 말까는 사람 불쾌하게 생각하거든요." "...윤서야." "예. 전 김윤서예요. 얼마전까지 부산 제화예고에 몸담고 있다가 이번에 인천 황제공고로 전학온 김윤서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칠공주의 일당백, 김윤서요. 김한영 세상에서 제일로 조져버리고 싶은 김윤서요. ...그래서 김한영하고 관련된 새끼 모조리 박살내버릴라고 온 김윤서요." 목운동을 하며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무언가 더 할말이 남은듯. 입을 벙긋거리던 구나루는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부터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베베꼬던 구나루는 한참의 망설임 끝에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머리카락에서 손가락을 떼고 입을 열었다. "사랑해.내가 얼만큼 그앨 사랑하냐면.. 주위 반대 무릅쓰고 학교1년 가볍게 꿇을정도로. 그애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따라 전학갈 수 있을정도로. 끝까지 안심할 수 있게 가장 가까이서 그 애 동생을 지켜줄 수 있을정도로. 딱 그정도로 사랑해, 나. 넌 이해못할꺼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윤서 네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일테니까." ".....양파 싫어해요,난." "뭐??" 자신의 기다란 고백끝에 뜬금없는 리플을 달자 기분이 상했는지 눈썹을 찌푸린 구나루가 매섭게 되물었다. 난 빙글웃으며 아까 구나루가 했던것처럼 머리카락을 잡고 베베꽜다. "까도까도 그 속을 모르는 양파.그런 양파같은 인간 싫어한다구요." "윤서야." "...근데 아쉽게도 내앞에 있는 사람이 딱 양파과네요. 진심은 멀찌감치 숨겨놓고 태연히 구라까는. 양파 중에서도 최고악질, 구라양파." 드디어 구나루 얼굴에서 같잖은 미소가 사라졌다. 구나루에게서 심상치않은 기운을 느낀 용산공고 무리들은 들고있던 재미난 플랜카드를 한쪽으로 밀어넣고, 각자 준비해온 무기를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너가 가져라, 지니야." "뭘??.." ".....용산공고 짱. 또라이 100명값 한다는 용산공고 짱, 너가 가지라고." "니가 왠일이냐." 지니가 의외라는 듯. 눈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걸어왔다. 점점 험악하게 구겨져가는 용산공고 무리들을 나른한 눈길로 훑어보며 씨익 웃었다.퍼석퍼석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기분이 후지다. ...... 아무래도 화창한 날씨와는 거리가 먼듯 싶다, 김윤서 인생은. "...친구때리는 거지같은 취미, 없거든 김윤서한텐." "병신.그렇게 약해빠진 마음가짐으로 뭘 해먹겠다고." 벌써 역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러 떠난 이연이의 뒷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지니가 피식웃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알싸한 담배 냄새에 코끝을 찡그린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것만같아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줬다. "...한영이 우습게보지마. 윤서 너가 만약 한영이 동생아녔으면... 벌써 죽었을테니까." "너야말로 김윤서 우습게 보지마세요. 구나루 너가 만약 유달리 아녔으면.. 내가 일찌감치 조져버렸을테니깐." 빠득.이를 가는 구나루. 빙글.웃고있는 김윤서. 사설이 너무 길었다. 구나루와 웃기지도 않은 말싸움을 하는동안 지니는 벌써 준비를 마쳤는지, 살기등등한 얼굴로 우드득우득.뼛소리를 내고 있었고, 반대편에 있는 용산공고 무리들은 구나루 손짓 하나에 바로 달려들 기세로 서있었다. "...부산에서 왠만큼 겪어봤으니 알테지만. 김윤서는 싸울때 눈시깔에 뵈는거 없거든요??... 그니까 김윤서한테 거지같은 취미 안만들어 줄라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개겨요. 내 사정권 안에 들어오면 그땐... 구나루고 유달리고 그냥 조져버릴꺼니깐." 휘익. 말을 끝내자마자 오른발을 휘두르며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구나루의 뺨을 지나 그 옆에 있던 쬐끄마한 남자애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두어걸음 물러선 나는 불시의 습격에 어안이벙벙해진 용산공고 무리들을 향해 찡긋.윙크를 날렸다. "오늘은 어제처럼 살살 갈 생각 없으니깐, 제대로 박살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들 계시던가." 옆에 있던 지니가 용수철처럼 튕겨나가 구나루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와동시에 용산공고 무리들이 개떼처럼 김윤서에게 몰려들었다. ......... 기가막히게 날씨 좋은 어느날. 그렇게 김윤서는 인생에서 세번째로 뒷통수를 후려맞았다. 한때 친구라고 믿었던.양파를 꽤많이 닮은 유달리에게서... 4-73. 김윤서의 약점 .................. ※1시간42분 뒤. 햇빛 쨍쨍한 날 밖으로 기어나온 지렁이들처럼 꼬물꼬물. 바닥에 몸을 비비적대고 있는 용산공고무리들을 바라보며 지니가 벗어놓은 검은 자켓을 뒤적였다. 곧이어 깊숙한 안주머니에서 네모난 곽이 잡히고, 주저없이 그 곽을 꺼내든 나는 살짝 삐져나온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한창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던 지니가 갑자기 고개를 훽.틀더니 거칠게 소리친다. "빼, 병신아!!!!.." "싸움하면서 한 눈 파는거 아니다. 지니야." "씨발. 입에 문거 빼라고!!!.." 콰앙. ........... 지니의 머리 위로 쓰레기들이 우수수.낙엽처럼 떨어진다. 구겨진 신문지에서부터,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종이컵. 빈 도시락통, 타다만 담배꽁초, 동그란 캔커피까지.. 갖가지 쓰레기들과 함께 지니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악하악.불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구나루가 쓰레기통을 잡고있던 손을 놨다. 투둥퉁.. 구나루는 쓰레기들과 함께 지니의 발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묵직한 쓰레기통을 말없이 쳐다본다. 그 모습에 담배를 입에 문채로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우. 대단한 한방." "......" "하악.하악..." "그러니까 내가 한눈팔지 말랬잖아. 이제부터 눈시깔 똑바로 뜨고 조져 은지니." 콰직.지니는 힘있게 쓰레기통을 발로 짓뭉개고 말 잘듣는 착한 아이처럼 구나루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꺼번에 떨어지지않고 어깨에 붙어있는 신문지를 신경질적으로 떨궈낸 지니는 차갑게 구나루를 노려보며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하늘로 솟구친 지니의 매끈한 다리는 무서운 기세로 구나루의 어깨를 향해 돌진했고, 0.09초후. 어깨뼈 아작나는 소리와 함께 구나루의 어깨에 지니의 오른발이 꽂혔다. 구나루의 한쪽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고.지니는 쉴틈을 주지않고 바로 주먹을 뻗었다. 처음엔 가벼운 잽으로. 다음엔 조금 무게가 실린 훅으로. 마지막은 강한 스트레이트. "병신. 니가 나랑 맞먹을 주 알었냐,아님 내가 봐주니까 눈에 뵈는게 없었냐??... 병신같은 년이 꼭 병신같은 짓만 골라서 하지." 하여간. 은지니 입에도 고운 소리 나오는 꼴을 못봤지. 혀를 끌끌차며 잘근잘근.담배를 씹었다. 텁텁한 맛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입 안이라도 써야 눈동자가 쓰지 않을테니. 차라리 침에서 쓴맛이 나는게 낫지, 눈물에서 쓴맛이 나면... ......아. 토나와. "..난 세상에서 너같은 년 제일 싫어해. 어디 후릴데가 없어서 친구 뒷통수를 후려??.." 거칠게 구나루의 머리칼을 잡아당긴 지니가 무릎을 들어올려 구나루의 안면을 찍었다. 구나루의 두 개의 콧구멍에서 새빨간 쌍코피가 주르륵.흐르고... 지니는 이참에 구나루 콧대를 뭉개줄 작정인지 잡고있던 머리칼을 놓고 주먹을 악쥐었다. 쌍코피를 손등으로 닦아낸 구나루가 지니의 주먹을 막기 위해 몸을 젖혔지만, 지니의 주먹이 쬐끔 더 빨랐다. 뿌각. 경쾌할정도로 신나는 소리가 구나루 콧잔등 위에서 울려퍼졌다. "악!!.." 짧은 비명을 내지른 구나루가 서둘러 코를 감싸쥐며 몸을 숙였다.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구나루의 어깨를 바라보던 지니가 갑자기 몸을 돌려 관상용으로 꾸며놓은 인공정원으로 저벅저벅.들어가더니.. 큼지막한 화분 하나를 들고 다시 구나루 앞에 다가섰다. "너 김윤서 약점이 뭔 줄 아냐??.." 뜬금없이 김윤서 약점은 왜?.. 평소엔 주둥이에 본드를 붙여놓드만. 오늘따라 지나칠정도로 말이 많아진 지니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옆에 높게 설치된 화단에 팔을 기댔다. 까딱까딱.입에 물린 하얀 담배가 위아래로 출렁인다. "바로 뒷통수야, 뒷통수. 남들은 한방만 맞아도 떨어져나간다는 턱주가리 골백번 쳐맞아도 멀쩡한게 김윤서라는 년인데. 그런 년 최대 약점이 뒷통수라고, 뒷통수. 무슨 뜻인지 이해갔냐??.. 너 오늘 김윤서 약점 제대로 건드렸어. 쌈박질이라면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김윤서. 맥도 못추게 만들었다고, 너가." .... 지니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나도 몰랐던 약점을 은지니가 알고 있었다니.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지니의 새빨간.아니 지금은 가발을 써서 검어진 머리통을 보며 빙글 웃었다. 정리아 뺨치게 무뚝뚝한 가시네가 오랜만에 사람답게 구네. "...그래서 지금 존나 화났어, 나. 너같은 년이. 나한테 쪽도 못쓰는 너같은 년이!!.. 김윤서 약점 건드려서.또라이같은 김윤서 더 또라이같이 만들어서. 우리말고 김윤서한테 제일로 소중했던 한가람새끼가 후린 뒷통수.아물기도 전에 후려쳐서. 이제 사람답게 살아볼려는 김윤서!!!... 너가 다시 죽여놔서.그래서 존나 화났어, 이 씨발아." 퍽. 굵고 간결한 소리가 순간 울려퍼졌다. 먼저 갈색 화분 조각들이 위험스럽게 구나루의 무릎 위로 떨어지고.검은 흙과 초록색 난초가 뒤따랐다. 그래도 분에 안찼는지 지니는 구나루의 머리통을 발로 힘껏 후려깠다. 하얀 구나루 살결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투둑. 뽀얀 구나루 얼굴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투둑. ................ 예쁜 달리 머리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투둑. 투둑투둑. .... "...병원가봐. 적어도 전치4주는 나올꺼야, 아마. 어차피 그 몸으론 너가 죽고못산다는 김한영한테 한톨 도움 안될꺼니까 그 편이 더 좋을꺼다." "...유...윤서야.." "괜찮아.김윤서 욘나 괜찮아. 오히려 고맙기까지해, 난. ...김윤서 눈깔이 뵈는거 없게 해줘서 진짜 고맙기까지해. 유달리덕에 내 약점이 뭔지도 알게됐고. 구나루덕에 김한영 제대로 싫어졌으니깐. 진짜 고맙기까지해." 화단을 짚고서 빙글.가볍게 덤블링을 넘어 만남의 광장에서 나왔다. 누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구나루를 향해 찡긋.윙크를 날려주고 사물함으로 걸어가 쇼핑백을 꺼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좀 늦어졌는지 이연이가 쬐끔.긴장한 얼굴로 시계 바늘을 가르켰고. 그 모습에 지니가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 퉤.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맨인블랙 오고있는 중이라니깐 오늘은 같이 움직이자. 수이연 1번출구 길 터놨지??.." "응!!이연이가 잽싸게 길 터놨어." "가자." 지니는 볼 일은 다 봤다는듯. 쌩하고 용산공고 무리들을 지나쳐 이연이와 함께 1번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빨리오라고 소리치는 지니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쇼핑백을 뒤져 밴드 두통과 후시딘 세개를 꺼낸 구나루의 앞에 털썩.내려놨다. ....유달리도. 그렇다고 구나루도 아닌. 둘을 반씩 갈라 그 반을 합쳐놓은 듯한 구달리(구나루+유달리)의 앙증맞은 정수리를 향해 바삭하게 마른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면 얄짤없어.어쩡쩡하게 구달리로 나타나지말고, 구나루면 구나루.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달리면 유달리. 그렇게 하고 나타나. ....그래야 나도 깔끔할테니깐. 김한영꺼 할려면 김윤서 앞에서 유달리처럼 굴지말라는 말이야. 센스 지켜, 지금만 구달리." 삐요삐요. 우루루루. 요란한 포돌이 아저씨들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마지막으로 방글.웃음을 짓고 지니와 이연이가 일찌감치 사라진 1번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니의 재촉에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뒤에서 울음섞인. 하지만 패버리고 싶을 정도로 악에 받친 구달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아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후회할꺼야!!!... 피눈물나게 후회할꺼야!!!.." "......" "한영이도.가람이도. 그리고 나도 잡지 않은 거.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거!!!..후회할꺼라구, 윤서 너!!!.." 핑그르. 다시 구달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어렸을때 누구나 해봤을 뒷걸음질을 살살치며 피식.웃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텅빈 깡통처럼. 허해진 얼굴로 피식.웃었다. "달리 너도 후회할꺼야. 오늘일. 부산에서 있었던 일. 앞으로 벌어질 일. 그리고 지금 나보고 후회할꺼라고 소리친 일. 모두 다 후회할꺼야. ....그래서 난 니가 걱정이다,달리야. 이미 난 젖어있는데. 너가 그렇게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흠뻑 젖어있는데. 인생 자체가 후회에 제대로 젖어있는데..넌 그렇지 않으니깐. 나중에 더 힘들 사람이 너여서 걱정이 돼.아주 많이. 김한영하고 같이 무너지게 되면 죽고싶을정도로 후회 되겠지,아마??.. 김한영 옆에서 나란히 무너질 너 생각에 오늘부터 발도 못뻗고 잘 거 같아." 아래로 처진 눈꼬리에서 잔인함이 묻어나온다. 나조차도 감출 수 없는 처절한 잔인함이. 따뜻하게 휘어진 눈꼬리에서 묻어나온다. ............. 2004년 10월 30일. 김한영 조지기 29일 전. 두번째. 서울 연합의 용산공고 박살. 4-74. 불길한 조짐 .......... 빠앙. 코 끝에서 후끈거림이 느껴지기도 전에 억센 힘이 팔뚝을 잡아챘다. 추여사가 종종 입던 살색 거들처럼 아프게 살을 짓누르는 힘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보다 한발 먼저. 벼락같은 지니의 고함소리가 귀떼기를 후려쳤다. "뭐하는거야!!!!!..." "아.귀아퍼. 고막 찢어지면 너가 매꿔줄꺼냐?... 치료비도 안물년이 소리는." "눈깔을 뜨고 다니는거야,마는거야 도대체!!!" "붕신아. 너야말로 초록불에 횡단보도 밟아야 된다는 것도 안배웠어??.. 찢을려면 김윤서 고막이 아니라 방금 지나간 아반떼 타이어를 찢어야지." "뭐??.." 지니가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뼈까지 눌러대는 은지니의 무식함에 혀를 내두르며, 잡힌 팔뚝을 빼내려는데 이번엔 은지니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이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악!.. 돌았냐, 은지니?!!... 싸다구는 왜 갈겨, 띠바. 아까 싸우다 입안 터졌나고 내 말 안하디??.." "뭐라고 그랬어, 김윤서. 너 지금." "뭘 뭐라고 해. 아. 나 마이 아포. 그니까 손 좀 떼도." 옆에서 지켜보는 이연이가 헛구역질을 할정도로 앙증맞은 혀짧은 말투를 선보이며 후끈후끈.열이 올라오는 뺨을 문지르는데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는 은지니. 아까부터 왜이래, 얘가. "저리 안치우냐, 은지니??..." "초록불이라 그랬어??.. 너 지금 초록불이라 그랬냐고." "엉.그랬다 어쩔래." "....수이연 너가 말해봐.아까부터 지금까지 신호등이 무슨 색깔인지." "빨간색.지니 머리카락색깔." "들었냐??..와. 뒷통수 후려맞더니 이젠 눈시깔까지 병신됐나보지??.." 꿈뻑꿈뻑. 이연이와 지니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있는 신호등을 쳐다봤다. .....아깐 분명히 초록불이였는데.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반짝반짝.빛나고 있는건 지니의 얼굴만큼이나 무뚝뚝한 빨간불이다. 헐.턱주가리에 힘이 빠졌는지 입이 절로 헤.하고 벌어진다. "..정말 은지니 말대로 눈시깔이 병신됐나?.. 아닌데.김윤서 시력 양쪽 다 3.0인데. 독수리 눈깔 뺨치는게 김윤서 눈깔인데.." "병신.하여간 또라이짓만 골라서 하진." 욱신욱신. 지니의 말에 갑자기 눈 안쪽이 뻐근해져온다. 아으.신음소리가 흘러나올정도로 두개골이 빠개지는 느낌. 검지손가락으로 꾹꾹.미간을 누르고 그걸로도 모자라 관자놀이도 힘있게 눌러줬는데 두통이 쉽사리 가라앉지않는다. 이번엔 제대로 초록불이 들어왔는지 앞서가는 지니와 이연이의 네 다리가 보이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폼 구겨지게 이게 뭐니. "김윤서 안와??.." "나. 나...어디 들렸.아. 좀있다 연락하께!.." 지니와 이연이가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머리통을 악누르며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소리냐며 소리치는 지니를 뒤로하고 한적한 골목길을 찾아 한참 거리를 뛰어다니는데 파악.하고 내 어깰 밀치고 가는 한 아이. "아 씨발.뭐야??.. 눈깔을 어따-" "솔림아 그만하고 가자. 나루언니 다쳤다잖아." "그 놈의 구나루구나루!! 아주 구나루 말만 들어도 역겨워 뒈질꺼같아." "야!! 누가 들으면 어쩔려구 그래??.." "들으면 들으라지.씨발. 구이겸하고 쫑낸지가 언젠데 그걸 들먹이면서 사람을 개취급해?!!.. 1년만에 나타나서 사람 속 존나 뒤집고 말야.후.. 그리고 지가뭔데 우리반 진따년 갖고 노는 거까지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야??.." "솔림아!!" "씨발.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김윤서. 그 병신같은 계집애가 도대체 누구길래 금잔디로도 모잘라 구나루까지 지랄이야,지랄이. 아우!!짜증나." 화장품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주절주절.짜증난다는 어투로 한껏 불만을 토로하는 그 아이.최솔림. 최솔림의 째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머리통을 짓누르던 두통이 가셨다. 아까부터 잔뜩 찌푸려진 검은 눈썹이 팽팽한 부메랑처럼 휘어졌다. 한껏 뒤틀린 심장이 팟.하고 펴졌다. ........... 심장 위에 턱.자리 잡은 돌덩이 하나가 데구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쿵.쿵.아래로 떨어졌다. "...야." "뭐??..너 지금 나 불렀냐??" "엉.너. 최솔림이. 황제공고 다니는 최솔림이. 머리는 샛노래가지구 발랑 까진 최솔림이. 너 불렀어.." "하.뭐야?? 뭐 이런 미친년이-." "참을라했어요. 김윤서가 꾸왁꾸왁 눌러담어서 겨우겨우 참을라했어요.뒷통수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와도. 가슴이 찔끔 아파도 참을라했는데... 사람 가지고 노는거 존나 싫어해서. 세상에서 제일 싫은게 사람 가지고 노는거라서. 그래서.. 참을수가 없어요,하늘님. 7분만 용서해주세요." 빙글. 입술이 보기좋은 곡선을 그렸다. 내가 정신병원에서 방금 탈출한 따끈따끈.정신병자인 줄 알았는지 샛노란 최솔림이와 그 친구가 슬금슬금 자리를 뜨려고하자 손을 뻗어 기다란 최솔림의 머리칼을 나꿔챘다. 웅성웅성.사람들이 하나둘씩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밥숟갈 못뜨고 싶어질 새끼들만 남으세요." .......... 심상치 않은 협박에 모여들었을때처럼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사람들. 후와.길게 숨을 내뱉고 최솔림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뭔데.너??.." "씨.씨발 이거 안놔?!??!!!..." "구나루가 최솔림한테 뭔데 김윤서를 가지고 놀아.." "무머어뭐??" "이해 안갔으면 바꿔물을께. 죽고싶어??.." "갑자기 그게 무슨!!-" "김윤서 가지고 놀았잖아.그럼 죽고싶은 거 아녔어??.. 난 그렇게 알고있는데. 너출판사에서 나온 죽을래 국어사전엔 그렇게 나와있었거든." "뭐야,이 년?? 정귀림!! 이 미친년 좀 빨리 떼봐!!!" "어..어어?... 소, 솔림아. 걔.. 걔 잖아!!" "뭐??" "우크라이나.. 아니. 칠공주.. 아니.. 누.누구지 쟤??" 정귀림이라고 불린 최솔림 친구가 날 향해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어버버.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쉽게 내 손을 떨쳐내지 못한 최솔림은 그런 정귀림이 답답했는지 바락바락.소리를 내질렀고.. 6분 남았다. "...살기 싫어졌지,너??.." "정귀림!!빨랑 얘 안떼놔?!!!" "아무리 살기 싫어졌어도 사람 가지고 놀면 안되지. 콧구멍으로 숨쉬고 똥구멍으로 내뱉고.. 살아있는 사람 가지고 놀면 안되는거지,아무리 살기 싫어졌어도.." "아.씨파. 짜증나게-" "...구나루가 오늘 김윤서 뒷통수 두번 후렸어. 누가 내 눈깔에 안대 씌우는 거 존나 싫어했는데 앞으로는 더존나 싫어할 꺼같애." 5분30초. 질질질.최솔림의 머리칼을 잡은채로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정귀림은 발을 동동구르며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던 최솔림이 갑자기 고개를 바짝.쳐들었다. 써클렌즈를 껴서 한층 도드라져보이는 최솔림의 동그란 눈매가 코끝을 자극한다. "너..우리반 찐따년이지??.."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해주까??.." 두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말. 휘둥그레진 최솔림의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뒷통수가 불쌍한 여자애 얘기." "허..허억..." 드디어 뭔갈 알아챘나보다. 최솔림은 숨 넘어가는 소릴내며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가냘프게 떨었다.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최솔림과 눈높이를 맞추기위해 쪼그려앉은 나는 빙그레.웃으며 잡고있던 최솔림의 머리칼을 놨다. "불쌍한 여자애가 그렇게 믿고 따랐던 씨발놈은 알고보니 그 여자앨 자기 대신으로 삼는 조건으로 집을 나가려던 놈이였고. 불쌍한 여자애가 유일하게 믿었던 이쑤시개는 알고보니 그 씨발놈의 꼬붕이였고. 불쌍한 여자애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달리꽃은 알고보니 그 씨발놈의 여자였던 얘기. 그래서 뒷통수가 불쌍해진 여자애 얘기..." "미..미안.. 마.만약 넌줄 알았으면 안그랬을꺼야!!.. 나 나는 그냥 구나루가 시켜서.. 구,구나루가 구이겸하고 있었던 일 남친한테 꼬지른다고 협박해서!! 그래서.." 3분.벌써 3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들바들떨며 변명을 늘어놓는 최솔림의 검정색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퍽.가볍에 최솔림의 머리통을 후려찼다. 힘없이 픽.고꾸라지는 최솔림. ......... 눈동자에 힘이 사그라든다. 온 몸이 나른해지고 숨이 길어진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제발.제발... 미안해.용서해줘.. 다시는..." "난 앞으로 죽여볼 예정인데." "제발... 흐어.. 제발.." 최솔림은 본격적으로 무릎을 꿇고 내 바지를 잡아끌었다. 눈물콧물이 알맞게 버무려진 최솔림의 불쌍한 얼굴. 허리를 숙여 최솔림의 머리칼을 다시 잡아올렸다. 두피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을까? 최솔림의 한쪽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겁 먹지마.너 말고 그 씨발놈. 뒷통수가 불쌍한 여자애를 불쌍하게 만든 그 씨발놈. 그 새끼 죽일 예정이니까 넌 겁 먹지마." "흐어..흐엉.." "그냥 넌 나 가지고 논 벌 받는다고 생각해."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최솔림의 머리칼을 다시 놨다. 스르륵.힘없이 주저앉으려는 최솔림의 복부를 힘껏 걷어차고 그 다음엔 바닥에 나자빠진 최솔림의 목을 짓눌렀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최솔림을 아무런 감흥없이 바라보며 목을 누르는 발에 힘을 실었고.. 눈이 까뒤집혀 금방이라도 개거품 물고 쓰러지려는 그 때. 최솔림의 목에서 발을 뗐다. 쿨럭쿨럭.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리는 최솔림. "...다음부터는 애 가지고 놀지마라. 나 말고도 다른 애들 가지고 놀지마. 사람 가지고 노는거 안 좋은 취미다, 솔림아. 니가 잘난만큼 다른애도 잘난거고, 니가 소중한만큼 다른애 마음도 소중한거야. 자의든 타의든 살아있는 사람 가지고 노는건... 개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벽돌을 주워들었다. ........... 퍼억. ... ................. 투욱.. ".....그리고 난 그 개새끼고." 4-75. 투아웃 ........ ※오후 8시59분. 철컥.매끄럽게 열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굳은 얼굴의 맨인블랙들이 보였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쇼파로 걸어와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다가오는 정지혁씨. 온 몸에 퍼지는 피곤함에 몸을 뒤로 기대는데 정지혁씨가 들고있던 딱딱한 회초리가 턱을 찔렀다. "어딜 갔다왔지? 용산에 데리러 갔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더군." "강조아저씨한테 9시까지 들어온다고 말했는데.. 못들으셨나봐요." "하교시간은 분명 아침에 말해줬을텐데. 그리고 어제 이런 개인행동 앞으로 일절 봐주지 않는다고도 말하지 않았나??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굴꺼지?" ".....김한영 조질때까지요." 순간 정지혁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느꼈다면 졸린건가??.. 집에 오는 내내 욱신거리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정지혁씨의 따가운 시선이 얼굴에 와닿았지만 일일히 대꾸해주기가 귀찮아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는데 왼쪽뺨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물부터 드세요." "..응요.고마워요 강조아저씨." 아까 학교서부터 예쁜짓을 하는 강조아저씨를 향해 찡긋.윙크를 날려주고 아저씨가 건네준 시원한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정지혁씨에게 빈 유리컵을 건네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업과 품행이 뛰어나서 남의 모범이 될만한 학생.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해서 어른들의 체면을 살려주는 학생.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모범생과 어른들이 말하는 모범생의 정의는 참 달라요.똑같은 한국어고, 똑같은 글잔데 가지고 있는 뜻은 천지차이죠. 참 신기하지 않아요??.." "김윤서." "...어차피 어른들이 원하는 모범생은 후자일테니까 그렇게 해줄겁니다. 시험 존나 잘보고, 선생들한테 아양떨어서 어른들의 그 잘난 체면에 먹칠 안할테니까 작작하십쇼. 어차피 눈에 띄는 사고만 안치면 되는거잖습니까." 순간 정지혁씨의 눈에 불이 번쩍.하더니.. 띠바.아까 지니한테 후려맞은 뺨에서 다시 후끈후끈 열이 올라온다. 김윤서 수난시대야, 아주. 정지혁씨에게 얻어맞은 뺨을 문지르며 잔뜩 터져 핏물이 가득 고여버린 입안을 핥았다. 퉤.입술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튀어나왔다. "투아웃이야. 조심해." 조금만 다가서만 날카롭게 베일것만 같은 찬바람을 남기고 정지혁씨가 집을 나갔다. 현도아저씬 인상을 찌푸리더니 후.한숨을 내쉬며 정지혁씨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고,혼자 남은 강조아저씬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뺨에 손을 올려놓으셨다. 차가운 강조아저씨의 손바닥에 뺨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흡수되는 느낌이다. "아가씨.." "...거지같은 세상이예요.그쵸 아저씨?" ".." "난 그래서 이 세상이 싫어요.아마 칠공주랑 하늘 아녔음 진작에 죽어버렸을꺼야." "그런말 하시는 거 아녜요." "...요즘엔 잘 안했는데, 오늘따라 입이 근질거려서요. 하아.아저씨." "예??" 강조아저씨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김윤서의 얼굴이 비춰진다. 스마일걸이라도 되는지 빙글빙글 잘도 처 웃는 김윤서의 얼굴이... "내 약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뒷통수요.그게 제 약점이래요. 저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뒷통수요??" "예. 아저씨 내가 이렇게 김윤서 약점 알려줬으니깐. ...아저씬 그러지마요." "예??.." "아저씨까지 제 뒷통수 후리지 말라구요.나 아저씨가 쬐끔 좋아졌으니깐..." 느닷없는 고백에 놀란 강조아저씨의 두 뺨에 슬슬 홍조가 피어오르자 피식.웃으며 아저씨의 손을 떼고 방으로 들어왔다. 귀여운 아저씨. .... 쇼핑백을 내려놓고. 최솔림의 피가 잔뜩 튀어 볼썽 사나운 옷도 갈아입고 내일 입고갈 교복을 꺼내 옷걸이에 걸어놓고.. 마지막으로 깨끗히 씻고 나오자 책상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에서 그룹 NBC의 나봉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받아들자 익숙한 목소리 한 개가 고막을 울렸다. [아무리 인천이 좋다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연락 한번이 없냐??] ["오.쫄따구 하이. 오랜만이야 그대. 잘 지냈지??"] 오랜만에 듣는 기분 좋은 선우권의 목소리에 싱글싱글. 웃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오쫄따구 하이??.. 어쩜이래.] ["어쩜이러긴 뭘 어쩜이래."] [...가.] ["뭐??..가? 그럼 나."] [아씨. 그게 아니고 나 인천간다고.] ["니가 여긴 왜??"] [마누라 볼라구.] ["오. 인제 쫌 쎄졌나봐??.. 가슴팍에서 꺼냈네,그 아껴둔다는 사랑한다는 말."] [..어.나 김윤서 지켜줄만큼 좀 쎄졌어.] 사뭇 진지한 선우권의 목소리에 컥.하고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말한 자기도 쑥스러웠는지 핸드폰 너머로 흠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잊을만하면 흔들고. 괜찮을만하면 나타나고. 정말 구제불능이다, 선우권. ["요즘 대장님이 바뻐가지고 연애놀음 할 시간이 없는데.. 아쉽다.그래도 축하해. 쎄진거는."] [김윤서] ["엉??.."] [....아직도 한가람 살고있냐.] ["글쎄. 아마 잘 살고 있지 않을까??"] [니 마음속에. 아직도 한가람 살고 있냐구.] 꿈벅꿈벅.눈꺼풀을 몇번 위아래로 움직이다 파.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우권 삽질. 여전하네.. ["걔 가출한지 꽤 됐는데. 나도 지금 알았다야. 내가 워낙 바빠서 방관리를 못했어."] [....다.] ["엉?? 인제 다야??..그럼 난 라."] [아니. 이제 내가 니 마음에 들어간다고. 얼마전까지 한가람 살았던 방, 허물고 거기 선우권이 들어간다고..] ......... ["...아플껀데.눈물나게 아파서 잠도 못잘껀데. 김윤서 마음이 너무 좁아서 아플껀데 아마 너.."] [그런거 일일히 따지면서 어떻게 널 좋아하냐.] 침대 위로 털썩.드러누우며 눈두덩이 위로 오른손을 얹었다. 하루가 참 길다. 24시간. 1440분. 86..86...아무튼 참 길다. 긴 하루. 언제쯤 끝나려나. 후우.기다란 한숨만 터져나온다. ["사귀고 싶어,그렇게 나랑??"] [아니] ["그럼??"] .............. [...니 마음에만 들여보내주면 돼. 꼭 사겨주지 않아도 되니까. 백일,이백일 따져가며 안 사겨줘도 되니까 니 마음에 선우권, 이름 석자만 박아줘. 너한테 첫번째 아녀도 되니깐.그렇게 좋다는 하늘,그리고 니 친구들,메주같다던 너네 가족보다 훨씬 아래여도 되니까 니 마음에. 김윤서 심장에 살게만 해줘.] 4-76. 선우권의 여친 .......... ["존나 닭살."] [응.너가 생각해도 그렇지??..그래서 지금 팔뚝 긁고 있어. 존나 닭살이야 정말.] ["지가 말해놓고, 지가 더 난리네."] [흠흠. 그건그렇고 니 생각은 어떤데??] 세수 할 때 물이 튀겨 살짝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실끗.웃었다. ["차라리 사겨달라고하지. 그랬음 단박에 OK했을껀데.."] [뭐??저.정말로??] 당황한 선우권의 목소리가 입가를 포근하게 간지른다. 붕신. 이럴꺼면서 멋진척은.. 허리를 튕겨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부산에서 리아가 건네줬던 서류와 인천에 올라온 날.지니에게서 받았던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새가구에서만 난다는 특유의 나무 냄새를 기분좋게 느끼며, [서울연합 비밀 아지트]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는 서류를 집어들었다. ["하루에 한번씩 꼬박꼬박. 문자는 해줄 수 있고,너가 힘들다 그러면 웃겨줄 의향도 있어. 자랑스럽진 않더라도 남들한테 여친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만큼 연오한테 교육을 받을 수도 있고,핸드폰에 널 내 남친이라고 저장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너보다 하늘이 더 좋을꺼야,아마. 너가 아프다 그래도 칠공주가 다쳤으면 거길 먼저 갈꺼고, 너때문에 싸움을 그만둔다거나, 위험한짓을 안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 어쩌다 눈깔 뒤집히면 너까지 팰지도 모르고, 병원에서 만나는 게 일상이 될거야. ........그래서 사귀는 건 괜찮은데, 널 심장에 담을 수는 없어.죽어도 선우권이 김윤서한테 첫번째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너가 선택하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김윤서 남친이 될래요,그냥 쌩까고 지낼래요??..."] 쓸떼없는 잡음 넣지않고,가만히 듣고있던 선우권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영등포의 ´사신´. 용산의 ´닭큐멘터리´ 성북구 보문동의 ´블랙´ ............ 그리고 마지막. 강남구 삼성동의 ´폭풍´ 폐건물 지하에 위치한 서울연합 서열1위. 서울공고의 비밀아지트, 폭풍에 대한 설명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선우권의 대답. 내심 궁금하고,또 기대된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한가람은 뭐라고 했었는데.] 푸시식. 통통하게 불어진 풍선에서 픽.하고 바람이 새는 기분이다. 뜬금없는 선우권의 질문에 핸드폰을 어깨에 끼워놓고, 눈썹을 긁었다. 한가람은 뭐라고 했냐고??... 한가람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어떻게 알어. 아예 물어보질 않았는데. 하여간 삽질의 제왕이야,선우권. ["안 물어봤어."] [왜] ["...알고있었으니깐."] [뭐를]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가람인 알고 있었으니깐. 김윤서한테 절대 첫번째가 될 수 없다는 걸. 소중한 사람은 될 수 있지만,결코 전부를 걸 수있는 사람은 못된다는 걸. 그 애는 나보다 먼저 알고있었으니깐."] ............ 우권아,선우권. 너 그거 아니??.. 가람인 언제나 웃었어. 아무리 김윤서 옆에 있어주고, 가장 가까운데서 지켜봐주고, 좋아해줘도. 그래도 김윤서한테 하늘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거. 칠공주들처럼 김윤서에게 세상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그랬으면서도 웃었어. 내 옆에서. 김윤서 옆에서.. 하늘에 미쳐버린 년 옆에서. 눈물나게 웃었어. 자길 다쳐가면서도 웃었어. 그리고 지켜줬어. 내 하늘을. 내 세상을, 그리고 내 심장을. ........근데,그런데. 그런 아이가 뒷모습을 보였을때. 항상 곁에 있던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내게 등을 보였을 때. 매일매일 99를 주면서,1을 채워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그 아이가 누구도 아닌 날 위해서 먼저 손을 놨을 때. 난. 나는. 김윤서는..... .......... 하늘이 웃을만큼. 다행이라고, 이제라도 김윤서와 떨어진게 무척 다행이라고 크게 웃어버릴만큼. 딱 그만큼. 그 아일 버렸어. 빌어먹을 하늘때문에.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미운 김한영때문에. .....그 아일 버렸어. 손은 그 아이가 먼저 놨지만, 결국 버린 건 김윤서였던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버린건. 먼저 돌아선건 김윤서였던 거야. 평생 그 아이의 슬픈 사랑을 받았던. 김윤서였던 거야.. .................... 투둑. 수북하게 쌓인 A4용지 위로 동그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아마 하늘하고 선우권,둘 중에 하날 택하라면 주저없이 하늘을 택할꺼야. 칠공주하고 선우권, 둘 중에 하날 택하라고해도 역시 칠공주를 택할꺼야. 거기까지밖에 못해줘,나는. 한가람도 거기까지밖에 못왔으니깐. 하지만 한가람2따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니까 네가 결정해."] 하늘님. 제발.. 가여운 그 아이,끝까지 가엽게 만들지 마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이 아이,끝까지 빛날 수 있게 해주세요. 저 혼자 감당할께요. 김윤서 혼자 꽈악.부둥켜안고 있을께요. .....혼자 아프고,혼자 울다 지치면 그땐 하늘님한테 갈테니깐. 제발 이 아이마저 가엽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 [....서방님한다. 지금부터 선우권,김윤서 서방님 하고. 김윤선은 선우권 마누라한다. 김윤선일언중천금, 설마 모르는거 아니지??.. 치사하게 없던 일로 치자는 그런 말은 안듣는다.] 살짝 들뜬.하지만 슬픔이 묻어나는 선우권의 목소리. ............끝까지. 하늘님은 끝까지. ["...그럼 약속 한개만 해라,선우권."] [무슨 약속??] ["나한테. 김윤서한테... 니 전부를 걸지않기로."] 꾸깃. 쥐고있던 A4용지가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뼈가 느껴지는 말에 잠시 대답이 없던 선우권 가벼운 휘파람과 함께 흔쾌히 말했다. [좋아.대신 선우권이 김윤서의 전부가 되는 날이 오면 그땐. ...서로 손잡고 결혼식장으로 직행이다.약속해.] ["풉.. 끝까지 삽질이지,아주. 좋아,약속할께.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만약 너가 첫번째가 되는 날이 오면. 너랑 같이 결혼식장으로 갈께."] 달리에게 후려맞은 뒷통수가 따끔따끔.아팠던 날. 심장이 새카맣게 변했던 날. 더이상 젖을 데가 없을만큼 꽉.잠긴 날. .....선우권의 여친(여자친구)이 되었다. 4-77(1). <특별번외>미친개의 하루 ※새벽5시. 투박한 전자시계에서 알람음이 흘러나오자,지니의 검은 속눈썹이 움찔합니다.곧이어 부릅.눈을 뜬 지니는 거칠게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후우.기다란 한숨이 지니의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옵니다. 지니는 아무렇게나 뻗친 빨간머리를 벅벅.긁으며 욕실로 들어갑니다. ............. ※새벽5시40분. 깨끗히 씻고나온 지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내 시원스럽게 들이켰습니다. 가느다란 목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생수가 무척이나 섹시합니다. 띠리리.벽에 걸린 빨간색 전화기가 알람시계보다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립니다. 입주변을 손등으로 닦아낸 지니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참을 그자리에 서있다,결국 얼굴 가득 짜증스러움을 담고 전화기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만하라고 했지."] 전화를 받자마자 지니가 한 말이였습니다. 매일매일 걸려오는 전화. 지겹고,지겨워서 차라리 부숴버린 전화기만 해도 100대가 넘는 전화. .....냉기가 뚝뚝.떨어지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화기 반대편에서는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보고싶다,지니야. 못견디게 너가 보고싶어.] ["...새벽마다 전화하는 거. 은지니 일어나는 시간, 일일히 체크해가며 꼬박꼬박 전화해대는 거. 그만하라고 말했지,내가 분명히 너한테!!"] 따박따박.쉬지않고 지니가 소리쳤어요. .....현광입니다. 김현광이요. 은지니를 죽도록.정말 말 그대로 죽도록 사랑하는 아이,현광이. [너가 일어나는 시간에 나도 일어나고 싶어서 그래. 지금은 멀리 떨어져있으니깐..이런 거라도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하고 싶으면 너나해,이 개자식아."] [지니야.나 조만간 한국 들어갈거야. 최대한 빨리. 연오 본지도 오래됐고,이렇게 통화만 해서는 널-] ["최필립때문이라고 말해,솔직하게. 니 꼬붕들이 벌써 다 꼬질렀을 거 아냐??.."] 지니가 지친눈빛을 하고 벽에 몸을 기댑니다. 정곡을 찔렸는지, 지니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못하던 현광인 결국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응.그래 솔직하게 최필립이 신경쓰여. 널 웃게 만든 그 새끼가.. 잠도 못잘만큼 신경쓰여서 들어 가는 거야. 은지니 내꺼라고,도장 찍으러. 은지니, 김현광 여자라고 못 박아두러. 그러려고.] ["...만약 니가 지금 내 앞에 있었더라면. 아마 널 죽였을꺼야,김현광."] 콰득.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지니는 불같은 눈을 하고서 전화기를 힘껏 밟았습니다. 전화기의 파편이 튀어 발바닥이 따끔따끔.아플텐데도 힘껏 밟았습니다. 하악하악.한참 후, 지니가 숨을 몰아쉬며 발길질을 멈췄습니다. 피가 베어나올정도로 꽉.입술을 짓누른 지니는 간단한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와 뛰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윤서가 알려줬던대로 심장을 비우기 위해서. 깨끗히 버리기 위해서 숨이 멎을 때까지. 오늘도 지니는 달립니다. ......... 지니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현광이와의 짧지만 강한 통화와, 온 몸이 흠뻑 젖을만큼 힘겨운 달리기로.. ※아침11시. 느긋하게 학교에 들어선 지니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담임에게 손쉽게 조퇴증을 끊어, 들어간지 1시간도 안되 다시 학교를 나왔습니다. 학교를 나와 길거리를 쏘다니며 지니가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시비를 거는 일밖엔 없습니다. 한시간마다 걸려오는 전화가 지니를 미치게합니다. 쉴틈없이 날아오는 문자들이 지니를 돌게합니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 쳐박아둔 핸드폰은.현광이가 선물해준 최신형 핸드폰은.. 항상 지니의 눈을 붉게 만듭니다. "씨발.. 눈깔을 어따 박고다니는거야, 새끼야??" "아.미안하게 됐습니다,근데 말이 쫌 심하네요." "내가 말을 심하게 하던 말던 보태준 거 있어,이 개새끼야!!!!" 살짝 어깨를 치고간 사내를 향해 지니가 주먹을 내지릅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꼭 이렇게 크게 불리고야 마는 지니입니다. 사내와 싸움이 붙은 지니를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미친개가 떴다!!.. ........... ※오후 4시. 오늘 하루에만 벌써 5번의 크고작은 싸움을 일으킨 지니의 발걸음이 연오가 다니고 있는 제화상고로 향했습니다. 교문에 기대 연오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곱상하게 생긴 여자애 둘이 지니의 앞을 지나쳐가며 내뱉어서는 안될 말을 내뱉고야 맙니다. "영심아,너 그거 아노?? 체고 최필립있재??.. 그 칠성에 최필립말이다." "응,알재. 유명하잖아, 이 일대에서. 싸움 잘하고, 성격 좋고, 쌍판 쥐기고~ 그만한 머스마가 없재." "어야.근데 그 최필립이가 미친개하고 사귄단다!!.. 어제 1반 광자한테서 들었는데,쇼킹하지 않나?? 최필립만 불쌍하게 됐재,어쩌다 미친개한테 걸려가꼬.." "그르게나 말이다. 그나마 칠성에서 제일로 된 노마였는데." 억센 부산 사투리를 내며 재잘재잘.떠드는 여자애들의 목소리에 지니의 눈매가 흠칫.굳어집니다. 최필립. 부산에서 지니를 처음으로 웃게 만든 아이입니다. 칠공주 아니면 부드러워지지 않는 지니의 눈매를 처음으로 부드럽게 만든 아입니다. 제화체고 최고의 에이스. 부산연합 칠성의 멤버. 신랑으로 삼고 싶은 남자 1위등. 휘향찬란한 수식어들이 항상 따라다니는. 남자답게 생긴 몸과는 달리 착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예쁜 아이가. 어느순간 지니도 모르게 가슴으로 스며든 그 아이가 바로 저 여자애들이 말하는 최필립입니다. .......까득.주먹을 말아쥔 지니의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습니다. "야." "뭐꼬,야는??" 지니의 부름에 가는 길을 멈추고 돌아선 영심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터벅터벅.영심이에게 걸어가는 지니의 주머니에서 순간 빨간빛이 터졌습니다. 아마 현광이겠지요??.. 지니는 받을 가치도 없다는 듯 주머니의 핸드폰을 무시하고 영심이의 코 앞에 다가섰습니다. "최필립 이름,함부로 부르고 다니지 마라." "하.니가 뭔데 참견이가?? 니가 그 미친개라도 되나??.." "최필립. 함부로 주둥이에 달지말라면, 달지말 것이지 잔말이 많아 왜 이렇게!!!" 퍽. 지니의 강한 펀치에 영심이의 코뼈에서 우득.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꺅소리를 지르며 코를 감싸쥐는 영심일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던 지니는 주먹질로도 모자라,발길질까지 하기 시작했고. 결국 근처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빈 맥주병으로 영심이의 머리통을 후려치고나서야 영심을 놔주고야 말았습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선생님들에게까지 주먹질을 하고,주변에서 말리는 학생들의 얼굴에 기다란 상처를 남겨주고. 제화상고 앞에서 한참 난동을 부리던 지니가 모든 행동을 멈춘 건. 요란한 싸이렌소리와 함께 파란옷을 입은 포돌이가 들이닥쳤을 때였습니다. 하악하악.거친 숨을 토해내며 지니의 피묻은 주먹에 은색의 수갑이 채워집니다. ....너무 자주타 이젠 자기차처럼 느껴지는 경찰차에 올라탄 지니는 가죽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습니다. "가스나 너는 어째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노,사고를. 너때문에 우리 파출소 전화통이 쉴 틈이 없다아이가!!" 밉지않게 눈을 흘기며 잔소를 늘어놓는 포돌이 아저씨의 말은 이미 지니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니는 떠올렸습니다. 예전엔 현광이 하나였는데,오늘 보니 현광이 하나뿐이 아니였나봅니다. 활짝 웃고있는 필립이의 얼굴을 떠올리는 지니의 얼굴이 슬프게 구겨집니다. ........... 미칠만큼 지겹고,증오스러운 현광이가 지니를 미친개로 만드는 유일한 이유였는데.부산에 내려와 필립이를 만난 뒤로는 그 것마저도 아니게 됐습니다. 현광이의 전화와 문자만 보면 전기가 팍.하고 나가듯 사고회로가 터져버리는 지니였는데,이제는 필립이의 이름까지 더해지고만 것입니다. ....누가 이 불쌍한 미친개를 멈추게 해줄 수 있을까요. 지니를 죽도록 사랑하는 현광일까요. 아님 지니를 웃게 해줄 수 있는 필립일까요. 파출소로 향하는 내내 지니의 감겨진 눈은 떠지지 않았습니다. ............. ※오후8시. 부랴부랴 달려온 연오와 효선이가 사건을 수습하고 지니와 함께 파출소를 나오는 길. 효선이의 안쓰러운 눈길과 연오의 복작한 눈길이 한데 뒤엉켜 지니의 상처난 얼굴 위로 다가왔습니다. "....언제까지 이럴꺼니." "작작해,기지배야. 인천으로도 부족해서,부산까지 와서 미친개소릴 듣고 살고싶어??" 따뜻하지만 뼈가 담긴 효선이의 목소리와 앙칼졌지만 걱정스러움이 담긴 연오의 목소리가 지니의 인상을 찌푸리게 합니다. "..김윤서가 어떻게 알고 김현광 찾아가서 패 죽여버리기 전에 너가 먼저 정리해. 이연이하고 리아,그리고 효선이랑 나. 방금까지 윤서가 친 사고 수습하고 오는 길이야. 가뜩이나 위태로운 기지배,니 손으로 밀어버리고 싶어??" 누구보다 지니의 마음을.죽여버리고 싶을정도로 미워도 현광이를 절대 떼어낼 수 없는 지니의 슬프고도 지독한 마음을 알고있는 연오가 소리칩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아픈 연오가 소리칩니다. ......... 어두운 밤거리. 반짝이는 네온사인. 파출소 앞에 선 지니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습니다. "....씨발. 세상 참 좆같다.." ................. 그렇게 지니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주먹으로밖에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수 없는 불쌍한 미친개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갑니다. 죽을만큼 미친개를 사랑하는 아이와. 얼어버린 미친개의 심장을 녹여준 아이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한 미친개의 하루는 슬프도록 지겹게. 잔인하도록 아프게. 그렇게 어두운 막을 내립니다. 4-77(2) <특별번외>전설의 하루 ※아침9시. 아침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한영이가 부르르.눈을 뜹니다. 부시시하게 뜬 머리를 긁적이며 이불 속에서 빼꼼.고개만 내민 한영이가 TV화면에 뜬 시간을 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쉽니다. 어차피 공부하려고 다니는 학교도,늦는다고 뭐라고 할 선생도 없지만 그래도 한영인 주섬주섬.일어나 학교를 갈 준비를 합니다. ........... ※아침10시23분. 찰칵.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한영이의 모습에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던 901호 아가씨의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어쩜. 교복을 입어도 이렇게 멋질 수가 있는 걸까요??.. 하트로 변해버린 901호 아가씨의 눈을 아는지,모르는지 한영인 기다란 하품을 하며 비상구로 향했습니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내려 금새 1층에 도착한 한영인 한영이의 오토바이와 함께 아파트 주차장에 서있는 한 아이에게 터벅터벅.걸어갔습니다. "후우.시스터, 학교는 잘 갔어??" "예.광진이 말로는 가는 길에 두어번 시비가 붙었다는데,다행히 상처는 안 남으신 거 같답니다." "오야,수고했다. 하교길에는 잔챙이 안붙게 잘 챙기고, 이상한 낌새 보이면 바로 연락하라고 말해라." "예." "...참, 무성아." "예?" 오토바이에 올라탄 한영이 갑자기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한영이에게 반질반질. 잘 닦아놓은 오토바이를 건네주면서 윤서의 하루 일과를 보고해야되는 임무를 가진 그 아이, 무성이는 처음 듣는 한영이의 다정한 목소리에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달리더러 우리 시스터 마음 많이 뺏지 말라고 전해. 우리 시스터는 뒷통수가 약하니깐.. 쓸떼없는 뚜쟁이 노릇도 관두고,어설픈 친구 노릇도 다 관두고 그냥 옆에서 지키라고. 알았지??" "예." "....만약 그거 어기고 우리 시스터 뒷통수 아프게하면." 윤서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굳게 굳은 얼굴도,차갑게 보이는 눈매도 둥글둥글.모나지 않게 휘어지는 한영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전설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한영이에게서 느껴지는 오싹함에 무성이의 등 뒤로 싸늘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립니다. "김한영한테 죽어." "아,예에.." "그래. 수고했어,너도 이만 가봐라." 투닥투닥.잔뜩 긴장이 선 무성이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한영이가 키를 꽂았습니다. ..........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동안,한영이는 윤서를 생각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유일한 동생,윤서를요. 아장아장.걸으며 예쁜 입술로 '옵빠옵빠-'하고 부르며 달려오던 작은 윤서에서부터, 초등학교 졸업식날. 오지않는 엄마아빠를 대신해 간 자신의 품에 안겨 펑펑 울던 윤서를 지나. 죽여버리고 말겠다며,슬프도록 처절하게 악을 쓰는 다 큰 윤서까지. 한영이의 눈가에 살짝.물기가 어립니다. "나중엔 다 괜찮을꺼야. 쪼끔만,아주 쪼끔만 버티면.. 우리 아주 쪼끔만 더 아프면.. 괜찮을꺼야,윤서야." 위험스럽게 차선을 넘나들며 학교에 도착한 한영인 학교 뒷구석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반으로 향했습니다. 올해 20살인 한영인 다른 20살과는 달리 아직도 고등학교엘 다닙니다. 남들은 한번만 다닌다는 3학년을 한영인 두번 다니게 됐거든요. 하지만 한영인 오히려 그게 더 좋다합니다. 아직은 더 싸울 수가 있어서요. 어른이 될랑말랑한 미묘한 나이,곪을대로 곪아 썩어들어가는 심장을 마음껏 쉬게 할 수 있어서요. 그리고 윤에게 멀리 떨어지지 않아도 되서요.그래서 한영인 3-11반이라는 숫자를 정겹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창 수업 중인 교실. 당당하게 앞문을 열고 등장하는 한영일 보며 여자 아이들은 붉어진 얼굴로 '어머-어머'를 외쳤고, 남자 아이들은 존경스럽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살짝 눈쌀을 찌푸리셨지만 말이예요. "늦어서 죄송해요,쌤. 오다가 오리똥을 밟아서 빨리 올 수가 없었어요." 개구진 얼굴로 한영이 웃으며 말하자,선생님은 알았다며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고개를 까닥이고 자리로 걸어가 앉은 한영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위에 붙여놓은 윤서의 사진을 보는 것이였습니다. 누군가가 닦아놨는지 맨들맨들.빛이 나는 윤서의 통통한 뺨을 보며 한영이 씨익.웃습니다. "우리 시스터,오늘 하루도 무사히!" 7살 윤서를 향해 눈을 찡긋인 한영인 그래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합니다. 한영이는 아침이 싫습니다. 하루가 온통 밤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종일 잘 수있게 말이예요.하지만 그보다 한영이가 밤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윤서 얼굴을 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은 너무 밝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윤서를 몰래 보러갈 짬이 안나지만 밤은 다르거든요. 아주아주 어두운 밤이면 멀리서나마 윤서를 보고 올 수가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윤서라 가까이는 못가지만, 멀리서라면 마음껏 보고, 시린 심장에 따뜻한 윤서바람을 마음껏 넣고 올 수가 있어서.그래서 한영인 하루가 온통 밤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윤서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오후5시. 점심급식을 세번이나 먹고서 학교를 나서는 한영이의 뒤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따릅니다. 김한영 친위대라고도 불리고, 서울연합이라고도 불리는 아주아주 무서운 아이들입니다. 한영이의 말이라면 청와대에 쳐들어가 무궁화를 쌔벼올 수도 있는 아주 무서운 아이들이요. "..시스터는 뭐한대??." "예,학교에서 나오셔서 아지트로 가셨답니다. 간식거리를 많이 사가는 걸로 봐서는 아마 오늘 밤에 파티를 벌이실 모양입니다." "오와.좋겠네,파티도 하고. 넉넉하게 사겠어??.. 워낙 입들이 많아서 시스터한테 과자 한봉지나 돌아올지 모르겠다." "광진이가 잠깐 한눈 파시는 사이에 봉지에 먹을거릴 몇개 더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자식,기특하네." 무성이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무현이가 한영이의 옆에서 '실시간 윤서안내'를 합니다. 무현이에게서 윤서 얘기를 듣는내내 한영이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지나가며 한영이를 바라보는 여자애들의 시선이 수줍게 달아오릅니다. 하지만 그런 시선엔 무심한 한영인 오늘도 여전히 윤서 얘기에만 웃고,윤서 소식에만 미소를 짓습니다. .......... 서울연합의 아지트 '폭풍'. 폐건물 지하를 개조해 만든 아지트에 들어서며 한영이가 입에 문 담배를 발로 비벼끕니다. 윤서의 앞에선 담배 피우는 모습,보여주기가 싫었나봅니다. 폭풍의 가장 안쪽에 걸려있는 크게 확대된 윤서의 사진 앞.학교에서처럼 반갑에 인사한 한영인 가죽쇼파에 걸터앉았습니다. "왔냐??..오늘은 쫌 늦었다." "죄송합니다. 경기연합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울연합의 넘버쓰리. 아석이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를 합니다. 하암.하품을 하며 한영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뻣뻣하게 서있는 연합 아이들을 둘러봤습니다. "쇼파는 폼으로 사다놓은 주 알어??..작작하고 앉아서 쉬어라. 쉬기 싫으면 가서 당구나 치던가." "예." 한영이의 말에 원래 연합에 있었거나,한영이의 성격을 알고 있는 몇몇 아이들이 당구대로 향합니다. 하지만 연합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초짜들은 한영이의 카리스마에 눌려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습니다. 후우.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아이들을 쳐다보던 한영인 앞에 있는 넓은 테이블을 발로 후려치며 소리쳤습니다. "씨박들아,대가리는 폼이냐?!!! 가서 쳐 놀라고, 답답하게 시야 막지말고!!!" 그제서야 아이들은 후다닥.아지트 안에 위치한 여러가지 운동기구나 게임기구의 앞으로 달려갑니다. 병신새끼들.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으며 한영이 박하사탕을 꺼내 먹습니다. 윤서 앞에서는 이렇게 담배 대신 항상 박하사탕을 먹는 한영이입니다. "저..선배님." "어." "가람이가 부산에 갔다는데,들으셨습니까??" "...강안이가 어제 전화했어." "저..이대로 두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아가씨께 잘못 입을 놀렸다간-" "가람이 그렇게 멍청한 새끼 아니다,아석아. 넌 부산 걱정 하지말고 문제 있다는 경기연합이나 신경써라." "예." 까득. 느긋한 성격이 못되는 한영인 말하는 사이 사탕을 깨먹고,두번째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습니다. 아지트 안을 메운 아이들의 색색깔의 머리통에 시선을 두며 한영이 입을 엽니다. "아석아." "예." "김한영 전설이 언제쯤 깨질 거 같냐??" "예??" "너희가 대단하다고 떠받는 김한영 전설을 우리 시스터가 언제쯤 깨줄 거 같냐고." "......선배님이 아가씨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지만, 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그런 일은 없다라..우리 시스터 실력은 누구보다 네가 더 잘알면서 무슨 그런 섭한 소릴 하냐." 순간 한영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습니다. 인천에서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한영을 지켜봐왔던 아석으로썬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잘 알고 있었지만,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한영이에겐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이지만, 서울연합으로써 윤서는 눈엣가시일 뿐이다. 한영인 윤서에게 개박살나는 날을 기대하지만, 서울연합으로써는 한영을 향한 윤서의 불타는 복수심은 미리 꺼버려야 할 불쾌한 존재일 뿐이다. "...아가씨가 선배님께 어떤 의미인지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하지만 그만큼 연합도 선배님께 큰 의미 아닙니까??.. 지금 아가씨가 그렇게 잡고싶어하시는 하늘, 얼마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의 최고 꿈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가씬... .......선배님께 연합보다 작은 의미였잖습니까." 퍽. 아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영이의 주먹이 아석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붉은 핏방울이 아석의 코에서 주르륵.쏟아져 내리고.. 둘의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서울연합의 넘버파이브, 강호가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말 함부로 하지마라,반아석. 누구보다 날 잘안다는 새끼가 감히 그따위로 주둥이를 놀려??.." "저희에게 선배님은 하늘입니다.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평생을 두고 모실 전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선배님을 조지겠다는 아가씨,전 단 한번도 좋게 여긴적 없습-" 쿠당탕.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한영이 아석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날립니다. 당황한 강호가 한영을 막아보지만,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한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습니다. 몇명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한영이를 말렸지만,한영의 주먹을 멈추지 않았고.. 아석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반쯤 눈을 감자 한영이의 주먹질이 멈췄습니다. "....너희가 날 하늘로 여기면서 떠받드는 만큼,아니 그 이상 나도 너희가 소중하다.하지만 그때도,지금도 시스터만큼은 아니다. 섭섭하다고 떠날 새끼들은 떠나,잡지 않을테니. 하지만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시스터 이름 들먹이면, 그땐 다리하나 부러질 각오하는 게 좋을꺼다." "...선배님...쿨럭.." 후배에게 몸을 기대 배를 움켜쥔 아석이 괴로운 얼굴로 한영을 불렀습니다. 감정없이 메마른 눈으로 아석을 돌아보는 한영이. 아석의 눈동자에 얼핏.슬픔이 어립니다. "선배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선배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목숨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안됩니다.. 제 하늘이... 무너지는 모습. 일부러... 아가씨게 박살나려는 선배님의 모습... 보고싶지 않아요... 형...한영이 형.. 제발.. ...그러지..크억!!.."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아석이 컥컥거리며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그 중 눈치빠른 아이가 아석을 업고 급히 병원을 향해 달려갔고,지친 얼굴을 쓸어내린 한영이 다시 쇼파에 앉습니다. 강호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한영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래.나도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고, 목숨을 버릴 각오도 됐기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온 거다.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위해 그렇게 달려올 동안... 내 하나뿐인 동생은.. 눈에 넣어도 안아플 소중한 내 동생은... 상처난 심장을 안고 살아왔다. 타버린 심장을 안고.. 개같은 이 세상.. 꾸역꾸역 버텼다. ....그런 동생에게..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는 난.. 이제 내 목숨을 주고싶다.내 만족을,너희들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달릴동안 다친 내 동생에게.. 이젠 내 세상을 주고싶다. 내가 가진 하늘을.. 동생의 아픈 심장에게 주고싶다..."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한영이의 가슴을 적시는 말에.도저히 삼킬 수가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아이들의 마음을 태워버렸습니다. 활활.재도 남기지 않고 붉게 태워버렸습니다. .......... ※오후12시58분. 어두운 집에 들어선 한영은 불도 켜기 전에,컴퓨터의 전원을 켰습니다. 바탕화면을 가득 채우는 윤서의 사진을 향해 다녀왔단 인사를 남기고,인터넷창을 연 한영인 메일을 확인합니다. ....무성이에게서 메일이 와있습니다. [....오후8시. 칠성과 시비가 붙으심. 오후8시38분. 화강안과 만남. 오후8시59분. 선우권등 칠성의 멤버와 만남. ....오후9시13분. 길거리에서 제화고 남학생과 시비가 붙음. 오후9시20분. 친구분께서 제화고 남학생과 대신 싸움. ....오후11시50분. 무사히 귀가.] 빙그레.메일을 읽는 한영이의 입가가 예쁘게 휘어집니다. 첨부파일로 딸려온 윤서의 사진들을 보며 한영이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윤서를 보는 한영이의 가슴이 웁니다. "...나때문에 살아서 다행이야..나때문에 죽지않고 버텨줘서 다행이야.. 이쁘게 살아,시스터. 기꺼이 내 목숨 줄테니까.. 그때까지.. 그 이후로도... 이쁘게.. 웃으면서...." 달깍. 메일창을 끈 한영인 자꾸만 떨리는 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쓸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교복을 갈아입고 트레이닝룸으로 들어온 한영인 온 몸이 땀에 젖을 때까지. 가슴을 가득 메운 눈물을 땀으로 다 내보내 가슴을 깨끗히 비울 때까지. 샌드백을 두드립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어둠이 잠길 때까지. 그러다 지쳐 잠이 들면 내일 또 아침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눈을 뜹니다. 무성이에게 윤서의 아침 일과를 전해듣고, 졸업장을 따기위해 학교를 갑니다. 학교가 끝난 뒤엔 무현이에게서 윤서의 오후 일과를 듣고 아지트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무성이가 보낸 윤서의 사진을 보고 하루를 마칩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삼일이 가고,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갑니다. 한영이의 시간을 그렇게 매일.되풀이 됩니다. 전보다 한껏 자란 윤서가 다시 그를 찾아 올 때까지. 한영이의 시간은 그렇게 매일매일.그리움으로 시작해 그리움으로 끝납니다. ............. 김한영은 전설입니다. 인천에서도 서울에서도,그리고 이젠 전국에서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한 최고의 전설. 중학교 2학년 때 인천연합을 만들었고. 중학교 3학년 때 78:1로 싸워서 이긴적이 있고. 그 해 겨울. 조폭들과 시비가 붙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주먹을 들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천연합을 전국서열 1위로 올렸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후배들을 위해 교장실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연합을 만들었고. 서울연합을 만든지 일주일만에 전국 최강자들만 모였다는 서울을 통합했고. 그 해 인천연합을 제외한 전지역의 연합을 깼고. 두번째 맞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연합을 조직했고. ....지난 수년간 부동의 전국서열 1위를 차지한 살아있는 전설이 바로 김한영입니다. 우는 아이도 뚝 그친다는 김한영의 전설은 여전히 유명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한영이는 압니다. 자신이 그런 전설이 될 동안 숨죽여 울던 한 아이를. 상처난 가슴을 안고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었던 한 아이를. 자신때문에 모진 생활을 버텼던 한 아이를. .......매일매일 궁금하지만,결국 오빠란 이름으로 앞에 나설 수 없는 한 아이를. 전설의 길을 택한 그 순간부터 죽어서도 떳떳하게 안아줄 수 없는 한 아이를. 한영이는 압니다. 그래서 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영이의 가슴엔 항상 눈물이 넘쳐납니다. 눈으로 울지 못하는 한영이의 가슴엔 항상 눈물이 넘쳐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그는 자신을.하늘을.그의 친구를. 후배를.동료를.선배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그들을 위해 달렸고, 그들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바랍니다. 전설은 바랍니다. ............ 그의 동생이 이젠 새로운 전설이 되길. 자신과는 달리 남을 잘 웃길 주 알고,자신도 잘 웃을 주 알며 사랑스러운 그의 동생이. 그를 넘어 새로운 전설이 되길. 자신의 뒤를 이어,살아있는 진정한 전설이 되길. 전설은 어제도,오늘도,내일도 그리고 내일모레도. 그 내일모레의 또 내일도 바랍니다. 4-77(3) <특별번외>칠공주의 하루 ※새벽4시. .... 새벽2시에야 겨우 잠이든 효선이의 두 눈이 번쩍.떠집니다. 겨우 2시간밖에 잠을 못잔 사람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하게 멀쩡해 보이는 효선인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씻은 뒤,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영어로 쏼라쏼라.쏟아져 나오는 단어들을 열심히 입으로 되뇌입니다. 밤과 겨우 2시간 차이밖에 나지않는 효선이의 아침은 이렇게 누구보다 가장 일찍,그리고 가장 빠르게 시작됩니다. (※새벽6시. 온통 레이스 투성인 침대 위.인형처럼 잠을 자고 있는 연오가 보입니다. 띠리링.똑같은 가게에서 파는 알람시계라도 연오의 알람시계는 뭔가 다른가 봅니다. 연오를 닮아 참 예쁘게도 울리는 알람소리에 연오의 눈꺼풀이 파르르.떨렸습니다. 달깍.공주모양의 알람시계의 버튼을 누르며 잠이 깬 연오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폅니다. 일어나자마자 침대 위,테이블 위에 있는 거울을 집어든 연오는 밤새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온 연오는 30평은 족히 넘을듯한 방 안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쏴아.. 칠공주 중에서 세번째로 일찍 일어나는 연오지만 집을 나서는 시각은 항상 가장 늦게 일어나는 윤서와 똑같습니다. 왜냐면 연오는 아침에 할 일이 참 많은 아이거든요. 프랑스에서 직수입해 온 목욕샴푸로 샤워도 해야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도 셋팅해야하고, 손톱정리도 해야하고.. 정말이지 쓸떼없는 할 일이 참 많은 연오입니다.) <※새벽6시30분. 리아와 아라가 동시에 눈을 뜹니다. 눈을 뜨자마자 서로를 바라보는 리아와 아라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어립니다.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모범생으로 소문난 리아와 아라는 부산에 내려온 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히 같이 살게 됐습니다. 품행이 가장 불량해 문제아로 제대로 찍힌 윤서는 가장 감시가 심하다는 경찰청장님네 댁에. 적당한 연기로 그냥 문제아로 찍힌 지니와 이연이는 그보다 조금 덜한 경감님데 댁에.대단한 빽을 가지고 있는 연오와 효선이는 따로 어른들께서 마련해주신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비해 두 사람의 동거는 꽤 특별하다고 볼 수 있지요. 칠공주 중 유일하게 어른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니깐요. 아라가 아침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리아는 아라와 자신이 입고갈 교복을 준비해놓습니다.> ※아침7시. 효선이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자전거를 탄 한 남자아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효선이의 앞으로 달려옵니다. 빨간 자전거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그 남자아인 효선이에게 장미꽃 한송이를 건네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보기만해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정도로 귀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바라보는 효선이의 얼굴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시간 있으면 단어 한자라도 더 외워,천상아." "난 단어 한자보다 누나가 더 좋은데요." "..후.남동생뻘 되는 애하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내가 왜 누나 남동생이예요? 난 재천상이라구요. 누나 남동생이 아니라 재천상. 누날 좋아하는 재천상!"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며 효선이가 천상이에게 받은 꽃 한 송이를 다시 자전거 바구니에 집어넣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뒤,정확히 말하자면 새로 다니게 된 학교에서 천상이와 만난 뒤로부터 계속되온 아침의 고백타임이 영 달갑지 않은 효선입니다. 화가난듯 붉어진 천상이의 얼굴을 보는 효선이의 표정이 살짝 굳어집니다. 리아와 맞먹을정도로 감정 기복이 없는 효선이가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가장 눈치가 빠르다는 윤서조차도 감을 못잡을정도로 미약하게 뿜어져나오고 있는 효선이의 짜증지수를 용케도 알아낸 천상이가 금새 표정을 풀고 베시시. 웃었습니다. "누나.그만 짜증내고 학교 가요." "...부탁인데. 아침마다 니 얼굴, 안보게 해줬으면 좋겠다." 효선이의 탐탁치않은 한마디. 풀죽은 강아지처럼 천상이가 시무룩해집니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따끔한 효선이였지만, 아무런 내색하지않고 앞장서 걷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천상이가 조심스럽게 따릅니다. <※아침7시40분. 아라와 리아가 사이좋게 집을 나섭니다. 오늘도 윤서의 걱정으로 얘기를 나누던 아라와 리아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한개 드리워졌습니다. "하이,리아." "반계율." "리아 친구도 하이??" "아,예."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리아가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계율이를 노려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기죽고도 남을 리아의 싸늘함 앞에서 계율인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습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도 역시나,아라가 먼저 자리를 뜹니다.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아라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리아가 계율이의 정강이를 힘껏 후려찹니다. "반계율,정말 싫다." 칠공주들한테는 남자 알레르기라도 있는걸까요. 리아는 40분 전,효선이처럼 굳은 얼굴로 계율이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놓고는 학교로 향합니다.> (※아침9시35분. 끼익.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검은 철제문이 열리며 반짝반짝.빛이 나는 연오가 걸어 나옵니다. 그와 동시에 몇시간 전부터 연오를 기다리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연오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혹 연오가 다칠세랴 어느정도 거리를 둔 남자들의 선물공세에 연오는 방긋.웃으며 감사를 표합니다. 몇명의 남자들이 코피를 쏟으며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놀라운 주연오의 파워. "오늘은 좀 걷고 싶은데.. 내일 다시 뵈요." 나긋나긋.남자들의 심장을 설레게 하는 연오의 목소리에 코피를 쏟는 남자들이 하나둘,더 늘어납니다. 연오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남자들이 가져온 자전거와 오토바이,스쿠터에 자동차.그리고 킥보드까지.. 담벼락을 가리고 서있는 교통수단들을 유유히 지나쳐 가는 연오의 뒤로 남자들의 하트눈빛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뒷모습을 보이며 걷는 연오의 얼굴은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바보같은 놈들. 연오는 비웃음을 가득 담은 콧방귀를 끼며 학교가 아닌 강안이의 집 앞으로 향했습니다.) <※오후1시. 제화국고의 점심시간입니다. 리아는 샛노란 금발머리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Julia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새로 온 초짜선생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식당에 들어선 리아의 안색이 흠칫.하고 굳습니다. .....제화동에서 제일 시설이 좋다고 소문난 제화국고의 식당이 썰렁할정도로 휑.합니다. 그리고 텅텅 비어있는 식당의 한가운데에는 멀리에서도 눈에 확.튀는 계율이가 두 개의 식판을 준비해놓고 앉아있었습니다. 보나마나 계율이 짓이겠지요. 쓰레기통이라도 뒤집어쓴 듯,리아의 인상이 구겨집니다. "반계율,내가 점심시간마다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지??.. 내 말이 우습니?.." "하지만.. 리아, 너 시끄러우면 밥 잘 안 먹잖아." "내 일이야. 밥을 처먹든,못 처먹든 내 일이라구!! 왜 니가 거기에 간섭인데??.." "내가 너 좋아하니까." 얼굴이 빨개질정도로 흥분한 리아와 달리 싱글벙글.잘도 웃는 계율이의 모습에 Julia가 당황한 얼굴로 리아와 계율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제화동을 넘어 부산에서 명성이 자자한 제화국고의 짱,반계율. 전학온지 단 한달만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지지를 받아 제화국고의 학생회장이 된 정리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이름이지만, 얼굴만큼은 서로 기가막히게 잘 어울리는 게 참 신기합니다. 연예인에 비교를 하자면 김태희,원빈 커플이 바로 정리아,반계율 커플이거든요. 당황스러움과 함께 신기함이 가득 담긴 Julia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율의 앞으로 걸어간 리아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습니다. "너 연봉5000돼?? 나보다 머리에 든 거 많아??..것도 아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길해,집이 빵빵해??" "어??어..글쎄. 근데 연봉이 뭐냐??.. 동화책인가?..." "이것봐. 이래서 난 니가 싫어,반계율. 무식하고,능력도 없고,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고..요란한 머리에다 맨날 학생부에 끌려가고. 무엇보다 넌!!... 김윤서랑 똑같애. 밥먹듯이 싸움질을 하면서도,자기가 왜 그 짓을 하고 있는질 몰라. 허구언날 다치면서도 그만둘 줄을 모른다구. 김윤서가 너보다 더 심하긴 하지만..그래도 너같은 애 정말 질색이야!!" 서슬퍼런 독설에도 불구하고 계율이의 눈에는 화가난 리아까지도 너무 예뻐보입니다. 조막만한 얼굴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어쩜 저렇게 섹시할 수가 있지요??.. 계율이의 눈동자가 하트로 뿅.변합니다. "...근데 김윤서가 누구야??너 친구?"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너? 지금 니가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볼 상황이야?!!!.." "근데 이름이 꽤 낯익다??.. 김윤서,김윤서.. 아!! 제화예고 짱! 맞지,걔??" 칭찬이라도 받고싶은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묻는 계율이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리아가 허탈하게 웃습니다. 어의없어 웃은 것도 좋다고 계율이가 따라 웃습니다. 리아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예쁘게만 보이는 계율이의 착한 마음을 리아는 언제쯤이면 알아줄까요.> (※오후6시8분. 제화남고 교문 앞. 교문을 나서는 제화남고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제화남고 학생들은 억.소리 나게 예쁜 연오의 모습에 놀라고, 그 뒤로 쫘르륵.서있는 또다른 남자들의 모습에 또 한번 놀랍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그런 남학생들에게 눈길 한 번 안주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기다리던 연오의 눈에 낯이 익은 아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연오는 곧이어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한솔아!!.." "에..예??.. 아. 연오누나,안녕하세요." 연오의 부름과 동시에 쏟아져오는 남자들의 부리부리한 눈빛에 놀란 한솔이 눈을 꿈벅이며 얼떨결에 연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한솔인 칠공주가 부산에서 지낼동안 윤서의 남동생이 된 아이입니다. 하얀 덧니가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귀여운 한솔이의 머리를 쓱쓱.쓰다듬으며 연오가 대견스럽다는 듯 웃었습니다. "지금 집에가니??.." "아뇨.독서실에 들렸다가.. 근데 여긴 어쩐일이세요??" "아.우리 자기가 이 학교 다니거든. 윤서가 요즘 너 걱정 많이하더라. 거의 밤이 다되서 집에 간다며. 윤서 고 가시네가 너 납치되면 어떻게 하냐고 아주 난리가 아냐." 호들갑을 떨던 윤서의 모습을 떠올리는 연오의 입가가 포근하게 휘어집니다. 정말.. 사람이 예뻐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건가요??.. 여자라면 윤서밖에 모르는 한솔이조차 숨을 쉬기 힘들정도로 예쁜 연오의 미소에 수많은 남자들이 쓰러졌습니다. 2분뒤. 한솔이를 배웅하고 돌아선 연오의 눈에 그렇게도 기다리던 얼굴이 보였습니다. 저절로 지어지는 함박웃음. 연오는 팔짝팔짝.이연이처럼 뛰어대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자기야!!..오늘 하루 어땠어??" "씨발.꺼져." "윤서가 그랬는데... 사람은 촛불이 아니여서 꺼질 수 없대.나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자기 앞에서 꺼질 수가 없는걸?? 그니까 자기가 날 받아들이는 게 빠를꺼야." "....죽고싶지 않으면 니 추종자들 데리고 빨리 꺼져." 강안이의 위협적인 협박에 연오가 귀엽게 볼을 내밀며 입술을 비죽였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연오의 눈웃음 한방이면 갑니다. 보통보다 쬐끔 높은 남자들은 연오의 목소리 한방이면 갑니다. 보통이 아닌 남자들은 연오의 애교 한방이면 갑니다. 근데 이 남자,화강안. 연오가 달콤함이 뚝뚝.떨어지는 눈웃음을 쳐도. 꾀꼬리도 울고갈 낭랑한 목소리로 불러도. 코피가 터질만큼 앙증맞은 애교를 떨어도 도통 움직이질 않습니다. 아무리 죽이고 싶은 적이라도 남자라면 한번쯤 넘어올 법도 한데 말이죠. "질투하는거지??.. 걱정마,자기. 요즘 주연오 눈엔 자기밖에 안보이니깐." "...더러운 계집애." "더럽다구?? 나 씻었는데. 킁킁,냄새 나?.." "김윤서랑 어울려 다니더니,그 년이랑 똑같아졌구나 너도. 사람 우습게 여기는 거.더럽고 역겨울 정도로 똑같아서 신물이 난다.진짜." 순간. 거짓말처럼 연오의 눈가에 주렁주렁.매달려 있던 웃음기가 싹.가셨습니다. 연오를 봐온 지난 몇 년간 단 한번도 본 적없는 싸늘한 모습에 강안이 당황했는지 잠시 얼굴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며 연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강안입니다. 사람 무안주기로 따지자면 지니와 맞먹고, 사람 개똥취급 하는 걸로 따지자면 리아와 맞먹는 아이가 바로 화강안이란 아인데 연오의 변화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리가 없죠. "...화강안아." "..." ".....주연오가 미치게 좋아하는 화강안아. 뭘해도 다 괜찮은데. 너가 하는거라면 뭘해도 다 멋지게 봐줄 수 있는데... 윤서는 들먹이지마. 윤서 그렇게. 그렇.. 후. 아,미안. 미안미안.. 이 상태로 계속 입 열다간 후회할 꺼 같애. 후와..오늘은 먼저 갈께,자기. 빠빠이." 빙글빙글. 터져오르는 화를 꾹꾹.눌러담은 연오가 떨리는 입가로 애써 미소를 지어주고 돌아섰습니다. 후들후들 떨리는 주먹을 악.쥐고 걸어가는 연오의 커다란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두둑.튀어나옵니다. 우는걸까요? 가늘게 떨리는 연오의 어깨를 보는 강안이의 눈빛이 씁쓸하게 젖어갔습니다. ........ 만약 강안이가 진짜 사랑이 아니였음. 연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진짜 사랑이 아니였음. ....아마 강안인 쥐도새도 모르게 끽.해서 염라대왕과 하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아니게 예쁜 연오는 화를 내도 역시 보통 아니게 화를 내거든요.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오들오들.떨정도로 화난 연오의 모습은...휘유. 강안이는 모를껍니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고,또 그 큰 실수를 눈 감아줄만큼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걸 말이예요.) ※오후7시58분. 피곤한지.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지트로 향하던 효선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춥니다.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핸드폰을 꺼내든 효선이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집니다. [윤서담당] 효선이가 비밀리에 붙여놓은 윤서의 감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닐거란 예감에 효선이의 뒷통수를 강하게 흔듭니다. 정말이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는 친굽니다,윤서는. ["후,무슨 일이세요."]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으셨는데..하필이면 경찰서 앞에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조금 급하게 됐습니다.] ["어디쯤이죠?"] 아지트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 효선이가 안주머니에서 칠공주 전용으로 쓰고있는 핸드폰을 꺼내며 심각하게 묻자,반대편에서 윤서가 잡혀있는 파출소의 주소를 부릅니다. 후우. 또 한번.효선이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나옵니다. ["심각한가요??"] [상대편 학생이 모두 다섯명이였는데,그 중 둘이 전치5주 받고.나머지 셋은 전치2주 받았습니다. 근데 전치5주 받은 학생 중 한 명 부모님이 제화예고 학부모회장이랍니다.] ["윤서는 어쩌자고.. 후.알았어요,고마워요. 참, 그 학생들은 어 디 입원했죠??"] [대한병원입니다.] ["예,그럼 수고하세요."] 뚜.전화를 끊은 효선이가 바로 단축번호3번을 길게 누르며 어디론가 전화를 겁니다. 요즘 누구다 다 한다는 컬러링도 없이 단촐한 기계음이 몇번 흐르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응,효선아. 무슨일이야.] ["윤서가 사고쳤어.하필 건드린게 자기네 학교 학부모회장 딸인가봐. 지금 대한병원에 입원해 있다니까 너가 이연이랑 좀 찾아가봐."] [뭐?? 이 기집애!!!] 리아의 성난 목소리에 효선이가 텁텁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마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이 갔을꺼야. 나말고도 애들이 윤서한테 몇명 붙여놓은 것 같았으니깐. 아무튼 병원쪽하고 상대편 부모님들은 이연이랑, 니가 알아서 수습해줘. 여기는 아라하고 연오랑 같이 처리해 놓을게."] [그래. 아유,이 기지배때문에 쉴 틈이 없다 아주.] 리아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이번엔 반대편 손에 든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연] 발신자를 확인한 효선인 도로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며 핸드폰의 플립을 열었습니다. 쨍쨍거리는 이연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사아저씨에게 목적지를 말한 효선인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댑니다. 그리고 피곤에 젖은 효선이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마디가 터져나옵니다. ["애들 좀 모아줘,이연아."] .............. <※오후7시58분. 효선이가 전화를 받았던 그 시각. 아지트에 가장 먼저 도착해 떡볶이를 만들고 있던 아라는 앞치마 앞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작은 진동에 들고있던 주걱을 내려놓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큰일났어요,언니. 저 인영인데요, 윤서언니가 지금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무-뭐?? 윤서가??"] [급해요,언니. 지금 빨리 제화경찰서로 나오세요!!] 언제 어디서 사고를 칠지 모르는 윤서가 걱정되 붙여놓은 후배,인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아라의 얼굴이 금새 사색이 되었습니다. 서둘러 앞치마를 벗은 아라는 인영이의 전화를 급하게 끊고나서 연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 딸깍.아지트 문을 잠그고서 나선 아라는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연오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종종걸음으로 길을 내려갑니다. ["응,연오야. 나야."] [어.왠일이야??] ["윤서가 지금 제화경찰서에 있대."] [아-.나도 방금 전화 받았어. 우리가 붙여놓은 애들만 해도 열명이 넘을껀데,도대체 그 눈들을 어떻게 피해서 사고를 쳤을까??..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지.] ["으응.. 아무튼 그래서 난 지금 경찰서로 가는 중인데, 넌 어떻게 할래??"] [난 경찰서장 좀 만나볼께.효선이하고 윤서,알아서 잘 잡아놔. 하여간 이 사고뭉치때문에 몸 한번을 못흔든다야. 후.그럼 좀있다 봐.] ......... 연오의 한숨과 함께 아라의 눈망울이 흔들렸습니다.> 일주일에 네 번이상 걸려오는 경찰서장님 전화에 지끈지끈.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경찰서로 달려가면 그 곳이 바로 칠공주의 또다른 아지트가 됩니다. 도저히 못참겠어서 붙여놓은 감시자들에게서 매일매일 걸려오는 전화에 후와후와.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병원으로 달려가면 그 곳이 바로 칠공주의 또다른 아지트가 됩니다. 한 대 확.패주고 싶은 얼굴로 싱글싱글.잘도 웃고있는 윤서를 보며 하루하루. 칠공주들의 얼굴엔 잔주름만이 늘어가고 있다는 걸 과연 윤서가 알아줄까요??... 어찌어찌 사고를 수습해 진짜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 이연이와 손잡고 팔짝팔짝.철없는 아이처럼 뛰어가는 윤서의 뒷모습을 보는 칠공주들의 메마른 심장이 쿵덕쿵덕.불안감에 흔들리고 있다는 걸 과연 윤서가 알아줄까요??.. 조금은 특별한 아침을 시작으로. 조금은 설레고,조금은 지겨운 고백타임을 거쳐. 조금은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며. 조금은 특이한 의뢰를 받아 돈을 벌고. 심하게 피곤한 저녁을 끝으로. 칠공주들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칠공주여서 특별하고,칠공주여서 특이하고. 칠공주여서 피곤한 하루가 그렇게 꼴딱꼴딱.잘도 갑니다. 4-78. 뒷통수가 아픈 날 ............ ........ ※다음날 새벽4시28분. 목구멍을 텁텁하게 만드는 갈증을 못견디고 방을 나와 냉장고로 향하는데.여름괴담을 찍어도 될만큼 을씨년스러운 베란다에서 두런두런.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저씨들이 아직 안갔나. 조심스럽게 냉장고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살금살금. 말소리가 들려오는 베란다로 향했다. 살짝 열려진 문틈 사이로 따가운 담배 연기와 함께 강조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이냐??..어 그래. 저번에 니가 부탁했던대로 됐다. 어." ....... 발소리를 죽이느라 잔뜩 숙였던 허리를 펴며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김윤서 약점까지 말해줬는데.그거 말해준지 62시간도 안지났는데..설마. 조그마한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안고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통화중인지 가끔씩 아저씨의 목소리가 끊긴다. "아냐,임마. 너 말대로 재밌는 애였어. 어. ...글쎄." ....... "니가 걱정할 필욘 없을 꺼같다. 옥상에서 얘기 좀 나눴는데,날 경계하는 눈치는 아녔어. 어." ........ "천하의 ...-가 부탁을 다 하고말야.그때 내가 얼마나 놀랬는 주 아냐?? 뭐, 그렇게 궁금하던 니 동생 얼굴도 보고.썩 나쁜 부탁은 아녔지만 말이다. 하하.." 강조아저씨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화가 날 주 알았는데, 오히려 두근대던 심장이 풍덩.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선우권의 위력인가. ...쓰게 웃으며 아직까지도 강조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베란다에서 몸을 돌렸다. 아까와 달리 터벅터벅.걷는 발소리가 조금 아프다. .................... ............. ......... ※아침6시40분. 띠띠띠.띠리릭.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오늘도 여전히 검정 정장을 쫙.빼입은 정지혁씨가 피곤한 얼굴로 나타났다. 마악 앞치마를 몸에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서던 정지혁씨의 걸음이 뚝.멈춘다. .....빙글.몸을 돌려 함박웃음을 짓자 정지혁씨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특하다고 하는 것도 같고,어의없어 하는 것도 같고.. "표정이 뭐 그래요??.. 이거 영광이예요,영광. 9시 이전엔 절대 눈 안뜨던 김윤서가 처음으로 일찍 일어나서 차린 밥상이라구요." "...이럴 시간 있으면 학교 갈 준비나 해." 탁.앞치마를 벗어던진 정지혁씨가 평소의 차림새,그대로 있는 날 보며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띠바.아주 성질머리가 띠바야,정지혁. "설마 내가 그 중요한 준비도 안하고 이럴라구요??.. 여기다 가방만 메고 가면 OK." "....장난하나?" "설마요. 천하의 정지혁씨를 두고 어떻게 장난을 걸어요,제가." "후.들어가서 제대로 입고 나와." 예전 제화예고 교복을 몸에 딱.맞게 입고있는 날 불만스럽게 훑어보며 방문을 가르키는 정지혁씨. 그리고 그런 정지혁씨를 보며 방글방글.웃고만 있는 김윤서. "정지혁씨." "김윤서." 동시에 터져나온 두 개의 이름. 재미난 우연에 신기하게 웃고 있는데 정지혁씨의 싸늘한 눈초리가 와닿았다. "시간 없어.빨리 가서 갈아입고 나와." "이대루 간다니깐 그러네.그건 그렇고 김윤서가 준비한 영광, 안 먹을꺼예요??..땡큐함의 표신데,이거." "장난할 시간 없다고 말했다." "버리면 아쉬울껀데.. 당한 기억만 남으면 나중에 정지혁씨 건강에 안좋아요." "뭐??" 정지혁씨의 오른쪽 눈썹이 훽.치켜올라간다. 의자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둘러맨 나는 싱긋.웃으며 보글보글.식탁의 정 가운데에서 앙증맞게 끓고있는 김치찌개를 가르켰다. "드세요.김윤서가 준비한 처음이자 마지막 영광." "후..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어제.남자친구가 생겼어요." "뭐???" 아까보다 더 크게 정지혁씨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간다. 동그래진 눈동자 가득,날 담고있는 정지혁씨를 향해 실끗.윙크를 날려주고 하얀 쌀밥이 담겨진 상아색 밥그릇 옆에 딸깍.은수저를 내려놨다. "남자친구가 생겼다구요,김윤서한테. 신기하죠??나도 되게 신기해요. 주연오가 맨날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그게,나한테도 생길지 몰랐거든요." "...." "그래서 그 애한테 많이 미안해요.내 전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늘뿐이 없을꺼니까. 그래서 미안해요." 딸깍.이번엔 꼬다리에 예쁘장한 구름모양이 매달린 은젓가락을 은수저 옆에 나란히 내려놨다. ...그 때,준비가 다됐냐며 현도아저씨와 강조아저씨가 심각한 얼굴로 서있는 정지혁씨 옆으로 빼꼼.얼굴을 내민다. 두개의 수저와 네개의 젓가락을 다른 밥그릇 옆에 내려놓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미안할꺼야,아마. 권이한테 미안한만큼,그만큼.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그만큼. 미안할꺼야.아저씨들..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려면.그 애한테 아주 쬐끔이라도 덜 미안해할라면 하늘이 필요할꺼야.그치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게 무슨." "하늘이 빨랑 잡히면,그럼 하늘이 쬐끔 덜 소중해질꺼아녜요. 하늘이 쬐끔이라도 덜 소중해져야...그 애한테도 덜 미안해 질테니깐. 그러니깐 그래야 된다구요." 아까부터 알 수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정지혁씨가 말 뒤에 가려진 숨은 뜻을 알아챘는지, 험상궂게 눈을 부라리며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다 보여." "뻔히 보여줄라구 말한거예요." "...니 생각대로 쉽게 될 것 같냐??" "여태까지 내 생각대로 된 일은 한개도 없었는걸.그니까 처음부터 기대같은 거 안걸어요,난." 턱.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하는 날 한대 칠 기세로 손을 올린 정지혁씨를 말린건,오늘도 내일처럼 예쁘장한 강조아저씨였다. 강조아저씬 조금 화난듯.무서운 얼굴로 정지혁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둬요,형." "너야말로 이 손 놔라." "형." "현강조,너!" "스탑. 두 분 다 그만해요. 아침부터 싸우시라고 영광 준비한거 아니예요." "아가씨.." "싸움말고 제가 준비한 영광이나 드세요들. 참.그리고 오늘은 혼자 갈게요, 애도 아니고 맨날 안데려다 주셔도 되요.뭐, 그것도 오늘까지의 일이겠지만." 멍청히 서있는 아저씨들을 뒤로하고 한상 차려진 부엌을 나오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고개를 꺾었다. 강조아저씨와 나란히 서있는 정지혁씨를 향해 실실.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마지막 쓰리아웃,기대하세요." ................ ※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출근하는 회사원들로 북적이는 버스 안. 친구들끼리 잡담을 나누거나,통화를 하며 얘기꽃을 피우느라 시끄러울법도 한데 유난히도 조용한 내부를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렀다. 서있는 사람은 많은데도 정작 내 주변의 좌석이 텅텅. 빈 까닭은 무얼까??... 눈썹을 긁적이며 힐끔힐끔.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다리 안아프세요??..노약자석도 아닌데 좀 앉지." "....저.저기. 일당백 맞으시죠? 칠공주 일당백이요.." 개중 용기있어뵈는 한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여학생의 황당한 물음에 허허.웃으며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우 교복하나 바꿔입고,변장 하나 안해준걸로 이렇게 쉽게 알아볼꺼였음 안경이라도 쓰고 나올껄. 방 안에서 고이 잠든 변장도구들을 떠올리며 바들바들. 애처롭게도 떨고있는 여학생에게 대답해줬다. "아뇨. 칠공주 일당백이 아니라 김윤서예요,칠공주 김윤서." 칠공주 일당백이나,칠공주 김윤서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얼굴로 날 보던 그 용기있는 여학생은 금새 울상을 짓고는 고개를 푹.숙였다. 그리고 그 여학생을 뒤따라 줄줄이 고개를 처박는 버스 안의 사람들. .....내가 자기들을 잡아먹기라도 하나. 유난을 떠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끌끌.찼다. 학교에 도착하려면 아직 다섯정거장이나 남았지만,나때문에 자리에도 못안고 전전긍긍.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가여워 손을 뻗어 빨간색 부저를 꾹.눌렀다. 버스 안을 울리는 기적의 벨소리. 휴우. 아주 제대로 안심하는 티를 내고있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훑어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모세의 기적이라도 찍는지 내 옆으로 쏴악.물러서는 사람들. ..... 띠바.누가 보면 오해하겠네,이 사람들??.. "저 조류독감 걸린 꼬꼬댁두 아니구요,광견병 걸린 멍멍이도 아닙니다. 그렇게 기겁을 하시면.. 보건소에 잡혀갈지도 몰라요,저." 우스개소리로 던진 소리에 금새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 그냥 변장하고 나올껄. 빨간색 부저를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멈추고 뒷문을 열어준 기사아저씨를 향해 고마움을 표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뒤도 안돌아보고 시속200Km로 달려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보는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는다. 조만간 보건소에서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4-79. 제안 ※황제공고 교문을 지날때부터 느껴지는 아이들의 경악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도착한 본교무실 앞.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들 모두가 짜기라도 했는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휘둥그레.눈을 떳다. 빙글.선생들을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이며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너,너..??" "안녕하세요,선생님들. 전학은 이틀전에 왔지만,이제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립니다. 김윤서예요,김윤서. 많이 들어 보셨죠?? 1년전에 TV에 자주 얼굴 내밀고 그랬는데.." "허억." 이영애 닮은 담임이 숨 넘어가는 소릴 내며 손가락질을 한다. 효선이가 전학왔음,플랜카드까지 만들어가며 환영해줄꺼면서. 김윤서가 오니까 아주 오줌을 지리겠네,지리겠어. 겁에 질린 선생들의 표정을 보며 씁.바람소릴 냈다. "너무 무안주시네,선생님들. 어지간한 꼴통들은 다 상대해 봤다는 황제공고 선생님들까지 이러면 저 학교 못다녀요." "..그..그나저나 아침부터 여,여긴 무슨 일이냐?.." 왕년에 힘깨나 썼을법한 학생부장이 우락부락한 덩치와 안 어울리게 새소리를 내며 묻는다. 그제서야 학교를 오자마자 반이 아닌 교무실부터 들린 이유를 떠올린 나는 베실베실.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다름이 아니라 시험 좀 봤으면 해서요. 정규시험이 아니어두 되니까 오늘이나 내일중으로 성적표 낼만한 시험 좀 보면 안될까요??..어른들한테 빨리 100점찍힌 성적표를 보여줘야 일이 쉬워지걸랑요." "시..시험??.." "예,시험요. 교장선생님 도장 꽝꽝.찍힌 성적표 나오는 시험." 이까지 드러내보이며 웃는 나에 비해 선생들의 표정은 똥파리가 앉아있던 똥을 씹어먹은 것처럼 구겨졌다. 쉬운 부탁이 아니란건 알지만,이렇게 대놓고 싫은티를 내면 우울해지는데. 영 오케이 사인을 안보내주려는 선생들을 보며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되요,안되요??..그것만 말해주세요." "그..그야. 쉬,쉬운 일이 아니..." "오케이.접수했어요. 안된다 이거죠??" "아,아니. 굳이 안되는게 아니라.." "그럼 제안 한개 해드릴께요. 여기도 사고치는 새끼들 좀 많죠??. 그런 새끼들 싸그리 잡아다드릴께요,제가. 교육청에서 깝깝하게 공문 내려오고,선생님들이 애들 합의보러 경찰서 안뛰어다니게 문제치는 새끼들 제가 잡아다 조질테니까, 시험 좀 만들어주세요."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었겠지만,그래도 귀가 솔깃한지 선생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다. [인천 최고의 꼴통학교] [어찌나 꼴통들만 모였는지, 웬만한 선생들은 한 달도 못버티고 나간단다.] [선생님이 출근은 학교로 하지만, 퇴근은 꼭 경찰서로 한다는...] 새벽녘에 효선이와 리아,그리고 아라에게서 온 문자를 떠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위에선 대가리들이,아래에선 애새끼들이 숨통을 조이느라 스트레스 꽤나 받았을 선생들한테는 이게 직빵이지. 알아서 문제아들 조져준다니,얼마나 고마운 제안이겠어??.. "그,그게.. 무슨.." "말 그대로요. 제가 이 학교,황제공고 꼴통들 꽉 잡아드릴테니까 시험 좀 보잔 말이죠. 어때요?? 아쉬운 조건은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학교 선생님들한테 꼴통학교,꼴통선생이라는 말 들으면 별로 기분 안좋으시잖어요. 그 말 안듣게 해드린다니깐요,제가." "저,정말이냐??..하지만 애들이 좀..많은데.." "제 별명 모르세요??.." "알지,잘 알지. 하지만..." "학부모회랑 저희 부모님들한테만 입 다물어주세요.그럼 선생님들이 그렇게 원하는 퇴근 후,바로 컴백홈!! 제대로 도와드릴께요." 꿀꺽. 학생부장을 비롯한 교무실에 있는 모든 선생들이 침을 삼킨다. 약35.1초후. 결심했는지 학생부장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턱.잡았다. "...부탁한다." "예썰,감사함다!!.." 뜨겁게 데워진 학생부장의 손을 떨궈내며 힘차게 대답했다. ........... 몇분 후. 학생부장에게서 문제아 중에서도 특별히 조심해야 될 문제아 리스트를 받아들고 교무실을 나오자마자 복도 쓰레기통에 그 리스트를 구겨넣었다. 병신들. 지들이 뭐라고 학생을 쓰레기처럼 분류하고 난리야??.. 교무실의 회색문을 향해 잔뜩 비틀린 웃음을 날려주고 돌아서는데 주머니에 얌전히 잠들어있던 핸드폰이 요란한 진동을 내는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액정을 보니 문자표시가 깜박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사고치지말라고 경고했지,김윤서.] [우리가 가기 전까지 조용히 지내기로 했잖아,윤서야..] [참아,윤서야. 제발.] [사고치면 리아가 너 죽인대.] 정리아,황아라,최효선,주연오가 차례대로 보내온 문자를 확인하며 황당하게 웃었다. 띠바.도대체 김윤서 주변에 애새끼들을 몇명이나 붙여놓은 거야??..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온지 얼마나 됐다구,이런 문자를 보내. "찾아내기만 해. 아주 조져야지."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김윤서 감시자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으며 핸드폰을 봤다. 이왕 들켰으니,귀뜸이라도 해놔야 나중에 덜 혼날껀데. 문제는 그 귀뜸을 누구한테 하냐 이거지.. 우선 대마왕 정리아 제외. 그 다음엔 말하면 우느라 학교도 못갈 울보 아라도 제외. ....그나마 나은 연오는 지금쯤 머리를 마느라 바쁠꺼고, 아무래도 효선이가 제일이겠지??. 결정을 내리고 단축번호5번을 길게 눌렀다. 얼마안가 들려오는 효선이의 화난 목소리. [윤서,너 이렇게 자꾸 날뛸래??] ["굿모닝."] [윤서야.] ["효선아,인제 달릴꺼야 나. 1년이면 많이 쉬었으니깐, 쉬지않고 달려줘야 하늘님이 재밌어하지. 안그래??"] [달리는 것도,다른 것도 다 좋은데 우리 가기 전까진 가만히 있어. 부산에서 니가 벌인 일,뒷수습 할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래서 너들이 오기 전까지 합법적으로 놀라고 교무실 갔다오는 길."] [후우.윤서야..] ["아프다,효선아 나."] [뭐??] 한숨을 내쉬며 날 말리기 위해 무언가 말하려던 효선인 아프다는 내 한마디에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구라"] [윤서,너!!..] ["아무튼 효선아!!내가 이렇게 전화를 건거는 말이지. 지금부터 내가 달릴꺼라구. 쉬지않고 달려서 김한영 조질꺼라구. 그래서 하늘 꼭 잡을꺼라구. 그거 얘기할라구 건거."] [우리 갈때까지만 참아.] ["못참을 거 같애."] [윤서야] 귓구멍을 간지르는 효선이의 뜨뜻미지근한 목소리에 빙글빙글.웃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 한개가 보였다. 오예. 빙고. ["효선아 지금이 몇년,몇월,몇일,몇시,몇초야??"] [2004년 11월 1일 7시 58분 32초] ["오케이. 너가 인천 오기 전에,인천에서는 김윤서면 안된다고 했지??..난 너 말듣는 착한 아이니깐. 그거 접수했어,그니깐 2004년 11월 1일 7시 58분 42초부터. ......김윤서,개새끼 된다."] [뭐?그게 무슨-] 효선이의 뒷말을 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서,핸드폰을 교복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들뜬 발걸음으로 익숙한 얼굴이 서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검은 목폴라티로 얼굴을 반쯤 가린 정지운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금잔디는 갑작스러운 김윤서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떳다. "너가 여긴 어떻게.." "금잔디 하이. 정지운도 헬로우." "....지운이,너 얘 알어??" 아까보다 더 커진 눈동자로 정지운을 돌아보는 금잔디. 고개를 끄덕이는 정지운의 모습에 금잔디가 동그래진 눈동자를 원래 크기로 되돌려놓고,날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넌 어떻게 알어,정지운을??" "목표 쓰리,맨인블랙 동생." "목표 쓰리,맨인블랙?" "엉,그런게 있어. 아무튼 반가워,금잔디?? 전학 첫날 보긴 봤는데 넌 몰랐으니까 이게 황제공고에서의 첫만남인가." "....혹시 너였니,그 전학생." "오와,눈치가 제법인데??" 얘기를 나눌수록 방글방글.웃음이 가득 떠오르는 김윤서의 검정 눈동자완 달리 싸늘히 가라앉는 금잔디의 갈색 눈동자. "원터치 한방.그게 네 별명이라며??" "그러는 네 별명은 일당백이지??..혼자서 백명은 상대할 수 있어서 붙은 별명말야." "글쎄,솔직히 혼자서 백명을 상대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사실 궁금해,나. 그 별명 누가 지었는지말야." "가만히 처박혀있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뭔데??" 삐딱하게 고개를 깐 금잔디가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 글쎄. 가만히 처막혀있다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나도 궁금해지네,그거. "남친이 생겨서 그런가.아님 서울연합 반이나 박살내서 그런가. 것도 아님... 뒷통수가 아퍼서 그런가.나도 잘 모르겠는데,아마 이 중 하날꺼야. 아무거나 골라찍어." "후." 짧은 한숨. 금잔디는 정지운을 흘끗.쳐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언제 그랬냐는둥 싸늘한 얼굴을 한 채 날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뻗을듯,가늘게 떨리는 금잔디의 주먹을 보며 피식.웃었다. "치고 싶음쳐,그럴라고 너한테 인사한거야. 하이하고." "...자신이 넘치네.교무실 앞에서 맞짱 뜰 자신감,나도 배우고 싶은데?" "아.그거. 난 이미 합법적으로 지랄한다고,말해놔서 괜찮아. 아, 맞다. 넌 불법이구나,여기서 싸우면. 저번에 시내에서 정식으로 붙자고 했었으니까,너가 불법이면 안되지. 좋아,지금 뜰래 아님 학교 끝나고 뜰래??.. 학교 끝나고는 서울가야되서 제대로 못 놀아줄 꺼같은데. 선택해,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듯,입술을 꾹 다무는 금잔디.그리고 아까부터 한마디, 말도 없다 갑자기 내 손목을 잡는 정지운. 무언가 할 말이 있어보이는 정지운의 눈빛에 아하.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잊으면 아쉬울뻔했네, 너도 택해요. 17전1승16패,정지운. 화장실에서 기억나죠??.. 한 판 붙자고 했던 거.기다릴게, 찾아와라. 정지운 입에서 나온 말인데." "싸우지마." "안싸워요. 조질꺼지." "..잔디,호락호락한 애 아냐." "난 금잔디보다 댁한테 더 흥미있는데. 천하의 그 김한영을 이겼잖아요??.." "그건." "결정했어." 정지운과 정답게 말을 나누고 있는 내가 보기싫었는지, 내 손목을 잡고있던 정지운의 팔을 떨궈낸 금잔디가 위험스럽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떠, 씨발아." 4-80. 맞짱 .......... ※ 슈웅.턱. 급작스럽게 날아온 금잔디의 강펀치를 가볍게 막아내고 어깨를 으쓱였다. "감정섞였어,니 주먹. 그런거 별로 안 좋은데." "상관마." "상관말고 싶은데, 상관하게 만들잖아 너 주먹이." 빙글웃으며 금잔디의 악센 주먹에 손을 뗐다. 제대로 막았는데도 손바닥이 얼얼하다. 원터치 한방. 별명처럼 인천짱 거저먹은게 아니라는 듯, 금잔디의 주먹은 제법 매서웠다. 찌릿찌릿.주먹의 여운이 남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잠잠한 교무실쪽 복도를 쳐다봤다. "감정조절 됐어??.." 여전히 교무실 문에서 시선을 떼지않고서 묻자, 금잔디가 쉼호흡을 한다. 재밌는 애야,금잔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기분좋게 놔두고 고개를 돌렸다. 감정정리가 다 됐는지 금잔디가 아까보다 한결 괜찮아진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무실 문을 흘끗.바라봐주고 복도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교무실 앞은 너무 오바니까, 소각장 뒤로 고고.하자구." 탁.난간 위에 오른발을 올린 뒤, 금잔디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당황한듯 눈을 껌벅이던 금잔디가 손을 뻗었을때,난 이미 1층에 착지한 뒤였다. 아까까지만해도 날 향해 불태우던 적의는 어디다 버려놨는지,금잔디가 고개를 내밀고 괜찮냐고 소리쳤다. "오키도키!!!..괜찮으니까 빨랑 와!!!" 휘적휘적.크게 손을 흔들어주고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소각장으로 향했다. 아.두근두근. 신난다. 아주 신나 죽겠다. 오늘 한 번 제대로 죽어줘야지. 잔뜩 들뜬 마음을 알았는지, 소각장에 도착한지 2분만에 금잔디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수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서. "일대일이던,개떼로 덤비던 상관없긴한데. 의외네??" "후와후아. 구경한다고,후와.온거야. 씨발,그리고 무식하게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년이 어딨어?? 존나 놀랐네." "아.그거. 재밌지??...너도 한 번 해봐. 느낌 짱이야."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던 금잔디는 한 번 크게 숨을 내뱉더니. 더이상 어깨를 들썩거리지 않았다. 눈썹을 긁적거리며 입고 있던 마이를 벗어 정지운에게 건네주는 금잔디와 그 주변을 둘러싼 황제고&황제공고 아이들을 쳐다봤다. ......... 아무리 선생들하고 싸바싸바했어어도,이렇게 대놓고 싸우면 나중에 짜증나지는데. "구경 꼭 해야돼,쟤네??.." "화려한 거 좋아하잖아,너. 니가 좋아할 거 같애서 그냥 놔뒀는데.아니야??" "화려한건 주연오취향이고, 난 별로. 너야말로 그쪽 취향아냐?? 주변에서 들려오는 응원소리에 파워업하고 막 그런." 씩.웃으며 말하자 금잔디가 굳은 얼굴로 옆에 있던 정지운에게 작게 속삭였다. 정지운이 나서서 애들을 몰아내자,순식간에 소각장에 썰렁할정도로 휑해진다. 와. 저 가시네도 농담이 안 통하는 가시네네. "화나게 할라구 한 건 아녔는데,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네. 미안. 또 감정조절 할 시간 필요해??" "아니." "엉,그래. 어차피 서로 말싸움으 별로 안좋아하는데,질질 끌지말고 바로 시작하자??" "마음대로." "아참. 시작하기 전에 이거 하나만 약속해주라." 금잔디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인천연합을 걸어. 정확히하자면, 너가 가진 인천연합을 칠공주한테 넘기라는 거." "...그럼 넌 칠공주를 거는거야??" "글쎄. 그건 아닐꺼야,아마. 넌 대가리라서 괜찮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칠공주 대가리가 아니여서 함부로 걸 수가 없지롱. 그 대신. 칠공주말고 김윤서를 걸게. 이정도면 별로 아쉬울 조건은 아니잖아??.." "아니,아쉽지. 인천연합이 얼마나 큰 건데. 김윤서 실력은 높이 사겠지만,인천연합을 걸만큼은 아냐." 금잔디의 눈빛에서 효선이와 비슷한 무언가가 묻어져 나온다. 리더쉽?? 아니.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흠.함부로 걸었다간 리아한테 죽을껀데.. 내가 칠공주를 걸면,넌 확실히 인천연합을 거는거야??" "응." "...뭐,좋아. 어차피 죽는한이 있어도 너한테 질 일은 없을꺼니깐. 칠공주를 걸고 하는 일에 졌다간,금잔디 손이 아니라 정리아 손에 죽을껄??..하하." "그럼 된거지??" "좋아. 그럼 준비...시-땅!!" 하얀 치아를 드러내보이며 금잔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부웅. 금잔디에게서 몇걸음 떨어진 곳에 몸을 띄워 발을 휘둘렀다. 금새 손을 올려 발차기를 막아내는 금잔디. 역시,재밌다니깐. 알 수 없는 흥분이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빨리. 뭔가 뜨거운 불구덩이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제법하네." "너야말로. 발차기에 안넘어지는 애 처음봤어." "나도 내 주먹이 안먹히는 애,처음봤어." 부웅.말끝나기가 무섭게 금잔디가 내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예의상이라도 한번쯤은 맞아줘야할 것 같아 그대로 놔뒀는데,으와. 상상초월인데,이거??.. 뼈까지 시큰거리는 금잔디의 주먹에 한쪽 입꼬리가 일그러진다. 하지만 뭐,이런 쪽이 더 좋으니깐. 옆구리에 박혀있는 금잔디의 주먹을 팔꿈치로 꾸욱.눌렀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금잔디가 급하게 주먹을 회수하려고 했지만,아쉽게도. 딱.그랬다. 아쉽게도... 퍼억.주르륵. 단단한 이마가 들이받은 금잔디의 콧구멍에서 새빨간 피가 기다렸다는듯이 흘러내린다. 탁.그제서야 금잔디의 주먹에서 팔꿈치를 떼고,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적지않은 충격이였는지 금잔디가 다리를 휘청이며 흘러내리고 있는 코피를 닦아낸다. 그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엔 잘 안그랬는데,요즘들어서는 싸워도 아무 것도 남지 않는거야. 예전엔 갈비뼈도 아작나고,턱도 부숴지고. 또.. 음. 코뼈도 주저앉고 막 그랬었는데 말이야.." "..후.말싸움은 네 취향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노노.말싸움이 아냐. 칭찬하고 있는거야, 지금 나. 그떄 어금니부터 시작해서.. 너 진짜 재밌어,금잔디. 이렇게 흥분한 적 제대로 오랜만. 너라면. 있지,너라면. 금잔디. 너라면.." 나른한 눈길로 금잔디의 주먹을 바라봤다. "....날 죽여줄 수 있을거 같애." 터억.물러섰던 한걸음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놨다. 그리고 다시 한걸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금잔디가 묘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여태까진 눈장난이였고,진지하게 어때??.." "....좋아." 눈꼬리가 순하게 휘어졌다. 슈웅.무서운 기세로 금잔디와 김윤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뻐걱,퉁. 먼저 금잔디의 주먹이 허공으로 퉁겨졌고,남은 김윤서의 주먹은 작은 떨림을 안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금잔디가 꽤 놀란 눈으로,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이 서린 눈으로 날 보고있었다. "놀랄 거 없어.말했잖아??..아주 짱!!!세다고,김윤서 주먹." "하.정말 대단하네. 싸움실력도 수준급,주먹도 수준급?? 씨발.하늘은 역시 불공평해." 금잔디가 낮게 투덜거렸다. "맛뵈기 보여줬으니까 인제 너가 정해.원터치로 갈래, 아님.. 그냥 싸울래??" "...너 편할대로." "....역시." 지지않겠다는 얼굴로 애써 주먹을 악쥐는 금잔디를 보며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금잔디가 왼쪽 눈섭을 치켜떳을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부웅.크게 한바퀴를 돌며 날아간 발차기가 정확히 금잔디의 관자놀이를 가격하고, 순식간에 급소를 맞은 금잔디는 힘이 풀렸는지 한 쪽 다리를 휘청거렸다. 어쩡쩡한 자세로 눈매를 가다듬던 금잔디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내 허릴 끌어안는다. "와.때려달라고 아주 용을쓰네." 보기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금잔디의 흑색 머리통을 보며 비죽.웃음을 흘렸다. 뻐헉.팔꿈치로 있는힘껏 금잔디의 등줄기를 내리찍고,바로 허리를 꺾었다. 두 손이 바닥에 닿았을 때,이미 금잔디는 허공을 한바퀴 돌고 반대편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후왁후왁.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금잔디. "맷집이 대단한데." "흐아.너야말로..허억." "내가 충고하나 해도 될까??.." "흐.아니." "..싸울땐말야.대가리에 아무 것도 담아놔선 안돼. 금잔디 넌 주먹은 일륜데,싸움실력은 정말이지 형편없어. 게다가 어줍잖은 아량까지 베풀다니.그딴 건 너보다 못하는 새끼들한테나 베풀어,붕신아. 그리고 금잔디 주특기가 원턴친가 본데,싸움은 정정당당 스포츠가 아녀. 어디서 웃기지도 않게 양보야,양보가. 난 그딴거 제일로 싫어해,금잔디." 금잔디의 눈이 동그래졌다,다시 작아진다. 아까 왜 김윤서가 실망의 한숨을 내뱉었는지,이제서야 이해 갔는지 금잔디가 입안 가득 고인 핏물을 퉤.뱉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좋아,내가 원하는게 바로 그거라니까. 김윤서를 죽여줄 금잔디님아??.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오래 싸워본 적이 처음이라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언제나 주먹 한방에 끝냈으니깐. 처음엔 꼭 원터치가 아녀도 널 이길꺼라고 생각했어. 한영오빠까지도 감탄한 내 주먹이였으니깐. .....하지만 내가 오해했네. 미안,김윤서. 니 말대로 싸움은 스포츠가 아냐. 그걸 깨달았어." "엉.좋아, 이모습." "후.그럼 염치불구하고 말할께. 원터치로 가자." "푸하하하하.." 제딴엔 진지하게 말했는데,내가 박장대소를 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금잔디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크큭.. 추,충고 하나 더. 싸울때 주둥이 놀리는건 허접들이나 하는 짓이야. 흐하하. 게다가 싸움이 스포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서,원터치로 가자??.. 하하하. 정말 재밌다,너.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 누가 너 뜻에 따라준데??.. 누누히 말하지만,금잔디. 세상에 예의나 격식같은 거 차릴 필요가 없는 유일한 게. 바로 싸움이야,붕신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못하고 금잔디를 향해 2단앞차기를 날렸다. 금잔디의 턱을 가볍게 후려치고,뒤이어 둥글게 말아쥔 주먹을 뻗었다. 급하게 정신을 차린 금잔디가 내 주먹을 잡으며,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해,김윤서." "엉.내가 쫌 대단해." 꾸득.금잔디에게 잡힌 주먹에서 기분좋은 뼛소리가 났다. 소리로 봐선 아주 적게 잡아도 뼈가 부러진 거 같다.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아. 악력으로 뼈를 부술정도니 어련하겠어. 어깨를 으쓱이고는 반대편 주먹으로 잽싸게 금잔디의 관자놀이를 끊어치고 그와 동시에 무릎을 들어올려 복부에 찔러넜었다. 쿨럭.기침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는 금잔디. 하지만 여전히 김윤서 주먹을 놓지 않았다. "나로써는 니가 주먹을 잡고있는 게,더 재미있지만. 그거 안 놓으면 아마 나대신 너가... 죽을꺼야." 금잔디에게 잡힌 주먹을 급하게 내쪽으로 끌어당기며 굽혀진 팔꿈치로 금잔디의 턱을 올려쳤다. 샤바샤바, 춤을 추듯 반대편 팔꿈치와 함께 번갈아 금잔디의 턱을 후려쳤지만 금잔디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질때까지 끝끝내 주먹을 놓지 않았다. 와오. 독종이야,독종. 감탄의 미소를 흘리며 팔꿈치를 거두고 무릎에 다시 힘을 주려할 때였다. 빠르게 내 주먹을 놓은 금잔디가 엄청난 힘과 함께 내 옆구리를 후려친건. 뻐득. "와.정신을 잃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 대단해,박수 6851번이야 금잔디." 스르륵.금잔디의 무릎이 힘없이 꺽이며,이 아이의 얼굴이 미끄러졌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부어터진 금잔디의 얼굴이 내 교복을 지나 털썩.바닥에 닿았다. 금잔디의 입술 사이로 작게 터져나오는 숨소리를 느끼며 쪼그려 앉았다. "인제 인천연합은 칠공주꺼??.." "하아.하아.." "으음.간부새끼들 말고는 비밀지켜줄꺼??.." "흐하.하으..." "정신이 가출했는갑네.그럼 뭐,나중에 정신 돌아오면 얘기하지. 정지운,너가 증인이예요??.." 바닥에 엎어진 금잔디를 들쳐업으며 조금 놀란 얼굴로 서있는 정지운을 향해 말했다. 멍한 정지운을 향해 찡긋.윙크를 날려주고 소각장을 나서려는데.. 욱신욱신. 금잔디에게 두번이나 후려맞은 갈비뼈가 삐그덕거린다. 힘겹게 갈비뼈를 감싸쥐며, 등에 업혀있는 금잔디를 흘끗 쳐다봤다. ........ 수이연도 못당하겠어,금잔디한텐. 다음번에 싸우면 그땐 제대로 죽여주겠는데??.. 아작난 갈비뼈를 기분 좋게 느끼며 빙글.웃었다.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4-71. 뜻밖의 재회 ※용산역 후왁.후왁...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용산역 3번출구. 뛰어오느라 땀으로 흠뻑 젖은 와이셔츠를 펄럭거리며 지니와 이연이를 찾기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찹쌀떡 파는 할머니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노란 대가리, 수이연대가리. 빙고♪ 찾었다. "숨연!!" "..이연공주님 이름 맘대로 바꾸는 윤서야, 안뇽. 오늘도 이연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구나. 이연인 2시간50분, 지니는 3시간." 입주변 가득 하얀 찹쌀가루를 묻히고서 베시시 웃는 수이연이. 요요 날카로운 가시네. 이연이의 뾰족한말에 히죽.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하늘이 너무 좋았어." "만날만날 그짓말. 하늘이 좋기는. 아까보니까 못생겼든데, 뭘." "흠흠!!.. 바나나우유 사줄께." "그건 당연한거구." "어그래. 근데 지니는 어디갔어?? 3시간 아까워서 도로 갔나??." 이연이의 옆에 쪼그려앉아 지니를 찾기위해 고개를 돌리는데 퍽. 옆구리를 강력하게 파고드는 어제와 똑같은 쇼핑백 하나. "알었다, 알었어. 먼저 갈아입구 올께..설마 어제꺼같은 그런 스타일은 아니겠지??.." "이번엔 지니옷이얌. 얼릉 갈아입구와, 지니 한대만 까고 온댔으니깐. 휘오휘오." 은지니 옷이면.... 적어도 치렁치렁한 수이연 옷보단 낫겠지. 휴우.안도의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덜렁덜렁.들고있던 가방을 이연이의 품안에 안겨주고 낼름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네번째칸으로 들어와 쇼핑백을 열었는데.. "아. 띠바.. 이것들이 골고루 하네, 아주." 낮게 신음소리를 흘리며 툭.초록색 화장실 칸막이에 몸을 기댔다. 쇼핑백엔 총 두벌이 있었다.(☜수이연 지딴엔 날 배려한답시고 이래놨나본데.. 솔직히 두 벌 다 오십보백보였다.)어깨가 훤히 드러난 쭉티와, 바지가 맞나싶을정도로 너덜너덜하게 찢어진 청바지. 그리고 입으면 꽉.조일것만같은 가죽세트. (☜검정색 가죽자켓, 검정색 가죽바지, 검정색 탱크탑. 그리고 검정색 가죽부츠까지..아주 골고루 갖췄다, 골고루 갖췄어.)까지.. "내가 주연오랑 옷사러 갈때부터 알아봤다. 후와.. 오늘따라 되는게 없어, 아주." 벅벅. 머리를 거칠게 긁다 안되겠다싶어 다시 주섬주섬. 쇼핑백에 옷을 집어넣고 나가려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김윤서 어디갔어??.." "엉. 윤서 옷 갈아입구 있는데.. 화장실서 안 갈아입는댔어. 나가서 찹쌀떡이나 먹자." "후. 이 기지배 오기만 해. 대갈통을 부숴버려야지." 억... 전혀 장난같지 않은 은지니의 진지한 목소리에 슬금슬금. 문고리에서 손을 떼고 들고있던 쇼핑백을 변기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놨다. 눈썹을 한번 길게 쓸어내리고 쇼핑백에서 옷을 꺼냈다. 아. 정말.. 눈물나. ............ ※6분후. 사물함에 기대서있던 지니와 아까 그 자리에 앉아서 찹쌀떡을 오물오물.먹고있던 이연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진다. "...아띠바. 나도 알어, 쪽팔린거. 기니까 그만봐." 붉게 달아오른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777번 사물함에 쇼핑백을 구겨넣었다. 입을게 없어 결국 입고 나오긴 했지만.. 개구리왕눈이가 와서 친구먹자고 할만큼 둥그래진 이연이와 지니의 눈을 보고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170cm를 웃도는 지니와 160cm에서 놀고있는 내가 서로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부터가 모험이였어. 아주.. ".....그거 놓으면 벗겨지냐??" 지니는 정말 궁금하다는 얼굴로 옷의 가슴께와 허벅지 부분을 꽉.부여잡고 있는 내 손을 가르켰다. "띠바. 궁금하면 벗겨봐라, 붕신아." "왜 나한테 지랄이야. ..근데 김윤서 넌 우유는 꼬박 꼬박 잘도 처먹으면서 어째 위로는 안가고, 엉덩이만 커지냐." "..죽여버려." 심각하게 묻는 지니를 향해 중지를 뻗은 나는 엉거주춤. 돌아섰다. 픽.돌아선 내 모습을 보고 비웃음을 터트린 은지니는 입고있던 청자켓을 내 어깨위에 걸쳐주고선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만 남겨놓은채. 역 근처에 있는 백화점으로 들어가버렸다. (☜이연인 끝까지 자리에앉아 찹쌀떡을 주워먹었다.) ........ ※다시6분후. "갈아입고 나와." "헐.나 돈없어." "난있어." "그래도-" "그 꼬라지하고 가고 싶냐? 좋은말 할 때 들어가라." 브랜드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쇼핑백을 대뜸 품에 안겨주고 화장실 안으로 날 밀어넣는 은지니. 얼떨결에 다시 화장실로 들어온 나는 은지니의 깜찍한짓에 빙글.미소를 흘리며 쇼핑백 안에 들어있는 내용물을 꺼냈다. 회색 맨투맨티와 라인이 예술적으로 빠진 청바지 한개. 음.좋아좋아.. .........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나오자 넓다란 만남의 광장을 장악한 지니와 이연이가 손을 휘적휘적. 흔들고 있었다. 사물함에 다시 쇼핑백을 집어놓고, 지니와 이연이가 있는 자리로 걸어와 앉기가 무섭게 지니가 딱딱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제 내가 어디까지 설명했는지 기억나??" "..두개골이 빠개질뻔 했다는건 생각나." "잘들어, 김윤서. 이번엔 어제처럼 미적거릴 시간없어. 빨리 치고 빠지는거야. 알겠어??" "오케바리." 말장난이라도 쳤다간 바로 주먹이 날아올것같은 지니의 분위기에 실쭉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탁.아직까지도 찹쌀떡을 손에 놓지 못한 이연이의 손등을 소리나게 후려친 지니가 매서운 눈을 부라리며 이연이에게서 찹쌀떡을 빼앗았다. "히잉..지니 나뻐." "제대로 집중해, 수이연." "이연이는 윤서 오기전부터 주구장창 들었는데.. 힝. 지니는 나만 미워해." 이연인 귀엽게 입술을 비죽이더니 지니에게 시위라도 할모양인지 주머니에서 바나나우유를 꺼내 빨대도 안꽂고 소주를 마시듯. 벌컥벌컥. 입속으로 우유를 아예 쏟아부었다. 그 모습에 퓌휴.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지니. 화를 삯히려는듯 몇번 쉼호흡을 하던 지니는 드디어 마음 정리가 됐는지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서대문구일대는 용산공고가 맡아서 관리하고 있었어. 하지만 1년전, 용산공고 짱이 갑자기 자취를 감췄고. 하루새 짱을 잃은 용산공고는 순식간에 무너졌지. 결국 올해 새로 치고올라온 제일고한테 깔끔하게 박살났어. 얘기가 여기서 끝났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제일고로 쳐들어가면 됐겠지만.. ..아라한테서 어제 전화가 왔었다. 1년 전 자취를 감춘 용산공고 짱이 다시 나타난 모양이야." "오예.그 용산공고 짱, 어지간히 강한가봐??." "...하여간 김윤서 너는 샛길로 빠지는데 일가견 있어. 아라말로는 강하대. 서울연합 사신중 한명이라니깐. 넉넉하게 잡아서 니가 여태까지 상대했던 또라이들 100명 값은 한다고 보면 되겠지. 게다가 김한영하고 특별한 친분까지 있는 새끼라던데.. 뭐. 어제보단 재미있지 않겠어??." 호오. 천하의 그 김한영하고 특별한 친분까지??.. 비틀린 입술을 비집고 차가운 웃음이 터져나왔다. 김한영하고 깊게 관련된 새끼라면... 확실히 어제 상대했던 한강호보단 조질 재미가 있겠네. 가느다란 철제의자에 몸을 기대고 지니의 다음 설명을 기다렸다. 쿵쾅쿵쾅. 터질랑말랑 심장이 요동을 친다. 이러다 싸우기도 전에 심장 터지는 거 아냐??.. "어쨌든 서대문구일대를 놓고 용산공고와 제일고 사이에 또 한번 싸움이 붙었고, 아직 결과가 나오진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로 봐선 용산공고의 압도적인 승리야. 짱대짱으로 봐도 용산공고가 월등히 높고, 연합 내에서도 용산공고를 밀어주는 분위기니깐." "그래서 다음타켓이 용산공고가 됐다, 이거지??.. 좋아쓰. 입력완료됐으니까 일어나자. 속전속결로 끝낼라면 이러고 앉아있을시간이 없다아이가." 흥분된 미소를 감추지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서자 지니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잉??아까 지입으로 빨리 치고빠지재놓구선 왜 또 도리질이여. 지니의 속내를 몰라 어리둥절.멀뚱히 서있는데 갑자기 역 안이 소란스러워지더니.. 곧이어 1번출구에서 한무데기의 교복무리들이 출현했다. 짙은 남색 마이에 환한 회색 교복 치마(&교복바지). 특이하게 생긴 학교마크 위에 깔끔하게 박혀있는 석자.혹은 넉자나 두자의 이름들. 그리고... 연예인 콘서트장에서나 볼법한 화려한 플랜카드들. (☜나를 웃긴건 플랜카드가 아니라 大용산공고. 용산공고만세. 우리가최고다.등등.. 플랜카드를 장식하고 있는 유치찬란한 내용들이였다.) 배꼽 붙잡고 쓰러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겨우 억누르고, 지니에게 물었다. "크큭.. 쟤, 쟤네가 오늘 조질 용산공고.. 마, 맞지?.." "우캬카!!..이연이 뒤집어지겠어, 정말!!"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참는 나와, 원숭이 울음소릴 내며 뒤집어져라 웃어재끼는 이연일 한심하다는 눈으로 째려본 지니가 탕.유리로 된 테이블을 내리쳤다. "초장부터 깨게 놀지마라, 김윤서.수이연." "하,하지만.. 아. 존나. 웃긴걸 어떡해. 아띠바. 쟤네 저렇게 웃겨도 되는거냐??.." "그르니깐!! 저기 제일 큰 플랜카드 든 애, 고릴라처럼 생겼더. 아잉. 어떡해. 싸우기도 전에 쓰러질꺼 같애." 엄청 튀고.엄청 유치찬란해주시는 용산공고 무리들이 우리를 발견했는지 만남의 광장쪽으로 천천히 다가온다. 용산공고 무리들이 다가올때마다 이연인 아예 바닥에서 구를 기세로 웃어재껴댔고, 나역시 지니의 어깨에 손을 얹은채 부르르.몸을 떨었다. "...싸우기 전에 이름먼저 묻는게 김윤서 습관 아녔냐?? 오늘은 조용하다, 너." "어엉??. 아맞다. 용산공고 짱 명함은 뭐야??.." 터억. 용산공고 무리들이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웃음을 참기위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드는데.. 근질근질한 몸을 시원하게 긁어줄 싸움이 코앞에 다가와 있다는 사실때문에 평소보다 쬐끔.흥분한 지니의 목소리가 귓구멍을 타고 스르륵.들어왔다. 그리고 용산공고 무리 중. 가장 앞에 서있는. 가장 많이 낯이 익은. 가장 놀라운 얼굴이 보이자 웃느라 잔뜩 휘어진 내 눈동자가 연오네 앞마당에서 자라고 있는 토마토만해지는 게 느껴졌다. "구나루. 서울에서 사라진 1년동안 사용했던 이름은... ..... ......유달리." 4-72. 구나루+유달리=구달리 ............ 꿈뻑꿈뻑. 얼마간의 정적이 흘렀을까. 꿈뻑대던 눈시깔을 가만히 놔두고 천천히 달리.아니 이제는 구나루라고 불러야될 용산공고 짱을 향해 걸어갔다. "...보고싶었어." "마음으로 끝냈어야했어, 그거. 유종의 미라는 말도 있잖어??. 이렇게 너저분하게 끝내는 거 김윤서 취향 아니다, 달리야." 빙그레.휘어진 입과는 달리 구나루를 바라보는 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김윤서 뒷통수 제대로 후려갈겼다는 사실이 뿌듯한건지. 아님 정말로 보고싶던 얼굴을 보게되서 그런건지 알수는 없지만 어쨌든 구나루는 기분 좋게 웃으며 오른손을 내밀어왔다. "재회의 악수." "...내가 미안했던건. 말 한마디 제대로 못건네주고 부산을 떠나온 김윤서가 정말로 미안했던 사람은. 유달리지 용산공고 짱이 아니야." "유달리도 나야. 구나루도 나고, 용산공고 짱도 나야. 이름만 다를뿐이지 알맹이는 다 똑같은 사람인데, 악수 안해줄꺼야??.." 뻔뻔기름이 좌르르.흘러내리고 있다는걸 저 아이는 모르는걸까??... 손수건을 사와 직접 닦아주고싶은 마음을 꽉.억누르고 다시 몸을 돌렸다. 후와후와.쉼호흡을 하고 차근차근 흥분되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직도 배를 잡고 웃고있는 이연이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있는 지니를 쓱. 훑어보며 메마른 입술을 들썩였다. "하나만. 아니 몇가지만 좀 묻자. 내가 전학오자마자 짱자리 넘겨준거. 오락실 앞에서 선우권 만나게 해준거. 이거 말고도 부산에서 있었던 모든일들. 그거 다 너가 일부러 꾸민거냐??.." "....응. 일부러그랬어. 미래 시누이한테 점수좀 왕창 따낼라고.처음부터 계획적으로 그랬어. ..하면 나 나쁜년 되는거지??" 밉지 않을정도로. 딱 그정도로 얄밉게 눈웃음을 친 구나루가 물었다. ....띠바. 날씨가 너무 좋다 했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기며 터벅터벅.지니의 옆자리로 걸어와 앉았다. 앞에 냉수라도 있으면 시원하게 들이킬텐데.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있는데, 눈치 제대로 빨라주시는 이연이가 냉큼 가방에서 꺼낸 바나나우유를 내게 내밀었다. "다음에 일곱개로 불려서 사주면 되니까.. 마셔.윤서야." "...땡큐베리감사." 턱. 이연이에게서 우유를 건네받은 나는 손가락으로 껍데기를 북.찢어 단숨에 우유를 들이마셨다. 후와.순식간에 빈 우유통을 한손으로 콰직.구겨 쓰레기통에 휙.던졌다. 부드러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우유통이 정확히 쓰레기통 안에 꽂히고. 두 손으로 작게 만세를 외친 나는 우유 원샷으로 진정된 마음을 기분좋게 받아들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처음엔 한영이부탁이였지만, 나중엔 아녔어. 정말 친구로써 윤서 네가―" "말까지마세요. 전 초면에 말까는 사람 불쾌하게 생각하거든요." "...윤서야." "예. 전 김윤서예요. 얼마전까지 부산 제화예고에 몸담고 있다가 이번에 인천 황제공고로 전학온 김윤서요.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칠공주의 일당백, 김윤서요. 김한영 세상에서 제일로 조져버리고 싶은 김윤서요. ...그래서 김한영하고 관련된 새끼 모조리 박살내버릴라고 온 김윤서요." 목운동을 하며 경직된 근육을 풀었다. 무언가 더 할말이 남은듯. 입을 벙긋거리던 구나루는 한숨을 내쉬며 살며시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부터 샛노랗게 염색한 머리카락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베베꼬던 구나루는 한참의 망설임 끝에 드디어 결정을 내렸는지 머리카락에서 손가락을 떼고 입을 열었다. "사랑해.내가 얼만큼 그앨 사랑하냐면.. 주위 반대 무릅쓰고 학교1년 가볍게 꿇을정도로. 그애가 가장 사랑하는 동생을 따라 전학갈 수 있을정도로. 끝까지 안심할 수 있게 가장 가까이서 그 애 동생을 지켜줄 수 있을정도로. 딱 그정도로 사랑해, 나. 넌 이해못할꺼야.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윤서 네가 세상에서 제일 미워하는 사람일테니까." ".....양파 싫어해요,난." "뭐??" 자신의 기다란 고백끝에 뜬금없는 리플을 달자 기분이 상했는지 눈썹을 찌푸린 구나루가 매섭게 되물었다. 난 빙글웃으며 아까 구나루가 했던것처럼 머리카락을 잡고 베베꽜다. "까도까도 그 속을 모르는 양파.그런 양파같은 인간 싫어한다구요." "윤서야." "...근데 아쉽게도 내앞에 있는 사람이 딱 양파과네요. 진심은 멀찌감치 숨겨놓고 태연히 구라까는. 양파 중에서도 최고악질, 구라양파." 드디어 구나루 얼굴에서 같잖은 미소가 사라졌다. 구나루에게서 심상치않은 기운을 느낀 용산공고 무리들은 들고있던 재미난 플랜카드를 한쪽으로 밀어넣고, 각자 준비해온 무기를 하나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너가 가져라, 지니야." "뭘??.." ".....용산공고 짱. 또라이 100명값 한다는 용산공고 짱, 너가 가지라고." "니가 왠일이냐." 지니가 의외라는 듯. 눈꼬리를 길게 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걸어왔다. 점점 험악하게 구겨져가는 용산공고 무리들을 나른한 눈길로 훑어보며 씨익 웃었다.퍼석퍼석해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기분이 후지다. ...... 아무래도 화창한 날씨와는 거리가 먼듯 싶다, 김윤서 인생은. "...친구때리는 거지같은 취미, 없거든 김윤서한텐." "병신.그렇게 약해빠진 마음가짐으로 뭘 해먹겠다고." 벌써 역안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하러 떠난 이연이의 뒷모습을 대견스럽게 바라보며 지니가 피식웃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알싸한 담배 냄새에 코끝을 찡그린 나는 갑자기 눈물이 나올것만같아 눈두덩이를 꾹꾹. 눌러줬다. "...한영이 우습게보지마. 윤서 너가 만약 한영이 동생아녔으면... 벌써 죽었을테니까." "너야말로 김윤서 우습게 보지마세요. 구나루 너가 만약 유달리 아녔으면.. 내가 일찌감치 조져버렸을테니깐." 빠득.이를 가는 구나루. 빙글.웃고있는 김윤서. 사설이 너무 길었다. 구나루와 웃기지도 않은 말싸움을 하는동안 지니는 벌써 준비를 마쳤는지, 살기등등한 얼굴로 우드득우득.뼛소리를 내고 있었고, 반대편에 있는 용산공고 무리들은 구나루 손짓 하나에 바로 달려들 기세로 서있었다. "...부산에서 왠만큼 겪어봤으니 알테지만. 김윤서는 싸울때 눈시깔에 뵈는거 없거든요??... 그니까 김윤서한테 거지같은 취미 안만들어 줄라면 멀찌감치 떨어져서 개겨요. 내 사정권 안에 들어오면 그땐... 구나루고 유달리고 그냥 조져버릴꺼니깐." 휘익. 말을 끝내자마자 오른발을 휘두르며 뒤돌려차기를 날렸다. 아슬아슬하게 구나루의 뺨을 지나 그 옆에 있던 쬐끄마한 남자애의 머리통을 후려치고, 두어걸음 물러선 나는 불시의 습격에 어안이벙벙해진 용산공고 무리들을 향해 찡긋.윙크를 날렸다. "오늘은 어제처럼 살살 갈 생각 없으니깐, 제대로 박살나고 싶으면 계속 그렇게들 계시던가." 옆에 있던 지니가 용수철처럼 튕겨나가 구나루의 머리칼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그와동시에 용산공고 무리들이 개떼처럼 김윤서에게 몰려들었다. ......... 기가막히게 날씨 좋은 어느날. 그렇게 김윤서는 인생에서 세번째로 뒷통수를 후려맞았다. 한때 친구라고 믿었던.양파를 꽤많이 닮은 유달리에게서... 4-73. 김윤서의 약점 .................. ※1시간42분 뒤. 햇빛 쨍쨍한 날 밖으로 기어나온 지렁이들처럼 꼬물꼬물. 바닥에 몸을 비비적대고 있는 용산공고무리들을 바라보며 지니가 벗어놓은 검은 자켓을 뒤적였다. 곧이어 깊숙한 안주머니에서 네모난 곽이 잡히고, 주저없이 그 곽을 꺼내든 나는 살짝 삐져나온 담배 한개비를 입에 물었다. 한창 싸움에 열을 올리고 있던 지니가 갑자기 고개를 훽.틀더니 거칠게 소리친다. "빼, 병신아!!!!.." "싸움하면서 한 눈 파는거 아니다. 지니야." "씨발. 입에 문거 빼라고!!!.." 콰앙. ........... 지니의 머리 위로 쓰레기들이 우수수.낙엽처럼 떨어진다. 구겨진 신문지에서부터,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종이컵. 빈 도시락통, 타다만 담배꽁초, 동그란 캔커피까지.. 갖가지 쓰레기들과 함께 지니의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하악하악.불규칙적으로 숨을 몰아쉬며 구나루가 쓰레기통을 잡고있던 손을 놨다. 투둥퉁.. 구나루는 쓰레기들과 함께 지니의 발 밑으로 굴러떨어지는 묵직한 쓰레기통을 말없이 쳐다본다. 그 모습에 담배를 입에 문채로 작은 환호성을 질렀다. "와우. 대단한 한방." "......" "하악.하악..." "그러니까 내가 한눈팔지 말랬잖아. 이제부터 눈시깔 똑바로 뜨고 조져 은지니." 콰직.지니는 힘있게 쓰레기통을 발로 짓뭉개고 말 잘듣는 착한 아이처럼 구나루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한꺼번에 떨어지지않고 어깨에 붙어있는 신문지를 신경질적으로 떨궈낸 지니는 차갑게 구나루를 노려보며 오른발을 들어올렸다. 하늘로 솟구친 지니의 매끈한 다리는 무서운 기세로 구나루의 어깨를 향해 돌진했고, 0.09초후. 어깨뼈 아작나는 소리와 함께 구나루의 어깨에 지니의 오른발이 꽂혔다. 구나루의 한쪽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지고.지니는 쉴틈을 주지않고 바로 주먹을 뻗었다. 처음엔 가벼운 잽으로. 다음엔 조금 무게가 실린 훅으로. 마지막은 강한 스트레이트. "병신. 니가 나랑 맞먹을 주 알었냐,아님 내가 봐주니까 눈에 뵈는게 없었냐??... 병신같은 년이 꼭 병신같은 짓만 골라서 하지." 하여간. 은지니 입에도 고운 소리 나오는 꼴을 못봤지. 혀를 끌끌차며 잘근잘근.담배를 씹었다. 텁텁한 맛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입 안이라도 써야 눈동자가 쓰지 않을테니. 차라리 침에서 쓴맛이 나는게 낫지, 눈물에서 쓴맛이 나면... ......아. 토나와. "..난 세상에서 너같은 년 제일 싫어해. 어디 후릴데가 없어서 친구 뒷통수를 후려??.." 거칠게 구나루의 머리칼을 잡아당긴 지니가 무릎을 들어올려 구나루의 안면을 찍었다. 구나루의 두 개의 콧구멍에서 새빨간 쌍코피가 주르륵.흐르고... 지니는 이참에 구나루 콧대를 뭉개줄 작정인지 잡고있던 머리칼을 놓고 주먹을 악쥐었다. 쌍코피를 손등으로 닦아낸 구나루가 지니의 주먹을 막기 위해 몸을 젖혔지만, 지니의 주먹이 쬐끔 더 빨랐다. 뿌각. 경쾌할정도로 신나는 소리가 구나루 콧잔등 위에서 울려퍼졌다. "악!!.." 짧은 비명을 내지른 구나루가 서둘러 코를 감싸쥐며 몸을 숙였다. 여전히 싸늘한 시선으로 구나루의 어깨를 바라보던 지니가 갑자기 몸을 돌려 관상용으로 꾸며놓은 인공정원으로 저벅저벅.들어가더니.. 큼지막한 화분 하나를 들고 다시 구나루 앞에 다가섰다. "너 김윤서 약점이 뭔 줄 아냐??.." 뜬금없이 김윤서 약점은 왜?.. 평소엔 주둥이에 본드를 붙여놓드만. 오늘따라 지나칠정도로 말이 많아진 지니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며 옆에 높게 설치된 화단에 팔을 기댔다. 까딱까딱.입에 물린 하얀 담배가 위아래로 출렁인다. "바로 뒷통수야, 뒷통수. 남들은 한방만 맞아도 떨어져나간다는 턱주가리 골백번 쳐맞아도 멀쩡한게 김윤서라는 년인데. 그런 년 최대 약점이 뒷통수라고, 뒷통수. 무슨 뜻인지 이해갔냐??.. 너 오늘 김윤서 약점 제대로 건드렸어. 쌈박질이라면 눈 까뒤집고 달려드는 김윤서. 맥도 못추게 만들었다고, 너가." .... 지니의 입가가 묘하게 뒤틀렸다. 나도 몰랐던 약점을 은지니가 알고 있었다니. 앞으로 조심해야겠군.. 지니의 새빨간.아니 지금은 가발을 써서 검어진 머리통을 보며 빙글 웃었다. 정리아 뺨치게 무뚝뚝한 가시네가 오랜만에 사람답게 구네. "...그래서 지금 존나 화났어, 나. 너같은 년이. 나한테 쪽도 못쓰는 너같은 년이!!.. 김윤서 약점 건드려서.또라이같은 김윤서 더 또라이같이 만들어서. 우리말고 김윤서한테 제일로 소중했던 한가람새끼가 후린 뒷통수.아물기도 전에 후려쳐서. 이제 사람답게 살아볼려는 김윤서!!!... 너가 다시 죽여놔서.그래서 존나 화났어, 이 씨발아." 퍽. 굵고 간결한 소리가 순간 울려퍼졌다. 먼저 갈색 화분 조각들이 위험스럽게 구나루의 무릎 위로 떨어지고.검은 흙과 초록색 난초가 뒤따랐다. 그래도 분에 안찼는지 지니는 구나루의 머리통을 발로 힘껏 후려깠다. 하얀 구나루 살결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투둑. 뽀얀 구나루 얼굴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투둑. ................ 예쁜 달리 머리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투둑. 투둑투둑. .... "...병원가봐. 적어도 전치4주는 나올꺼야, 아마. 어차피 그 몸으론 너가 죽고못산다는 김한영한테 한톨 도움 안될꺼니까 그 편이 더 좋을꺼다." "...유...윤서야.." "괜찮아.김윤서 욘나 괜찮아. 오히려 고맙기까지해, 난. ...김윤서 눈깔이 뵈는거 없게 해줘서 진짜 고맙기까지해. 유달리덕에 내 약점이 뭔지도 알게됐고. 구나루덕에 김한영 제대로 싫어졌으니깐. 진짜 고맙기까지해." 화단을 짚고서 빙글.가볍게 덤블링을 넘어 만남의 광장에서 나왔다. 누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멀리서 싸이렌 소리가 들려온다. 멍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구나루를 향해 찡긋.윙크를 날려주고 사물함으로 걸어가 쇼핑백을 꺼냈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좀 늦어졌는지 이연이가 쬐끔.긴장한 얼굴로 시계 바늘을 가르켰고. 그 모습에 지니가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에 퉤.하고 가래침을 뱉었다. "맨인블랙 오고있는 중이라니깐 오늘은 같이 움직이자. 수이연 1번출구 길 터놨지??.." "응!!이연이가 잽싸게 길 터놨어." "가자." 지니는 볼 일은 다 봤다는듯. 쌩하고 용산공고 무리들을 지나쳐 이연이와 함께 1번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빨리오라고 소리치는 지니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쇼핑백을 뒤져 밴드 두통과 후시딘 세개를 꺼낸 구나루의 앞에 털썩.내려놨다. ....유달리도. 그렇다고 구나루도 아닌. 둘을 반씩 갈라 그 반을 합쳐놓은 듯한 구달리(구나루+유달리)의 앙증맞은 정수리를 향해 바삭하게 마른 입을 열었다. "다음에 보면 얄짤없어.어쩡쩡하게 구달리로 나타나지말고, 구나루면 구나루. 그럴 일은 없겠지만 유달리면 유달리. 그렇게 하고 나타나. ....그래야 나도 깔끔할테니깐. 김한영꺼 할려면 김윤서 앞에서 유달리처럼 굴지말라는 말이야. 센스 지켜, 지금만 구달리." 삐요삐요. 우루루루. 요란한 포돌이 아저씨들이 계단을 밟고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마지막으로 방글.웃음을 짓고 지니와 이연이가 일찌감치 사라진 1번출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지니의 재촉에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데.뒤에서 울음섞인. 하지만 패버리고 싶을 정도로 악에 받친 구달리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날아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후회할꺼야!!!... 피눈물나게 후회할꺼야!!!.." "......" "한영이도.가람이도. 그리고 나도 잡지 않은 거. 아무도 잡아주지 않은 거!!!..후회할꺼라구, 윤서 너!!!.." 핑그르. 다시 구달리를 향해 몸을 틀었다. 어렸을때 누구나 해봤을 뒷걸음질을 살살치며 피식.웃었다. 바람 빠진 풍선처럼. 텅빈 깡통처럼. 허해진 얼굴로 피식.웃었다. "달리 너도 후회할꺼야. 오늘일. 부산에서 있었던 일. 앞으로 벌어질 일. 그리고 지금 나보고 후회할꺼라고 소리친 일. 모두 다 후회할꺼야. ....그래서 난 니가 걱정이다,달리야. 이미 난 젖어있는데. 너가 그렇게 확인시켜주지 않아도 흠뻑 젖어있는데. 인생 자체가 후회에 제대로 젖어있는데..넌 그렇지 않으니깐. 나중에 더 힘들 사람이 너여서 걱정이 돼.아주 많이. 김한영하고 같이 무너지게 되면 죽고싶을정도로 후회 되겠지,아마??.. 김한영 옆에서 나란히 무너질 너 생각에 오늘부터 발도 못뻗고 잘 거 같아." 아래로 처진 눈꼬리에서 잔인함이 묻어나온다. 나조차도 감출 수 없는 처절한 잔인함이. 따뜻하게 휘어진 눈꼬리에서 묻어나온다. ............. 2004년 10월 30일. 김한영 조지기 29일 전. 두번째. 서울 연합의 용산공고 박살. 4-74. 불길한 조짐 .......... 빠앙. 코 끝에서 후끈거림이 느껴지기도 전에 억센 힘이 팔뚝을 잡아챘다. 추여사가 종종 입던 살색 거들처럼 아프게 살을 짓누르는 힘에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려는데 그보다 한발 먼저. 벼락같은 지니의 고함소리가 귀떼기를 후려쳤다. "뭐하는거야!!!!!..." "아.귀아퍼. 고막 찢어지면 너가 매꿔줄꺼냐?... 치료비도 안물년이 소리는." "눈깔을 뜨고 다니는거야,마는거야 도대체!!!" "붕신아. 너야말로 초록불에 횡단보도 밟아야 된다는 것도 안배웠어??.. 찢을려면 김윤서 고막이 아니라 방금 지나간 아반떼 타이어를 찢어야지." "뭐??.." 지니가 당황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뼈까지 눌러대는 은지니의 무식함에 혀를 내두르며, 잡힌 팔뚝을 빼내려는데 이번엔 은지니의 솥뚜껑같은 손바닥이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악!.. 돌았냐, 은지니?!!... 싸다구는 왜 갈겨, 띠바. 아까 싸우다 입안 터졌나고 내 말 안하디??.." "뭐라고 그랬어, 김윤서. 너 지금." "뭘 뭐라고 해. 아. 나 마이 아포. 그니까 손 좀 떼도." 옆에서 지켜보는 이연이가 헛구역질을 할정도로 앙증맞은 혀짧은 말투를 선보이며 후끈후끈.열이 올라오는 뺨을 문지르는데 갑자기 얼굴을 들이대는 은지니. 아까부터 왜이래, 얘가. "저리 안치우냐, 은지니??..." "초록불이라 그랬어??.. 너 지금 초록불이라 그랬냐고." "엉.그랬다 어쩔래." "....수이연 너가 말해봐.아까부터 지금까지 신호등이 무슨 색깔인지." "빨간색.지니 머리카락색깔." "들었냐??..와. 뒷통수 후려맞더니 이젠 눈시깔까지 병신됐나보지??.." 꿈뻑꿈뻑. 이연이와 지니의 말에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 있는 신호등을 쳐다봤다. .....아깐 분명히 초록불이였는데. 눈을 비비고 다시 쳐다봐도 반짝반짝.빛나고 있는건 지니의 얼굴만큼이나 무뚝뚝한 빨간불이다. 헐.턱주가리에 힘이 빠졌는지 입이 절로 헤.하고 벌어진다. "..정말 은지니 말대로 눈시깔이 병신됐나?.. 아닌데.김윤서 시력 양쪽 다 3.0인데. 독수리 눈깔 뺨치는게 김윤서 눈깔인데.." "병신.하여간 또라이짓만 골라서 하진." 욱신욱신. 지니의 말에 갑자기 눈 안쪽이 뻐근해져온다. 아으.신음소리가 흘러나올정도로 두개골이 빠개지는 느낌. 검지손가락으로 꾹꾹.미간을 누르고 그걸로도 모자라 관자놀이도 힘있게 눌러줬는데 두통이 쉽사리 가라앉지않는다. 이번엔 제대로 초록불이 들어왔는지 앞서가는 지니와 이연이의 네 다리가 보이는데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 폼 구겨지게 이게 뭐니. "김윤서 안와??.." "나. 나...어디 들렸.아. 좀있다 연락하께!.." 지니와 이연이가 최대한 눈치채지 못하게 머리통을 악누르며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소리냐며 소리치는 지니를 뒤로하고 한적한 골목길을 찾아 한참 거리를 뛰어다니는데 파악.하고 내 어깰 밀치고 가는 한 아이. "아 씨발.뭐야??.. 눈깔을 어따-" "솔림아 그만하고 가자. 나루언니 다쳤다잖아." "그 놈의 구나루구나루!! 아주 구나루 말만 들어도 역겨워 뒈질꺼같아." "야!! 누가 들으면 어쩔려구 그래??.." "들으면 들으라지.씨발. 구이겸하고 쫑낸지가 언젠데 그걸 들먹이면서 사람을 개취급해?!!.. 1년만에 나타나서 사람 속 존나 뒤집고 말야.후.. 그리고 지가뭔데 우리반 진따년 갖고 노는 거까지 이래라저래라 간섭이야??.." "솔림아!!" "씨발.내가 뭐 틀린 말 했어?? 김윤서. 그 병신같은 계집애가 도대체 누구길래 금잔디로도 모잘라 구나루까지 지랄이야,지랄이. 아우!!짜증나." 화장품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주절주절.짜증난다는 어투로 한껏 불만을 토로하는 그 아이.최솔림. 최솔림의 째진 목소리를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머리통을 짓누르던 두통이 가셨다. 아까부터 잔뜩 찌푸려진 검은 눈썹이 팽팽한 부메랑처럼 휘어졌다. 한껏 뒤틀린 심장이 팟.하고 펴졌다. ........... 심장 위에 턱.자리 잡은 돌덩이 하나가 데구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쿵.쿵.아래로 떨어졌다. "...야." "뭐??..너 지금 나 불렀냐??" "엉.너. 최솔림이. 황제공고 다니는 최솔림이. 머리는 샛노래가지구 발랑 까진 최솔림이. 너 불렀어.." "하.뭐야?? 뭐 이런 미친년이-." "참을라했어요. 김윤서가 꾸왁꾸왁 눌러담어서 겨우겨우 참을라했어요.뒷통수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나와도. 가슴이 찔끔 아파도 참을라했는데... 사람 가지고 노는거 존나 싫어해서. 세상에서 제일 싫은게 사람 가지고 노는거라서. 그래서.. 참을수가 없어요,하늘님. 7분만 용서해주세요." 빙글. 입술이 보기좋은 곡선을 그렸다. 내가 정신병원에서 방금 탈출한 따끈따끈.정신병자인 줄 알았는지 샛노란 최솔림이와 그 친구가 슬금슬금 자리를 뜨려고하자 손을 뻗어 기다란 최솔림의 머리칼을 나꿔챘다. 웅성웅성.사람들이 하나둘씩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난 그들을 향해 말했다. "오늘부터 밥숟갈 못뜨고 싶어질 새끼들만 남으세요." .......... 심상치 않은 협박에 모여들었을때처럼 하나둘씩 자리를 뜨는 사람들. 후와.길게 숨을 내뱉고 최솔림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뭔데.너??.." "씨.씨발 이거 안놔?!??!!!..." "구나루가 최솔림한테 뭔데 김윤서를 가지고 놀아.." "무머어뭐??" "이해 안갔으면 바꿔물을께. 죽고싶어??.." "갑자기 그게 무슨!!-" "김윤서 가지고 놀았잖아.그럼 죽고싶은 거 아녔어??.. 난 그렇게 알고있는데. 너출판사에서 나온 죽을래 국어사전엔 그렇게 나와있었거든." "뭐야,이 년?? 정귀림!! 이 미친년 좀 빨리 떼봐!!!" "어..어어?... 소, 솔림아. 걔.. 걔 잖아!!" "뭐??" "우크라이나.. 아니. 칠공주.. 아니.. 누.누구지 쟤??" 정귀림이라고 불린 최솔림 친구가 날 향해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어버버.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쉽게 내 손을 떨쳐내지 못한 최솔림은 그런 정귀림이 답답했는지 바락바락.소리를 내질렀고.. 6분 남았다. "...살기 싫어졌지,너??.." "정귀림!!빨랑 얘 안떼놔?!!!" "아무리 살기 싫어졌어도 사람 가지고 놀면 안되지. 콧구멍으로 숨쉬고 똥구멍으로 내뱉고.. 살아있는 사람 가지고 놀면 안되는거지,아무리 살기 싫어졌어도.." "아.씨파. 짜증나게-" "...구나루가 오늘 김윤서 뒷통수 두번 후렸어. 누가 내 눈깔에 안대 씌우는 거 존나 싫어했는데 앞으로는 더존나 싫어할 꺼같애." 5분30초. 질질질.최솔림의 머리칼을 잡은채로 으슥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정귀림은 발을 동동구르며 핸드폰으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고, 그 모습을 보며 가슴을 치던 최솔림이 갑자기 고개를 바짝.쳐들었다. 써클렌즈를 껴서 한층 도드라져보이는 최솔림의 동그란 눈매가 코끝을 자극한다. "너..우리반 찐따년이지??.." "내가 옛날 얘기 하나 해주까??.." 두사람의 입에서 동시에 터져나온 말. 휘둥그레진 최솔림의 눈동자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뒷통수가 불쌍한 여자애 얘기." "허..허억..." 드디어 뭔갈 알아챘나보다. 최솔림은 숨 넘어가는 소릴내며 겁에 질린 얼굴로 몸을 가냘프게 떨었다. 바닥에 주저앉아버린 최솔림과 눈높이를 맞추기위해 쪼그려앉은 나는 빙그레.웃으며 잡고있던 최솔림의 머리칼을 놨다. "불쌍한 여자애가 그렇게 믿고 따랐던 씨발놈은 알고보니 그 여자앨 자기 대신으로 삼는 조건으로 집을 나가려던 놈이였고. 불쌍한 여자애가 유일하게 믿었던 이쑤시개는 알고보니 그 씨발놈의 꼬붕이였고. 불쌍한 여자애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달리꽃은 알고보니 그 씨발놈의 여자였던 얘기. 그래서 뒷통수가 불쌍해진 여자애 얘기..." "미..미안.. 마.만약 넌줄 알았으면 안그랬을꺼야!!.. 나 나는 그냥 구나루가 시켜서.. 구,구나루가 구이겸하고 있었던 일 남친한테 꼬지른다고 협박해서!! 그래서.." 3분.벌써 3분밖에 남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바들바들떨며 변명을 늘어놓는 최솔림의 검정색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퍽.가볍에 최솔림의 머리통을 후려찼다. 힘없이 픽.고꾸라지는 최솔림. ......... 눈동자에 힘이 사그라든다. 온 몸이 나른해지고 숨이 길어진다. "너 사람 죽여본 적 있어??.." "제발.제발... 미안해.용서해줘.. 다시는..." "난 앞으로 죽여볼 예정인데." "제발... 흐어.. 제발.." 최솔림은 본격적으로 무릎을 꿇고 내 바지를 잡아끌었다. 눈물콧물이 알맞게 버무려진 최솔림의 불쌍한 얼굴. 허리를 숙여 최솔림의 머리칼을 다시 잡아올렸다. 두피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을까? 최솔림의 한쪽 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게 보였다. "겁 먹지마.너 말고 그 씨발놈. 뒷통수가 불쌍한 여자애를 불쌍하게 만든 그 씨발놈. 그 새끼 죽일 예정이니까 넌 겁 먹지마." "흐어..흐엉.." "그냥 넌 나 가지고 논 벌 받는다고 생각해." 잔인한 미소를 머금고 최솔림의 머리칼을 다시 놨다. 스르륵.힘없이 주저앉으려는 최솔림의 복부를 힘껏 걷어차고 그 다음엔 바닥에 나자빠진 최솔림의 목을 짓눌렀다. 숨이 막혀 컥컥거리는 최솔림을 아무런 감흥없이 바라보며 목을 누르는 발에 힘을 실었고.. 눈이 까뒤집혀 금방이라도 개거품 물고 쓰러지려는 그 때. 최솔림의 목에서 발을 뗐다. 쿨럭쿨럭.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리는 최솔림. "...다음부터는 애 가지고 놀지마라. 나 말고도 다른 애들 가지고 놀지마. 사람 가지고 노는거 안 좋은 취미다, 솔림아. 니가 잘난만큼 다른애도 잘난거고, 니가 소중한만큼 다른애 마음도 소중한거야. 자의든 타의든 살아있는 사람 가지고 노는건... 개새끼들이나 하는 짓이야." 바닥에 굴러다니는 벽돌을 주워들었다. ........... 퍼억. ... ................. 투욱.. ".....그리고 난 그 개새끼고." 4-75. 투아웃 ........ ※오후 8시59분. 철컥.매끄럽게 열리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굳은 얼굴의 맨인블랙들이 보였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쇼파로 걸어와 앉자 기다렸다는 듯이 앞으로 다가오는 정지혁씨. 온 몸에 퍼지는 피곤함에 몸을 뒤로 기대는데 정지혁씨가 들고있던 딱딱한 회초리가 턱을 찔렀다. "어딜 갔다왔지? 용산에 데리러 갔더니 이미 사라지고 없더군." "강조아저씨한테 9시까지 들어온다고 말했는데.. 못들으셨나봐요." "하교시간은 분명 아침에 말해줬을텐데. 그리고 어제 이런 개인행동 앞으로 일절 봐주지 않는다고도 말하지 않았나?? 언제까지 이렇게 철없이 굴꺼지?" ".....김한영 조질때까지요." 순간 정지혁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고 느꼈다면 졸린건가??.. 집에 오는 내내 욱신거리는 눈두덩이를 문지르며 눈을 감았다. 정지혁씨의 따가운 시선이 얼굴에 와닿았지만 일일히 대꾸해주기가 귀찮아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는데 왼쪽뺨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물부터 드세요." "..응요.고마워요 강조아저씨." 아까 학교서부터 예쁜짓을 하는 강조아저씨를 향해 찡긋.윙크를 날려주고 아저씨가 건네준 시원한 냉수를 단숨에 들이켰다.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쏘아보는 정지혁씨에게 빈 유리컵을 건네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학업과 품행이 뛰어나서 남의 모범이 될만한 학생. 학업성적이 매우 우수해서 어른들의 체면을 살려주는 학생. 국어사전에서 말하는 모범생과 어른들이 말하는 모범생의 정의는 참 달라요.똑같은 한국어고, 똑같은 글잔데 가지고 있는 뜻은 천지차이죠. 참 신기하지 않아요??.." "김윤서." "...어차피 어른들이 원하는 모범생은 후자일테니까 그렇게 해줄겁니다. 시험 존나 잘보고, 선생들한테 아양떨어서 어른들의 그 잘난 체면에 먹칠 안할테니까 작작하십쇼. 어차피 눈에 띄는 사고만 안치면 되는거잖습니까." 순간 정지혁씨의 눈에 불이 번쩍.하더니.. 띠바.아까 지니한테 후려맞은 뺨에서 다시 후끈후끈 열이 올라온다. 김윤서 수난시대야, 아주. 정지혁씨에게 얻어맞은 뺨을 문지르며 잔뜩 터져 핏물이 가득 고여버린 입안을 핥았다. 퉤.입술 사이로 시뻘건 핏물이 튀어나왔다. "투아웃이야. 조심해." 조금만 다가서만 날카롭게 베일것만 같은 찬바람을 남기고 정지혁씨가 집을 나갔다. 현도아저씬 인상을 찌푸리더니 후.한숨을 내쉬며 정지혁씨의 뒤를 따라 집을 나섰고,혼자 남은 강조아저씬 걱정스러운 얼굴로 내 뺨에 손을 올려놓으셨다. 차가운 강조아저씨의 손바닥에 뺨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흡수되는 느낌이다. "아가씨.." "...거지같은 세상이예요.그쵸 아저씨?" ".." "난 그래서 이 세상이 싫어요.아마 칠공주랑 하늘 아녔음 진작에 죽어버렸을꺼야." "그런말 하시는 거 아녜요." "...요즘엔 잘 안했는데, 오늘따라 입이 근질거려서요. 하아.아저씨." "예??" 강조아저씨의 부드러운 갈색 눈동자에 김윤서의 얼굴이 비춰진다. 스마일걸이라도 되는지 빙글빙글 잘도 처 웃는 김윤서의 얼굴이... "내 약점이 뭔지 아세요??..." "뭔데요?" "....뒷통수요.그게 제 약점이래요. 저도 오늘 처음 알았어요." "뒷통수요??" "예. 아저씨 내가 이렇게 김윤서 약점 알려줬으니깐. ...아저씬 그러지마요." "예??.." "아저씨까지 제 뒷통수 후리지 말라구요.나 아저씨가 쬐끔 좋아졌으니깐..." 느닷없는 고백에 놀란 강조아저씨의 두 뺨에 슬슬 홍조가 피어오르자 피식.웃으며 아저씨의 손을 떼고 방으로 들어왔다. 귀여운 아저씨. .... 쇼핑백을 내려놓고. 최솔림의 피가 잔뜩 튀어 볼썽 사나운 옷도 갈아입고 내일 입고갈 교복을 꺼내 옷걸이에 걸어놓고.. 마지막으로 깨끗히 씻고 나오자 책상 위에 올려놨던 핸드폰에서 그룹 NBC의 나봉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누구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핸드폰을 받아들자 익숙한 목소리 한 개가 고막을 울렸다. [아무리 인천이 좋다고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연락 한번이 없냐??] ["오.쫄따구 하이. 오랜만이야 그대. 잘 지냈지??"] 오랜만에 듣는 기분 좋은 선우권의 목소리에 싱글싱글. 웃으며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오쫄따구 하이??.. 어쩜이래.] ["어쩜이러긴 뭘 어쩜이래."] [...가.] ["뭐??..가? 그럼 나."] [아씨. 그게 아니고 나 인천간다고.] ["니가 여긴 왜??"] [마누라 볼라구.] ["오. 인제 쫌 쎄졌나봐??.. 가슴팍에서 꺼냈네,그 아껴둔다는 사랑한다는 말."] [..어.나 김윤서 지켜줄만큼 좀 쎄졌어.] 사뭇 진지한 선우권의 목소리에 컥.하고 나도 모르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말한 자기도 쑥스러웠는지 핸드폰 너머로 흠흠.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 잊을만하면 흔들고. 괜찮을만하면 나타나고. 정말 구제불능이다, 선우권. ["요즘 대장님이 바뻐가지고 연애놀음 할 시간이 없는데.. 아쉽다.그래도 축하해. 쎄진거는."] [김윤서] ["엉??.."] [....아직도 한가람 살고있냐.] ["글쎄. 아마 잘 살고 있지 않을까??"] [니 마음속에. 아직도 한가람 살고 있냐구.] 꿈벅꿈벅.눈꺼풀을 몇번 위아래로 움직이다 파.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선우권 삽질. 여전하네.. ["걔 가출한지 꽤 됐는데. 나도 지금 알았다야. 내가 워낙 바빠서 방관리를 못했어."] [....다.] ["엉?? 인제 다야??..그럼 난 라."] [아니. 이제 내가 니 마음에 들어간다고. 얼마전까지 한가람 살았던 방, 허물고 거기 선우권이 들어간다고..] ......... ["...아플껀데.눈물나게 아파서 잠도 못잘껀데. 김윤서 마음이 너무 좁아서 아플껀데 아마 너.."] [그런거 일일히 따지면서 어떻게 널 좋아하냐.] 침대 위로 털썩.드러누우며 눈두덩이 위로 오른손을 얹었다. 하루가 참 길다. 24시간. 1440분. 86..86...아무튼 참 길다. 긴 하루. 언제쯤 끝나려나. 후우.기다란 한숨만 터져나온다. ["사귀고 싶어,그렇게 나랑??"] [아니] ["그럼??"] .............. [...니 마음에만 들여보내주면 돼. 꼭 사겨주지 않아도 되니까. 백일,이백일 따져가며 안 사겨줘도 되니까 니 마음에 선우권, 이름 석자만 박아줘. 너한테 첫번째 아녀도 되니깐.그렇게 좋다는 하늘,그리고 니 친구들,메주같다던 너네 가족보다 훨씬 아래여도 되니까 니 마음에. 김윤서 심장에 살게만 해줘.] 4-76. 선우권의 여친 .......... ["존나 닭살."] [응.너가 생각해도 그렇지??..그래서 지금 팔뚝 긁고 있어. 존나 닭살이야 정말.] ["지가 말해놓고, 지가 더 난리네."] [흠흠. 그건그렇고 니 생각은 어떤데??] 세수 할 때 물이 튀겨 살짝 젖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실끗.웃었다. ["차라리 사겨달라고하지. 그랬음 단박에 OK했을껀데.."] [뭐??저.정말로??] 당황한 선우권의 목소리가 입가를 포근하게 간지른다. 붕신. 이럴꺼면서 멋진척은.. 허리를 튕겨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부산에서 리아가 건네줬던 서류와 인천에 올라온 날.지니에게서 받았던 서류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새가구에서만 난다는 특유의 나무 냄새를 기분좋게 느끼며, [서울연합 비밀 아지트]에 대한 내용이 나와있는 서류를 집어들었다. ["하루에 한번씩 꼬박꼬박. 문자는 해줄 수 있고,너가 힘들다 그러면 웃겨줄 의향도 있어. 자랑스럽진 않더라도 남들한테 여친이라고 소개할 수 있을만큼 연오한테 교육을 받을 수도 있고,핸드폰에 널 내 남친이라고 저장할 수도 있어. 하지만 너보다 하늘이 더 좋을꺼야,아마. 너가 아프다 그래도 칠공주가 다쳤으면 거길 먼저 갈꺼고, 너때문에 싸움을 그만둔다거나, 위험한짓을 안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을지도 몰라. 어쩌다 눈깔 뒤집히면 너까지 팰지도 모르고, 병원에서 만나는 게 일상이 될거야. ........그래서 사귀는 건 괜찮은데, 널 심장에 담을 수는 없어.죽어도 선우권이 김윤서한테 첫번째가 될 수는 없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너가 선택하세요. 처음이자 마지막일 김윤서 남친이 될래요,그냥 쌩까고 지낼래요??..."] 쓸떼없는 잡음 넣지않고,가만히 듣고있던 선우권의 숨소리가 들려온다. 영등포의 ´사신´. 용산의 ´닭큐멘터리´ 성북구 보문동의 ´블랙´ ............ 그리고 마지막. 강남구 삼성동의 ´폭풍´ 폐건물 지하에 위치한 서울연합 서열1위. 서울공고의 비밀아지트, 폭풍에 대한 설명을 눈으로 읽어 내려가는 동안에도 귀를 쫑긋 세웠다. 선우권의 대답. 내심 궁금하고,또 기대된다. 두근두근. 콩닥콩닥. [....한가람은 뭐라고 했었는데.] 푸시식. 통통하게 불어진 풍선에서 픽.하고 바람이 새는 기분이다. 뜬금없는 선우권의 질문에 핸드폰을 어깨에 끼워놓고, 눈썹을 긁었다. 한가람은 뭐라고 했냐고??... 한가람이 뭐라고 대답했는지 어떻게 알어. 아예 물어보질 않았는데. 하여간 삽질의 제왕이야,선우권. ["안 물어봤어."] [왜] ["...알고있었으니깐."] [뭐를] ["내가 이렇게 말하지 않아도 가람인 알고 있었으니깐. 김윤서한테 절대 첫번째가 될 수 없다는 걸. 소중한 사람은 될 수 있지만,결코 전부를 걸 수있는 사람은 못된다는 걸. 그 애는 나보다 먼저 알고있었으니깐."] ............ 우권아,선우권. 너 그거 아니??.. 가람인 언제나 웃었어. 아무리 김윤서 옆에 있어주고, 가장 가까운데서 지켜봐주고, 좋아해줘도. 그래도 김윤서한테 하늘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거. 칠공주들처럼 김윤서에게 세상이 되어줄 수 없다는 거.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그랬으면서도 웃었어. 내 옆에서. 김윤서 옆에서.. 하늘에 미쳐버린 년 옆에서. 눈물나게 웃었어. 자길 다쳐가면서도 웃었어. 그리고 지켜줬어. 내 하늘을. 내 세상을, 그리고 내 심장을. ........근데,그런데. 그런 아이가 뒷모습을 보였을때. 항상 곁에 있던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내게 등을 보였을 때. 매일매일 99를 주면서,1을 채워주지 못해 미안해하던 그 아이가 누구도 아닌 날 위해서 먼저 손을 놨을 때. 난. 나는. 김윤서는..... .......... 하늘이 웃을만큼. 다행이라고, 이제라도 김윤서와 떨어진게 무척 다행이라고 크게 웃어버릴만큼. 딱 그만큼. 그 아일 버렸어. 빌어먹을 하늘때문에. 죽여버리고 싶을만큼 미운 김한영때문에. .....그 아일 버렸어. 손은 그 아이가 먼저 놨지만, 결국 버린 건 김윤서였던 거야. 기다렸다는 듯이 버린건. 먼저 돌아선건 김윤서였던 거야. 평생 그 아이의 슬픈 사랑을 받았던. 김윤서였던 거야.. .................... 투둑. 수북하게 쌓인 A4용지 위로 동그란 눈물 방울이 떨어졌다. ["...아마 하늘하고 선우권,둘 중에 하날 택하라면 주저없이 하늘을 택할꺼야. 칠공주하고 선우권, 둘 중에 하날 택하라고해도 역시 칠공주를 택할꺼야. 거기까지밖에 못해줘,나는. 한가람도 거기까지밖에 못왔으니깐. 하지만 한가람2따위 만들고 싶지 않아. 그니까 네가 결정해."] 하늘님. 제발.. 가여운 그 아이,끝까지 가엽게 만들지 마세요. 반짝반짝 빛나는 이 아이,끝까지 빛날 수 있게 해주세요. 저 혼자 감당할께요. 김윤서 혼자 꽈악.부둥켜안고 있을께요. .....혼자 아프고,혼자 울다 지치면 그땐 하늘님한테 갈테니깐. 제발 이 아이마저 가엽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 [....서방님한다. 지금부터 선우권,김윤서 서방님 하고. 김윤선은 선우권 마누라한다. 김윤선일언중천금, 설마 모르는거 아니지??.. 치사하게 없던 일로 치자는 그런 말은 안듣는다.] 살짝 들뜬.하지만 슬픔이 묻어나는 선우권의 목소리. ............끝까지. 하늘님은 끝까지. ["...그럼 약속 한개만 해라,선우권."] [무슨 약속??] ["나한테. 김윤서한테... 니 전부를 걸지않기로."] 꾸깃. 쥐고있던 A4용지가 괴로운 신음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뼈가 느껴지는 말에 잠시 대답이 없던 선우권 가벼운 휘파람과 함께 흔쾌히 말했다. [좋아.대신 선우권이 김윤서의 전부가 되는 날이 오면 그땐. ...서로 손잡고 결혼식장으로 직행이다.약속해.] ["풉.. 끝까지 삽질이지,아주. 좋아,약속할께.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진 않겠지만, 만약 너가 첫번째가 되는 날이 오면. 너랑 같이 결혼식장으로 갈께."] 달리에게 후려맞은 뒷통수가 따끔따끔.아팠던 날. 심장이 새카맣게 변했던 날. 더이상 젖을 데가 없을만큼 꽉.잠긴 날. .....선우권의 여친(여자친구)이 되었다. 4-77(1). <특별번외>미친개의 하루 ※새벽5시. 투박한 전자시계에서 알람음이 흘러나오자,지니의 검은 속눈썹이 움찔합니다.곧이어 부릅.눈을 뜬 지니는 거칠게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습니다. 후우.기다란 한숨이 지니의 빨간 입술 사이로 흘러나옵니다. 지니는 아무렇게나 뻗친 빨간머리를 벅벅.긁으며 욕실로 들어갑니다. ............. ※새벽5시40분. 깨끗히 씻고나온 지니는 작은 냉장고에서 생수통을 꺼내 시원스럽게 들이켰습니다. 가느다란 목줄기를 따라 흘러내리는 생수가 무척이나 섹시합니다. 띠리리.벽에 걸린 빨간색 전화기가 알람시계보다 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립니다. 입주변을 손등으로 닦아낸 지니는 머리를 쓸어넘기며 한참을 그자리에 서있다,결국 얼굴 가득 짜증스러움을 담고 전화기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만하라고 했지."] 전화를 받자마자 지니가 한 말이였습니다. 매일매일 걸려오는 전화. 지겹고,지겨워서 차라리 부숴버린 전화기만 해도 100대가 넘는 전화. .....냉기가 뚝뚝.떨어지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전화기 반대편에서는 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보고싶다,지니야. 못견디게 너가 보고싶어.] ["...새벽마다 전화하는 거. 은지니 일어나는 시간, 일일히 체크해가며 꼬박꼬박 전화해대는 거. 그만하라고 말했지,내가 분명히 너한테!!"] 따박따박.쉬지않고 지니가 소리쳤어요. .....현광입니다. 김현광이요. 은지니를 죽도록.정말 말 그대로 죽도록 사랑하는 아이,현광이. [너가 일어나는 시간에 나도 일어나고 싶어서 그래. 지금은 멀리 떨어져있으니깐..이런 거라도 같이 하고 싶어서 그래.] ["하고 싶으면 너나해,이 개자식아."] [지니야.나 조만간 한국 들어갈거야. 최대한 빨리. 연오 본지도 오래됐고,이렇게 통화만 해서는 널-] ["최필립때문이라고 말해,솔직하게. 니 꼬붕들이 벌써 다 꼬질렀을 거 아냐??.."] 지니가 지친눈빛을 하고 벽에 몸을 기댑니다. 정곡을 찔렸는지, 지니의 말에 아무런 대답을 못하던 현광인 결국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응.그래 솔직하게 최필립이 신경쓰여. 널 웃게 만든 그 새끼가.. 잠도 못잘만큼 신경쓰여서 들어 가는 거야. 은지니 내꺼라고,도장 찍으러. 은지니, 김현광 여자라고 못 박아두러. 그러려고.] ["...만약 니가 지금 내 앞에 있었더라면. 아마 널 죽였을꺼야,김현광."] 콰득.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친 지니는 불같은 눈을 하고서 전화기를 힘껏 밟았습니다. 전화기의 파편이 튀어 발바닥이 따끔따끔.아플텐데도 힘껏 밟았습니다. 하악하악.한참 후, 지니가 숨을 몰아쉬며 발길질을 멈췄습니다. 피가 베어나올정도로 꽉.입술을 짓누른 지니는 간단한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집 밖으로 나와 뛰기 시작합니다. 언젠가 윤서가 알려줬던대로 심장을 비우기 위해서. 깨끗히 버리기 위해서 숨이 멎을 때까지. 오늘도 지니는 달립니다. ......... 지니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현광이와의 짧지만 강한 통화와, 온 몸이 흠뻑 젖을만큼 힘겨운 달리기로.. ※아침11시. 느긋하게 학교에 들어선 지니는 이미 모든 걸 포기한 담임에게 손쉽게 조퇴증을 끊어, 들어간지 1시간도 안되 다시 학교를 나왔습니다. 학교를 나와 길거리를 쏘다니며 지니가 하는 일이라곤 오로지 시비를 거는 일밖엔 없습니다. 한시간마다 걸려오는 전화가 지니를 미치게합니다. 쉴틈없이 날아오는 문자들이 지니를 돌게합니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 쳐박아둔 핸드폰은.현광이가 선물해준 최신형 핸드폰은.. 항상 지니의 눈을 붉게 만듭니다. "씨발.. 눈깔을 어따 박고다니는거야, 새끼야??" "아.미안하게 됐습니다,근데 말이 쫌 심하네요." "내가 말을 심하게 하던 말던 보태준 거 있어,이 개새끼야!!!!" 살짝 어깨를 치고간 사내를 향해 지니가 주먹을 내지릅니다.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꼭 이렇게 크게 불리고야 마는 지니입니다. 사내와 싸움이 붙은 지니를 보며 지나가던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미친개가 떴다!!.. ........... ※오후 4시. 오늘 하루에만 벌써 5번의 크고작은 싸움을 일으킨 지니의 발걸음이 연오가 다니고 있는 제화상고로 향했습니다. 교문에 기대 연오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는데, 곱상하게 생긴 여자애 둘이 지니의 앞을 지나쳐가며 내뱉어서는 안될 말을 내뱉고야 맙니다. "영심아,너 그거 아노?? 체고 최필립있재??.. 그 칠성에 최필립말이다." "응,알재. 유명하잖아, 이 일대에서. 싸움 잘하고, 성격 좋고, 쌍판 쥐기고~ 그만한 머스마가 없재." "어야.근데 그 최필립이가 미친개하고 사귄단다!!.. 어제 1반 광자한테서 들었는데,쇼킹하지 않나?? 최필립만 불쌍하게 됐재,어쩌다 미친개한테 걸려가꼬.." "그르게나 말이다. 그나마 칠성에서 제일로 된 노마였는데." 억센 부산 사투리를 내며 재잘재잘.떠드는 여자애들의 목소리에 지니의 눈매가 흠칫.굳어집니다. 최필립. 부산에서 지니를 처음으로 웃게 만든 아이입니다. 칠공주 아니면 부드러워지지 않는 지니의 눈매를 처음으로 부드럽게 만든 아입니다. 제화체고 최고의 에이스. 부산연합 칠성의 멤버. 신랑으로 삼고 싶은 남자 1위등. 휘향찬란한 수식어들이 항상 따라다니는. 남자답게 생긴 몸과는 달리 착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예쁜 아이가. 어느순간 지니도 모르게 가슴으로 스며든 그 아이가 바로 저 여자애들이 말하는 최필립입니다. .......까득.주먹을 말아쥔 지니의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습니다. "야." "뭐꼬,야는??" 지니의 부름에 가는 길을 멈추고 돌아선 영심이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터벅터벅.영심이에게 걸어가는 지니의 주머니에서 순간 빨간빛이 터졌습니다. 아마 현광이겠지요??.. 지니는 받을 가치도 없다는 듯 주머니의 핸드폰을 무시하고 영심이의 코 앞에 다가섰습니다. "최필립 이름,함부로 부르고 다니지 마라." "하.니가 뭔데 참견이가?? 니가 그 미친개라도 되나??.." "최필립. 함부로 주둥이에 달지말라면, 달지말 것이지 잔말이 많아 왜 이렇게!!!" 퍽. 지니의 강한 펀치에 영심이의 코뼈에서 우득.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꺅소리를 지르며 코를 감싸쥐는 영심일 싸늘한 눈초리로 쏘아보던 지니는 주먹질로도 모자라,발길질까지 하기 시작했고. 결국 근처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빈 맥주병으로 영심이의 머리통을 후려치고나서야 영심을 놔주고야 말았습니다. ......비명을 듣고 달려온 선생님들에게까지 주먹질을 하고,주변에서 말리는 학생들의 얼굴에 기다란 상처를 남겨주고. 제화상고 앞에서 한참 난동을 부리던 지니가 모든 행동을 멈춘 건. 요란한 싸이렌소리와 함께 파란옷을 입은 포돌이가 들이닥쳤을 때였습니다. 하악하악.거친 숨을 토해내며 지니의 피묻은 주먹에 은색의 수갑이 채워집니다. ....너무 자주타 이젠 자기차처럼 느껴지는 경찰차에 올라탄 지니는 가죽시트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습니다. "가스나 너는 어째 하루가 멀다하고 사고를 치노,사고를. 너때문에 우리 파출소 전화통이 쉴 틈이 없다아이가!!" 밉지않게 눈을 흘기며 잔소를 늘어놓는 포돌이 아저씨의 말은 이미 지니의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지니는 떠올렸습니다. 예전엔 현광이 하나였는데,오늘 보니 현광이 하나뿐이 아니였나봅니다. 활짝 웃고있는 필립이의 얼굴을 떠올리는 지니의 얼굴이 슬프게 구겨집니다. ........... 미칠만큼 지겹고,증오스러운 현광이가 지니를 미친개로 만드는 유일한 이유였는데.부산에 내려와 필립이를 만난 뒤로는 그 것마저도 아니게 됐습니다. 현광이의 전화와 문자만 보면 전기가 팍.하고 나가듯 사고회로가 터져버리는 지니였는데,이제는 필립이의 이름까지 더해지고만 것입니다. ....누가 이 불쌍한 미친개를 멈추게 해줄 수 있을까요. 지니를 죽도록 사랑하는 현광일까요. 아님 지니를 웃게 해줄 수 있는 필립일까요. 파출소로 향하는 내내 지니의 감겨진 눈은 떠지지 않았습니다. ............. ※오후8시. 부랴부랴 달려온 연오와 효선이가 사건을 수습하고 지니와 함께 파출소를 나오는 길. 효선이의 안쓰러운 눈길과 연오의 복작한 눈길이 한데 뒤엉켜 지니의 상처난 얼굴 위로 다가왔습니다. "....언제까지 이럴꺼니." "작작해,기지배야. 인천으로도 부족해서,부산까지 와서 미친개소릴 듣고 살고싶어??" 따뜻하지만 뼈가 담긴 효선이의 목소리와 앙칼졌지만 걱정스러움이 담긴 연오의 목소리가 지니의 인상을 찌푸리게 합니다. "..김윤서가 어떻게 알고 김현광 찾아가서 패 죽여버리기 전에 너가 먼저 정리해. 이연이하고 리아,그리고 효선이랑 나. 방금까지 윤서가 친 사고 수습하고 오는 길이야. 가뜩이나 위태로운 기지배,니 손으로 밀어버리고 싶어??" 누구보다 지니의 마음을.죽여버리고 싶을정도로 미워도 현광이를 절대 떼어낼 수 없는 지니의 슬프고도 지독한 마음을 알고있는 연오가 소리칩니다.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기에.그렇기에 더욱 가슴이 아픈 연오가 소리칩니다. ......... 어두운 밤거리. 반짝이는 네온사인. 파출소 앞에 선 지니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습니다. "....씨발. 세상 참 좆같다.." ................. 그렇게 지니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주먹으로밖에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수 없는 불쌍한 미친개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갑니다. 죽을만큼 미친개를 사랑하는 아이와. 얼어버린 미친개의 심장을 녹여준 아이와. 목숨보다 더 소중한 친구들과 함께한 미친개의 하루는 슬프도록 지겹게. 잔인하도록 아프게. 그렇게 어두운 막을 내립니다. 4-77(2) <특별번외>전설의 하루 ※아침9시. 아침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한영이가 부르르.눈을 뜹니다. 부시시하게 뜬 머리를 긁적이며 이불 속에서 빼꼼.고개만 내민 한영이가 TV화면에 뜬 시간을 보고는 낮게 한숨을 내쉽니다. 어차피 공부하려고 다니는 학교도,늦는다고 뭐라고 할 선생도 없지만 그래도 한영인 주섬주섬.일어나 학교를 갈 준비를 합니다. ........... ※아침10시23분. 찰칵.현관문을 잠그고 돌아서는 한영이의 모습에 우연히 복도를 지나가던 901호 아가씨의 얼굴이 새빨개졌습니다. 어쩜. 교복을 입어도 이렇게 멋질 수가 있는 걸까요??.. 하트로 변해버린 901호 아가씨의 눈을 아는지,모르는지 한영인 기다란 하품을 하며 비상구로 향했습니다. 빠르게 계단을 뛰어내려 금새 1층에 도착한 한영인 한영이의 오토바이와 함께 아파트 주차장에 서있는 한 아이에게 터벅터벅.걸어갔습니다. "후우.시스터, 학교는 잘 갔어??" "예.광진이 말로는 가는 길에 두어번 시비가 붙었다는데,다행히 상처는 안 남으신 거 같답니다." "오야,수고했다. 하교길에는 잔챙이 안붙게 잘 챙기고, 이상한 낌새 보이면 바로 연락하라고 말해라." "예." "...참, 무성아." "예?" 오토바이에 올라탄 한영이 갑자기 아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한영이에게 반질반질. 잘 닦아놓은 오토바이를 건네주면서 윤서의 하루 일과를 보고해야되는 임무를 가진 그 아이, 무성이는 처음 듣는 한영이의 다정한 목소리에 동그래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습니다. "..달리더러 우리 시스터 마음 많이 뺏지 말라고 전해. 우리 시스터는 뒷통수가 약하니깐.. 쓸떼없는 뚜쟁이 노릇도 관두고,어설픈 친구 노릇도 다 관두고 그냥 옆에서 지키라고. 알았지??" "예." "....만약 그거 어기고 우리 시스터 뒷통수 아프게하면." 윤서의 이야기를 들을때면 굳게 굳은 얼굴도,차갑게 보이는 눈매도 둥글둥글.모나지 않게 휘어지는 한영이의 얼굴이 순식간에 전설이라고 불리는 남자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한영이에게서 느껴지는 오싹함에 무성이의 등 뒤로 싸늘한 식은땀이 한줄기 흘러내립니다. "김한영한테 죽어." "아,예에.." "그래. 수고했어,너도 이만 가봐라." 투닥투닥.잔뜩 긴장이 선 무성이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한영이가 키를 꽂았습니다. ..........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달리는 동안,한영이는 윤서를 생각합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유일한 동생,윤서를요. 아장아장.걸으며 예쁜 입술로 '옵빠옵빠-'하고 부르며 달려오던 작은 윤서에서부터, 초등학교 졸업식날. 오지않는 엄마아빠를 대신해 간 자신의 품에 안겨 펑펑 울던 윤서를 지나. 죽여버리고 말겠다며,슬프도록 처절하게 악을 쓰는 다 큰 윤서까지. 한영이의 눈가에 살짝.물기가 어립니다. "나중엔 다 괜찮을꺼야. 쪼끔만,아주 쪼끔만 버티면.. 우리 아주 쪼끔만 더 아프면.. 괜찮을꺼야,윤서야." 위험스럽게 차선을 넘나들며 학교에 도착한 한영인 학교 뒷구석에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반으로 향했습니다. 올해 20살인 한영인 다른 20살과는 달리 아직도 고등학교엘 다닙니다. 남들은 한번만 다닌다는 3학년을 한영인 두번 다니게 됐거든요. 하지만 한영인 오히려 그게 더 좋다합니다. 아직은 더 싸울 수가 있어서요. 어른이 될랑말랑한 미묘한 나이,곪을대로 곪아 썩어들어가는 심장을 마음껏 쉬게 할 수 있어서요. 그리고 윤에게 멀리 떨어지지 않아도 되서요.그래서 한영인 3-11반이라는 숫자를 정겹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한창 수업 중인 교실. 당당하게 앞문을 열고 등장하는 한영일 보며 여자 아이들은 붉어진 얼굴로 '어머-어머'를 외쳤고, 남자 아이들은 존경스럽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습니다. 물론 선생님은 살짝 눈쌀을 찌푸리셨지만 말이예요. "늦어서 죄송해요,쌤. 오다가 오리똥을 밟아서 빨리 올 수가 없었어요." 개구진 얼굴로 한영이 웃으며 말하자,선생님은 알았다며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습니다. 고개를 까닥이고 자리로 걸어가 앉은 한영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 위에 붙여놓은 윤서의 사진을 보는 것이였습니다. 누군가가 닦아놨는지 맨들맨들.빛이 나는 윤서의 통통한 뺨을 보며 한영이 씨익.웃습니다. "우리 시스터,오늘 하루도 무사히!" 7살 윤서를 향해 눈을 찡긋인 한영인 그래도 책상에 엎드려 잠을 청합니다. 한영이는 아침이 싫습니다. 하루가 온통 밤이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루종일 잘 수있게 말이예요.하지만 그보다 한영이가 밤을 더 좋아하는 이유는.. 윤서 얼굴을 볼 수 있어서입니다. 아침은 너무 밝고,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 윤서를 몰래 보러갈 짬이 안나지만 밤은 다르거든요. 아주아주 어두운 밤이면 멀리서나마 윤서를 보고 올 수가 있습니다. 눈치가 빠른 윤서라 가까이는 못가지만, 멀리서라면 마음껏 보고, 시린 심장에 따뜻한 윤서바람을 마음껏 넣고 올 수가 있어서.그래서 한영인 하루가 온통 밤이기를 바랍니다. ............이제 다시는 보지 못할 윤서의 웃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오후5시. 점심급식을 세번이나 먹고서 학교를 나서는 한영이의 뒤로 한 무리의 아이들이 뒤따릅니다. 김한영 친위대라고도 불리고, 서울연합이라고도 불리는 아주아주 무서운 아이들입니다. 한영이의 말이라면 청와대에 쳐들어가 무궁화를 쌔벼올 수도 있는 아주 무서운 아이들이요. "..시스터는 뭐한대??." "예,학교에서 나오셔서 아지트로 가셨답니다. 간식거리를 많이 사가는 걸로 봐서는 아마 오늘 밤에 파티를 벌이실 모양입니다." "오와.좋겠네,파티도 하고. 넉넉하게 사겠어??.. 워낙 입들이 많아서 시스터한테 과자 한봉지나 돌아올지 모르겠다." "광진이가 잠깐 한눈 파시는 사이에 봉지에 먹을거릴 몇개 더 넣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자식,기특하네." 무성이에게 바통을 이어받은 무현이가 한영이의 옆에서 '실시간 윤서안내'를 합니다. 무현이에게서 윤서 얘기를 듣는내내 한영이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질 않습니다. 지나가며 한영이를 바라보는 여자애들의 시선이 수줍게 달아오릅니다. 하지만 그런 시선엔 무심한 한영인 오늘도 여전히 윤서 얘기에만 웃고,윤서 소식에만 미소를 짓습니다. .......... 서울연합의 아지트 '폭풍'. 폐건물 지하를 개조해 만든 아지트에 들어서며 한영이가 입에 문 담배를 발로 비벼끕니다. 윤서의 앞에선 담배 피우는 모습,보여주기가 싫었나봅니다. 폭풍의 가장 안쪽에 걸려있는 크게 확대된 윤서의 사진 앞.학교에서처럼 반갑에 인사한 한영인 가죽쇼파에 걸터앉았습니다. "왔냐??..오늘은 쫌 늦었다." "죄송합니다. 경기연합에 문제가 생겨서 잠시 다녀오는 길입니다." 서울연합의 넘버쓰리. 아석이 허리를 90도로 꺾어 인사를 합니다. 하암.하품을 하며 한영이 바짝 긴장한 상태로 뻣뻣하게 서있는 연합 아이들을 둘러봤습니다. "쇼파는 폼으로 사다놓은 주 알어??..작작하고 앉아서 쉬어라. 쉬기 싫으면 가서 당구나 치던가." "예." 한영이의 말에 원래 연합에 있었거나,한영이의 성격을 알고 있는 몇몇 아이들이 당구대로 향합니다. 하지만 연합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는 초짜들은 한영이의 카리스마에 눌려 당황한 얼굴로 서로의 얼굴만 바라 보고 있습니다. 후우.한심하다는 눈초리로 아이들을 쳐다보던 한영인 앞에 있는 넓은 테이블을 발로 후려치며 소리쳤습니다. "씨박들아,대가리는 폼이냐?!!! 가서 쳐 놀라고, 답답하게 시야 막지말고!!!" 그제서야 아이들은 후다닥.아지트 안에 위치한 여러가지 운동기구나 게임기구의 앞으로 달려갑니다. 병신새끼들. 나지막히 욕설을 내뱉으며 한영이 박하사탕을 꺼내 먹습니다. 윤서 앞에서는 이렇게 담배 대신 항상 박하사탕을 먹는 한영이입니다. "저..선배님." "어." "가람이가 부산에 갔다는데,들으셨습니까??" "...강안이가 어제 전화했어." "저..이대로 두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아가씨께 잘못 입을 놀렸다간-" "가람이 그렇게 멍청한 새끼 아니다,아석아. 넌 부산 걱정 하지말고 문제 있다는 경기연합이나 신경써라." "예." 까득. 느긋한 성격이 못되는 한영인 말하는 사이 사탕을 깨먹고,두번째 사탕을 꺼내 입에 물었습니다. 아지트 안을 메운 아이들의 색색깔의 머리통에 시선을 두며 한영이 입을 엽니다. "아석아." "예." "김한영 전설이 언제쯤 깨질 거 같냐??" "예??" "너희가 대단하다고 떠받는 김한영 전설을 우리 시스터가 언제쯤 깨줄 거 같냐고." "......선배님이 아가씨 생각하시는 마음은 알지만, 그런 일은 없을겁니다." "그런 일은 없다라..우리 시스터 실력은 누구보다 네가 더 잘알면서 무슨 그런 섭한 소릴 하냐." 순간 한영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습니다. 인천에서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한영을 지켜봐왔던 아석으로썬 그 눈빛이 의미하는 바가 뭔지 잘 알고 있었지만,이번만큼은 쉽게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한영이에겐 끔찍하게 아끼는 동생이지만, 서울연합으로써 윤서는 눈엣가시일 뿐이다. 한영인 윤서에게 개박살나는 날을 기대하지만, 서울연합으로써는 한영을 향한 윤서의 불타는 복수심은 미리 꺼버려야 할 불쾌한 존재일 뿐이다. "...아가씨가 선배님께 어떤 의미인지는 누구보다 제가 더 잘 압니다.하지만 그만큼 연합도 선배님께 큰 의미 아닙니까??.. 지금 아가씨가 그렇게 잡고싶어하시는 하늘, 얼마전까지만 해도 선배님의 최고 꿈이였습니다. 그리고 그 얼마전까지만 해도 아가씬... .......선배님께 연합보다 작은 의미였잖습니까." 퍽. 아석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한영이의 주먹이 아석이 얼굴에 닿았습니다. 붉은 핏방울이 아석의 코에서 주르륵.쏟아져 내리고.. 둘의 심상치않은 분위기에 서울연합의 넘버파이브, 강호가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왔습니다. "무슨.." "말 함부로 하지마라,반아석. 누구보다 날 잘안다는 새끼가 감히 그따위로 주둥이를 놀려??.." "저희에게 선배님은 하늘입니다.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평생을 두고 모실 전설이라는 말입니다!! 그런 선배님을 조지겠다는 아가씨,전 단 한번도 좋게 여긴적 없습-" 쿠당탕. 테이블이 엎어지면서 자리에서 일어선 한영이 아석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주먹을 날립니다. 당황한 강호가 한영을 막아보지만,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한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였습니다. 몇명의 아이들이 달려들어 한영이를 말렸지만,한영의 주먹을 멈추지 않았고.. 아석이 피투성이가 된 채 반쯤 눈을 감자 한영이의 주먹질이 멈췄습니다. "....너희가 날 하늘로 여기면서 떠받드는 만큼,아니 그 이상 나도 너희가 소중하다.하지만 그때도,지금도 시스터만큼은 아니다. 섭섭하다고 떠날 새끼들은 떠나,잡지 않을테니. 하지만 다시 한 번 내 앞에서 시스터 이름 들먹이면, 그땐 다리하나 부러질 각오하는 게 좋을꺼다." "...선배님...쿨럭.." 후배에게 몸을 기대 배를 움켜쥔 아석이 괴로운 얼굴로 한영을 불렀습니다. 감정없이 메마른 눈으로 아석을 돌아보는 한영이. 아석의 눈동자에 얼핏.슬픔이 어립니다. "선배님을 위해.. 죽을 수도 있습니다.선배님이.. 시키시는 일이라면... 목숨을 다할 겁니다.. 하지만.. 아가씨는 안됩니다.. 제 하늘이... 무너지는 모습. 일부러... 아가씨게 박살나려는 선배님의 모습... 보고싶지 않아요... 형...한영이 형.. 제발.. ...그러지..크억!!.." 갈비뼈가 부러졌는지 아석이 컥컥거리며 바닥을 뒹굴었습니다. 그 중 눈치빠른 아이가 아석을 업고 급히 병원을 향해 달려갔고,지친 얼굴을 쓸어내린 한영이 다시 쇼파에 앉습니다. 강호의 걱정스러운 시선을 뒤로하고 한영이 눈을 감았습니다. "...그래.나도 너희들을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고, 목숨을 버릴 각오도 됐기때문에 여기까지 올라온 거다. 하지만.. 내가 너희들을 위해 그렇게 달려올 동안... 내 하나뿐인 동생은.. 눈에 넣어도 안아플 소중한 내 동생은... 상처난 심장을 안고 살아왔다. 타버린 심장을 안고.. 개같은 이 세상.. 꾸역꾸역 버텼다. ....그런 동생에게.. 아무 것도 해줄 게 없는 난.. 이제 내 목숨을 주고싶다.내 만족을,너희들의 마음을 채우기 위해 달릴동안 다친 내 동생에게.. 이젠 내 세상을 주고싶다. 내가 가진 하늘을.. 동생의 아픈 심장에게 주고싶다..." 그 자리에 있던 아이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솟구쳐 올랐습니다. 한영이의 가슴을 적시는 말에.도저히 삼킬 수가 없는 뜨거운 불덩이가 아이들의 마음을 태워버렸습니다. 활활.재도 남기지 않고 붉게 태워버렸습니다. .......... ※오후12시58분. 어두운 집에 들어선 한영은 불도 켜기 전에,컴퓨터의 전원을 켰습니다. 바탕화면을 가득 채우는 윤서의 사진을 향해 다녀왔단 인사를 남기고,인터넷창을 연 한영인 메일을 확인합니다. ....무성이에게서 메일이 와있습니다. [....오후8시. 칠성과 시비가 붙으심. 오후8시38분. 화강안과 만남. 오후8시59분. 선우권등 칠성의 멤버와 만남. ....오후9시13분. 길거리에서 제화고 남학생과 시비가 붙음. 오후9시20분. 친구분께서 제화고 남학생과 대신 싸움. ....오후11시50분. 무사히 귀가.] 빙그레.메일을 읽는 한영이의 입가가 예쁘게 휘어집니다. 첨부파일로 딸려온 윤서의 사진들을 보며 한영이의 눈동자가 흔들립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윤서를 보는 한영이의 가슴이 웁니다. "...나때문에 살아서 다행이야..나때문에 죽지않고 버텨줘서 다행이야.. 이쁘게 살아,시스터. 기꺼이 내 목숨 줄테니까.. 그때까지.. 그 이후로도... 이쁘게.. 웃으면서...." 달깍. 메일창을 끈 한영인 자꾸만 떨리는 손으로 뜨거워진 얼굴을 쓸어내리고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교복을 갈아입고 트레이닝룸으로 들어온 한영인 온 몸이 땀에 젖을 때까지. 가슴을 가득 메운 눈물을 땀으로 다 내보내 가슴을 깨끗히 비울 때까지. 샌드백을 두드립니다.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어둠이 잠길 때까지. 그러다 지쳐 잠이 들면 내일 또 아침드라마의 시작과 함께 눈을 뜹니다. 무성이에게 윤서의 아침 일과를 전해듣고, 졸업장을 따기위해 학교를 갑니다. 학교가 끝난 뒤엔 무현이에게서 윤서의 오후 일과를 듣고 아지트에서 하루를 보냅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무성이가 보낸 윤서의 사진을 보고 하루를 마칩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삼일이 가고,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갑니다. 한영이의 시간을 그렇게 매일.되풀이 됩니다. 전보다 한껏 자란 윤서가 다시 그를 찾아 올 때까지. 한영이의 시간은 그렇게 매일매일.그리움으로 시작해 그리움으로 끝납니다. ............. 김한영은 전설입니다. 인천에서도 서울에서도,그리고 이젠 전국에서도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한 최고의 전설. 중학교 2학년 때 인천연합을 만들었고. 중학교 3학년 때 78:1로 싸워서 이긴적이 있고. 그 해 겨울. 조폭들과 시비가 붙은 친구를 위해 기꺼이 주먹을 들었고. 고등학교 1학년 때 인천연합을 전국서열 1위로 올렸고. 고등학교 2학년 때 후배들을 위해 교장실 앞에서 무릎을 꿇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 서울연합을 만들었고. 서울연합을 만든지 일주일만에 전국 최강자들만 모였다는 서울을 통합했고. 그 해 인천연합을 제외한 전지역의 연합을 깼고. 두번째 맞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전국연합을 조직했고. ....지난 수년간 부동의 전국서열 1위를 차지한 살아있는 전설이 바로 김한영입니다. 우는 아이도 뚝 그친다는 김한영의 전설은 여전히 유명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하지만 한영이는 압니다. 자신이 그런 전설이 될 동안 숨죽여 울던 한 아이를. 상처난 가슴을 안고서 마지막까지 자신을 믿었던 한 아이를. 자신때문에 모진 생활을 버텼던 한 아이를. .......매일매일 궁금하지만,결국 오빠란 이름으로 앞에 나설 수 없는 한 아이를. 전설의 길을 택한 그 순간부터 죽어서도 떳떳하게 안아줄 수 없는 한 아이를. 한영이는 압니다. 그래서 울지 못합니다. 그래서 한영이의 가슴엔 항상 눈물이 넘쳐납니다. 눈으로 울지 못하는 한영이의 가슴엔 항상 눈물이 넘쳐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그는 자신을.하늘을.그의 친구를. 후배를.동료를.선배를 위해 싸워왔습니다. 그들을 위해 달렸고, 그들을 위해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바랍니다. 전설은 바랍니다. ............ 그의 동생이 이젠 새로운 전설이 되길. 자신과는 달리 남을 잘 웃길 주 알고,자신도 잘 웃을 주 알며 사랑스러운 그의 동생이. 그를 넘어 새로운 전설이 되길. 자신의 뒤를 이어,살아있는 진정한 전설이 되길. 전설은 어제도,오늘도,내일도 그리고 내일모레도. 그 내일모레의 또 내일도 바랍니다. 4-77(3) <특별번외>칠공주의 하루 ※새벽4시. .... 새벽2시에야 겨우 잠이든 효선이의 두 눈이 번쩍.떠집니다. 겨우 2시간밖에 잠을 못잔 사람이라고는 생각치도 못하게 멀쩡해 보이는 효선인 자리에서 일어나 대충 씻은 뒤, 책상에 앉았습니다. 그리고선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영어로 쏼라쏼라.쏟아져 나오는 단어들을 열심히 입으로 되뇌입니다. 밤과 겨우 2시간 차이밖에 나지않는 효선이의 아침은 이렇게 누구보다 가장 일찍,그리고 가장 빠르게 시작됩니다. (※새벽6시. 온통 레이스 투성인 침대 위.인형처럼 잠을 자고 있는 연오가 보입니다. 띠리링.똑같은 가게에서 파는 알람시계라도 연오의 알람시계는 뭔가 다른가 봅니다. 연오를 닮아 참 예쁘게도 울리는 알람소리에 연오의 눈꺼풀이 파르르.떨렸습니다. 달깍.공주모양의 알람시계의 버튼을 누르며 잠이 깬 연오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폅니다. 일어나자마자 침대 위,테이블 위에 있는 거울을 집어든 연오는 밤새 푸석푸석해진 얼굴을 쓸어내리며 작게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침대에서 내려온 연오는 30평은 족히 넘을듯한 방 안에 위치한 욕실로 들어갔습니다. 쏴아.. 칠공주 중에서 세번째로 일찍 일어나는 연오지만 집을 나서는 시각은 항상 가장 늦게 일어나는 윤서와 똑같습니다. 왜냐면 연오는 아침에 할 일이 참 많은 아이거든요. 프랑스에서 직수입해 온 목욕샴푸로 샤워도 해야하고, 드라이기로 머리도 셋팅해야하고, 손톱정리도 해야하고.. 정말이지 쓸떼없는 할 일이 참 많은 연오입니다.) <※새벽6시30분. 리아와 아라가 동시에 눈을 뜹니다. 눈을 뜨자마자 서로를 바라보는 리아와 아라의 입가에 살포시 미소가 어립니다. 평소 품행이 단정하고, 모범생으로 소문난 리아와 아라는 부산에 내려온 뒤.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특별히 같이 살게 됐습니다. 품행이 가장 불량해 문제아로 제대로 찍힌 윤서는 가장 감시가 심하다는 경찰청장님네 댁에. 적당한 연기로 그냥 문제아로 찍힌 지니와 이연이는 그보다 조금 덜한 경감님데 댁에.대단한 빽을 가지고 있는 연오와 효선이는 따로 어른들께서 마련해주신 집에서 지내고 있는데 비해 두 사람의 동거는 꽤 특별하다고 볼 수 있지요. 칠공주 중 유일하게 어른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는 증거이니깐요. 아라가 아침준비를 위해 부엌으로 들어간 사이,리아는 아라와 자신이 입고갈 교복을 준비해놓습니다.> ※아침7시. 효선이가 집에서 나오자마자 자전거를 탄 한 남자아이 하나가 기다렸다는 듯이 효선이의 앞으로 달려옵니다. 빨간 자전거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그 남자아인 효선이에게 장미꽃 한송이를 건네며 수줍게 웃었습니다. 보기만해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을정도로 귀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바라보는 효선이의 얼굴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습니다. "이럴 시간 있으면 단어 한자라도 더 외워,천상아." "난 단어 한자보다 누나가 더 좋은데요." "..후.남동생뻘 되는 애하고 연애하고 싶은 마음, 예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분명히 말했잖아." "내가 왜 누나 남동생이예요? 난 재천상이라구요. 누나 남동생이 아니라 재천상. 누날 좋아하는 재천상!" 후우. 짧은 한숨을 내쉬며 효선이가 천상이에게 받은 꽃 한 송이를 다시 자전거 바구니에 집어넣습니다. 부산에 내려온 뒤,정확히 말하자면 새로 다니게 된 학교에서 천상이와 만난 뒤로부터 계속되온 아침의 고백타임이 영 달갑지 않은 효선입니다. 화가난듯 붉어진 천상이의 얼굴을 보는 효선이의 표정이 살짝 굳어집니다. 리아와 맞먹을정도로 감정 기복이 없는 효선이가 짜증을 내고 있습니다. 가장 눈치가 빠르다는 윤서조차도 감을 못잡을정도로 미약하게 뿜어져나오고 있는 효선이의 짜증지수를 용케도 알아낸 천상이가 금새 표정을 풀고 베시시. 웃었습니다. "누나.그만 짜증내고 학교 가요." "...부탁인데. 아침마다 니 얼굴, 안보게 해줬으면 좋겠다." 효선이의 탐탁치않은 한마디. 풀죽은 강아지처럼 천상이가 시무룩해집니다. 그 모습에 순간 가슴이 따끔한 효선이였지만, 아무런 내색하지않고 앞장서 걷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천상이가 조심스럽게 따릅니다. <※아침7시40분. 아라와 리아가 사이좋게 집을 나섭니다. 오늘도 윤서의 걱정으로 얘기를 나누던 아라와 리아의 앞으로 검은 그림자가 한개 드리워졌습니다. "하이,리아." "반계율." "리아 친구도 하이??" "아,예." "너 이게 뭐하는 짓이야." 리아가 싸늘한 눈초리로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선 계율이를 노려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벌써 기죽고도 남을 리아의 싸늘함 앞에서 계율인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습니다.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오늘도 역시나,아라가 먼저 자리를 뜹니다. 종종걸음으로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아라의 뒷모습을 보며 인상을 험악하게 구긴 리아가 계율이의 정강이를 힘껏 후려찹니다. "반계율,정말 싫다." 칠공주들한테는 남자 알레르기라도 있는걸까요. 리아는 40분 전,효선이처럼 굳은 얼굴로 계율이를 향해 따끔한 일침을 놓고는 학교로 향합니다.> (※아침9시35분. 끼익.드라마에서나 나올법한 검은 철제문이 열리며 반짝반짝.빛이 나는 연오가 걸어 나옵니다. 그와 동시에 몇시간 전부터 연오를 기다리던 남자들이 순식간에 연오의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혹 연오가 다칠세랴 어느정도 거리를 둔 남자들의 선물공세에 연오는 방긋.웃으며 감사를 표합니다. 몇명의 남자들이 코피를 쏟으며 자리에 주저앉습니다. 놀라운 주연오의 파워. "오늘은 좀 걷고 싶은데.. 내일 다시 뵈요." 나긋나긋.남자들의 심장을 설레게 하는 연오의 목소리에 코피를 쏟는 남자들이 하나둘,더 늘어납니다. 연오를 학교에 데려다주기 위해 남자들이 가져온 자전거와 오토바이,스쿠터에 자동차.그리고 킥보드까지.. 담벼락을 가리고 서있는 교통수단들을 유유히 지나쳐 가는 연오의 뒤로 남자들의 하트눈빛이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뒷모습을 보이며 걷는 연오의 얼굴은 무섭기 그지없습니다. ....바보같은 놈들. 연오는 비웃음을 가득 담은 콧방귀를 끼며 학교가 아닌 강안이의 집 앞으로 향했습니다.) <※오후1시. 제화국고의 점심시간입니다. 리아는 샛노란 금발머리가 무척이나 매력적인 Julia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새로 온 초짜선생님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 받으며 식당에 들어선 리아의 안색이 흠칫.하고 굳습니다. .....제화동에서 제일 시설이 좋다고 소문난 제화국고의 식당이 썰렁할정도로 휑.합니다. 그리고 텅텅 비어있는 식당의 한가운데에는 멀리에서도 눈에 확.튀는 계율이가 두 개의 식판을 준비해놓고 앉아있었습니다. 보나마나 계율이 짓이겠지요. 쓰레기통이라도 뒤집어쓴 듯,리아의 인상이 구겨집니다. "반계율,내가 점심시간마다 이런 짓 하지 말라고 했지??.. 내 말이 우습니?.." "하지만.. 리아, 너 시끄러우면 밥 잘 안 먹잖아." "내 일이야. 밥을 처먹든,못 처먹든 내 일이라구!! 왜 니가 거기에 간섭인데??.." "내가 너 좋아하니까." 얼굴이 빨개질정도로 흥분한 리아와 달리 싱글벙글.잘도 웃는 계율이의 모습에 Julia가 당황한 얼굴로 리아와 계율이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봅니다. 제화동을 넘어 부산에서 명성이 자자한 제화국고의 짱,반계율. 전학온지 단 한달만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지지를 받아 제화국고의 학생회장이 된 정리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이름이지만, 얼굴만큼은 서로 기가막히게 잘 어울리는 게 참 신기합니다. 연예인에 비교를 하자면 김태희,원빈 커플이 바로 정리아,반계율 커플이거든요. 당황스러움과 함께 신기함이 가득 담긴 Julia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율의 앞으로 걸어간 리아는 도도하게 턱을 치켜들고 말했습니다. "너 연봉5000돼?? 나보다 머리에 든 거 많아??..것도 아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있길해,집이 빵빵해??" "어??어..글쎄. 근데 연봉이 뭐냐??.. 동화책인가?..." "이것봐. 이래서 난 니가 싫어,반계율. 무식하고,능력도 없고, 미래에 대한 생각도 없고..요란한 머리에다 맨날 학생부에 끌려가고. 무엇보다 넌!!... 김윤서랑 똑같애. 밥먹듯이 싸움질을 하면서도,자기가 왜 그 짓을 하고 있는질 몰라. 허구언날 다치면서도 그만둘 줄을 모른다구. 김윤서가 너보다 더 심하긴 하지만..그래도 너같은 애 정말 질색이야!!" 서슬퍼런 독설에도 불구하고 계율이의 눈에는 화가난 리아까지도 너무 예뻐보입니다. 조막만한 얼굴에 살짝 치켜 올라간 눈매가 어쩜 저렇게 섹시할 수가 있지요??.. 계율이의 눈동자가 하트로 뿅.변합니다. "...근데 김윤서가 누구야??너 친구?" "정말. 구제불능이구나 너? 지금 니가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볼 상황이야?!!!.." "근데 이름이 꽤 낯익다??.. 김윤서,김윤서.. 아!! 제화예고 짱! 맞지,걔??" 칭찬이라도 받고싶은지 눈을 초롱초롱하게 반짝이며 묻는 계율이의 모습에 할 말을 잃은 리아가 허탈하게 웃습니다. 어의없어 웃은 것도 좋다고 계율이가 따라 웃습니다. 리아가 하는 거라면 뭐든지 다 예쁘게만 보이는 계율이의 착한 마음을 리아는 언제쯤이면 알아줄까요.> (※오후6시8분. 제화남고 교문 앞. 교문을 나서는 제화남고 학생들의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제화남고 학생들은 억.소리 나게 예쁜 연오의 모습에 놀라고, 그 뒤로 쫘르륵.서있는 또다른 남자들의 모습에 또 한번 놀랍니다. 하지만 무심하게도 그런 남학생들에게 눈길 한 번 안주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기다리던 연오의 눈에 낯이 익은 아이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연오는 곧이어 아이의 이름을 기억해내고 손을 흔들었습니다. "한솔아!!.." "에..예??.. 아. 연오누나,안녕하세요." 연오의 부름과 동시에 쏟아져오는 남자들의 부리부리한 눈빛에 놀란 한솔이 눈을 꿈벅이며 얼떨결에 연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한솔인 칠공주가 부산에서 지낼동안 윤서의 남동생이 된 아이입니다. 하얀 덧니가 깨물어주고 싶을만큼 귀여운 한솔이의 머리를 쓱쓱.쓰다듬으며 연오가 대견스럽다는 듯 웃었습니다. "지금 집에가니??.." "아뇨.독서실에 들렸다가.. 근데 여긴 어쩐일이세요??" "아.우리 자기가 이 학교 다니거든. 윤서가 요즘 너 걱정 많이하더라. 거의 밤이 다되서 집에 간다며. 윤서 고 가시네가 너 납치되면 어떻게 하냐고 아주 난리가 아냐." 호들갑을 떨던 윤서의 모습을 떠올리는 연오의 입가가 포근하게 휘어집니다. 정말.. 사람이 예뻐도 이렇게 예쁠 수가 있는 건가요??.. 여자라면 윤서밖에 모르는 한솔이조차 숨을 쉬기 힘들정도로 예쁜 연오의 미소에 수많은 남자들이 쓰러졌습니다. 2분뒤. 한솔이를 배웅하고 돌아선 연오의 눈에 그렇게도 기다리던 얼굴이 보였습니다. 저절로 지어지는 함박웃음. 연오는 팔짝팔짝.이연이처럼 뛰어대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자기야!!..오늘 하루 어땠어??" "씨발.꺼져." "윤서가 그랬는데... 사람은 촛불이 아니여서 꺼질 수 없대.나도 사람이니까 당연히 자기 앞에서 꺼질 수가 없는걸?? 그니까 자기가 날 받아들이는 게 빠를꺼야." "....죽고싶지 않으면 니 추종자들 데리고 빨리 꺼져." 강안이의 위협적인 협박에 연오가 귀엽게 볼을 내밀며 입술을 비죽였습니다. 보통 남자들은 연오의 눈웃음 한방이면 갑니다. 보통보다 쬐끔 높은 남자들은 연오의 목소리 한방이면 갑니다. 보통이 아닌 남자들은 연오의 애교 한방이면 갑니다. 근데 이 남자,화강안. 연오가 달콤함이 뚝뚝.떨어지는 눈웃음을 쳐도. 꾀꼬리도 울고갈 낭랑한 목소리로 불러도. 코피가 터질만큼 앙증맞은 애교를 떨어도 도통 움직이질 않습니다. 아무리 죽이고 싶은 적이라도 남자라면 한번쯤 넘어올 법도 한데 말이죠. "질투하는거지??.. 걱정마,자기. 요즘 주연오 눈엔 자기밖에 안보이니깐." "...더러운 계집애." "더럽다구?? 나 씻었는데. 킁킁,냄새 나?.." "김윤서랑 어울려 다니더니,그 년이랑 똑같아졌구나 너도. 사람 우습게 여기는 거.더럽고 역겨울 정도로 똑같아서 신물이 난다.진짜." 순간. 거짓말처럼 연오의 눈가에 주렁주렁.매달려 있던 웃음기가 싹.가셨습니다. 연오를 봐온 지난 몇 년간 단 한번도 본 적없는 싸늘한 모습에 강안이 당황했는지 잠시 얼굴을 굳혔습니다. 하지만, 이내 코웃음을 치며 연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강안입니다. 사람 무안주기로 따지자면 지니와 맞먹고, 사람 개똥취급 하는 걸로 따지자면 리아와 맞먹는 아이가 바로 화강안이란 아인데 연오의 변화에 그렇게 쉽게 무너질리가 없죠. "...화강안아." "..." ".....주연오가 미치게 좋아하는 화강안아. 뭘해도 다 괜찮은데. 너가 하는거라면 뭘해도 다 멋지게 봐줄 수 있는데... 윤서는 들먹이지마. 윤서 그렇게. 그렇.. 후. 아,미안. 미안미안.. 이 상태로 계속 입 열다간 후회할 꺼 같애. 후와..오늘은 먼저 갈께,자기. 빠빠이." 빙글빙글. 터져오르는 화를 꾹꾹.눌러담은 연오가 떨리는 입가로 애써 미소를 지어주고 돌아섰습니다. 후들후들 떨리는 주먹을 악.쥐고 걸어가는 연오의 커다란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두둑.튀어나옵니다. 우는걸까요? 가늘게 떨리는 연오의 어깨를 보는 강안이의 눈빛이 씁쓸하게 젖어갔습니다. ........ 만약 강안이가 진짜 사랑이 아니였음. 연오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진짜 사랑이 아니였음. ....아마 강안인 쥐도새도 모르게 끽.해서 염라대왕과 하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보통 아니게 예쁜 연오는 화를 내도 역시 보통 아니게 화를 내거든요. 어지간한 강심장이 아니면 오들오들.떨정도로 화난 연오의 모습은...휘유. 강안이는 모를껍니다. 지금 자기가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고,또 그 큰 실수를 눈 감아줄만큼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걸 말이예요.) ※오후7시58분. 피곤한지.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지트로 향하던 효선이가 갑자기 걸음을 멈춥니다. 주머니에서 반짝이는 핸드폰을 꺼내든 효선이의 안색이 급속도로 굳어집니다. [윤서담당] 효선이가 비밀리에 붙여놓은 윤서의 감시자에게서 전화가 왔다는 건.. 결코 좋은 일은 아닐거란 예감에 효선이의 뒷통수를 강하게 흔듭니다. 정말이지 하루라도 조용할 날이 없는 친굽니다,윤서는. ["후,무슨 일이세요."]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으셨는데..하필이면 경찰서 앞에서 일이 터지는 바람에. 조금 급하게 됐습니다.] ["어디쯤이죠?"] 아지트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린 효선이가 안주머니에서 칠공주 전용으로 쓰고있는 핸드폰을 꺼내며 심각하게 묻자,반대편에서 윤서가 잡혀있는 파출소의 주소를 부릅니다. 후우. 또 한번.효선이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숨이 터져나옵니다. ["심각한가요??"] [상대편 학생이 모두 다섯명이였는데,그 중 둘이 전치5주 받고.나머지 셋은 전치2주 받았습니다. 근데 전치5주 받은 학생 중 한 명 부모님이 제화예고 학부모회장이랍니다.] ["윤서는 어쩌자고.. 후.알았어요,고마워요. 참, 그 학생들은 어 디 입원했죠??"] [대한병원입니다.] ["예,그럼 수고하세요."] 뚜.전화를 끊은 효선이가 바로 단축번호3번을 길게 누르며 어디론가 전화를 겁니다. 요즘 누구다 다 한다는 컬러링도 없이 단촐한 기계음이 몇번 흐르다 무뚝뚝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응,효선아. 무슨일이야.] ["윤서가 사고쳤어.하필 건드린게 자기네 학교 학부모회장 딸인가봐. 지금 대한병원에 입원해 있다니까 너가 이연이랑 좀 찾아가봐."] [뭐?? 이 기집애!!!] 리아의 성난 목소리에 효선이가 텁텁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습니다. ["아마 다른 애들한테도 연락이 갔을꺼야. 나말고도 애들이 윤서한테 몇명 붙여놓은 것 같았으니깐. 아무튼 병원쪽하고 상대편 부모님들은 이연이랑, 니가 알아서 수습해줘. 여기는 아라하고 연오랑 같이 처리해 놓을게."] [그래. 아유,이 기지배때문에 쉴 틈이 없다 아주.] 리아와 통화를 끝내자마자 이번엔 반대편 손에 든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이연] 발신자를 확인한 효선인 도로로 내려와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올라타며 핸드폰의 플립을 열었습니다. 쨍쨍거리는 이연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기사아저씨에게 목적지를 말한 효선인 편하게 시트에 몸을 기댑니다. 그리고 피곤에 젖은 효선이의 입술 사이로 무거운 한마디가 터져나옵니다. ["애들 좀 모아줘,이연아."] .............. <※오후7시58분. 효선이가 전화를 받았던 그 시각. 아지트에 가장 먼저 도착해 떡볶이를 만들고 있던 아라는 앞치마 앞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작은 진동에 들고있던 주걱을 내려놓고 서둘러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큰일났어요,언니. 저 인영인데요, 윤서언니가 지금 경찰서에 잡혀갔어요!] ["무-뭐?? 윤서가??"] [급해요,언니. 지금 빨리 제화경찰서로 나오세요!!] 언제 어디서 사고를 칠지 모르는 윤서가 걱정되 붙여놓은 후배,인영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아라의 얼굴이 금새 사색이 되었습니다. 서둘러 앞치마를 벗은 아라는 인영이의 전화를 급하게 끊고나서 연오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 딸깍.아지트 문을 잠그고서 나선 아라는 요란한 음악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연오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종종걸음으로 길을 내려갑니다. ["응,연오야. 나야."] [어.왠일이야??] ["윤서가 지금 제화경찰서에 있대."] [아-.나도 방금 전화 받았어. 우리가 붙여놓은 애들만 해도 열명이 넘을껀데,도대체 그 눈들을 어떻게 피해서 사고를 쳤을까??..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지.] ["으응.. 아무튼 그래서 난 지금 경찰서로 가는 중인데, 넌 어떻게 할래??"] [난 경찰서장 좀 만나볼께.효선이하고 윤서,알아서 잘 잡아놔. 하여간 이 사고뭉치때문에 몸 한번을 못흔든다야. 후.그럼 좀있다 봐.] ......... 연오의 한숨과 함께 아라의 눈망울이 흔들렸습니다.> 일주일에 네 번이상 걸려오는 경찰서장님 전화에 지끈지끈.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경찰서로 달려가면 그 곳이 바로 칠공주의 또다른 아지트가 됩니다. 도저히 못참겠어서 붙여놓은 감시자들에게서 매일매일 걸려오는 전화에 후와후와.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병원으로 달려가면 그 곳이 바로 칠공주의 또다른 아지트가 됩니다. 한 대 확.패주고 싶은 얼굴로 싱글싱글.잘도 웃고있는 윤서를 보며 하루하루. 칠공주들의 얼굴엔 잔주름만이 늘어가고 있다는 걸 과연 윤서가 알아줄까요??... 어찌어찌 사고를 수습해 진짜 아지트로 돌아가는 길. 이연이와 손잡고 팔짝팔짝.철없는 아이처럼 뛰어가는 윤서의 뒷모습을 보는 칠공주들의 메마른 심장이 쿵덕쿵덕.불안감에 흔들리고 있다는 걸 과연 윤서가 알아줄까요??.. 조금은 특별한 아침을 시작으로. 조금은 설레고,조금은 지겨운 고백타임을 거쳐. 조금은 열심히 학교생활을 하며. 조금은 특이한 의뢰를 받아 돈을 벌고. 심하게 피곤한 저녁을 끝으로. 칠공주들의 하루가 지나갑니다. 칠공주여서 특별하고,칠공주여서 특이하고. 칠공주여서 피곤한 하루가 그렇게 꼴딱꼴딱.잘도 갑니다. 4-78. 뒷통수가 아픈 날 ............ ........ ※다음날 새벽4시28분. 목구멍을 텁텁하게 만드는 갈증을 못견디고 방을 나와 냉장고로 향하는데.여름괴담을 찍어도 될만큼 을씨년스러운 베란다에서 두런두런.말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아저씨들이 아직 안갔나. 조심스럽게 냉장고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살금살금. 말소리가 들려오는 베란다로 향했다. 살짝 열려진 문틈 사이로 따가운 담배 연기와 함께 강조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이냐??..어 그래. 저번에 니가 부탁했던대로 됐다. 어." ....... 발소리를 죽이느라 잔뜩 숙였던 허리를 펴며 눈썹을 찌푸렸다. ...설마. 김윤서 약점까지 말해줬는데.그거 말해준지 62시간도 안지났는데..설마. 조그마한 두려움과 두근거림을 안고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누군가 통화중인지 가끔씩 아저씨의 목소리가 끊긴다. "아냐,임마. 너 말대로 재밌는 애였어. 어. ...글쎄." ....... "니가 걱정할 필욘 없을 꺼같다. 옥상에서 얘기 좀 나눴는데,날 경계하는 눈치는 아녔어. 어." ........ "천하의 ...-가 부탁을 다 하고말야.그때 내가 얼마나 놀랬는 주 아냐?? 뭐, 그렇게 궁금하던 니 동생 얼굴도 보고.썩 나쁜 부탁은 아녔지만 말이다. 하하.." 강조아저씨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화가 날 주 알았는데, 오히려 두근대던 심장이 풍덩.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선우권의 위력인가. ...쓰게 웃으며 아직까지도 강조아저씨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는 베란다에서 몸을 돌렸다. 아까와 달리 터벅터벅.걷는 발소리가 조금 아프다. .................... ............. ......... ※아침6시40분. 띠띠띠.띠리릭. 덜컥.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열리고 오늘도 여전히 검정 정장을 쫙.빼입은 정지혁씨가 피곤한 얼굴로 나타났다. 마악 앞치마를 몸에 두르고 부엌으로 들어서던 정지혁씨의 걸음이 뚝.멈춘다. .....빙글.몸을 돌려 함박웃음을 짓자 정지혁씨의 표정이 묘해졌다. 기특하다고 하는 것도 같고,어의없어 하는 것도 같고.. "표정이 뭐 그래요??.. 이거 영광이예요,영광. 9시 이전엔 절대 눈 안뜨던 김윤서가 처음으로 일찍 일어나서 차린 밥상이라구요." "...이럴 시간 있으면 학교 갈 준비나 해." 탁.앞치마를 벗어던진 정지혁씨가 평소의 차림새,그대로 있는 날 보며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띠바.아주 성질머리가 띠바야,정지혁. "설마 내가 그 중요한 준비도 안하고 이럴라구요??.. 여기다 가방만 메고 가면 OK." "....장난하나?" "설마요. 천하의 정지혁씨를 두고 어떻게 장난을 걸어요,제가." "후.들어가서 제대로 입고 나와." 예전 제화예고 교복을 몸에 딱.맞게 입고있는 날 불만스럽게 훑어보며 방문을 가르키는 정지혁씨. 그리고 그런 정지혁씨를 보며 방글방글.웃고만 있는 김윤서. "정지혁씨." "김윤서." 동시에 터져나온 두 개의 이름. 재미난 우연에 신기하게 웃고 있는데 정지혁씨의 싸늘한 눈초리가 와닿았다. "시간 없어.빨리 가서 갈아입고 나와." "이대루 간다니깐 그러네.그건 그렇고 김윤서가 준비한 영광, 안 먹을꺼예요??..땡큐함의 표신데,이거." "장난할 시간 없다고 말했다." "버리면 아쉬울껀데.. 당한 기억만 남으면 나중에 정지혁씨 건강에 안좋아요." "뭐??" 정지혁씨의 오른쪽 눈썹이 훽.치켜올라간다. 의자 위에 올려놓은 가방을 둘러맨 나는 싱긋.웃으며 보글보글.식탁의 정 가운데에서 앙증맞게 끓고있는 김치찌개를 가르켰다. "드세요.김윤서가 준비한 처음이자 마지막 영광." "후..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어제.남자친구가 생겼어요." "뭐???" 아까보다 더 크게 정지혁씨의 오른쪽 눈썹이 올라간다. 동그래진 눈동자 가득,날 담고있는 정지혁씨를 향해 실끗.윙크를 날려주고 하얀 쌀밥이 담겨진 상아색 밥그릇 옆에 딸깍.은수저를 내려놨다. "남자친구가 생겼다구요,김윤서한테. 신기하죠??나도 되게 신기해요. 주연오가 맨날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그게,나한테도 생길지 몰랐거든요." "...." "그래서 그 애한테 많이 미안해요.내 전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늘뿐이 없을꺼니까. 그래서 미안해요." 딸깍.이번엔 꼬다리에 예쁘장한 구름모양이 매달린 은젓가락을 은수저 옆에 나란히 내려놨다. ...그 때,준비가 다됐냐며 현도아저씨와 강조아저씨가 심각한 얼굴로 서있는 정지혁씨 옆으로 빼꼼.얼굴을 내민다. 두개의 수저와 네개의 젓가락을 다른 밥그릇 옆에 내려놓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미안할꺼야,아마. 권이한테 미안한만큼,그만큼. 더도말고 덜도말고 딱 그만큼. 미안할꺼야.아저씨들.. "...조금이라도 덜 미안할려면.그 애한테 아주 쬐끔이라도 덜 미안해할라면 하늘이 필요할꺼야.그치요?? 아저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그게 무슨." "하늘이 빨랑 잡히면,그럼 하늘이 쬐끔 덜 소중해질꺼아녜요. 하늘이 쬐끔이라도 덜 소중해져야...그 애한테도 덜 미안해 질테니깐. 그러니깐 그래야 된다구요." 아까부터 알 수없는 소리만 늘어놓는 날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던 정지혁씨가 말 뒤에 가려진 숨은 뜻을 알아챘는지, 험상궂게 눈을 부라리며 내 손목을 거칠게 잡아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뻔히 다 보여." "뻔히 보여줄라구 말한거예요." "...니 생각대로 쉽게 될 것 같냐??" "여태까지 내 생각대로 된 일은 한개도 없었는걸.그니까 처음부터 기대같은 거 안걸어요,난." 턱. 어깨를 으쓱이며 태연하게 말하는 날 한대 칠 기세로 손을 올린 정지혁씨를 말린건,오늘도 내일처럼 예쁘장한 강조아저씨였다. 강조아저씬 조금 화난듯.무서운 얼굴로 정지혁씨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만둬요,형." "너야말로 이 손 놔라." "형." "현강조,너!" "스탑. 두 분 다 그만해요. 아침부터 싸우시라고 영광 준비한거 아니예요." "아가씨.." "싸움말고 제가 준비한 영광이나 드세요들. 참.그리고 오늘은 혼자 갈게요, 애도 아니고 맨날 안데려다 주셔도 되요.뭐, 그것도 오늘까지의 일이겠지만." 멍청히 서있는 아저씨들을 뒤로하고 한상 차려진 부엌을 나오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고개를 꺾었다. 강조아저씨와 나란히 서있는 정지혁씨를 향해 실실.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마지막 쓰리아웃,기대하세요." ................ ※ 가지각색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출근하는 회사원들로 북적이는 버스 안. 친구들끼리 잡담을 나누거나,통화를 하며 얘기꽃을 피우느라 시끄러울법도 한데 유난히도 조용한 내부를 둘러보며 휘파람을 불렀다. 서있는 사람은 많은데도 정작 내 주변의 좌석이 텅텅. 빈 까닭은 무얼까??... 눈썹을 긁적이며 힐끔힐끔.날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다. "다리 안아프세요??..노약자석도 아닌데 좀 앉지." "....저.저기. 일당백 맞으시죠? 칠공주 일당백이요.." 개중 용기있어뵈는 한 여학생이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여학생의 황당한 물음에 허허.웃으며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겨우 교복하나 바꿔입고,변장 하나 안해준걸로 이렇게 쉽게 알아볼꺼였음 안경이라도 쓰고 나올껄. 방 안에서 고이 잠든 변장도구들을 떠올리며 바들바들. 애처롭게도 떨고있는 여학생에게 대답해줬다. "아뇨. 칠공주 일당백이 아니라 김윤서예요,칠공주 김윤서." 칠공주 일당백이나,칠공주 김윤서나 그게 그거 아닌가??.. 하는 얼굴로 날 보던 그 용기있는 여학생은 금새 울상을 짓고는 고개를 푹.숙였다. 그리고 그 여학생을 뒤따라 줄줄이 고개를 처박는 버스 안의 사람들. .....내가 자기들을 잡아먹기라도 하나. 유난을 떠는 사람들을 보며 혀를 끌끌.찼다. 학교에 도착하려면 아직 다섯정거장이나 남았지만,나때문에 자리에도 못안고 전전긍긍.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이 가여워 손을 뻗어 빨간색 부저를 꾹.눌렀다. 버스 안을 울리는 기적의 벨소리. 휴우. 아주 제대로 안심하는 티를 내고있는 사람들을 씁쓸하게 훑어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뒷문으로 향했다. 모세의 기적이라도 찍는지 내 옆으로 쏴악.물러서는 사람들. ..... 띠바.누가 보면 오해하겠네,이 사람들??.. "저 조류독감 걸린 꼬꼬댁두 아니구요,광견병 걸린 멍멍이도 아닙니다. 그렇게 기겁을 하시면.. 보건소에 잡혀갈지도 몰라요,저." 우스개소리로 던진 소리에 금새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진다. ......... 그냥 변장하고 나올껄. 빨간색 부저를 누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차를 멈추고 뒷문을 열어준 기사아저씨를 향해 고마움을 표하며 버스에서 내렸다. 뒤도 안돌아보고 시속200Km로 달려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보는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는다. 조만간 보건소에서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4-79. 제안 ※황제공고 교문을 지날때부터 느껴지는 아이들의 경악어린 시선을 무시하고 도착한 본교무실 앞.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서자 선생들 모두가 짜기라도 했는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휘둥그레.눈을 떳다. 빙글.선생들을 향해 예의바른 미소를 지어보이며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너,너..??" "안녕하세요,선생님들. 전학은 이틀전에 왔지만,이제서야 제대로 인사를 드립니다. 김윤서예요,김윤서. 많이 들어 보셨죠?? 1년전에 TV에 자주 얼굴 내밀고 그랬는데.." "허억." 이영애 닮은 담임이 숨 넘어가는 소릴 내며 손가락질을 한다. 효선이가 전학왔음,플랜카드까지 만들어가며 환영해줄꺼면서. 김윤서가 오니까 아주 오줌을 지리겠네,지리겠어. 겁에 질린 선생들의 표정을 보며 씁.바람소릴 냈다. "너무 무안주시네,선생님들. 어지간한 꼴통들은 다 상대해 봤다는 황제공고 선생님들까지 이러면 저 학교 못다녀요." "..그..그나저나 아침부터 여,여긴 무슨 일이냐?.." 왕년에 힘깨나 썼을법한 학생부장이 우락부락한 덩치와 안 어울리게 새소리를 내며 묻는다. 그제서야 학교를 오자마자 반이 아닌 교무실부터 들린 이유를 떠올린 나는 베실베실.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다름이 아니라 시험 좀 봤으면 해서요. 정규시험이 아니어두 되니까 오늘이나 내일중으로 성적표 낼만한 시험 좀 보면 안될까요??..어른들한테 빨리 100점찍힌 성적표를 보여줘야 일이 쉬워지걸랑요." "시..시험??.." "예,시험요. 교장선생님 도장 꽝꽝.찍힌 성적표 나오는 시험." 이까지 드러내보이며 웃는 나에 비해 선생들의 표정은 똥파리가 앉아있던 똥을 씹어먹은 것처럼 구겨졌다. 쉬운 부탁이 아니란건 알지만,이렇게 대놓고 싫은티를 내면 우울해지는데. 영 오케이 사인을 안보내주려는 선생들을 보며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되요,안되요??..그것만 말해주세요." "그..그야. 쉬,쉬운 일이 아니..." "오케이.접수했어요. 안된다 이거죠??" "아,아니. 굳이 안되는게 아니라.." "그럼 제안 한개 해드릴께요. 여기도 사고치는 새끼들 좀 많죠??. 그런 새끼들 싸그리 잡아다드릴께요,제가. 교육청에서 깝깝하게 공문 내려오고,선생님들이 애들 합의보러 경찰서 안뛰어다니게 문제치는 새끼들 제가 잡아다 조질테니까, 시험 좀 만들어주세요." 마음에 드는 표현은 아니었겠지만,그래도 귀가 솔깃한지 선생들의 표정이 아까보다 한결 나아진다. [인천 최고의 꼴통학교] [어찌나 꼴통들만 모였는지, 웬만한 선생들은 한 달도 못버티고 나간단다.] [선생님이 출근은 학교로 하지만, 퇴근은 꼭 경찰서로 한다는...] 새벽녘에 효선이와 리아,그리고 아라에게서 온 문자를 떠올리며 한쪽 입꼬리를 슬쩍. 말아올렸다. 위에선 대가리들이,아래에선 애새끼들이 숨통을 조이느라 스트레스 꽤나 받았을 선생들한테는 이게 직빵이지. 알아서 문제아들 조져준다니,얼마나 고마운 제안이겠어??.. "그,그게.. 무슨.." "말 그대로요. 제가 이 학교,황제공고 꼴통들 꽉 잡아드릴테니까 시험 좀 보잔 말이죠. 어때요?? 아쉬운 조건은 아니라고 보는데.. 다른 학교 선생님들한테 꼴통학교,꼴통선생이라는 말 들으면 별로 기분 안좋으시잖어요. 그 말 안듣게 해드린다니깐요,제가." "저,정말이냐??..하지만 애들이 좀..많은데.." "제 별명 모르세요??.." "알지,잘 알지. 하지만..." "학부모회랑 저희 부모님들한테만 입 다물어주세요.그럼 선생님들이 그렇게 원하는 퇴근 후,바로 컴백홈!! 제대로 도와드릴께요." 꿀꺽. 학생부장을 비롯한 교무실에 있는 모든 선생들이 침을 삼킨다. 약35.1초후. 결심했는지 학생부장이 조심스럽게 내 손을 턱.잡았다. "...부탁한다." "예썰,감사함다!!.." 뜨겁게 데워진 학생부장의 손을 떨궈내며 힘차게 대답했다. ........... 몇분 후. 학생부장에게서 문제아 중에서도 특별히 조심해야 될 문제아 리스트를 받아들고 교무실을 나오자마자 복도 쓰레기통에 그 리스트를 구겨넣었다. 병신들. 지들이 뭐라고 학생을 쓰레기처럼 분류하고 난리야??.. 교무실의 회색문을 향해 잔뜩 비틀린 웃음을 날려주고 돌아서는데 주머니에 얌전히 잠들어있던 핸드폰이 요란한 진동을 내는게 느껴졌다. 핸드폰을 꺼내들고 액정을 보니 문자표시가 깜박이고 있었다. 이 시간에 누구지??.. [사고치지말라고 경고했지,김윤서.] [우리가 가기 전까지 조용히 지내기로 했잖아,윤서야..] [참아,윤서야. 제발.] [사고치면 리아가 너 죽인대.] 정리아,황아라,최효선,주연오가 차례대로 보내온 문자를 확인하며 황당하게 웃었다. 띠바.도대체 김윤서 주변에 애새끼들을 몇명이나 붙여놓은 거야??.. 교무실에 들어갔다 나온지 얼마나 됐다구,이런 문자를 보내. "찾아내기만 해. 아주 조져야지." 어딘가에서 날 지켜보고 있을 김윤서 감시자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으며 핸드폰을 봤다. 이왕 들켰으니,귀뜸이라도 해놔야 나중에 덜 혼날껀데. 문제는 그 귀뜸을 누구한테 하냐 이거지.. 우선 대마왕 정리아 제외. 그 다음엔 말하면 우느라 학교도 못갈 울보 아라도 제외. ....그나마 나은 연오는 지금쯤 머리를 마느라 바쁠꺼고, 아무래도 효선이가 제일이겠지??. 결정을 내리고 단축번호5번을 길게 눌렀다. 얼마안가 들려오는 효선이의 화난 목소리. [윤서,너 이렇게 자꾸 날뛸래??] ["굿모닝."] [윤서야.] ["효선아,인제 달릴꺼야 나. 1년이면 많이 쉬었으니깐, 쉬지않고 달려줘야 하늘님이 재밌어하지. 안그래??"] [달리는 것도,다른 것도 다 좋은데 우리 가기 전까진 가만히 있어. 부산에서 니가 벌인 일,뒷수습 할려면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래서 너들이 오기 전까지 합법적으로 놀라고 교무실 갔다오는 길."] [후우.윤서야..] ["아프다,효선아 나."] [뭐??] 한숨을 내쉬며 날 말리기 위해 무언가 말하려던 효선인 아프다는 내 한마디에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구라"] [윤서,너!!..] ["아무튼 효선아!!내가 이렇게 전화를 건거는 말이지. 지금부터 내가 달릴꺼라구. 쉬지않고 달려서 김한영 조질꺼라구. 그래서 하늘 꼭 잡을꺼라구. 그거 얘기할라구 건거."] [우리 갈때까지만 참아.] ["못참을 거 같애."] [윤서야] 귓구멍을 간지르는 효선이의 뜨뜻미지근한 목소리에 빙글빙글.웃고 있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얼굴 한개가 보였다. 오예. 빙고. ["효선아 지금이 몇년,몇월,몇일,몇시,몇초야??"] [2004년 11월 1일 7시 58분 32초] ["오케이. 너가 인천 오기 전에,인천에서는 김윤서면 안된다고 했지??..난 너 말듣는 착한 아이니깐. 그거 접수했어,그니깐 2004년 11월 1일 7시 58분 42초부터. ......김윤서,개새끼 된다."] [뭐?그게 무슨-] 효선이의 뒷말을 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고서,핸드폰을 교복 안주머니에 쑤셔넣었다. 들뜬 발걸음으로 익숙한 얼굴이 서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검은 목폴라티로 얼굴을 반쯤 가린 정지운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금잔디는 갑작스러운 김윤서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떳다. "너가 여긴 어떻게.." "금잔디 하이. 정지운도 헬로우." "....지운이,너 얘 알어??" 아까보다 더 커진 눈동자로 정지운을 돌아보는 금잔디. 고개를 끄덕이는 정지운의 모습에 금잔디가 동그래진 눈동자를 원래 크기로 되돌려놓고,날 묘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넌 어떻게 알어,정지운을??" "목표 쓰리,맨인블랙 동생." "목표 쓰리,맨인블랙?" "엉,그런게 있어. 아무튼 반가워,금잔디?? 전학 첫날 보긴 봤는데 넌 몰랐으니까 이게 황제공고에서의 첫만남인가." "....혹시 너였니,그 전학생." "오와,눈치가 제법인데??" 얘기를 나눌수록 방글방글.웃음이 가득 떠오르는 김윤서의 검정 눈동자완 달리 싸늘히 가라앉는 금잔디의 갈색 눈동자. "원터치 한방.그게 네 별명이라며??" "그러는 네 별명은 일당백이지??..혼자서 백명은 상대할 수 있어서 붙은 별명말야." "글쎄,솔직히 혼자서 백명을 상대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 사실 궁금해,나. 그 별명 누가 지었는지말야." "가만히 처박혀있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뭔데??" 삐딱하게 고개를 깐 금잔디가 불쾌한 말투로 물었다. 글쎄. 가만히 처막혀있다가 이러는 이유가 뭘까??.. 나도 궁금해지네,그거. "남친이 생겨서 그런가.아님 서울연합 반이나 박살내서 그런가. 것도 아님... 뒷통수가 아퍼서 그런가.나도 잘 모르겠는데,아마 이 중 하날꺼야. 아무거나 골라찍어." "후." 짧은 한숨. 금잔디는 정지운을 흘끗.쳐다보며 미묘한 표정을 짓더니 언제 그랬냐는둥 싸늘한 얼굴을 한 채 날 노려봤다. 금방이라도 뻗을듯,가늘게 떨리는 금잔디의 주먹을 보며 피식.웃었다. "치고 싶음쳐,그럴라고 너한테 인사한거야. 하이하고." "...자신이 넘치네.교무실 앞에서 맞짱 뜰 자신감,나도 배우고 싶은데?" "아.그거. 난 이미 합법적으로 지랄한다고,말해놔서 괜찮아. 아, 맞다. 넌 불법이구나,여기서 싸우면. 저번에 시내에서 정식으로 붙자고 했었으니까,너가 불법이면 안되지. 좋아,지금 뜰래 아님 학교 끝나고 뜰래??.. 학교 끝나고는 서울가야되서 제대로 못 놀아줄 꺼같은데. 선택해,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느긋하게 말했다. 잠시 생각에 잠긴듯,입술을 꾹 다무는 금잔디.그리고 아까부터 한마디, 말도 없다 갑자기 내 손목을 잡는 정지운. 무언가 할 말이 있어보이는 정지운의 눈빛에 아하.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잊으면 아쉬울뻔했네, 너도 택해요. 17전1승16패,정지운. 화장실에서 기억나죠??.. 한 판 붙자고 했던 거.기다릴게, 찾아와라. 정지운 입에서 나온 말인데." "싸우지마." "안싸워요. 조질꺼지." "..잔디,호락호락한 애 아냐." "난 금잔디보다 댁한테 더 흥미있는데. 천하의 그 김한영을 이겼잖아요??.." "그건." "결정했어." 정지운과 정답게 말을 나누고 있는 내가 보기싫었는지, 내 손목을 잡고있던 정지운의 팔을 떨궈낸 금잔디가 위험스럽게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지금 떠, 씨발아." 4-80. 맞짱 .......... ※ 슈웅.턱. 급작스럽게 날아온 금잔디의 강펀치를 가볍게 막아내고 어깨를 으쓱였다. "감정섞였어,니 주먹. 그런거 별로 안 좋은데." "상관마." "상관말고 싶은데, 상관하게 만들잖아 너 주먹이." 빙글웃으며 금잔디의 악센 주먹에 손을 뗐다. 제대로 막았는데도 손바닥이 얼얼하다. 원터치 한방. 별명처럼 인천짱 거저먹은게 아니라는 듯, 금잔디의 주먹은 제법 매서웠다. 찌릿찌릿.주먹의 여운이 남은 손바닥을 문지르며 잠잠한 교무실쪽 복도를 쳐다봤다. "감정조절 됐어??.." 여전히 교무실 문에서 시선을 떼지않고서 묻자, 금잔디가 쉼호흡을 한다. 재밌는 애야,금잔디.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기분좋게 놔두고 고개를 돌렸다. 감정정리가 다 됐는지 금잔디가 아까보다 한결 괜찮아진 얼굴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교무실 문을 흘끗.바라봐주고 복도창문을 드르륵. 열었다. "교무실 앞은 너무 오바니까, 소각장 뒤로 고고.하자구." 탁.난간 위에 오른발을 올린 뒤, 금잔디를 향해 방긋 웃어보였다. 당황한듯 눈을 껌벅이던 금잔디가 손을 뻗었을때,난 이미 1층에 착지한 뒤였다. 아까까지만해도 날 향해 불태우던 적의는 어디다 버려놨는지,금잔디가 고개를 내밀고 괜찮냐고 소리쳤다. "오키도키!!!..괜찮으니까 빨랑 와!!!" 휘적휘적.크게 손을 흔들어주고 경쾌한 스텝을 밟으며 소각장으로 향했다. 아.두근두근. 신난다. 아주 신나 죽겠다. 오늘 한 번 제대로 죽어줘야지. 잔뜩 들뜬 마음을 알았는지, 소각장에 도착한지 2분만에 금잔디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수많은 아이들을 거느리고서. "일대일이던,개떼로 덤비던 상관없긴한데. 의외네??" "후와후아. 구경한다고,후와.온거야. 씨발,그리고 무식하게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년이 어딨어?? 존나 놀랐네." "아.그거. 재밌지??...너도 한 번 해봐. 느낌 짱이야." 히죽히죽 웃으며 말하는 날 이상하게 쳐다보던 금잔디는 한 번 크게 숨을 내뱉더니. 더이상 어깨를 들썩거리지 않았다. 눈썹을 긁적거리며 입고 있던 마이를 벗어 정지운에게 건네주는 금잔디와 그 주변을 둘러싼 황제고&황제공고 아이들을 쳐다봤다. ......... 아무리 선생들하고 싸바싸바했어어도,이렇게 대놓고 싸우면 나중에 짜증나지는데. "구경 꼭 해야돼,쟤네??.." "화려한 거 좋아하잖아,너. 니가 좋아할 거 같애서 그냥 놔뒀는데.아니야??" "화려한건 주연오취향이고, 난 별로. 너야말로 그쪽 취향아냐?? 주변에서 들려오는 응원소리에 파워업하고 막 그런." 씩.웃으며 말하자 금잔디가 굳은 얼굴로 옆에 있던 정지운에게 작게 속삭였다. 정지운이 나서서 애들을 몰아내자,순식간에 소각장에 썰렁할정도로 휑해진다. 와. 저 가시네도 농담이 안 통하는 가시네네. "화나게 할라구 한 건 아녔는데,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네. 미안. 또 감정조절 할 시간 필요해??" "아니." "엉,그래. 어차피 서로 말싸움으 별로 안좋아하는데,질질 끌지말고 바로 시작하자??" "마음대로." "아참. 시작하기 전에 이거 하나만 약속해주라." 금잔디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인천연합을 걸어. 정확히하자면, 너가 가진 인천연합을 칠공주한테 넘기라는 거." "...그럼 넌 칠공주를 거는거야??" "글쎄. 그건 아닐꺼야,아마. 넌 대가리라서 괜찮겠지만, 안타깝게도 난 칠공주 대가리가 아니여서 함부로 걸 수가 없지롱. 그 대신. 칠공주말고 김윤서를 걸게. 이정도면 별로 아쉬울 조건은 아니잖아??.." "아니,아쉽지. 인천연합이 얼마나 큰 건데. 김윤서 실력은 높이 사겠지만,인천연합을 걸만큼은 아냐." 금잔디의 눈빛에서 효선이와 비슷한 무언가가 묻어져 나온다. 리더쉽?? 아니.그렇게 단순한게 아니다. 턱을 쓰다듬으며 미간을 좁혔다. "흠.함부로 걸었다간 리아한테 죽을껀데.. 내가 칠공주를 걸면,넌 확실히 인천연합을 거는거야??" "응." "...뭐,좋아. 어차피 죽는한이 있어도 너한테 질 일은 없을꺼니깐. 칠공주를 걸고 하는 일에 졌다간,금잔디 손이 아니라 정리아 손에 죽을껄??..하하." "그럼 된거지??" "좋아. 그럼 준비...시-땅!!" 하얀 치아를 드러내보이며 금잔디를 향해 달려들었다. 부웅. 금잔디에게서 몇걸음 떨어진 곳에 몸을 띄워 발을 휘둘렀다. 금새 손을 올려 발차기를 막아내는 금잔디. 역시,재밌다니깐. 알 수 없는 흥분이 손끝이 저릿저릿하다. 빨리. 뭔가 뜨거운 불구덩이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다. "..제법하네." "너야말로. 발차기에 안넘어지는 애 처음봤어." "나도 내 주먹이 안먹히는 애,처음봤어." 부웅.말끝나기가 무섭게 금잔디가 내 옆구리를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예의상이라도 한번쯤은 맞아줘야할 것 같아 그대로 놔뒀는데,으와. 상상초월인데,이거??.. 뼈까지 시큰거리는 금잔디의 주먹에 한쪽 입꼬리가 일그러진다. 하지만 뭐,이런 쪽이 더 좋으니깐. 옆구리에 박혀있는 금잔디의 주먹을 팔꿈치로 꾸욱.눌렀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금잔디가 급하게 주먹을 회수하려고 했지만,아쉽게도. 딱.그랬다. 아쉽게도... 퍼억.주르륵. 단단한 이마가 들이받은 금잔디의 콧구멍에서 새빨간 피가 기다렸다는듯이 흘러내린다. 탁.그제서야 금잔디의 주먹에서 팔꿈치를 떼고,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적지않은 충격이였는지 금잔디가 다리를 휘청이며 흘러내리고 있는 코피를 닦아낸다. 그 모습을 재밌게 지켜보며 입을 열었다. "..예전엔 잘 안그랬는데,요즘들어서는 싸워도 아무 것도 남지 않는거야. 예전엔 갈비뼈도 아작나고,턱도 부숴지고. 또.. 음. 코뼈도 주저앉고 막 그랬었는데 말이야.." "..후.말싸움은 네 취향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어??" "노노.말싸움이 아냐. 칭찬하고 있는거야, 지금 나. 그떄 어금니부터 시작해서.. 너 진짜 재밌어,금잔디. 이렇게 흥분한 적 제대로 오랜만. 너라면. 있지,너라면. 금잔디. 너라면.." 나른한 눈길로 금잔디의 주먹을 바라봤다. "....날 죽여줄 수 있을거 같애." 터억.물러섰던 한걸음을 다시 제자리에 돌려놨다. 그리고 다시 한걸음 더.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금잔디가 묘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여태까진 눈장난이였고,진지하게 어때??.." "....좋아." 눈꼬리가 순하게 휘어졌다. 슈웅.무서운 기세로 금잔디와 김윤서의 주먹이 날아들었다. 뻐걱,퉁. 먼저 금잔디의 주먹이 허공으로 퉁겨졌고,남은 김윤서의 주먹은 작은 떨림을 안고 있었다. 저릿저릿한 팔을 주무르며 금잔디가 꽤 놀란 눈으로,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두려움이 서린 눈으로 날 보고있었다. "놀랄 거 없어.말했잖아??..아주 짱!!!세다고,김윤서 주먹." "하.정말 대단하네. 싸움실력도 수준급,주먹도 수준급?? 씨발.하늘은 역시 불공평해." 금잔디가 낮게 투덜거렸다. "맛뵈기 보여줬으니까 인제 너가 정해.원터치로 갈래, 아님.. 그냥 싸울래??" "...너 편할대로." "....역시." 지지않겠다는 얼굴로 애써 주먹을 악쥐는 금잔디를 보며 실망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의 의미를 눈치채지 못한 금잔디가 왼쪽 눈섭을 치켜떳을때,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부웅.크게 한바퀴를 돌며 날아간 발차기가 정확히 금잔디의 관자놀이를 가격하고, 순식간에 급소를 맞은 금잔디는 힘이 풀렸는지 한 쪽 다리를 휘청거렸다. 어쩡쩡한 자세로 눈매를 가다듬던 금잔디가 이를 악물고 달려들어 내 허릴 끌어안는다. "와.때려달라고 아주 용을쓰네." 보기좋은 위치에 자리잡은 금잔디의 흑색 머리통을 보며 비죽.웃음을 흘렸다. 뻐헉.팔꿈치로 있는힘껏 금잔디의 등줄기를 내리찍고,바로 허리를 꺾었다. 두 손이 바닥에 닿았을 때,이미 금잔디는 허공을 한바퀴 돌고 반대편 바닥에 쓰러진 상태였다. 후왁후왁.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금잔디. "맷집이 대단한데." "흐아.너야말로..허억." "내가 충고하나 해도 될까??.." "흐.아니." "..싸울땐말야.대가리에 아무 것도 담아놔선 안돼. 금잔디 넌 주먹은 일륜데,싸움실력은 정말이지 형편없어. 게다가 어줍잖은 아량까지 베풀다니.그딴 건 너보다 못하는 새끼들한테나 베풀어,붕신아. 그리고 금잔디 주특기가 원턴친가 본데,싸움은 정정당당 스포츠가 아녀. 어디서 웃기지도 않게 양보야,양보가. 난 그딴거 제일로 싫어해,금잔디." 금잔디의 눈이 동그래졌다,다시 작아진다. 아까 왜 김윤서가 실망의 한숨을 내뱉었는지,이제서야 이해 갔는지 금잔디가 입안 가득 고인 핏물을 퉤.뱉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다. 좋아,내가 원하는게 바로 그거라니까. 김윤서를 죽여줄 금잔디님아??.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 오래 싸워본 적이 처음이라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려. 언제나 주먹 한방에 끝냈으니깐. 처음엔 꼭 원터치가 아녀도 널 이길꺼라고 생각했어. 한영오빠까지도 감탄한 내 주먹이였으니깐. .....하지만 내가 오해했네. 미안,김윤서. 니 말대로 싸움은 스포츠가 아냐. 그걸 깨달았어." "엉.좋아, 이모습." "후.그럼 염치불구하고 말할께. 원터치로 가자." "푸하하하하.." 제딴엔 진지하게 말했는데,내가 박장대소를 하자 기분이 상했는지 금잔디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크큭.. 추,충고 하나 더. 싸울때 주둥이 놀리는건 허접들이나 하는 짓이야. 흐하하. 게다가 싸움이 스포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서,원터치로 가자??.. 하하하. 정말 재밌다,너.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 누가 너 뜻에 따라준데??.. 누누히 말하지만,금잔디. 세상에 예의나 격식같은 거 차릴 필요가 없는 유일한 게. 바로 싸움이야,붕신아." 여전히 웃음을 멈추지못하고 금잔디를 향해 2단앞차기를 날렸다. 금잔디의 턱을 가볍게 후려치고,뒤이어 둥글게 말아쥔 주먹을 뻗었다. 급하게 정신을 차린 금잔디가 내 주먹을 잡으며,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대단해,김윤서." "엉.내가 쫌 대단해." 꾸득.금잔디에게 잡힌 주먹에서 기분좋은 뼛소리가 났다. 소리로 봐선 아주 적게 잡아도 뼈가 부러진 거 같다. 역시, 날 실망시키지 않아. 악력으로 뼈를 부술정도니 어련하겠어. 어깨를 으쓱이고는 반대편 주먹으로 잽싸게 금잔디의 관자놀이를 끊어치고 그와 동시에 무릎을 들어올려 복부에 찔러넜었다. 쿨럭.기침소리와 함께 배를 움켜쥐는 금잔디. 하지만 여전히 김윤서 주먹을 놓지 않았다. "나로써는 니가 주먹을 잡고있는 게,더 재미있지만. 그거 안 놓으면 아마 나대신 너가... 죽을꺼야." 금잔디에게 잡힌 주먹을 급하게 내쪽으로 끌어당기며 굽혀진 팔꿈치로 금잔디의 턱을 올려쳤다. 샤바샤바, 춤을 추듯 반대편 팔꿈치와 함께 번갈아 금잔디의 턱을 후려쳤지만 금잔디는 눈동자의 초점이 흐려질때까지 끝끝내 주먹을 놓지 않았다. 와오. 독종이야,독종. 감탄의 미소를 흘리며 팔꿈치를 거두고 무릎에 다시 힘을 주려할 때였다. 빠르게 내 주먹을 놓은 금잔디가 엄청난 힘과 함께 내 옆구리를 후려친건. 뻐득. "와.정신을 잃기 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정신. 대단해,박수 6851번이야 금잔디." 스르륵.금잔디의 무릎이 힘없이 꺽이며,이 아이의 얼굴이 미끄러졌다. 여기저기 얻어맞아 부어터진 금잔디의 얼굴이 내 교복을 지나 털썩.바닥에 닿았다. 금잔디의 입술 사이로 작게 터져나오는 숨소리를 느끼며 쪼그려 앉았다. "인제 인천연합은 칠공주꺼??.." "하아.하아.." "으음.간부새끼들 말고는 비밀지켜줄꺼??.." "흐하.하으..." "정신이 가출했는갑네.그럼 뭐,나중에 정신 돌아오면 얘기하지. 정지운,너가 증인이예요??.." 바닥에 엎어진 금잔디를 들쳐업으며 조금 놀란 얼굴로 서있는 정지운을 향해 말했다. 멍한 정지운을 향해 찡긋.윙크를 날려주고 소각장을 나서려는데.. 욱신욱신. 금잔디에게 두번이나 후려맞은 갈비뼈가 삐그덕거린다. 힘겹게 갈비뼈를 감싸쥐며, 등에 업혀있는 금잔디를 흘끗 쳐다봤다. ........ 수이연도 못당하겠어,금잔디한텐. 다음번에 싸우면 그땐 제대로 죽여주겠는데??.. 아작난 갈비뼈를 기분 좋게 느끼며 빙글.웃었다.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4-81. 입원 ※한국병원 응급실에 금잔디를 던져놓고 나오는 길. 사색이 된 간호사 하나가 달려나와 내 손목을 붙잡는다. "왜요??..나 언니한테 관심 없는데." "예에? 아,아니. 그게 아니라.. 걷는 거 보시니까 어디 다치신 거 같은데.. 치료 안하시고가나 해서요.." "아아. 예." 날 잡은 그 간호사 언닌 내 말에 휘둥그레진 눈을 수습하지 못하고 떠뜸떠뜸. 말을 건넸다. 난 목소릴 기다랗게 늘어트리며 멀뚱히 간호사 언니를 쳐다봤다. 무언가의 대답을 기대했던지, 간소사 언니가 또 한 번 당황해한다. 픽.가볍게 웃음을 터트리며 간호사 언니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들어가서 일보세요. 뒤질만큼 아픈거 아니니깐,걱정 마시구요." "그,그래도.." "와. 직업정신 투철한 언니네." "환자분 보니까 서로 심하게 싸우신 거 같은데.. 치료 받고 가세요." "아뇨. 난 아픈게 슬퍼요." "예??" 앞뒤가 안맞는 말에 간호사 언니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듯한 얼굴로 날 바라본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살짝 찌푸려진 한쪽 눈썹을 긁었다. "그니깐요, 아픈게 슬프다구요. 아프다는 건 내가 살아 있다는 거잖아요??.. 거지같은 세상에서 아직 후와후와. 하고서 숨을 쉬고 있다는 거잖아요. 그래서 슬프다구요. 안직 안죽어서..그래서 되게 슬프다구요." "그게 무슨.." "어?? 응급환자 들어온다. 간호사언니 그럼 빠빠이??.." 툭툭. 눈부시게 하얀 간호사 언니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로비 현관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요,이쁜 간호사 언니. 난 아픈게 슬퍼요. 아직까지도 살아있는게 너무 슬퍼요. 하지만. 하지만 모두들 내가 슬픈걸 원해요. 손가락 예쁜 효선이두 내가 슬프길 바라구요.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지니도 내가 슬펐으면 좋겠대요. 얼굴 예쁜 연오도, 눈동자에 바다를 담아놓은 아라도, 밀가루처럼 하얀 리아도, 눈이 엄청 큰 이연이도. 그리고 인제는 제 남친. 선우권까지. 모두가 내가 슬프길 원해요. 난 슬픈데. 아프다는게 느껴질만큼 살아있는 게 너무 슬픈데. 그 아이들이 바라니깐 참을 수 있어요. 그래도 가끔은 금잔디같은 애들이 많이많이 나타났음 좋겠어요. ....... 처음엔 갈비뼈가 아작나고. 다음엔 코뼈가 무너지고. 그 다음엔 턱뼈가 부숴지고. 그 다음엔 머리통이 박살나고. 그 다음엔 심장소리가 멈추고. 그렇게. 그렇게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떠날 수 있게 그렇게. 점점 무거워지는 입꼬리에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후와후와. 가뿐 쉼호흡을 하며 마음을 정리하고 있는데, 바로 옆으로 삐뽀삐뽀.구급대원 아저씨들이 급하게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코를 찌르는 강한 피비린내에 살짝 실눈을 떠 주황옷에 둘러쌓여 들것에 실려가고 있는 사람을 쳐다봤다. "......저거." 주황옷들에게 가려져 들것에 실려있는 사람의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김윤서 눈동자에 똑똑히 날아와 박힌 것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그 사람이 꽉.쥐고 있는 하트였다. 너무 세게 쥐어 잔뜩 구겨진 하트. 피가 묻어 군데군데 붉은 자국이 남은 하트. 서툰 가위질로 모양새가 뾰족한 하트. .........하트. 다시 눈을 감았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금잔디와의 싸움으로 한껏 흥분된 마음을 누르고,욱신거리는 갈비뼈의 통증을 느끼면서. 간호사 언니와의 대화에 무겁게 가라앉은 심장을 위로 끌어올렸다. 천천히 눈을 뜨고 투명한 회전문을 향해 걸어갔다. 한걸음, 두걸음. 그리고 세걸음째 내딛었을때, 난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방금 전. 주황옷들이 그 하트의 주인을 데리고 들어간 응급실로 뛰기 시작했다. 띠바. 왜 자꾸 선우권이 생각나지??.. .............. 후왁.후왁. 100m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부러진 갈비뼈가 자꾸만 폐를 찔러 호흡이 짧아졌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응급실로 들어서자 비릿한 피냄새와 알싸한 약냄새가 뒤엉켜 콧구멍을 강하게 찔러왔다. 하지만 아랑곳하지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주황옷. 구겨진 하트. "언니,언니야." "예? 어?.. 다시 오셨어요??" 급하게 어디론가 뛰어가던 아까 그 간호사 언니가 날보며 눈을 동그랗게 치떳다. 하지만 언니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주황옷을 가르키며 물었다. "저사람요,방금 실려온 저 사람. 저 사람 이름이 뭐예요??.." "아시는 분이세요? 급하게 치료하느라 아직 신원확인을 못했는데. 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니 학생인 거 같은데, 참 안됐어요." "어디가...어디가 다친건데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여러명 달려와 급하게 의료기기의 스위치를 올린다.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데, 간호사 언니의 따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글쎄. 아유, 요즘 고등학생들 정말 무섭다니깐요. 구급대원들 말로는 여러명이서 저 학생을 구타했나봐요. 어찌나 심하게 때렸는지, 머리가. 후우. 정말 오늘따라― 어머. 저기요? 학생!!" 언니의 다급한 부름에도 불구하고 응급실을 뛰쳐나왔다. 길고 가느다란 쇠꼬챙이 여러개가 머리통을 쑤신다. 이를 악물고 머리를 감쌌지만, 한번 시작된 두통은 멈출줄 모르고 계속해서 나를 울렸다. .......... 김윤서를 감싸고 쓰러지던 한가람이 생각난다. 머리에서 피를 철철.흘리면서 끝까지 날 걱정하던 그 아이. 한가람이 떠오른다. 입술을 깨물었다. 피맛이 느껴진다.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올렸다. 짠맛이 난다. 울고있나??.. 내가.... 울고있나??.... 얼굴을 가득 적시고 있는 뜨거운 느낌에 주머니를 뒤적여 서둘러 핸드폰을 꺼냈다. Rrrrrr...Rrrrrrr... [수업중이야.왜?] ["....지니야.지니야....지니야..."] [...아씨발. 선생님, 저 조퇴처리해주세요. ('뭐? 수업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조퇴를-') 싫음 말구요. 후,말해. 김윤서 무슨 일이야??] 지니의 목소리 너머로 드르륵.책상 끄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다시 잠잠해졌다. 복도로 나온듯, 지니의 성난 목소리에 작은 울림이 더해진다. [김윤서!!?..김윤서 너 뭐하―] ["빨리.빨리.빨리. 있잖아,빨리."] [빨리,뭐 이년아.] ["...뜨자.지니야, 참을 수가 없다.빨랑 와서 한판 뜨자.엉?"] [..어딘데 너.] ["여기는. 있지,여기는 말이야. 여기는... 저 푸른 금잔디 위에 그림같은 집이야."] [뭐?아씨바. 장난까지 말고 어디냐고.] ["사실 여기는. 여기는 사실,여기는... 후와..지니야.그때 있잖아. 한창 김윤서가 미쳐서 날뛰던 그 때. 김윤서가 조진 새끼들이 한꺼번에 떼로 몰려와서.. 너하고 이연이 병원에 실려갈만큼 덤볐던 거. 기억나??.. 그때보다 쬐끔 더 전엔 김윤서하고 제대로 깨진 공고새끼 몇명이서 아라하고 연오 잡아다놓고 지랄한건 기억나??.. 그때보다 쬐끔.쬐끔 더 전엔 김윤서가 죠팼던 새끼 두개가 효선이하고 리아 목에 칼 들이밀면서 깝쳤던거는 기억나??.. 그리고. 그리고.. 한가람이 김윤서 대신 벽돌에 후려맞고 반죽음 당했던건??..너 기억나,지니야??"] 너무 오래 말했는지 옆구리의 통증이 아까보다 더 심해졌다. 불규칙적으로 터져나오는 숨소리를 지니가 듣지 못하게, 최대한 억누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지니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소리를 버럭 지르다.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디야.] ["있지,지니야. 나는. 나 김윤서는 괜찮은데.김윤서가 누굴 위해서 다치거나 아픈거는 괜찮은데. 나때문에.. 김윤서때문에 누가 다치는거는 싫다..너무 싫다. 눈물날정도로 싫다..."] [어디냐고 묻잖아,지금!!] ["..나는 싫다,지니야. 내가 싫다,지니야. 지니야. 지니야.. 내친구 지니야..지니야아...."] [여보세요??여보세요!! 야!!!..아오,씨발. 김윤서!! 너 지금 장난깔래!! 어?!! 김윤서어!!!!!] 힘없이 바닥으로 떨궈진 손바닥에서 핸드폰이 굴러떨어진다. 하아.하아. 입김이 뿜어져 나올 것만 같은 뜨거운 숨이 입술 사이를 비집고 터져나온다. 하늘님이 질투를 하는거다. 김윤서한테 소중한 사람들이 자꾸만 늘어나니깐,하늘님한테 쏟아야할 신경들을 조금씩.조금씩 나눠 다른 사람들에게 쥐어주니깐. 그니깐.. 그래서 질투하는 거다. ........세상 하나로 만족해야 하는데. 그 세상에 자꾸만 뭔갈 집어넣으려는 김윤서가 질투나는거다. 그치.그치 하늘님??.... 가물가물해져가는 시야 속에 직업정신이 투철했던 하얀 간호사 언니가 보인다. 뭐라고 말은 하는데 잘 들리지가 않는다. 입술을 달싹여 말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눈을 감았다. 숨이. 격하게 터져나오던 숨이. .....멈춘다. "학생!! 이봐요,학생!!!!..정신 차려요,정신. 어머,어떡해. 김간호사!! 여기 사람이 쓰러졌어요!!" .....다시는 안만들께. 어차피 김한영 조지면 끝낼 인생에 더이상 소중한 거 안만들께,하늘님. 칠공주로 만족할께. 김윤서 숨쉬게 해주는 칠공주로 만족할께. 욕심 안부려. 혼자서도 잘해요,꼭 지킬꺼야. 동정도 안해,틈도 안내줄꺼야. 반가워도 안할꺼고, 한가람처럼은 절대 안만들어. 그니깐. 그니깐.... 하늘님. 하늘님아. 제발. 제발. 그 아이는. 그 아이마저는. ............ 빛나게 놔둬. 반짝반짝. 눈부시게 빛나는 선우권으로. 제화공고 다닌다는 그 선우권으로 놔둬. 제발. 부탁할께. 나때문에. 빌어먹을 김윤서때문에 망가지는 새끼,더이상 늘리지마. 한가람 한개면 됐잖아,그 미치게 착한 새끼 한개면 됐잖아. 걘 건들지마. 걘. 그앤. 그 아인. 제발. 건들지 마.... 4-82. 쓰리아웃 ........... ................... ※한국병원 2007호. 통.통.통 링거액 떨어지는 소리 외에는 숨막힐만큼 조용한 병실 안. 게슴츠레 눈을 뜨고 넓다란 병실 안을 살펴봤다. 그러다 쇼파에 앉아있던 정지혁씨와 정통으로 눈이 마주치고. 순간 뜨끔.놀란 마음을 안고 슬쩍 몸을 일으켰다. 우악.소리가 절로 나올정도로 갈비뼈에서 느껴지는 통증은 장난이 아녔다. 하지만 정지혁씨 앞에서 차마 폼구겨지게 엄살을 부릴 수가 없어 태연한척.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지혁씨 안녕?.. 좋은 아침." "이틀꼬박 잠만 잔 사람한테서 듣는 인사치고는 너무 어이없군." "하하.사람이 살다보면 어이가 있을때도 있고,없을때도 있고 뭐 그런거죠. 그나저나 내가 이틀동안 내리 잠만 잤어요?? 오와.신기록 세우겠다,신기록." 신난 얼굴로 웃으며 말하는 날 매섭게 째려보던 정지혁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기대이상이더군, 김윤서의 쓰리아웃. 상대방은 전치8주에.본인은 전치6주. 어른들의 반이 뒷목잡고 쓰러지셨다는 거,알고 있나??" "누구처럼 감시카메라 켜놓고 빙빙.돌리는 사람이 아니여서 그런건 잘 몰라요,난. 근데 그 반이나 쓰러졌다는 어른들 중에서도 그 사람들은 멀쩡했겠죠??.." "뭐?" 처음 자기가 던진 거에 배가 되어 돌아오는 물음에 정지혁씨가 당황한 얼굴로 날 내려다본다. 빙글.미소를 지어주고는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내 모습에 정지혁씨가 입을 벙긋이며 무슨 말을 하려는 그 때, 벌컥.열린 병실문으로 바나나 농장에서 서리라도 하고 왔는지 바나나를 한아름 들고있는 이연이와 지니가 들이닥쳤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맨인블랙을 주렁주렁.달고서. "윤서야아!!!!!!!!" "김윤서,이씨발년!!!!!!!" 우왁. 내가 환자라는 걸 아는지,모르는지 무지막지한 힘으로 들이대는 미친개와 폭탄 한개.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움켜쥐며 실실.웃음을 흘렸다. "이 띠바들아..언니 지금 병원복입구 있는 거 안보여??.. 냉큼 떨어져." "그따위로 다시 한번만 전화해봐. 손가락 부러질 주 알어,너." "윤서가 다쳤다그래서 이연이 마음이 콩당콩당했도. 윤서 마이 다쳤또??" 험악한 얼굴로 내 뒷통수를 후리는 은지니와, 아예 몸 위로 올라타서 귀엽게 눈망울을 반짝이는 수이연.이 못말리는 가시네들. 보다못한 정지혁씨가 내게서 그 둘을 떼어놓는다. "지금 아가씨는 안정을 취해야합니다." "겨우 갈비뼈 몇대 나간걸로 안정까지야." "겨우 갈비뼈 몇대가 아니란 건 본인이 더 잘고 있지 않습니까??.." 보는 눈이 많아 그러는지 정지혁씨가 예전처럼 존대말을 쓰며 말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비식비식. 피어오르는 웃음을 겨우 누르고서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끼리 할 얘기가 좀 있는데.좀 나가시죠." 갑작스레 들려오는 지니의 따가운 목소리. ....지니의 차가운 눈초리에 쫄은 지니네 맨인블랙이 제일 먼저 병실을 나가고,그 뒤를 이어서는 이연이의 쟁쟁거리는 목소리가 듣기 싫었던지 입술이 예쁜 이연이네 맨인블랙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정지혁씨가 절대안정을 강조하며 병실을 나갔다. 검은 정장 셋이 빠져나가 한층 더 넓어진 병실. 우리끼리 할 말이 있다며 맨인블랙을 쫓아낸 지니가 레종을 꺼내 입에 물고서 창가로 다가선다. 어울리지 않게 분위기를 잡는 지니의 뒷모습이 웃음나 이연이에게 무슨 일있냐며 눈짓을 하는데,그 눈짓 한방에 제대로 잽싸주시는 이연이가 내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있지,윤서야. 쇼킹쇼킹왕쇼킹한 소식!!.. 김현광이...드디어 떳어,한국에." "뭐???" "한국도 그냥 한국이 아니야.바로 여기,한국병원 이라구!!!..더더더 놀란건.. 방금 전에 로비서 지니와 마주쳤다는 사실!!." "무어??!-으악." 이연이의 기절초풍할 말에 놀라 나도 모르게 일어서다 갈비뼈의 아릿한 통증에 인상을 구겼다. 그 모습이 뭐가 그렇게 재밌다고 깔깔대던 이연인 자기가 가져온 바나나를 매끈하게 까서 오물조물.맛나게도 씹어먹었다. 이연이의 연노랑 바나나를 흘겨보며 퉁퉁거렸다. "그 놈의 바나나는 아주." "우응.그래서 아무튼 말이지,거기서 더더더더더더!! 눈알이 띠용할만한건!!..지니가 김현광을 봤는데두 아무말을 안했다는 거. 심지어 인사까지 해주고서 올라왔잖아,지니가!.. 어때?? 정말 소킹하지않아??" "소킹이 아니라 아주 돼지킹하다,돼지킹해. 그러니깐 결국 환자있는 병실에서 저렇게 담배를 뻑뻑,피워대는 이유가 김현광이라 이거지." 할 말이 잔뜩 담겨있는. 하지만 결코 꺼내지는 않을 지니의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 휘유.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 쌀 한톨만큼의 피해도 주지 않은 김현광이를 미워하는건 정말 못된짓이지만,가끔 지니가 저런 복잡한 얼굴로 등을 보이고섰을땐 주먹이 저절로 꿈틀거린다. 차라리 계속 중국에 짱박혀있지, 한국엔 뭐하러 들어온 걸까 김현광은. 복잡하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한쪽 구석이 밀어넣고, 고개를 내저었다. 터질지,안터질지도 모르는 미친개를 미리부터 건드는건 바보같은 짓. 깔끔하게 결정을 내리고서 이연이가 건네주는 생수병을 받아들었다. 이틀째 잠만 자느라 텁텁해진 입안을 생수로 헹구며 갈비뼈를 쓰다듬어봤다. 흐음.손끝에서 느껴지는 감촉으로 봐선 많아야 세대. 적으면 한대. ......이왕 마음 먹은거 속전속결로 끝내야지.어차피 이번 쓰리아웃으로 어른들이 움직이기 시작할텐데말야. 빈 생수병을 옆 협탁 위에 올려놓고 팔뚝에 꽂혀있던 링거 바늘을 쑤욱.뽑았다. 송글송글.올라오는 피를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고서 침대에서 내려오자 이연이가 두번째 바나나를 까먹이며 베실베실.웃고 있었다. "그러다,죽어 윤서야." "웃으면서 할 소린 아니라고 본다,이연아." "그렇긴 하지만.. 어디갈라구??.." "서울." "서울?" "엉.서울." 이연이의 머리통을 쓱쓱.쓰다듬어주고 옷장으로 걸어가 외투를 꺼내들었다. 하늘색 환자복 위에 검은 잠바를 걸쳐 입고서 몇일 안감아 냄새가 나는 머리를 모자 속에 집어 넣는데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돌린 은지니가 말했다. "서울어디." "와.감정변화 제대론데??..담배의 위력인가,아님 김현광의 위력인가.하하하." "서울 어디냐고 물었어." 유쾌하게 터트린 웃음 뒤로 지니의 메마른 음성이 따라왔다. 아까까지만해도 불같이 화를 내던 지니의 빨간 눈동자가 어느새 본래색을 되찾았다. 지독할만큼 차가운 지니의 눈동자를 보며 빙글.웃었다. ...만약 김윤서 약점이 뒷통수라면,은지니 약점은 김현광일꺼야. "..강남. 서울공고의 아지트 폭풍,거기." "가지마." "나지마." "...농담하자는 거 아냐,김윤서." "분위기 잡지마,너가 그러면 서울이 아니라 김현광 한테로 가버릴지도 몰라." 지니가 험악하게 눈을 부라린다. ....농담아냐,지니야. 너가 자꾸 이렇게 아파하고,힘들어하고. 또 점점 겨울처럼 변해가면 난 김현광을 찾아갈꺼야. 그 새끼 멱살을 잡고 옥상에서 떨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새끼 얼굴보고서 이성이 날아가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새끼 찾아가서 말할꺼야. 은지니 심장을 그만 놔달라고. 이제 겨우 웃을 수 있게된 은지니 심장,이만 놓으라고. 웃고있는 입과는 달리 진지한빛이 가득한 내 눈동자에서 숨겨진 김윤서 마음을 읽었는지 지니가 한숨을 내쉬며 눈에 줬던 힘을 사르르.풀어내렸다. "..오늘 무리야.적어도 일주일은 더 병원에서 치료받고 가. 아니면 차라리 내가 갈테니깐―." "이연아 거기 붕대 좀 줘." "응,여기." "수이연!!.." 세번째 바나나를 까먹으며 이연이가 내게 붕대를 넘겨주자 지니가 낮게 소리쳤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환자복을 들춰 갈비뼈 주위를 붕대로 둘둘.감기 시작했다. 턱.제대로 화난 은지니가 거칠게 손목을 비튼다. "늑골에 찔려서 숨도 못쉬고 싶어?!!" "너보단 나아. 난 고작 갈비뼈 두어개고,끽해야 폐 한개지만 넌 심장이잖아. 아니,심장뿐만 온 몸이 김현광한테 눌려서 숨을 못쉬잖아..." "김윤서." "나보다 아픈 새끼한테 걱정받을만큼은 아니니까 내 걱정말고,니 걱정이나 해. 그리고 너도 알잖아. 김한영 조지기 전까지는 김윤서,죽어도 사는 거." 지니의 손을 떼고 붕대를 마저 감았다. 지니 말대로 부러진 갈비뼈가 폐에 닿을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밀려왔지만, 못참을 정돈 아니였다. 피곤한듯,얼굴을 쓸어내리며 지니가 내게서 물러나 벽에 몸을 기댔다. "...같이가." "아니.이번만큼은 아냐." "김윤서, 고집 부리지 말고 좀." "지니야. 윤서 고집 알면서잉♡ 그냥 우린 여기서 바나나나 먹으면서 둘리네 재룡잔치나 보자.오늘 둘리가 드디어 재룡잔치를 한단말이야." 아까부터 눈치3128단으로 이쁜짓만 골라하던 이연이가 마지막 라스트를 귀엽게 장식해준다. 아유,이쁜것. 나중에 내가 바나나 우유 한박스 사다줄께. 눈치껏 지니에게 애교를 떨어주는 이연이에게 윙크를 날려주고 병실문을 열었다. 고개만 빼꼼.내밀어 복도를 상황을 살펴보니 엘레베이터 앞에 서있는 맨인블랙 두 개, 비상구쪽에 서있는 맨인블랙 한 개. 그리고 접수창구에 서있는 맨인블랙 두개가 보였다.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딜 뚫어야 힘 안들이고 병원을 나갈 수 있을까. "내 맨인블랙 뚫어,저 남자가 제일 쉬워." "흐음.체격이 장난이 아닌데??" "병신. 그런 거 더 좋아하잖아,너." "아잉.부끄럽게." "...힘들면 전화해.갈테니깐." 두번째 레종을 입에 문 지니의 목소리는 불쌍할정도로 힘이 없었다.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힘없닌 지니의 목소리에 나까지 덩달아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붕신이야,은지니는. 그렇게 맥아리 없이 말하면, 김윤서가 좋다고 오케키 할 주 알았냐?? 나 없는 동안 여기서 잠이나 자. 피곤해보인다, 은지니 목소리." "목소리도 보이냐 넌??"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농담이 없어. 그럼 나 갔다올게, 그리고 정리아.그 대마왕한텐 입도 벙긋하지마,평생 병원에서 썩고싶지 않으니깐." 재밌는 농담을 던지듯,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병실문을 조금 더 크게 열었다. 가장 쉽다는 지니의 맨인블랙은 비상구 앞에 서서 핸드폰을 열심히 띡띡.거리고 있었다. 아래로 늘어진 눈꼬리나, 따뜻하게 풀린 입꼬리는 지니의 말대로 정말 쉬워보였다. 퍼석하게 마른 입술을 할짝이며 천천히 맨인블랙에게로 다가갔다. 내가 코 앞에 다가설때까지도 핸드폰에 정신이 팔렸던 그 맨인블랙은 반갑다는 내 인사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봤다. "어??지금 병실에―" "미안요. 나중에 지니한테 배로 갚아주세요??" 퍽.둔탁한 소리와 함께 눈을 동그랗게 뜨던,그 쉽고 귀여운 맨인블랙이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탁탁.쓰러진 맨인블랙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어두운 비상구로 한걸음 내딛었다. 후아.쉼호흡을 하고 계단을 뛰어내려갔다.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도착한 1층.아픈 갈비뼈를 움켜쥐며 비상구 문을 여는데,문을 열자마자 김윤서를 반긴건 왠 남자 아이 하나였다. "으왁!!..심장 놀랄뻔 했네. 비상구 앞에서 뭐하세요?" 약간의 오버를 더해 가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비상구 바로 앞에 서서 날 놀래켰던 그 남자아이가 갑자기 싱긋.웃었다. 옅게 패여진 보조개가 깜찍할만큼 귀여운 그 아인 마치 오랜 친구라도 만난듯,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윤서야. 아까부터 너 내려오기만 기다렸어." 보조개가 하는 말에 미간을 좁혔다. 만나서 반가워,윤서야??.. 내 주위에 이렇게 친한척을 떨만한 녀석이 있었던가. 눈썹을 긁적이며 누구냐고 물으려는 그 때.나보다 한발 앞서 그 보조개가 자기 소개를 했다. 입이 떡.벌어질만큼 놀라운 자기 소개를. "난 현광이야,김현광. 연오나 다른 애들은 자주 봤었는데, 너하고는 이게 처음이라 좀 떨린다. 계단으로 다니는 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정말이네. 아.어쨌든 정말 만나서 반가워." 도저히 미친개를 사랑하는 미친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남자애 하나가 그 미친놈,김현광이 맞다며. 도저히 미친개를 아프게 만든 나쁜놈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남자애 하나가 그 나쁜놈,김현광이 맞다며. 너무나도 해맑은 웃음과 함께 소개를 한다. 떡.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바보처럼 꿈벅이는 눈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서 나는 자기가 김현광이라고 소개하는 아이를 멀거니 쳐다봤다. 한국에 있을땐 한창 제정신이 아니여서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지니의 남자친구,김현광. 지니를 놓아주지 않는 못된 마음처럼 못되게 생겼을거라고 짐작하고 있던 내 예상을 하얀 보조개로 산산히 깨트리고 있는 지니의 남자친구, 김현광. ........ 미친개의 미친사랑. 김현광. 4-83. 의외인 김현광 .......... ※한국병원 벤취 서울행을 잠시 미루고 병원 앞뜰에 마련된 벤취에 앉아 내게 음료수를 건네는 김현광을 쳐다봤다. 아무리봐도. 얜... "...김현광,맞아 너.요??.." "응. 그리고 편하게 말놔,동갑인데 뭐하러 말을 높혀." "와.존나 놀랍네. 진짜 그쪽이 김현광??.." "으응." 조금 쑥스러운 듯, 김현광이 양 볼을 붉히며 수줍게 말한다.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순진하기로 따지면 아라와 비둥비둥하고, 귀엽기로 따지면 이연이와 삐까한 아이가 김현광일 수가 있어?!!.. 게다가 솜털도 안가신 이 뽀얀 얼굴이 동갑이라니. 오주여. 정말 대단하십니다. 고개를 저으며 감탄,그 비슷한 감정을 토해냈다. "와.정말 신기 그자체야." "으응?뭐가." "너말야,너. 지니한테 하는 거 보면 와,난 완전 나같은 앤줄 알았는데. 한솔이처럼 생겨서 놀랐어." "한한솔??" "어?너가 한솔일 알어?" 조금 놀란 눈으로 김현광을 돌아봤다. 내 눈빛에 김현광이 갑자기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미안.." "난 파안." "어.어??" "개그하자는 거 아녔어??" "아. 하하.. 정말 듣던대로다, 너." "뭐라고 들었는데??" 빙글웃으며 묻자 김현광의 표정이 또 아까처럼 시무룩해졌다. "어디 아퍼??..아까부터 왜 뭐만 물으면 시무룩시무룩이야??.." "나 이상하지??" "너 이가 상했는지,안상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 내 이는 튼튼해." "하하.." 시덥잖은 내 농담에 김현광이 여전히 무거운 기색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뭐랄까. 웃는것도 예쁘고, 말하는 것도 예쁘고, 풍기는 분위기도 참 예쁜데. 이 아이..진짜가 없다. 김윤서가 제일 싫어하는 양파처럼 진짜 알맹이는 꼭꼭 감춰두고서,그 위로 겹겹히 벽을 싸놓은 그런. 내 눈빛에 실망이 떠오르는 걸 느꼈는지, 살짝 눈썹을 찌푸린 김현광이 날 보며 조금 쓰게 웃었다. "..물어도 알려주지 않으니까,내가 직접 알아보는 수 밖에 없어서 그랬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해. 그냥 궁금해서.. 지니가 유일하게 좋아한다는 너희들이. 그리고 네가 궁금해서.. 다른 애들하고는 몇번 만난적 있었는데, 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더 궁금했어. 그래서 그냥 뒷조사를 좀 했는데.. 정말 미안해. 나도 이런 내가 싫지만 어쩔 수가 없어. 지니는..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는 걸." 아. 그제서야 왜 무슨 말만 하면 김현광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는지 알 수가 있었다. 은근히 웃긴 아이,김현광. 아라하고 연오는 맨날 남 뒷조사 하고 다니는데,그게 그렇게 미안할 짓인가??.. 어깨를 으쓱이며 참 안쓰러운 얼굴로 앉아있는 김현광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봤다. 어디가 아픈지 얼굴이 새하얗다. 얼굴은 이연이 취향. 까맣게 염색한 머리가 꽤나 단정하다. 머리는 효선이나 리아 취향. 웃을때마다 옅게 파이는 보조개가 귀엽다. 웃는건 김윤서 취향. 예의바른 말투가 제법 진지해보인다. 말투는 아라 취향. 입고 있는 옷들은 아주 센스가 만점이다. 옷차림은 연오 취향. ......... 다 좋은데 아쉽게도 지니 취향이 한개도 없네. 입맛을 다시며 김현광에서 시선을 뗏다. 시원하게 음료수를 들이키는데, 옆에서 김현광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오가 그러더라.. 널 찾아가면,그래서 너란 애를 만나게 되면 날 알게 될거라구. 지니에 대한 내 사랑을 깨닫게 될 거라구 말야. ....니가 보기에 김현광은 어떤 사람 같애?.." "음. 대답하기 전에 한개만 물어볼께.넌 지니를 보면 뜨거워, 아님 차가워??" "어? 그게 무슨 소리야??.." 한 번에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김현광에게 친절하게 웃어보이며 다시 한번 물었다. "김현광은 은지니를 보면 심장이 어떠냐구. 뜨거워,아님 차가워??..." "..차가워,항상."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아오는 조금 의외인 딱딱한 대답. 김현광의 굳은 얼굴을 흘끗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그래, 왜 지니가 너가 아닌 최필립 앞에서 웃게 됐는지 알겠다. 단숨에 음료수를 비워낸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을 향해 빈 음료수 캔을 던졌다. 기분 좋은 곡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쏙.들어가는 캔. "있지말야. 너가 보기엔 지니가 차가운 거 같다는 말이지??." "응." "..틀렸어,지니는 뜨거운 애야. 펄펄끓는 열탕에 몸을 담가두는 아이야, 지니는." "그건 너희들한테만이지, 나한테는 아냐." "아니. 그건 너가 잘못보고 있는 거야." 단호하게 말하는 김현광의 말에 나 역시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단호하니까 단호박 생각나네.. 허기진 배를 문지르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니의 심장이 걸린 중요한 문제에서 단호박에게 마음을 빼앗기면 안되지, 암. 그렇고 말고. "..지니가 차갑다고 생각하기때문에,넌 뜨거워지려고 해. 그건 열탕에서 나오자마자 또다른 열탕에 들어가는 거랑 똑같애. 너 그렇게 열탕 두번 들어갔다 나오면 어떻게 되는 줄 알어??... 온 몸이 빨갛게 데여. 화상처럼 온 몸에 상처가 남는단말야. 그래서 쓰라리고, 아퍼. 너하고 지니가 딱 그래. ...지니한텐 너같은 열탕이 아니라,냉탕이 필요해. 뜨거워진 몸을 시원하게 식혀줄 냉탕." "....최필립같은 새끼?.." 아까까지 내 옆에 있던 그 애가 맞나싶을정도로 섬뜩한 기운이 퍼져왔다. 둥그래진 눈으로 김현광의 얼굴을 보다 눈썹을 긁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엉,맞어. 최필립은 냉탕이야. 은지니의 냉탕. 빙그레 웃으며 김현광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 "물었지,내가 보기에 김현광이란 사람 어떠냐고. 김윤서가 본 김현광은 굉장히 좋은애야. 따뜻하고,눈이 부셔. 고작 몇분밖에 안 본 사이지만 그래. 그래서 지니의 입을 웃게 해주는 아이." "...지니는 내 앞에서 절대 웃지 않는걸." "아니,넌 모르겠지만 네 해바라기같은 사랑에 지니도 가끔 웃어. 담긴 의미는 쬐끔.답답하지만 말야. 아무튼 넌 지니의 입을 웃게 해주는 애야. 근데 최필립은. 그 앤. ....지니의 심장을 웃게해줘. 뜨겁게 달아올라 주체를 못하는 지니의 심장을,그 아인 시원하게 웃게해줘. 그래서 난 너가 이제 그만 놔줬으면 좋겠어. 새카맣게 타서 잿더미가 된 지니의 심장을,그만 니가 버려줬음 좋겠어." 타악.머리 위에 올려져있던 내 손을 거칠게 떼어낸 김현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눈이 참 김윤서같다. 흠뻑 젖어서,더이상 젖을 데가 없어보이는 게. 개같은 김윤서 눈동자랑 똑같아,너. 김현광은 금방이라도 쏟아낼듯, 무거운 눈물 방울을 가득 담고서 힘껏 소리쳤다. "싫어!!!..죽어도 그건 싫어.지니가 없음 내가 죽어. 내가 있음 지니가 죽는다는 거 알지만!!!..알지만... 지니가 없으면 내가 죽어. 김현광이 죽는단말야.... 너까지 그러지마,윤서야. 연오가 그랬단말야.. 너가 등을 돌리면... 그럼... 내가 포기해야 된다구.. 그렇게... 말했단 말이야..." 우는 게 참 슬픈 아이. 김현광은 그렇게 내 어깰 부여잡고 고개를 숙였다. 격하게 들썩이는 김현광의 어깨가 눈동자에 아프게 박혀왔다. ....이래서 안된다는 거야,김현광. 만약 최필립이였다면 자기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지니를 놔줬을껄. 그렇기때문에 그 애가 지니의 심장일 웃게 할 수 있는거고, 지니의 냉탕이 되어줄 수 있는 거야. "...사람마다 사랑하는 건 틀리니깐, 내 잣대로 네 사랑을 말하는 건 어이없는 일인거야. 좋아,너 사랑이 그런거면,너 원하는대로 해. 말리지 않아. 하지만 지니를 더 아프게 하면.이제 겨우 웃을 수 있는 그 애,심장을 너무 아프게 만들면.. 그땐.... 고추를 떼버릴꺼야." 빙글. 진지하던 분위기가 기우뚱.하고서 갑자기 뒤집힌다. 김현광은 조금 어이없는 얼굴로 날 쳐다봤고,난 그런 김현광을 향해 하얀 이까지 드러내보이며 웃었다. 그런 상황이 얼마나 지속됐을까. 이번엔 김현광의 어깨가 아까완 전혀 다른 의미로 들썩이기 시작했다. "크크..크큭하하..하하.." 아까처럼 묵직한 웃음소리가 아닌,정말 가볍고 유쾌한 웃음소리가 김현광에서 터져나온다. ....그래. 원래 너도 이렇게 예쁘게 잘 웃는 아이야,김현광. 지니가 아니었음 누구보다 해맑고, 가볍게 웃을 수 있는 아이가 바로 너인거야. 지니하고 넌 서로한테 독이 될 수밖에 없는 사이란걸 조금쯤은 알겠냐??.. 한참을 크큭대며 웃던 김현광이 살짝 눈물고인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정말 대단해. 만나길 잘했어,김윤서." "엉,고마워." "...후우. 잘 생각할께,매일매일 생각해볼께. 근데 아마. 내가 먼저 지니를 놔주는 일은 없을거야. 지니가 날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나 참 나쁘지??" "자기 입에서 나쁠꺼란 말이 나오면,그 뒤론 다른 사람 말은 필요 없는 거야." "....응.그래." "후와.그럼 난 일이 있어서 먼저 인나보께. 지니 만날라면 어디 있는지 알테니까,알아서 잘 만나고 가. 빠빠이,김현광. 만나서 재밌었어." 씩.웃으며 어깨 위에 올려져있던 김현광의 손을 내려놨다. 뼈가 시릴정도로 차가운 겨울바람에 호호.언 손에 입김을 불며 지하철역으로 몸을 돌리는데,추운 날씨에 안 어울리게 따뜻한 김현광의 손이 손목을 잡았다. "타구가,데려다줄께. 서울 간다고 했지??.." "헐.너 도청까지 해?.." "...가끔." 힘없이 웃으며 김현광이 날 데리고 은색 sm5으로 걸어갔다. 꽤나 사는 집안의 도련님인지 기사아저씨로 보이는 사람이 뒷문을 열어준다. 오와.. 김현광,제대론데?? 기대는 촉감까지 아주 죽여주는 sm5는 김현광과 날 태우고서 그렇게 서울로 향했다. .............. ※58분뒤. "으쌰.빨리 도착했네??.." "응. 심하게 싸우지 말고,조심해. 지니,너 다친거 알면 또 난리칠테니까." "싸울때 결과를 보고서 싸우면 재미 떨어져. 하지만 니 말대로 은지니 미친개 만들면 안되니까,조심은 해볼께. 태워줘서 고마웠어,잘가!" "응." 검게 세팅된 유리창이 스르륵.내려가고 뿌연 매연과 함께 첫만남이 굉장히 새로운 김현광과 sm5가 사라졌다. 쓰윽.점점 작아지는 sm5의 뒤꽁무니에서 시선을 떼고 서울공고의 비밀 아지트. 어둡고 무서운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그 곳,폭풍의 입구를 바라봤다. 좀 늦은 시각이라 그런지 지하에서 불빛에 새어나오고 있었다. 사람이 있단 거겠지??.. 손등으로 마른 입술을 쓸며 천천히 폭풍의 입구로 걸어갔다. 오늘은 폭풍을 조지고,김한영이 인천에 돌아오는 그 날. 그 날은 김한영을 조져야지. 생각만해도 발가락에서부터 온 몸이 짜릿해진다. "한바탕 신나게 놀아볼까??.." 고개를 삐딱하게 쳐들고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터벅터벅.천천히 폭풍의 입구로 걸어갔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조금씩 커져가고.마지막 계단에 다다랐을때, 나는 갈비뼈의 통증도 잊고 신나게 웃을 수 있었다. 김한영의 서울공고. 그리고 김한영의 서울연합. .......... 뻐엉.이곳저곳 구겨진 철문을 발로 꽝.차며 폭풍의 내부로 들어선 나는 동그란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서울공고 떨거지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헬로,에블바리?? 김한영 꼬붕들 만나서 반가워." 4-84. 폭풍 .......... ※ 쿠왕.퍽.투칵.. 넓은 지하의 천장이 둔탁한 소리로 쉴세없이 울린다. 대충 서른명쯤이 서있던 폭풍에는 인제 떨거지들이 다 떨어져나가고.진짜 알짜배기, 열명이 경악스런 얼굴로 김윤서를 쳐다보고 있었다. 후와후와. 가뿐 숨을 몰아쉬며, 방금 전 내 어깨를 후려치고서 제 주인과 함께 바닥을 뒹굴었던 당구큐대를 주워들었다. "후와.. 벌써 쫄았어??.." "씨바.너 누구야." "나??..나 너네 조지러 온 이쁜이라니깐." "너 뒤지고 싶어서 환장했냐?..여기가 어딘줄 알고-." "서울공고의 비밀아지트,폭풍. 더불어 김한영이 끔찍히도 아끼는 후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여기가 어딘지는 너네처럼 아주 잘 알구 있지." 빙글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남은 열명의 제일 앞에 서서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눈썹의 스크래치가 참 인상적인 아이가 갑자기 표정을 굳히더니 폭풍의 가장 안 쪽에 위치한 어느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기 시작했다. 도대체 뭘보나.하고 나도 시선을 돌리려다 뒷목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급히 허리를 숙였다. 부왕.소름끼치게 짜릿한 바람소리가 미처 아래로 내려오지 못한 내 머리카락을 후려치고 지나갔다. ......후와. 짱이야,정말. 서울연합의 최고봉들만 모인 새끼들이라더니, 정말 이름값은 하네. "야구선수로 나갔으면 벌써 바차호랑 삐까하겠어.??.." "죽여버린다,너." "엉,한번 죽여봐. 나 죽고싶어서 이렇게 찾아온거니깐, 한번 작살나게 죽여봐. 근데,이거 한개 알고 시작해라. 너네가 김윤서를 못죽이면,김윤서가 너넬 죽인다는거." 방금 전. 엄청난 바람소릴 내며 당구큐대를 휘두르던 녀석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김윤서를 죽여버리겠다는 그 녀석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까처럼 큐대를 휘두르며 내게 달려들었고,아예 바닥에 주저앉을정도로 무릎을 굽힌 나는 아래쪽에서 다리를 휘둘렀다. 퍼흑. 녀석의 정강이를 힘껏 후려찼다. 맞닿은 감촉으로 봐서는 끽해봤자 금이나 몇개 갔을까?..갈비뼈의 통증이 생각보다 심했는지 예전같지가 않다. 아쉬운 입맛을 다시며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으로 고꾸라진 녀석을 밟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껏 휘두르고 싶으면 적당히 힘조절을 해야지. 그렇게 한곳에 힘을 모아두면,한꺼번에 무너지잖아??.." "이씨발!!!!.." "저씨발!!.." 쿠왁.진한 욕을 내뱉으며 일어서려던 녀석의 뒷머리를 잡아채 무릎팍으로 힘껏 내질렀다. 녀석의 코뼈와 무릎팍이 정통으로 마주치고,결국. 녀석은 쌍코피를 터트리며 뒤로 넘어갔다. "열아홉이네,인제. 떼로 덤비는게 난 좋은데,꼴에 서울연합이라고 한놈씩 덤벼도 괜찮어. 그니까 빨랑 컴온 베이비." "너!!...-" "그만둬,창수야." 아까 그 눈썹 스크래치가 주먹을 움켜쥐며 달려들려다,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하나에 주먹을 풀고 자리에 멈춰섰다. 지금 김한영은 경상도 어디 산골 한자락에 내려가있대니깐, 대빵은 아닐꺼고.이정도 위력을 내뿜을 정도면..부대빵정도 될라나??.. 눈썹을 긁으며 고개를 들자 창수라고 불린 아이 뒤로 왠 녀석 하나가 걸어나오는게 보였다. ......저 새끼. "누구지??.." "반아석이다.반아석." "....반아석??..이름 예쁘네." "요즘 서울연합 조지고 다닌다는 미친년들이 있다던데, 역시 너였구나." "왠지 김윤서를 잘 안다는듯한 말투??.." "여기서.아니,이 자리에 있는 새끼뿐 아니라 서울연합치고 니 이름 모르는 새끼는 없어." "인천이나 부산은 몰라도,서울에서 나댄적 없는데 나는. 요 몇일새 두 학교 조진걸로도 그렇게 유명해지나??.." 픽. 자길 반아석이라고 소개한. 처음보지만 왠지모르게 낯익어 보이는 그 아이,반아석이 어이없다는 듯.실소를 흘리며 나를 삐딱하게 쳐다봤다. 결코 좋아보이지 않는 반아석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였다. 서울연합치고 지들 조지겠다는 김윤서를 좋아라하는 새끼는 없겠지만,반아석의 삐딱한 시선은 그 이상이였다. 싫어한다는 감정 그 이상. 반기지 않는 감정 그 이상. ...... 보나마나 김한영이 엮였겠지.빌어먹을이다,정말. "실은 너도 잘 알고있잖아. 어째서 너가 이렇게나 유명한지.." ".....첫인상 참 조졌다,너. 첫인상 조지면 인생이 고달플껀데. 안그래??.." "그딴거 신경 안쓰고 산지 오래여서 말이야." "후와. 리아랑 붙여놓으면 참 볼만하겠어." 쉴세없이 몸을 움직일땐 몰랐는데,이렇게 주둥이로만 나불나불거리니 잊고있던 갈비뼈의 통증이 끔찍하리만큼 띵.하게 밀려온다. 마주선 서울연합 새끼들이 모르에 갈비뼈를 움켜쥐며 후읍.숨을 멈췄다. 꼴사납게 김한영 꼬붕들 앞에서 쓰러질수야 없지. 이를 꽉.물고 눈을 부릅떳다. "그만하고 슬슬 다시 시작-." "한영이형이 얼마나 널 생각하는 줄 모르지?" "...김윤서 앞에서 그 이름 꺼내는거,별로 니 건강에 안좋을껀데." "한영이형이 얼마나 널 좋아하는 줄 모르지." ".....아.머리아퍼." "한영이형이 얼마나 널.얼마나 널...." 우는걸까. 조금씩 사그라드는 반아석의 목소리. 하지만 사그러들던, 피어오르던 반아석의 목소리따윈 이미 들리지 않았다.아래로는 아작난 갈비뼈가,위로는 지끈거리는 두통이 누르는 통에 흐려지는 시야를 최대한 열심히.최대한 꽈악.붙잡고 있는게 최고였으니깐. ....저새끼는 뭐 저렇게 할 말이 많아. 나불나불.꼬불꼬불 지렁이면 말을 안해,사내새끼가 나불나불 나방이 뭐냐,나방이. "....-래서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한영이형한테 맞아 뒈지는 한이 있더라도 너한테는 못줘.절대 안줘. 한영이형 전설,절대 너같은 거한테 주지 않아.." "그딴거 달라고 빌빌댄적 없는데,나는." "서울연합은. 김윤서한테 깨지지 않을꺼란 얘기야." "말만 그럴듯하게 하지말고 직접 덤벼봐. 입만 산 새끼들은 질리도록 봐왔거든." 휘익. 폭풍 한 가운데 위치한 당구대에 올라서 씩.웃었다. 뭔가 할말이 더 남은듯,아쉬운 얼굴로 손을 까닥이는 반아석. 그와 동시에 서울연합의 최고봉.그 중에서도 진짜 최고봉들만 모인 18명이 일제히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핏줄이 투둑.튀어나올정도로 큐대를 움켜쥐고서 마음속으로 말했다. 씨발같은 김한영,조질때까지만 버티게 해달라고. .................... ........... ※ 툭. 마지막으로 남아 버텼던 반아석의 피묻은 손이 힘없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금방이라도 빠개질듯,위태로운 머리통을 꽉 누르며 반쯤 뒤집힌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는 반아석을 향해 쪼그려앉았다. "서울연합은 김윤서한테 깨지지 않을거라구??..이렇게 개박살이 났는데,인제 어쩔꺼니 아석아. 엉??이름 예쁜 아석아, 아까 나불대던 주둥이로 또 나불대봐." "하..한영..형은...절..대..." "..김한영 어디가 좋아??..옛날 인천연합부터 시작해서, 정말 궁금해서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야. 그딴 새끼, 어디가 그렇게 좋은거야??.." 띠잉.띠잉. 머리 속에서 종이 울린다. 내 머리속의 지우개가 아니라,내 머리속의 딸랑이가 되어 김윤서의 머리를 울린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듯.잔뜩 찌푸린 얼굴로 빙긋 웃었다. 아무래도 반아석은 내 질문에 대답을 해줄 생각이 없는가보다. 더이상 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으니깐.. 털썩.다리에 힘을 빼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부러진 큐대에 긁혀 길게 찢어진 손등의 상처를 핥으며 고개를 들었다. "....서울연합. 내가 부셨거든,김한영??..니가 그 누구보다 소중히 여기던 인천연합 조지고,인제 서울연합까지 박살냈거든??... ...그니까 인제 너야.지긋지긋한 김윤서 인생, 쫑낼 수 있는 김한영 바로 너가 다음이야. 그리고. 그리고 너가 마지막이야. ...김윤서 처음이자 마지막일 너가 바로 김한영이라구. 그니까 빨리 와. 빨리 와서... 빨리..." 씨발. 혀가 굳었다. 있지도않을 김한영에게 주절대던 말을 그만 멈추고, 눈을 감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 마지막으로 내가 봤던건. 맨 처음.눈썹의 스크래치,창수가 보던 곳이였다. 굳은 얼굴로 처음부터 끝까지 서울연합 새끼들이 봤던 그 곳. ........... 김윤서의 얼굴. 김윤서가 담긴 액자. 김윤서 키를 훌쩍 넘길 아주아주 커다란 사진. ...................... 붕신.... 털썩. 여전히 찢어진 상처로 피가 베어나오고 있는 손이 쓰러진 서울연합 새끼들 위로 떨궈졌다. 2004년 11월 1일. 김한영 조지기 27일 전. 세번째. 인천연합 금잔디 박살. 2004년 11월 3일. 김한영 조지기 25일 전. 네번째. 서울연합 서울공고 박살. ......그리고. 2004년 11월 4일. 다섯번째. 서울연합 성안상고 박살.(은지니) 여섯번째. 서울연합 진일고 박살.(수이연) 2004년 11월 6일. 일곱번째. 서울연합 제일고 박살.(수이연) 여덟번째. 서울연합 서초남고 박살.(은지니) ......... .. 2004년 11월 7일. 마지막. 서울연합 금천상고 박살. ................ ............. ......... ... ※11월9일. 삐.삐. 일정한 기계음이 울리고 있는 한국병원 2007호. 커다란 의료기계들에 둘러쌓여 작은 숨소리를 내뱉고 있는 윤서를 바라보고 있는 10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죽여버릴라.와,진짜. 김윤서.. 아주." "리아야 그만해. 많은 일이 있었다잖아." "많은일??..그래. 참 많은 일이 있었지. 당분간만이라도 조용히 지내라고 보내놨드니,겁도 없이 서울연합에 쳐들어가 애새끼들을 조져놓지않나. 변장까지 시켜서 학교에 보내놨드니, 인천연합 짱하고 싸움질을 하지 않나. 게다가 늑골이 부러져서 병원에 입원시켜놨드니,폐가 찢어질때까지 싸워 이지경까지 오고 말이야. 아주 참 많은 일이 있었지.안그래??.." 정말 화가난 듯.매서운 눈으로 리아가 윤서를 노려봤다. 하늘님이 도운건지,아니면 김윤서가 인간이 아니던지 둘 중 하나였다. 갈비뼈가 부러진 상태에서 서른명이 넘는 서울연합과 싸워 이긴걸로도 모자라,아직까지 목숨이 붙어있다니. 전화를 받고 인천으로 올라오는 내내 리아는 윤서를 영안실에서 만나게 될 줄 알았다. 다행히 영안실에서 윤서를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전치12주라는 판정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윤서를 봤을땐 조만간 장례식장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정도에서 그친게 어디야.후,이제 우리라도 왔으니 괜찮겠지." "효선이 너 그런말이 지금 나와? 우리라도 왔으니 괜찮다고??.. 언제 김윤서가 우리 눈 봐가면서 싸움한적있어?..아마 좋다고 더 날뛸껄. 이번일로 어른들까지 모두 다 아셨는데,뒷수습은 어떻게 할려고..아.진짜.. 눈만 떠봐,김윤서. 아주..으으." 리아가 주먹을 부르르 떨며 입술을 깨문다. 너무 울어 눈이 퉁퉁 부은 아라는 아직까지도 나올 눈물이 있는지,훌쩍이며 차갑게 적셔온 물수건으로 윤서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냈다. 그 모습을 보며 답답하다는 얼굴로 가슴을 치던 리아가 어른들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효선이와 같이 병실을 나가고,아라의 반대편에 앉아 윤서의 손톱에 보라색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던 연오가 지니를 향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은지니,효선이하고 리아가 인천 오기전에 괜히 이것저것 알려주고 그랬겠니??..이런 일 있으면 먼저 말려야지, 오히려 더 부추겨? 아주 제정신이 아냐,제정신이." "닥쳐." "김윤서라면 이렇게 대답했겠지. 닭가져와,쳐줄께." "흐으..윤서,깨어날 순 있을까?..유,윤서..이대로 안깨어 나면 어떡해..얘.얘들아.."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이 있잖아? 걱정마,아라야. 그리고 얘는 이미 인간이 아냐.그니까 금방 털고 일어날꺼야. 너는 모르겠지만, 가끔 깨서 이연이보고 먹을 것좀 사오라고 그랬다더라. ..맞다. 수이연 얘는 바나나우유사러 어디까지 간거야??" 울고있는 아라를 꽤 솜씨있게 달래며 연오가 매니큐어의 뚜껑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쇼파에 앉아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지니를 향해 끌끌. 혀를 차며 이연이를 찾기위해 병실을 나갔던 연오가 갑자기 되돌아와서는 부산스럽게 윤서의 머리를 매만진다. 연오의 뜬금없는 행동에 아라는 물론이고 지니까지 어이없어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달칵. 병실문이 열리면서 한무더기의 교복무리들이 들이닥쳤다. 교복무리들의 맨 앞에는. 손에는 목발을 짚고,목에는 깁스를 한 금잔디가 시원한 얼굴로 서있었다. "인천짱,김윤서한테 인사하러 왔다." 갑작스레 들어닥쳐서 인천짱한테 인사하러 왔다는 금잔디의 말도 당황스러웠지만,그보다 더 당황스러웠던건.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였다. "오케이.만나서 반갑다,애기들." 4-85. 인천연합 접수 ........... ※4분뒤. 톡.치면 툭.하고 쓰러질 것같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라가 열명쯤 되는 인천연합 애기들 앞에 바나나 우유.를 놓으려다 정신을 차리고는 초록색 알로에를 가져와 내려놨다. 지니는 매우 화난 얼굴로 씩씩거리며 병실을 나간지 오래였고, 연오는 1분 전.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리아와 효선이를 찾아 병실을 나갔었다. 이연인 바나나우유를 사러갔다가 아직 안들어 왔다고,아라가 말했다. 그래서. 넓다란 병실 안에는 싱글벙글.웃고 있는 김윤서와, 내가 멀쩡히 앉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 아라와. 그리고 금잔디와 정지운을 중심으로 길게 쇼파에 앉아있는 인천연합밖에 없었다. "내가 깨난지 얼마 안되가지고,얼굴이 이따위야. 미안해?.. 참.그리고 먼저 찾아와준건 고마워." "괜찮아." "역시. 금풀은 마음에 든다니깐." "금풀??.." "너 이름 금잔디잖어. 그니까 금풀맞지,뭐. 하하하-악." "유,윤서야!! 괜찮아??" 웃다 갈비뼈가 욱신거려 배를 움켜쥐는데,사색이 된 아라가 후다닥 달려온다. 나보다 더 떨면서 괜찮냐고 물어보는 아라에게 빙긋.미소를 지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라 무서워서 아파도 못하겠다. 여전히 핏기가 가셔 새하얘진 얼굴로 내 옆에 앉는 아라. "그나저나 김윤서한테 인사하러 왔다구??.." "그래. 그때 내가 졌으니깐,이제 인천짱은 너야 김윤서." "흐음.인천짱을 원하게 아녔는데,나는." "인천연합을 걸라며." "인천연합을 걸라고했지, 인천짱을 걸라고 하진 않었다?.. 그리고 내가 갖겠다고도 안했어,붕신아. 칠공주꺼 하래니깐.." "...넌 날 이겼어." "대신 넌 내 갈비뼈를 아작냈잖아." "원하는 게 도대체 뭐야?" 빙글빙글 웃으며 대꾸하는 내가 짜증났던지,금풀이 눈을 흘기며 사납게 말했다. 내가 원한건 인천연합. 김한영이 가지고 있는 전국연합을 같이 깨부셔줄 인천연합. ......친구가 되서 같이 싸울 인천연합. 오래 말하는게 쉽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일을 마무리짓고 누워야 겠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이대로 또 쓰러져 잔다면 다음에 깨어났을때,대마왕으로 변한 리아가 칼을 갈며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니깐. "친구가 되자,금풀.을 포함한 인천연합아." "뭐??.." "내가 널 이겼고,너가 나한테 졌다고해서 내 밑으로 들어올 필요는 없어. 난 꼬붕들이 필요한 게 아니라, 그냥 같이 싸워줄 친구들이 필요해. 아시다시피 칠공주에서 몸으로 밀고나가는건 지니하고 이연이 뿐이잖아??.." "...떼거지로 덤비는 거 좋아하잖아,김윤서." "좋아하기야하지. 하지만 이번은 아냐." "...왜?" 제법 진지해진 금풀이 물어왔다. 왜냐고??.. 글쎄. 왜일까. 금풀의 향해 씩.웃었다. "..이번 목표는 싸움이 아니니깐." "목표??" "하늘.하늘을 가지고 있는 김한영. 그새끼만 조지면 돼, 나는. 오로지 그 새끼 하나하고만 싸우고 싶어,이번만큼은. 그러니까 친구가 필요해. 우스운 얘기겠지만 그래. 많이는 필요없으니깐 걱정마. 그냥.. 잔챙이들만 처리해주면 되는거니까." "우리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 "아니. 고맙게 보여." "뭐??" "...사실 나도 잘 모르겠거든.이 몸이 언제까지 버텨줄지 말이야." 두꺼운 링거바늘이 꽂혀있는 손목을 들어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금풀이 멍한표정을 짓다,이내 표정을 수습하고 옆에 있던 하겸상고 교복의 도움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섰다. 금풀의 갈색 눈동자가 조금.아주 조금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무슨 병있니??" ".....길게도 필요없어. 김한영 조지고나면 다시 가져가도돼, 인천연합. 그니까 빌려준다고 생각해." "물건이 아냐,우린!" 여지껏 가만히 있던 인천연합 녀석 하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원반처럼 반삭을 한 머리에 옅게 진 쌍커풀이 꽤나 예쁜 그 녀석은 내 말에 기분이 상했는지,잔뜩 뒤틀린 얼굴을 하고서 나를 보고 있었다. ....부평공고네. "이름이 뭐야??" "뭐??" "이름이 뭐냐구.네임몰라 네임?? 아시아의 스타 봐가 불렀던 노래에도 있잖아. 마~이네임♩♪.." "...민구야. 정민구." "어? 아라야,니네 동생하고 이름 비스하다. 그치??" "아.으응." 아라가 여전히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강아지같은 얼굴로 앉아있는 아라의 머리를 쓱쓱.쓰다듬으며 민구를 향해 말했다. "민구야,나는 더 욕심 안내.그러기로 했어. 그래서 그래. 1년 전이라면 몰랐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안되는거니깐. 잠깐만 친구가 되주라. 김윤서 거지같은 인생에 안 휘말리게, 적당한 선에서 놔줄꺼니깐.. 그니까 그때까지만 친구로 살자. 난 꼬붕이나,짱. 뭐 이런 거 굉장히 싫어해. 그니까 친구해. 서로 좋잖아??.." "한번 친구면 계속 친구지,잠깐 친구는 뭔데." 금풀이었다. 여전히 하겸상고한테 기대 힘겹게 서있는 금풀이 화난 목소리로 묻는다. 계속 친구가 못될꺼니깐.. 칠공주 말고 김윤서한테 계속 친구는 더이상 욕심내면 안되는 거니깐. 그니까 잠깐친구. 잠깐. 잠깐 친구. ......... 에이.존나 복잡하네. 붕대가 감겨있는 손을 들어올려 눈썹을 긁었다. "싫음 말아." "지금 내가 원하는 대답, 그거 아냐." "복잡하게 만들지 말자,풀아. 엉??..그냥 단순하게 생각해. 단순하게. 난 너희들을 내 꼬붕들로 만들 생각이 없고, 너희들 역시 금풀 하나 이겼다고 김윤서 진짜로 짱대접 해줄 생각 없잖아??..그니까 단순하게. 단순.영어로 뭐라고 하지,아라야??" "시.심플.." "그래. 심플하게 가자구,우리." 찡긋.윙크를 날리는 날 복잡한 얼굴로 보던 금풀이 고개를 내젓는다. "이해할 수 없다,정말." "난 삼해할 수가 없어,정말." "....시덥잖은 농담은 그만두고,어쨌든 오늘은 인천짱 김윤서한테 인사하러 온거니까, 인사나 받아둬." "인천짱이 아닌데??..그냥 김윤서한테 인사하러 온거하면 안될까." "마음대로해. 알다시피 난 금잔디고,나이는 열여덟. 김윤서한테 깨진뒤로는 서열4위." "정지운,열여덟. 서열3위" 표정을 알아볼 수 없는 정지운의 딱딱한 목소리가 검은폴라티 사이로 흘러나온다. 어깨를 으쓱이고는 차례차례.자기소개를 하는 인천연합 애기들을 바라봤다. "정민구,열여덟. 부평공고 다니고,서열7위야." "최설이예요. 나이는 열일곱먹었구요,정일여상다녀요. 서열은 9위예요." "선우입니다. 열일곱이구요, 학교는 하겸상고예요. 서열은5위입니다." "강드림.나이 열아홉에 학교는 남인천고. 서열은 6위." "이름은 기해바구요,올해 열여덟됐습니다. 선정여고다니고 서열은10위예요." "세유님이예요. 열일곱이고,구산상고 다녀요. 서열은8위예요. "지이다,열아홉이다. 전자공고다니고,서열은 11위." "황매영이야. 나이는 열아홉,인천여상다녀. 서열은12위." 기다란 자기소개가 끝나고, 일제히 나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너무 휘딱휘딱.지나가 이름이나 서열,다니는 학교같은 건 기억하지 못했지만 얼굴 하나는 또렷히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 반삭한게 민구, 연예인 강혜정 닮은애가 설이. 키가 제일크고,지금 금풀 부축하고 있는게 선우고, 백구두 신은게 드림. 짧게 숏커트 친애가 해바, 흰후드 입은애가 이다. 이연이랑 삐까하게 작은애가 유님이고, 빨간색 립스틱을 칠한애가 매영이. 후와.. 많기도 하네. "너네가 다 인천연합 간부급들??.." "원랜 10위까지 올려고했는데,강이오빠가 빵구내서 둘 더 데려온거야." "아항.글쿠나. 근데 그 강이라는 사람,인천공고 다니지 않나??.. 김윤서가 알기론 인천공고는 인천연합이 아니라,전국연합껀데." "한영오빠하곤 개인적으로 친분있는 사이고,강이오빤 인천연합 소속이야." "그럼 구이겸은??.." "걘 서울연합." "아.왜 이렇게 복잡해. 나중에 효선이보고 정리해달라 해야지." "...손 줘봐,김윤서." "엉??" "손." 이다의 도움을 받아 내 앞에 다가선 금풀이 대뜸 손을 내밀었다. 왼쪽은 링겔바늘이 주렁주렁. 무겁게 달려있고, 오늘쪽은 붕대칭칭인데.. 어떻게할까,하다가 그냥 붕대가 안감긴 손을 들어 금풀의 손바닥 위에 올려놨다.타악. 기분좋은 마찰음을 내며 떨어져나가는 금풀의 손. "이젠 너가 책임지는 거야,인천연합." "어??야야.은근슬쩍 이러는 게 어딨냐,분명 내가 가진다고 안했다??..칠공주꺼 하래니깐,칠공주꺼." "난 인천연합의 짱이였고,몇일 전에 너한테 졌어. 싫든 좋든 인천연합은 이제 네꺼야,김윤서." "와.이 가시나 봐,아라야.. 뒷통수 막 친다,얘가." "어어??아.어.." "그럼 몸조리 잘해라. "야!금풀.풀떼기!! 풀떼기 너 거기 안서??.." 휙.매정하게 몸을 돌린 금풀이 선우의 부축을 받으며 병실을 나가자, 나머지 애들이 우루루 금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와.저 계집애 대단한데??..하여간 김윤서를 실망 시키지 않아. 벌어진 턱을 다물며 바람소릴 냈다. 정리아가 알면 또 개난리치겠네. 벌써부터 정리아한테 혼날 생각에 우울해지는데,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소개할때 빼고는.시종일관 말이없던 정지운이 가까이 다가왔다. "휘유.피곤하다,그치??.." "정말 싸울생각이야?" "당면이지." "...그만둬." "뭘??.." 정지운을 올려다보며 빙글 웃었다. 쓰윽.검은 폴라티가 아래로 내려가고,그 안에 감춰져 있던 정지운의 하얀 얼굴이 드러난다. 참. 언제봐도 곱상해. 남자가 어쩜 이렇게 곱게 생길 수가 있지??.. 감탄의 감탄을 거듭하며 잘빠진 정지운의 턱선을 쳐다봤다. "나는. 네가 다치는 것도,한영이형이 아파하는 것도 보고싶지 않다." "맨인블랙놀이는 끝났어요. 니네 형 생각해서 이러는거라면 관둬도 괜찮다는 말." "처음부터 형은 상관없었어." "...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어요??..가끔 봤을때마다 한마디도 안하고 이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있었는데." 눈꼬리를 찢으며 말하자 정지운이 괴로운 얼굴로 웃었다. 눈썹은 찌푸렸으면서도, 입은 웃는. 그런 괴로운 얼굴로.. 아무리 눈치가 높다하지만,뜬금없이 정지운이 내게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얘..금풀이랑 러브러브하는 사이 아녔나??.. "니 앞에서만. 김윤서 앞에서만 여는거야,입." "...헐.그거 고백같은데 어째,번지수 잘못 짚은 거 아녜요??" "김윤서." "금풀은 나갔어요.여기 금풀 없는데.." "...." 툭.갑자기 덮고 있는 이불 위로 검은 지갑이 떨어졌다. 난데없는 검은지갑의 등장에 눈을 껌벅이고 있는데,정지운이 아주 친절하게 지갑을 열어 내 앞에 갖다대준다. 교통카드와 학생증밖에 안 꽂혀있는 썰렁한 지갑 속에 유일하게 밝은색의 사진이 하나 끼워져있었는데... .......그 사진은 어이없게도 울고있는 김윤서였다. 졸업식인지 꽃다발을 들고서,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우는. 김윤서조차도 낯선 김윤서의 사진. "이거..." "넌 인천에서 처음 봤겠지.하지만 난 아냐. 아주 어렸을때부터, 네가 아주아주 어렸을때부터 알고있었어. ...널." "....아..글쿠나..." 마땅히 해줄말이 없어 고개만 끄덕거리는데,지갑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은 정지운이 의자를 끌고와 내 옆에 앉았다. 아라는 빨개진 얼굴로 후다닥.잡을틈도 없이 병실을 나가버렸고, 어색한 침묵만이 감도는 병실 안에서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썹을 긁적이고만 있었다. "이 사진..한영이형한테 받은거다." ....... 눈썹을 긁던 손가락이 멈춘다. 고개를 돌려 정지운을 바라봤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정지운도 똑바로 나를 바라봤다. 두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친다. "...사귀자는 거 아냐.나 좋아해달라는 것도 아니고,내 마음 알아달라는 것도 아냐. 그냥.그냥.. 후.한영이형 마음도 좀 이해해달라는 거다. 어차피 상처밖에 없을 싸움,이제 그만 두면―" "그 입 닥칠래,꺼질래." "김윤서?" "....구나루,강조아저씨로도 모자라 이젠 정지운까지?? 아주 꼬붕복이 넘치네, 김한영." "너." "..어차피 상관안해. 금잔디나 너나,최강이나 인천연합 중에서 김한영 싫어하는 새낀 없겠지. 굳이 김한영 싫어하라고 시킬 마음은 없으니깐 상관안해,안할꺼야." "내가 하는 말은!" "지운아.." 정지운의 눈동자가 커졌다. 방글방글. 소름끼치게 무서운 목소리와 달리 얼굴 가득 웃음을 담아 정지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물었어. 그 입. 닥칠래..아님 꺼질래??.." "후회안할 자신 있어??..한영이형하고 싸우고 난 뒤에, 다 끝나고 난 뒤에.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냐구..난 그게 싫다는거야,김윤서. 어차피 서로 가슴에 상처밖에 안남을 짓,니가 이제 그만 뒀으면 좋겠다고. 한영이형도,너도 그리고 모두 다.. 아플짓 그만두고,이젠―" "너라서 두번 물어준 거야.생판 모르는 새끼들보단 그래도 안면있는 정지운이라서.김한영 이겨본 적있고, 싸워보고 싶은 새끼라서 두번씩이나 물어봐준거라고. ....마지막이야. 앞으로 친구가 될 인천연합이여서 마지막 한번 더야. 닥칠래,꺼질래." 정지운의 눈에서 순간 불꽃이 튀겼다. "김윤서 너정말!" "...대답하기 어려우면 바꿔서 물어줄께. 김한영 추종자할래, 김윤서 친구할래. 정지운,너 뭐할래??.." "내가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야,한영이형. 그리고 넌 내가 유일하게―." "오케이.접수했어,정지운. 김한영 추종자,끝까지 하겠다 이거지??그럼 잔말말고 꺼져. 눈깔 뒤집혀서 너 죽여버리기 전에,당장 뛰쳐나가서 김한영 조져버리기 전에.. ....나가." 머리가 지끈거린다. 빌어먹을,김한영. 끝까지 좋게 가는 법이 없지. 잠잠하다 싶으면 꼭 한개씩 걸고 넘어져??...씨발놈.씨발놈.. 아릿한 피가 베어나올정도로 아랫입술을 깨물며 주먹을 악.쥐었다. "김윤서,윤서야.." "....그 기분 알아,넌?? 뒷통수가 너무 아픈데.뒷통수가 너무 아파서 이제 그만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데..자꾸만 누가 내 뒷통수 후리는 거. 김윤서가 주먹쓰지도 못하게,자꾸만 내 주변 사람들이 김윤서 뒷통수 후리는 거. 그래서 아픈거. 몸이 아니라, 심장이 아픈거. 그 기분... 알아??..." "난." ".....내가 왜 김한영하고 엮이는 게 싫은 줄 알어??.." 눈물이 나는걸까. 뜨겁게 달아오른 눈시울이 느껴진다. 정지운의 잘생긴 얼굴이 점점 흐려진다. 흥분을 해서 그런지 가뿐 숨이 터져나온다. 심장이. 심장이.... 팔뚝에 박힌 링겔바늘을 거칠게 뽑아냈다.하지만 이걸로도 성에 안차 링겔병을 끌어내려 힘껏 잡아쥐었다. "그 새낀 꼭 날 비참하게 만들거든.안그래도 거지같은 김윤서를 꼭 그 새낀....바닥 끝까지 내려놓거든...충분히 개같은 김윤서,개새끼처럼 만들거든. 사람이 아니게 만들거든. 그 새끼가.너가 그렇게 존경하고,구나루가 그렇게 사랑하는 김한영 그 새끼가.. 날. 나를.. 김윤서를 그렇게 만들거든...." 파지직.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링겔병을 쥐고있던 손에서 질퍽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자잘한 유리파편이 된 링겔병이 바닥으로 떨어지고,그 위로 투명하면서도 지독히 붉은 핏방울이 후두둑.떨어진다. ......... 지겹다. 김한영. 정말.... 끝내고싶다.. 4-86. 김윤서의 가족 ...... ※ 쾌쾌한 가습기 냄새가 훅하고 끼쳐온다. 뻑뻑한 느낌이 드는 눈꺼풀을 겨우 들어올리자마자 느껴지는건 역시나 아픔이였다. 괜히 나댔나.. 양손에서 느껴지는 갑갑함과 그에 못지않은 뾰족함에 픽.힘없는 웃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라고 생각하자마자 뒷통수를 후려치는 딱딱한 물체 하나. "아..띠바.정리아 넌 아픈사람을 때리구 싶냐??.." "망할기지배!!!아주 너때문에 내가!!아우.아우아우!!!... 정말..무식하게 링겔병을 맨손으로 부수는 기지배가 세상천지에 어딨어!!!" "악.고막 찢어진다야. 볼륨 낮춰,난 절대안정이라니깐??.." "말이나 못하면!!으휴.." 고막을 울리며 쟁쟁거리던 리아가 더 패고싶은 눈치로 효자손을 내려놓는다. 붕대에 감겨 곰발바닥처럼 된 손으로 리아에게 후려맞은 뒷통수를 문질렀다. 쟨 아마 골프채를 쥐어주면,전국을 평정할 꺼야. 어찌나 힘이 센지.. "다른 애들은??.." "학교갔지,바보야. 제발 부탁인데,생각이라는 걸 좀 하고 살아라 김윤서." "해봤자 골치만 아픈데 뭘.배고파. 먹을 거 없어??" "저 기지배는 아주 쫄쫄 굶겨서 아마존에 던져버려야돼." "아마존은 더워서 싫어.차라리 시베리아가 좋겠어." "닥쳐!" 또다시 날아오는 효자손. 이번엔 잽싸게 머리통을 뺐지만,대마왕 정리아가 노린건 어깨 죽지였다. 뜨끔한 충격에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진짜.. 대마왕은 학교 안가??" "전학수속 아직 안밟았어." "어?? 전학??..어??어!!!!" "아라처럼 순진하지도 않은게 어어거리지마,토나와." "와.난 존나 기뻐서 그런건데,매정하다." "개소리." "치. 아무튼 그럼 너네 다시 인천컴백인거야??" 조금은 들뜬 목소리로 묻자, 리아가 냉장고에서 꺼낸 삼각김밥 두개를 던지다시피 내 품에 밀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와오,예아.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하자,시끄럽다며 소리를 빽.지르고 교과서를 펼치고 앉는 정리아. 띠바. 저거 성질머리도 띠바야,아주. 삼각김밥의 포장을 뜯어 입 속에 넣으며 투덜거리는데,귀신같이 알아챈 정리아가 샤프를 들고서 위협한다. "잡소리 넣으면 죽어,이제부터." "엉." 시베리아 바람도 저보단 덜 춥겠다. 찬바람이 쌩쌩 날리는 리아의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해주고, 삼각김밥을 마저 입 속에 구겨넣었다. 순간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상상초월.아찔한 통증에 배를 움켜쥐며 이를 악물었다. 띠바... 맞아,나 지금 갈비뼈 나갔었지. 흐으. 잘못 신음소리 내뱉었다가는 정리아에게서 배가 되어 되돌아올 잔소리 세례가 두려워 이불을 물었다. 띠바.내가 개도 아니고 이게 뭐야.. "....바보.진짜 바보,김윤서." "으..으엉??..." "아라가 요 앞이라니까 나 나갔다온다." "어디가??.." "정리아 무서워서 아프다고 소리도 못지르는 바보한테 바보바이러스 옮을까봐, 예방주사 맞으러 간다!" "뭐??.." "아프면 아프다고해. 끙끙거리면서 참지 말고. ......정리아 말고 황아라 앞에서." ....끝까지 아주. 탁.교과서를 챙겨든 정리아가 병실을 나가고,얼마 지나지않아 뭘 한아름 들고 있는 아라가 나타났다. 전학수속을 밟고 바로 나온건지 교복차림인 아라는 테이블 위에 봉지를 내려놓고 방긋웃었다. "사골국하고, 우유하고 뭐 뼈에 좋다는 건 다 사왔어. 빨리 나아야지. 윤서 너 병원 싫어하잖아." "아유.우리 아라 예뻐 죽겠다,아주. 넌 나중에 결혼하면 진짜 왕사랑받을꺼야." "와,왕사랑까지야..헤.고마워." "내가 훠배 더 고맙지야." 리아의 시베리아같은 얼굴만 봐오다,아라의 봄날같은 얼굴을 보고있자니 아픈 배가 저절로 나아가는 기분이다. 가져온 음식들을 차곡차곡. 냉장고에 챙겨넣는 아라의 뒷모습을 보며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갑자기 구겨진 하트가 떠올랐다. 구겨진 하트.응급실.빨간색.주황옷. ......... "...아라야." "으응??.." "선우권..지금 어디 있는지, 지금 알아봐줄 수 있어??" "선우권?? 걔라면 지금 부산에 있지 않을까. 거기 살잖아." "..본거 같아서. 한번 따르릉해봐,너 후배들한테." "으응.알았어, 잠깐만." 아라는 별다른 의심없이 냉장고 문을 닫고 핸드폰을 꺼냈다. 닫혀진 냉장고의 회색문을 보며 오른손에 감겨진 붕대를 이빨로 물어뜯어 풀어냈다. 갑갑함은 아까보다 한결 가셨지만,자잘한 상처들로 가득한 손은 훨씬 더 쓰라렸다. 띡띡띡. 핸드폰을 귀에 갖다댄 아라가 이불 속에서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는 날 흘끗.보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신호가 가는 동안 아라가 볼 수없게 팔뚝에 꽂힌 링겔바늘마저도 빼고, 슬쩍. 한다리를 아래로 내려놨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아라가 핸드폰을 바짝 갖다댄다. "응.모리니?? 인영인 어디가구?.." "아.그래. 다름이아니라, 칠성의 선우권이라고 알지? 응. 부산에. 어.. 그 애, 지금 어디있는지 좀 알아봐줄래??.." "..음.2분정도면 되?.." "괜찮아, 천천히해도 돼." 삐걱. 얇은 마찰음에 아라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 아라를 향해 방긋.웃어보이며 재빠르게 아라가 들고있던 핸드폰을 낚아채,병실을 뛰쳐나왔다. 놀란 아라가 뒤따라나오기 전에, 비상구로 몸을 숨긴 나는 정말 억.소리 나게 아파주시는 갈비뼈를 움켜쥐며 털썩.계단에 주저앉았다. 띠바.. 갈비뼈는 역시 띠바야. 숨을 몰아쉬며 핸드폰을 귀에 댔다. 아라의 후배로 보이는 여자애 하나가 갑자기 들려오는 거친 숨소리에 놀란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누,누구세요??...아,아라선배??] [엉.아라후배님 안녕?난 아라 친구 윤서라고 하는데, 아라가 지금 급하게 똥싸러갔어. 그니깐 나한테 말해."] [예??] ["나한테 말하라구.으.. 아라가 선우권 어디있는지 물어봤잖어."] [아,예에..그.근데..윤서선배면... 일당백,그 선배님 맞죠??] [엉.내가 그 일당백이야. 후와.숨차. 빨랑빨랑 얘기하자,우리."] [아.예에!!] 일당백이란 소리에 군기가 바짝 들어간 아라후배님. 떨리는 목소리로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후배님의 목소리 뒤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들려온다. 한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줄줄.쏟아지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송글송글.피가 흐르고 있는 팔뚝에 힘을 줬다. 아프다. 자꾸만 1년전,한가람과 겹쳐지는 선우권의 모습이 두렵다. ........... 김윤서는 이런사람 아녔는데.... 선우권이 다 배려놨네.. [아..그니깐..저. 이거..말씀드려도 되요??] ["말씀드려도 되고,돼지씀드려도 되고. 후배님 마음대로해."] [아..아라선배가..이런 건 알려드리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아라는 지금 나한테 모든걸 맡겨놓고,똥싸러 갔대니깐??.. 그리고 후배님이랑 통화하고있는 건, 아라선배가 아니라 김윤서니까 빨랑 말해. 그리고 아라후배니깐,알 거아냐. 김윤서가 초장부터 반말 찍찍.까면 별로 좋은거 아니라구."] [아.예에...저 11월1일날 인천에 올라가셨는데요,터미널에서 ...서울연합하고 마주쳐서...] ["닭모가지같애, 후배님 목소리. 볼륨 키워."] ........ 지끈지끈. 18년 평생 감기 한 번 안걸리고,싸울때빼곤 병원 문턱에 가보지도 않아 튼튼우유도 부러워하던 김윤서가 요즘따라 왜 이럴까. 관자놀이를 누르며,밀려오는 두통을 최대한 밀어냈다. [..저..서울연합이 유.윤서선배님한테 깨진 뒤여서 많이 기분이 안좋았나봐요. 연합안에서 권선배에 대한 소문도 별로 안좋았고, 게다가.. 저.저..윤서선배랑 사귄다는 소문 나고부터는.. 아.아무튼 그래서 그때 터미널에 있던 서울연합 서른명하고.. ...일방적으로-...한국병원-.....] 하아. 시린 겨울날.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하얀 입김처럼,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기대봤지만,가라앉을 생각은 커녕 더욱더 기승을 부리는 두통때문에 후배님의 목소리조차 제대로 들리지 않는다. 고장난 TV처럼. 늘어난 비디오처럼. 지지직거리면서 자꾸만.자꾸만 후배님의 목소리가 멀어져간다. [...애들100명쯤 끌고가서 윤서선배 죽인다니깐,끝까지 안놓고 버티셨대요. ...이마가 찢어져서 눈에 핏물이 들어가는데도, 끝까지 안놓고...선배..건드리지 말라고...그렇게 말하셨대요...] 붕신. 최고붕신. ........ 김윤서가 뭐라고. 하늘밖에 안보이는 미친년이 뭐라고... 틱.팅그르.. 쥐고있던 핸드폰이 바닥으로 떨어지고.아라의 삐까뻔쩍한 핸드폰이 계단 아래로 굴러가는데, 주울생각도 못하고. 자꾸만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낼 생각을 않고.그렇게 눈을 감았다. 바라는 건 고작 한갠데. 하늘,그거밖에 바라는거 없는 김윤서인데. ..왜. 왜요... 왜,하늘님. 김윤서한테만은 이렇게 나쁜건데. 다른 사람한텐 다 하늘님이면서, 왜 김윤서한테만은 염라대왕이 되고싶은건데.. ............ 다시는 흘리지 않을꺼라고. 그렇게 다짐했던 눈물이 한 방울,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린다. 지끈거리는 머리도,욱신거리는 갈비뼈도,쓰라린 주먹도. 그 어떤 것보다도 아프게.잔인할만큼 지독하게.. 그렇게. 그렇게.... .................... .............. ※3시간뒤. 몸을 추스리고,흠집난 아라의 핸드폰을 주워 비상구를 나왔는데. 병실 앞에서 기분 나쁠정도로 익숙한 뒤통수가 하나 보였다. 뻣뻣해진 안면근육을 최대한 움직이며,커다란 과일바구니를 들고서 병실 앞에 서있는 그 뒷통수를 향해 걸어갔다. 아라의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넣고,붕대가 감겨진 손을 들어 뒷통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추여사 안녕??..바쁘실텐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윤서 너!" "넵. 윤서 너 여기 있습니다.설마 윤서너, 이 한마디하려고 오신건 아닐테고. 차림새가 꼭 병문안 오신 차림새네.. 누구, 아는 사람 입원했나봐요??.."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추여사를 지나 병실문을 열었다. 김윤서를 찾으러 간건지,아니면 잠시 자리를 비운건지 병실엔 가습기의 하얀 연기만 날 반기고 있었다. 갈비뼈를 움켜쥐며 쇼파로 걸어와앉은 나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문 앞에 서있는 추여사를 향해 물었다. "아.가실때 문좀 닫고 가주실래요??..날이 추워서 그런지, 오싹오싹하네." "..엄마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니.넌 변한게 없구나, 정말." "글쎄요.뭘 배워먹은 게 있어야 변하던가,말던가하죠." "비싼 돈 주고 다니는 학교다." "그 비싼돈,김윤서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니 걱정마세요." "....." "설마 잊으신거예요??..추여사는 김한영,그 새끼 뒤치닥거리 하느라 비싼돈을 쓰신 적은 있어도,김윤서한텐 없잖아요. 아. 요즘은 어르신들 머리에 지우개가 하나씩 산다던데, 추여사 머리 속에 있는 지우개는 꽤 큰 지우갠가봐요." 피식. 비아냥이 가득 담긴 웃음을 터트리며 추여사를 바라봤다.주먹을 악쥐고,부들부들 떠는 폼이 아주 장난이 아니다. 쿵.들고 있던 과일바구닐 떨어트리며 곱게 칠해진 입술을 앙다무는 추여사. "...김한영운운하실꺼면 가세요,그냥. 오지도 않았고,왔어도 벌써 뒤져서 영안실에 내려갔을꺼니깐." "너.너.." "그리고 정 궁금하시면 직접 알아보시면 되잖아요??..내키진 않지만 아라한테 말씀해보세요,그 애라면 충분히 알아봐주겠죠. 참. 그렇다고 너무 부려먹지 마세요.보는 사람이 화나거든요." "엄마한테 그게 무슨!!!" "엄마요??..아.엄마. 등본 떼보면 추여사가 그렇게 있죠,아마. 근데 그거 아세요?...하늘님이 써준 등본에는 추여사가 엄마일지 몰라도,김윤서가 써놓은 등본에는 효선이가 내 엄마라는 거. 효선이뿐 아니라, 리아.아라.지니.연오.이연이. 그 애들 모두가 김윤서 가족이고,엄마고,아빠고 그래요. 동사무소가서 떼오는 등본엔 김사장하고 추여사가 김윤서 가족일진 몰라도,내가 선택한 가족은 그 애들이라구요. 운동회때 김윤서 김밥을 싸온 것도 그 애들이였구요. 졸업실날 꽃다발을 사온 애들도 그 애들이였어요. 싸우고난 뒤에 경찰서 찾아오는 사람도 그 애들이였고, 병원에 입원했을때.매일매일 간호해주던 것도 그 애들이였어요. 내가 사고쳤을때,선생들이 제일처음 전화거는 보호자도 그 애들이고. 개같은 세상,죽지못해 사는 이 거지같은 세상에 지금까지 살아 숨쉬고 있는 이유도 그 애들이예요. 무슨 바람이 불어 이렇게 찾아오신지는 모르겠는데요,김윤서 앞에서 엄마노릇 하실려면 번지수 잘못 짚으셨어요.추여사는 죽을때까지 김한영네 엄마잖아요. 김윤서한테도 그래요. 김윤서한테도 죽을때까지 엄만 칠공주예요.내 친구고,내 가족이고,내 삶의 이유는 죽을때까지도 그 애들이라구요." 새하얗게 질린 추여사가 픽.고꾸라졌지만 난 여전히 웃는 얼굴로 쇼파에 앉아있었다. 놀란 간호사들이 달려와 추여사를 부축해 어디론가 달려갔지만,난 여전히 웃는 얼굴로 쇼파에 앉아있었다. 쉬지않고 계속 말하는 바람에 갈비뼈는 아파왔지만, 그래도 웃음이 났다. 킥킥킥.어깨까지 들썩이며 신나게 웃어재끼다 고개를 꺾자마자 바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에 나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들으셨어,하늘님??..예전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렇고.또 앞으로도 쭈욱 그럴꺼야. 김윤서한테 가족은 그 애들뿐이라구. 그니깐 그만둬,인제. 한가람이 처음이였고, 우권이.칠성 멋쟁이 선우권이 그 애가 마지막이야. 관둬,인제 하늘님도.." 엉. 그래. 라고 하늘님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4-87. 빠빠이, 선우권 .......... ※다음날. 학교가기 전에 들른 리아와 효선이가 공부 좀 하라고 던져주고 간 교과서 뭉치들을 재미없게 쳐다보며 기다란 하품을 했다. 병실에서 나와같이 하루밤을 꼴딱 샌 아라도 학교를 가고, 조용해진 병실 안. 조금 늦게 아침밥을 주고가는 간호사 언닐향해 눈을 찡긋이고, 묵직한 식판을 식탁 위에 올려놨다. "이거 먹고 뭐 힘을 내겠어??..흐아.심심하다." 모래알같이 잘게 부순 죽을 단숨에 들이키고,짭짤한 간장으로 입가심을 하자 또다시 지루함이 몰려온다. 하품을 찍찍. 내뱉으며 병실을 서성이던 나는,안되겠다싶어 환자복 위에 지니가 놓고간 검은 잠바를 걸쳐입고 병실을 나섰다. 마침 약봉지를 들고 오던 간호사 언니 하나가 놀란 얼굴로 달려와, 팔뚝을 잡아챈다. "어디가세요,2007호 환자님??.." "저 이름은 2007호 환자가 아니라,김윤서예요.언니." "아.예에..근데 어딜..이렇게 움직이시면 안되요. 손도 다 안나으셨는데. 링겔은 아직 안맞으셨어요??" 병원에 벌써 나에대한 소문이 쫙.퍼졌는지.. 간호사 언니가 살짝 두려움에 질린 얼굴로 물어온다. 어깨를 으쓱이며, 웃음으로 대꾸해주고 간호사 언니에게 잡힌 팔을 빼냈다. "이런건요. 침바르면 다 나아요,언니." "예에??그.그래도.." "약봉투는 냉장고에 넣어두세요. 그럼 언니 빠빠." 경쾌하게 인사를 해주고 끼익.비상구로 들어왔다. 쾌쾌한 담배연기로 가득한 계단을 올라 출입금지 팻말이 걸려져있는 옥상문 앞에섰다. 눈썹을 긁적이며 뽀얗게 먼지가 쌓인 옥상문을 밀자 온 몸을 서늘하게 만들어주는 바람이 나를 반겨준다.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넓은 옥상으로 들어서자,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 같은 하늘이 두 눈 가득 펼쳐진다. "흐음.. 이제야 살겠네." 욱신거리는 갈비뼈의 통증도. 쓰라린 손등의 상처도 다 잊게해줄만큼 기분 좋은 바람을 한껏 들이마쉬며 눈을 감았다. 천천히 난간으로 걸어가 기대앉는데, 낯선 숨소리와 함께 미처 닫지못한 옥상문에서 끼익.하는 녹슨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 앞을 바라보는데.. "흐아..힘들다. 병실 앞에서부터 계속 불렀는데,못듣는척 지존이였어 너.후와. 쫓아오는데 얼마나 힘들었는 주 아냐?? ...잘 지냈지?" ......... 검은색 비니 아래로 삐죽삐죽. 삐져나온 검은 머리카락. 눈 밑에 작은 상처. 어색한 팔. 살짝 절뚝거리는 발. 잘빠진 청자켓 밑으로 보이는 하얀 붕대. 하늘을 담고있는 눈동자. 예쁜 미소. ..........아.선우권이다. "몸도 안좋은 애가 옥상엔 뭐하러 올라왔냐. 바람 장난아니던데,내려가자. 병실에 먹을 거 사다놨―." "....하지마." "어?" "아무렇지 않은 척,하지 말라구 붕신아." 탁.난간에서 내려와 우권이와 마주봤다. 우권이는 못 알아듣는 척을 하는건지, 정말 못알아 들은 건지 아라같은 얼굴로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아프면 그냥 침대에 누워있지,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너.. "마누라??.." "...OK여기까지. 딱 여기까지만 하자,선우권." "후아..뭐??..나 지금 비싼돈내고 총알같이 튀어왔는데, 찐한 뽀뽀는 못해줘도 얼굴도 좀 보고.오랜만이다 인사도 좀 하고,또 숨 좀 돌리고. 그러고나서 여기까지든,저기까지든 해야되는 거 아니냐?? 진짜 예의없어,우리 마누라." 귀여운 얼굴로 툴툴거리는 우권일 물끄러미 바라봤다. 눈에 훤히 보이는데. 나보다 훠배 아파하는 거,훤히 보이는데.. 선우권. 삽질을 잘해도, 구라는 못하네.. "...한가람 하나로 족해,나는. 김윤서때문에 목숨 걸어줄 미친새끼,한가람 딱 하나로 만족해. 그니까 너는 가. 더이상 김윤서때문에 다치지도 말고, 아프지도 말고. 꼴사납게 김윤서 쫄다구 노릇도 그만두고가. ....너 다치는 거 죽어도 못보겠으니깐 제발가. 아니,제발 가주라. 제발 좀 가주세요.엉??.." "무슨 개소리야. 내가 언제 마누라때문에 다쳤다고-" "다 알아,붕신아. 다 안단말야..." 입으로는 빙글 웃으며,눈쌀을 잔뜩 찌푸렸다.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끝이 따끔한걸 보니 눈물이 나올랑 말랑하고 있나보다. 어제 그렇게 울었는데, 아직 나올 눈물이 있다는게 신기하다. 아라한테 전염됐나??.. 싱겁게 웃으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권이가 조금 화난 얼굴을 하고 날 바라보고 있었다. "김윤서가 선우권 마누라하고,선우권이 김윤서 서방님 하겠다고 한지 일주일도 안됐어. 아무리 여자 마음이 갈대라지만, 너무 심한 거 아니냐?" "..약속했잖아,너도. 나한테..김윤서한테 니 전부 안걸기로 약속했잖아.." "건 적 없어!" "...붕신. 진짜 최고 붕신,선우권." 터벅터벅.힘없이 우권이의 앞으로 걸어갔다. 잔뜩 굳은 얼굴로 날 내려다 보고있는 우권이의 정강이를 힘껏 후려쳤다. 윽. 굵은 신음소릴 터트리며 주저앉는 우권이. "...팔도 부숴지고,다리도 아작나고. 얼굴은 개판에, 어디 하나 성한데도 없잖아 너 지금. 근데도 계속 안되는 구라 깔래??..." "이건!" "김윤서한테 박살난 주제에,다시 덤빌생각은 안하고 김윤서 주변사람들만 건드리는 개새끼들 정말 싫어해. 대가리 뽀개버리고 싶을정도로, 싫어해 그런 개새끼들. 근데.그런 개새끼들보다 더 싫어하는 게 뭔지 알어??" 뿌옇게 흐려진 시야 속에 우권이의 얼굴이 보인다. ....... "..상황을 그따위로 몰고간 김윤서야.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날뛰다가..소중한 사람들 아프게 만드는 김윤서가 제일 싫어 난. 죽여버리고싶을만큼 싫다구,선우권. .....근데 너가 자꾸 그렇게 만들어. 혼자 뒈지고 싶은 김윤서를, 너가 자꾸 이렇게 만든단말야..." 투욱. 뜨거운 눈물방울이 선우권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금잔디 주먹과 맞부딪쳤을때처럼 팔에서 작은 경련이 일어난다. 바람을 너무 오래 맞았더니, 뼛속까지 시린 바람이 스며든 것 같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정도로 주먹을 악쥔 나는 우권이에게서 한걸음 물러섰다. "....한가람으로 끝내고 싶다,우권아. 나는. 나는..김윤서 때문에 더이상 인생 조진 사람 만들고 싶지않다.." "안조졌어. 누구 마음대로 인생 조졌대? 고작 몇대 맞았다고 인생 조진거면, 세상에 안 조진 인생이 어딨는데. 억지 부리지마, 김윤서." 자리에서 일어선 우권이가 거칠게 내 팔을 나꿔챘다. 손목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열기. 리아를 떠올렸다. 김윤서 마음을 싸늘하게 가라앉혀줄 리아의 얼굴과 리아의 색깔과,리아의 눈빛을. 우권이의 뜨거움을 식혀줄 리아의 차가움을. .....우권이의 손을 기분 나쁘지 않을정도로만 뿌리치고,다시 난간 위로 걸어와 앉았다. 고개를 까딱이며 우권일 향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억지는 지금 너가 부리고 있는 걸,억지라고 하는 거야.." "...이러지마. 나 화날라고 해." "그거 알어??.. 옛날엔 김한영 조지고,전국하늘 잡으면 뒈져도 될 것 같했는데. 인천 칠공주,전국최고되면 그만 뒈져도 괜찮을 것 같앴는데.. 너만나고 나니까 그게 조금 아쉬워진 거." 뜻밖의 고백에 놀란 우권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띄운채 그런 우권일 바라봤다. 하늘이 이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네가 처음이였어. 칠공주말고 이렇게 김윤서 심장에 깊숙히 들어온 남자,네가 마지막일꺼야. 그니까 여기까지만 하자. 그동안 정말 즐거웠으니깐. 제화공고 선우권을 만나서,김윤서는 너무 많이 기뻤으니깐.. 그랬으니깐.. 여기까지만 하자. "...가람이가 나대신 그렇게 되고났을때..숨을 쉴 수가 없었어. 심장을 누가 꽉.누르고만 있는 거 같아서..그래서 숨을 쉴 수가 없었어. 근데도 죽지 않았잖아.김윤서때문에 그렇게 됐는데도,나 가람이 보면서 잘 웃잖아. 오히려 한가람,너때문이다 탓하며 그렇게 나쁘게 살고있잖아." "......." "하지만 선우권이면 안돼.그때처럼 선우권이 한가람처럼 김윤서때문에 다치면...그땐.그땐..심장이 터질꺼야, 아마. 펑.하고 터져서..산산조각이 날꺼야." "....너한테 폐안끼쳐. 너만큼은 못되도, 너보다 훨씬 아래인건 아니니깐 절대 그렇게 안만들어." 우권이도 울음이 나나보다. 인상을 잔뜩 구기며,고개를 숙인 폼이 아파보였다. 촉촉하게 젖은 눈을 손등으로 훔쳐내고, 우권이에게서 시선을 뗐다. "..되게 이해 못해,선우권. 저번에도 말했던 것처럼 김윤서 목숨은 칠공주꺼야.죽어서도, 살아서도 김윤서 목숨은 칠공주꺼여서, 함부로 죽으면 안돼. 근데 선우권이 자꾸만 이렇게 나오면 그럴 수가 없게 되잖어. 김윤서 목숨은 한갠데, 선우권이 자꾸만 이렇게 나오면 그 한개가 없어지는 거잖어. 그래서 안된다는 거라구. 김윤서는 오로지 칠공주를 위해서만 살꺼니까,선우권은 그걸 방해하면 안돼. 그러니까 여기서 그만 빠빠이하자." ".....김윤서."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떨어져내릴 듯, 위태로운 바람이 손 끝을 감싼다. 예전엔 그 바람이 못견디게 좋았는데.이제는 두렵다. 18년 평생 인연에도 없는 눈물이 나올정도로. 두렵다, 바람이. 그리고 하늘이... 한번도 이런적 없었는데. 언제부터였을까... ".....고마워 해야되는 거냐?.." 흐려진 우권이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 몸을 휘감는다. "....고마워하든,구마워하던 너 마음대로 해. 그리고 앞으로는 덜 봤으면 좋겠어. 서로 엮인 줄이 많으니깐 아예 안보고 사는건 어려울꺼 아냐.그니까 조금만 덜 만나자,우리." "..널 이해할 수 없다." 바람을 느끼고 있던 손을 거두고 다시 일어섰다.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우권이의 아픈 어깨를 지나쳐 옥상문을 향해 걸어가는데 눈동자가 얼얼하다. 또 두통인가. 갑자기 희뿌연 안개가 가득찬 시야를 느끼며 몸을 휘청였다. 가까스로 벽을 짚어 바닥에 뒹구는 꼴사나운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우권이가 언제 고개를 돌릴지 모를 일이였다. 이를 악물고 뼈가 녹아버린 것만 같은 다리에 애써 힘을 줬다. "진짜 빠빠이..선우권.." 타앙. 선우권을 뒤로하고 옥상문을 닫았다. 삐에로 놀이를 하는 것처럼 기우뚱.기우뚱거리며 겨우 병실에 도착했을 땐, 온 몸이 뜨겁게 젖은 뒤였다. ..... 인제 정말 하늘밖에 안 남았네. 김윤서한테 하늘, 그 한개만 남았네... 하늘님 인제는 그 애한테 안 껄떡되겠다.. 풀썩. 힘없이 침대 위로 쓰러지며 기쁘면서도,한없이 슬픈 미소를 지었다. ............... ※오후8시. 학교를 마치자마자 달려온 연오의 도움을 받아 땀으로 흠뻑.젖은 몸을 씻고,보송보송한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병실문이 열리면서 오후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오예.반가워. 오랜만이네들..." "꺄. 자기야,어서와!! 보고싶었어!!.." 발톱에 매니큐어를 발라주던 연오가 환호성을 지르며 김윤서의 인사말을 먹어버린다. 한 손엔 묵직한 과일 바구니를,다른 한손엔 게임기를 들고있는 한가람과. '짜증 1892개'라고 이마에 딱.써붙인 화강안이 연오와 김윤서의 열렬한 환영인사를 받으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몸은 괜찮아??." "당근. 근데 그거 말고 바나나우유나 좀 사오지,이연이가 그거 되게 좋아하는데.." "아. 그래서 밑엔 바나나 우유로 깔아달라고 했어. 근데 다른 애들은 안보이네??" "좀 떨어져,씨발아." "아잉. 몇 일만인데 벌써 떨어져." 내 앞으로 걸어와 들고 있던 과일 바구니와,게임기를 내려놓은 한가람이 머쓱하게 웃었다. 차가움이 뚝뚝.흐르는 화강안의 목소리와 섹시함이 좔좔.흐르는 주연오의 목소리가 아주 배꼽 빠지게 웃기다. 끈덕지게 화강안에게 달라붙는 주연오와, 그런 주연오를 매몰차게 쳐내는 화강안을 재미있게 쳐다보다 어쩡쩡하게 서있는 한가람을 향해 말했다. "의자 꺼내서 앉어. 몸도 성치않은 애가 무리할 필욘 없걸랑." "...하나도 안변했네." "하나는 안변하고, 둘쯤은 변했지 내가." 부욱. 과일바구니의 비닐을 찢어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물며 한가람을 향해 눈을 찡긋였다. "김한영,그 개새끼는 인천에 언제 올라온대??.." "어??..아,어. 한영이형은 아마 11일이나,12일쯤 올라올거야." "후우. 인기 많은 척 하고있어,개새끼. 그럼 너가 그 새끼한테 말 좀 전해주라.15일날 월미도 선착장에서 보자구." "거긴 왜??.." "왜긴 왜야.그 새끼 조질라고 그러지." 껍찔째 와삭.와삭 씹어먹으며 짖궂게 웃었다. 놀라움을 담고서 커지는 한가람의 예쁜 눈동자. 언제봐도 참 예쁘다, 한가람. 김윤서 옆에 있을때보다 훠배 더... "윤서야." "전국연합 걸고 싸우자그래.난 인천연합을 걸꺼니깐."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야??.." "아.누가 그랬지, 포기라는 건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라고. 음. 누가 그랬지??.. 이럴땐 효선이가 있어야 되는건데. 아쉽다." 구긴 인상마저 너무나도 예쁜 가람이가 눈동자 가득 날 담는다. ....너가 아녔음 정말 슬펐을꺼야. 너같이 예쁘고,착한 애가 있어서 그 옛날.김한영때문에 하루하루가 거지같았던 그 옛날.그래도 웃으면서 버틸 수 있었어. 칠공주 애들을 만날때까지,그래서 온전히 살아 숨쉴 수 있던때까지. 찢어진 김윤서 인생을 스카치 테이프로 붙여준 건,언제나 너였다 가람아.. "...하느님.우리 윤서 항상 웃게 해주세요. 잘때마다.자고 일어날적마다 항상 이렇게 빌었어. 아파서 죽을 것같았던 날에도.니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고 싶었던 날에도.. 이렇게 빌었어." "그만했음 좋겠다,그기도. 너가 안그래도 나 맨날맨날 잘 처웃고 그러니까,그런 기도 그만하고 너 건강하게 해달라는 기도나 해줬음 좋겠다,나는 가람아." "너만 웃을 수 있으면 난 죽을 수도 있어.아니, 그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어 난. 니가 진짜 웃을 수만 있으면. 그러니까 이제 스스로한테 상처내는 짓 그만하고, 제발 웃어.그래야 나도 살아. .....네가 웃어야 내가 살아,윤서야.." 가람이의 예쁜 눈동자에 눈물방울들이 알알히 박힌다. 우권이때문에 충분히 아픈 심장이,또 한번 아파온다. 왜 아무 것도 가진게 없는 김윤서를 위해서 이래. 해줄건 아무 것도 없는,하늘하고 칠공주 아님 볼 것도 없는 김윤서때문에 이래... 사과씨를 꿀꺽.삼키고 씩.웃었다. ......가람아,난 이제 이렇게 잘 웃어. 너 없어도 이렇게 잘 처웃는다구. 그러니까 인제 너가 웃어. 김한영도,하늘도 다 떠나서 한가람을 눈물나게 좋아했던 김윤서가 널 놔줄꺼니깐.. 이제 그만 내게 묶여있는 네 시선을 잘라줄꺼니깐... 웃어. 예전처럼 예쁘게. 재밖에 안남았던 김윤서 심장에 햇빛을 비춰준 그 때처럼. 내 하늘을 지켜줬던 그 때처럼. 그렇게 웃어. ........... 4-88. 한가람을 닮은 한곽 ※ .......... 원래 한번 잠들면 잘 안 깨나는데.. 요즘따라 정말 왜이러는지 모르겠다. 새벽4시쯤 됐을까. 어스름한 빛으로 가득한 병실을 둘러보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눌렀다. 잠시 자리를 비운건지, 아니면 집에 간건지 쇼파 위에 덩그러니 놓여진 연오의 레스포삭 가방과, 지니의 검은 자켓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머리가 아프다. 뾰족한 쇳덩이가 하나 굴러다니는 느낌이랄까. 관자놀이를 꾹.누르자 입술 사이로 허스키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띠바..." 얼마쯤 그러고 있었을까. 구부정하게 꺾인 허리를 피며.목 주변을 문지르는데 끼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병원 특유의 하얀빛이 문 틈 사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이 시간에 누구지??.. 갑작스레 들어오는 빛때문에 눈을 찡그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누나,안녕??." 생전 처음 보는 꼬마아이.아니 그보다는 좀 나이가 먹어보이는 듯한 남자애 하나가 나와같이 붕대로 감겨진 손을 들고 방긋. 웃고 있었다. 나와 똑같은 환자복을 입고서 웃던 그 아인 종종걸음을 치며 내 앞으로 걸어왔다. 정말 옛날같았음 그 아이의 얼굴에 점이 몇개인지까지도 다 일일히 세어볼 수 있었을껀데,지금은 아이의 얼굴 윤곽만 보는게 고작이였다. 아.정말 슬픈 일이다. 우울하게 웃으며 아이에게 말했다. "엉. 꼬맹이도 안녕." "..누나는 안 물어봐??" "뭘." 억지로 깨서 그런가 가물가물. 눈꺼풀이 껌벅인다. 기다란 하품을 찍.내뱉으며 아이를 내려다봤다. 아이는 어느새 내 옆으로 기어 올라와 이불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 꺼져,초딩아. 지니였다면 이렇게 말했을거고, 엄만 어디있니.어디 다쳤어?여기 입원해 있는 애구나,너. 아라였다면 이렇게 말했을꺼다. 대책없는 아이를 향해 어깨를 으쓱이고는 침대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아니,접때 여기 있던 누나는 이것저것 다 물어봤었거든. 이 시간에 여긴 왠일이니부터 시작해서 엄만 어디있냐고. 근데 누난 한개도 안물어보니까 되게 시시해." "엉.그럼 넌 도도해." 나른한 목소리로 대충 대꾸해주고 목을 주무르는데, 내 갈비뼈 근처에서 꼼지락거리던 아이가 갑자기 배 위로 올라탄다. 억. 눈을 뜨고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는 아이를 쳐다봤다. 아라처럼 착하지도, 효선이처럼 너그럽지도 못한 김윤서였지만. 지니처럼 버럭.승질을 내지 않고 가만히 넘어갈 수 있었던 건 생각보다 약하게 느껴진 갈비뼈의 통증 때문도. 아이의 해맑은 웃음때문도 아니였다. ............ 이 애. 가람이 어렸을때를 쏙 빼닮았다. 황당할정도로. "꼬맹이 이름 뭐야??" "나 꼬맹이 아닌데." "나 꼬맹이 아닌데가 이름이야?와오. 제대로 긴데. 그럼 뭐라고 부르지." "누나 장난쳐?" 빙긋 웃으며.뾰루퉁한 표정을 짓고있는 아이의 머리를 쓱쓱.쓰다듬었다. "곽이야. 한곽." "곽? 오리 울음소리같다,이름이." "누나!" "하하하. 농담이야. 성깔있게 구네,너 나중에 빨간머리 한 누나 여기서 보면 절대 이러면 안된다?.." "아아.봤어, 그 누나. 나 그 누나 눈보고 울뻔했어. 눈이 왜 그렇게 무서워,그 누난?" "지니를 벌써 봤단말야?? 너 여기 자주 왔었냐??" "음. 누나 깨나기 전엔 거의 꼬박왔었어.누나 깨나고 나선.. 가끔씩? 근데 올때마나 누난 자거나,없더라." 이연이처럼 재잘재잘.말을 늘어놓는 곽이를 가만히 지켜보다 푸하하.크게 웃어재꼈다. 얼굴은 한가람. 성격은 선우권. 딱이네,얘. 갑자기 왜 웃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곽이는 이내 작은 손으로 내 허리를 안았다. "누나 되게 유명해.그거 몰랐지??.." "글쎄. 하암.졸리다. 자자,곽아." "있잖아. 간호사누나들은 다 2007호누나가 무섭대.뉴스에서도 나오고 그랬다면서? 의사아저씨들은 2007호 누나가 안타깝다 그러고,아줌마들은 누나랑 안마주쳤음 좋겠대. 지금 병원에서 누나처럼 유명한 사람은 없을꺼야." "그래,그래.." 늘어지는 목소리를 내며 곽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끔 내가 이럴때마다 리아는 질리지도 않고 화를 냈었다. 사람이 얘길 하면 끝까지 들어주던가,아니면 정중히 사과를 하고 끝을 내던가 해야지. 어떻게 된 애가 듣는둥 마는둥하면서 말하는 사람 기분을 조지냐고..라고 했던가?? 점점 감기는 눈을 느끼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누나 되게 보고싶었어. 어떤 사람일까,하고서. 2007호에 있는 누나는 누굴까.어떻게 생겼을까. 정말로 싸움을 잘할까?..하고서." "엉,그래.." 머리통을 쪼개버릴 것만 같았던 두통이 가시고,인제 졸음이 몰려온다. 곽이의 매끈한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천천히 눈을 감는데.. 허리에 감겨진 곽이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게 느껴진다. "..누나는 날 구해줄 수 있을거 같아.누난 곽이를 꼭 구해줄꺼야. 그치..그럴꺼지?? 곽이랑,지웅이형이랑 다..구해줄꺼지...그치??.." "어엉..누나만 믿어.누나가 다 구해주께..." 마지막 하품을 뒤로하고,가람이와 권이를 눈물나도록 쏙. 빼닮은. 그래서 굉장히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것처럼 느껴지는 곽이를 안고 눈을 감았다. 조금씩 조금씩 곽이의 목소리가 멀어져가고.. 다음날,눈을 떴을때. 곽이는 뽑기에서 뽑은 듯한 구름모양의 반지만 놔두고 사라져있었다. 뻑뻑해진 눈가를 비비며 곽이의 구름반지를 새끼손가락에 껴보고 있는데, 병실문이 열리면서 한무더기의 의사들이 들이닥쳤다. "의사씨들 안녕요??.." "아침마다 어딜 다녀오시는 겁니까. 회진돌때마다 자리에 없으시던데요." "글쎄요. 하암,그나저나 저는 언제부터 밥먹어요??..허구언날 죽만 들이키니까 손목이 완전 연필만해졌어요."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하자, 가장 앞에 서있던. 하지만 재일 젊었던 의사씨 하나가 안경을 치켜올리며 내 앞으로 다가섰다. 이만 나가보세요. 젊은 의사씨의 짤막하고도 간결한 한마디에 우루루.몰려 나가는 다른 의사씨들. 이렇게 빨리 나갈꺼면 애초에 들어오질 말던가. 심드렁하게 웃으며 닫혀진 병실문을 쳐다봤다. 끼익. 침대 밑에 있는 간이침대를 꺼내 앉은 젊은 의사씨가 부담스러울정도로 내게 시선을 고정시킨다. ......... 졸리다. 새벽에 깨나서 그런가. 지루한 하품을 하며 젊은 의사씨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졸린데. 한숨 자도 될까요?" "김윤서 환자. 지금 왜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아시고 있습니까??" "후아암. 갈비뼈 아작나고,뭐. 머리통도 병신되고,그래서 그런거 아닐까요." "...말 참 함부로 하시네요." 피곤한지.젊은 의사씨는 안경을 벗어 콧잔등을 꾹꾹.눌렀다. "말 함부로 하는거는 은지니가 최고봉인데." "...보호자분은 언제 오십니까." "보호자요??..김윤서 보호자,맨날 여기 있는 애들이요. 그 중에서 머리 초록색인애, 걔가 내 보호자 대빵이예요." "친구분들을 말씀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다시 안경을 고쳐쓴 젊은 의사씨가 뭐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지.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말한다. 이거,미치겠네.. 졸음은 몰려오고, 앞에 있는 젊은 의사씨는 사람 말을 듣지도 않고.. "친구이기 전에 내 보호자예요,걔네들이. 나 진짜 졸린데.. 짦게 말하시면 안될까요??" ".....살다살다 이런 환자는 처음보는군." "제가 원래 희귀한 애예요. 자자,빨랑 정리합시다. 요번달까진 살 수 있는거죠? 그럼 됐어요.난 15일까지만 살면 되니까―" "김윤서!!!..사람 목숨이 그렇게 하찮은 건줄 알아?!!" 젊은 의사씨가 갑자기 귓구멍이 따가울정도로 소리쳤다. 졸음이 싹 가진 눈동자로 젊은 의사씨.가슴팍에 구하겸이라는 하얀 명찰을 달고 있는 신경질적인 의사씨를 쳐다봤다. "너도 알고 있을 거 아냐. 지금 니 몸상태가 어떤지!! 객기부릴 몸이 아니라는 거,누구보다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함부로 하는 말이라는 거.지금 의사씨가 하구 있어요. 그건 아세요??" "후우.윤서야. 김윤서! 지금 네 몸이 얼마나 위험한지 아니? 링겔바늘을 네 마음대로 뽑아버리고, 주는 약 제대로 먹지도 않고. 하루가 멀다하고 자리를 비울만큼의 여력은 이미 없다구. ...보호자분을 빨리 데리고 오는 게 좋을꺼다. 제대로 검사받고, 또." "아놔..돌겠네,진짜." 붕대 사이로 삐죽삐죽.튀어나온 손가락으로 뒷통수를 긁적였다. 제대로 심각해주시는 젊은 의사씨,구하겸은 그런 내 모습에 깊은 한숨만 내쉴 뿐이였다. ......... 어차피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갑자기 머리가 띵해져 온다거나,새벽에 잠을 설친다거나. 갑자기 눈이 안보인다거나. 길가다 무릎이 휘정인다거나 하는 자잘한 행동들이 결코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쯤은. 하지만 그게 얼마나 대수라고. 사람은 살면서 언젠가는 죽는 인생 아닌가??.. 그 시기가 빠르냐, 느리냐는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어차피 죽을 목숨인걸. 정말 이해불능. "언젠가 죽겠죠. 지금 의사씨가 말하는건 그 언젠가가 오늘 저녁이 되지 않게.내일도 안되게, 최대한 이후의 일로 미뤄지게 만들어야 된다는 거잖어요. 나도 다 알아들어요. 근데 내가 상관없다구요. 김한영 조질때까지만 숨쉬면.하늘 가질때까지만 주먹 쓸 수 있으면. ...우리 칠공주한테 그 하늘을 보여줄수만 있으면, 아무것도 필요 없다구요. 언제 뒈져도, 언제 꼴까닥해도 상관없는 인생이였으니깐 김윤서가 괜찮다잖아요. ...근데 왜 자꾸 사람 승질나게 만들어요,의사씨?? 정말 김윤서 도는꼴 보고싶어서 그래요??.." 최대한 울상을 지으며 씩.웃었다. 할 말을 잃은듯.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던 구하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굉장히 많은 감정들이 뒤섞여있는 구하겸의 갈색 눈동자를 향해 말했다. "동정해도 상관없어요. 재수없다고 손가락질 해도 관심 없구요, 뭐 이딴게 다있어?하고 소리쳐도 다 괜찮아요. 근데 이거 한개만 알아두실래요???... 지금 병실에서 의사씨랑 2007호 환자님이 말한 얘기들.절대 김윤서 보호자들한테 흘리지말란거. 꼭 알아두셔야 되요. 서로 끝난 얘기,괜히 오버해서 걔네들한테 주절주절대면..... 아저씨,인제 그 손으로 메스도 못잡게 할꺼야." 찡긋. 귀엽게 윙크를 날려주고 부스스한 얼굴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내 말이 어이가 없었는지, 허탈한 숨소릴 내던 구하겸은 무거운 발소릴 내며 병실을 나갔다. 다시 조용해진 병실안. 여전히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졸린 눈을 감았다. ....... 그때까지만. 김한영 조질때까지만. 김윤서 손에 하늘이 쥐어질때까지만. 그때까지만.... 5부. 하늘 5-89. 내사랑 시스터 ※오후6시51분. ....... 우적우적. 가람이가 사다놓고 간 과일바구니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사과를 씹으며,눈썹을 긁었다. 한 13분전부터 와서는 아무 말 없이 숨만 몰아쉬는 금잔디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데.드디어 진정됐는지 금잔디가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굽혔던 허리를 반듯이 폈다. "...하아.하아..김윤서." "엉,왜??" "하아. 큰 일 났어." "무슨 큰일??" 붕신같은 몸으로 애쓴다. 여전히 온 몸에 깁스를 두르고 있는 금잔디를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숨 쉬는 게 힘든지 눈썹을 잔뜩 찌푸린 금잔디가 은근히 볼륨있는 가슴을 한 번 쓸어내리더니. 비장한 얼굴로 내게 말한다. "한영오빠가. 지금 병원에..왔―." "헬로우.씨스터!!!!??.." 금잔디의 말을 뚝.잘라먹고 등장한 요란한 새끼,하나.둘,셋, 넷,다섯... 퉤.병실 바닥에 씹다만 사과씨를 뱉었다. 병실문을 활짝.열고서 등장한 다섯명의 불청객 중. 가장 앞에 서있던 씨발놈이 양 팔을 벌리며 웃고 있었다. 사과즙이 진득하게 묻어있는 붕대를 이로 끌어내며 눈꼬리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씨발놈도 안녕??.존나 일찍 올라왔네,인천." "시스터!! 몸은 괜찮을 거야??..시스터 소식 듣고서,이 브라덜 마음이 쿵쾅쿵쾅.방아질을 하는데. 와.나 죽는 줄 알었어." "그럼 뒈지지그랬어." 툭.피딱지가 볼썽사납게 말라붙어있는 붕대를 바닥에 떨궈내고, 김한영을 향해 찡긋.윙크를 날렸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하하하. 박장대소를 하는 김한영. 김한영은 손에 들고있던, 엄청나게 큰 꽃다발을 내가 덮고 있는 이불 위에 올려놓으며 인상을 찡그렸다. "아프지??..우리 시스터 이렇게 아픈거 보니까,브라덜 심장이 찢어진다." "토나와. 그리고 한가람한테 분명 15일날 보자고 했을껀데??.. 이렇게 미리 찾아온거는, 김윤서보고 빨랑 조져달라는 소린가." "으. 시스터가 이렇게 아픈데??.. 안돼.시스터 다 나으면,그때―" "오빠!!!! 역겨우니까,그 면상 치우라잖어요오." 푸다다닥. 어디선가 나타난 수이연이 오리새끼처럼 요란하게 달려온다. 어렸을적,애벌레랜드에서 효선이가 사줬던 바나나모자를 앙증맞게 뒤집어쓴 이연인 어쩡쩡하게 서있던 불청객 4명을 밀치고. 나와 김한영 앞에 다가섰다. "윤서가 토나온대잖어요. 오빠,그 면상 치워요오. 이연이가 조따조따 화났어요,오빠 보구서. 그래서 막 달려왔거든요??.. 근데 이르케 오빠가 멀쩡히 서있음,이연이 진짜 뒤집어져요. 접때 분명히 말했잖어요. 김한영 목구녕,수이연이 따버린다구...." 필요이상으로 날을 잔뜩 세운 이연이가 방글방글.귀엽게도 웃으며 김한영을 향해 말한다. 멋쩍은 듯, 뒷통수를 긁으며 웃는 김한영. 개새끼.씨발놈. 아,또 뭐가 있지. 김한영한테 어울리는 말이.. 진지하게 생각에 빠져들기가 무섭게,뒤이어 날아오는 웃음나는 목소리들. "....뭐야,이새끼들은??" "어.어..하,한영이 오빠??..." "얼. 오빠 안녕!! 우리자기, 강안이는 어따놓고 왔어?" "오랜만이예요,한영이오빠." "흥. 벼룩도 낯짝이 있지. 어떻게 여기 오실 생각을 다해셨대??" 지니.아라,연오.효선이,리아. 차례로 한마디씩 던지며 병실 안으로 꾸역꾸역.들어오는 가시네들. 김한영과 함께 등장한 불청객들은 자신들을 밀치고 지나가는 가시네들을 아니꼬운 눈으로 쳐다보다,지니의 싸늘한 눈초리에 하.헛바람을 낸다. 이러다 병원에서 한바탕 치르는 거 아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걱정과는 달리 신이나 죽겠다는 얼굴로 흥미진진한 상황을 지켜봤다. 김한영을 둥그렇게 둘러쌓는 여섯명의 칠공주들. "와우. 다들 오랜만??그동안 잘 지냈지??..이게 얼마만이야." "닥쳐,이 씹쌔끼야." 역시 미친개다웠다. 전국짱 앞에서 닥쳐라니.지니를 향해 험악한 눈을 부라리고 있는 김한영 쫄따구들을 보며 킬킬킬.배를잡고 웃었다. 완전 개그가 따로없어. "왈왈!..지니는 여전하네?? 현광이하고는 어때,잘 되고있어??.. 최필립하고도 여전하고??. 와.지니, 은근히 능력 좋네. 연오, 금방 따라 잡겠어.." "....천하의 김한영 취미가 남 뒷조사라니. 놀랍네요." "내가 아니라 후배들이 물어다준거지. 리아는 전보다 더 예뻐졌네??..말만 예쁘게하면 진짜 일등신부감인데. 그 입 좀 어떻게 안될까?" 엿먹어,새끼야. 라는 얼굴로 김한영을 향해 입꼬리를 말아올리는 리아. 그런 리아를 향해 히죽히죽. 잘도 처웃는 김한영. 띠잉. 순간 두 사람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고개가 뒤로 넘어갈정도로 찡한 두통이 몰려왔다. 띠바..여기서 이러면 안되는데... 이를 악물고 고개를 흔들어봤지만, 아쉽게도 달리지는 건 없었다. 너무 세게 물어 어금니가 시큰했다. 김한영한테 정신팔려서,이런 김윤서를 애들이 못본다는 게 그나마 다행인가??... 어이없는 웃음을 흘리며 등받이에 머릴 기댔다. "..그만들 해." 언제나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하는 건 우리의 대빵,효선이. 효선이가 김한영을 향해 으르렁거리는 지니와 리아를 멀찌감치 떼어놓자,아라가 재빨리 냉장고에서 음료수를 꺼내 김한영과 그 쫄따구들에게 건넸다. 험악했던 병실 분위기가 지하2000미터에서 끌어올린 암반수를 엎어놓은 것 처럼 금새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아라가 건넨 음료수.요즘 한창 뜨고있는 삼준기가 선전해 유명해진 미라는 석류를 좋아해를 단숨에 들이킨 김한영이 빈 캔을 콰직. 구겨 쓰레기통에 곱게 밀어넣는다. "...여긴 왜 오셨어요." 거의 반쯤 날아간 정신상태를 겨우겨우 붙잡고, 눈꺼풀에 힘을줬다. 희미한 시야 속에 효선이의 초록색 머리통이 보인다. 그 옆에 아직도 씩씩거리는 지니의 빨간 머리도 보인다. 아. 고새 염색했나. 나도 다시 보라색으로 바꿔야될 껀데..이번엔 무슨 염색약을 살까 고민을 하고있는데,부담스러울정도로 무겁게 가라앉은 김한영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내 동생 보려구.김한영한테 하나밖에 없는,사랑하는 시스터 보려구 왔다. 너희가 이러는 거,이해 못하는 거 아닌데.. 아니. 이해뿐만 아니라 동감까지 하는데... 그래도 내 시스터잖아. 너희들 친구이기 전에,윤서는 내 동생이고. 또 내가―" "먼저 버렸어,오빠가!!! 김한영,너가 먼저 버렸잖아 그거!!!!!" 아. 귀 아프다. 오랜만에 이성을 잃은 이연이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김한영에게 달려들었다. 목에 핏대가 설정도로 바락바락.소리를 지른 이연인 눈물이 그렁그렁.매달린 눈으로 김한영을 노려본다. ......저런 건 차라리 김윤서가 하는 게 나을껀데. 칠공주는 예쁜 것만 하고, 좋은 것만 하고 그래야 되는데.. "죽여버릴꺼야. 무슨 낯짝으로 여길 다시 와!!!오빠가 뭔데!!!!!!...." "이연아,진정해!!" "윤서가 얼마나 아픈데!!오빠때문에 윤서 가슴이 얼마나 슬픈데!!!! 아무 것도 모르면서 오빤.오빤.. 윤서는 오빠 동생 아냐!!!..오빠도 윤서 오빠 아냐. 윤서한테 인제 우리가 가족이야. 우리가 가족이란 말이야아!!!!!!!.." 천장의 형광등이 흔들렸다.고 느꼈다면 그건 김윤서의 오바인가. ..아무튼 병실이 흔들릴정도로 크게 고함친 시한폭탄 수이연이 드디어 터져버렸다. 놀란 효선이와 아라가 달려와 팔을 잡았지만, 어디에서 그런 황소같은 힘이 나왔는지.두 사람을 뿌리치고서 김한영의 멱살을 잡아올리는 수이연. 160도 안되는 꼬맹이 수이연이, 190에 가까운 거인 김한영을 내팽개친다는 건 말도 안되는 일이였다. 하지만.. 제대로 터진 이연이가 못하는 일이라곤 바나나 우유를 버리는 일 뿐밖에 없다. 황소개구리도 울고갈 힘으로 김한영을 바닥에 집어던진 이연이가 눈물 가득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쇳소리가 날정도로 소리를 지른 이연인..결국 주체를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울기 시작했다. "윤서는 아픈데!!!!..오빠때문에 너무 아픈데!!..그래도 아프다, 한마디 안하는 게 우리 윤선데!!!..오빠가 뭔데 자꾸 윤서를 아프게해. 쫌만 기다리면 우리가 간댔잖아!!!...오빠 조지러 윤서랑 우리가 간댔잖아... 근데 왜 나서서 윤서 더 아프게 해. 윤서한테 왜 자꾸 가짜웃음 짓게 만들어,왜!!... ...진짜 싫어,오빠같은 사람..." 토닥토닥. 넘어갈 듯 울던 이연인 등을 두드려주는 아라의 품 안에서 울음을 삼켰다. 연오가 쓰게 웃으며 손톱을 튕긴다. 탁탁.달려오려는 쫄따구들을 한 손으로 막은 김한영이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이연이처럼 한바탕 치르고 싶지만,날 생각해서 그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지 알 수 없는 지니가 성난 얼굴로 애꿎은 벽만 탕탕.친다. 그 옆에서 리아는 차갑게 식은 표정을 하고 서있고, 좀더 옆으로 가보면 급작스럽게 벌어진 상황에 놀란금잔디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다. .........아. 완전 개판이네.. 조금은 흐릿해진 두통을 느끼며 픽.웃었다. "나가요,오빠. 지금 여기서 김한영 반기는 사람, 아무도 없는 거 누구보다 잘 아시잖아요? 잘 꺼지시구요, 김윤서가 지 발로 스스로 찾아갈 때까지. 가만히 처박혀 계시길 바랄게요." 다다다다. 쉴틈없이 뾰족한 말을 내뱉은 리아가 벽에 기댄 몸을 떼고, 손수 병실문을 열여줬다. 조금.아주 조금 슬프게 웃던 김한영은 날 한번 쓰윽.돌아보고는 아무 말 없이 리아가 열어준 병실문으로 나갔다. 뒤이어 나가려던 김한영의 쫄따구들이 갑자기 이마에 주름을 잡으며 돌아섰다. "..그렇게 까불다,뒤지는 수가 있다.김윤서?" "저 씹쌔가 진짜!.." 참다못한 지니가 몸을 일으킨다. 참을 수 있을만큼 가라앉은 두통에 고마워하며 침대에서 내려선 나는 그런 지니를 막고, 병실문을 막고서있는 김한영의 쫄따구들에게 걸어갔다. "김한영이 그렇게나 좋냐??..." "뭐??" "너희 목숨보다,그 씨발놈이..더 좋다.이거지??.." "그래." "....그럼 뒈져,띠바야." 빙글.웃으며 자기 목숨보다 김한영이 더 좋다고 말하던 검정 후드의 머리통을 잡았다. 그리고 쿠왕. ....녀석의 눈에 별똥별이 하나.둘 보인다. 붕신. 고작 벽에 대가리 한 번,박았다고 정신을 놓아버린 재미없는 검정 후드에게서 손을 뗐다. 그 모습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나머지 쫄따구 셋. 시야는 흐릿하고. 머리는 묵직하고. 갈비뼈는 욱신하고. 어금니는 시큰하고. .......하지만 주먹만은 말짱했다. 자잘한 상처들만 빼면 아무렇지 않을만큼,아주 말짱했다. "너 이씨발!!!!" "김윤서!!!!" "..여기서 나 골로 못보내면,몇일 후에 너네 짱이 골로 갈 주 알어. 확실히 덤비란 말이야..그지같이 굴지말고." 삐딱하게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자, 바닥에 가래침을 뱉은 세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허리를 숙여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고,다리를 휘둘러 한 녀석의 복숭아뼈를 힘껏 후려찼다. 기분 좋은 뼈소리와 함께 한 녀석이 발목을 움켜쥐며 주저앉는다. 눈 앞에 보기좋게 놓여진 녀석의 검은 대가리를 걷어차고,뒤에 서있던 녀석의 목덜미를 움켜 쥐었다. 숨 넘어가는 소릴 내며 눈을 부릅뜨는 새끼. "...아프지??..존나 아퍼서 뒤질 거 같지??... 너가 지금 아픈만큼 후회해. 김한영,그 씨발놈 밑에 붙어있는 거. 그 씨발놈을 짱이라고 떠받들었던 거. 그 씨발놈하고 안면 튼 거. 모두다 후회해. 그리고 뒈져,붕신아." 나머지 한명이 뒤에서 내 허릴 잡았지만,아랑곳 하지 않고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줬다. 녀석의 눈시깔에 점점 흰자위가 올라오고. 입에선 침이 주르륵.흘러내린다. "뭐 이런 년이 다있어?!!!.." 내 허릴 잡고있던 녀석이 거칠게 소리친다. 허리에 두르고있는 팔에 힘을 줘,아작난 김윤서 갈비뼈를 더 뭉개고 있는데.. 우습게도 웃음이 난다. 아퍼서 죽을 것만 같은 상황에 웃음이 난다. .....아. 싸이코네, 김윤서. 털푸덕.숨 넘어가기 일보 직전인 녀석을 바닥에 팽개치고, 허리를 비틀어 날 안고있는 녀석의 양 머리통을 잡았다. "그렇게해서 가루내겠어??...하려면 제대로 하라니깐.." 터트려버릴듯. 녀석의 양 머리통을 짓누르며 무릎을 들어올렸다. 기침을 하며 내 어깨 위로 피를 토해내는 녀석.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주춤주춤 물러서는 녀석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처얼썩.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후끈거리는 뺨을 쓸어내리며 씩.웃었다. "그렇게 해서 뒈지겠니,리아야??.." 방금 전. 어마어마한 힘으로 내 뺨을 후려친 리아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진짜 뒈지게 해줘,김윤서??..그게 그렇게 소원이야?.. 뒈지는 게 그렇게 소원이냐구!!!..." "....15일만 지나면.하늘 잡고나면...그게 소원일 거 같기도 하다." "김윤서,너어!!.." ".......리아야.." 띠잉. 다시 시작됐는갑다. 가느다란 기계음이 소름끼칠정도로 흘러대는 두통을 느끼며 작게 중얼거렸다. 휘청이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리아의 위로 쓰러지는데.. 마지막 내 말을 듣고 어이없어하던 리아가 몸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뒤로 꽈당.넘어진다. 운동 좀 해놓으라니깐... 가물가물해진 시야를 닫으며, 물컹한 리아의 가슴 위에서 빙그레.웃었다. "내일 꼼보다 남자,보라색으로 사와라.." 5-90. 정리, 그리고 한라스트 .... ※다음날. 요즘은 참 제대로 깨는 날이 없다. 정각 오후3시. 마른 하품을 하며 뻐근한 허리를 주물렀다. 도대체 몇시간을 잔거지??.. 검정색 시계 바늘을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얼마 전까지 사람이 있었는지, 삐죽 튀어나온 간이침대를 발로 대충 밀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덜그럭거리며 팔뚝에 매딜린 튜브들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이건 또 언제 달린거야?? 어지럽게 얽혀있는 튜브들을 보며 눈썹을 긁적였다. 멋대로 뽑았다간 구하겸은 물론이고 리아까지 덩달아 지랄할껀데. 나름대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고민을 시작했다가, 30초도 지나기 전에 팔뚝에 꽂힌 바늘들을 뽑아냈다. 조그맣게 새어나오는 핏방울들을 반대편 손에 감겨진 붕대로 훑어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띵. 하면서 눈 앞이 핑-돌았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잡고 다리에 힘을 줬다. 어지러운 두통을 없애기위해, 좌우로 머리를 터는데. 문득 쇼파 위에 가지런히 올려있는 교복이 눈에 보인다. "아. 학교.." 아라가 빨아다놨는지 빳빳하게 다려진 제화예고 교복을 보고 이마를 퉁겼다. 금잔디랑 싸우기 전에 교무실에서 그 오버를 떨고 나왔는데. 와, 지금 몇일이나 지난거지??.. 이연이가 크레파스로 덕지덕지. 낙서를 잔뜩 해놓은 달력을 보며 쇼파 위의 교복을 집어들었다. 엉금엉금. 굼벵이보단 빠르게 교복을 갈아입고 병실문을 열자, 마침 내 병실로 오려던건지. 병실 바로 앞에서 눈이 동그란 구하겸과 마주쳤다. 미간을 구기며 내 차림새를 훑어본 구하겸이 내 어깨를 잡는다. "병실로 돌아가." "외출이요, 외출. 외출 갈껀데, 나." "그 몸으로 무슨 외출이야? 장난 그만치고 들어가." "그때 얘기 끝난 거 아녔어요??.." 조금 짜증난다는 투로 말하자 구하겸이 어이없는 얼굴을 한다. "김윤서. 아무리 그래도 넌 환자야. 그 몸으로 어딜 간다는-. 허리에 두른 보호대,어쨌어??!!" "아. 그거요, 교복때문에 그냥 벗었어요." "뭐?? 넌 도대체!!" 할 말을 잃은 듯. 구하겸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도 않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다.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는 날 한참 바라보던 구하겸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내젓기 시작했다. "아무튼 그대로는 안돼. 보호대라도 차고 가. 황간호사, 여기." "됐어요. 걸리적거리게 그런걸 뭐하러.그럼 다녀올께요!!" 구하겸이 말릴틈도 없이 아픈 갈비뼈를 부여잡고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후왁후왁.조금만 뛰어도 콧구멍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비상계단을 서너칸씩 뛰어내려가다.문득 떠오른 생각에, 몸을 틀었다. 금잔디 병실이 몇호였지??.. 코를 킁킁.거리며 비상문을 열고 들어가, 눈 앞에 보이는 간호사 언니를 붙잡고 물었다. "언니, 금잔디가 몇호실이예요??.." "예??금잔디라면. 아, 1501호예요." 기막힌 우연. 금잔디를 담당하던 언니였는지, 언니는 다짜고짜 들이댄 내 물음에 곧바로 대답을 해줬고. 난 고마움의 인사를 해주고 1501호로 향했다. 금잔디(18/女). 병실문 옆에 붙어있는 하얀 종이를 보며 씩.웃었다. 벌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아령을 들고서 TV를 보고있던 금잔디가 고개를 돌린다. 들고있던 아령을 내려놓고, TV를 끈 금잔디가 왠일이냐는 얼굴을 한채 목에 두른 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물어볼꺼가 있어서." "어제 그 난리를 치고도 멀쩡하네? 본받고 싶다,김윤서 회복능력." "하하하. 별거아닌데,뭘. 아. 그건 저렇고, 황제공고에 좀 깝치는 새끼들 누구있냐??.." 냉장고를 열어 미라로화이바를 집어들었다. "깝치는 새끼들??..갑자기 그런건 왜." "아. 선생들한테 해놓은 게 있어서.대가리급으로 몇명만 알려줘. 뭔 리스트를 받았었는데, 버렸거든. 넌 짱이였으니까 대충 알거아녀." 원샷으로 미라로화이바를 깔끔하게 비운 나는 빈 병을 쓰레기통에 넣으며 금잔디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난감한듯. 머리를 쓸어넘기던 금잔디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지 위에 이름 몇자들을 휘갈겨쓰기 시작했다. 3학년 C반 최치인. 3학년 J반 노하라. 1학년 A반 권구산. 1학년 K반 한라스트. 2학년은 없네. 금잔디에게서 건네받은 메모지를 대충 훑어보고,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땡쿠베리마치. 그럼 수고해라." "그 몸으로 또 하게??.." "죽기전에 마음껏 싸워놔야지." 눈을 찡긋이며 병실문을 나섰다. 아라같은 눈을 하고서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금잔디를 뒤로하고.. .............. ※황제공고 언제봐도 참 웅장한 황제공고 정문 앞. 메모지에 있는 네 명의 이름을 곱씹으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한창 수업시간인지 고양이 죽은 듯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우선 순위를 매겼다. 교무실에 들러 그때 말한 시험을 보고,3학년부터 차례로 내려가는거지. 이름을 존중해줘야하니까, 한라스트를 끝으로 빠바방. 좋았으. 손바닥을 치며 교무실로 향했다. 벌컥. 문을 열고 본교무실로 들어서자 수업에 들어간 선생들을 빼고 얼마 안되는 선생들이 그때처럼 놀란 눈을 끔벅이며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헉. 숨 들이키는 소리, 아주 리얼해주시고. 몇 안되는 그 선생들을 향해 윙크를 날려주며 교무실 정 가운데 위치한 테이블로 걸어갔다. "그때요, 약속했잖아요. 시험 이콜 꼴통. 시험지 어디있어요??" "어??아. 어어." "다른 애들은 이미 다 봤어요??그럼 점수 빨리 나오겠네." 컴퓨터용 사인펜을 이빨로 뜯어내고, 겁에 질린 여선생이 슬쩍 내려놓고 간 두툼한 시험지를 펼쳤다. 불편한 갈비뼈때문에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대충 오른팔로 몸을 지탱한채 시험지를 풀어내려갔다. ........ 효선이처럼 번뜩이는 천재도. 그렇다고 리아처럼 더럽게 잘 돌아가는 머리도 아니였지만, 그런대로 잘 풀어놨다. 음. 이정도면 만족스럽지. 개발새발. 거지같은 글씨로 가득찬 시험지를 바라보며 빙긋.웃었다. 총 아홉장이나 되는 시험지 위에 이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난 컴퓨터용 사인펜을 내려놓고, 테이블에서 몸을 뗏다. 아뜨뜨.하면서 마시던 녹차를 바닥에 내뿜는 여선생 하나. "잠깐 어디 다녀올동안 성적표 좀 뽑아놔주세요??..그럼 마시던 녹차 마저 드시고. 다음에 또 만나요." 까닥까닥. 손을 흔들어주고 교무실을 나왔다. 아직도 수업중인지 더럽게도 조용한 복도를 지나 꼭대기층에 위치한 3학년 J반 앞에 멈춰섰다. 수학시간인지 분필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숫자들을 열심히 외치고 있는 선생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온다. 뻐엉. 오른발로 앞 문을 걷어찼다. 거의 반쯤은 졸고있던 선배님들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날 쳐다본다. 아. 얼굴을 모르니 당황스럽네. 뒷머리를 긁적이며 우선 파리 들어갈라.입을 쩍 벌리고 있는 선생에게 꾸벅.인사를 했다. "하이,헬로우,봉쥬르 선생님. 찾는 선배님이 있어서요, 여기 노하란지 예스하란지 있어요??" "너. 너는!!" "난데 무슨 일―" 퍼억. 4분단 맨 앞자리에 있던 거구의 선배님 하나가 손을 들며 일어서기가 무섭게 팔꿈치를 휘둘렀다. 주르륵.새빨간 코피가 흐르고, 눈꺼풀이 깜짝하기도 전에 일어난 상황이라 그런지. 상황파악이 덜 된 노하란지, 예스하란지 모를. 덩치빨은 오질나게 좋은 그 선배님은 눈을 껌벅이며 나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었다. 턱 밑으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을 이제서야 깨달았는지,험악하게 인상을 구기며 눈을 부라리는 선배님. "아아. 이렇게 대놓고 조지면 존심 상하는데.그쵸??" "씨발.너 뭐야!!!?" "나요??..나 선배 조지러 온 후배님인데요." "하. 별 꼴같지도 않은―" "시간 없으니까 휘딱휘딱 처리하자구요. 아차차, 빼먹고 그냥 시작할뻔했네. 여기서 저한테 깨지면 다시는 사고 안치겠다고, 약속 한개 하고 가죠. 우리??.." 옛날. 한때 엄청난 인기를 휩쓸었던 SOS시트콤, 중풍산부인과에서 미달이의 친구로 나왔던 정배처럼 이마를 딱.치며 실실. 웃음을 흘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허허.헛바람을 내는 노하라 선배님. 애들이 오기 전에 병실에 얌전히 돌아가있어야 된다는 생각에, 선배님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나 혼자 알았다구요? 오케이. 도장 쾅.하며 주먹을 날렸다. 별다른 기술 없이 투박하게 날아간 주먹은 정확히 선배님의 목덜미 중앙에 꽂혔고. 숨쉬기가 힘들어졌는지 마른 기침을 하던 선배님이 바닥에 고꾸라진다. 탁.바닥에 엎어져 목을 감싸쥐는 선배님의 뒷통수를 지그시. 밟아주며 경악어린 시선으로 날 보고 있는 J반 선배님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보였다. "선배님들이 인제 증인이예요??... 노하라 선배님은 오늘부로 사고 절~대로 안치는 착실한 모범생이 될꺼라는. 쾅쾅쾅. 오예.그럼 수고들요!!"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J반을 나와 곧장 아래층에 있는 3학년 C반으로 향했다. ......................... ※17분 후,1학년 K반. 덜덜떨며, 꼴사납게 교탁 앞에 주저앉은 선생을 향해 가여운 시선을 보내며 피로 떡칠을 한 라스트 후배님의 멱살을 잡았다. 정신이 가물가물 한지, 흐릿한 시야로 애써 날 보려는 게 참. 애쓴다, 애써. 나보다 두세뼘은 더 큰 잘생긴 남학생, 라스트는 내게 멱살을 잡힌채로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야.3학년보다 너가 훠배 낫다야. 이름이 괜히 라스트가 아냐. 그치??.." "씨..씨바..." "너 인천연합 할래??..되게 마음에 든다,너." 싱글싱글 웃으며 다른 꼴통, 세명처럼 한방에 나가떨어지지 않아 더욱더 나를 기쁘게 만들어주는 라스트를 향해 물었다. 탁. 책상 위에 라스트를 앉혀놓고, 최대한 이연이처럼 애교스럽게 눈을 깜박였다. 싸우다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를 손등으로 거칠게 훔쳐낸 라스트는 입가를 실룩이며 날 노려봤다. "뜬금없이 와서..붙자더니..이제는...인천연합을 들라구요?.." "오. 처음보다 말이 길어졌네. 좋은 현상이야." "씨발.." "씨발이고,디발이고. 어때??.. 너정도 맷집에, 너정도 마스크면. 오예. 전국연합 조지는 데 한도움 될껀데." ".....사고치지 말라며요, 처음에." 가물가물한 정신을 드디어 잡아왔는지, 초점이 제대로 잡힌 눈으로 날 똑바로 응시한 라스트가 조금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한다. 아. 그거야 뭐..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한번뿐인데 뭘. 퍼스트 이콜 라스트가 되게 만들어 줄께. 어때, 생각있어??.." "....누나가 나 키워줄꺼예요?.." "하하하. 너가 내 애새끼도 아니고,키우긴 뭘 키워." "나 강하게 만들어 줄꺼냐구요." 아예 의자를 끌고와 라스트 앞에 앉은 나는 도전적인 라스트의 눈동자를 보며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 배겠다. 교복에 튄 피를 퉤퉤. 침으로 닦아내며 라스트를 향해 말했다. "그건 잘 모르겠고. 아,연오라고. 존나 예쁜 가시네 하나 있는데, 걔 얼굴 구경시켜줄께. 아무데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이 아니다, 너??.." "아. 그딴거 필요 없어요." "얼.연오의 얼굴이 안먹히는 새끼도 있네???..그럼 효선이 소개시켜주께. 걔하고 한시간만 있어봐,전교1등이 아주 껌이야. 껌." 소매자락에 묻은 피가 잘 지워지지않아, 미간을 좁히며 대답했다. 아씨.. 작게 욕을 중얼거리는 라스트. "걔도 싫으면.. 흠.아라는 너무 아까워서 안되고,지니는 성격이 지랄맞아서 넘어가고. 리아는 당연히 제끼고.이연인.. 아. 그래, 이연이 어떠냐??.." "누나요. 나 누나 수제자 시켜줘요." 피를 닦다말고 고개를 들어 라스트를 쳐다봤다. 수제자??.. 무협영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닌가 싶다,라스트야. 한솔이를 보듯.녀석의 머리를 쓱쓱,쓰다듬으며 눈을 찡긋였다. "금잔디 수제자 시켜줄께." "누나요. 난 일당백 김윤서 제자할래요." "하하하하. 진짜 골때리는 새끼다,너." "시켜줄꺼예요,말꺼예요??.." "새끼야, 우유나 더 처먹고 와라." 탁탁. 라스트의 어깨를 두드려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의자를 끌고 오는 바람에 아까부터 어쩡쩡하게 서있던 앞자리 아이에게 친절히 의자를 건네주고, 반을 나오려는데. 인상을 잔뜩 구긴 라스트가 뛰어나와 내 팔을 잡는다. 그렇게 맞고도 이렇게 뛸정도면.. 이연이 맷집하고 거의 맞먹겠는데??.. 이곳저곳.찢어진 상처를 가득 안고 있는 라스트를 올려보며 한쪽 눈썹을 늘어뜨렸다. "왜??.." "어쩔꺼예요. 초딩때부터 누나 존나 존경했단 말이예요." "하하하.존경까지야..황송하다?" "장난 아니예요." "장난말고, 장넌해 그럼." "누나!!" "어따대고 소리냐." 갑작스럽게 들려온 허스키한 목소리에 김윤서와 라스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땡땡이 치다 왔는지, 담배 냄새가 진득하게 배인 교복을 입고 정지운이 삐딱한 시선으로 라스트를. 정확히 말하자면 라스트가 잡고 있는 김윤서의 손목을 쳐다보고 있었다. 얼. 저번 고백타임 이후로 오랜만에 보는 정지운이 스크래치 난 눈썹을 꿈틀거리며 걸어왔다. "오늘은 검정폴라 안입었네??.." "....어." "언제봐두 죽인다,니 턱선. 조각해두 되겠어. 4B연필 쥐어본 사람이라면 한번쯤 그리고 싶은 턱선이야." "....여긴 어쩐일이냐." "아. 볼 일이 좀 있어서.맞다, 성적표 받으러 가야되는데." 라스트에게 잡혀있는 손의 반대편 손으로 눈썹을 긁으며, 허허.웃었다. 김한영을 조지고 하늘을 잡을 날이 얼마남지 않아 아주 유쾌한 지금 이 기분을 망치고 싶지않다. 정지운을 계속 보고 있다간, 아무리 웃는낯을 해도 김한영때문에 눈꼬리부터 천천히 일그러 질꺼고..그러다 주먹부터 나가겠지??... 휘유. 가벼운 한숨을 쉬며 정지운을 쳐다봤다. "김한영 추종자로든,아님 인천연합으로든 어차피 조금있음 볼껀데. 이만 빠빠이하자??..라스트 너는 인천연합 할라면 나 찾아오고. 안할라면 그냥 처박혀서 열공 해주시고.오키??.." "누나." "김윤서." "아놔,병실로 빨리 컴백해야돼." 슬슬 통증이 오려는 머리통을 누르며 라스트와 정지운에게서 물러섰다. 관자놀이를 꾹꾹.누르며 교무실이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벌써부터 복도가 다섯개로 보이는 게.. 별로 좋지않다. 아.성적표는 받구 가야되는데.. 뜨거운 숨을 뱉으며, 한걸음.한걸음 떼어지지 않는 발을 뗏다. ............ "아프지마라." 정지운의 짧고,굵은 그 한마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김한영 조지기 전까지 아마,김윤서가 안아플 날은 하루도 없을꺼다, 정지운. ......... 모퉁이를 돌아 정지운과 라스트의 뜨거운 시선이 더이상 보이지않게 되었을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심장께를 움켜쥐며, 두통이 가라앉길 얼마쯤 기다리고 있었을까. 뺨을 따라 흘러내린 뜨거운 땀방울이 툭.하고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떨어졌다. ................. 김한영 조지기 전에 김윤서가 먼저 뒈지면 안될껀데.... 아. 졸려. ♡ ─────────────────────────────── ♡ 　♥ 「제　목」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 「작　가」 상큼써냐♪ 　♥ 「메　일」 yunho-sukloveys@hanmail.net 　♥ 「팬카페」 GOOD CAFE [상큼써냐] (http://cafe.daum.net/tkdzmaTjsi) 　♥ 「연재방」 맑은하늘1 　♥ 「작가말」 모탈문을 읽으시는 동안 만큼은 기쁘고,재미있는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모두들 행복하세요♪. 　♥ 「출　처」 ╋소설나라╋ (cafe.daum.net/sosulnation) 　+ 불펌/도용/성형 은 비매너적인 행동입니다 + 　+ 퍼가실땐 작가님 허락메일 필수 + ♡ ─────────────────────────────── ♡ ※※ 모범생의 탈을 쓴 문제아 ※※ 5-91. 가출 ............. ※.... 끼륵끼륵. 태어나 처음 보는 갈매기들을 보며 샴푸CF처럼 휘날리는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지나가는 짭쪼름한 바닷 바람을 깊게 들이마쉬며, 멀미가 나려는 속을 억눌르고 있는데,바닷가에 서있던 몇안되는 사람들이 날 보며 수근거리는게 보인다. 띠바. 여기도 빨리 뜨던가 해야지. 발가락 틈새로 파고드는 깔깔한 모래알들을 몰려오는 바닷물에 헹구고, 입고있던 후드점퍼의 모자를 머리에 뒤집어썼다.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갈비뼈를 움켜쥐고 돌아서는데,마침 반가운 얼굴 한 개가 날보며 활짝 웃고있었다. "곽곽곽. 얼어 뒤지겠는데 왜 왔어,꼬맹이." "누나가 안들어와서. 누나,이거 오늘 찍은거." 대가리가 허리에도 안오는 곽이가 하얀 가디건을 펄럭이며 열장쯤 되보이는 사진을 내밀었다. 씩.웃으며 곽이의 맨들맨들한 머리통을 쓰다듬어줬다. 곽이에게 건네받은 사진을 하나씩 넘겨보는데,사진 속에는 몇일새 팍삭 늙어버린 여섯명의 여자애들이 하나같이 죄다 우중충한 얼굴로 서있었다. 아.때되면 갈껀데,뭣하러들.. 쓰게 웃으며 다크써클이 입꼬리까지 내려온 리아의 얼굴을 바라봤다. "있지,누나. 누나들이 누나 되게 찾어.병원에서도 그러고,밖에서도 그러고. 맨날 교복입은 누나,형들이 와서 누나 찾고 그래. 근데 이렇게 여기 있어도 되는거야??" "엉." "아라누난 울다가 어제 기절해서 입원했다??..연오누나 손톱은 몇일째 그대로구,지니누나하고 이연이누난 아예 학교도 안가고 누나 병실에 있어. 효선이누난 맨날맨날 바쁘게 뛰어다니구, 리아누난.. 누나 오면 죽여버리겠다고,진짜 시퍼런. 저거 바다색깔만큼 파란 칼을 막 가는데. 곽이 마음이 콩닥콩닥했어.하지만 끝까지 누나 여기있는 건 얘기 안했다. 나 잘했지??" 검은 눈망울을 반짝이며,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귀여운 곽이. 엉,잘했다꼬맹이. 빙그레. 입가를 늘어뜨리며 사진을 주머니에 쑤셔넣었다. "자. 오늘은 그럼 뭐해볼까??..발차기 해볼래,꼬맹이?" "응응!!!" 해맑게 웃으며 곽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다. 활활.타오르는 눈으로 자세를 잡고 선 곽이를 보며 한걸음 물러섰다. 배우는 속도가 꽤 빠르다. 곽이는 벌써 그저께 알려준 자세를 완벽하게 잡고 발을 뻗고있었다. 이야. 이러다 새로운 전설이 또 한개 나타나겠는데??.. 흐뭇한 얼굴로 곽이를 쳐다보고 있는데,문득 바닷가 구석에 처박혀 있는 가게 하나가 시선을 잡아당겼다. 허공을 향해 열심히 발을 휘두르고 있는 곽이에게 하고 있으라는 말을 남기고,그 가게로 천천히 걸어갔다. 볼품없는 외관과는 다르게 내부는 꽤 주연오스럽게 꾸며져있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10평남짓한 가게 안을 둘러보는데,카운터에서 쿵.하는 소리와 함께 왠 대가리 하나가 불쑥 올라왔다. "악.씨바, 존나 아프네. 어서오- 어? 사부!!!!" 헉. 카운터에서 올라온 대가리가 반갑게 웃으며 가볍게 카운터를 뛰어넘어 날 확.안는다. 숨도 못쉬게 꽉 안아버리는 무식한 새끼의 배에 주먹을 찔러넣고 욱신거리는 갈비뼈를 움켜쥐었다. 이 새끼를 확.그냥.. 아픈 배를 문지르면서도 실실 웃음을 흘리는 라스트를 보며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가 여긴 왠일이냐??...벌써 학교 때려친거?" "아뇨!!사부 그렇게 가고,정지운하고 맞짱까다 선생한테 걸려서 한 달 정학 먹었지롱요!!..그러는 사부야말로 여긴 왠일이예요?? 지금 인천 장난 아니던데. 칠공주에,인천연합. 그것도 모자라서 무슨 그룹??..아무튼 그런데서 사부 찾을려고 눈에 아주 형광등을 켰어요." "누가 니 사부야.할꺼면 금잔디 수제자 하라니까??.." "아.싫어요. 금잔디는 정지운빼고 존나 차갑잖아요.그리고 주먹빼면 볼 거 없는데,뭐." "하하하하.넌 그런 주먹이라도 있냐??.하여간 재미나. 그래, 정학먹고 여기서 알바뛰는거?.." "아. 아니예요,여기 마이홈이예요. 동생 둘이랑 같이 살고 있는데, 막내는 병원에 입원해있구. 둘째는 뭐,어디 갔는지 잘 모르겠어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라스트를 멀뚱히 바라보다,나도 그냥 어깨를 으쓱였다. 가게는 분명한데 용도를 전혀 모르겠는 라스트의 마이홈을 싱겁게 훑으며,눈썹을 긁었다. 그런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라스트가 갑자기 날 끌고 가게 안 쪽으로 들어간다. 이건 또 왠 용광로??.. 얼굴이 후끈.달아오를 정도로 뜨겁게 타오르는 뜬금없는 용광로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라스트가 신이난 목소리로 주절거린다. "이래뵈도 제가 한사장이잖아요. 악세사리든 뭐든 다 만들어줘요. 손님이 와서 직접 만들어도 되고,제가 직접 만들어주기도 하구요. 은근히 인기가 많아서 주말엔 꽤 붐벼요,여기." "엉." 라스트에게 잡혀있는 손의 반대쪽 손으로 턱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무선반 위에 어지럽게 놓여있는 특이한 모양의 목걸이,이름이 새겨진 반지.이니셜로 만들어진 귀걸이등등. 할튼 굉장히 다양한 종류의 물건들을 살펴보다,퍼뜩. 곽이가 떠올랐다. 아 맞다. 이마를 치며 곽이에게로 돌아가려는데, 문이 열리면서 입술이 파랗게 질린 곽이가 어떻게 알고 왔는지 팔뚝을 문지르며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꼬맹아." "막내야." "어??누나하고 형이 어떻게 같이 있어??..."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휘둥그레진다. 막내??..그럼 곽이가..라스트 동생??... 뭐 이런 황당한. 바보처럼 눈을 껌벅이며 라스트와 곽이를 번갈아 봤다. 입술 사이로 신기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이 근처에 있다는 집이 이거였어,꼬맹이??.." "응. 근데 누난 우리 형 어떻게 알어??.." 곽이가 곧 베실베실 웃으며 내게로 달려와 허리를 꼭 껴안는다. 덩치는 가장 크면서,대가리 속에 들어있는 뇌는 제일 작은 라스트가 여전히 휘둥그레진 눈을 하고서 날 빤히 쳐다본다. ".......기막힌 운명이야,사부. 역시 우린 운명이라니까!!!!!" 한참을 가만히있던 라스트가 갑자기 가게가 무너져라 크게 소리친다. 윽.먹먹한 고막때문에 눈쌀을 찌푸리며,똑같이 인상을 쓰고있는 곽이의 귀를 막아줬다. 이 새끼는 목소리가 왜 이렇게 커??..확성기가 필요없네,아주. "곽이말고 나.나해 사부!!곽이는 나중에 내가 알려줄테니까, 나 수제자 시켜줘.응??" "뭔 개소리야." "나도 다 알어. 사부가 요즘 곽이 단련시켜주는 그 누나잖어.곽이 말고 나도 좀 알려주라. 응응?? 사부.사부우~" "안돼!!누나 내꺼야,형은 충분히 쎄잖아." 한씨 형제 두명이서 고막이 터져라 소리를 꽥꽥.지르며 양쪽 팔을 잡고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억.빠질 것만 같은 어깨뼈에 힘을 주고, 잡혀있는 팔을 뺀 나는 곽이와 라스트 머리통에 알밤만한 주먹을 콩콩.날렸다. "사부!" "누나!!" "고막 터지겠다,새끼들아. 아. 김윤서 인생 조졌어,정말. 인제 별 일이 다생겨. 그럼 이렇게 하자. 와,나 완전 최효선 다됐어. 아아. 자꾸 딴길로 새네. 할튼 15일까지 밥좀 주라. 그리고 저거, 나 몇개 좀 만들게 도와주면 그 동안은 너네 사부해줄께. 어때??" 횡설수설. 리아였다면 효자손으로 대가리를 후려치고도 남았을 두서없는 김윤서의 말을 용케도 알아들었는지,라스트가 환하게 웃으며 아까처럼 무식하게 날 안았다. 옆에있던 곽이도 그런 라스트에게 지지 않겠다는 얼굴로 내 허릴 더욱더 힘줘 안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나는 점점 심해지는 갈비뼈의 통증을 느끼며,눈을 감았다. "떨어져,꼬맹이들." 눈꺼풀을 문지르며 기분 좋게 웃었다. 암쏘리,칠공주. 김윤서가 또 사고쳤다. ..................... ※그 시각,대한병원. 환자가 없는 병실 안에 어두운 표정의 여자 여섯명과,그 것보다 훨씬 더 어두워보이는 남자 한 명이 무거운 침묵을 유지하고 있었다. 창가에 기대서있던 리아가 얼굴을 쓸어내리며,낮게 욕설을 내뱉는다. "씹쌔. 오기만 해,김윤서. 죽여버릴꺼야,정말." "리아야." "꼴랑 성적표 한장만 덜렁 보내놓고, 병신같은 몸뚱이 하나 들고 사라지고. 씨발이야,진짜. 김윤서 왕씨발." 초조한 얼굴로 손톱을 깨물던 연오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서 툭. 말을 내뱉었다. 윤서가 없어진 그 날, 화를 참지 못한 지니가 귀퉁이를 박살낸 테이블 위에는 받는이만 찍혀있는 편지 봉투와. 전교1등이란 글자가 당당하게 박혀있는 성적표가 나뒹굴고 있었다. 후우.성적표를 바라보는 효선缺?눈동자가 아득하게 가라앉는다. 몇일째 그 좋아하는 바나나도 입에 대지 않던 이연이가, 잔뜩 굳은 얼굴로 주머니에 들어있던 바나나사탕을 와르르.쏟아냈다. 사탕 하나를 집어든 이연이가 거칠게 껍질을 뜯어내고 와드득. 입 안이 찢어질정도로 사탕을 깨문다. 옆에 있던 지니가 그런 이연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때, 이연이의 눈 에서 왕구슬만한 눈물방울들이 후두득.하고 떨어져내렸다. "수이연." "아퍼. 지니야,이연이 심장이 너무 아퍼. 막 긁힌 거 같애. 윤서가 이렇게 만들어놨어. 이연이 맨날 웃게 만들어주겠다던 윤서가, 이연 가슴을 막 긁어놨어. 나 화나. 눈물도 나고, 막 아퍼. ....근데 이연이보다 더 아플 윤서 생각하면 아무 말도 안나와. 윤서는. 윤서는... 왜 맨날 자기 생각은 안하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소중한만큼 윤서도 소중한데,전혀 그렇게 생각 안하는 윤서가 미워. 우린 친군데.아픈 거 나눠갖고 그러는 친군데. 윤서는.. 맨날 자기 혼자만 아픈 거 다 가져가. 그거 싫어. 이연이는 그거 싫어." 입 안의 찢어진 상처에서 베어나오는 비릿한 피를 한웅큼 삼키며, 이연이가 말한다. 아픈 목소리로, 아파서 미치겠다는 목소리로. 그런 이연이를 보던 지니가 짜증난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린다. 바보같은 계집애. 지니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고,마음 속으로 삼켰다. 바로 옆에서 사람이 쓰러져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리아도, 언제나 차분하고 냉정하게 판단하는 효선이도. 하다못해 매일매일 네일아트다 뭐다해서 꾸미기 바쁜 연오까지 제 정신이 아닌 상태로 있는 지금. 굳이 자기까지 거들 필요가 없을 거라고 여긴 지니는 자꾸만 치밀어오르려는 화를 삭히기 위해 주먹을 악쥐었다. "..유,윤서..많이 아파요?..서,선생님. 윤서요.우리 윤서.. 많이 아픈..거 진.진짜 맞는 거예요?..이렇게 갑자기 사라지면 안될정도로.. 그만큼...아픈거...사실이예요??.. 전 못믿겠어요. 선생님이 거짓말같은 거 안하실 분이라는 건 알겠는데요..근데...그 거 만큼은 못믿겠어요..거짓..말이죠?? 예?..거짓말이죠,선생님?.." 얼마 전까지 응급실에서 링겔을 맞고 온 아라가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쇼파에 앉아있는 하겸에게 물었다, 하겸은 절망적인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윤서는 말하지 말라고, 협박까지 했지만 하겸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친개 은지니가 무서워서도. 불도저를 끌고와 병원을 밀어버리겠다는 이연이의 성난 협박이 두려워서도 아니였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떨었던 그 유명한 칠공주의 행동대장. 한때 인천에 피바람을 휘날렸던 김윤서가. 더이상 상처 날 곳도 없이 빽빽하게 할퀴어진 윤서의 눈동자가. 슬프게 젖은 윤서의 얼굴이. 눈물날만큼 위태로운 윤서의 웃음이. 그 아이의 모든 것이 못견디게 안쓰러웠다. 죽지못해 산다는 그 아이의 손을 잡아줄 수도. 잡아주지도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우스웠다. 꼴에 의사라고 흰 가운을 걸치고 있으면서. 그 작은 아이 하나를 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그를 괴롭게 만들었다. 그래서 말했다. 윤서가 갑자기 사라져 이성을 잃은 친구이자, 보호자인 아이들에게. 윤서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15일날은 오겠지. 그 계집애, 싸움이라면 죽고 못사니깐. 김한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깨나는 계집애가 바로 김윤서니깐. ...그 날은 오겠지." 아라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연오가 입술을 앙다물었다. 몇일째 관리하지 못한 연오의 기다란 손톱이 볼썽사납게 망가져 있었지만, 그런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 다는 듯이 연오가 눈을 부릅떳다. 효선이는 엉망이 되버린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윤서가 마음 먹고 숨으면 찾을 수 없다는 것도. 윤서가 마음 먹고 결정하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잘 알고 있는만큼 그런 윤서를 뒤에서 지켜봐줬지만. 이번만큼 물러설 수 없었다. 목숨이다. 아무리 죽는다,죽는다 해도 결국 자신들때문에 여지껏 버텨온 윤서의 목숨이다. 그 소중하고, 소중한 목숨을 걸고 효선이는 이번만큼은 윤서의 편에 서줄 수가 없었다. 예전. 윤서가 처음 싸움을 시작했을때, 윤서를 알고있는 아이들 모두가 위험하다고 반대한 윤서의 주먹을 믿어준 것도 효선이였고. 1년 전, 인천연합과 싸울 때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대책없던 윤서의 뒤를 처음부터 끝까지 처리해준 것도 효선이였지만. 이번만큼은. 절대 윤서의 편에 서줄 수가 없었다. "...끝까지 윤서 넌." "마음껏 싸우게 둬. 실컷 지랄하다, 지쳐서 돌아올때까지 냅둬, 김윤서." "지니야!" 효선이가 놀란 눈으로 지니를 쳐다봤다. 화를 억누르고 있는 얼굴과는 다르게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지니의 입술을 비집고 조용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계집애를 말리는 건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야. 저 의사새끼도 그렇고, 어른들도 그렇고. 그 계집애를 추종하는 새끼들도 그렇고, 인천연합도 그렇고. 개나소나 다 할 수 있는게 김윤서 말려서, 병원에 처박는 일이야. .....최효선 넌 알잖아. 우리 중에서 유일하게 김윤서를 믿어준 너니까, 알고 있을 꺼잖아." "알아서 안돼! 아니까 안된다는 거야, 지니야." "..너가 항상 하는말. 기다리자, 믿어주자. 서로에게 단 하나가 되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는지 지니가 담배 한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독한 담배 연기가 병실 안을 조금씩 메우자, 리아가 얼굴을 찌푸리며 창문을 열었다. 순간 서늘한 바람이 병실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후우. 바람에 조금씩 옅어지는 담배 연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지니가 말을 이었다. "어차피 말려도 안들어. 그럴바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김윤서 혼자 싸우게 놔두지 말고,칠공주가 되서 싸우는게 서로 힘 덜빼고 좋잖아, 안그래?.." "오랜만에 바른 말하네,은지니." 리아가 픽 웃는다. "그래. 김윤서 혼자 싸우다 죽는 거 보다,차라리 같이 싸우다 죽는 게 나으니깐. 후. 효선아, 우리 오늘부터 공부 좀 해야겠다??.. 의대생 뺨치게 아주 제대로 배워보자구. 그렇게 원하는 하늘 잡고, 김한영 조질라면 김윤서 적어도 정상으로 만들어놔야지, 우리가." 힘없이 웃던 리아가 결정을 내렸는지, 깔끔하게 말하며 창가에서 몸을 뗏다. 우린 칠공주니깐. 단순히 김윤서와 친구들이 아니라, 칠공주니깐. ............... 죽지 말고 돌아와라, 김윤서. 김윤서의 끝에 칠공주가 서있을테니깐. 어디 한군데 부러져도 되고, 정신 나가도 되니까 살아서만 돌아와라. 김윤서가 잡은 하늘. 칠공주가 지켜줄테니깐.. 꼭 돌아와라, 김윤서. 5-92. 결전의 날 .......... ※2004년 11월 15일 아아.아침이다. 고추장을 풀어놓은 것 처럼 붉그스름한 바다에게서 시선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새벽6시쯤 됐을까. 몇일 전에 바다에 빠진 곽이를 구하느라 쫄딱 젖어버린 전자시계를 풀어 모래사장 위에 올려놨다. 곧있으면 라스트가 올테고,적당히 눈치 까주겠지. 오늘이 웃기지도 않는 사부와 수제자 놀이가 끝나는 날이란 걸. 김윤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수제자가 될 라스트와 곽이가 엉성하게 염색해놓은 보라색 머리 위에 모자를 눌러쓰고 돌아섰다. 빠빠이, 꼬맹이들. .............. ※ 덜컹덜컹. 생긴 것 처럼 굉장히 난폭하게 운전하는 버스기사 아저씨의 뒷통수에 가운데 손가락을 올려주고, 비어있는 뒷자석으로 걸어가 앉았다.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텅 비어있는 버스 안을 둘러보다, 이내 흥미를 잃고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날은 손 끝이 저릿저릿할만큼 신이 났는데,지금은 뭐랄까. 그냥. 그냥.. "기대되네. 하늘." 창문을 열어 손을 뻗었다. 진득한 상처로 가득한 손바닥 위로 솜털같이 가벼운 하늘이 내려앉는 느낌이다. 아.조금 있으면 저게 김윤서꺼가 되고,더 지나선 칠공주꺼가 되는건가. 픽.웃음이 난다. 기쁘기도 하고.설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아프기도 하고. 또..많이 신나기도 한 그런 웃음. 예전보단 한결 나아진 통증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월미도에 도착하기 전에 잠이나 실컷 자둬야지. 요 몇일 꼬박 샜으니깐. .............. ※ 매쾌한 연기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지는 버스의 뒤꽁무니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뭔가 따따끔한 시선들이 날아와 박히는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꽤나 무서운 표정의 금잔디와 낯익은 얼굴들이 곳곳에 숨어있는 인천연합이 눈알을 부라리고 있었다. "얼. 마중나온 거야?? 이야, 이거 영광인걸. 인천연합이 이렇게 단체로 마중을 나와주다니말야." 하하하.웃으며 반갑게 팔을 벌리는데, 앞으로 성큼.다가온 금잔디가 손을 번쩍 치켜든다. 비라도 올 듯, 까맣게 낀 구름 사이로 살짝 나온 햇빛을 잔인하게 손으로 가린 금잔디가 조그맣게.그니까 나조차도 엄청 귀를 귀울여야만 맛을 볼 수 있는 쬐끄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했잖아.." "영광이야,나 진짜. 눈물나게 받을께, 금잔디 걱정." "너!!.." "그나저나 꽤나 모였나. 작전변경했는데, 대가리수가 너무 많다." "오십도 전국연합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냐. 그쪽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백명은 올껄??.. 게다가 전국에서 논다는 새끼들로만. ....자신은 있니, 너??" 휘유. 색색깔의 교복을 입고있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인천연합의 대가리수를 세어보며 휘파람을 부는데, 금잔디가 어이없게도 김윤서한테 자신을 찾고있다. 자신??.. 그딴거 개나 주라지. 픽.웃으며 인천연합 마지막 51번째 대가리, 금잔디를 끝으로 인천엽합 숫자세기를 그만두고 하늘을 향해 팔을 쭈욱. 뻗었다. 버스 뒷자석에서 편하게 누워 잤어도,몸은 불편했는지 우두둑.하며 등뼈가 아우성을 친다. "그딴거 없어도 잘만 싸웠어,난. 아. 그리구 작전 변경된 거 몰랐어??? 말했는데." "언제?" 무슨 개소리를 하냐며 치켜들었던 손으로 내 어깰 치는 금잔디를 향해 씩.웃어보였다. "지금." 하.어이없는 콧바람을 한 번 내주고, 돌아선 금잔디가 아까보단 한결 큰 목소리로 말해준다. "등. 조심해라. 난 정리아, 걔가 그렇게 무서운 앤 줄 몰랐다. 왜 대마왕 정리아라고 불리는 줄 이제야 알았어. 하하하.전국 연합하고 붙기도 전에, 대마왕 손에 뒈지지나 말아라 일당백!!" 뜬금없는 금잔디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허허.웃고 있는데 갑자기 푸왁.하는 소리와 함께 등딱지가 후끈후끈 달아 올랐다. 띠바. 밉지않게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리자, 지니처럼 눈매가 사나워진 리아가 정말 금잔디 말처럼 대마왕의 가면을 쓴 채. 씩씩.거리며 손을 번쩍.처들고 있는게 보였다. 억. 두번째로 날아오는 리아의 손을 잽싸게 피해, 마침 리아의 옆에 서있던 효선이의 뒤로 숨어 눈을 찡긋였다. "자기,안녕??.." "내가 왜 니 자기야,김윤서!! 너 이리로 안와?!!!..내가 너를 아주 죽여놔야.죽여놔야!!...정말. 아,짜증나!" 쾅쾅쾅. 바닥을 발로 차며 있는 짜증,없는 짜증 다 뱉어내던 리아는 결국 물기로 가득찬 눈 언저리를 쓱.훑으며 고개를 돌려버린다. 그런 리아를 보며 웃던 효선이가 귓가에 작게 속삭여준다. "저래봐도 리아가 네 걱정 제일 많이 한 거 아니??.. 어른들한테 시간 벌어준 것도 리아고, 학교 찾아가서 너 뒷처리 다 해준 것도 리아다? ..이제 너 리아한테 잘해. 맨날 대마왕이라고 놀리지만 말고." "...후와후와.숨쉬는 동안은 꼭 잘하께. 아아아!!! 칠공주 나와라,오바." 효선이에게 세발자국 떨어져 허공에 대고 힘차게 소리쳤다. 까르르웃으며 나왔다,오바를 외치는 이연이. 유치하다며 리아와 함께 근처 오락실로 들어가는 연오. 언제나처럼 김윤서 보호자같은 웃음을 띄는 효선이. 울어서 빨갛게 부은 눈가를 가리며 보시시, 예쁘게도 웃는 아라. 엿이나 처먹어,라며 쓰고있던 모자를 더욱 더 깊게 눌러쓰는 지니. 김윤서의 전부. 김윤서가 목숨보다 더 좋아하는 유일한 존재. 칠공주. 김윤서의 칠공주. ........하늘을 향해 씩.웃어보였다. 하늘님 보여??.. 이 애들이 김윤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김윤서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언제나 이 애들이라구. 그니까. 인제 긴장 단단히 하고 있으란 말이지. 천하무적 칠공주가 지금 하늘님을 잡으러 가니깐말야. 휘잉.갑자기 불어온 하늘바람이 쓰고있던 모자를 낚아채간다. 저 멀리 날아가는 검정모자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였다. 하늘님, 제대로 쫄았는갑네??.. 낄낄웃으며 바나나사탕을 입에 문 이연이와, 김윤서보단 덜하더라도 꽤나 신나보이는 지니의 어깨에 손을 걸치고 하하하하.웃었다. 하늘님과 개새끼,김한영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아주 크게. .................. 우웅. 고막을 꽉.누르는 뱃고동 소리. 핑.도는 두통을 누르기위해 쇠냄새가 나는 난간을 힘주어 잡았다. 하얗게 변한 손등 위로 뼈마디가 불거져나온다. 한씨네 형제랑 지내면서 몰래몰래 해온 특훈덕에 그나마 아픈 건 참을 수 있겠는데, 문제는 시야였다. 뭐가 보여야 주먹을 내지르던, 발을 휘두르던 할껀데. 분무기로 왕창 뿌려 놓은 것만 같은 뿌연 시야가 영 마음에 걸린다. 후우. 주먹으로 박살애면 조금은 나아질라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쪼개고 있는데, 갑자기 수이연의 찢어지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허버 빠르네,새끼들." 뚝.엄지손가락의 가운데 뼈를 누르며 고개를 돌렸다. 비라도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 낀 하늘 아래. 웃기게도 저마다 짱구인형 하나씩을 들고 있는 전국연합 무리들이 안개 낀 시야 속으로 들어온다. 삐딱하게 웃으며 칠십명.아니 넉넉하게 잡아서 구십명쯤 되보이는 전국연합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1년 전하고는 쨉이 안되네. 숫자가 이쯤되면 벌써 기자들이 냄새 좀 맡았겠는데??.. 흐음.턱을 문지르며 어마어마한 숫자를 자랑하고 있는 전국연합에게서 시선을 떼고 효선이를 바라봤다. 역시. 일곱걸음정도는 먼저 내다볼 주 아는 센스!! 효선이는 이미 PDA를 똑똑.두드리며 리아와 심각하게 얘길 나누고 있었다. 아마 근처에 애들을 깔아놔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생각인갑다.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김윤서의 온 몸을 짜릿짜릿하게 만들어줄 전국연합을 향해 씩.웃어보였다. "곧있음 염라대왕하고 하이할 새끼들 모두 안녕??" 경쾌한 내 인사 맨 앞에 서있던 가장 낯익은 새끼, 최강이 굳은 얼굴로 멈춰섰다. 최강이 멈추자 뒤따라오던 새끼들도걸음을 멈추고. 휘이이잉. 서부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스산한 바람이 전국연합과 칠공주. 그리고 인천연합 사이에 불어왔다. 낄낄낄.자꾸만 터져나오는 웃음을 얼굴 가득 띄우고,효선이의 옆으로 걸어가 효선이 어깨에 팔뚝을 걸쳤다. "그정도로 되겠어??..적어도 백명쯤은 데리고 와야 폼이 살지. 안그래?..명색에 전국연합을 상대한다길래 이쪽은 인천연합까지 뽀개서 데리고 나왔는데.너무 쉽게 박살나도 재미가 없지야.엉??.." "김윤서.." "한시간 삼십칠분 줄께. 김한영 포함해서 놀만한 새끼들 더 데려와. 그리고 개그같지도 않은 그 인형은 알아서 빠빠이 시켜놔―" "시스터!!선물이야!!!!!" 펑펑펑. 벌건 대낮에 쏘아올려진,보이지도 않는 그지깽깽이같은 폭죽들과 함께 터져나온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씨발놈의 목소리. 아아.눈썹을 긁으며 막 선착장으로 들어오고 있는 유람선의 금잔디색 갑판 위를 바라봤다. 몇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는 김한영이 전국연합 손에 들려진 짱구인형보다 훠배 커 보이는 짱구인형을 손에 들고 반갑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워째,저번 병원에서 봤을때보다 훠배 젊어진 거 같네. "미친놈." 리아의 한마디. 그래,딱 미친놈. 피시식.웃으며 김한영이 꼴같지도 않은 오빠놀이를 끝내고 어서 올라오길 기다렸다. 우리 중에 제일 키가 큰 효선이의 어깨에 매달린 있자니, 고개가 뻐근했지만 효선이한테서 나는 기분좋은 엄마냄새에 김한영이 내 앞에 설때까지 오래도록 효선이에게 기대서있을 수 있었다. 여전히 효선이 어깨에 고개를 걸쳐놓고,김한영을 향해 말했다. "씨발놈 안녕??.." "응!!우리 시스터도 안녕!!!" "오와.깝 제대로야, 전국연합 짱. 언제 김윤서가 전국연합짱네 시스터가 됐데??.." "아주아주 오래전부터!!이건 내가 준비한 선물. 오늘 시스터 생일이잖아. 맨날맨날 챙겨주고 싶었는데,이제야 챙겨줘서 찐짜로 미안!!" 얼굴 가득 웃음을 지우지 않고 내 앞에 수많은 짱구인형을 내려놓는 전국연합과 김한영을 쳐다봤다. 조금 당황한듯.인천연합의 얼굴이 동그래진다. "....오늘 김윤서 생일 없는데." "호적떼보면 나와,시스터 생일!!...." "김한영이라는 씨발놈이 뒷통수 치고 튄 그 날 이후로. 김윤서한테 생일같은 거 없다고 방금 말하지 않았니,붕신아??.." 슬슬 올라오는 열기를 눈치챘는지 리아의 차가운 손이 한쪽 손을 감싼다. 이연인 사탕을 와그작.깨물며 김한영을 죽일듯이 노려봤고, 그런 이연이 옆에서 지니는 싸늘한 얼굴로 주먹을 우드득.우드득 꺾고 있었다. "맞어. 오빤 또라이야. 윤서 생일은 12월 31일이야.우리 칠공주가 처음 만난 그 날이 윤서 생일이고,우리 생일이라구. 호적에 달라붙은 껌정 잉크따위는 윤서 생일 아냐,오빠." 생글생글 웃으며 이연이가 붉은 핏방울이 묻어있는 하얀 사탕막대기를 바닥에 집어던졌다. "다 집어치우고, 휘딱휘딱 시작하자고. 너무 기다려서 그런지 미친 근육들이 아우성을 쳐." "시스터." "아아.맞다, 잊을뻔 했네. 김한영, 싸우기 전에 한개 물을꺼 있는데.. 다 너꺼했잖어??..빌어먹을 추여사도,김사장도. 유일하게 김윤서꺼였던 한가람까지도 너꺼했잖어?...그러니까 하늘 하나쯤 없어져도 너는 괜찮은거지??..니가 가진 거 다 버릴만큼 쥐고싶었던 하늘,내가 뺏고 너 조져도 괜찮은 거지?.." 효선이의 포근한 어깨에 기댔던 고개를 떼고,바닥에 쌓여있는 짱구 인형 한개를 집어들었다. 엉덩이를 까고 훌라춤을 추고 있는 짱구의 감자머리를 쓰다듬으며 김한영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얼마안가 활짝.웃는 얼굴의 김한영이 별로 원하지 않았던 대답을 늘어놨다. "그러면 오빠라고 불러줄꺼야??..그럼 괜찮아할께. 우리 시스터가 하늘 뺏어가두,한가람 다시 되찾아가두. 추여사,김사장 다 시스터꺼 해두 괜찮아할께. 어렸을적처럼 오빠오빠 불러주면 다 괜찮아할께." "...까고있네. 그렇게 쉽게 괜찮을꺼였음 애초에 하늘을 찍지도 않았어. 그리고 너가 뭘 모르는가본데,김윤서한테 오빠란 건 없어. 그 날, 니 주둥이로 말했잖아??...김윤서 죽어도,무너져도 끝까지 가겠다고 니 터진 주둥이로 그랬잖아??...그런데 이제와서 오빠라.하. 씨발놈...너때문에 씨발놈이란 말이 있는 거야,이 씨발놈아..." 뻥. 들고있던 짱구의 배떼기를 발로 훙.후려차며 곧바로 김한영에게 달려들었다. 으와와아. 그걸 시작으로 월미도를 찢어버릴 것 만같은 거대한 함성과 함께 오십이 쬐끔넘는 인천연합과, 백명에 가까운 전국연합이 맞붙었다. 2004년11월15일. 대망의 날. 마지막 목숨을 걸고,칠공주와 함께한 김윤서의 싸움이 시작됐다. 하늘을 사이에 두고, 인천연합과 전국연합을 끼고 시작한 김윤서의 슬프도록 처절한 마지막 싸움이... 5-93. 전국연합VS칠공주 하악.하악.. 눈에 띄게 거칠어진 숨소리를 내뱉으며 피가 진득하게 묻어있는 손잔등을 바지춤에 쓱.닦아냈다. 무작정 전국연합 무리들의 중심으로 파고들어와 정신없이 후려패고나니,어느새 김윤서 주변만 폭탄을 떨어트린 것 처럼 깨끗하게 비워져있었다. 바닥에 누워 피떡칠이 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열댓명의 아이들을 훑어보다 아차싶어,이마를 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리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울려퍼진다. "김윤서!!! 같은 편을 패면 어쩌자는 거야,너!!!!" 김윤서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싸움이였다. 어쩌면이 아니라 확실한.. 그래서 평소처럼 어디 멀리 떨어진데서 지켜보면서,뒤치닥거리만 하지말고 인천연합에서 주먹 좀 쓴다는 새끼 몇명 달아줄테니까 가까운데서 구경하랬더니..아주 죽을라고 용을 써주신다. 자기 지킬려고 쌍코피가 터지는 인천연합따윈 신경도 쓰지않고, 어디서 구해온건지 알 수없는 메가폰에 대고 고래고래.소리를 지르는 리아의 뾰족한 목소리에 휘유.휘파람을 불며 바닥에 쓰러져있던 새끼들 중 인천연합으로 보이는 녀석의 팔을 잡아올렸다. 맨 처음에 휘두르던 팔꿈치에 맞았는지,벌겋게 부어오른 녀석의 눈두덩이를 보며 미안함을 담은 웃음을 흘렸다. "미안..혼자 싸우는 게 버릇이되서.지니나 이연이하고면 몰라도 이렇게 여럿이서 덤비는 건 또 처음이라. 리아한테 또 혼나면 안되니까. 괜히 내 주위에 있다 피보지말고, 뒤에서 쉬어라." "예에.." "얼라??..저 새끼봐라." 당황해하는 녀석의 어깨를 두드려주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거의 스무명에 가까운 전국연합을 혼자서 상대하고 있는 지니가 보였다. 처음부터 너무 나대서 그런가,주위에 오려고하질 않는 전국연합 덕분에 쉽게 지니에게 다가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김윤서 등장에 단박에 쫄아 주춤거리는 전국연합을 쳐다봤다. "고작 이정도에??.." "하아.닥쳐, 병신아." "....언니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누가 니 언닌데?" 혼자서 스무명은 힘겨웠는지, 흠뻑 젖은 모자를 신경질적으로 벗어던지며 지니가 말했다. 그런 지니를 향해 픽.웃어보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은지니 생일 11월23일. 김윤서 호적생일 11월15일. 내가 너보다 8일언니 맞잖아??.." "미친." "히,암튼 그동안 은지니를 위해 김윤서가 준비한 신기구리한거 한개 보여줄께. 그니까 잘 구경하라구. 김윤서 스페셜 선물이 흔한게 아니라니깐??.." 탁탁. 발끝으로 바닥을 차며 손목을 가리고 있던 쟈켓의 소매 부분을 접어올렸다. 투둑.무거운 납조각들이 그득하게 담긴 주머니가 바닥에 얕은 홈을 만들며 떨어진다. 투둑.투둑.투두둑.. 결국 잿빛 시멘트가 주머니의 무게를 이기지못하고 주저앉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있던 지니는 눈썹을 찌푸리며 어이가 없어진 표정을 지었고,주변의 전국연합들은 턱이 빠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손목에 2.5kg짜리 두개. 발목에 3kg두개. 그리고 왼쪽 허벅지에 5kg짜리 하나. 총 16kg에 가까운 간장색 납주머니를 다 떼어내고 발을 뻗자, 날아갈 듯 가벼웠다. "미친년. 그 몸꼬라지로 별 걸 다한다." "지니 너정도면 10kg까지 가뿐할껄??..난 뭐. 라스트를 제대로 장식해주기위해서랄까. 아차차.깜빡할 뻔 했네. 잠만잠만." 주변에서는 피를 튀겨가며 격렬하게 싸워가고 있는데 나와 지니, 그리고 스무명쯤의 전국연합이 서있는 곳만 전혀 딴세상같다. 시간이 멈춘 나른한 분위기에 실쭉.웃으며 바닥에 떨어져있던 납주머니 한개를 집어들었다. 납을 감싸고있던 겉부분을 찢어내고 그 안에서 여섯개의 반지를 꺼내 안겨주자,은지니가 삐딱한 얼굴로 날 쳐다본다. "진짜 선물..." "어쩌라고." "가지라고." "근데??" "아. 은지니 띠바야,정말. 말 그지같이 하는데는 아주 정리아 싸다구를 갈길정돈데??..그냥 받아두라고. 사라진 동안 대빡 미안한 김윤서가 칠공주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니까." 내 말에 그제서야 손바닥 위에 올려져있는 여섯개의 반지를 내려다보는 은지니. 씩.웃으며 그런 지니의 빨간 머리를 틱.팅겨주고 얼얼한 표정으로 아직까지 멀뚱멀뚱 서있는 전국연합을 향해 돌아섰다. 갑자기 사라진 무게때문에 시큰해진 뼈를 문지르며 고개를 좌우로 까딱였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한개둘셋! 은지니 잘봐라!!!이게 바로 일당백이다!!!!" 하늘을 향해 힘껏 외친 나는 신이나 죽겠다는 기분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낸채 전국연합에게 달려갔다. 전국연합 무리들에게서 세발자국쯤 떨어진 곳에서 뜀박질을 멈추고 몸을 돌린 나는 땅을 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에 떠있는 상태에서 허리를 비틀며 다리를 휘두르자, 바로 코 앞에 있던 새끼 하나가 얼굴을 움켜쥐며 뒤에 서있던 또다른 새끼 하나와 함께 바닥을 뒹굴었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자마자 날아오는 발차기를 피해 허리를 꺾었다. 한껏 유연해진 허리가 매끄럽게 구부러지고 양 어깨가 바닥에 닿을락말락할쯤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어 다리를 뗐다. 방금 전 김윤서한테 발차기를 날렸던 녀석의 턱을 오른발로 후려치고,그 반동으로 허리를 튕겨 몸을 세운 다음 물구나무자세 그대로 다리를 180도로 찢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주변으로 몰아치던 새끼들이 크게 휘둘러지는 김윤서 발차기에 후려맞고 뒤로 나자빠지기 시작했다. 춤을 추는 것처럼 몸을 가볍게 통통.튀겨가며 다리를 휘두를때마다 약간의 피를 터트리며 전국연합들이 물러섰다. 손목뼈가 이제 그만하라고 지랄을 하자,어쩔 수 없이 다리찢기를 그만하고 바닥에서 손을 뗐다. "지니야!!!!잘보라구,이게 바로 김윤서가 준비한 거야!!!!" 반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지니가 그제서야 김윤서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지니의 삐죽삐죽한 시선을 느끼며 하아.긴 숨을 내뱉었다. 욱신거리는 갈비뼈의 통증을 무시하고 눈을 부릅뜨자 아프리카에서 일광욕이라도 하고 왔는지, 얼굴이 새카만 녀석의 주먹이 코 앞에 다가와있었다. 픽.웃으며 왼쪽 주먹을 뻗었다. 투캉.뻑. 으아아악.비명을 지르며 자기 주먹을 움켜쥐는 아프리카. "부웅신. 김윤서 주먹 정면에서 받을 수 있는 애는 하늘 아래 딱 넷이야. 미친개, 시한폭탄, 인천짱.그리고 씨발놈. 넌 용골매 오형제에 들어올 자격이 없는 주먹,그러니까 아웃. 네 나라로 돌아가.^ㅇ^.." "뭐?뭐이런 씨발!!!" "자. 문제 나갑니다. 여기서 진짜 주먹은 어느 주먹일까요??" 순간 아프리카의 눈이 바둑알만해진다. 속눈썹에 공기 한 톨이 내려앉기도 전에 날아간 오른쪽 주먹. 바람을 가르는 위험한 소리에 바둑알만했던 아프리카의 눈이 질끈.감겨졌다. 붕신.역시 넌 붕신이였어. 라스트만도 못한 아프리카의 배짱에 야유를 보내며 아직 허공에 떠있던 왼쪽 주먹의 손목을 비틀었다. 손등이 가볍게 아프리카의 관자놀이를 후려치고,생각보다 약한 주먹에 잃어버린 배짱을 찾은 아프리카가 다시 바둑알만한 눈을 떴다. "이런썅!!!" "쯔쯔. 뇌가 없는갑네,아프리카??..말했잖어, 넌 용골매 오형제에 들어올 자격이 없다고. 아웃됐어,이미 너. 고작 김윤서 맞을랭말랭주먹 1탄에." "무스..어..어라?..." 제법 사나운 기색으로 달려들려던 아프리카의 검정 동공이 흐릿해지면서,쿵. 결국 지 친구들 옆에 정신을 잃은채 쓰러진다. 두번째 손가락을 들어 왕년에 꽃미남으로 이름을 날렸던 차인포의 개인기.좌우로 흔들어주기를 하며 아프리카에게 즐거운 빠빠이를 고했다. 허억.순간 시원하다못해 싸늘하기까지한 월미도의 바다바람이 한웅큼 목구멍으로 들어왔다. 내 허리를 꽉.감싸안은 울끈불끈. 근육질의 팔을 보며 눈을 깜박이고 있는데, 등 뒤에서 뜨거운 목소리 한개가 들려온다. "싸울때 그렇게 한 눈 팔면 안되지,일당백??.." "고작 이런 새끼들 상대하면서 한눈까지야. 두눈도 팔 수 있는데??.." "씨발. 언제까지 그렇게 느긋하게 굴 수 있는지 보―" "자기낼라 했지??그럼 난 김윤서답게 주먹내야지잉♡" 팔을 최대한 안 쪽으로 굽혀 힘껏 뒤로 뻗었다. 단단하면서도 푹신한 이 느낌은.아아. 울끈이불끈이 가슴이구나. 팔꿈치에서 느껴지는 촉감에 능글맞게 눈꼬리를 흘리며 손을 위로 뻗었다. 턱.방금 전, 심장부위를 크게 얻어맞아선지 잠시 숨을 멈춘 울끈이불끈이의 양 옆 머리통을 잡고 이마가 무릎에 닿을락말락할정도로 허리를 숙였다. 쿠왕.아프리카의 위로 근육질 가슴이 내 팔꿈치만큼이나 쏙. 패인 울끈이불끈이가 시큼한 표정으로 드러눕는다. "부웅신." 길게 말을 늘어뜨리며 울끈이불끈이의 목을 밟았다. 기침을 하며 괴롭게 몸을 뒤트는 울끈이불끈이. 그 모습에 열이 뻗친 전국연합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갈색벽돌 몇개를 주워들고 달려든다. "김윤서 신기록 달성!!!!!" 날아오는 벽돌을 향해 왼쪽 주먹을 뻗었다. 가루가되어 날리는 벽돌의 최후를 느끼기도전에 벽돌을 집어던진 왁스칠한 검정머리의 앞으로 달려갔다. 레프트훅.라이트훅할 것 없이 뻗어나간 양 팔이 흐릿한 잔상만 남긴채 왁스칠의 안면을 후려쳤다. 눈도 못뜨고 한참동안이나 얻어터지던 왁스칠이 마지막 18번째 주먹을 맞고나서야 힘없이 고꾸라졌다. "....제일 가까이서 봤던 나이키야. 방금 내가 주먹 몇개 날렸게??" "여..열개???" "땡. 김윤서 나이,열여덟이였어. 그리고 지금부터는... 너희가 죽고못사는 김한영 나이만큼 날라갈꺼니까 단단히 하는 게 좋을거야,각오." 가슴팍에 노란색 나이키 로고가 새겨진 후드티를 입고 있던 녀석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 꼴을 보며 빙그레.입꼬리를 올렸다. ........ 절대안정이 필요한 환자처럼은 전혀 보이지 않는 김윤서를. 지금 당장 꼴까닥해도 이상할 게 없을정도로 약해빠진 김윤서를. 지금이 마지막인것처럼 구는 정신 나간 김윤서를. 슬프게 젖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등 뒤에 차곡차곡 담아두고서. 아프게 뜨여진 눈으로 애써 바라보고 있는 시선을 심장 속에 꼭꼭 숨겨두고서.. 나이키를 향해 오른주먹을 뻗었다. 아아. 기분 끝내주게 좋다, 정말. ................ 아.미치겠다. 심장이 터져버릴까 걱정이 될정도로. 풍선처럼 금방이라도 부풀어오를 것 같은 가슴께를 누르며 씩. 웃었다. 누군가가 후려친 각목에 맞아 길게 찢어진 오른쪽 팔뚝에선 시뻘건 피가 줄줄.새어나오고 있었지만 이런 사소한 고통쯤은 이미 김윤서 수준의 것이 아니였다. 피에 흠뻑 젖어 너덜너덜해진 소매를 찢어내는데,문득 등 뒤로 지니의 차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평소에도 그렇게 감정표현이 풍부한 애는 아녔지만,오늘만큼 표정이 없는 지니는 처음이다. 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지니의 사막같은 얼굴을 향해 어깨를 으쓱여보였다. "반했냐??.." "....미친년." "하하하. 가끔씩 미쳐보는 것도 좋지. 게다가 미치지 않고서는 꿈을 이룰 수 없다는데,별 수 있겠어." "살다살다 정말 너같은 계집애는...후.팔은 괜찮은거야?? 상처 좀 보자." "걱정마. 겨우 요딴 상처로 엄살부릴만큼 약하게 지내지 않았어, 김윤서. 하하하하.인제 조무래기들은 다 쓸었으니까 대빵한테―" "가더라도 치료는 하고 가. 말은 지지리도 안들어 처먹지,개년." 입에 물고있던 담배를 발로 비벼끄며, 지니가 한쪽 손을 들자 리아와 효선이 옆에서 와들와들.떨면서도 눈만큼은 동그랗게 잘 뜨고있던 아라가 기다렸다는듯이 화장지색 약통을 한개 들고 후다닥.달려왔다. 김윤서하고 은지니때문에 징하게도 보고,들었을 싸움이지만 여전히 심장 떨리는지. 눈을 꼭 감고 달려오는 폼이 영 미더웠는데, 잘 도착했네. 장하다, 황아라. 너의 그 눈물겨운 노력에 보답을 안해주면 김윤서가 아니지. 최대한 덜 걱정하도록 옷매무새를 가다듬고나서, 아라에게 팔을 보여줬다. .... 후두둑. 정말 아라의 눈엔 소나기가 옴팡지게 담겨있는게 틀림없다. 어쩜 이렇게 울음이 쉴세없이 나올 수가 있지??...하여간 초미스테리. 달려오는 내내 주렁주렁 달고있던 눈물이 영 찜찜했는데, 결국 김윤서 상처 위로 빨간약보다 자신의 눈물방울을 더 많이 쏟아내고야 마는 아라다. 그 모습을 보며 몇번째 담배인지 모를 담배를 꺼내 또다시 입에 문 지니가 지독한 연기를 내뿜으며 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 으. 아라의 들썩이는 어깨를 토닥여주며, 한창 열을 올리고 있는 싸움판을 보는데. 탁해진 지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방금전까지 너가 했던건 저거보다 더했어." 지니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묶여있다. 지니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니.. 아. 입술 사이로 경욱이같은 짧은 탄성이 터져나왔다. 지니가 바라보고 있는 그 곳엔 김한영이 서있었다. 금잔디하고 최강, 정지운에다.. 한번쯤 이름을 들어봤을법한 인천연합의 최고봉들과 함께. "방금꺼 몇개까지 봤냐. 열개이후론 세지도 못하겠네,씨발. 저 인간은 어떻게 볼때마다 달라져있냐." "....정확히 스물세개. 아,신나. 빨랑 붙고싶어 저새끼랑. 아맞다, 지니야 너 뒤에 어떤 개새끼하나 지키구서있다??.." 퍽.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지니의 머리통 위로 힘겨워보이는 빨간벽돌이 내리쳐진다. 후왁후왁.벽돌을 내리친 개새끼는 숨을 몰아쉬며 반쪽이 난 벽돌을 들고, 벽돌가루가 허옇게 묻은 지니의 머리통을 내려다봤다. 끼약!!!..아라의 고막을 찢어내리는 고함소리가 들리고. 아라가 놀란 바람에 오른쪽 뺨에 붉은약이 고약스럽게도 튀겼다. 이런띠바. 벌써부터 빨간약 그 특유의 고린내가 얼굴을 덮친다. 아라가 보지못하게 최대한 얼굴을 누그러띤 나는 입고있던 티셔츠자락을 들어올려 얼굴을 닦아냈.. 팍.티셔츠를 잡고있는 손목에 감겨지는 하얀손. "남친있어서 좋겠다,띠바야. 이렇게 처맞고도 한눈을 다 팔고??.." "....이거 뭐냐???" "뭐가??아. 너 악력 은근히 세다??..놔봐, 아퍼. 주머니 주렁주렁달고있어서 손목뼈 거지됐담말여." "이거 뭐냐고,너!!!" 움찔. 까치발을 들고서 지니의 머리털을 털어주던 아라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런 아라의 뒤로 언제나타난건지 알수없는 최필립이 은지니의 머리통을 후려깐 새끼의 멱살을 잡고 흠씬 두들겨패주고 있었다. 깁스가 둘러진 최필립의 오른팔에서 시선을 떼지않고 지니에게 물었다. "..너 남친 응원안하냐?? 너때문에 부산에서 이 먼 인천까지 올라왔는데. 김윤서 배떼기에서 이만 시선떼고,니 남친이나 봐임마." "화내기 전에 대답해. 이거뭐야." 한자한자 또박또박 내뱉으며 눈을 부라리는 은지니. 도대체 뭐땜에 지니가 이러나.하고 고개를 돌린 아라의 눈이 동그래진다. 후우.귀찮게됐네, 이거. 앞머리를 긁적이며 눈썹을 찌푸렸다. "그냥. 아.그냥 쫌.." "....병신아. 좀 자각 좀 해,어떻게 된 계집애가 남 일은 기가막히게 알아채면서 지 몸 하나를 간수못해. 아라야, 거기 붕대하고 그 것 좀 줘봐." "어??..아.아응." ....... 아라에게서 건내받은 붕대를 제법 솜씨있게 허리에 둘러주는 지니. 보기 흉하게 상처난 배 위에 붕대를 두르는 지니의 어깨가 순간 흐릿해진다. 안돼. 안된다구, 김윤서. 겨우 반왔는데 여기서 겨우??.. 어금니를 깨물며 지니 모르게 등뒤로 감춘 오른손의 검지 손가락의 첫번째 마디를 힘껏 눌렀다. 우득.뼈가 부러지는 고통과 함께 시야가 말끔해진다. "....옛날같았음 당장에 죽여버렸거야." "오마나. 살벌해라." "...오늘이니까 봐주는 거라고, 이 계집애야!! 앞으로 이런 일 있으면 국물도 없어." "황송해서 돌아가시겠다, 아주." 아무렇지 않은 척. 낄낄대며 후우.머리를 쓸어넘겼다. 비를 잔뜩 머금고 있는 거무스레한 구름이 푸른 하늘을 까맣게 뒤덮고있다. 투둑.투둑.. 한방울.두방울. 그리고 그 다음엔 셀 수도 없이 많은 빗방울들이 투신자살이라도 하는 것처럼 떨어진다. "씨발. 날씨가 왜 이리 개같아." 핀으로 붕대를 고정한 지니가 욕짓거리를 내뱉으며 어깨를 털어낸다. 그런 지니의 위로 드리워지는 검은 그림자. "아아. 남친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그치, 아라야??" "비꼬지마.병신아, 지는 알아서 굴러온 것도 차버린 주제에." "여기서 그 얘기가 왜나와??..하여간 뜬금없음의 최고봉. 인제 치룐가 뭔가 하는 거 다 끝냈지??..그럼 시동 건다. 부릉부릉." "제정신이 아냐, 하여간." 최필립이 펼쳐든 우산 아래로 아라의 어깨를 잡아당긴 지니가 고개를 좌우로 내저으며 혀를 찬다. 위로 잡아올렸던 티셔츠를 끌어내리고, 다시 싸움판에 뛰어들려고 어깨를 주물러주는데. ....아까, 지니 위로 드리워졌던 검은 그림자보다 훨씬 더 큰 그림자가 김윤서의 머리를 덮쳤다. "....처량하게 놀긴." 눈 앞에 내밀어진 밝은 보라색 비옷. 얘는 왜 자꾸. 그래도 한숨보다 반가움이 먼저 터져나왔다. "말은 더럽게 안처먹어. 할튼 반갑다, 선우권." "..입고 싸워. 천하의 일당백이 겨우 비옷 하나 입었다고 둔해지진 않을 거 아냐." "호의 감사하게 받겠슴다." 눈 앞에 서서 따뜻한 입김을 내뿜는 우권이에게 고개를 까닥이고,비옷을 받아들었다. 어쩜 이렇게 사이즈를 딱 맞춰 사왔는지. 실실 웃으며 비옷을 주섬주섬 입고있는 날 가만히 바라보던 우권이가 조심스럽게 입을 뗀다. 빗소리에 묻혀 작아진 우권이의 목소리가 슬플정도로 김윤서의 눈가를 자극한다. "....이겨라. 김윤서 평생을 건 이 싸움의 끝에서 웃는 게 너였음 좋겠다, 난." "널 위해서라도 꼭. 웃어줄께." 탁탁. 비에 젖은 선우권의 넓은 어깨를 두드려주고 돌아섰다. 시큰거리는 눈 주위를 문질렀다. 후우.길게 숨을 내뱉고, 비옷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썼다. 좋아. 가는거야. 주먹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며 싸움판으로 뛰어들었다. 으랴앗. 우렁찬 고함소리와 함께한 김윤서의 컴백. 그리고 기겁하는 전국연합. 한껏 가벼워진 발을 휘두르며 조금씩.조금씩 김한영에게로 다가가는데.. 김윤서의 눈 앞으로 1년 전 재방송이 펼쳐진다. 재탕하는 거 별로 안 좋아는데... 눈가를 찡그리며 내 앞을 막아선 그 아이를 쳐다봤다. 그마나 1년 전과 다른게 있다면. 조금은. 아주 조금은 한가람스러워진 눈동잘까. "비켜. 진심으로 싸우고 싶지 않은 새끼하고 시간낭비할만큼 여유롭지가 않다, 가람아." "........" "꼴통아냐, 이제 김윤서. 씨발놈하고, 친구하고 구별할 주 알어 나 이제. 그니까 그만하자, 가람아. 끝까지 너 심장에 소금뿌리는 못되처먹은 친구 되고싶지 않다 난." "......." "아. 진짜. 진짜진짜! 가람아. 이제 나한테 너 한가람 아니고 가람이야. 그니깐.. 그니깐 제발. 엉??.." 찡그리는 것도. 그렇다고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이 얼굴 위로 떠오른다. 간절하다 못해 아주 애가 타는 김윤서의 심정을 알아챘는지, 가람이의 발걸음이 조금씩 옆으로 물러났다.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김한영에게 걸어가는 김윤서의 등 뒤로 정말이지 심장을 울게 만드는 슬픈 목소리가 떨어졌다. "....너 아프면. 너 울면. 이 싸움 끝나고나서도 너 웃지 않으면...나 죽는다, 윤서야. 네가 웃지 못하면, 내가 죽는다구. 그니깐.. 그니까... 힘내서 싸워. 그래서 잡아. 니가 그렇게 원하던 하늘, 놓치지말고 꽉 잡아." 뜨거운 불감자를 삼킨 것 같다. 목구멍이 너무 뜨거워서 말도 다 안나온다. 어금니를 악물고 천천히 걸어갔다. 고마워. 고마워,진짜. 가람이 너한테 죽어서도 해줄 말은 이거 한개야. 눈물나게 고맙고. 가슴아프게 고맙고. 목숨만큼 고마워. 고마워..가람아.. 내 소중한 추억아.. "으아아아아!!!!!!" 핏대가 설정도로 힘찬 고함소릴 질렀다. 그리고 달려갔다. 그렇게 조지고 싶었던. 그렇게 잡고 싶었던. ..... 그렇게 이기고 싶었던 김한영에게로. 하늘을 쥐고 있는 나의 오빠, 전설에게로. 타다닥. 탁.부웅. 금새 빗물이 고인 물웅덩이를 차고 올라가 발을 휘둘렀다. 주머니를 벗고나서 훨씬 더 가벼워진 발이 경쾌한 바람소릴 내며 김한영의 허리를 후려차고. 바닥에 발이 닿기 전. 공중에서 몸을 한바퀴 더 돌려 김한영의 어깨를 내리찍었다. "시스터,반가워. 한참 기다렸어." 괜히 전설이 아니지. 다른놈 같았으면 벌써 뻗었을 김윤서 발차기를 두방이나 먹고도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는 김한영을 향해 나 역시 웃어보였다. 순간 김한영의 얼굴이 거짓말처럼 굳어지고. 석고상처럼 뻣뻣해진 김한영에게서 다섯걸음쯤 떨어진 곳에서 손을 내밀었다. "나도 반가워, 오빠. 이제야 만났네." "윤...서야??" 김한영은 물론이고 그 주변에 있던 모든. 아니,더 멀리 떨어진 곳에 있던 효선이와 리아. 아라와 지니. 어느새 화강안을 찾아 옆에 찰싹, 붙어있던 연오는 물론이고 싸우느라 바쁜 이연이조차 그 행동을 멈추고 나를 돌아봤다. 쏟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에 멋쩍게 웃으며 눈썹을 긁었다. 여전히 내밀어진 오른손 위로 빗방울이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부끄럽게." "지, 지금...오빠라고.. 그니까 시스터가,윤서 너가 지금.. 오빠...라고..." "마지막인데. 게다가 그렇게 고이 아껴둔 하늘까지 뺏어가는 판에, 적어도 예의는 차려줘야 김윤서지.안그래??.." "윤..서야..." 김한영은 얼빠진 얼굴로 계속해서 내 이름만 불렀다. 믿지기않는 듯 눈을 깜박이며. "이제 그만 놀라고, 시작하자구. 몸이 근질근질해서 죽겠―." 싱글싱글 웃으며 주먹을 움켜쥐는데. .......라스트. 쟤가 여긴 어떻게???? 모두가 경직된 틈을 타 김한영의 뒤로 익숙한 그림자 한 개가 다가갔다. 검은색 잠바를 뒤집어쓴 그림자의 손엔 못이 자잘하게 박혀있는 각목이 들려져 있었다. 1년 전. 흑백 영상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빠르게 지나가는 잿빛 장면 위로 가람이와 김한영이 한치의 틈도 없이 겹쳐지고.. 숨이 가빠져왔다. 그리고. 몸이 튕겨져나갔다. 텅 비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머리통 대신 본능적으로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억눌린 고함소릴 목구멍 안으로 밀어넣으며, 동시에 김한영의 어깨를 밀치고.. 빠각.툭... 안도의 한숨일까. 나른한 숨과 함께 끈적한 액체가 김윤서를 적시기 시작했다. 멈춘다. 고막의 소리가. 갈비뼈의 통증이. ...심장의 박동이. 천천히. 아주 느리게.. 멈춘다. ................. 둔탁한 소릴 내며 바닥에 떨어진다. 가볍게 튕겨오른 몸은 곧이어 빗방울을 머금고 다시 가라앉는다. 투명한 빗물 속에 열기로 가득찬 붉은 피가 섞여 흐른다. 흐려지는 시야 속으로 들어온 얼굴들을 향해 윤서가 픽.웃는다. "씨발...오빠 조지고...가야 되는데....아깝네..." 늘어진 테이프처럼 뭉개진 중얼거림. 곧이어 윤서의 눈꺼풀이 스르르.닫히고... 절규어린 외침이 월미도 선착장을 뒤흔들었다. "윤서야!!!!!!!!!" 5-94. 잠자는 인천의 일당백 ........... ........ ※ "정간호사!!! 모니터 체크해!!!" "환자의 BP(혈압)가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습니다!! bleeding(출혈) 너무 심하고. 이대로 가다가는 뇌사상태에 빠질 위험이 높습니다." "선생님!!! diaphragmatic rapture(횡경막 파열)에다 rib fracture (늑골 골절) 입니다." "서,선생님!! arrest(심장박동 정지)가!!..." 한 간호사의 급박한 외침에 모두가 숨을 들이켰다. 열여덟.열아홉쯤 됐을까. 피범벅이 된 얼굴은 나이를 가늠할 수 없을만큼 처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응급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이름만 대면 전국의 고교생들의 대부분이 알만큼 일종의 거물들에게 둘러쌓여 병원에 실려왔을 때부터. 아니, 어쩌면 금방 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만큼 망가진 몸을 하고서도 유난히 즐거워 보이는 입매를 봤을 때부터일지도 모르겠다. .....붉게 물든 이 아이, 윤서의 정체를. 입고있는 흰 가운 위로 윤서의 피를 가득 묻힌 석재는 식은땀이 베어나오는 이마를 쓸어내렸다. 결정 해야한다. 석재는 어금니를 깨물며 소매를 걷어올렸다. "CPR(심폐소생술) 준비해!!" 석재의 흔들리는 다갈색 눈동자 안으로 윤서의 핏기 없는 손이 들어선다. 움찔. 그 순간 아주 미세하게.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만큼의 작은 움직임이 일렁였다. ........... ※ "김윤서어!!!!!!!!!" 반투명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희미한 풍경에 차마 끓어오르는 감정을 식히지 못한 지니의 처절한 외침이 복도를 울린다. 주체할 수 없을만큼 떨려오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양 팔을 힘껏 감싸쥐고 있던 연오가 지니의 외침에 결국 힘을 잃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가까스로 그런 연오를 품에 안아든 강안이 미간을 좁힌다. 방금 전까지 연오가 쥐고있던 팔뚝에 선명히 찍혀있는 자국. 얼굴이나 몸에 상처나는 걸 끔찍히도 싫어하는 연오가 자기 스스로 낸 손톱 자국이다. 자국에 지워진 충격의 무게를 느낀 강안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칠공주의 눈물나는 우정을 이해하기 어려울 거라고 강안은 생각했다. 기절한 연오를 계속 들고있기도 뭐해 간호사를 찾아 돌아선 강안의 눈 앞에 애처롭게 떨리고 있는 이연의 어깨가 보였다.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응응, 윤서는 여태까지 이연이하고 한 약속 자주 어겼으니까. 이번만큼은. 이번만큼은 절대 어기지 않을꺼야. 응.그럴꺼야. 꼭.. 꼭 그럴꺼야. 그치..윤서야??.." 발 밑에 노란색 추파춥스 껍데기를 산처럼 쌓아놓고선 기도라도 하듯, 두 손을 꽉.부여잡은 이연의 어깨가 덜덜 떨리고 있다. 옆에있던 재섭이 보다못해 그런 이연의 위로 입고 있던 쟈켓을 덮어줬지만, 이연의 떨림은 조금도 사그라지지 않는다. 제 정신이 아니야, 다들. 씁쓸하게 되뇌인 강안이 고개를 내저으며 월미도에서 윤서와 함께 정신을 놓아버린 아라가 입원해있는 병실로 향했다. "..누나, 지금 병원 로비라는데. 데리고 올까요??" "...." "누나??" "어? 지금 뭐라고. 아아, 그래. 좀 데려와줘." 응급실 문에 고정된 효선의 시선이 잠시 흔들렸다. 피투성이가 된 윤서와 함께 병원에 도착했을 때부터, 줄곧 그 자리만 지키고 서있던 효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던 천상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윤서가 정신이 돌아왔다는 얘기가 아니면 뭘 해도 들리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효선에겐... 천상의 가여운 어깨를 한번쯤 돌아볼법도 한데. 효선의 고개는 꿋꿋히 한 곳만 바라봤다. 윤서가 있는. 그 곳. "..가. 여기가 어디라고 오빠가 있어?? 가버려. 꺼지란말야. 윤서 앞에서, 우리 앞에서. 이제 제발 좀 사라지라구.." 갑자기 들려온 리아의 독기어린 목소리가 한영의 뺨을 후려친다. 빛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이 검어진 한영의 눈동자가 순간 번뜩였다. 보이지도 않을만큼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선 한영이 리아의 코 앞에 다가섰다. 윤서의 친구여서 그런 건지, 아니면 예전부터 알아왔던 동생이여서 그런 건지. 그 것도 아니면 단순히 여자라 그런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한영은 성난 주먹을 애써 억누르며 리아를 마주봤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리아의 눈은 참 차갑다. 사나워도 그 안에 온기가 감춰진 지니의 눈과는 다르게, 뼛 속까지 시리다, 리아의 눈은. "이제 내 동생이야, 윤서. 김한영의 시스터, 김윤서. 그건 아까 월미도서부터 앞으로 쭉.변하지 않아. 알아들었냐??... 그리고 너희가 윤서를 얼마나 아끼고, 소중해하는지 나도 잘 아는데. 더이상 나한테 감놔라,대추놔라 하면 오빠 화난다. 리아야,응??" 한영의 뺨이 실룩인다. 응급실에서는 조금 떨어진 복도 끝자락에 자리를 지키고 있던 전국연합 멤버들이 미리 짜기라도 했는지,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전설이 화났다. 김윤서하고 관계된 일만 아니면 사람이 백팔십도 변하는 게 김한영인데, 이번엔 꽤 오래가나 싶었다. 웃는 모습 보기가 하늘에 토성따기만큼이나 어려운 한영이 사사건건 삐딱하게 나오는. 그 것도 자기보다 세살이나 어린 계집애를 상대로 여태까지 웃어줄 수 있었다는 사실부터가 그들에겐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법한 모습이였다. 윤서하고 코딱지만큼이라도 관련된 새끼들 앞에서는 무조건 한수 물러주는 김한영이 이정도면 많이 참았다싶다. 전국연합 멤버들은 마른 침을 삼키며 살짝만 힘을 줘도 끊어질 것 같은 한영와 리아를 주시했다. 그 순간, 하하하하하. 리아가 입술 사이로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배를 잡고 한참동안이나 마른 웃음을 토해내던 리아의 얇은 쌍꺼풀이 들썩인다. 리아는 한영을 향해 싸늘해진 눈을 홉떳다. "오빠??오빠라고 그랬어요, 지금??.. 난 살면서 오빠같이 뻔뻔하고, 낯짝 두껍고. 이렇게 웃음 날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처음이야. 마지막인데 뭔들 못해줄까. 윤서가 그런 애라는 거, 오빠도 잘 알잖아??.. 걘. 진짜 오빠여서 오빨 인정한 게 아냐. 마지막이니깐. 걔한테도, 오빠한테도, 우리한테도. ...그게 마지막이니깐. 더럽고, 치사하고. 역겨울만큼 구차해도 마지막이니깐.. 자기 가고나서 남아있는 우린 웃어야 된다고 생각했을껄. 자기때문에 오빠하고 우리가 이렇게 틀어졌다고 생각하는 윤서는. 자기 없어지고나서 우리만이라도 되돌아갔음 하니깐..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준거야, 마지막으로. 알아??" 딱히 칠공주나 한영과 깊이 관여된 사람이 아니여도 충분히 기분 상할만한 비웃음을 지으며 리아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리아 못지않게 건조해진 눈으로 한참동안 가만히 있던 한영이, 소리없이 오른손을 치켜들었을 때. 응급실 문이 열리면서 입고 있는 간호복 위에 빨간 피를 잔뜩 튀긴 간호사 한 명이 뛰쳐나왔다. "여기 B형이신 분 계세요?..아니면 O형이라도!!" 급박한 간호사의 외침에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손을 들며 나섰지만, 간호사의 표정에는 전혀 안도감이 깃들지 않았다. 그 순간. 지운의 옆에 서있던 잔디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앞다투어 간호사 앞으로 달려나가는 사람들과는 대조적으로 윤서에 대한 일이라면 열 일 제쳐놓고 나서는 칠공주가 이상하리만큼 가만히 있었다. 한영과 가람은 물론이고 옛날부터 윤서의 팬이였다던 인천연합의 몇몇 멤버들과, 윤서와는 하등 상관없는 전국연합까지 자기 피를 써달라고 나서고 있는데. 누구보다 제일 먼저 간호사에게 달려갔어야 할 칠공주가 가만히 있다니. 지금 자리에 없는 아라나, 연오. 혈액형이 다른 효선을 제외하고도 윤서와 같은 혈액형인 지니나 리아. 모든 혈액형에게 수혈이 가능한 이연이 가만히 있다는 사실은 심각할정도로 이상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어진 간호사의 말에 잔디는 이 이상한 상황을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Rh+형 말고 Rh-형이요!! Rh-B형이나, O형인 분. 안계세요???..." 찬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진 복도. 한 옥타브 더 높아진 간호사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아까와 달리 섣불리 손을 들고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15%나 되는 서양이면 몰라도, Rh-형을 가진 사람이 전체의 1%도 되지 않는 동양에서. 그 것도 인구 사천 오백의 대한민국 안에서 Rh-형을 가진 사람이 그렇게 쉽게 나타날리 없었다. 간호사의 말을 듣는 순간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던 한영이 갑자기 엘레베이터 쪽으로 달려간다. 자기 동생의 혈액형도 몰랐냐는 한심한 얼굴로 한영의 뒷모습을 흘겨보던 리아가 초조한 걸음으로 어디론가 뛰어가려는 간호사의 팔목을 붙잡았다. 복도 저편에서 누군가를 데리러 갔던 천상이 걸어오고 있었다. 두 개의 그림자와 함께. "..제가 늦은 건..아니죠??.." 부산에서 윤서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희미하게 남아있는 마리가 자신의 허리쯤에 오는 여자아이의 손을 잡고 어색하게 웃었다. 마리의 목소리에, 그제서야 응급실 문에서 시선을 뗀 효선이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 애니??.." "아. 예. 얘가 제 친척 동생이예요." "언니, 하늘 나는 배 태워준다며. 근데 왜 병원엘 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을까. 올망졸망한 눈망울이 꽤나 귀여운 아이의 뺨이 찬 바람에 빨갛게 달아올라있었다. 효선은 아이의 빨간 뺨을 멍하니 바라보다, 후우.한숨을 내쉬며 리아에게 팔목이 잡힌 간호사에게 고개짓을 했다. "쟤가 Rh-예요." "예??..하, 하지만.." "죽지않을 만큼만 뽑아서 쓰세요. 이대로 어영부영, 병신처럼 굴다 윤서 죽이면 내가 언니 가만 안둘 거니까 서두르는 게 좋을껄요. 게다가 혈액은행은 폼으로 만들어 놓은 게 아니잖아요??.. 미리 연락해놨으니까, 충분하게 공급해줄 거예요." 리아의 딱부러지는 협박에 겁에 질린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서둘러 아이의 손을 잡고 검사실로 들어갔다. 아이를 잡았던 손을 치마춤에 문지르며 마리가 고개를 숙였다. 숨막히는 분위기다. 복도 끝에 엉거주춤 기대선 마리는 윤서가 있는 응급실 문을 바라보다, 문득 시야 안에 들어온 효선을 알아채고 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언닌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걸까?? 이렇게 될 거라고. 윤서 선배가 전학온 지 두달쯤 됐을까. 갑자기 날 찾아와, 언젠가 친척 동생의 피 좀 줄 수 있냐던 효선 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땐 쫌 어이없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경외로운 시선으로 매끄럽게 깍아진 효선의 옆모습을 보던 마리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글자 모양의 금속이 손에 잡힌다. 윤서는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효선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응급실 문을 바라보는 마리의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잠깐.잠깐 씨발!!간호사 어딨어??" 격하게 숨을 토해내며 한영이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제법 강한 인상을 가진 사내아이 하나가 그런 한영의 손에 잡힌채 빙글빙글.웃고 있다. 한영의 고함소릴 들었는지, 검사실에 들어갔던 간호사가 놀란 눈으로 달려나온다. 간호사 앞으로 잡고있던 사내아일 던지다시피 밀어넣은 한영이 얼굴을 흐르는 땀방울을 거칠게 닦아내며 말했다. "Rh-B." "네??" "아 씨발.걔가 Rh-라고.요." 한영은 땀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의기양양하게 리아를 돌아봤다. 그런 한영을 보며 우습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린 리아가 효선이의 옆으로 걸어가 벽에 기대섰다. 눈을 감고 조금 빨라진 심장 박동을 가다듬는데, 이연이의 찢어지는 괴성이 리아의 귀를 파고들었다. "너.너너!!!!!!" "..제 동생도 Rh-예요. ....사부님 좀 살려주세요." 애처로울 정도로 비에 흠쩍 젖은 라스트가 울먹이며 무릎을 꿇었다. 그런 라스트의 옆에는 눈물범벅이 된 곽이 서있었다. 이연은 쇳소리를 내며 라스트의 앞으로 달려가 멱살을 잡아올렸다. 쿠왕. 어디서 그런 괴력이 솟았는지, 이연은 라스트의 멱살을 쥔 상태로 복도 한 켠에 자리잡은 의자에 내리꽂았다. 박살난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 조각과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라스트의 위로 이연이가 울부짖는다. "죽여버릴꺼야!!!!너.너 절대!!용서못해, 내가!!!! 너 죽여.. 죽여..버릴꺼라구우...." 재섭과 가람에게 양 팔이 잡힌 채 이연이 바닥으로 무너져내렸다. "윤서야!!!윤서야아!!!!!!...." 라스트의 젖은 어깨만큼이나 젖은 이연의 목소리가 응급실 너머 윤서의 심장에 스며든다. 천천히. 그리고 슬프게. 5-95. 눈물의 참회 ............. ....... ※ 삑.삑.삑― 일정한 기계음이 규칙적으로 울리고 있는 병실 안. 몇 일째 제대로 잠을 자지못해 푸석해진 피부를 쓸어내리며 효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벌써 일주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잠을 자는 것 처럼 마냥 평온해보이지만은 않은 윤서의 상처난 얼굴을 바라보는 효선의 눈가가 아련해진다. 이대로 윤서가 잠겨버리는 것은 아닐까.걱정이 될 정도로 숨막히는 적막이 맴도는 병실 안과는 달리, 밖은 용케 낌새를 알아채고서 기삿거리를 물어간 기자들때문에 1년 전.아니, 그보다 더 심할정도로 전국이 떠들썩했다. 윤서가 입원해있는 대한병원 앞에는 연일 기자들의 플래쉬가 터지고 있었고, 뉴스나 신문 할 것없이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과격해지는 고교생 폭력문제에 대해 언성을 높였다. 윤서의 개인적인 사생활이나, 칠공주의 직접적인 노출이 없도록 리아와 함께 효선이 최대한 손을 써봤지만 그 것도 언젠가 한계에 부딪치고 말 것이다. "....그래도 너만 깨어난다면. 윤서 너만...눈 뜰 수 있으면 ..우린 괜찮아. 알지?.." 조금의 여유만 남긴채 빽빽하게 호스들이 연결된 윤서의 손등 위로 효선의 젖은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는다. 수백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윤서의 병실을 다녀갈동안, 윤서의 닫혀진 눈꺼풀은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예전처럼 한껏 개구진 얼굴로 농담을 건넬 것만 같은데. 몇일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 우릴 놀라게만 할 것 같은데.. 지난 일주일간. 슬프게도 윤서의 눈꺼풀은 그 어떤 움직임도 만들어내지 않았다. "여기가.." 문가에서 들려온 인기척에 눈 주위를 훔쳐낸 효선이 고개를 돌렸다. 곱게 단장을 한 미숙을 보자 효선은 깍듯이 인사를 하고, 윤서에게서 한걸음 물러났다. 살짝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한 효선이 미숙을 자리로 안내한다. 집중하지 않으면 느끼지 못할 미약한 술냄새. 미숙의 앞에 방금 냉장고에서 꺼낸 오렌지 주스를 내려놓는 효선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상태는...대충 들었는데...아. 저기, 생각이 정리가 잘 안되는구나. 잠시만 기다려주겠니?" 마른 기침을 하며 불안하게 떨리는 두 손을 맞잡은 미숙이 쉼호흡을 한다. 한참을 그렇게 뜸을 들이던 미숙이 드디어 결심했는지 아까보다 한결 또렷해진 눈으로 효선에게 물었다. "상태가 많이..안좋다고. 지금, 지금 이대로 눈을 영영 못.. 뜰 수도 있다고.." "깨어납니다. 윤서요, 무슨 일이 있어도 깨어나요. 이대로 우리 놔두고 죽을 애 아녜요. 아줌마보다 그건 제가 더 잘 알아요." "효선아." "아줌마는 모르시잖아요. 윤서가 얼마나 강한앤지, 얼마나 우릴 아끼는 앤지. 이렇게 두고 갈리 없어요. 금방 눈 떠요. 금방 털고 일어날―" "다 듣고 왔다. 윤서, 만신창이가 다 됐다고.. 차라리 이대로 안 깨어나는 게 오히려 그 애한테 좋을만큼. 많이..아프다고." 아랫입술을 깨문 미숙의 고개가 결국 아래로 떨궈진다. 가늘게 떨리고 있는 미숙의 어깨를 보며 주먹을 움켜쥔 효선의 입술 사이로 단호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슨 권리로. 이제와서 아줌마가 그런 말 하시는 건데요??" "뭐? 효선이 너." 날카로움을 띄고 있는 효선의 목소리에 놀란 미숙이 고개를 들자, 병실문이 거칠게 열리면서 흐트러진 교복차림의 이연이 달려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와 싸우다 왔는지, 교복이 온통 자잘한 피와 먼지투성이였다. 게다가 문 밖에서 효선과 미숙의 대화를 엿들었는지, 눈동자는 붉게 상기돼 있었다. 뒤따라온 리아와 아라가 말릴 틈도 없이 이연이 미숙을 향해 격하게 소리쳤다. "..버려두셨잖아요!!! 줄곧, 내내 윤서 버려만 두셨잖아요!!!.. 한영이 오빨 너무 사랑하셔서. 그래서.. 윤서 항상 혼자이게 하셨잖아요!!!!... 그런 분이 이제와서 왜 그러시는데요?.. 윤서 아프니깐.어차피 깨어나도 살 가망 없는 애니까 포기하자구요??..아줌마가 뭔데요. 아줌마가 뭔데 윤서를 포기하라마라예요!!!아줌마가 뭔데!!!!" "이연아,진정해!!.." "아줌만 모르잖아!!! 윤서가 얼마나 아팠는지!!윤서가.. 윤서가 왜 싸우는지!!!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날처럼. 양 팔을 리아와 아라에게 붙잡힌 채로 이연이 몸부림친다. 경악스러운 얼굴을 감싸쥔 미숙을 향해 성난 고함을 지르던 이연의 얼굴이 눈물투성이가 되고. 그 모습을 지켜보는 아라의 눈가에도 눈물이 그렁그렁.서린다. 윤서가 쓰러지던 날,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는 바람에 잔뜩 망가져버린 성대가 채 낫기도 전에 또 한번 자신의 성대를 할퀴며 울부짖는 이연의 모습에 태어나 눈물 한 방울 흘려본 적 없는 리아의 눈가에도 물기가 맺혔다. "윤서는 그래도 엄마라구!!!..아줌마 그래도 엄마라구... 사진 꼭 챙겨다녔단말야. 그래도 자길 낳아준 사람이라구.. 아줌마...많이 좋아했단말야... 그런 윤서 배신한 거 아줌마잖아. 아들이라고!!제사 지내줄 자식이라구!!!한영오빠만 예뻐하면서 윤서 마음에 못 박은거 아줌마 자신이잖아!!!!..이제와서 왜그래. 아줌마가 뭔데. 아줌마가....뭔데...." 기분 나쁜 쇳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린 이연이 더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이연아! 짧은 비명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이연을 받아 함께 바닥으로 넘어진 아라가 정신을 놓아버린 이연의 어깨를 감싸쥐고 어깨를 들썩였다. "...버릇없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저나 효선이나. 아라나 연오, 지니까지 모두 이연이 말 틀리지 않다고 생각해요. ..전 아직도 생생해요. 그 추운 날, 윤서 혼자 문 밖에 버려두고 아줌마. 김한영 손잡고 가버린 거. 김한영 학교는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면서 윤서네 학교엔 단 한번도 오시지 않은 거. 김한영한테 비싼옷, 비싼밥 먹여가며 키우실때. 윤서한테는 시선 한 번 안주신거. ....아줌마 힘드시다고, 윤서한테 화풀이 하신 거. 아저씨하고 싸울때마다 윤서 몸에 꼭 상처 하나씩 만드신 거. 김한영에 속 썩일때마다 윤서 들먹이신 거. 저 하나도 안 잊었어요." 아라와 이연을 일으키며 리아가 건조한 얼굴로 미숙에게 말했다. 점점 색을 잃어가는 미숙의 창백한 얼굴이 가엽지도 않은지 리아는 일말의 동정심도 안보탠 싸늘한 눈초리로 미숙을 바라봤다. "이연이 말처럼 그래도 윤서는 아줌마 좋아했어요. 제 오빠만 챙기는 엄마 보면서도 끝까지. 자기 엄마만큼은 미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근데.. 그런 앨 아줌만 어떻게 대하셨어요??.. 아줌만 윤서 자식취급도 안하셨어요. 그 아픈 애,스스로 떨어져나갈만큼 모질게.아프게 하셨어요." "그건. 그건.. 윤서만큼은... 윤서만큼은...." 감겨진 미숙의 눈꺼풀 사이로 굵은 눈물 한줄기가 소리없이 흘러내린다. "...아줌마가 기다리기 싫으면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없는 자식 취급하시면 되요. 윤서한텐 우리가 있으니까, 우리가 윤서 깨어날 때까지 기다려줄테니까. 아줌마는 그냥 평소처럼 사시면 된다구요." 매섭게 미숙을 쏘아보던 리아가 아라와 함께 이연을 부축해 병실을 나간다. 폭풍이 휩쓸고 간 것처럼 황량해진 미숙의 마음을 느낀 효선은 가만히 미숙의 눈물을 보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고 가세요. 라는 짤막한 말을 남기고 리아를 따라 병실을 나갔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는 가습기 소리와, 서늘한 기계음. 그리고 윤서의 미약한 숨소리만 흐르는 병실에 남겨진 미숙은 한참동안이나 그 자리에 앉아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윤서에게로 다가갔다. 윤서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게 헬쓱해진 아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미숙의 다리가 힘없이 풀린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은 미숙이 침대 밖으로 삐져나온 윤서의 손을 잡고 오열한다. 문 밖에 기대,안에서 들려오는 미숙의 오열을 듣고있던 효선이 욱신거리는 눈 두덩이를 문질렀다. 왼팔에 깁스를 두르고, 그 걸로도 성이 안차 밴드를 덕지덕지.붙여놓은 지니와 연오가 그런 효선에게로 걸어왔다.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연오가 어깨를 으쓱이며 복도 한 켠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걸터앉는다. "이제와서 저러신다고 뭐가 달라지니." "..글쎄." "이러다 김한영까지 와서 무릎 꿇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후우. 그나저나 이 계집애는 징하게도 잔다. 이만큼 잤으면 슬슬 깨어나야 되는 거 아니니??" 마른 웃음을 지으며 연오가 농담을 건넨다. 효선이 픽.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 주머니에서 꺼낸 레종 한 개비를 입에 문 지니에게서 라이터를 빼앗아 든 효선이 [흡연금지구역] 팻말을 가르켰다. 지니는 무감각한 얼굴로 효선의 손에 들려진 라이터를 쳐다봤다. .......갑자기 재킷 주머니를 뒤적이던 지니가 효선과 연오 앞으로 자신과 똑같은.그러나 약간 다른 모양새를 띠고있는 두 개의 반지를 내밀었다. 조금은 두껍다싶은 금반지 가운데 위치한 동그란 자국 위로 ´7´가 선명하게 새겨져있다. 형광등에 비칠때마다 7자는 서로 다른 색을 띠었다. 빨강, 주황, 초록. 아마 이연과 아라,그리고 리아에게 줄 반지의 색깔은 아마 노랑,짙은 네이비, 파랑일 것이다. 반지의 뒷면엔 휘갈겨 쓴 듯한 글자들이 어지럽게 자리잡고 있다. "....이 거." "우린 칠공주야. 그거, 누구보다 김윤서가 잘 알아. 그러니까 금방 깨어날 거다. 그리고 그 계집애가 하늘 반쪽도 못쥐고 그냥 갈 거 같아?? 사서 걱정말고 이제 그만 들어가서 쉬어라, 효선아. 여긴 내가 있을테니깐." 입에 물었던 담배를 휴지통에 구겨넣은 지니가 병실문 앞에 다가섰다. 지니의 손이 문고리에 얹혀졌을 때,순간 병실 안에서 들려온 흐느낌에 지니가 멈칫한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연오와 효선이 지니의 옆으로 다가와 병실 안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에 귀를 기울였다. 문고리를 쥐고있는 지니의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두둑.올라온다. ............. ......... ..... "....―그래도...한영이 미워마라, 윤서야.. 우리 한영이... 미워하지마.. 그래도 걔한텐 네가 전부다. 내가 너한테 몹쓸짓 할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말린 애야, 한영인.. 한영이한테 넌 전부야..윤서야... 네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그 날, 한영이가 집을 나간 건... 다 널 위해서였다. 자기만 없어지면 네가 행복할 거라고.그렇게 믿고.. 자기 하나만 사라지면.." 윤서의 손을 어루만지며 미숙이 젖은 목소리로 힘겹게 머릿 속을 맴도는 단어들을 토해낸다. 꽤 오랜 시간동안 말을 잇던 미숙이 고개를 떨구며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심박체크기에 그려지던 부드러운 곡선이 불규칙한 선을 나타내며 요란한 기계음을 내기 시작했다. 삑.삐빅.삐빅.삑.삑. 그 소리에 당황한 미숙이 호출버튼을 누르자,병실문이 열리면서 지니와 효선,연오가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왔다. "유,윤서야? 윤서야..윤서야!!!!" 현기증을 느낀 연오와 효선의 무릎이 휘청인다. 지니는 곧바로 윤서에게 달려가 믿기지 않는다는 시선으로 윤서를 보며 소리쳤다. 목청껏 불러도 전혀 뜨일 생각이 없는 검은 눈꺼풀에 화가 난 지니가 윤서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자, 미숙이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을 친다. 차트를 손에 든 간호사 두 명이 병실 안으로 뛰어들어와, 지니의 허리를 붙잡았다. "정간호사!!빨리 선생님 불러요!!!" "예에!!..보호자분 이러시면 안되요!! 손 놓으세요!!!" "이거 놔!!!" "...무슨 일이야!!"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병실. 급히 호출을 받고 달려온 석재와 다른 의사 세 명이 윤서에게서 지니를 떼어놓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간호사를 보며 소리쳤다. 결국 등치 좋은 경비원들까지 달려와서야 윤서의 멱살을 놓은 지니는 아직도 분이 안풀렸는지 경비원들을 향해 거칠게 발길질을 했다. 소란스러운 상황에서도 윤서의 상태를 확인한 석재는 서둘러 사이드레일을 올리고, 침대 바퀴의 안전장치를 해제했다. "당장 원장님께 호출해요,박간호사!!! 위급상황입니다!!!" 침대를 끌고 병실을 나가던 석재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망연자실한 상태로 서있는 효선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매번 하는 말이긴 하지만 유독 곤혹스럽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석재는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입고 있는 하얀 가운 위에 닦아냈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는 효선의 눈동자를 향해 떼어지지 않는 입을 겨우 뗀 석재가 조금은 슬픈 어조로.조금은 씁쓸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이 고비입니다. 보호자분들도 각오 단단히.. 하고 계시는 게 좋을 겁니다." 안돼. 윤서야, 안돼.. 너 이러면 안되잖아.... 이렇게 쉽게 가버리면.. 인사도 안하고 훌쩍 가버리면... 안되는 거 잖아, 너... 윤서야.. 제발. 제발.... 5-96. 일년 후 ................. ....... ※2005년 2월. 대한병원 앞.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고 있는 솜털같은 눈송이들을 보며 걸음을 멈춘 지니가 조용히 손을 뻗었다. 쫙.펴진 지니의 손바닥 위로 눈송이들이 하나둘씩 내려앉는다. 하나.둘. 셋.넷.다섯 여섯. 그리고 마지막 일곱번째 눈송이가 내려앉자 지니가 주먹을 힘껏 말아쥐었다. 지니의 체온에 의해 녹아버린 눈송이들이 옅은 물기를 남긴채 자취를 감춘다. 후우.시린 입김이 뿜어져 나왔다. "춥다. 들어가지, 여기서 뭐해??.." "주연오." "왜?? 아흐. 추워죽겠네.괜히 폼낼라고 뻗댔나??.." 허벅지의 반을 겨우 가리는 미니스커트에, 하얀 털방울이 앙증맞게 매달린 코트를 입은 연오가 가죽 부츠의 끝을 윗쪽으로 끌어당기며 투덜거렸다. 그 모습을 어이없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지니의 입가에 픽.하고 작은 웃음이 걸쳐진다. 다시 지니가 병원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그 뒤로 지나가는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연오가 따라간다. ............. 2027호. [김윤서(19/女)] 어느새 병실 옆의 하얀 팻말엔 숫자 하나가 더 늘어있었다. 그 숫자를 아픈 눈으로 바라보던 지니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오늘은. 병실에 들어가기 전에 꼭 한번씩 되뇌이는 말, 오늘은. 그 때. 이연이가 부탁했던 바나나 우유를 한아름 사들고 온 연오가 뭐하냐며,지니를 대신해 병실문을 벌컥.열었다. 열려진 문 틈사이로 보이는 어제와 다름 없는 병실 풍경에 쓰게 욕을 지껄이며 지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으악.아라야, 너 누구한테 돈받을라고 그러구 있니??.. 나는 새뱃돈 안가져왔는데.어쩌나." "아. 새해기도 하고, 그냥.. 버,벗을까?? 많이 이상해??.." "이상하긴야. 이쁘다 아주.전인화도 울고 가겠어." 연오의 장난어린 농담에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있던 아라의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가 되버린다. 눈을 찡긋이며 아라의 어깨를 두드려준 연오는 쇼파에 누워 잠이 든 이연이 옆에 사온 바나나 우유를 내려놨다. 연오는 병실 안이 더운 듯, 코트를 벗어 이연에게 덮어줬다. 그새를 못참고 또 어디선가 싸움을 했는지 얼굴이 말이 아니다. 군데군데 멍이 든 이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연오가 안쓰러워진 아라가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다들 밥 안먹었지??.. 그럴 줄 알고 집에서 떡국 좀 끓여왔어. 먹을래?" "좋지. 우리 황장금이의 솜씨를 내가 또 봐줘야지 않겠어?? 파 송송썰어서 부탁합니다, 장금님." "하하. 응." 윤서가 그렇게 되고 난 뒤, 부쩍 넉살이 좋아진 연오의 너스레에 아라가 말간 웃음을 띠우며 병실 한 켠에 마련된 부엌으로 들어갔다. 딸깍. 언제나 그랬듯, 병실에 들어오자마자 윤서의 옆에 의자를 끌고와 앉은 지니가 지포라이터의 뚜껑을 손톱으로 퉁긴다. 불규칙한 금속음을 내며 한참을 그렇게 있던 지니는 하우.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다. 이건 아니다. "망할 계집애." "이쁘고 고운말만 씁시다. 아라가 듣고서 놀란다,너??.." "...눈만 떠봐,다시는 감지도 못하게 아예 본드칠 해놓을 거다. 이 계집애야." 숨길 수 없는 아라의 붉은 눈두덩이. 앙상하게 마른 연오의 어깨. 하루에 말하는 횟수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진 이연. 무겁게 늘어난 효선이의 한숨 갯수. 한껏 예민해진 리아의 날카로운 눈동자. 하루에 수십번씩 벌이는 싸움에 상처투성이가 된 지니의 몸. 그리고... 길어진 머리칼만큼이나 닫혀진 윤서. 목숨이 붙어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생각해야 된다는 석재의 멱살을 몇번이나 쥐었는지 모르겠다. 지니는 부쩍 길어진 윤서의 머리칼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런 윤서는 생소하다못해 너무 낯설기까지 하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윤서가 병원복을 입고, 이렇게 병원 침대에 죽은듯이 누워있는 모습은.. "후우. 갑갑하다.." "창문 열어줘??.." "....화강안은 그만뒀냐, 너." 모르는 척. 웃으며 창문을 열던 연오의 손길이 멈칫한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담배곽을 만지작거리며,지니가 그런 연오를 가만히 바라봤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한참동안 같은 자세로 굳어있던 연오가 언제 그랬냐는 듯,밝게 웃으며 창문을 활짝 열고선 고개를 돌렸다. "응.아니." "...." "있잖아, 지니야. 강안인 진짠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아닌거 같애. 그래서 쫌 아쉽더라. 주연오같이 성격만 빼면 완전 퍼펙튼데 말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냐. 그거??" "...차라리 딴 놈이나 알아보려구. 너무 그지야, 걘. 너도 봤지??? 윤서 수술 끝나고나서 그 새끼가 지껄인 말. 와, 아무리 주연오 마음에 담아둔 남자라도 그따위로 말 지껄이면 나 용서가 안된다."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연오가 하하하.웃었다. 대답이 없는 지니가 무안했던지, 연오는 금새 웃음을 멈추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 그냥 쫑냈어. 어차피 나혼자 시작하고,나혼자 끝내는 건데 뭘. 그러는 너야말로 완전히 정한거야, 이제?? 김현광하고 최필립말야." "...." "아. 또 대답 없네?? 너 사람 존나 무안주기 일인자야. 이제 리아도 널 따라잡을 수 없을껄." 의미없는 눈짓을 보낸 연오가 아라를 돕기위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다시 고요해진 병실 안으로 연오가 열어놓은 창문 아래로 하얀 바람이 불어온다. 그 때, 병실문이 열리면서 뭔가.조금은 평소와 달라보이는 효선이와 리아가 들어섰다. 입고있는 갈색 더플코트에 눈송이를 군데군데 묻히고 있는 효선은 복잡하면서도 찜찜한 표정을 숨기지 않은채 지니에게 말했다. "지니야.. 한영오빠가 지금 대한파에 잡혀갔대." "...대한파??.. 아아.옛날에 윤서한테 찾아왔다던 그 조폭들?.." 인기척을 느끼고 부엌에서 고개를 빼꼼이 내민 연오가 지니대신 효선에게 묻는다. 지니의 눈쌀이 찌푸려졌다. 대한파라면 어렴풋이 기억난다. 김윤서가 제정신이 아니였을 그 때. 그러니까 김한영을 조질려고 반미친 상태에서 싸움질만 죽어라 하던 그 때.어느날 갑자기 찾아온 검은 정장의 사내들. 싸움질 좀 하는 고교생들을 조직에서 픽업해간다는 소문은 얼핏 들었지만, 막상 자기한테 들이대니까 신기하다고 웃던 김윤서가 재빠르게 그 뒤를 따라 떠올랐다. 하지만.. "그 때 김윤서가 분명 걸레짝으로 만들어놨을텐데. 이제와서 뭣하러??.." "....대한파가 좀 깊은. 사이였나봐, 한영오빠랑." "그 게 무슨 소리야." "..김윤서정도면 천하의 은지나도 인정하는 계집애잖아. 그런 애를 겨우 조직원 몇 부숴놨다고 포기할만큼 허술한 조직이 아니였다는 얘기지. 윤서한테 그렇게 깨지고나서 얼마안가 김한영한테도 찾아갔단다, 그 양아치새끼들이." 부엌과 병실 안을 분리해주는 나무 기둥에 기대선 리아가 피곤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리아의 말에 효선이 고개를 끄덕이며 묵직한 한숨을 내쉰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자잘한 톱니 바퀴들이 맞물려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을만큼의 상처가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 알았더라면. 그 당시에 모든 걸 알아냈었더라면.. 적어도 지금까지 오는 일은 없었을까? 자꾸만 머릿 속을 맴도는 부질없는 희망이 효선의 마음을 동요시킨다. 과거에 발목이 붙들린 채,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만 만든다. 만약이라는 건, 언제나 효선이 가장 싫어했던 단어인데.. "..그 쪽도 하나를 포기하는 대신. 더 큰 하나를 가지고 싶었을거야, 아마. 그래서 한영오빠한테 손을 내밀었대. 윤서를 걸고.." "잠깐. 나 지금 효선이, 네가 하는 말 이해 안된다. 뜬금없이 김한영이 대한파한테 끌려갔다는 건 뭐고, 2년이나 지난 대한파 얘길 왜 이제서야 꺼내는 건데??.." "....윤서를 다시 건드리지 않는 조건으로 한영오빤 졸업 후에 대한파에 들어가겠다고 약속했어. 자기가 집을 나온 뒤로 더 힘들어하는 윤서를 아니까, 오빠는.. 더이상 윤서를 그 집에 놔둘 수 없었나봐." 효선이 한쪽 얼굴을 찡그리며 집게손가락으로 안경을 추켜올렸다. 방금 전. 병원 앞에서 다짜고짜 길을 가로막고 도와달라던 아석의 애절한 얼굴이 자꾸만 효선을 심난하게 만들었다. 남자의 눈물을 처음 보는 것도, 그렇다고 남자의 눈물을 불쌍하다 여긴적이 단 한 번도 없는 효선이였는데. 한영을 도와달라는. 자신의 하늘을 제발 살려달라는 아석의 가여운 외침은 효선의 심장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결과는 보다시피. 너도 알잖아, 윤서 이렇게 되고나서 한영오빠 어떻게 지내는지... 열받은 대한파 보스가 어젯밤에 폭풍에 와서 한영오빨 잡아갔대." ".....그래서 어쩌라고." "...밖에 반아석이 와있어. 도와달래." "원터치 한방, 금잔디에다 서울연합의 폭풍 최강. 게다가 정지운까지 불렀지만.. 아무리 폐인이라도 천하의 김한영을 잡아갈 정도니 지들도 별 수 있겠어. 그러니까 도와달라는 거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리아가 기둥에서 몸을 뗐다. "난 찬성 못해. 이유가 어쨌건 결국 윤서 저렇게 만든 새끼, 김한영이야. 그런 새낄 도와주자고??.. 그럴바엔 차라리 샌드백을 두드리는 게 나아." "......김한영 상태는 어떤데?" "은지니, 너!" "...같이 따라갔던 한가람이 오늘 병원에 실려왔어. 전치4주래. 한가람이라서 봐준 건지, 아니면.. 한가람 대신 한영오빨 팼는지 알 수는 없지만 말야." 윤서의 손 끝이 미세하게 까닥인다. 문가에 모여있던 지니와 효선, 리아는 윤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지 못했고, 그건 자고있던 이연이와 부엌에서 한창 떡국을 대접에 옮겨담고 있던 연오와 아라도 마찬가지였다. 윤서의 머리맡에 있는 뇌파계에서 작은 진동이 일어났다. "..리아, 네가 정 그러면 나만 간다." "은지니!!" ".....아직 못잡았어, 김윤서. 그 계집애 이대로 하늘도 못잡고 그냥은 못가, 아니 안가. 근데 그 하늘 쥐고 있는 게 김한영이야. 싸워보기도 전에 김한영 뒈지면. 온전하게 싸울 수 없을만큼 망가지면.. ...김윤서가 좋아할 거 같애?? 그건 내가 못봐. 그니까 간다는 거야. 네가 싫어도, 내가 싫어도. 김윤서때문에 간다는 거야, 알겠냐??" 지니는 여전히 매섭게 올라간 눈썹을 내리지 않고있는 리아의 머리를 쓱.쓰다듬고 병실을 나갔다. ............... ........ ※ 하악.하악.. 버거운 숨소리가 가득한 창고 안. 입 안이 터져 진득하게 베어나오는 핏물을 뱉어내며 지니가 고개를 들었다. 힘들다. 힘들어 죽겠다. 김윤서가 없으니까 그렇게 재밌던 싸움도 이렇게 힘이 든다. 우습게도.. 몇십분 전. 성치도 않은 몸으로 열심히 주먹을 내지르던 금잔디가 한 깍두기가 휘두른 각목에 후려맞고서는 정신을 잃은채 구석에 쓰러져있었다. 정지운과 최강은 턱까지 차오른 숨을 채 넘기기도 전에 십여명의 깍두기들과 함께 자리에 드러누운지 오래고. 창고 밖에선 아직도 전국연합이 나머지 조무래기들과 한 판 붙고 있는지 시끄러운 소음이 끊이지 않고있다. 아. 정말 개새끼. "김한영, 그만 처 일어나지. 존나 저 씹쌔끼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 "듣던대로 입이 험하군." "형씨는 아가리 좀 닥쳐. 씨빠.이만한 조직을 갖다가 저 지랄을 해??.." 지니는 믿겨지지 않는다는 묘한 시선의 끝엔 피투성이가 된 한영이 있었다. 대한파의 보스, 김우승은 그런 지니를 흥미로운 얼굴로 지켜봤다. 미친개 은지니. 살아있는 전설 김한영과 일당백 김윤서에 비하면 그렇게 크지 않지만, 그 둘을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손에 꼽히는 싸움꾼이다. 마지막이 좋지않아 윤서와 한영은 이대로 놓아야하나 고민 중인 우승에게 지니는 딱 좋은 대상이였다. "대한파에 들어오겠나??" "하. 개지랄을 떨어요, 아주. 덥다. 짜증나고. 그니까 빨랑 덤벼, 개새끼야." "대한파에―." "....아저씨, 내 친구한테까지 손벌리면 죽여버린다고. 아주 똑똑하게 말했잖아, 그때. 근데 왜 어겨, 사람 승질나시게??..엉??.. 아저씨 행동 쫌 화난다야." 빙글빙글 웃고있는 입매. 즐겁게 휘어진 눈가. 펄럭이는 환자복 위에 물든 붉은 핏자국. 그리고...... 지니의 심장을 뜨겁게 달군 해맑은 목소리. 굴러나올만큼 커다래진 지니의 눈동자 안으로. 힘겹게 뜨여진 한영의 눈동자 안으로. ...........윤서가 들어왔다. "있잖아, 아저씨 행동이 하두 같잖아서 밖에있는 개새끼들 다 조져놨다???... 그때보다 아주 떨어져, 질이. 그래서 아주 쉬웠지롱. 하하하.전력보강 좀 해야될꺼야." 타박타박.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윤서의 맨발이 닿을때마다 퍼석한 소리가 난다. 지니는 불에 데인 것 같은 눈가를 손등으로 거칠게 쓸며 욕이 터져 나오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웃고 있었다. 병실 앞에서 항상 지니가 바래왔던 것 처럼 윤서는... 그렇게 웃고 있었다. 희미하게 풍겨오는 포르말린 냄새와, 아라의 떡국 냄새가 이게 꿈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주고 있다. 지니는 주먹을 악.쥐었다. 조금씩 다가오던 윤서가 지니와 우승에게서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멈춰섰다. 반가워 죽겠다는 얼굴로 지니를 향해 윤서가 손을 흔들었다. "하이,헬로우,봉주르. 그리고 안녕. 은지니, 오랜만." 5-97. 부활, 김윤서 .................. .......... ※ "후왁.후와.. 눈 뜨자마자 이지랄." "병신. 그니까 처 자라고." "시스터는 내가 지켜줄께. 나만 믿으라구." 미친개 은지니. 살아있는 전설 김한영. 그리고 일당백 김윤서. 세 사람은 등을 맞대고서 웃고 있었다. 서른명 가까이 되는 대한파에 둘러 쌓여있으면서도,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특히 윤서의 입가는 보는 사람의 기분마저 좋아질만큼 둥글게 휘어져있다. "하하하하. 띠바,저 아저씨들 쫀거봐. 우리 쫌 멋있는가봐??.." "미친년." "응!! 우리 시스터야 멋짐의 최고지." "오빠. 아작난 어깨뼈나 추슬리고나서 말해. 아주. 아주.. 팔불출이야, 정말." 조금은 붉게 물든 윤서의 뺨을 본 한영이 더없이 밝게 웃는다. 김씨 남매의 어이없는 말장난에 지니가 입술을 실룩였다. 평소같았으면 진탕 욕을 퍼부었겠지만, 지니는 가만히 입을 다무는 쪽을 선택했다. 죽다 살아난 김윤서도, 그 것때문에 모처럼 환하게 웃는 김한영도... 지니에겐 눈물나게 그리웠던 광경이였기때문이다. "지니야, 저 아저씨가 아까 너 뺨때기 휘갈겼지??저쪽에 머리 스크라치난 아저씬 니 허벅지 깐 아저씨고.. 히.다 패 줄 새끼들밖에 없네, 여긴. 그치???.." "병신." "있잖아, 지니야. 나 누워있는데 자꾸만 너 목소리가 들리는거야. 욘니 무서웠다, 그거??.. 특히. 오늘 본드칠한다는 거 보고, 나 시껍했잖아. 완전. 근데.. 그게 내 빛이됐어. 니 목소리가 자꾸 잘려는 김윤서를 깨우는 몽둥이가 됐고, 파리채가 됐고, 정리아 효자손이 됐다니깐??.. 그래서 달려왔지. 김윤서 빛한테, 그 빚갚으러." 한영이 윤서가 가르킨 두 명의 떡대들의 목을 잡고 한바탕 휘젓고 있을때, 지니의 등 뒤로 가까이 붙은 윤서가 씩. 웃었다. 느껴진다. 심장소리가. 숨소리가. 그리고... 눈물소리가. "...진짜. 보고싶었어. 염라대왕 턱주가리 차버리고, 저승사자 무릎 깔만큼, 그렇게 보고싶었다구 이 김윤선이! 너 은지니를!!!..하하하하하." 갑자기 허리를 꺾으면서까지 크게 웃어재낀 윤서가 달려오던 깍두기의 턱을 올려찼다. 방금 전까지 병원에서 오늘,내일 하던 중환자라고는 생각하기 힘겨운 발차기였다. 발놀림은 가벼웠으며. 실린 무게는 묵직했으며. 무엇보다 스텝이 경쾌했다. 김윤서 특유의. 그런. 지니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상한 일이다. 김윤서가 없을때는 그렇게 지겹고, 힘들었던 싸움이 지금은 미치도록 재미가 있다. 맞으면 아플 곳만 골라서 깔끔하게 주먹을 내뻗는 한영과 지니의 군더더기없는 동작과는 다르게, 윤서는 춤이라도 추는양. 유연하게 몸을 놀리며 마구잡이로 후려팼다. 손에 잡히는데로. 그냥 무작정 눈에 보이는데로. .................... ............. 피튀기는 싸움판에서 조금 떨어져 상황을 지켜보던 우승이 픽.웃었다. 그가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들이다. 단 한사람만 제외하고. 살아있는 전설은 결코 웃지 않는 냉혈안이라고 했지만, 김한영은 윤서가 나타난 뒤로 끈임없이 웃고 있었고. 미친개는 일단 싸움을 시작하면 사정거리에 들어온 모든 사람을 물어뜯는다고 했지만, 은지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윤서에게 단 한번도 주먹질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당백은 소문 그대로였다. 혼자서 백명은 족히 상대할 수 있는 실력하며, 즐겁게 휘어진 입매하며. 무엇보다 경쾌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경쾌함이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참..놓치기 아까운 인물이야. 김한영도, 김한영이지만 저 아가씨. 대단해." "형님, 점점 밀리고 있습니다. 그냥 이렇게 넋놓고.." "그만둬라. 싸움은 끝났다." 그의 오른팔이자, 대한파의 행동부장인 김지석이 우승에게 염려섞인 말을 끝내기도 전에 우승이 손을 들어 대한파와 세 사람의 싸움을 멋대로 끝내버렸다. 허탈한 표정으로 서있는 지니, 한영과 다르게 윤서는 뭐가 그렇게도 즐거운지 연방 싱글벙글한 얼굴로 우승을 쳐다봤다. "예전보다 실력이 늘었구나." "시간이 지났으니깐요. 하하하.그 대신에 아저씨네들 쫄다구는 형편없어졌는걸요??..동생편만 있나봐, 그것도 잔뜩." 시덥잖은 농담을 건네며 웃자 지니가 윤서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으왁. 밉지않은 괴성을 지르며 윤서가 지니에게 후려맞은 뒷통수를 문질렀다. "졌다, 아주 확실히. 고삐리들한테 진 적은 이번이 처음이군." "하하하.우린 그냥 고삐리가 아니잖아요. 그나저나.. 아저씨, 이 창고 지금 쬐끔만. 빌려주실 수 있어요??" "창고를?" "...여기선 하늘이 보이거든요. 흔치않아요, 이런 데. 아주 완벽한걸. 대여료는 아저씨네들 그냥 보내주기. 어때요?? 손해볼 장사는 아니잖아." 뻥 뚫린 창고의 천장을 가르키며 윤서가 하얀이를 드러내보였다. 우승은 어깨를 으쓱이며,쉽게 부하들을 데리고 창고를 나갔다. 금새 비어버린 창고 안에서 지니가 윤서가 보고있는 하늘을 흘끗.쳐다봤다. 불안하지만 믿는다. 넌... 김윤서니깐. 지니는 새끼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쓸며 윤서의 어깨를 툭.건드렸다. "이겨라. 그리고 잡아라. 김윤서의 하늘.." "땅콩보리감사." "....끝나고 은지니 상대할 수 있을만큼만 싸워. 또 침대에 처자지말고,임마." 마지막으로 윤서의 머리를 부비적거리며 지니가 창고를 나갔다. 상황을 눈치챈 한영이 조금은 힘든 미소를 지으며 윤서를 쳐다봤다. 사랑스러운 그의 동생은 기뻐보였다. 감춰진 그의 본능을 이끌어낼만큼. "..만나서 반갑습니다, 전국짱님??.." "예. 만나서 반갑습니다, 일당백님." "하하하하. 역시 눈치코치야. 그럼 바로 들어가자구. 온 몸에 있는 세포 하나하나가 아우성을 쳐. 제발 움직여달라고." 윤서는 눈을 찡긋이는 동시에 한영에게 달려갔다. 대게 한영이 싸워왔던 지금까지의 사람들은 일정한 패턴이 있었다. 맨 처음에 발차기를 날린다거나, 말 거는 척을 하며 기습을 노린다거나. 하지만 윤서에게는 그런 게 없었다. 그냥 기분 내키는 대로 주먹을 뻗고, 발을 휘두르며,이마로 들이받았다. 오빠로써 그건 굉장히 바람직한 모습이였지만. 싸움을 하는 상대방으로써는 굉장히 피곤한 일이다. 예측불가. 그 건 9:0으로 지던 경기를 9:10으로 만들어버리는 대단히 매력적인 단어이기때문에. 복부로 곧장 날아오는 윤서의 주먹을 가까스로 피한 한영이 팔꿈치를 휘둘렀다. 빠각.팔꿈치와 팔꿈치가 맞부딫쳤다. 빙긋.윤서의 입가가 둥글게 휘어진다. "역시 전국짱은 달라도,심하게 다르단말야. 난 오늘 아침까지 침대에서 고이 잤던 몸이고, 오빤 오늘 아침까지 신나게 두들겨 맞았던 몸이니깐 서로 쌤쌤. 그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시작하는 거. 오키바리??...." .......... 윤서의 악쥔 주먹이 한영의 턱을 올려쳤다. 흠 잡을 데 없이 완벽한 레프트 어퍼컷. 한영은 턱에서부터 퍼져오는 묵직한 통증을 누르며 비어있는 윤서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아직 완치되지 않은 갈비뼈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다시 으스러졌지만, 윤서는 오히려 즐겁다는 듯이 히죽.웃었다. 전설이다. 지금의 한영은 분명 전설이였다. 2년 전의 김윤서의 오빠,김한영이 아니라. 전국의 하늘을 쥐고있는 살아있는 전설로써의 주먹! "드디어.드디어드디어드디어!!!" "엉??..일당백, 왜 그래??.." 윤서의 눈이 둥글게 휘어진다. 시스터가 아닌 일당백으로 윤서를 불렀다는 건.적어도 지금 이순간만큼은 오빠이기를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적당히 봐주고, 넘어가는 거 없이 진지한 싸움을 하겠다는.한영의 눈물서린 각오. 이제서야 목숨을 걸만한 가치가 생겼다. 옛날처럼 한영이 오빠 운운하며 제대로된 싸움을 피했다면, 걸레짝만큼이나 의미없을 일이 이제서야 목숨을 걸고 싸울 가치가 생긴 것이다. 흥분된 얼굴로 주먹을 쥐었다,폈다 하는 윤서를 보며 한영이 씩.웃었다. "그렇게 좋아하진 마. 죽을지도 모르거든,너. 전설은 강해. 일당백만큼이나.. 그래도 네가 원한다면 난 끝까지 갈 각오가 되있다. 왜냐면 넌... 왠만큼 싸움질하는 새끼들이라면 도저히 지나치지 못하는 주먹이거든." "하하하하. 절대 지지않아, 난. 내 목숨을 걸고. 내 세상과,전부를 걸고 하는 싸움에서만큼은 저승사자도 못말릴 천하무적이니깐." 부웅. 땅을 차고 허공으로 뛰어오른 윤서가 한영을 향해 오른발을 휘둘렀다. 왼쪽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오는 윤서의 발목을 가까스로 잡아챈 한영이 발목을 잡고있는 손의 반대편 팔꿈치로 윤서의 복숭아뼈를 내리찍었다. 뿌각.경쾌한 뼛소리를 내는 다리를 보며 윤서가 픽.웃었다. 목숨까지 걸었는데,이까짓 다리뼈가 대수랴. 윤서는 아파하는 대신 한영에게 붙잡힌 다리에 힘을 주고, 다시 한번 몸을 띄웠다. 윤서의 왼쪽 무릎팍은 정확하게 한영의 관자놀이를 가격한 뒤, 미끄러지듯이 한영의 목을 감쌌다. 아래로 기울어지는 몸을 지탱하기 위해 손으로 바닥을 짚은 윤서가 갑자기허리를 비틀었다. 쿠왕.녹슨 드럼통과 함께 한영이 바닥을 구른다. 목을 조이는 윤서의 다리때문에 숨쉬기가 곤란했던지,한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턱.한영은 양 손으로 목에 감겨진 윤서의 다리를 잡고 힘을 줬다. 엄청난 악력이였다. 윤서는 옅은 신음소릴 지르며 다리를 풀었다. 급작스럽게 들어오는 숨을 고르는 동안 자리에서 일어선 윤서가 쉴 틈도 주지않고 몰아쳤다. "후왁.후왁..이정도로 쓰러지면 그동안의 시간이 아깝지. 안그래???...그만 구라까고 일어나,전설." "하아. 역시 일당백이야. 눈치는 백점만점이라니깐?.." 방금 전. 윤서에게 얻어맞은 코뼈가 주저앉았는지 비린내가 얼굴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한영은 빠르게 날아오는 윤서의 주먹을 피해 코 밑을 닦아냈다. 예상대로 엄청난 양의 피가 한영의 손등에 묻어났다. 제길. 기분 좋은 욕설을 지껄이며 한영이 굽혀진 허리를 폈다. 그의 주변에 구겨진 드럼통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한영의 입가가 휘어진건 그때였다. 투캉.발 끝으로 드럼통을 차올린 한영은 전직 축구선수답게 펠레의 오버헤드킥을 완벽하게 재현해냈다. 등이 바닥에 닿는 동시에 윤서의 앞으로 굴러간 한영이 순간 멈칫했다. 언제나 들어맞던 그의 예상이 보기좋게 빗나갔다. 생전 처음 당해보는 낯선 경험에 한영의 입술 사이로 허탈한 숨이 비져나온다. .....보통 사람이였다면 허리를 숙여 피했을 드럼통을 윤서는 과감히 정면으로 받아낸 것이다. 발도 아닌 주먹으로. "정말 골때리네. 하." 중심이 낮아진 윤서의 안면을 노렸던 한영이 아쉬운 입맛을 다시고 있을때. 윤서의 주먹을 맞고 퉁겨져나온 드럼통이 한영을 덮쳤다. 질수야 없지. 누운 상태에서 뻗은 주먹으로 또 한번 드럼통을 튕겨낸 한영이 몸을 일으켰다. 윤서는 여전히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대단해. 정말." "나야말로. 굿이야,전설. 과연 하늘을 가질만해." "하하. 칭찬 고맙게 받아들이지." "엉.칭찬 고맙게 받아들이구, 이만 하늘을 내놔라 악당아!!" 짖궂게 웃으며 윤서가 한영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곧은 주먹이였다. 눈속임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은 깔끔할만큼 곧은 주먹. 한영이 피해야겠다고 느낀 그 순간. 쥐어진 주먹 중에서 다른 손가락과 달리 조금 튀어나온 윤서의 가운데 손가락이 한영의 인중을 찔렀다. 입술이 터졌다. 게다가 앞니 두 개는 부러졌는지 뭉툭한 조각이 되어 한영의 입 안을 맴돌았다. 한영은 부러진 이를 내뱉고 바로 윤서에게 달려들었다. 윤서의 허리통을 감싸안은 한영은 그대로 달려가 단단한 시멘트 벽 위로 윤서의 등을 내리꽂았다. 벽 위로 솟아나있던 뾰족한 요철에 찔린 피부거죽에서 금새 피가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아윽.윤서가 처음으로 인상을 구겼다. 도저히 웃어넘길만한 충격이 아니였다. 윤서는 가빠져오는 숨을 가다듬으며 왼손을 번쩍 처들었다. 콰직.윤서의 팔꿈치가 한영의 날개뼈를 힘껏 찍었다. 윤서못지 않은 고통에 한영의 얼굴에도 구겨짐이 가득했다. 윤서는 최대한의 힘을 끌어몰아 자신의 허리를 안고있느라 아래로 떨구어진 한영의 안면을 올려찍었다. 사람의 얼굴은 약하다. 아무리 단련해도 결코 단단해지지 않는.유일한 곳이 바로 사람의 얼굴이였다. 그런데 한영은 벌써 그 곳을 두 번이나 얻어맞은 상태였다. 주먹의 일인자라고 불리는 금잔디마저도 이기지 못했던 김윤서의 주먹에. 드럼통을 맨손으로 튕겨낼 수 있는 김윤서의 주먹에. .......... 윤서의 허리를 감싸고있던 한영의 손이 힘없이 풀린다. "후와.. 안타까워마. 마징가 제트,아니 태권 브이가 왔더라도 세번째는 이겨낼 수 없었을 꺼니깐. 후하.하하..씨발.. 힘드네.." 비오듯이 흐르는 땀방울을 닦아낸 윤서가 한숨 돌리고 있을때. 귀신같이 일어선 한영이 주먹을 뻗었다. 마지막 일격. 윤서의 입꼬리가 보기좋게 휘어졌다. 콰득. 윤서의 주먹과. 한영의 주먹이 만났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한 치의 틈도 없이 맞물려진 두 사람의 주먹 위로 눈부시게 햐얀 하늘이 쏟아져내린다. 시간이 흐른다. 잔인한 소나기가 퍼붓던 그 날 이후,죽은듯이 멈춰져있던 두 사람의 시간이.. 묵직함을 지고 돌아가기 시작한다. 드디어. .......한영의 눈꼬리를 비집고 나온 눈물방울이 매끈한 뺨을 지나, 날카로운 턱에 맺혔다. 툭.눈물방울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떨어지는 동시에 한영이 윤서의 위로 쓰러진다. 쿠당.쾌쾌한 먼지바람과 함께 바닥에 드러누운 윤서의 눈동자 가득 하늘이 담겨졌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한영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며 윤서가 웃었다. 텅 비어있던. 눈물이 날만큼 가여웠던 소녀의 얼굴에 비로소. 진짜 웃음이 드리워진다. 살갗이 벗겨져 피가 흥건한 주먹이 꽉.쥐어진다. "....잡았다. 하늘....." 5-98. 하늘을 손 안에 .................... .......... ... 길을 가던 사람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개중엔 호들갑을 떨며 119로 전화를 거는 아가씨도 있었고,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는 중년 아줌마도 있었다.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플래쉬를 터트리는 여학생들 사이에 존경의 눈빛을 보내는 남학생들도 간간히 보였다. 참을 수 없다. "씨발.피칠한 년 처음봐?!!!!..눈깔 돌리고 꺼져, 씹쌔들아." 용케도 참았다 싶다. 당장 달려가 멱살을 뒤흔들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지니가 거칠게 소리치자, 주변에 몰려있던 사람들이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한채. 주춤주춤, 걸음을 뗀다. 하우. 성난 숨을 토해낸 지니가 미간을 구겼다. 망할 계집애. 지니의 격해진 숨소리를 들었는지,등에 업혀있던 윤서가 히죽. 웃는다. 지니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어깨에 내려와있는 윤서의 앞머리를 노려봤다. "뭐가 좋아서?..정신 차렸으면 이만 내려와라." "아직 기절중 입니당." "지랄은." "하하하. 평소같았음 당장 엎어버렸을껀데,너. 김윤서 파워가 이정도라니. 대단한데?..은지니 조련사로 나 취직해도 되겠어, 아주." "까지마,병신아. 좋다고 처 웃기는.." 지니의 핀잔에도 윤서는 기분좋은 웃음소릴 내며 지니의 어깨에 피곤한 얼굴을 묻었다. 진득하게 베어나오는 피가 걸리적거린다. 지니는 어이가 없을정도로 가벼워진 윤서의 무게에 괜히 짜증이 치솟았다. 방금 전, 동물원 고릴라 구경하는 듯한 사람들의 시선보다 더. 땀방울이 들어가 따끔거리는 눈가를 쓸고 싶었지만,윤서를 업고있느라 그마저도 여의치 않다. 그 때, 잔뜩 까져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 윤서의 손등이 지니의 따가운 눈가를 쓸어준다. 픽. 지니의 입가에 미소가 걸린다. 푸근한. 그리운. 그보다 더 한. ............ 아주 어렸을 적에,윤서가 슈퍼맨 놀이를 한답시고 놀이터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다. 평소같았으면 공중제비를 돌아 멋지게 착지 했을텐데, 그날은 왠일인지 멍청이처럼 뚝.떨어져 다리가 그대로 아작이 났었다. 흉측하게 부어오른 윤서의 발목을 본 아라는 그 자리에 졸도했고, 연오와 리아는 사람을 불러온답시고 동네방네 뛰어다녀댔다. 이연이는 엉엉.울면서 윤서의 뒤에 앉아 추파춥스를 깨먹었고 그런 이연이를 달래며 효선이는 윤서의 상태를 걱정했다. 마치 남일인양. 멀뚱히 있던 윤서가 너무 놀라 굳어있는 지니에게 손을 내민건 그때였다. '업어주라.' '..안아퍼??' '엉. 너가 나 업구서 병원에 가주면 안아퍼.' '바보. 가다가 너 죽으면?' 말은 그렇게 해도 지니의 등은 벌써 윤서의 앞에 내밀어져 있었다. ........... 처음으로 칠공주 모두가 운 날이였다. 남자애하고 싸워 코피가 터졌어도 안울던 지니도. 우는 애들보고 겁쟁이라며 놀려대던 연오도. 언제나 방싯방싯.웃던 이연이도. 가장 어른스러웠던 효선이도. 태어나 한 번도 운적이 없다던 리아도. 평소에 울음이 많았던 아라도. 수술실로 들어가는 윤서를 보며 목놓아 울던 날이였다.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운적이 없는데.. 처음이다. 지니는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견디지 못하고 눈을 꽉. 감았다. 금방이라도 죽어버릴 것 같다. 이젠 하늘 잡았다고, 미련 없다고 훌훌.날아갈 것 같다. 안되는데.. 아직 안되는데.. "....내가 너흴 두고 가긴 어딜가냐,임마." '내가 너흴 두고 가긴 어딜가냐,임마. 이제부터 김윤서 목숨은 달랑달랑,은지니한테 달렸어. 그니까 열심히 달리라구. 김윤서 죽기 전에 병원까지! 으쌰으쌰,하니처럼! 아자! 은지니 화이팅!!' 윤서의 미치도록 눈물겨운 목소리가 지니의 귓가를 울린다. 아랫입술에 깊이 박혀버린 이 사이로 빨간 핏방울이 맺혔다. 지니는 울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눈을 감고. 절대.. 울지 않는다. 등 뒤로 고스란히 느껴지는 지니의 떨림에 윤서는 흠뻑 젖은 얼굴로 웃었다. 죽지 못해 살았던 인생처럼, 울지 못해 웃었다. 자신의 눈물로 더 아파하고,더 슬퍼할 칠공주를 생각해서.. 윤서는 그렇게 웃었다. ................... ....... ※일당고등학교 얕은 잠에 빠져있던 윤서가 더이상의 흔들림이 느껴지지 않자, 게슴츠레 눈을 떠 지니의 등에서 내려섰다. 윤서는 안개가 가득 끼어있는 눈을 비비며 생전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고개를 까닥였다. "후암.. 전학갔냐,너??.." "꺄악!!!!!!윤서야,윤서야. 윤서야아!!!!!!!" 우렁찬 고함소리. 윤서는 밉지않게 인상을 찡그리며 양 팔을 벌렸다. 물이 예쁘게 빠진 노란색 교복을 입고,이연이 폴짝거리며 뛰어와 윤서의 품 안에 안겼다. 풀썩.이연이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운동장에 넘어진 윤서가 갈비뼈를 움켜쥐고 실실.웃음을 흘린다. "아주. 죽일라고 작정했지??..." "히히히.이정도로 죽을 일당백이 아니지!!" "옳은 말씀. 그래도 찬데 오래 누워있음 안되니까, 일어나." 머리색보다는 조금 어두운 주황색 교복을 입고있는 연오가 손을 내밀었다. 어깨를 으쓱이며 연오의 손을 잡고 일어선 윤서가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탈탈.털어냈다. "그나저나 왠 학교??.." "...우리 학교야." "엉??..너 학교차렸냐, 정리아? 이야. 출세했네." "정리아꺼가 아니라 우리꺼. 말 제대로 못알아 처먹네, 김윤서?.." 바다를 통째로 옮겨다 놓은 것 같은 시원한 색깔의 교복을 입은 리아가 윤서의 이마를 퉁기며 혀를 찼다. 보기만 해도 눕고싶어지는 잔디색 교복을 입은 효선이와,짙은 남색 교복의 아라가 그 모습을 보며 작은 웃음을 터트린다. 이제보니.. 갑자기 이마를 딱.친 윤서가 부랴부랴 학교 안으로 뛰어 들어간다. 갑작스러운 윤서의 행동에 의아해하기도 잠시. 1층 맨 끝자락에 있는 교장실 창문이 열리더니.곧이어 보라색 학교 깃발을 슈퍼맨처럼 어깨에 두른 윤서가 폭. 튀어나왔다. "...하여간 골때린다, 김윤서." 꼭 그 때로 돌아간 것만 같다. 아라는 결국 그 자리에 주저앉고야 말았다. 참을 수 없는 슬픔이,그리고 기쁨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믿겨지지 않는다. 저렇게 밝게 웃는 아이가... 어떻게.. "..근데 진짜 정리아,너가 세웠어 이거??..띠바.학교 세울라면 돈 많이 깨먹는다매?..그 돈으로 수이연 바나나 공장이나 차려주지,그랬냐." "하여튼 생각하는 거 하고는.. 이번에 대한그룹에서 인수한 학교야. 이번 세계올림피아드에서 죽이는 기록 내면 우리 달라고 했었는데,너도 알잖아? 최효선 머리가 보통 머리냐." "..학교는 갑자기 어디다 쓰게??.." 이연이와 장난을 주고받던 윤서가 물었다. 세계올림피아드에서 죽이는 기록을 냈다던 효선이 안경을 추켜올리며 예쁘게 웃었다. "....다같이 다녀보게, 학교. 우리 초등학교 이후로는 같은 학교 다닌 적 한번도 없었잖아." "잉??.." "너 퇴원하면 다같이 다닐꺼야! 교복도 우리가 만들었다?? 일곱색깔이야!!.." 그 자리에 빙그르르.돌며 이연이 외쳤다. 우리 학교. 윤서는 새삼 달라진 시선으로 학교를 돌아봤다. 모처럼 편안해보이는 윤서의 옆모습에 이연인 윤서가 두르고 있는 보라색 깃발의 끝자락을 움켜쥐었다. 응. 윤서야, 우리 학교야. 칠공주 학교야. 그니까 너 꼭 건강해져서, 학교 같이 다녀야 돼. 우리 칠공주 색깔대로 딱 일곱개로 만들었으니깐, 너 꼭 다시 건강해져서 다녀야 돼. 너가 그랬잖아. 칠공주는 영원히 칠공주라구. 육공주는 폼 안난다구.. 그니깐. 그니깐 우리 같이 다니는 거야. 일곱명이서 옛날처럼 손 꼭 붙잡고. 그렇게.. 다녀야돼. 알겠지? 가늘게 들썩이는 이연의 어깨를 안으며,윤서가 리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럼 칠공주 고등학교하지,왜 일당고냐??..멋없게시리." "......이 학교의 전설은 네가 될 꺼니깐." "엉??" "춥다! 이연아, 요 앞에 식당 예약해놨지??빨리가서 밥이나 먹자." 리아가 멋쩍은 듯,효선이의 팔짱을 끼고 먼저 학교를 나선다. 얼레리꼴레리.신이 난 목소리로 그런 리아를 놀리며 이연이 뒤따라 가고, 아직도 울고있는 아라를 달래며 연오가 걸음을 옮겼다. 모자를 푹.눌러쓴 지니가 빨리 오라며,앞장서 걸어가고.. 어쩌면 다시 보지못할 학교의 풍경을 다시 한번,심장 깊숙히 새긴 윤서가 몸을 돌렸다. "아.." 그 순간. 으스러질듯한 고통을 느끼며 윤서가 어깨를 꽉.눌러잡았다. 한쪽 다리에 힘이 풀린 윤서가 털썩.힘없이 주저앉는다. 뿌옇게 일어난 흙먼지가 윤서의 시야를 까맣게 가린다. 참아왔는데..이젠 한계였나보다. 숨이 가빠져온다. 폐를 찌르는 통증이 이젠 참을 수 없을만큼 윤서의 목을 조여왔다. ......기겁한 얼굴로 달려오는 칠공주의 모습이 흐릿하다. 그럼에도 윤서는 웃었다. 마지막까지.. 볼 수 있는 얼굴이 너희여서... ......고맙다. 윤서의 고개가 아래로 떨구어지고.윤서가 쓰러진 자리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다. ......................... ................. ............ ※ 아.아. 마이크 테스트 중. 아에이오우?.. 하하하.. 잘 들리나, 이거. 꼬맹이한테 부탁한 거라서 쫌 거지같애도 이해바람. 으악. 곽아, 너한테 그런 거 아니다? 흠흠. 할튼 분위기 잡고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보낸이와 받을 사람. 김윤서가 너희들에게. 아. 진짜, 이런거 왕닭살이다. 그래도 뭐.. 마지막이니깐. 하하하. 다 알겠지만 나는 김윤서라고, 이름만 들어도 날아가는 독수리가 엄마찾아 삼만리하는 천하의 일당백이지. 으악. 은지니, 너 지금 테이프 부술라고했지??.. 그러지 마라. 피같은 돈 깨서 겨우 산거얌마. 그럼 다시 분위기 잡고!흠흠. 먼저 고맙다는 인사 하고 싶다. 죽지 못해 살던 개같은 김윤서 인생에 빛이 되어줘서. 단 하나뿐인 세상이 되어줘서.. 정말 고맙다! ...하늘은 날 버티게 했지만, 너희들은 날 살게 해줬다. 그니까.. 그 점, 정말 미치게 감사하다구!! .... 알지??.. 나한테 너희는 부모님이고, 친구고, 또 단 하나뿐인 심장이였다는 거. 부모님 놔두고 먼저 죽는 건 불효라던데.. 미안해서 어쩌냐. 그래도.. 삐까뻔쩍한 하늘,유산으로 남겨두고 가니까 너무 미워마라. 특히 은지니!!장례식장 와서 존나 깽판치고 가기만해?..아주 괴롭혀줄테다. 음. 할 말 존나 많았는데.. 막상 이러고 분위기 잡으니까 쫌 그러네?? 하하하. 하... 미안하다. 죽을만큼.. 진짜 미안하다. 김윤서때문에 불량하다, 문제아다,싹수가 노랗다.어쩌구저쩌구 씨발씨발,그런 소리 듣게 한 거. 나 아녔음 벌써 하버드에서 열공중이였을 거. 어른들하고 사이 그지같아진 거. 다.. 미안하다. ....후회뿐인 김윤서 인생에서 그나마 후회없던 짓이 뭐였는 줄 아냐?? 너희를 만난 것. 너희를 만나고 살아갈 수 있게 된 것. ......그니까 주연오,죄책감 갖고서 살았으면 이제 그거 다 날려버리라구. 난 오히려 너한테 고맙다니깐??... 주먹질이라도 안했음 벌써 꼴까닥.했을껄.. 미안하고. 그만큼 고맙고.. 고마운만큼 미안하고.. ....... 나 가는 거 아니다. 먼저 가는 거,절대 아녀. 은지니.주연오, 수이연. 최효선.정리아. 황아라 그리고 김윤서. 언제까지고 함께일꺼다. 이건 진심. 누가 뭐래도 우린 칠공주고,그러니깐... 울지마. 절대 울지마. 슬플때 우는 건 삼류고, 슬플때 참는 건 이류고 슬플때 웃는 건 일류. 오케바리??..근데 이 말 쫌 웃기다. 하하하.이 말대로 하면 우리 중에 제일로 착한 아라는 삼류고, 똑똑쟁이 효선이하고 리아는 이류고 나머지는 죄다 일류?? 에이. 그건 아니다. 솔직히 은지니는 하류인생 찍어도 될만큼.. 아!띠바. 너 녹음기 지금 후려쳤지,은지니??... 치지 말래니깐.. 어?? 이거 벌써 다 감긴거야?... 안돼!! 아직 라스트도 못남겼는데!!!... 한곽,이시끼 좀 긴걸로 사오래니깐. 아후.. 아까비. ............. ......... ...................... 살려주세요. 이렇게 안빌어요,난. 미련없어. 육공주 될 꺼 아니니깐.. 우리 평생 칠공주일꺼니깐.. 나 안울어. 그러니깐 하늘님.. 그 애들. 내 몫까지 행복하게 해줘요. 김윤서때문에 힘들었던 거,다 하늘님이 보상해주라구. 일당백 데리고 가면서 그정도는 해줘야,하늘님이지.그치??.. 그리구 염치없는데.. 우권이하고 가람이.그리고 정지운까지.. 그 애들 기억에 김윤서 좀 없애주라.엉?? 김윤서란 사람 깨끗하게 비워줘. 눈물겨운 사랑,평생 김윤서 혼자 지고 있을테니깐... 나때문에 인생 가여워진 그 애들. 훠배 좋은 여자 만나서, 훠배 이쁜 사랑하게.. 지워주라. 꼭. 티끌도 안남게.. 몽땅.싸그리.. 5-99(완결). 안녕.안녕. 그리고 안녕 ............ ........ ※ 면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중환자실 앞. 그 곳은 그야말로 개판이였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한영과,가람. 그리고 권을 비롯한 전국연합과 잔디와 지운을 앞세운 인천연합도 모자라 부산에서 올라온 제화예고 학생들로 발 디딜틈도 없이 붐볐다. 경비원까지 달려와 수습해보려 했지만 한창 혈기왕성한 그들을 통제하기엔 역부족이였다.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윤서의 이름과, 일당백이라는 별명. 줄곧 같은 자리에 서서 중환자실의 녹색문만 바라보던 지니가 주먹을 말아쥐며 고개를 숙였다. 굳은 지니의 어깨가 가늘게 떨린다. 어렸을 적부터 지니의 등을 봐왔던 연오가 힘없이 웃으며 그런 지니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괜찮아.괜찮을 꺼야. ...언제나 그랬잖아. 윤서는 우리 놀리는 맛에 사는 애니깐..이번에도 그랬으니깐..." "....자신이 없다. 그 계집애....이젠 정말 자신이 없다, 연오야." ..... 연오는 더이상 아무런 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처음 병원에 왔을때. 그 냉정하다던 리아조차 이성을 잃고 석재의 멱살을 뒤흔들었다. 살려내라며. 처절하게 악을 쓰고,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천하의 정리아가.. 이번만큼은 절대 안된다며, 이를 악물고 버티던 아라는 결국 수술을 마치고 나온 의사에게서 들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된다는 소리에 혼절해 응급실에 실려가있는 상태고, 보호자격으로 따라간 효선인 윤서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그 상황에서도 두꺼운 의학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연은 넋이 나간 얼굴로 복도 한켠에 마련된 플라스틱 의자에 누워,들고있던 추파춥스 사탕 머리를 퉁기며 불규칙적인 마찰음을 만들어내고 있다. 모두다. 제정신이 아니였다. 윤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과, 그 것이 곧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들은 제정신이길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미치지 않고서는 지금 이 상황을..... 버틸 수가 없다. "...니가 이러면 어쩌자는 거야. 정신차려, 은지니. 우리 시스터 목숨 쥐고 있는 애들이 이렇게 한심하면..나 용서가 안된다." "..닥쳐,씨발놈아." ..... 한영이 픽.웃었다. 정신이 나가있던 이연이조차 까르르.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지니의 어깨에서 얼굴을 뗀 연오는 지독히도 싸늘한 얼굴로 한영을 노려보고 있었다. "미친개 흉내내지마, 공주님. 안어울려." "어울리라고 낸 거 아니거든요??..니 쫄따구들이나 데리고 꺼지세요." "강안이랑 싸웠다더니.. 심경의 변환가?" "화강안?하." 한영의 말에 갑자기 헛웃음을 내뱉은 연오가 별안간 표정을 싹.굳히더니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바닥에 내팽개친다. 예쁘장한 빛깔을 띄고있는 핸드폰 고리가 짤랑거리며 반짝였다. 콰직.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구두굽으로 힘껏 핸드폰을 으깬 연오가 한영을 노려봤다. 자신의 가슴께를 가르키며 연오가 입을 연다. "...나한테 화강안은 이거지만,윤서는 내 심장이예요. 나한테 그 개새낀 고작 이정도지만, 윤서는 지금 날 서있게 해주는 유일한 힘이고,이유라구요. 리아가 맨날 그러죠, 오빠 이제와서 지랄말고 꺼지라고. 오빠한텐 자격없다고. .....나도 마찬가지예요. 우리한테 이 핸드폰만도 못한 오빠가 여기까지와서 감놔라,배추놔라 하는 거 거슬려요. 짜증나고, 열받아요." "너 말이 심하다." "난요!!! 칼이라도 있으면 당장 죽여버리고 싶어,오빠. 그 기분을 어떤 기분인지 알기나 해요??.. 아프죠, 지금?..아퍼서 죽을 거 같죠?...하지만 윤서가 더 아파요. 예전에도 그랬고,지금도 그래요. 오빠보다. 훨씬 더, 훨씬 더 많이 아파요 윤서는. 그래서 난 오빠가 싫어. 밉고, 증오해." 윤서와의 싸움 뒤로 상처도 제대로 치료 못하고 달려왔다는 건 안다. 윤서를 걱정하고,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도 진심이라는 걸 안다. 하지만.. 연오는 한영을 용서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윤서를 비참하게 하는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윤서를 가엾게 만드는 사람.. ".....오빠 병실에 윤서네,아니 오빠네 부모님 오셔서 기다리고 계시다고 들었어요. 오빠 자린 거기예요. 윤서 옆은 우리 자리고,오빠 옆은 오빠네 부모님 자리예요. 아시겠어요?... ...윤서 다시 눈 떳을때.오빠 얼굴 안보였음 좋겠어,난." 한영에게서 매몰차게 돌아선 연오는 지니의 손을 꽉.붙잡았다. 하지만 그런 연오의 어깨를 돌려세운 건,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이 창백한 안색의 가람이였다. "연오야.." "..너도 싫어,개새끼." ".....알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 지 다 아는데...자격 있다. 한영이형, 자격있어. 이 자리에 있을, 윤서 마지막 지켜볼... 자격." "씨발!" "그쯤해둬." 석재와 격하게 한바탕 했나보다. 리아의 이마에 하얀 거즈를 덜렁거리고 있다. 얼마나 많은 말이 오갔을까. 연오는 리아의 지친 얼굴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가람에게서 몸을 뗐다. 중환자실 앞으로 걸어가는 동안 리아는 한영에게 단 한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인양, 지독히도 철저한 무시였다. 다물어진 리아의 입매가 서늘해보였다. "..안녕하세요?.." 어두운 침묵이 얼마쯤 지속됐을까. 환자복을 입은 곽이 주춤거리며 그들의 시선 안으로 들어왔다. 지니와 리아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중환자실 문만 바라봤고, 보다못한 연오가 빙그레.웃으며 곽이에게 다가갔다. "오랜만이네. 치료는 잘 하고있어?.." "....사부님이 주랬어요." "응?" "...곽이 사부님이 이렇게 되면...누나들한테 전해주라고...." 곽이의 하얀 얼굴을 따라 투명한 물방울이 또르르.흘러내린다. 사부님.사부님. 그 세글자만 반복하던 곽이 입술을 꾹.다물고 연오에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게 뭔데.하며 봉투 안의 내용물을 확인하던 연오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뭉그러진다. 파닥.연오의 손을 지나 바닥 아래로 떨어진 봉투가 열리며 수백장의 사진들이 펼쳐졌다. "언...제부터야. 이거 언제부터...찍었니?.." ".....요즘껀 곽이가, 옛날껀 다 사부님이 찍은 거예요." 시선 안으로 들어온 형광등 빛이 눈부셨던지, 연오가 파르르. 떨며 눈을 감았다. 언제부터니... 언제부터였어, 너.. 언제부터 너... 이랬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이연이 다가와 사진을 주워든다. 말간 이연의 눈가에 쓰린 물기가 차오른다. "...윤서가 없어....연오야..윤서가 없어. 우린 칠공준데... 윤서가 없어.윤서가 없다구!!!!!" 사진을 구겨쥔 이연이 소리쳤다. 쇳소리가 섞여 불분명한 음을 내며 허공을 울린 이연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구어진다. 이연은 오열했다. 도저히 울지 않고선 버틸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숨이 막혀서.. 믿을 수 없는 현실이 자꾸만 커다래져서... 언제나 웃던 윤서의 얼굴이 흐릿해져서.. 이연은 참을 수 없었다. 이연의 처절한 모습에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던 아이들의 얼굴이 숙연함마저 감돌기 시작했다. 갈라진 연오의 입술을 비집고 한숨같은 중얼거림이 터져나온다. ".....알고 있었을까. 걘 자기 주먹이 망가져가고 있다는 걸, 도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던걸까??..." "윤서 깨어나면..그거부터 물어봐야 되겠다..그치??.." 효선의 부축을 받으며 나타난 아라가 베시시.웃으며 말했다. "윤서가 빨리 일어나야 될텐데..물어볼 게 산처럼 쌓였는걸. 그 산이 바다가 되고, 하늘이 되기 전에.. 윤서 빨리 깨어나야 할텐데..." 아라의 젖은 목소리가 칠공주의 가슴 속이 깊이 스며든다. 천천히. 그리고 아프게.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는사진들 뒷면엔 한결같은 글씨로 '제일 좋은..' .........'6' .............................. ....................... ................. ...... ※. 삑.삑.삑 소름끼치게 일정한 기계음. 그 속에 윤서가 누워있다. 파리한 안색이 죽은 시체처럼 고요하기만 하다. 중환자실 한 면에 넓게 나있는 유리창 너머로 윤서를 바라보는 가람의 시선이 슬퍼졌다. 새벽 4시. 어스름한 공기가 맴돈다. 간호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남은 여섯명의 칠공주가 서로에게 기댄체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그 옆으로 몸이 불편해보이는 한영과 뻣뻣하게 서있는 권이 보인다. 가람은 욱신거리는 심장의 통증을 느끼며 윤서의 실루엣을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저 애들을 두고 갈 사람이 아니란 거 나는 알아, 윤서야. 너는 꼭 일어날 거야. 언제가 걸리든 넌 꼭 일어날 거야. 그래서.. 예전처럼 밝게 웃을 거야. 그치?" 가람은 눈물이 터져나오려는 걸 꾹 참고 눈을 부릅떴다. 윤서의 모습을. 윤서의 얼굴을. 마지막까지 기억하고 싶었다. 죽는 순간까지 보이는 게 윤서였으면 좋겠다. ........ "너한테는 죽을때까지 저 애들이 전부겠지만, 나한텐 네가 전부였다. 태어날때부터 나한테 넌... 신이나 다름 없었으니깐." .....태어났을때 좋아했어요. 말이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안에 있는 윤서를 설명하려면 그렇게밖에 표현이 안되요. 내 시간은 윤서고, 그 끝도 윤서예요. 윤서한텐 처음부터 끝까지 그 애들이 전부겠지만, 나한테는 그런 윤서가 전부예요. 윤서가 웃을 수만 있다면, 그 쓰라린 상처 위에 더이상의 아픔이 얹어지지만 않으면 난 그걸로 족해요. 그게 김윤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한가람의 마음이예요.. 하늘님. 태어나서 매일 하늘님께 빌었는데, 염치없는 기도 하나만 더 할께요. 윤서 꼭 살게 해주세요. 윤서 꼭 웃게 해주세요. 한가람의 전부였던 김윤서.. 꼭 행복하게 해주세요... 그게 제 마지막 소원입니다. ................ 가람의 손에 쥐어진 종이가 힘없이 구겨진다. 입술을 꾹.깨문 가람이 윤서에게서 돌아섰다. 마지막 눈물 한줄기가 가람의 눈꼬리를 따라 흘러내린다. 그렇게 윤서에게서 벗어난 가람은 아직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권에게 다가갔다. "....윤서, 잘 부탁합니다." "..니가 안그래도 김윤서 내가 지켜." ".......옛날부터 잘 울지 않는 애예요. 아프면 아플 수록 웃거든요. 그리고 곁에 있는 사람을 위해서 자기 아픔같은 건 돌보지 않는 앱니다. 그러니까 그 쪽이 먼저 윤서 아픈 거 알아줘야 합니다. 누가 옆에서 챙겨주지 않으면 절대 먼저 아프다고 입 밖으로 소리내는 애 아니거든요. 한영이 형 용서했다고 해도 부모님까지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 물론 저 애들도 있지만 그 쪽도 나서서 윤서 부모님이 되주세요. 외롭기 때문에 외로운 걸 모르는 애니깐. 그리고 윤서.. 싸울때 말리기 보단 빨리 끝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한 번 싸우면 쉽게 멈추지 않거든요. 윤서... 끝까지 웃을 수 있게 옆에서 지켜봐주십시오." "너한테 그런 소리 들을 이유 없는데." 권의 도전적인 목소리에 가람이 쓰게 웃었다. "....윤서 심장에 살고 계신 분이니까요. 한가람이 끝까지 들어가지 못했던 그 자리에... 처음부터 끝까지 계실 분이니까 부탁드리는 겁니다." "하. 어디 떠날 새끼처럼 말한다, 너?" ".....나중에 눈뜨고, 모든 사실을 알게되면 윤서 분명히 많이 힘들어 할 겁니다. 이번엔 정말 죽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선우권씨가 옆에서 잡아줘야 합니다. 윤서가 어떤 마음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저 애들은 쉽게 윤서를 잡을 수 없으니깐.. 선우권씨가 독하게 마음 먹고 잡아주셔야 합니다." "너." "윤서는 칠공주밖에 필요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언젠가 나이 들고 그러면 결혼해서 든든한 남편이 되줄 사람이 필요할 겁니다. 나는 그 약속 못지키니까, 선우권씨가 대신 지켜주세요. 그래서 윤서, 다시는 혼자이게 하지 마십시오." 허탈한 웃음 소리가 권에게서 터져나온다. 어이없다는 얼굴로 가람을 쳐다보던 권의 시선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옅은 하늘빛. 윤서가 제일 좋아했던 하늘이 담긴 눈동자. 그 눈동자가 울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없어 울고 있었다. ".....이게 한가람의 사랑이라고. 김윤서를 사랑하는 한가람의 마음이라고...그러니까 꼭 건강하게 살아달라고... 전해주십시오. 마지막까지 아프게만 해서 미안하고도요." 권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가람은 복도를 벗어났다. 한동안 못이 박힌 듯, 그 자리에 서서 가람의 멀어지는 발소리를 듣고있던 권이 주먹을 움켜쥐고 소리쳤다. "너만 사랑하는 거 아니다 새끼야!!!!..너보다 늦었을진 몰라고 김윤서, 나도 사랑한다고!!!!! 씨발놈아!!!..김윤서!! 너보다 내가 훠배 많이 사랑한다고!!!!!!!!" "시끄러 씨발아!! 어디서 소리야?" 권의 고함소리에 잠이 깬 지니가 거칠게 소리쳤다. 하악.하악. 권이 숨을 몰아쉬며 분한 얼굴로 애꿎은 벽을 내리치고 있을 때. 조용히 눈을 뜬 리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람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뛰어갔다. 엘레베이터 앞. 가람의 손목을 낚아챈 리아가 눈을 꾹.감았다 뜬다. "미안해하지 않을거야. 나한테 그 계집애, 죽을만큼 소중하니깐. 내 목숨을 줄 수 있을만큼. 그만큼 소중한 계집애니깐... 절대 미안해 안해. 고마워하지도 않을 거야. 이게 윤서를 좋아하는 한가람의 마음이면, 알고서도 널 보내는 건 김윤서를 아끼는 정리아의 마음이야. ......그래도 고맙다." "..윤서한테 단 하나뿐인 세상이 되어줘서 고마워. 나도, 너희한테." "......연오. 많이 힘들어해, 아직까지도. 겉으로 내색은 않지만 가끔 악몽도 꿔. 그니까 연오...미워하지 마." "안 미워해. 윤서가 제일 좋아하는 친구를 내가 어떻게 미워해." 안타깝게 웃는 가람을 보며 리아가 잡고 있던 손을 놨다. 띵.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 안에 올라탄 가람이 원장실이 있는 꼭대기 버튼을 누른다. 스르르.다치는 엘레베이터 문 사이로 서로의 눈을 마주본다. 떠나는 사람은 웃고. 남겨진 사람은 운다. 그럼에도 리아는 잡지 않았다. 설령 이 일을 후회하며 평생을 산다해도, 지금의 일이 나중에 족쇄가 되어 그녀의 발목을 잡을지라도... 그 모든 걸 감수할만큼 그녀에게 윤서는 둘도없는 소중한 존재였으니까. .............. ........................... ..................... ............................ ....................... ※7개월 후, 인천 "야 너 그 소식 들었어? 일당백 말이야, 칠공주의." "아아. 어! 죽었다면서?" "야. 아냐, 무슨 태권V처럼 온 몸에 기계 박아놓고 아직까지 짱짱하게 산다더라." "에이. 아무리 일당백이 천하무적이라고 해도 그건 쫌 아니지 않냐?" "아니래니깐. 우리 삼촌이 일당백이 입원했던 병원에서 의사로 일하는데, 진짜래. 한 이틀동안 수술을 했다나? 그래서 지금 기계로 숨쉬고 있다잖아." "설마!" "아니야, 바보들아. 한가람이라고, 전국연합에 무지하게 잘생긴 오빠 있었잖아? 그 오빠가 곧 죽을 몸이였는데 일당백한테 자기 눈이던가, 장기던가. 하여튼 뭐 심어주고 가서 일당백이 살아난거래!" "아니래니깐!" 타이트하게 조여진 교복을 입고 세 명의 여학생이 쉴세없이 조잘거렸다. ......... 그렇게 인천에는 김한영을 이기고 2대 전국짱이 된 일당백에 대해 무성한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그 날 이후 감쪽같이 자취를 감춘 일당백과 칠공주때문에 진위를 확일할 겨를 도 없이 소문은 날개 돋힌 듯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 중에 가장 유력한 것은, 일당백이 죽어서 장례식을 치뤘는데 장례식에 참석한 인원이 800명에 가까울정도로 대인원이여서 장례식장에서 쫓겨나 결국 어느 이름 모를 강에 뿌려졌다는 것이였다. 게다가 참석한 800명에 가까운 인원이 모두 전국에서 난다,긴다하는 한주먹들이여서 곳곳에서 패싸움이 일어났다고도... 두번째로 유력한 것은 전국연합의 한가람이 일당백에게 장기를 기증하고 죽어서, 그 장기로 일당백이 살았다는 것이였는데. 이 얘기는 어떤 인터넷 소설 작가가 꾸며낸 러브 스토리라며 남자들 사이에선 무시되기 일쑤였다. ... 마지막은 정부의 비밀 프로젝트에 의해 태권V처럼 온 몸에 강철을 두르고, 기계에 의존해 지금 어디선가 악의 무리들과 싸우고 있다는 얘긴데.. 이건 초등학생이나, 유치원생들 사이에서나 유명한 얘기였다. 그렇게 일당백의 최후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는 세 명의 여학생 앞으로 왠 여자 하나가 성큼 다가왔다. 키는 여학생들의 어깨에 겨우 미칠만큼 작았고, 얼굴은 초등학생처럼 앳되보였으며 입에는 바나나맛 추파춥스를 입에 물고있었다. 초등학생이라고 보기엔 뭔가 미심쩍고, 그렇다고 또래라고 보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 여자의 등장에 여학생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어떤 시빠빠가 그지같은 소문을 낸다 했더니..너희였구낭♡" 말 끝에 달린 하트에서 애교가 가득 넘쳐 흘렀다. 바나나 걸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여학생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바나나 걸 뒤로 왠만한 남자들보다 훨씬 키가 큰 여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하늘 위로 뻗쳐있는 빨간색 머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였다. "내가 조용하니깐 이제 니가 지랄이냐? 빨리와, 씹쌔야. 정리아가 지랄하잖아." "정리아?" 빨간 머리에게서 나온 익숙한 이름에 여학생들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여학생들이 아직 정리아라는 이름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갑자기 두개의 머리통이 또 한 번 불쑥 튀어나왔다. "효선이도 쫌 화날라고 준비 중이더만? 빨리 와라. 오늘 뭐 일당고 어쩌고저쩌고 할 말이 많은가본데." "그, 그래. 얘들아.. 아이스크림 다 녹겠어." 머리색만큼이나 화려하게 생긴 여자와, 아이스크림 한 봉지를 힘겹게 들고 있는 굉장히 순해보이는 여자였다. 드디어 여학생 중 한명이 눈치를 깠다. 최고의 얼짱! 화려한 여자에게서 인터넷에 있는 팬까페만 해도 그 수가 어마어마한 얼짱, 주연오의 모습을 찾아낸 여학생이 기겁을 할 듯 숨을 들이키며 손가락질을 했다. 어디선가 나타난 손이 화려한 여자를 향하고 있는 여학생의 손가락을 살며시 접는다. "초면에 손가락질 하는 거 보니까 가정 교육이 형편없구만." "리아야, 말이 좀 심하다. 애들이나 데리고 빨리 가자." 잡고있던 여학생의 손가락에게서 손을 땐 파란 머리의 여자가 안경 쓴 여자의 한마디에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머지 두 여학생도 눈치를 깠다. 그러면 이 들이...방금까지 자신들이 얘기했던 칠공주?! 영광과 감격. 두려움과 공포를 동시에 표출해내며 바들바들. 떠는 여학생들 사이로 킥보드 하나가 슝.날아온다. "배고파!! 밥먹으러 가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보라색 머리. 천진난만한 웃음에 장난끼가 가득한 목소리. 으악. 결국 여학생들을 괴성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킥보드를 타고 나타난 여자가 눈을 껌벅인다. "배고프다는 소리가 그렇게 무서웠나?? 요즘 인천 애들, 통째로 다이어트 하는갑다." "미친년. 꼭 생각하는 게 지 수준에서 벗어나질 않아." "뭐? 은지니, 이 씹똥아. 말을 그따구로 하냐, 어떻게? 복수다!" 빨간 여자의 어깨를 힘껏. 깨문 그 여자는 깔깔깔.웃으며 쫓아오는 빨간 여자를 피해 킥보드의 바퀴를 열심히 굴렸다. "거기 서!!!!!!!" "서란다고 서는 붕신이 세상에 어딨냐!!" 경쾌하게 외치며 사람들로 북적이는 시내를 뛰어다니는 여자. ........... 여자의 하늘빛 눈동자에 웃음이 가득했다. 안녕. 안녕. 그리고 안녕. [모탈문∥] 100(에필로그). 문제아, 그들을 말한다. 그 마지막. 새로운 시작. 끝나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 2006년 5월 3일 전국이 술렁인다. 새로운 전설. 고독한 늑대. 광주의 아수라. 부산의 별. 11월의 피바람. 그 들이 한 자리에 모인 운명의 그 날. 비극의 톱니 바퀴는 천천히, 아무도 모르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 \.평택 경기북고 아수라장이 된 교실 안. 회색 교복을 입은 사내 하나가 거친 숨을 토해내며 앞에 있던 책상을 박살냈다. 사내의 발 아래에는 정신을 잃은 동급색 다섯명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 몰골이 보기 힘겨울정도로 처참했다. "씨발. 아. 진짜 좇같아서." 욕짓거리를 곱씹으며 한참을 그렇게 책상에 분풀이를 하던 사내는 교탁 뒤에 숨어 벌벌.떨고 있는 담임에게 소리쳤다. "저 조퇴합니다!" "어? 어어. 그래라!" 사내의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담임이란 작자는 목뼈가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인다. 사내의 가슴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흥분으로 들썩이고 있었다. 자기 자리에서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둘러맨 사내가 교실을 나가다, 무슨 마음에서인지 돌아서 교탁으로 걸어갔다. 겁에 질린 얼굴로 조금씩 가까워지는 제자를 보며 담임은 식은땀을 주르륵. 흘렸다. "...인생 그렇게 초라하게 살지 마십시오, 선.생.님!" 쾅. 마지막으로 교탁을 후려차며 사내가 교실을 나갔다.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담임. 그는 눈가에 어린 물기를 닦아내며 사내가 나간 문을 쳐다봤다. 무서운 녀석이다. 경기도 일대를 꽉 잡고 있는 녀석의 이름은 한신. 싸우는 모습이 어찌나 살벌한지, 붙은 별명이 고독한 늑대다. 고독한 늑대. 한 번 찍은 놈은 절대 놓치지 않고, 한 번 눈 밖에 난 놈은 절대 다시 들여놓지 않는다는 게 녀석의 철칙이다. 늑대의 유일한 친구로는 역시 경기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는 김대운과 조경철이 있는데, 그 셋이 어울리기만 하면 시내는 스산함마저 감돈다. 천하무적. 겁없는 이팔청춘. 그는 고독한 늑대, 한신이다. 학교를 나선 한신은 다니고 있는 도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팔뚝에 와닿는 느낌이 눅눅한게 아마 곧 비가 올 것같다. 구겨지려는 인상을 최대한 펴며 막 코너를 도는 한신의 가슴팍에 무언가 날아와 퍽.부딪친다. "아.씨발. 눈깔은 집에 두고 나왔냐, 꼬맹아?" 무슨 말을 하건 입만 열면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온다. 한신은 얼얼한 가슴팍을 문지르며 눈썹을 찡그렸다. 한신의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부딪친 그 꼬맹이가 아아. 하며 죄송하다고 허리를 숙였다. 꼬맹이의 긴 머리가 찰랑인다. "앞으로 잘 다녀라. 엉?" "아. 저기.. 경기북고에 한신. 맞으세요?" "..어쭈. 이 꼬맹이 봐라. 니가 날 어떻게 알아?" "아아. 글쿠나. 안녕하세요!" 보라색 긴 머리를 찰랑이며 또 한번 허리를 숙였던 꼬맹이가 내민 것은 한 장의 서류였다. 한신은 꼬맹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채 서류를 낚아챘다. [전학증명서] 서류의 맨 윗 부분에 써있는 굵은 글씨. 한신의 미간이 아까처럼 구겨진다. "내가 왜 전학따윌 가야돼지??" "고독한 늑대는 진정한 싸움꾼이니깐요!" "뭐?" "어차피 가는 거 이왕이면 폼나게 가시라고.. 아아. 아직 연락 못받으셨나보구나." "무슨 연락?" 아까부터 영문모를 소리만 늘어놓는 꼬맹이때문에 슬슬 짜증이 치솟으려는 찰나. 갑자기 입고 있던 재킷을 벗은 꼬맹이가 한신의 머리에 씌워준다. 까치발까지 서서 재킷을 덮어주는 꼴이 영락없는 꼬맹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습에 방금까지 치솟던 짜증이 갑자기 연기처럼 사라지는 느낌이다. 내가 왜 이러지? 꼬맹이한테 꼴리는 건가. "이거 아까부터-" "비올거예요. 비 맞으시면 안되잖아요, 내일 경기 있죠? 신인왕 꼭 타세요! 그리고 전학.. 재미있게 생각해보세요! 아마 후회하진 않을 거예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꼬맹이는 마지막까지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섰다. 어안이벙벙한 얼굴로 멍청히 서있던 한신이 어디론가 빠르게 걸음을 옮기고 있는 꼬맹이를 불러세웠다. "야야!! 꼬맹이!!" "예?" "이름이 뭐냐, 너!" "아. 전학 오시면 알게 될껀데.. 김윤서예요. 김윤서! 그럼 다음에 또 뵈요!!" 해맑게 웃으며 자기를 윤서라고 말한 꼬맹이가 손을 휘휘. 흔들며 한신의 시야에서 사라져간다. 김윤서? 김윤서. 꼬맹이가 말해주고 간 이름을 곱씹던 한신의 눈동자가 급격하게 팽창한다. 뭐라고? 김윤서? 그 순간 한신의 뒷통수를 강렬하게 후려치고 가는 세글자. 일당백. 대충 소문을 짜맞춰 보니 얼추 들어맞는다. 보라색 긴 생머리에, 아이같이 웃는 거에다 초면에는 절대 반말 찍찍. 안까고.. 근데 김윤서가 이렇게 작은가? 하던 한신이 아차.하며 자기 이마를 퉁겼다. 193cm의 키를 생각해낸 것이다. 왠만한 남자들도 올려볼 정도니 여자인 김윤서가 오죽하랴. 그제서야 한신은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일당백 김윤서에 대한 소문은 경기도에서도 자자했었는데, 그 소문이라는 게 뭐 심각한 싸이코느니 하는 지극히 사적인 것에서부터, 살아있는 전설을 누르고 제 2대 전국짱이 됐다는. 싸움꾼으로써는 굉장히 군침이 도는 소문까지 매우 다양했다. 그만큼 김윤서는 전국 고교생들의 우상이자, 그와 동시에 한번쯤은 꺾어보고 싶은 절대 주먹이였다. 김윤서에 열광하는 미친놈들은 아니였지만, 한신도 언젠가 김윤서와 붙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렇게 눈 앞에서 놓쳤으니 얼마나 허탈하랴. 하지만 올해 초에 무슨 병이 있다는 둥, 해괴한 소문이 돌다 칠공주랑 같이 종적을 감춘걸로 아는데.. 한신은 눈썹을 긁적이며 윤서가 덮어주고 간 쟈켓을 손에 들어봤다. "..와. 존나 이게 사람이 입는 거야? 왜 이렇게 작아. 김윤서가 이정도면 수이연이라는 계집애는... 씨발. 태아옷이겠네, 아주." 투박하게 말하면서도 윤서의 옷을 보는 한신의 눈빛은 포근하기 그지없었다. 그 대단하신 전국짱, 일당백님께서 친히 주고 가신 두개의 선물을 보며 한신이 야릇하게 웃었다. 그 날 이후 늑대의 심장에 한 여자가 들어섰으니. 그때부터 늑대의 짜릿한 사냥이 시작된다. ......... \.부산 제화예고 제화예고에 숨겨진 비밀창고. 그 안에 열댓명의 신입생들과 세명의 삼학년이 서로를 마주보고 있다. 제화예고의 짱, 김마리는 주머니에서 꺼낸 목걸이를 손 위에 올려놓고 신입생들 중 가장 예쁘장한 외모를 가진 1학년생을 불렀다. 3학년 앞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은 건방진 신입생은 무표정한 얼굴로 김마리의 앞에 다가섰다. "..니가 이젠 제화예고 짱이다." "저번부터 궁금했는데요, 선배님 이거 진짜 김윤서. 그니까 그 일당백이 남겨주고 간 거 맞아요?" 도도하게 치켜올라간 코 끝만큼이나 매우 건방져주시는 후배님이다. 만약 윤서가 있었다면 벌써 병원 신세를 졌을꺼라고 안타까워하며 김마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 김마리가 자신의 후배에게 건네주는 목걸이는 김윤서가 주고 간 물건이 아니였다. 하지만 김마리는 떳떳했다. 어찌됐건 김윤서가 만든 물건임에는 틀림이 없으니깐. 사연인 즉슨. 김윤서의 절친한 친구, 수이연이 학교 후배한테 선물받았다며 '연' 이라는 글자 모양의 목걸이를 자랑했는데. 단순한 제화예고 짱, 김윤서가 그 걸 보고 열이 받아서 따라 만든 것이 바로 지금 제화예고 짱에게만 대대로 전해진다는 '서' 목걸이가 된 것이다. 물론 김윤서가 거기에 특별한 의미를 담아 김마리에게 준 것이 아니고, 실기 시간에 만들자마자 재미 떨어졌다며 김윤서가 버린 걸 김마리가 몰래 주워와 자기 마음대로 의미를 부여한 것이지만 말이다. 하여튼 김윤서가 인천으로 떠나고 나서 그 목걸이는 나름 충실한 제화예고 짱이라는 증표 역할을 해주고 있는 중이였다. 김마리는 아끼고 아꼈던 그 목걸이를 자기만큼이나 싸가지 없는 후배한테 주기 아까웠는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신입생의 손바닥 위로 목걸이를 올려놨다. "제화예고, 잘 이끌어 나가―" "근데요. 그 선배님이 그렇게나 강했어요?" 아후. 이걸 그냥! 사사건건 따지고 드는 이 얼굴만 예쁜 신입생을 향해 치켜 올라가려는 손을 꾹.붙든 김마리가 어색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하지. 전국짱이신데, 더 말할 거 있니?" "그래도.. 시간이 많이 지났잖아요. 초대 전국짱도 늙어서 결국 선배한테 깨진 거 잖아요." "씨발. 이게 아까부터!" 참다못한 김마리가 신입생을 향해 손을 들었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원위치 시킨다. 비굴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눈 앞에 있는 신입생이 자기보다 월등한 싸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랬고, 무엇보다 제 2의 주연오라며 부산에 있는 모든 남자들의 마음을 손아귀에 쥐고 있는 점도 김마리를 힘없게 만들었다. 제화예고 성아뉼. 부산 토박이 주제에 사투리는 절대 쓰지 않고, 얼굴을 더럽게 이쁘면서도 싸움도 오질나게 잘하는 건방진 신입생. 그리고 이제 새롭게 제화예고의 짱이 된 그녀의 이름이였다. 성아뉼은 방금 김마리에게 건네 받은 목걸이를 쳐다보며 입술을 비죽였다. 최고가 아닌 건 싫은데. 막상 김윤서를 만나면 주먹도 뻗어보지 못할 주제에 성아뉼은 슬금슬금 최고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혔다. 하늘. 김윤서의 하늘. 성아뉼의 가슴 속에 위험한 목표가 떠오른다. ............ \.인천터미널 묵직한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맨 남자가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아직 안왔." "우권아!" 반가운 여자의 목소리. 선우권의 얼굴에 금새 화색이 돈다. 선우권을 달려오는 여자를 품안에 안아들고 하하하.웃었다. 선우권에게 안긴 여자는 그가 못내 반가웠는지 얼굴을 부비적거리며 헤실헤실. 입꼬리를 살랑거렸다. "보고싶었어. 있지, 이연이랑 아라가 너 준다고 요리 아주 거하게 차려놨대. 빨리 가자!" "응. 그동안 잘 지냈지?" "그러엄. 아주 튼튼,건강." 선우권에게 안긴 여자는 천진하게 웃으며 눈을 찡긋였다. 그런 여자를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쳐다보던 선우권이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에 어깨를 으쓱이며 여자를 안아들고 그대로 터미널을 나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아반떼에 올라탄 선우권은 여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보고싶었어." "엉엉. 나두." "...이제 너랑 똑같은 학교 다닌다. 이제는 내가 지켜줄 차례야." "하하하. 너가 지켜줄만큼 약골 아냐, 나." 여자의 보라색 머리에서 풍겨오는 그리운 향기에 선우권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힌다. 부산의 별. 얼음왕자의 그림자는 찾아볼 수 없을만큼 다정하고, 부드러워진 그의 새로운 별명이다. 언제나 웃는 낯이고, 웃을때마다 보이는 눈웃음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그의 눈웃음을 보면 절대 헤어나올 수 없다. 하지만 눈웃음의 매력에 푹 빠진 여자들의 섹시한 대쉬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해바라기 심장을 가졌으니. 힘을 키운 것도 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일편단심 해바라기, 선우권은 이제 그녀만의 흑기사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